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 -커튼.hwp
책명- 커튼
저- 밀란 쿤데라
출-민음사
독정- 2018. 4. 18. 수.
ㆍ소설의 인물들은 그들의 미덕 때문에 찬양받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해 받기를 원한다. 살미아라고 부르는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바고 여기세 소설 기술의 존재 이유가 있다.
서술은 기억이다. 그것은 요약, 단순화, 추상화다, 삶 그리고 삶의 산문성의 진짜 얼굴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만 발견된다. 그녀는 몇 계단을 내려가 철로 근처에 섰다. 화물열차가 다가온다. 예전에 수영 하면서 물에 몸 담으려 할 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녀는 어깨를 구부리고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열차 밑으로 떨어졌다._안나카레니나의 자살 장면
키치의 의미는 19세게 중반 뭔헨에서 생겨났으며 위대한 소설의 세기의 저질스러운 실추를 가리킨다.
소설은 역사서 시대 설명이나 사회 묘사, 이데올로기의 옹호 수단으로 존재하기를 거부하고 전적으로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위해 일하기 시작한다. 오에 겐자부로의 단편 소설‘인간의 양1958’은 일본인들이 잔뜩 탄 버스에 외국 군대의 술 취한 변사 한 무리가 타서 한 대학생 승객을 위협한다. 강제로 그의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가 드러나게 한다. 대학생은 주위 승객들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걸 느낀다. 병사는 희생자 한 명으로 만족하지 않고 승객 절반의 바지까지 벅신가. 버스가 멈추고 병사들이 내리자 멋은 사람들은 도로 바지를 꿰입는다. 다른 사람들은 무기력에서 깨어나 수모 당한 사람들에게 경찰에 가소 외국 병사들의 행동을 고발하라고 부추진가. 그들 중 교사 하나가 끝까지 대학생을 따라온다. 그가 당한 수치를 공개하고 외국인들을 고발하려고 한다. 결국 모든 것은 둘 사이의 격한 증오로 끝난다. 비겁함과 수치, 정의감이라는 허울을 쓴 경솔한 가학성 등을 이야기하는 놀라운 소설이다. 물론 전쟁 후에 일본을 점령한 부대는 미국군이다. 그런데 작가는 일본인 승객이라고 꼬집으면서 왜 병사의 국적은 밝히지 않을까? 정치 검열, 문체의 효과? 그렇지 않다. 소설 전체를 통해 일본 승객이 미국 병사와 대립한다고 상상해보라. 이 한 단어가 정치적 텍스트로 점령자에 e한 고발로 귀결된다. 이 단어 하나를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측면은 어슴푸레한 빛에 싸이고 소설가가 관심을 가진 주요한 문제인 실존의 수수께끼에 조명이 집중되기에 충분해진다. 왜냐면 사회 운동, 전쟁, 혁명가 반혁명, 국가의 굴욕 등 역사 그 자체는 소설가에게 그려야 할 대상, 고발하고 해석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심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
ㆍ스펙터클한 사회는 정치학자들의 단골 주제가 되기 훨씬 이전에 소설가 덕에 상황의 본질에 대한 소설가의 빠르고 명민한 통찰력 덕분에 이미 x선 촬영을 받은 셈이다.
ㆍ보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체코의 동료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잊을 수 없는 한 주일을 보냈다.
<에마 보바리>
는 결론 부분에서 은행가들에게 부탁을 거절당하고 레옹에게 버림받은 다음 역마차에 올라타고 한 걸인이 “일종의 소리 없는 절규를 지르고 있었다.” 그러자 어깨 너머로 5프랑 주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그녀의 전 재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드렇게 돈을 던져 주는 것에 흡족해하는 듯 보였다. 진정으로 절망적 순간조차 그녀는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훌륭하게 보이고 싶어서 과시적인 행동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ㆍ첫 만남을 위해 서둘러 가기 전에 단장을 하는 여자와 같이, 새상은 우리가 막 태어나는 순간 우리에게 달려온 그 세상은 단장을 마친 상태, 가면을 쓴 상태, 선 해석이 가해진 상태다. ㆍ소설은 남자를 여자고 바꾸고 여자를 남자로 바꾸며 진흙을 금으로 만들고 일화를 드라마로 만드는 연금술의 열매다. 바로 이 신성한 연금술이 모든 소설가에게 필요한 힘을 만들어 주고 그들 예술의 비밀과 광채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ㆍ작품은 미학적 설계도를 따라 아주 긴 작업을 거친 끝에 나오는 것이다.
ㆍ한 청년이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말하자 시인 조세프 카이너는 이렇게 답변했다.어린 소년이 눈먼 할머니와 산책을 한다. 길을 걷다가 때때로 아이가 말한다. “할머니, 조심해, 나무 뿌리야!”그러면 할머니는 숨 속을 걷는 줄 알고 폴짝 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를 보오 나무란다.
“이놈, 네 할머니를 그런 식으로 모시다니!”
그러자 아이는 “내 할머니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머니를 모실 거에요.”
나와 내 시도 마찬가지다.
ㆍ아주 가볍게 한 말 한마디로 그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내가 하는 말을 일일이 다 신경 써 가려야 하니까. 근엄한 척하는 태도가 그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을 아니까.
ㆍ한 시골 귀족이 돈키호테를 시인인 아들과 사는 자신의 영지로 초해한다. 아들은 돈키호테의 광기를 느끼고 거리를 둔다. 나중에 돈키호테는 그 아들에게 시를 낭송해달라 한다. 예의를 차려 아들은 시를 낭독하자 아들의 재능에 엄청난 찬사를 늘어놓는다. 그 찬사에 기분이 좋아진 아들은 방문객의 명석함에 넋을 잃고 그의 광기를 잊는다. 그렇다면 명석한 이에게 찬사를 보내는 미치광이와 미치광이의 찬사를 믿는 명석한 이, 이 둘 중 누가 더 미치광이일까? 다른 차원의 희극이다. 아들은 자작시에 찬사를 보내자 자기도취적 기쁨에 빠져 거드름 피우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런 식으로 어른은 세상을 본다. 사람들은 의미 없는 것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랄 비극인가? 비극의 개념은 개인의 운명 밖에서 의미를 갖는가? 역사가 군중, 군대, 고통과 복수를 자극할 때면 우리는 개인의 의지를 구별해 낼 수 없다. 세상을 덮어 버린 시궁창의 범람이 비극을 완전히 삼켜 버리는 것이다.
ㆍ인물들은 각자 자기 생각이 있지만 그것은 가볍고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생각일 뿐이다. 그들은 쉽게 생각을 바꾼다. 깊이 있는 지적 재검토를 통해서가 아리나 단지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넥타이를 바꾸듯이 말이다.
ㆍ어느 날 관리 일이 자기 성격과 기호와 성향에 맞지 않음을 인정하고 정치와 역사에서 멀리 떨어져 자연과 벅하며 시골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공직을 떠나 시골집, 장미의 집에 정착했ㄲ다. 관리는 자기가 담당하는 문제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는 옆 사무실에서 어떤 일이 진행되는지도 모르는 채,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양한 작업들ㅇ르 열성적으로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가 관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자기 지평선 너머에 있는 목표에 복종하고 그것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상황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 너무 커서 협상을 할 때면 상급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그 자체가 요구하는 것을 지지콘 했던 것이다.
ㆍ카프카의 <소송>은 아무런 판결 없이 오년 반 동안 질질 끌려 다니며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위해서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측량 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을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 모든 것이 계획되고 규정된 우리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뜻밖의 일이란 오직 행정 기계의 실수와 그로 인한 예측 불가능한 결과뿐이다. 관리의 실수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시(범죄시)가 된다. 카프카의 <성>의 결말은 모든 소동 후에 k는 지쳐서 죽는다.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비록 마을 시민권은 없지만, 몇 몇 세부 사항을 존중해 거기서 살고 일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결정이 성에서 내려온다.“
ㆍ내게 부족했던 것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나는 다른 지식이, 플로베르가 말했을 법한 인류의 내용을 파악하는 역사적 상황의 혼으로 파고드는 지식이 필요했다. 어쩌면 한 소설을 통해 위대한 한 소설을 통해 그 당시 체코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결정을 감내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ㆍ그런 가치를 지닌 작품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그 가치를 알아볼 만한 능력을 우리가 상실한 것일까?
ㆍ1920년대~1930년대 아방가르드를 좋아한다. 아무런 이성적 통제 없이 스무 쪽 가량의 글을 먼저 쓰고 나서 날카로운 비평 정신으로 그 글을 다시 읽고, 핵심을 잘 지키면서 그런 식으로 계속 써 나라가로 한다. 소설이라는 마차에 도취라는 이름의 야생마와 명석함이라는 이름의 훈련된 말을 나란히 묶고 싶은 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