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미 동성애자
스톤월(Stonewall) 폭동
미국의 뉴욕에 있는 스톤월 주점은 1960
년대 동성애자들의 주요 만남장소였다.
이 주점은 동성애가 불법이였던 당시
음성적으로 활동했었고 마피아가 운영
하였다.
평소에는 이 주점에서 뇌물을 주며 스톤
월 주점(게이 바)은 단속때마다 살아남았
지만 1969년에는 동성애자들이 마피아
를 비호하며 경찰을 공격한다. 이게 스톤
월폭동이고 동성애자들이 미화시키는
스톤월 항쟁이라 부르는 사건이다.
▶2012년 오재경 전 문화공보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별세
▶2007년 캄보디아에서 한국인 13명을
태우고 가던 전세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16명과 승무원 6명이 전원 실종되었다.
캄보디아 총리는 27일 탑승자가 전부
사망했다고 밝혔다.
▶2007년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제주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 2007년 6월 27일 뉴질랜드 크아이스트처치 에서 열린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국내 처음으로 세계유산(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성산일출봉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유산지구는 '한라산 천연보호구역'과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으로 제주도 전체 면적의 10.1%(187.2㎢)와 공유수면 1.2㎢ 등 모두 188.4㎢에 이른다.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은 폭포와 다양한 모양의 암석 형성물, 용암이 흘러 굳어진 해안 절벽, 분화구에 호수가 형성된 정상부의 경관과 미적 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산일출봉은 해상에서 화산이 분출한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세계적인 중요한 장소라고 밝혔다. 거문오름용암동굴계에서 세계자연유산으로 신청된 동굴은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이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유산지구는 지구의 화산 생성과정 연구와 생태계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가치가 있으며, 한라산 천연보호구역의 아름다운 경관은 자연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다.
▶2005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
에서 ‘박지성길’ 개통식
맨유맨’ 박지성(24)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27일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만포동에 위치한 ‘박지성길’ 개통식에 참석한 박지성은 2000여명의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안전상의 문제로 행사 도중 황급히 자리를 떠나야 했다. 박지성이 온다는 소식에 지역 주민들과 축구팬들은 부슬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2시간 전부터 모여들기 시작해 왕복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고, 박지성이 행사장에 나타나자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2000여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에 오른 박지성은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에 올랐을 때만큼 기쁘고 영광스럽다. 약속의 땅 영국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드리도록 노력하겠다. 힘들 때마다 이 길을 생각하며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기념사가 끝난 뒤 박지성은 손학규 경기지사, 김용서 수원시장 등 경기도 및 수원시 관계자들과 함께 테이프 절단식을 가졌고, 이때 먼발치서 ‘축구영웅’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팬들은 일제히 단상 주위로 몰려들어 박지성을 에워쌌다.
박지성은 단상을 정리하고 팬사인회를 시작하려 했지만 이미 주변은 사인을 받기 위해 몰려든 팬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구단 유니폼을 입게 된 영웅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려는 팬들의 광적인 열기에 질서는 일찌감치 묻혀버리고 없었다. 밀고, 당기고, 넘어지고, 깨지고…. 결국 박지성은 안전요원들이 인간 바리케이드를 쳐준 덕분에 겨우 대기하고 있던 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박지성이 자신의 인기를 온몸으로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박지성은 앞서 오후 2시에 수원월드컵경기장내 월드컵 기념관에 마련된 박지성 기념코너 개장식에 참석해 동아시아 쓰나미 피해복구 자선기금 마련 세계올스타전에 출전했을 때 입었던 유니폼과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골을 터트렸을 당시 신었던 축구화를 기증했다.
▶2002년 한기총, 북한이탈주민의 성공
적 정착지원 워크숍(2002)
▶2001년 관광공사 금강산 사업
남북기금 대출 결정.
▶2001년 대한민국-러시아
쿠릴해역 입어협상 타결
▶2000년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발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0년 6월 27일 가요 공연 전면 개방, 일반 극영화 극장 상영, 애니메이션 개방 등을 골자로 하는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의 이번 개방은 1999년 9월 있었던 2차 개방조치보다 대폭 확대된 것으로, 영화 애니메이션 가요 게임 방송 등 일본 대중문화 전 부문에 걸쳐 개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향후 국내 관련 분야에 미칠 파장이 주목됐다.
3차 개방에 따라 대중가요 공연 분야는 ‘2000석 이하 실내공연’으로 제한했던 개방 제한 규정이 완전 철폐됐다. 음반은 일본어 가창을 제외하고 연주음반, 제3국어 가창음반, 한국어 번안음반 등이 개방됐다. 애니메이션은 우선 국제영화제 수상작(약 30편 가량)에 한해 개방한다고 밝혔으나 일본 애니메이션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음을 감안할 때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관측되었다. 영화는 폭력과 선정성이 강한 ‘18세 미만 관람불가’는 제외한다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종래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했던 개방범위를 일반 극영화 전체로 대폭 확대했다.
▶2000년 북한, 남북적십자회담 취재차
방북한 김인구 조선일보 기자 입북 거부
▶1996년 007시리즈 제작가
앨버트 브로콜리 사망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1990년 서울지하철 5호선
(방화동-고덕동) 건설공사 착공
▶1990년 문학평론가 김현 사망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평민당 서경원 의원이 1988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1989년 6월 27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서의원은 유럽여행 중 성낙영 목사를 통해 접촉한 북한인사 정모씨의 주선으로 체코를 경유, 방북했다. 북한체류중 김일성 종매부 허담이 배석한 가운데 김일성 주석과 면담, 통일문제 등에 관해 회담을 가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안당국은 이 사건을 전형적인 국회간첩단 사건으로 단정하고 서의원이 활동해온 정치권과 재야단체에 수사의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특히 당시 김대중 총재의 사전인지 여부 등을 둘러싸고 조사과정에서 정국에 팽팽한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이길재 평민당 대외협력위원장, 방양균 비서관 등 9명이 국가보안법상 불고지죄 등의 혐의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고 서의원은 1심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 추징금 3천여만원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했다.
▶1988년 5공비리특위 구성
5공화국 비리를 조사할 목적으로 설치한 5공비리특위(위원장 이기택)가 1988년 6월 27일 발족했다. `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가 정식명칭이다.
특위는 산하에 4개 소위를 두고 있으며 제1소위는 정치권력에 의한 비리, 제2소위는 경제비리, 제3소위는 인권 및 인사비리, 제4소위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고 있다.
조사대상으로는 일해재단, 새세대 심장재단, 전씨 일가 해외재산 도피, 연희동 사저, 노량진 수산시장 등 44건을 1차대상으로 선정했다.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속에 11월 2일 제1차 청문회를 시작으로 수차례 청문회가 개최되었으나 속시원히 밝혀진 것이 없었다.
1988년 12월 31일 5공특위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발언하는 중에 평민
당 이철용의원이 증언대로 나와 `살인마`
라고 외치며 삿대질을 하자, 민정당
권해옥 의원 등이 이를 저지하고 있다.
https://youtu.be/11pogFsQdc4
▶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영남과 호남을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1984년 6월 27일 개통됐다. 건설부는 이날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 건설부장관 등 관계인사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88고속도로의 양쪽 시발점인 전남 담양 인터체인지와 경북 옥포 인터체인지에서 개통테이프를 끊고 중간지점인 지리산휴게소에서 준공식을 가졌다.
88올림픽고속도로 전경.
착공 33개월 만에 이날 준공, 개통된 88올림픽고속도로는 전남 담양군과 경북 달성군을 연결하는 175.3km의 2차선도로로 전구간이 국내처음으로 시멘트콘크리트로 포장됐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구에서 광주까지의 거리는 기존 국도망을 통한 195km보다 20km가 단축됐고 주행시간은 종전의 5시간대에서 2시간30분대로 크게 줄어들었다. 88올림픽고속도로의 통행은 개통식이 끝난 직후부터 허용되었으며 1984년말까지 통행료가 면제되기도 했다.
▶1977 년지부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6년 팔레스타인 게릴라,
항공기 탈취해 엔테베공항에서 농성
#텔아비브에서 파리행 에어 프랑스 항공기가 납치되어 우간다의 #엔테베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되었다. 이후 7월 3일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기습침투하여 인질들을 구출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엔테베 작전이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1976년 6월 27일 프랑스 항공기를 하이재킹한 후 우간다 엔테베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서독,프랑스,이스라엘,스위스,케냐에 수감중인 자신들의 동지 53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테러에는 일관되게 강경입장을 고수해 온 이스라엘도 7월1일 260여명의 인질들 생명을 위해 그들과 교섭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게릴라들은 일부 인질을 석방시켰지만 아직도 102명의 인질이 남아있었고 그중 과반수 이상이 이스라엘인이었다.
마침내 7월 3일 100여명의 이스라엘 특공대가 군용기 3대로 공항을 기습, 총격전을 벌인 끝에 게릴라 7명 전원과 우간다 군인 20여명을 사살했고 7대의 우간다 전투기도 파괴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에게 피납됐다가 엔테베공항에서 약 1주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인 인질들이 7월 4일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 가족 친지들과 눈물의 상봉을 하고 있다
영화 '엔테베 작전'중에서
https://youtu.be/G0MU46XDfag
▶1973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전
권, 울산권, 마산-창원-진해권, 춘천권,
청주권, 전주권, 진주권, 통영권 지정
▶1972년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IRA)
간의 무기한 정전 발효
▶1970년 경부고속도로 완공
▶1968년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언론의 자유를 도입하는 등 개혁정책을 폈다.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 1959년 오늘,
야누시 지그문트 #카민스키
폴란드 #촬영감독 출생.
1993년 《쉰들러 리스트》를 시작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촬영 기사를 전담했다. 《쉰들러 리스트》와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 야누시 지그문트 #카민스키
전쟁영화 촬영의 '최고봉'
'라이언일병 구하기'!
<실제 전쟁터, 노르망디에 있는 듯 총알이
살아서 내게 쏟아지는 것 같았지요.>
https://youtu.be/W2qR7EpKbHI
▶1954년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1950년 미국,
해공군 한국전 출동명령
▶1950년 정부, 대전으로 이전
▶1950년 소련,
유엔안보리 복귀를 신청
▶1950년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 1950년 6월 27일,
보도연맹 학살사건이 시작되다.
보도연맹에 가입 되어있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는 보도연맹원들 [서울의소리]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의 '보도연맹'학살 장면.<백문이불여일견!>
https://youtu.be/ulFupQDHmuw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 5일 좌익 계열 전향자로 구성됐던 반공단체 조직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을 사상전향시켜 이들을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국민의 사상을 국가가 나서서 통제하려는 이승만 정권의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결성됐다.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절대 지지’, ‘북한 정권 절대 반대’, ‘인류의 자유와 민족성을 무시하는 공산주의사상 배격 · 분쇄‘, ‘남로당,조선 로동당 파괴정책 폭로 · 분쇄’, ‘민족진영 각 정당 · 사회단체와 협력해 총력을 결집한다’는 주요 강령 내용 등을 내세워 철저히 반공주의 강령으로 삼았었다.
이런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의 시행에 따라 1949년 말에는 가입자 수가 30만 명에 달했고, 서울만해도 거의 2만 명에 이르렀다. 보도연맹 대상자는 좌파 낙인이 찍힌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서, 가족 중 월북자나 남로당원이 있다는 이유로 반강제로 가입한 경우도 많았고, 평범한 농부들에게 고무신을 나눠주거나 비료주는 조건으로 가입 도장을 받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공무원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쌀, 식량 등을 배급해준다"고 선전했고, 실제로 배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상에 관계없이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등록한 양민들이 많이 있었다고 알려지기도 한다.
최근 보도연맹 가입은 '공무원들의 실적주의'와 '반(半) 강제 가입'으로 인해 많이 생겨났다는 증거로서 10대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와중에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침해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초기 후퇴 과정 중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는 의심을 했다.
보도연맹원이나 양심수가 북한과 내응하고 뒤에서 배신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우려한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 국군(주로 헌병대), 경찰 또는 교도소 교도관들은 '북한군에 아직 점령되지 않고, 확보해두고 있는 남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 검속하고 즉별처분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이천시에서는 군복을 입고 경찰 마크를 붙인 사람들이 국민 보도연맹원 100명을 총살했고, 대전 교도소에서는 3,000여 명이 처형당하는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각 마을 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됐다.
학살 주체는 육군특무대(CIC)와 헌병이었다. 특히 최후방이었던 경상도 일대의 보도연맹 학살은 그 피해정도가 심각했는데, 육군특무대(CIC)는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학살할 때 산 골짜기, 우물, 갱도 등에 모아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다고 한다. 보도연맹 학살은 조선인민군 점령 지역에서 일어난 좌익 세력에 의한 보복학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6.25 전쟁 와중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민간인 학살은 국제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됐고 심지어 미국까지 '민간인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자, 이승만은 '보도연맹 학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이미 수 많은 사람이 살해된 상태였다.
이렇게 국민보도연맹 조직은 없어졌지만, 지금까지도 얼마나·어디서·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또한 오늘날 현재에도 추측만 할뿐, 정확한 해명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예비검속 및 예방학살'이라는 명분으로 군인(헌병)과 경찰이 이들 보도연맹원들을 살해한 후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은폐하고 금기시했었기 때문이다.
보도연맹 학살이 진행된 와중에서 운좋게 목숨을 부지한 보도연맹원들도 있고, 유가족도 살아있었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말을 꺼내진 못했다. 그들이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도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거나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철저히 은폐됐고 오랜 기간 동안 금기시되어왔다. 따라서 6.25전쟁때 학살된 보도연맹원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6.25 전쟁중 이승만 대통령이 행한 악질적인 범죄중의 하나인 보도연맹학살 사건이 벌어진 것은 6.25 발발 이틀후인 6월 27일부터였다.
#1950년 #6월27일 #역사속의 #보도연맹
#학살사건#양민학살#이승만
▶1947년 입법의원 보통선거법 통과
▶1946년 북한,
농업현물에 관한 결정서 발표
▶1941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사망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1918년 각도에 금융조합연합회 설치
▶1909년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장 순국
구한말 경기북부 지역의 연합의병을 지휘,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이은찬(1878∼1909) 의병장이 1909년 6월 27일 순국했다.
강원도 원주군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군대 해산 뒤 전국 의병연합체인 ‘13도 창의대’를 편성, 서울탈환에 들어가 동대문밖 10리까지 진격했으나 의병간 협조체계 미비로 작전에 실패했다. 1908년에는 임진강 연합의병을 결성, 서울 재침공을 목표로 가평과 포천, 양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벌여 대승을 거뒀다.
선생은 밀정의 신고로 서울 용산역에서 일경에 붙잡혀 1909년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정부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1999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이은찬 의병장의 애국충절을 기념하여
강원도 원주시 학성2동 327-1에 세워진
이은찬공 추모비(1968.10.29).
▶1907년 모병령 공포
▶1905년 포템킨호 수병 반란
1905년 6월27일, 흑해 북쪽 오데사항에 주로 입항해 온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포템킨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혁명의 기운이 러시아 전역에 휘몰아치고 장교들의 부패와 횡포로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부실한 식사를 거부하던 수병 1명이 장교에게 사살된 것이 발단이 됐다.
함장과 장교들을 모두 사살하고 파업이 한창이던 오데사항에 입항, 수병 일부가 총파업에 가담하자 가장 용맹하다는 코사크 기병대가 투입됐다. 남녀노소 할 것없는 무차별 학살이 전개되고 포템킨호도 이에 응수, 시가를 향해 포격을 시작함으로써 오데사는 피로 물들었다. 다른 흑해함대까지 동원해 포템킨호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수병들의 발포거부로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포템킨호는 육상으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수병들의 투지도 급격히 떨어지자 7월8일 루마니아의 콘스탄츠 군항으로 탈출했다. 루마니아가 러시아의 수병인도를 거부해 이들 중 상당수는 루마니아에 정착하거나 캐나다ㆍ미국ㆍ브라질 등으로 이주했지만 러시아로 돌아간 수병 54명은 사형되거나 강제노동에 처해졌다.
루마니아 콘스탄츠 군항에 입항한 포템킨호와 그 수병들. 타함에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고 고립된 포템킨호는 루마니아 경찰에 억류되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간요구 거절
▶ 1893년 오늘,
미국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뉴욕 증권 거래소에서 모든 주식들이 폭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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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kycho45/221332203576
▶ 1880년 오늘,
‘#빛의 천사’라 불린 미국사회사업가 #헬렌켈러 태어남.
생후 19개월에 앓은 열병으로 눈멀고 귀 먹고 말 못하게 됨. 스승 맨스필드 #설리번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농아학교 거쳐 하버드대 입학 1904년 세계최초로 대학교육 받은 시각장애인으로 졸업, 자기와 같은 맹농아인을 위한 구제 교육 사회사업에 생애를 바침
▶ 1693년 오늘,
영국 런던에서 존 던튼 이 #최초여성잡지 "Ladies Mercury" 출판되다.
레이디스 머큐리
레이디스 머큐리는 아테네 협회와 그 설립자인 존 던튼이 4주 동안 발간한 잡지이다. 첫번째 출판물은 1693년 2월 27일 런던에서 출판되었다.
최초의 정기 간행물로 여성들을 위해 특별히 고안되었다.
#LadiesMercury #존던튼
https://youtu.be/8XPxWptvAbw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솦트리종려나무 , 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