2024. 7. 7.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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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그리스도다
부제 : 십자가를 따라 세상과 반대 방향으로 가라
[마가복음 8장 27절 ~ 9장 1절]
출처 : 왕의 십자가 / 팀 켈러 / 두란노 2024년 25쇄 발행
마가복음 8장은 제1막의 클라이맥스다. 8장에서 마침내 제자들은 자신이 따르던 선생의 진정한 실체를 깨닫기 시작한다. 8장에서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나는 왕이지만 십자가로 갈 것이다."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십자가로 가야 한다." 마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막 8:27-30).
"예수님은 누구신가?" 마침내 베드로는 이 거대한 질문에 제대로 답한다.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 베드로는 문자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의 표현을 사용한다. 전통적으로 왕은 일종의 대관식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하지만 '크리스토스(Christos)'는 궁극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 메시아, 만왕의 왕, 세상만사를 바로잡을 절대적인 왕을 뜻한다. "당신은 메시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칭호를 기꺼이 받아들이신다. 그러고는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하지만 나는 네가 기대하는 왕은 아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막 8:31-32).
예수님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다. '인자'를 인간의 아들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이 명칭은 더 큰 의미를 내포한다. 다니엘의 예언을 보면 "인자 같은 이" (단 7:13-14)가 등장한다. 이는 천사들과 함께 찾아와 세상만사를 바로잡을 신적, 메시아적 인물을 지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라고 말씀하신다. 그 전까지는 메시아와 고난을 연결시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구약을 보면 고난을 받을 신비로운 주의 종에 관한 예언은 많다(예를 들어, 이사야서 43, 44, 53장). 하지만 예수님 이전에는 그런 예언을 메시아의 소망과 연결 지은 사람이 없었다.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았다. 악과 불의를 종식시키고 세상만사를 바로잡아야 할 인물이 고난이라니. 고난을 받다가 죽으면 어찌 악을 이길 수 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얼토당토않은 궤변처럼 보인다.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또한 이 표현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자진해서 목숨을 내놓을 계획이시다. 분명 이 말씀이 베드로의 심사를 가장 세차게 뒤흔들었을 것이다. 싸우다가 죽는다면 모르되 아예 죽으러 오셨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베드로가 항변한다. 여기서 항변에 해당하는 동사는 예수님이 귀신들을 꾸짖는 장면에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거친 표현을 써가며 예수님께 대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불러 놓고 곧바로 대들 만큼 흥분한 이유는 뭘까? 베드로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메시아가 강림하여 악과 불의를 끝내고 보좌에 오를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그런데 느닷없이 예수님이 황당한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닌가.
"그래, 내가 메시아요 왕이다. 하지만 나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왔다. 나는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힘을 잃기 위해서 왔다. 내 목적은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악을 무찌르고 세상만사를 바로잡기 위해 사용할 방법이다.“
인자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보건대, 고난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버림을 당해야 한다. 죽임을 당해야 한다. 부활해야 한다. 단순히 "나는 죽으러 왔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죽어야 한다. 내 죽음은 필연적이다. 내가 죽지 않으면 세상과 네 삶이 새로워질 수 없다." 왜 예수님의 죽음은 필연적이어야만 했을까?
1) 우리에게는 진짜 사랑이 필요하다
오래 전 윌리엄 반스톤(William Vanstone)이란 신학자가 책 한 권을 썼다. 지금은 절판된 이 책에는 '사랑의 현상학'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챕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스톤에 따르면, 모든 인간 심지어 어릴 적에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까지도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의 차이는 이렇다. 가짜 사랑의 목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짜 사랑에는 조건이 붙는다. 자신을 지지하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준다. 가짜 사랑은 언제나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 싶으면 즉시 몸을 뺀다. 하지만 진짜 사랑의 목적은 남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내주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복을 내 행복으로 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도 상관없이 사랑을 준다. 진짜 사랑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이다. 아낌없이 전부를 내주는 사랑이다.
그런데 반스톤은 세상에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진짜 사랑을 절실히 원하지만 서로에게 그런 사랑을 줄 수는 없다. 우리의 사랑은 모두 어느 정도 가짜다. 왜 그럴까? 우리가 공기와 물을 필요로 하듯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모든 관계에는 어느 정도 이해타산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는다.
물론 개중에는 사랑하는 능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반스톤의 말이 옳다. 우리는 모두 진짜 사랑을 갈망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사랑을 할 능력이 없다. 조건 없이 파격적으로 사랑해 줄 분,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 줄 분. 이런 사랑을 받고 나면 우리 안에 자존감이 충만해져 비로소 우리도 그런 사랑을 나눠주기 시작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해 줄 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삼위일체의 춤이 기억나는가? 아버지와 아들, 성령은 영원 전부터 서로를 완벽히 사랑해 오셨다. 하나님은 모든 사랑을 자체적으로 주고받으실 수 있다. 인간에게는 부족한 사랑이 하나님 안에는 충만하게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그분에게서만 온전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다음은 우리 교회의 한 여성이 친구에게 보낸 메모다.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사람들의 시선에 연연하는 거였어. 남들이 인정하고 좋아하지 않으면 견디질 못했지. 그러다가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처음으로 깨달았어. 그분의 사랑 덕분에 남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감정이 요동치지 않게 되었지. 그분의 사랑 덕분에 내 친구와 가족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었어. 뭐든 부족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을 수 있거든. 남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다른 사랑에 연연하지 않는다. 진짜 사랑을 하게 된다. 상대방이 사랑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이런 사랑은 나눠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이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우리를 창조하고서 나중에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우리를 구속하셨을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사랑이며 아무 조건 없이 전부를 내주는 사랑이다. 이 사랑을 받으면 우리의 사랑에서 거짓된 요소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 사랑을 받으면 인내와 자존감을 얻어 남들에게 더욱 진정한 사랑을 나눠 주게 된다.
2) 우리에게는 용서가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이 개인적으로만 필요한 건 아니다. 법적으로도 필요하다. 무슨 말인가 설명해 보겠다.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그가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생긴 셈이다. 친구가 잘못해서 당신 집의 형광등을 깨뜨렸다고 하자. 그때 당신은 두 가지 태도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다. "100달러만 내." 혹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렇다면 후자의 경우 어떻게 되는 건가? 당신은 그 비용을 지불하든가 어두컴컴한 집에서 지내야 한다. 친구가 비용을 물어내거나 당신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논리는 경제적인 면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남에게서 기회나 행복, 평판 같은 것을 빼앗는 것도 빚을 지는 것이다. 정의를 어겨도 빚을 지는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가 내게 빚을 지면 두 가지 선택 사항밖에 없다.
한 가지 선택 사항은 상대방에게 빚을 갚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기회를 빼앗거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분을 푸는 것이다. 하지만 앙갚음을 하면 상대방과 똑같은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점점 냉혹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변해 간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해 간다. 악이 이기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선택 사항은 용서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는 결코 쉽지 않다. 불같이 일어나는 복수심을 꾹 누르면 속병이 생기기 쉽다. 용서란 고통스러운 결단이다. 내 평판은 땅에 떨어졌는데 상대방의 평판은 승승장구하는 꼴을 봐야 한다. 남이 잘못한 대가를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용서란 고통이 따른다.
이렇듯 잘못의 대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방이든 나든 누군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용서를 통해 내가 대가를 치러야 잘못을 바로잡을 여지가 생긴다. 복수심을 가득 품고서 나무라 봐야 참회하며 고개를 끄덕일 가해자는 별로 없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내가 복수심을 누르고 스스로 용서의 대가를 치러야 그나마 상대방이 내 말을 듣고 잘못을 바로잡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당장 잘못에서 돌이키지 않더라도 용서는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효과가 있다.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내가 인류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너희 아니면 내가 죄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 누군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죄는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실 수 있는 길은 스스로 십자가에 달려 죄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3) 죽음으로 세상 권력을 이기다
예수님은 죽으셔야만 했다. 하지만 그냥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실 수는 없었는가? 그냥 인간의 몸이 노쇠해서 죽을 때까지 기다리셔도 되는 것 아닌가? 그럴 수는 없었다.
예수님의 죽음은 폭력에 의한 죽음이어야 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라고 말한다. 이는 기적에 의한 피 흘림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피'는 자연적인 죽음 이전에 목숨을 내주거나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목숨은 이 세상에서 치를 수 있는 가장 비싼 대가다." 예수님이 목숨을 내놓으셔야만 죄의 빚이 청산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빚 청산이 아니었다. 일종의 폭로이기도 했다. 성경학자 제임스 에드워즈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언은 거대한 아이러니를 숨기고 있다. 사실, 인자의 고난과 죽음은 사람들의 예상처럼 불경하고 악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장로와 대제사장, 서기관들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분노한 폭도나 범죄자에게 맞아 돌아가시지 않았다. 그분은 공식 영장을 통해 체포되고 지도층의 질투 속에서 심문과 처형을 당하셨다. 다시 말해,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 법정(principia iuris Romanorum)이 예수님을 죽였다.】
"유대 대제사장과 서기관, 로마 통치자들은 겉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뒤로는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 불의를 자행했다. 십자가는 정의와 진리가 아닌 권력과 압제를 추구하고 부패를 일삼는 세상 체제의 진면목을 폭로한다. 세상의 지배자들은 예수님을 유죄 판결함으로써 오히려 자신들의 유죄를 드러냈다.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추태뿐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왕국의 속성도 드러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분이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아들인 덕분에 그분과 우리를 옭아매던 죽음의 마수가 풀렸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사건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가치를 완전히 뒤엎어 용서를 이루셨다. 그분은 맞불 작전을 펼치지 않으셨다. 부패 정권을 심판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키지 않으셨다. 권력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낮아짐으로써 승리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세상의 권력 추구와 남용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렇게 세상권력은 패배했다. 세상 체제의 마법이 깨졌다.
세상의 부패 권력은 많은 도구로 사람들을 겁주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무서운 도구는 죽음이다. 언제라도 우리를 죽일 수 있는 대상 앞에서 우리는 겁을 먹고 그 대상의 통제를 받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으니 그분을 만난 사람에게는 최악의 죽음조차도 최상의 선물일 뿐이다. "얘야. 이제 일어나렴." 죽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에 안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죽음은 무시무시한 힘을 잃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사랑 속에서 살 수 있다.
4) 포기하면 얻고 죽으면 살리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왕이다. 하지만 너희가 상상하는 왕은 아니다. 나는 죽어야만 하는 왕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신다. 마가의 기록을 보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막 8:34-9:1).
여기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나는 십자가의 왕이니 나를 따르려면 너희도 십자가로 가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목숨을 구원하려면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마가는 "목숨"에 대해 일부러 '프시케(psyche)'라는 헬라어를 선택했다. 프시케는 심리학(psychology)이란 단어의 어원이다. 이것은 남들과 구별되는 개인의 정체성이나 개성, 자아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개성을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적인 것에서 정체성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모든 사회는 특정한 것을 가리키며 "이것을 얻으면 자존감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 전통적인 사회에서는 존경과 가문의 유산, 자식을 얻지 않으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된다. 개인주의적인 사회에서는 돈과 명예, 지위를 얻지 않으면 헛산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같이 성과가 삶의 전부라는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온 천하를 얻어도 존재 깊은 곳에 묻은 공허함의 때를 지울 수는 없다. 세상적인 것을 아무리 많이 얻어도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다. 남의 사랑이나 직업적 성공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런 것이 무너지는 순간 살아갈 의지도 잃는다.
예수님이 얼마나 파격적이신지 이제 알겠는가? 이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어. 나는 부도덕해. 그러니까 이제 교회에 가서 도덕적이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어." 하지만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도 역시 성과 중심의 방식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성과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짓은 그만둬라. 내가 전혀 새로운 방식을 알려 주마. 낡은 정체성을 내던져라. 그리고 나와 복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라.”
나는 "나와 복음을 위하여"라는 표현이 정말 좋다.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은 머리로만 알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머리로 알고 결심해서 존재 깊이 변화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열쇠는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내게 이론만 배워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삶을 봐야 한다. 나는 십자가로 갔다. 너희가 생명을 얻도록 내가 십자가 위에서 내 생명을 잃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고 존재 깊은 곳에서 감동을 받으면 자신의 성과나 외모, 재력 혹은 남들의 사랑과 상관없는 자신감과 안정감을 얻는다. 이 주제를 C. S. 루이스만큼 잘 풀어낸 사람도 없다. 루이스는 저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의 마지막 두 페이지에서 목숨을 얻기 위해 목숨을 버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루었다.
【'자기'를 비우고 그분을 채울수록 더욱 진정한 자신이 되어 간다..진정한 자기가 그분 안에서 우리를 내내 기다리고 있다. 그분을 거부하고 자기 맘대로 살려고 할수록 자신의 전통과 태생, 환경, 육체적인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사실 내가 자랑스럽게 '나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가 출발시키지도 않았고 멈출 수도 없는 사건의 열차들이 모이는 집결지에 불과하다. '내 소망'이라고 부르는 것은 내 육체적 기관들이 일으키거나 남들의 생각을 통해 주입된 욕망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 나아가 나 자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얻는다.… (그럼에도)(새로운 자신)을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한, 전혀 그분께 나아간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자신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아간 것은 사실상 그분께 나아간 것이 아니다. 진정한 자신은 잡으려고 하면 오히려 더 멀어지는 대상이다. 예수님을 추구할 때 진정한 자신은 덤으로 따라온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신다고 하자 베드로는 그분이 아닌 자신을 위해 화를 냈다. 베드로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에 고난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시지 않자 베드로는 참지 못하고 항변한다. 자신만의 목적을 세우면 예수님은 수단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분을 이용하지 않는다. 감히 왕 앞에서 흥정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뭐든 명령만 하세요"라고 말할 뿐이다.
예수님은 그냥 왕이 아니라 십자가 위의 왕이시다. 보좌에만 앉은 왕에게는 의무감으로 복종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왕이시다. 그래서 그분께는 사랑과 신뢰에서 우러나와 복종할 수 있다. 자신을 완전히 내주신 분께 어찌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내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자신의 목적과 계획, 삶에 대해 죽는다는 뜻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현재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예수님이 이 땅으로 돌아오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해서 이 말씀을 소중히 여겼다.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가 약하게(십자가 위에서) 시작되지만 약하게만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부활의 힘을 경험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랑과 섬김, 영향력이 자라나는 현상을 목격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약한 상태에서 시작된다. 포기에서 시작된다. 목숨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구주가 필요하다는 겸손한 고백에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를 대신 갚음으로써 의의 조건을 채워 줄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약하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약하게 시작하셨다. 먼저 약한 인간이 되셨고, 나중에는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달리셨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려면 우리도 약하게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시작된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언젠가 예수님이 돌아와 우리를 회복된 세상으로 데려가실 때 사랑이 미움을 완전히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이길 것이다.
C. S. 루이스는 '목숨을 얻기 위한 버리기'에 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끝맺음했다.
【자신을 포기하면 진정한 자신을 얻으리라. 목숨을 잃으면 목숨을 구원하리라. 죽음, 즉 매일 자기 야망과 소원의 죽음, 결국에는 몸 전체의 죽음에 온전히 순응하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무엇도 움켜쥐지 말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우리 안에서 죽지 않은 것은 부활할 수 없다. 자신을 추구하면 결국에는 미움과 외로움, 절망, 분노, 파멸, 부패만 얻는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추구하면 그분을 찾을 뿐 아니라 나머지도 덤으로 따라온다.】
정말로 춤이 존재한다면 정말로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해 주는 왕이 계시는 셈이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가 스스로 씻을 수 없는 더러움이 있다면 반드시 십자가가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