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잡지 '로망스(La Romance, Journal de Musique)'의 삽화. 1835,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쇼팽보다 한 세대 앞선 유명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모셸레스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쇼팽을 만나고 첫인상을 이렇게 전했다. “그의 모습은 여리고 꿈꾸는 듯한 것이 자신의 음악과 꼭 같았다.”
쇼팽전문가로 유명했던 음악학자 프레데리크 닉스(Frederick Niecks)의 묘사에 따르면 쇼팽의 눈은 옅은 브라운색으로 몽환적이었고, 길고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은 밝은 체스트넛 빛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른 체구에, 손발은 작지만 섬세하고 유연했다. 매부리코의 그는 외모에서 전반적으로 엄마 쪽을 닮았다고 한다. 그의 키는 기껏해야 160센티 정도로 추정된다.
행동거지는 점잖았고 언제나 깍듯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였다.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며 감정을 철저히 조절해서, 오해를 풀기 위한 것이 아니면 자신의 속을 밖으로 노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했다. 어떤 이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직접 손을 잡고 폴란드의 민속춤 마주르카 추는 법을 가르쳐 주던 쇼팽의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에 감격했다.
쇼팽은 파리에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음악계에 위상이 확고했던 원로 음악가부터, 젊은 음악가, 문인, 화가, 배우, 유력 정치인과 사교계의 인사 그리고 폴란드 출신의 귀족과 지식인을 포함했다. 그의 친교의 폭은 넓었다. 많은 사람과 같이 어울렸지만, 그는 그들 대부분과 너무 가깝지도, 또 너무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 속에 있었지만, 언제나 혼자였다.
첼리스트 프랑숌은 쇼팽이 파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친한 친구가 되었고, 쇼팽의 힘겨운 마지막 자리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쇼팽은 그에게조차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다. 쇼팽이 내밀한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티투스 보이체홉스키, 얀 마투진스키, 보이체흐 그셰마와 정도뿐이었다. 모두 폴란드에서부터 알던 사람이었다.
피아노 연주하는 쇼팽.
리스트는 말했다. “그는 모든 것을 주려 했지만 자기 자신만은 내주지 않았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 그의 영혼의 샘이 있는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곳은 굳게 닫혀있어서 대부분이 그 존재조차 몰랐다.”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을 포함하는 슬라브 민족이 대체로 그러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 프랑스인은 밝고 개방적이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를 둔 쇼팽이다. 외모뿐만 아니라 기질도 외탁했던 모양이다.
낯선 사람에게는 조심스러웠던 그는 특히 자신의 음악이나, 자신과의 친분을 과시의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떤 부유한 사람의 초대를 받았다. 주인은 좋은 음식을 접대한 후 다른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그에게 은근히 연주를 강요했다. 그러자 그는 “선생님, 저는 음식을 거의 안 먹었어요”하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쇼팽이 펜을 드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엇이든 직접 대면해서 말로 전하는 것을 선호했다. 초대에 응하기 어려운 경우, 초대장을 들고 온 사람에게 거절 의사를 표하면 될 것을 직접 걸어가서 초대자에게 불가한 이유를 완곡하게 설명하곤 했다. 규칙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은 상대는 가족과 티투스 보이체홉스키 정도였다. 그나마도 상드와 깊은 관계가 된 이후에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쇼팽이 옷차림새에 신경을 쓴 것은 유명하다. 쇼팽은 항상 깨끗하고 단정했으며 세련된 모습을 유지했다. 그는 여성들의 옷도 그것이 고급 재질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저급한 재질의 옷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단골 가게를 정해 두고 최신 유행의 옷을 공급받았다. 요란하지 않으면서 조용한 패턴의 점잖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주로 골랐다.
훗날 파리를 1년 정도 떠나있다가 돌아오기 직전에 빼먹지 않고 한 것이 있다. 파리의 친구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치수를 알고 있는 단골 가게에 옷을 주문한 것이었다. 모자, 바지, 조끼 등등을 무늬, 재질, 색깔들에 세세한 요구를 해서 완벽한 한 벌을 준비해뒀다. 파리에 오자마자 바깥 활동을 하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었다.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작품 번호 65의 자필 원고.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힘든 ‘숙고’의 과정이 악보에서 보인다. 프랑스 국립 도서관 소장.
작곡의 천재인 그에게 악상은 아무 때나 솟아났다. 그는 즉흥연주에 능했고 그것을 즐겼다. 쇼팽이, 마치 오랫동안 준비되어 있었던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즉흥적으로 풀어내는 멜로디에 그의 제자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세월이 흐른 뒤 상드도 그의 창조적 능력이 경이로웠다고 했다. 악상은 피아노 위에서 갑자기 흘러나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산책 중에 떠오르기도 했다. 이럴 경우 그는 급히 돌아와 피아노로 그것을 재현했다.
그런데 그 악상을 악보로 옮길 때가 문제였다. 그의 자필 원본에는 고민이 흔적이 남아있다. 그는 미친 듯이 머리를 쥐어짜며 기본 착상을 구체화하고 다듬으려 했다. 며칠을 방에 틀어박히거나 미친 듯이 위층과 아래층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수십 번을 썼다가 고치고, 다시 썼다고 고치기를 거듭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완성된 것을 보면 처음 썼던 그대로인 적도 있었다.
비교적 짧은 피아노 음악을 주로 작곡했지만 다듬는 과정은 길었다. 엘스너를 비롯한 폴란드 친구들은 그가 폴란드의 역사적 소재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기를 바랐다. 분량이 상당한 한편의 오페라나 교향곡을 작곡하려면 그의 창작과정을 생각할 때 엄청난 체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건강이 그것을 허용했을 것 같지 않다.
쇼팽의 제자들은 그가 누구보다 좋은 선생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플레옐 그랜드피아노를 학생에게 내주고 자기는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았다. 학생들의 손의 자세에 대해서 꼼꼼하고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연습을 오래 많이 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루 6시간 연습한다는 학생에게 3시간으로 줄이라고 조언했다. 그리고는 남는 시간에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다른 예술 작품을 감상하도록 권했다.
그는 부드럽고 우아한 소리를 선호했고 곡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을 중시했다. 수업시간 말미에 때로 폴란드에 대한 러시아의 만행을 비난하거나 조국을 되살리려는 자신의 꿈을 열정적으로 토로하기도 했다. 가난한 폴란드 청년에게 매월 용돈을 주며 학업을 계속하도록 하기도 했다.
존 필드. 아일랜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녹턴 양식의 창시자로 쇼팽에게 영향을 주었다. 쇼팽의 약혼녀 마리아 보진스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Anton Wachsmann 그림, 판화, 1820.
그는 당시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고국을 떠나온 동포들의 구심점이었다. 동포들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 자주 참여했다.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압제에 고통받는 폴란드인의 목소리를 국제사회에 전달하려 했고, 폴란드의 자긍심을 알리는 역할도 수행했다.
그는 고국에서 갓 온 사람들에게서 그곳의 최신 소식을 듣고 싶어했다. 고국에서 오는 새로운 시에 곡을 입히는 것도 좋아했다. 그가 고국의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면 그 노래는 다시 폴란드로 흘러가서 유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가 중에는 모차르트와 바흐를 좋아했다. 베토벤에 대한 그의 평가가 높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아마도 어릴 적 음악선생이었던 지브니의 영향일 수도 있다. 지브니는 모차르트와 바흐의 음악을 강조했다. 쇼팽은 베토벤의 음악이 매끄러운 마무리가 없고 구성이 너무 거창하며 열정은 너무 격렬하다고 생각했다.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했다면, 교향곡을 썼을 것이다.
그의 살롱 모임은 늦은 시각에 끝났다. 파티의 달콤함이 채가시기 전에 적막함에 쌓인 텅 빈 거리를 되돌아와서 빈방에 홀로 앉았을 때 이방인 쇼팽의 마음은 무거웠다. 특히 비라도 오는 날이면 그의 마음은 깊은 향수와 우수로 채워졌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던 존 필드(John Field, 1782~1837)가 창시한 정통 살롱음악인 녹턴에 공감했다. 그것은 도시적 감수성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외로운 쇼팽에게 녹턴은 향수와 우수에 대처하는 그만의 방편이었다. 많은 사람은 그의 다양한 장르의 곡 중에서도 녹턴에서 가장 쇼팽스러운 모습을 발견한다. 그가 담은 것은 폴란드적인 감정일 터인데, 그것은 오늘날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감성에도 호소하는 바가 크다.
사후 출판된 그의 녹턴 20번 c#단조는 쇼팽이 20세 전후에 작곡한 곡이다. 영화음악으로도 쓰였던 이 곡은 피아노로 들어도 좋고 바이올린으로 편곡하여 연주한 것을 들어도 좋다. 다음 이야기는 외로운 쇼팽에게 나타난 마리아 보진스카에 대한 이야기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첫댓글 감동입니다 ^^ 다양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