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위에는 찬란한 햇살이
비가 오락가락 하던 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 창밖을 내려다보고 깜짝 놀랐다. 목화송이가 쌓인 듯 하얀 구름이 하늘 아래 솜 무더기처럼 포근하게 펼쳐져 있는데 찬란한 햇빛이 쨍쨍 내리 비치고 있었다.
‘아! 구름을 뚫고 나오니 저렇게 포근한 구름이 펼쳐지고 태양이 엄청나게 비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1986년 서울 서진 룸살롱에서 두 폭력배들의 싸움으로 4명이 잔인하게 살해되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이었던 고금석. 그는 감옥에서 삼중 스님의 법문으로 회개하고 전 재산을 강원도 오지 학교 학생들이 바다 구경을 할 수 있도록 기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삼중 스님은 사형수와 무기수 500여 명의 교화와 구명을 위해 51년을 보냈다. 사형 집행 전 눈물을 흘리는 삼중 스님에게 고금석은 웃어달라며 오히려 스님을 위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1994년에는 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돈을 뺏기 위해 아무 연고도 없는 시민을 잡아다 5명이나 무참히 살해한 지존파 사건이 있었다. 두목은 26세 김기환이었지만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 건 공범 22세의 김현양이었다. 취재 중에 고개를 뻔뻔스럽게 들고 힐끗 웃는 그의 모습은 정말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회개하고 사형 집행 전 다른 사람에게 장기를 기증하여 여러 생명을 구하고 떠났다. 끝까지 악마가 되지 못했다. 사람이었다.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고 믿는다. 다만 한순간 잘못된 판단으로 죄를 짓기도 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에서 이해와 용서를 생각하게 되고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말을 한다.
나는 20년 전, 안양교도소의 교화위원으로서 재소자들에게 월 1회 10년 정도 정신 교육 강의를 했다. 그때 자청하여 교도관이 추천해 준 윤 씨라는 사람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20년 형을 받고 3년째 복역 중이었다. 그에게 매월 영치금을 보내주며 편지를 교환하고 면회도 몇 차례 했다. 그가 17년을 더 복역하고 출소할 때까지 그에게 얼마 안 되지만 영치금을 매월 전해 주며 500여 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그에게 접견실로 처음 면회 갔을 때,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진즉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부끄럽게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어 그가 출소할 때까지 17년 동안 인연을 나누었다.
그에게는 노령의 어머니가 있었다. 그의 편지에는 어머니 걱정의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어머니를 찾아가 뵙고 안부를 전해주기도 했다. 딸이 장성하여 결혼식을 하는데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편지를 받고 내가 가서 아버지 이름으로 축의금을 냈다. 결혼식 사진을 촬영해서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아들이 대학 1학년때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마저 혼자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이혼을 요구하여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고도 했다.
그와 편지를 나눈 지 10년쯤 되었을 때, 개안 수술비의 보조금을 내면 한 생명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며 어느 단체에 전달해 달라고 나에게 그 돈을 보내왔다. 그 돈은 재소자에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교도소에서 생활하더라도, 의약품, 내의 등을 구입해야 하고, 사식이나 간식도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돈 쓸 곳이 많을 건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 거금을 기부한 것이다. 그는 모범적으로 수형 생활을 하여 교도소의 작업실에서 일하는 재소자들의 반장일도 했다.
모범적으로 수형생활을 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부도 하는 그의 마음 씀이 고마웠다. 또, 그의 어머니가 연로하여 아들의 석방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뜰까 봐 그의 감형을 위해 나는 탄원서를 작성하여 법무부에 냈다. 그 후, 법무부에서 회신이 왔는데 법 집행은 사사로이 하는 게 아니라는 회신을 받았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그가 석방되기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몇 가지 상도 받았고 작업반장으로 기여를 했는데도 전혀 감형을 받지 못하고 20년 후에 만기 출소했다.
63세로 출소한 후, 인천의 어느 세차장에서 세차 일을 하여 찾아갔다. 세차장을 이용하고 세차비라도 내고자 했으나 끝내 받지 않아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다. 출소 후 성실히, 당당히 살고 싶어 하는 그를 보면서 보람을 느꼈고, 인간의 아름다운 변화에 대한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교도소에서 강의할 때 시를 몇 편 가지고 설명했더니 어느 재소자가 시 한 편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생명까지 위독한 환자가 쓴 ‘되고 싶었는데’라는 시였다. 그 재소자가 작곡을 해 주어 시를 쓴 이에게 악보와 피아노 연주 녹음테이프까지 보내주었다. 그 시인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추도식에 피아노 연주 음악으로 명복을 빌어 주었다.
또 한 재소자는 소설을 쓰고 싶다며 자문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에게 문학에 관한 답장을 보내주었고 여러 번 편지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자 출소 후 중증장애자 요양원에서 장애자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밥을 떠 주는 봉사활동을 6개월이나 했다. 그때는 교통비라도 보태 쓰라고 얼마 안 되는 금액을 봉사활동 기간에 매월 보내주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나온 후에 글쓰기 공부를 하여 시인으로 등단했다. 그리고, 어느 단체의 사무국장 일을 10년 이상이나 했다. 그는 나를 평생의 은인이라며 양복을 한 벌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냈던 교도소에 가서 재소자들에게 희망이 될 만한 강의도 했다.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다는 걸 믿는다. 아무리 흉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악인이라고 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걸 좋아한다. 그런 걸 보면 분명히 사람은 선하다.
어느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어느 지인에게 상당한 금액을 빌려 주었는데 미국으로 가버려 포기하고 지냈다. 그런데 십여 년 지났는데 약간의 돈과 편지를 인편에 보내왔다는 것이다. ‘빚을 잊지 않고 있는데 사는 게 어려워서 다 갚지 못해 죄송합니다. 작지만 죄송한 마음을 표하고자 보내드립니다.’는 내용이었다. 믿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사람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씀이셨다.
구름이 잔뜩 끼어 몹시 흐리지만 구름이 걷히는 날은 오게 마련이다. 비행기를 타고 구름을 벗어나 하늘에 오르니 태양이 쨍쨍 비쳐 새하얀 구름이 정말 아름다웠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이 내리 덮여도 시간이 지나면 구름이 물러가듯 지나간다.
고통도, 환희도 모두 한 순간이다. 아무리 황홀해도 영원히지속될 수 없듯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고통이 평생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걱정이 많고 고통이 심해도 그 아픔으로는 죽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어 금방 폭우가 쏟아질 것 같지만 분명히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 있다.
첫댓글 채찬석선생님의 글에는 항상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악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요.
저는 아직까지도 결론을 못내리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고보니 과연 성선설에 좀더 믿음이 가네요.
결국 환경의 위세앞에 굴복하느냐, 이를 극복하느냐가 관건이겠네요. 그리고 가려진 착한 본성을 일깨워주는 끝없는 선도가 중요함을 선생님의 글을통해 깨닫게 되었네요. 좋은 힌트 얻어갑니다.
바쁘실 텐데도 긴 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과찬의 말씀에 부끄럽습니다. 이 글도 발간하는 수필집에 넣었습니다. 책 발간 후에 제가 한 잔 답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채 선생님 잘 읽었어요.
교직 40년이면 만만한 세월이 아닌데요..
숨은 활동에 감동입니다...
구름 뒤엔 분명 밝은 태양이 떠 있지요.
삶이 맨날 비만 내리지 않을 테고요.
선..가장 훌륭한 것..가장 칭송할 만한 것이겠지요.
끝이 좋으니 좋습니다..
바쁘실 텐데도 긴 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전에 회식 후 한 잔 더 하자는 제안을 하실만큼 온정을 베풀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수필집 출판기념일을 잡아놓으니 마음이 여유가 없어 한 잔 더 못해 아쉬웠습니다. 책 발간 후에 제가 한 잔 제안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