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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독일 월드컵의 예상 TV 시청자수는 전 세계적으로 연 400억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세계 인구가 60억여명임을 감안하면 말이 400억명이지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유럽-아시아-남미-오세아니아-아프리카 등 전 세계는 월드컵이 열리는 4년마다 축구의 광풍에 휩싸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축구는 만국 공통어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몰라도 축구 슈퍼스타인 데이비드 베컴이나 지네딘 지단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정도다. 이제 축구는 세계적인 대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세에 역행하며 독자적인 스포츠의 세계를 구축해 온 나라가 있으니 바로 미국이다. 전 세계가 축구에 열광할 때 유독 미국만은 축구를 무시한 채 그들만의 스포츠인 야구, 미식축구, 농구 등에 더 열중해왔다. 왜 그랬을까. 왜 미국인들은 축구를 싫어했을까. 저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스포츠에 왜 유독 미국 사람들만 무관심했을까. 미국인은 특별한 종족인가. 성격이 달라서? 자란 환경이 달라서? 또 만약 미국이 오래전부터 축구에 열광해 NBA나 메이저리그야구와 같은 세계최고 수준의 축구리그를 갖고 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마이클 조던 같은 슈퍼스타가 이끄는 농구 드림팀이 우습게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듯 미국의 축구 드림팀도 월드컵 우승의 단골손님이 되었을까. 세계에서 스포츠에 돈을 가장 많이 쓰고, 또 스포츠 비즈니스가 가장 발달된 미국에서 유독 축구만 이렇게 찬밥 신세가 됐는지 역사를 되돌려 추적해 그 원인과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에서 근대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때는 1800년대 중반이다. 미국이란 나라 자체가 이민자들로 이뤄진 나라인데 초창기 미국인들이 즐긴 스포츠도 대부분 이민자들이 가져온 스포츠였다. 물론 이 가운데엔 영국에서 건너온 축구도 포함돼있었다. 미국으로 건너온 스포츠는 많은 변형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자존심이 상한 듯 이것 저것 뜯어고쳐 자기들의 구미에 맞게 스포츠를 변형 시켰다. 영국에서 건너온 크리켓은 야구로 바뀌었고, 럭비는 미식축구로 바꿔놓았다. 초창기 스포츠는 오늘날의 리그처럼 조직적이지 못했다.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사회가 농업시대에서 공업시대로 바뀌면서 비롯됐다.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도시가 커지기 시작했고 이와 함께 무료한 도시인들이 주말에 볼거리를 찾게 되면서 엔터테인먼트의 하나로 스포츠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많은 스포츠 가운데 미국인들은 야구에 애착을 많이 가졌다. 당시 미국은 전반적으로 영국에 대한 감정이 여전히 좋지 않은 때였다. 독립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지만 미국인들은 미국인들 나름대로 영국보다 더 나은 국가라는 자존심이 더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먼저 발전시키고 전 세계 각지에 퍼트리고 있는 축구를 받아들이기엔 영 내켜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이 고유하게 만들고 발전시켜온 야구에 더 큰 애정을 보였다. 자연 스포츠에 대해 관심 있는 재력가들도 야구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논리는 간단하다. 인기 높은 야구에 투자해야 그만큼 돈을 벌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괜히 일반인들 사이엔 별 관심을 끌지 못하는 축구에 투자해봤자 돈을 날릴 것이 뻔한데 누가 축구에 투자를 하느냐 말이다. 미국에서 야구가 처음 도입된 때는 1850년경. 초기엔 중상류층의 레저 스포츠였는데 곧 스포츠를 즐기는 계층이 중하류층으로 바뀔 정도로 미국 내에 야구의 저변은 급속도로 확대됐다. 차츰 야구를 즐기는 계층이 늘어나면서 급기야 1876년 메이저리그야구가 탄생하기에 이르게 된다. 메이저리그는 철저히 스포츠 상업화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야구는 자본가들에게 스포츠를 이용한 하나의 돈벌이 사업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반면 같은 시대 영국과 유럽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축구는 미국의 야구와 달리 꼭 돈을 벌 목적으로 사업가들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선교사나, 유학생, 외국으로 진출한 비즈니스맨들을 중심으로 축구란 새롭고 흥미로운 스포츠를 각지에 전파시키려는 자발적인 노력들이 축구 발전의 큰 밑거름이 됐다. 미국에서는 야구와 함께 럭비를 변형시킨 미식축구와 농구 또한 높은 인기를 끌었다. 미식축구는 그 특유의 격렬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끌었고 농구 또한 새로운 스포츠로 각광을 받았다. 이들 종목들의 특징은 모두 전형적인 미국 스포츠라는 점이다. 미국인들이 직접 고안하고 변형시켜 탄생시킨 미국 스포츠인 것이다. 이렇게 미국적인 스포츠에 미국인들이 집착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예전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영국에서 만든 축구를 선뜻 주류 스포츠로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어려웠다. 사실 미국에서 야구가 발전한 것도 영국이 만들고 영국 스포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켓에 맞서기 위해 의도적으로 미국인들이 발전시킨 부분도 없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종주국인 축구의 입지는 초창기 미국에서 더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초창기엔 축구가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꽤 인기가 있었다. 180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영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 모여 협회도 만들고 리그도 만드는 등 축구보급에 힘을 썼다. 1884년 미국축구협회가 마침내 창립돼 각종 규칙들이 만들어졌고 1895년엔 일부 동부지역의 팀을 중심으로 내셔널축구리그가 창설되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 농구 미식축구에 치이는 것은 물론이고 복싱, 폴로 등의 스포츠도 덩달아 큰 인기를 얻어가면서 축구는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실패하고 1898년 내셔널리그는 막을 내렸다. 1900년대 초반은 현대스포츠가 기반을 닦는 중요한 시기인데 이처럼 다른 종목들이 먼저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도 축구가 미국에서 발달하지 못한 큰 원인중의 하나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 있는 사람들이 벌써 다른 스포츠에 투자를 많이 하다보니 잠재력은 있지만 당장 인기스포츠가 아닌 축구에까지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돈버는 게 목적인 투자자들로선 구태여 모험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즉, 야구 농구 미식축구 복싱 등 돈 잘 벌리는 스포츠도 많은데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많이 못 끄는 축구에 투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특히 격렬한 스포츠로서 축구와 미식축구간의 경쟁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훨씬 더 폭력적이고 남성다움을 강조하는 미식축구의 손을 들어줘 축구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었다. 전반적인 미국 사회의 분위기도 축구 발전을 방해하기도 했다. 이민자들은 그네들 나름대로 새로운 사회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미국적인 스포츠,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스포츠를 좋아하려고 애쓰다 보니 유럽에서 즐겨했던 축구는 점차 멀리하게 됐다. 또 당시 사회 분위기는 내셔널리즘과 애국주의가 높았을 때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건너온 축구에 대해 못마땅한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하루라도 빨리 새 환경에 적응하려는 이민자들이 드러내놓고 수입 스포츠인 축구를 좋아하기는 한계가 있었다. 축구를 관장하는 조직의 부재와 무능도 미국축구가 초창기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된 원인중의 하나다. 1884년 드디어 미국축구협회가 창립됐지만 내부적으로 권력을 놓고 많은 분쟁이 일어났다. 1912년엔 미국 아마추어축구리그(AAFA)와 아마추어축구리그(AFA)가 동시에 만들어져 축구를 전국적인 스포츠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양 기구가 협력해도 모자라는 판에 서로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기관으로 인정 받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여 축구의 퇴보를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렇듯 제대로 된 축구 기관도 없고 축구 행정이 없다 보니 자연 체계적인 축구의 발전은 꿈을 꿀 수도 없었다. 이런 축구 행정력의 부재를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이름 하나 제대로 짓지 못한 것을 들 수 있다. 미국의 초창기 축구 기관들은 항상 Football Association이란 이름을 사용했는데 문제는 이 이름에서 축구란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미국에서 Football은 미식축구를 의미하지 우리가 알고 있는 축구가 아니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와 축구를 구분하기 위해 Football과 Soccer를 나눠 쓴다. 그런데 미국의 초창기 축구 기관들의 고집스럽게 Football을 고집, 일반인들을 헛갈리게 했다. 1945년이 돼서야 US Soccer Football Association을 사용, 처음으로 soccer(축구)란 이름을 넣었고 1974년 미국축구협회를 United States Soccer Federation으로 명명, 드디어 Football이란 이름을 지웠다. 초창기 대학에서 축구를 외면한 것도 미국에서 축구가 뿌리내리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중의 하나이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달리 많은 학생들의 입학을 허용해 대학생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사회의 엘리트계층으로서 스포츠 문화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다. 특히 대학스포츠는 거의 세미 프로수준으로 이미 전국적으로 많은 팬을 갖고 있을 만큼 스포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런데 이렇게 스포츠 문화의 리더 역할을 하는 대학에서 축구를 외면했으니 축구가 제대로 클 리가 없다. 사실 18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 대학에서 축구의 인기는 엄청났다. 예일, 프린스턴, 콜롬비아 등 명문대학팀들 사이엔 축구경기를 통해 서로 우의를 쌓을 정도로 축구 인기는 대단했다. 하지만 1876년부터 대학생들이 하나둘씩 축구보다 미식축구를 더 선호하기 시작하면서 대학에서 축구는 완전히 사라지게 됐고 대신 미식축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대학팀들간의 스포츠 교류는 축구대신 미식축구를 통해 이뤄졌고 대학별 미식축구리그는 폭발적인 인기를 더해갔다. 실제로 그 이전까지 활발했던 대학간의 축구교류는 1877년부터 뚝 끊겼고, 이후 1902년까지 공식적인 대학팀들간의 축구 경기는 단 한 건의 기록도 없을 만큼 대학에서 축구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축구의 큰 매력중의 하나가 국제 경기, 특히 라이벌 국가와의 경기인데 초창기 미국에선 국제 경기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축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실패하기도 했다. 미국은 간간이 영국팀을 초청해 국제경기를 벌이곤 했지만 그 횟수는 현저히 작아 축구 부흥을 도모하는 데 실패했다. 또 세계 제일이라는 자존심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미국인들은 자국의 스포츠기구가 다른 국제 상위 기관(국제축구연맹)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도 축구를 영 내켜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이다. 즉,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FIFA에 의해 자국리그가 간섭받고 또 FIFA 스케줄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이 미국인들로 하여금 축구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당시 미국은 나라 자체가 클 뿐더러 경제 규모도 유럽 전체와 맞먹을 정도로 커질 대로 커져서 다른 나라와 교류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충분한 상황이었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였다. 시장이 커서 국내리그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이 나 자생이 가능하다 보니 구태여 인터내셔널 매치 등 국제 스포츠 이벤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나라들이 국가간에 벌어지는 축구 경기를 통해, 월드컵 등 세계적인 축구대회를 통해 축구의 묘미에 한껏 빠져드는 사이 미국인들은 국내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스포츠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미국이 발달시켜온 스포츠인 야구, 미식축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을 보면 축구처럼 국제적인 스포츠라기보다는 미국과 일부 국가에서만 국지적으로 발달해온 종목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요즘 미국에서 야구, 농구를 제치고 미국인들이 가장 열광하는 스포츠인 미풋볼리그(NFL)는 미국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인기가 없다. 미국 축구가 소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1970년대 북미축구리그(North American Soccer League)가 졸속 행정과 운영 미숙으로 실패한 것도 오늘날까지 미국에 축구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다. TV로 중계가 된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은 미국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축구에 대한 일반인들의 높은 관심에 고무된 투자가들은 이윽고 1968년 북미축구리그를 출범시키게 된다. 하지만 TV 중계권도 확보하지 못하고 각 팀들이 재정난으로 속속 문을 닫아 리그 출범 3년 뒤엔 고작 5팀만이 살아남아 명맥을 유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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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이 된 것은 1975년 축구황제 펠레를 영입하면서부터이다. 뉴욕 코스모스팀이 펠레와 사인을 한 이후 전 세계에서 몰려든 미디어는 물론 미국 미디어의 관심이 폭발했고, 또 이런 영향으로 일반인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도도 부쩍 높아졌다. 펠레에 이어 국제적인 축구 스타의 영입은 계속돼 베켄바워(서독), 게르트 뮐러(서독), 에우제비오(포르투갈), 고든 뱅크스(잉글랜드),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 등 당대 내노라하는 슈퍼스타들이 총 결집했다. 이런 스타선수들 덕분에 관중수는 매년 크게 증가했는데 특히 1976년과 1977년엔 축구장을 찾는 관중이 눈덩이처럼 불어 1977년 코스모스-스트라이커팀간의 플레이오프 경기 때는 77,691명이라는 기록적인 관중이 입장했다. 1980년에도 4만-5만명의 관중이 입장하는 경기가 많아 미국에 축구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리는 듯 했다. 하지만 미숙한 운영이 문제였다. 리그는 여전히 TV 중계권을 따내지 못해 만년 적자에 시달렸고 팀들은 장기적인 계획 없이 몸값이 비싼 국제적인 스타 선수들을 너도나도 영입해 재정 압박을 자초했으며, 또 유망주를 자체 육성하고 자국 선수를 키워 장기적으로 리그를 살찌우기보다는 외국선수 스카우트에만 열중, 리그의 부실을 초래했다. 결국 펠레, 베켄바워, 에우제비오 등 슈퍼스타의 영입과 함께 축구붐을 타던 북미축구리그는 1980년부터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팀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해 1985년을 끝으로 리그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한 가지 긍정적인 것은 당시 축구에 열광하며 축구를 시작했던 유소년과 청소년들이 오늘날에는 성인이 돼 오늘날 미국 축구팬의 주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때부터 유소년축구가 활성화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측면이 아닐 수 없다. 1970년대를 기점으로 축구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한 미국인들은 유소년들을 중심으로 직접 하는 스포츠로서 자리를 조금씩 잡아갔다. 특히 미국여자축구의 비약적인 발전은 미국축구 부흥의 큰 밑거름이 돼왔다. 그러나 여전히 축구는 미국 스포츠의 주류에 끼지 못한 채 변방에 머물고 있다. 오랫동안 다른 스포츠에 길들여진 미국인들의 입맛을 축구란 새로운 종목에 맞추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야구, 농구, 미식축구 등에 길들여진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축구에 대해 '득점이 많지 않다, 지나치게 수비 위주다, 무승부가 너무 많다(전체 경기의 3분의 1이 무승부), 중간에 휴식 시간이 너무 없다'는 등 불평을 쏟아 붓는다. 이 모든 것이 그동안 100여년 이상 미국식 스포츠, 미국식 스포츠 패턴에 익숙해져 유럽식으로 발달된 축구란 스포츠에 대해 낯설어 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입맛을 한꺼번에 바꾸기란 힘든 법. 밥과 김치만 먹던 한국 사람이 하루 아침에 서양식으로 고기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포츠 문화도 마찬가지. 이미 오랫동안 길들여져 온 스포츠에 대한 입맛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요즘 들어 미국에서 서서히 축구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지만 전체적인 규모를 놓고 봤을 때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축구가 야구, 농구, 미식축구 못지않게 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으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할 수 있다. 또 10년-20년 뒤에 축구가 미국에 뿌리를 내리리라는 법도 없다. 왜냐하면 야구, 농구, 미식축구 등 다른 종목들도 살아남기 위해 치고 올라오는 축구와 더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 축구의 한계이기도 하다. 글 : 최성욱 ( 전 스포츠 조선, 스포츠 투데이 축구기자. 현재 포틀랜드 주립대학 스포츠 커뮤니케이션 석사 과정) |
첫댓글 그래도 K리그보다 관중이 많은 M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