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시계
권승섭
창가에서 뭉근히 요구르트가 만들어진다 몽글몽글해지도록 내버려 둔다 내일이면 꿀을 뿌려 먹을 수 있겠다 누군가에게 조금 나눌 수도 있겠고
나눌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구분할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건물 밑에서 누군가 웅성거린다 얼핏 싸우고 있는 듯한데 귀를 창밖에 내밀고 대화를 엿듣는다 어느 순간 마음으로 누구의 편을 들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행주로 탁자를 닦다가 창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다투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고 담벼락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까마귀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검은 짐승을 보는 일은 제법 낯설었는데
새의 눈으로 보면 인간도 검은 점들이 오가는 모습으로 보일 것이다
까마귀는 한곳을 응시하더니 이내 떠나버린다 새의 가슴팍이 소실점을 향해간다 햇살은 여전하고 요구르트는 왜 이리 오래 걸리는 음식이냐고 투정 부렸다 내일에게
언제 오냐고 물을수록 멀어지는 날개가 있다
― 문학매거진 《시마》 (2023 / 가을호)
권승섭
경기 수원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재학. 202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