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한 성도의 영적 싸움(2)
엡 6:10-20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도를 위하여 구하라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 설 교 >
기도는 전투다
에베소서 6:10-20 / 계강현 목사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를 체계화하는 설교를 쓰고 있을 때
, 사탄이 속삭이길, “루터, 너는 큰 죄인이다. 그러므로 너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참소했다. 그때 루터는 단호히 대적하였다. “나는 죄인임에는 틀림없고 저주와 심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피가 나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했다. 사탄아! 썩 물러가라!”고 외쳤다. 요한 웨슬리와 디엘 무디, 찰스 피니 등 위대한 전도자들의 전기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가운데 어둠의 세력인 사탄과의 생생한 믿음의 싸움을 간증하고 있다. 미국의 19c 부흥사였던 디엘 무디는 ‘단 한순간도 기도를 쉬면 사탄의 승전곡이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고, 20세기 최고 설교자인 로이드 존스 박사는 ‘어둠의 세상은 대포로 무장했는데 현대교회는 소총밖에 없다’며 현대교회의 영적 무력화를 지적한 바 있다.
오늘 우리는 영적전쟁을 하고 있다. 전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마귀를 대적하여 어둠의 결박을 끊고 마귀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영혼을 구출해내는 영적전투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이 먼저 힘 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있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다.”(마 12:29)고 하셨다. 전도를 영적전쟁으로 보시고 경계하신 것이다.
본문 앞부분인 엡 6:10-17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싸움이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군병인 성도들은 원수마귀의 술수를 능히 이기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무기로 무장하라는 것이다. 먼저 무장의 다섯 가지 수비 장비에 대해,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막이,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등의 수비 장비로 무장해야 한다. v16, “이 모든 것에 더하여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드십시오. 그것으로써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를 향해 불화살을 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전신갑주를 입으면 그것들을 막아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유일한 공격무기인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하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런 무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힘이 필요하다. 자동차가 아무리 완전하고 아름답게 제작되었을지라도 휘발유가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휘발유, 내적인 능력이 바로 기도다. 기도가 성도의 필수적인 능력의 방편이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을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전신갑주에 대해 말한 바울은 곧 이어서 v18에서부터 기도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을 특별히 기도에 대한 권면으로 끝맺고 있는 셈이다. 성도의 삶과 복음 전도는 영적전투이고, 그 전투는 기도로 시작한다.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포기한 사람이다. 기도를 시작한 사람은 이미 전투를 승리할 가능성을 지닌다.
1. 왜 기도가 영적 전투에 필수적인가?
1) 우리의 대적인 원수마귀와 그의 졸개들인 악령들은 영적인 존재인 반면에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물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보다 지혜나 능력에 있어서 더 탁월하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무소부재 못한다. 그래서 마귀는 조직을 갖고 일한다. 마귀를 대장으로 악령과 귀신들이 그 졸개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주 조직적이고 전략적으로 공격한다. 지역적으로 점과 주술과 다른 종교와 사이비 이단이 강한 지역들이 있다. 우리 광주에는 하나님의 교회 본부가 있고, 성남은 신천지 본부가 있다.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영적 전쟁이다. 마귀는 마치 바둑을 두는 기사들이 10수~20수를 내다보면서 두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공격해온다. 이걸 모르고 순진하게 한두 수도 앞을 못보고 당하고 있으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 영적인 공격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나?
우리 교회가 새해 들어서 비신자 전도를 통해 주일출석의 15% 세례를 주고 150명이 평균 출석하는 수적성장을 목표로 하면, 당연히 원수마귀는 자신의 영적 조직에 비상을 걸었다.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달려들 것이 뻔하다. 예상되지 않는가? 그럴 때 우리 교회에서 제일의 공격목표는 누구일까? 목자 목녀들이고, 장로들이고 목사와 사모다. 여러분, 이걸 제발 영적으로 분별하고 기도로 이 싸움을 이겨내야 한다. 미리 예상하고 기도로 악한 사단을 물리치고 선점하고 있어야 한다. 공격할 때 예수 이름으로 물리쳐야 한다. 경계하고 분별하여서 어떤 공격에도 시험 들거나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폭하지 말아야 한다.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때 우리가 이 원수마귀와 악령들을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기도를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과 소통하는 길밖에는 없다. 내 힘과 능력과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이요, 곧 성령 충만 이다. 새해 들어 시 119편을 계속 묵상했는데, 시인은 고난 중에도 말씀 붙잡고 늘 기도로 아뢰고 있다. 말씀과 기도가 함께 가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기도는 합심기도, 전투적 기도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합심해서 통성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새벽과 저녁에 기도하고, 4~5시간씩 기도하며 사탄을 물리치는 대적 기도를 드리는 이런 중보기도 모임을 통해서 악한 사단은 결박되고 물러간다. 기도가 많을수록 전도가 효과적이다.
2) 마귀가 우리를 공격해올 때 많은 분들은 영적인 존재를 잘 몰라서 너무 쉽게 넘어가거나 이용당하기 때문이다. 마 13장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면 씨가 네 가지 밭에 떨어지는데 그 중에 길가에 뿌려진 씨가 있다. v19, “누구든지 하늘나라를 두고 하는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가에 뿌린 씨는 그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주님이 자세히 비유를 설명해주었다. 새가 씨를 먹어버리듯이, 악한 자가 와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버린다는 것이다. 여러분, 영적인 세계가 분명히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영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이 악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데, 생각이나 마음이 다 내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나 감정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게 되면 허무와 퇴폐 등의 죄와 낙망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가 그거다. 영적인 세계를 전혀 모르니까 마음속에 떠오르는 허무 염세 등의 감정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을 인간다운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런 삶이란 게 아주 암울하다. 우리는 성령님이 계시고 악령이 역사하는 영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있다.
어떤 자매님을 만나서 신앙상담을 했는데, 이 분은 아주 염려가 많다. 가만히 보니까 자기가 염려해서는 안 되는 것조차 염려하는 거다. “자매님은 지금 그 염려가 자신에게서 온다고 생각을 하는데, 내 생각에는 사탄의 역사인 것 같아요. 악령이 역사하는 방법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이거든요. 우리 생각에다가 자꾸 염려를 심어주는 마귀와 싸워야지 자꾸만 회개하면 안돼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염려하게 하는 원수 마귀야 물러가라’고 믿음으로 크게 선언하세요.” 영적 싸움에서 마귀를 물리쳐야 되는데, 자꾸 자기 자신을 탓하고 있단 말이다.
예를 들어 누가 밉고 그러면 “하나님 제가 이 사람을 미워했습니다. 살인죄를 저질렀네요. 회개합니다.” 이렇게 하고나면 개운해져야 한다. 그런데 회개해도 개운하지 않고 자꾸 미움이 솟을 때는, 나 아닌 어떤 영적인 존재가 끈질기게 나에게 달라붙어서 나에게 미움을 심어준다고 생각을 하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에게 이런 미움을 심어주는 악령은 물러가라!!”하고 외치면서 악한 영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자꾸 자신하고 싸운다고 생각하고는 “아,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또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는데, 이것이 뭐하고 같나하면? 개가 와서 나를 물면 개를 차버려야 되지 않겠나? 그런데 개를 차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막 때리면 되겠나? 왜 나를 때리느냔 말이다. 그게 우습지 않은가? 마찬가지다. 악령이 와서 우리의 생각을 어지럽히면 악령과 싸워야지, 왜 자기가 해결을 하려고 그러느냔 말이다. 왜 그런가?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그렇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3) 마귀란 놈은 항상 우리의 약점을 노려 공격해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 자신이 쉽게 빠지는 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게 좋다. 목회자요 임상심리사로 기독교 상담에 큰 기여를 한 윌리암 D.베커스가 쓴 책,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극복하는 비결(죄악 상담 매뉴얼)’(CLC출판사)에서는 많은 부분 우리가 상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의 실상은 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 일곱 가지 죄가 바로 교만, 시기, 분노, 탐욕, 나태, 정욕, 탐식 등이다. 이런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해온다. 나의 약점은 무엇인가? 교만인가? 시기인가? 분노인가? 탐욕인가? 나태인가? 정욕인가? 탐식인가?
저자는 책 서론을 쓰면서 그 제목을 ‘아픈 건가? 악한 건가?’라고 했다. 상담을 해보면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면서 상처를 얘기하지만, 혹시 그것이 악한 죄의 습관 때문이 아닌지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만성적인 분노’ 대신에 ‘우울하다’로 표현하길 좋아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우울하다고 하면 자신이 어려움을 당해서 겪는 감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책임이 없지만, 그것을 분노라고 표현하면 자신이 이겨내고 피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자신의 원하는 것들을 무조건 다 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것이 극히 이기적인 죄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귀는 언제든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에 빠지게 만들 때 그런 약점을 이용해서 공격해 들어오고 우리로 하여금 혼동하게 만들고 죄라고 고백하기 전에 상처라고 말하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생각을 가져다준다. 죄만큼이나 인간의 문제에 긴밀하게 얽혀있는 것도 없다. 그리고 죄가 문제라면 그 해법은 회개와 고백의 기도, 그리고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뿐이다. 약 4:7-8a, “그러므로 하나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물리치십시오. 그리하면 악마는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분별해서 마귀의 공격을 물리치든지, 아니면 자기 죄를 고백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사안별로 맞게 처방해야 한다. 합심기도, 중보기도를 많이 할수록 전도의 효과는 더 크다.
2. 어떤 기도를 드려야 하나?
v18, “온갖 기도와 간구로 언제나 성령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것을 위하여 늘 깨어서 끝까지 참으면서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 이 구절은 우리에게 1) 먼저 기도의 종류를 가르쳐준다. 영어 성경의 이 부분을 보면 ‘온갖(all)’이란 단어가 강조되어 있다. 기도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개인기도, 두 사람 기도, 세 겹줄 기도, 대화식 기도, 릴레이 감사기도, 합심기도, 통성기도, 중보기도, 새벽기도, 정오기도, 철야기도, 하늘문 릴레이 기도, 금식기도, 산기도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기도는 안 좋은 게 없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도를 다 동원하는 게 필요하다. 올해 우리 교회는 사순절 기간에 다니엘 금식기도를 하려고 계획 중이다.
2) 다음은 기도하는 시간을 가르쳐준다. 언제 기도해야 하나? ‘언제나’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초창기 이동통신의 광고문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 기도 역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 길을 갈 때나 일을 할 때나 운전할 때나 설거지할 때나 속으로 언제나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부른다.
3) 또한 기도의 조건,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기도를 할 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마귀는 잠자지 않고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다. 오늘도 마귀는 먹이를 찾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넘어뜨릴 틈과 기회를 노리고 있다. 어제는 성령 충만해서 찬양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다가 오늘은 감정적으로 흔들거리고 넘어지는 성도의 모습을 우리는 왕왕 볼 수 있다. 우리 중의 어떤 사람도 이 마귀의 공격과 유혹에서 예외일 수 없다. 우리는 다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고, 그 전신갑주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 기도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내 힘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성령이 돕는 기도를 하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셨는데,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를 하셨다. 성령에 의존하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상달되고 성령 충만함으로 채워진다.
4) 마지막으로 기도의 자세다.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 ‘깨어서’란 말은 육체의 잠에서 깨라는 뜻도 되겠지만, 더 정확하게 영적인 잠을 깨라는 의미다. 오늘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지 모른다. 영적으로 우리를 어둡게 만들고 잠들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일의 분주함이 우리를 영적으로 어둡게 만든다. 현대사회의 대적은 세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① 시끄러움 ② 조급함 ③ 혼잡함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칼 융은 “조금함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귀이다”라고까지 말했다. 기도와 예배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사는 것은 마귀에게 넘어간 삶이다. 늘 입에 “바쁘다! 바빠!”를 외치다가 하나님 앞에 실패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또한 물질의 염려와 쾌락과 유혹이 우리를 영적인 잠에 빠지게 한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항상 기도할 때 바른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
또 다른 기도의 자세 하나는 ‘끝까지 참으면서’ 기도하는 것이다. 왜 끝까지 참으라고 했을까? 유추해보면, 기도가 속히 응답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응답되기 때문에 응답될 때까지 참으면서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며 사역을 할 때 아무리 기도해도 상대방이 변하지 않고 요지부동일 때 우리는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참 사람이 안 변하네.’하면서 좌절하게 된다. 그럴 때일지라도 다시 한 번 힘을 내어 끝까지 참으면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사랑하며 사역하라는 뜻이다. 이어서 나오는 그 뒤 구절이 ‘모든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십시오.’가 그런 해석을 뒷받침해준다.
3. 어떤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나?
이런 원칙을 가지고 기도할 때 무슨 내용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성경 전반을 통해 여러 가지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의 내용 세 가지를 말씀한다.
1)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구원의 감격을 마음속에 소유한 자라고 해도 규칙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먼저 세움을 받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사람도 도울 수 없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 넘어진 자가 어찌 넘어진 자를 세울 수 있겠나?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자신에게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받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 교회 8대 기도제목 8번째 제목이 ‘주여! 나를 도우소서!’ 이다. 그 내용은 “기도하는 내가 살아야 목장과 교회가 삽니다. 주여! 이런 교회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나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영혼 구원하여 제자 만드는 일에 지치지 않게 하소서. 어떤 사람을 맡기시든지 품을 수 있는 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우리 자신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그럴 때 말씀과 기도로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되고,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은혜를 누리게 된다.
2)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 왜 우리가 여러 성도들, 목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영적전쟁에 함께 부름을 받은 십자가의 군병들, 특전사 대원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적전쟁에 참여할 때 그 전쟁은 혼자의 싸움이 아니다. 우리가 영적인 전쟁의 성격을 이해할 때,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 함께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목장과 교회가 함께 영적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각종 기도회에 적극 참여하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의 몸 중에 한 지체가 상처를 입으면 온 몸이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 중에 한 사람의 상처는 교회의 남은 지체들에게도 큰 아픔과 좌절을 주게 된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체는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기도해주는 게 가장 큰 사랑 표현이다.
어떤 성도들은 특별히 어려운 시험과 위험스런 상황에 놓여있다. 가정의 신앙이 하나 되지 못하여 상처와 눈물로 고통을 당하는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돌아보아야 한다. 특별히 연약한 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이것을 확장하면 vip를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지역사회인 광주시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더 나아가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대통령과 남북관계와 북미정상회담과 비핵화와 경제 안정과 한국교회 개혁과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목장에서 vip 5명의 명단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별일이 아닌 것 같아도 영적인 세계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령께서 마귀의 영향 하에 살고 있던 영혼들을 만지시고 변화시키시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분이시지만, 꼭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미련한 전도를 통해서 이런 일을 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베푼다.
우리가 이렇게 영적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믿음의 담력을 얻게 되고, 생명의 면류관을 쓰게 된다. 약 1:12, “시험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의 참됨이 입증되어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3) 영적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라.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지도자가 서면 교회가 서지만 무너지면 교회가 흔들거리게 된다. 마귀의 주공격목표가 영적지도자이다. 목사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목자 목녀가 무너지면 목장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더 많이 해야 한다. 그들의 건강, 가정, 자녀, 축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고, 능력 있게 사역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을 주시도록’ 두 번째는 ‘담대함을 주시도록’ 바울사도는 기도 부탁을 하고 있다. 말씀을 주시도록 기도해달라는 말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정확하게 깨닫고 바르게 전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흐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해서 가르칠 때 모호하고 애매한 말씀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원래 의도하셨던 그 말씀이 자기의 입을 통해 전해지도록 기도해달라는 것이다. 담대함이라는 것은 많은 지식을 가진 학자 앞에서도, 많은 세력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 앞에서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히 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그리고 담대히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기도하자! 기도는 우리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한다. 기도는 원수마귀의 진을 훼파하고 복음의 빛을 밝히 비추게 해준다. 그리하여 영혼구원 제자 만드는 열매를 많이 맺게 만든다.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자. 이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기도하자. 광주시가 하나님의 통치가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우리 교회를 통해 영적 부흥이 일어나 비신자 전도를 통한 수적 성장이 이뤄지길 기도하자. 기도로 영적 전투를 이겨나가자!
악한 날에 서기 위한 우리의 싸움
에베소서 6:10-18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이미 5:16에서 권면하기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한 데 이어 오늘 본문 13절에서도 "악한 날"이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의 지배 아래 있고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시고 마귀의 시험을 다 이기셨으며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선언하신 바 있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하기 시작했고 그를 믿는 이들은 이미 영원히 복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악한 세월을 살고 있다고 한 것입니까? 마귀의 간계 때문입니다. 그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패배했으면서도 깨끗이 승복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계를 부려 그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놓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육과 세상에 대한 미련의 불씨를 되살리려 하며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의 온갖 것을 다 그리스도인들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삼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러한 마귀의 행태를 경고했습니다.
벧전5:8-9에서 그는 쓰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합니다. 베드로는 마귀를 그리스도인들의 대적이라고 단정합니다. 그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마귀에게 삼키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근신하고 깨어있으며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전쟁이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보통 전쟁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상대로 하거나 특정 국가를 상대로 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합니다. 우리의 싸움상대는 마귀와 그가 지배하는 천지의 악한 세력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 다 진멸될 것들이지만 그때까지는 하나님나라의 훼방꾼들이고 주의 몸 된 교회의 파괴자들로 활동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원수가 되고 그들의 공격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멸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전쟁에 처하게 되고 반드시 이겨야 할 전투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를 믿는 믿음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의 부르심은 곧 이 세상에서는 전사의 삶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는 마귀와 그 악한 세력과의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나라에서의 영원히 복된 날이 약속되어 있지만 그 나라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동안은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악한 날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우리는 전투에 임하기 위하여 무장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하고 완전한 무장을 하나님께서 다 예비하셨으며 그것을 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을 받고 그의 몸이 되며 그의 제자가 되고 그의 군사가 되는 이들이 싸울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된 전쟁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는 동안에는 숱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전쟁에서는 이기더라고 여러 전투에서는 지는 수도 있습니다. 전투에서 지는 것은 상대보다 사상자가 더 많은 것입니다. 아무리 최종승리가 보장된 전쟁이라 할지라도 가능하면 모든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가능한 한 사상자를 적게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온 국민이 누린다 해도 상훈을 받는 기쁨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몫입니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당당한 승리의 영예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숙지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마귀에게 삼키지 않고 승리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할 교인들에게 강건하여지라고 권면합니다. 어떻게 해야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먼저 "주 안에서 강건하여지라." 하고는 곧 이어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덧붙여 말합니다(본문 10절). 그의 힘의 능력이란 어떤 것입니까? 앞선 1:20-22에서 보았듯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서 오르시어 아버지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는 것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고 그의 확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강건해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성을 설명합니다. 본문 11절과 13절을 봅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전신 갑주를 입으라"는 것은 온 몸을 빈틈없이 방어하라는 것입니다. 운동경기이건 정치건 사업경쟁이건 모든 싸움에 있어서 싸우는 이들은 상대방의 약점을 노리는 것처럼 마귀도 항상 그가 넘어뜨리려고 하는 자들의 약점을 파고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디 한 군데라도 약점을 보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해야 하는 이유를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합니다. "대적한다"는 말을 달리 하면 "맞서 싸운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맞서 싸운다"는 것은 싸움에서 쓰러지지 않고 계속 서있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는 것은 싸움을 다 싸우고 난 후에도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서 있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최후승리자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는 끝까지 서있는 군사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달려드는 모든 적을 쓰러뜨리고 자기는 서서 아군의 깃발을 꽂는 사람이 승리자인 것입니다. 능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까이서 달려드는 적의 칼에도 쓰러지지 않고 멀리서 저격수가 쏘는 화살도 막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취하라고 하시는 전신갑주가 있으니 그것으로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할 필요성을 설명한 사도 바울은 본문 14절 이하에서 그 구성요소를 하나하나 언급합니다. 먼저 14절에서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 합니다. "허리 띠"는 옷과 몸이, 또 상의와 하의가 따로 놀지 않고 몸에 딱 붙게 해주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의 가죽 띠는 허리 아래 하복부를 보호해주는 호구이기도 하고 칼을 찰 수 있게 해주는 장비이기도 합니다. 몸에 힘을 줄 수 있게 해주고 자유롭고 민첩하게 동작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허리 띠입니다.
또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 하는데 "호심경"이란 가슴막이를 말합니다. 심장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손이나 발과 달리 심장에 칼이나 활을 맞으면 치명적이기 때문에 호심경을 붙여야 합니다. 그런데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는 것입니다. 입니다. 여기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루신 하나님의 의이며 우리가 믿음으로 거저 얻는 의입니다. 사실 그 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그 믿음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라는 그 믿음이 마귀와의 영적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라는 말입니다.
다음 15절에서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 합니다. 여기서 "신"이라 하면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튼튼한 가죽 샌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신발은 전투에서 군인들에게 안정감을 주며 발을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들고 있어도 맨발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는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가장 효과적이고 실질적인 사탄과의 대결은 평화의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인 전도를 통해서나 말없는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해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보다 마귀가 싫어하는 것은 없으며, 그것보다도 더 마귀의 영토를 좁혀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에 좋은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 16절에서는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로마병정들의 방패는 전신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컸습니다. 크기 때문에 나무로 만들고 가죽을 씌웠으며 위 끝과 아래 끝을 쇠로 고정시켰습니다. 전투 전에 이 방패를 물에 담갔다가 사용하면 불화살의 공격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불화살 공격과 같은 무시무시하게 위협적인 마귀의 모든 공세를 소멸시킬 수 있는 방패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또 17절에서는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합니다.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장비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써야 할 투구는 구원의 투구라는 것입니다.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우리의 안전과 승리의 가장 확실한 보장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완수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최고의 무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무장에서 유일하게 공격적인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방어를 아무리 잘 해도 적을 결정적으로 꺾어놓지 않으면 적은 언제라도 다시 공격을 해올 것입니다. 마귀와 악한 세상의 집요한 공격에 대한 최선의 방어는 공격인데 그 공격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언제나 마귀의 공격을 유발시키며 그 끈질긴 공격에 마침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이 사용한 검은 육박전에 맞춰 신속하게 상대방의 급소를 찌를 수 있도록 짧게 만들어졌습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단숨에 이길 수 있는 최선책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실 때마다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수요소는 기도입니다. 18절을 봅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그리스도인의 전술 중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기도일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원군을 요청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권면대로 우리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쓴다면 마귀는 아예 우리와 싸울 생각을 포기하고 도망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는 말로 권면을 마칩니다.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전투에서 우리 부대는 건재하다 해도 옆의 부대가 궤멸을 당하면 그 위협이 곧 우리 부대에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른 아군 부대들도 건재하기를 빌며 연락을 긴밀히 하고 상호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협력을 긴밀히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기도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할 일입니다. 같은 교회의 교우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웃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다른 교단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이웃나라들의 교회를 위해서도 기도하며,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그 지배세력이 일으키는 영적 전쟁은 글로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교회가 쇠퇴하고 죽어가는 것을 남의 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래 된 서구의 교회들을 먼저 다 무너뜨리고 나면 마귀는 다시 그 총력을 기울여 신흥 교회들인 아시아와 남미와 아프리카의 교회들을 공격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마귀의 새로운 집중공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고 정신 차려야 합니다. 서구교회는 이미 전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전력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마귀는 이제 한국교회를 향해 포화를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곧 항복의 깃발을 들고 말 것 같던 서구교회가, 아니 항복의 깃발조차 들 힘이 없이 숨을 헐떡거리던 서구교회가 다시 회생하고 전열을 가다듬어 마귀의 대공세에 밀리고 있는 우리의 힘겨운 싸움에 합류하여 마귀의 공격력을 분산시켜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전 세계의 기독교가 다시 일어서고 연합하여 마귀의 발악적인 공세에 대반격을 펼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어차피 이길 전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모든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선언하셨습니다. 마귀는 자신의 종국적인 패배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숨기고 자기의 수하들을 계속 독려하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전투를 벌이게 합니다. 마치 일본의 왕이 맥아더 장군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방 일선에서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일본병사들이 죽기로 항전한 것과 같습니다. 패퇴하면서도 한 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겠다고 발악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에게 승전은 기정사실화되었지만 그러나 마귀의 졸개들이 벌이는 모든 전투에서도 다 이기는 영광의 승리자들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승전국의 병사들이 패전국의 병사들과의 전투에서 밀리고 포로가 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쪽 팔이나 한쪽 다리 잃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지 않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보무당당하게 주님의 승전 퍼레이드 가운데 서야 하겠습니다.
주 인
엡 6:10-18 / 조용기 목사
우주 만물과 시간의 주인은 우리가 섬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일의 선악은 하나님만이 결정하시며, 모든 존재의 선악에 대한 판단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선악이라는 것은 좋고 나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악이라고 하니까 모를 사람 있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모든 일의 좋고 나쁜 것은 하나님이 결정 하시고, 모든 존재에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판단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지음받은 존재로서, 우주 내의 좋고 나쁜 것을 결정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들어 섬기는 사람인 것입니다. 선악의 의견을 내어 놓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은 그게 좋다고 하시지만 우리 보기에는 나빠요. 하나님 나쁘다고 해도 우리 보기에는 좋아요.’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동등한 자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선악은 하나님만 결정하는데 사람이 선악을 결정 내리려고 하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를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어디서 생겨났는가? 그걸 묻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마귀가 어쩌다가 마귀가 되었으며 어떻게 해서 마귀가 존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에 분명히 설명해 주지 않기 때문에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예배에서 마귀에 존재에 대한 일을 추상적으로 여러분에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마귀
마귀는 본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천한 천사장으로 지음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동기로 탐욕이 들어와 부패해지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도전하여 자기가 ‘좋다, 나쁘다’를 선택하고 결정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선악 결정에 도전한고로 하나님 앞에서 반역자가 되고 쫓겨나 마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의 반역에 가담한 천사들도 악한 영이나 귀신이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보면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 세계 중간에 공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하고 우리 인생이 사는 이 세상하고 중간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가 존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 공중에서 막아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내려오는 것도 공중에서 막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하는데 20일 동안 그 기도가 응답되지 못하도록 공중에서 막았어요. 그래서 다니엘이 응답을 가지고 오는 천사가 20일 동안 마귀의 세력에게 공중에서 대결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더 강한 천사를 보내어서 도와주어서 다니엘에게 응답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하면 공중의 권세 잡은 마귀의 저항을 뚫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 응답이 힘이 되는 이유가 그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보기에 참 좋았더라’고 했는데 유독 공중을 지으시고는 좋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나중에 사탄과 귀신들의 유배지로 당분간 사용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좋다고 말 안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빛을 짓고 동식물을 다 짓고 사람을 만들고 그런데 지었을 때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했는데, 궁창을 지었을 때 공중을 지으시고는 좋다는 말 안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사탄이 어느 정도 정한 날짜까지 유배되어서 사탄들이 떼를 지어서 공중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6절로 8절로 보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좋더라는 말은 없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장대한 우주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궁창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추정해서 성경을 해석하면 인간세계와 하나님의 세계 사이에 있는 공중이 마귀가 점령하고 있는 처소인 것입니다.
우주에 물이 60% 이상 물로 되어 있는데 물도 아랫물,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물하고 궁창 위에 있는 물하고 갈라져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에 물로써 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존재를 알고 나면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하나님 하시는 일을 훼방 놓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받아 세상을 다스리도록 한 아담과 하와를 꾀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만드는 그것이 마귀가 집중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슴이 어디에서 제일 아프냐?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하나님이 그것이 제일 가슴이 아픕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자식하고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원수가 되면 부모의 가슴이 제일 아픕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의 배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마귀가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의 역사로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세상에 있는 불의와 추악 등 모든 죄의 배후에 반드시 사탄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 배후에 사탄이 있어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언제든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여러분 우리를 유혹해서 하나님과 대결 시키려고 온갖 애를 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의 세계를 알아야 우리가 성공적인 신앙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들어와서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한 사람 속에 군대 마귀가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 군대 마귀를 사람에게서 쫓아내니, 이 마귀가 사람에게서 나가서 2천마리 돼지떼를 점령해서 모두 다 갈릴리 호수에 들어가 빠져 죽도록 한 기사가 있습니다.
마귀가 하나가 들어오는 게 아니라 무리를 이뤄 들어와 한 사람이 그런 인격을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보더라도 어떤 사람 속에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이 들어와서 인격을 형태를 나타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야, 너는 네 이외에 두 사람이나 되는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돼서 그러느냐?”, “마귀가 들어와서 그렇다.”
여러분, 가룟 유다가 자기 생각으로 예수님을 판 것 아닙니다. 성경에 가룟 유다가 마귀에게 자기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팔기로 작전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는 자기가 예수님을 판 것이 아니라 마귀가 들어와서 예수님을 팔도록 한 것입니다.
사탄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음에 들어가서 탐심을 일으켜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속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 재산을 팔아서 그 재산의 일부는 숨겨놓고, 일부만 가지고 나와서 베드로에게 내놓았었습니다. 그러니 성령이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너희 전 재산 손에 쥐고 있어도 다 네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께 바쳐도 네 것인데 왜 거짓말을 하느냐?”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내 있는 재산 중에 얼마를 하나님께 드립니다.”라고 해도 장한 일인데, 재산을 좀 감추어놓고 얼마를 가지고 나와서 “이것이 우리 재산의 전부 다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그 자리에서 벌해서 죽게 한 것입니다. 이것 자기 재산을 내놓은 다음에하나님을 속이려고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성령님의 진노를 사서 죽게 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얼마만 가지고 왔을 때,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사도행전 5장 3절)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마귀가 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마음에 아주 들락날락하는 귀신이 재산을 숨겨서 하나님께 드리고 칭찬받으려고 하다가 벌을 받아 죽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에게 에덴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영이 즉시 죽고, 영적인 존재가 육의 존재로 변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속사람은 영이 살아서 육체 속에서 있었는데, 육체 속에 있는 영이 죄를 지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사탄이 그 육체 속에 들어와서 살게 됐습니다. 온 세상이 사탄의 천지가 되고, 사람들은 자유와 독립성이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와서 직접 사람을 운전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은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비극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보면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3. 타락의 결과 다가온 심판
타락을 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명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 그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19절)
오늘날 우리 살아가는 환경에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고 괴로운 것은 땅이 저주 받아 사람이 피땀을 흘리고 살도록 만들어 놓고 만 것입니다. 여성은 어린 아기를 임신하고 해산하는 큰 고통을 더하도록 주님께서 명령한 것입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애기 낳을 필요가 어디 있냐? 결혼을 안 하든지, 하더라도 애기는 없이 살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지 인구가 줄어들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서 걱정을 하고 있는 바 있습니다. 아담은 먹고 살기에 땀을 흘리고 고생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한 땅에서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지으심을 받았으나, 죄를 지음으로 마귀의 종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인간의 실상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로마서 7장 14~15절)
이중인격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기도 살고 있는데 마귀가 들어와서 이중인격자가 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빚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그것을 속량이라고 하는데,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죽임을 당했을 때, 죄의 종이 되어서 사탄의 종으로 있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 앞에 죄 지은 값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 때문에 그 죄를 짊어 졌거든요. ‘예수 죽음 내 죽음, 나의 죄를 예수님이 짊어져서 죽었다.’ 그 말을 속량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속량의 죽음을 당하시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므로, 우리가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중인격 속에서 안 살아도 됩니다. 마귀가 우리를 점령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마귀에 속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바뀌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마귀의 종 된 삶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이 바뀐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장 20절)
우리는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단호하게 마귀를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이 되었을 때는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인격, 사탄의 인격, 이중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사람들이 모두 다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게 만들었으니깐, 이제 사탄은 우리에게 들어올 처소가 없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예수님이 죽음으로 죄의 세계를 청산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예배 받는 이 자리에는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어 같이 있지, 사탄이 주인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사탄이 주인이 아니므로 사탄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단호하게 예수님 이름으로 대적해야 될 것입니다.
4. 세상의 임금 된 마귀
세상의 임금 노릇을 예수님 오시기 전에는 마귀가 한 것입니다. 악한 원수,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 마귀가 우리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절로 11절에 보면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완전무장을 하고 이제 사탄에 대적을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지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리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으로 경쟁을 하고 살아가는데 사람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탄이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이 우리의 원수가 되어서 우리가 싸워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혈과 육이라는 것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 된 사람. 영은 죽었고 혈과 육으로 사는데, 이제 혈과 육이 우리의 원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혈과 육을 통해서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마귀와 대적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 마귀들이 통치를 하고, 권세를 행하고, 어두운 세상에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영이기 때문에, 그 사탄과 싸우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무장을 하셔야 되는데, 에베소서 6장 14절로 18절에 보면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허리를 굽혀서 많은 위증을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공부하고 당당하게 진리로 허리띠를 띄어야 합니다.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라고 했는데 의의 호심경을 가슴에 달아 방탄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약속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히 무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로써 대결하고, 말씀으로써 대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마귀를 대적해서 싸우면 이길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를 가진 사람은 날마다 우리를 공격하는 걱정, 염려되는 불화살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태복음 6장 24~2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종이 되면, 먹고 사는데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탄의 종으로 있을 때는, 의식주 생활에 걱정을 하고 염려를 했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 문제는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태복음 6장 31~32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섬기고 살아가면, 우리 손과 발로 행하는 모든 행위에 축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안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은 사탄의 계획에 빠져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주님께서 우리 주인이 되시는데 자기를 섬기는 종들을 돌보지 못한 주인은 주인의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다스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이유는, 우리를 마귀에서 건지기 위해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몸 찢고 피를 흘려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믿음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먹고, 입고, 사는 근본적인 생활도 책임지지 못 한다면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귀를 물리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고 암송하면, 마귀가 유혹해올 때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에게 협박공갈을 하고, 두려움을 가져올지라도, 성경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대적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가 “너는 버림받았다. 너는 크게 낭패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너희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면 나도 너희 가운데 있겠노라. 사탄아! 너희가 거짓말 못 한다. 하나님 말씀에 써있다. 물러가라!”고 선포하면 마귀는 물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칼보다도 날카로워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기까지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가지고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8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기도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주 무기인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대적하고, 기도로써 대결하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를 했기 때문에 전쟁을 해 본 경험이 없습니다. 반면에 아말렉은 호전적이고 전쟁 경험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하고 아말렉하고 광야에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터를 내려다보는 높은 산 고개에 모세가 가서 여호수아가 산 아래 싸우고 있는데, 두 손을 들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겨요. 그러나 팔이 아파서 팔을 내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져요. 그래서 모세가 팔을 늘 들고 있을 수 있도록 하려고 그에게 돌을 가지고 와서 앉게 하고, 그 양 팔을 한쪽에는 이쪽 팔, 모세의 팔을 들어주었어요. 그러니깐 앉아서 보조를 받고 손을 들고 있으니깐 이스라엘 백성이 싸워서 완전히 아말렉을 멸망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한 모범으로 보여준 것인데, 우리가 혼자 기도를 하면 지쳐서 기도를 그치기 때문에 마귀에게 습격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이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고, 과로를 해도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서 “주여, 주여, 주여”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그 능력이 전쟁터에 나타나서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다리가 저리고 아파서 기도를 그치면 도로 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기도는 대단히 효과가 큽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북한이 언제 전쟁의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처지에 있고,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를 위해서 온 국민이 긴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이럴 때 모세처럼 기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해요. 우리는 정말 정신을 차리고 공산주의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열심히 기도해서 아말렉과 같은 원수를 정복하고 나가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안 있으면 잡혀서 심판을 받고 죽게 됐는데,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시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영적인 힘이 있어야 되는데, 그 힘은 기도함으로 밖에 가질 수가 없습니다. 동산에 제자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마귀의 혼돈의 영에 빠져서 다 잠을 자고, 예수님 혼자 기도하시는데 얼마나 집중적인 기도를 했던지 땀투성이가 되고, 나중에는 땀구멍으로 피가 솟아났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온 세상 죄를 짊어지고 대속의 제물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다 자고 있었는데, 그걸 보시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가복음 14장 37~38절)라고 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는 기도라는 무기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이것은 우리가 승리하고 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마귀를 대적하는 무기로써,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대단한 권세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안에 있으면서 크게 발전한 것은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외국 교회들은 모이기는 모이는데, “주여, 주여, 주여” 세 번 부르고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삶과 동등하게 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든지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주인이신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 세상 우주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결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 이유는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든지 만든 사람이 주인이고, 그것을 만든 사람이 물건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신 것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 값을 주시고 샀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 23절에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 주고 샀기 때문에, 산 사람이 주인이지, 구경꾼이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만들어 주셨으니 하나님 것이요, 보혈로 값 주고 사셨으니 하나님 것이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마음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집’에 비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4절로 26절에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속에 일곱 마리 귀신이 들어가 있으니, 한 사람 속에 일곱 귀신 인격자가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정신이 복잡하고 어렵습니까? 우리는 죄의 주인이 죄가 우리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므로, 하나님께 꽉 붙잡혀 있어야 평안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주인이 되어 있으면 그 삶은 결국 파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문에 성령으로 무장하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항상 원수를 쫓아내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의 주인인가?” 주님이 우리의 주인인 것입니다. 주인이면 그 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적은 원수마귀입니다. 원수마귀를 끝까지 쫓아내고 주님의 은총으로 매일매일 충만한 생활을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면역력
엡 6:10-18 / 김중곤 목사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창1:27)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의 몸은 신비 그자체입니다. 우리 몸은 보이는 몸과 보이지 않는 영으로 구성되어 있고, 몸의 각각 다른 기능들이 조화를 이루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생명을 유지시킵니다. 이들 중 어느 하나에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곧바로 신호를 보내 이상을 알 수 있게 하고, 외부로부터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하거나 이를 인식하고 저항할 수 있는 ‘면역체계’(免疫體系; immune system)가 갖추어져 있기도 합니다.
‘면역체계’(免疫體系; immune system)는 세균의 감염이나 질병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는 면역반응에 관여하는 장기, 조직, 세포, 체액의 생체시스템입니다.
본문에‘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하였는데, 우리 몸을 모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는‘면역체계’가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면역체계에서 ‘면역’(免疫; immunity)은 면역시스템이 전제된 생물이 감염이나 질병으로부터 대항하여 병원균을 죽이거나 무력화하는 작용, 또는 그 상태로, 우리 몸에 해로운 미생물이 침입하는 것을 막아내는 방어 능력을 말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 면역’(자연 면역 또는 자연 치유력)과 감염이나 예방 접종 등을 통해 얻는 ‘후천 면역’(획득 면역)으로 분류합니다.
‘면역력’(免疫力; level of immunity)은 외부에서 들어온 병원균에 저항하는 힘을 말하는데, 암 세포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은 충분히 이결 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몸에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면역 체계를 만들어 두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 면역력이 약하고 기능에 이상이 생기면 몸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우한 폐렴’으로 알려진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한 재난이 발생하면서 사람들의 공포가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많은 노인이나 지병이 있는 사람들의 사망자 수가 많다는 것은 노인이나 지병이 있는 사람들의 면역력이 약해져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몸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면역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면역력 역시, 육체의 면역력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고, 영육간의 면역력은 우리에게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영육간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육체의 면역력을 향상 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적인 면역력 또한 향상 시켜야 합니다.
같은 환경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지내는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에 비해 유난히도 감기에 자주 걸리고 잔병치레로 고생하는 것을 보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면역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은 쉽게 질병에 걸리지 않고, 걸려도 빠르게 회복되는 반면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질병에 노출되기 쉽고 회복되는 기간도 더딥니다. 우리 몸의 면역력이 약화되면 각종 질병을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에 쉽게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는데,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에게 발생하는 가장 흔한 질병이 감기입니다.
감기 바이러스는 면역력이 떨어져 저항력이 약한 사람에게 침투하여 그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일반 감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반 감기 치료는 ‘약을 먹으면 일주일이요, 안 먹으면 칠일’이라는 웃기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감기약은 먹으나 안 먹으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감기가 낫지 않고 악화 되면 폐렴이 되고, 심각한 패혈증을 유발하기도 하여 사망에 이르기도 합니다.
같은 감기가 이처럼 상반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바로 우리 몸속에 있는 면역체계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는 혈액이 흐르는데, 혈액의 성분 크게 ‘혈구’(血球; blood corpuscle)와 ‘혈장’으로 나누어지며, ‘혈구’는 전체 혈액의 약 45%를 차지하는데, ‘적혈구’, ‘백혈구’ 및 ‘혈소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백혈구’(白血球; Leukocyte)는 외부에서 몸 안으로 침투한 세균성 바이러스를 퇴치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백혈구가 하는 일들이 세분화되어 있는데 면역체계가 공격을 받으면 강력한 전쟁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백혈구의 수가 증가하게 되어 몸 안에 침투한 병원균을 물리쳐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이유 없이 지나치게 백혈구가 많이 증가하면 백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적혈구’(赤血球; red blood cell)가 하는 일도 중요한데, 적혈구는 온 몸 구석구석 모세혈관까지 산소를 공급하는가 하면 이산화탄소를 외부로 내 보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적혈구가 모자라거나 그 기능이 떨어지면 빈혈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혈소판’(血小板; blood platelet)은 혈관이 손상되어 출혈이 생기면 혈액의 응고와 지혈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혈소판입니다. 그래서 혈소판이 부족하면 출혈이나 멍이 들고 코피가 잘 터진다고 합니다.
또한‘혈장’(血漿; blood plasma)은 혈액 부피의 약 55%를 차지하며, 대부분이 물(부피의 92%)이며, 대표적인 기능은 영양소나 호르몬, 항체 및 노폐물의 운반과 체온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 안에 흐르는 혈액에 있는 백혈구와 적혈구, 혈소판과 혈장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데, 그중에 백혈구와 적혈구 등이, 우리 몸에 필요한 만큼 충분치 못하면 결국은 면역력이 저하되는 원인이 됩니다. 물론 면역력의 저하는 혈액 뿐 아니라 불규칙한 식습관이나 무리한 생활, 수면 부족 등 다양한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리하게 지나친 운동이나 힘든 일을 하면 피곤하게 되고,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질병에 노출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19가 처음에는 감기 증상을 보이며 열이 나다가 급격하게 합병증을 일으키는데 그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폐렴증상이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갑자기 이와 같은 질병에 걸리면 우울, 불안, 공포, 짜증 등 심리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영육 간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어 결국은 영육간의 생활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우리 몸의 건강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고, 자신의 몸에 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며,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서 관련된 음식물을 섭취해야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피해야할 음식과 꼭 필요한 음식들을 잘 분별하여 섭취해야 건강을 유지 할 수 있습니다. 적당한 위생관리와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착용하여 전염경로를 철저히 차단하여, 질병을 전파시키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고,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력을 키우려면 우리 몸에 필요한 음식물을 섭취해야 하듯이, 영적인 면역력도 영의 양식인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아드리고 우리 삶에 적용할 때, 영적인 면역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몸의 건강을 지키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충분한 휴식과 숙면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잠을 자는 사이에 몸속에서 나오는 호르몬은 대표적으로 성장 호르몬으로, 이 성장호르몬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한테서만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른들도 잠을 자는 동안 성장호르몬이 분비되어 온몸의 조직을 새로이 교체하고, 손상된 세포를 복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숙면은 우리 몸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면역 시스템을 튼튼히 하는 소중한 시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되도록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과 같이 근심과 걱정을 주님께 맡기고, 잠시 피곤한 삶을 숙면과 휴식으로 몸과 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우리 몸의 신체적인 면역력 이외에 우리의 영적인 면역력이 약해지면, 우리의 영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바이러스가 침투하여 영적인 상태를 공격할 때, 방어할 면역력이 약하면 즉시 영적침체에 빠지고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영적인 면역력 증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면역력을 증대하려면 우리의 체질과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 면역력을 높이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영적인 생활습관’이 중요합니다.
영적 면역력을 키우기 위한‘영적인 생활습관’이 ‘말씀과 기도와 예배’입니다. 그중에 예배는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감사와 성도의 교제와 축복을 포함하기 때문에 믿음의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 면역력을 키우지 않으면 언제든지 영적인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 뿐 아니라 매일의 말씀 묵상과 기도생활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몸의 면역력이 강하면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도 영적 면역력 체계가 잘 갖추어지면 사탄의 공격이나 세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에 바로설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이든 고칠 수 있는 약을‘만병통치약’이라고 부릅니다.
의학이 발달하면서 ‘언젠가는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만병통치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약에는 그에 따른 부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만병통치약’은 면역력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몸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사람의 몸을 연구하면서 면역력을 담당하는 세포들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이 세포들이 제대로 활성화만 되면 암도 물리칠 만큼 강력하고 부작용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면역력들은 치매나, 혈관질환까지 고칠 수 있는 ‘만병통치약’으로 알려 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주님께서 동행하시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은 죄의 바이러스가 가득한 세상에서 능히 믿음의 면역력으로 승리하고 성령 충만하여, 기쁨이 넘치는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라도 누구나 다 질병에 대한 크고 작은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자신이 질병으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욱 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클 것입니다.
인간의 속성은 지난날에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망각하면서 살지만 몸의 질병에 관한 한 예민해서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이 아프면 자신의 건강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음을 절감하게 되고, 그에 따라서 모든 것이 귀찮고 힘들어 지기에 그 사람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건강을 되찾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 몸의 면역력을 위해 예방하고 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람인 우리도 영적인 면역력에 대해 그 경각심을 갖는 것은 중요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중권세를 잡은 원수 마귀가 뿌린 악한 죄의 바이러스가 우리 영 안에 침투하기 위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영적 면역력을 갖추지 않으면 지금도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신천지와 같은 이단의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적당한 운동을 할 때, 우리 몸에 면역력이 생기듯,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영적 면역력이 강한 믿음의 성도가 되어 어떤 악한 죄의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데 게으르지 말고 예배와 기도로 영적 면역력을 키워 주님을 끝까지 섬기는 강건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몸의 백혈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으로 우리 영에 강력한 영적 면역체계가 갖추어지면 사탄의 유혹과 세상의 어떠한 영적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바로설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설 때,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들을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고, 책망하고 바로잡으며 의로 교훈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든든한 영적 면역력으로 무장하여 사탄과 악한 죄의 바이러스와 효과적으로 싸워 승리하면, 예수님 오실 때, 주님으로부터 잘했다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엡6:12-17절에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의 영적 싸움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권세와 세상의 어둠을 주관 하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으로는 상대 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악한 영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영적 면역력을 키우지 않으면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기도를 통해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영적 면역력을 키움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악한 영들을 싸워 물리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도,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악한 질병이 괴롭히고 힘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창조하신 면역력을 키우며 살아간다면, 어떤 악한 질병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벧전4:12-13절에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불 시험과 같은 재난을 당한다 해도, 믿음으로 우리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면역력과 같은 능력으로 싸워 끝내는 승리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인 봄을 맞이려하면(영적 전쟁)
엡 6:10-17 / 윤삼중 목사
우리나라는 일제 36년의 비극과 아픔의 역사를 안고 있습니다. 36년 동안 나라의 주권을 잃어버리고, 백성들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였고, 인권이 말살되는 심한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이 비극과 아픔을 해결하고, 사랑하는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하여 3.1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은 자유와 해방을 선언하며, 총과 칼을 무서워하지 않고 비폭력주의를 추구하며, 나라와 민족의 독립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생명을 받쳐 싸웠기 때문에 이 땅에 대한민국 만세라는 해방의 봄이 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 곁에 추운 겨울을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연약하게 보이는 봄이 추운 겨울을 이길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추운 겨울도 봄에게 추방되어 만물이 소생하게 되었고,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세상을 탄생시켰습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들이 해동을 하고, 잠자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며, 모든 생명들이 싹을 틔우며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 봄이 왔습니다. 봄은 시작을 알리는 계절임과 동시에 약동과 소생, 회복과 부활, 희망과 소망을 상징하는 계절의 여왕입니다. 자연계의 봄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절의 봄은 여인들의 옷을 타고 찾아오지만 신앙의 봄은 부활의 영을 타고 교회를 통해 들어옵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영적인 계절은 다르겠지만 분명히 지금은 영적인 봄날입니다(고후6:2). 우리가 영적인 봄을 맞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죄악과 세상에 살면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사방 곳곳에 적들이 우리를 둘러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치열한 공격과 각종 유혹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역사적 배경은 바울은 로마 시민으로서의 그의 권리를 행사하여 가이사에게 호소하였으므로 마침내 로마에 보내졌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것은 아마도 A.D. 61년 봄이었을 것이며, 거기서 2년간 그는 죄수의 몸으로 머물렀습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편지가 기록된 시기는 A.D. 62년 쯤일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사도가 가이사랴에서 투옥되어 있는 동안 기록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으나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증거가 훨씬 더 강합니다. 이 편지를 기록할 때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엡3:1) 그러나 로마에서의 그의 구금(拘禁) 형편이 그의 편지들을 기록하기에 훨씬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행28:16) 바울이 이 편지를 기록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는 시기이며, 그가 주고자 하는 내용은 박해와 각종 유혹 가운데 사단의 간계를 인식하고, 보라는 것입니다. 잔인무도한 폭군 네로가 당시 황제였고, 방종과 사치와 살상이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핍박으로 성도들이 심히 어려운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환란과 핍박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성도들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종말로" "마지막으로", "결론적으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의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시기하여 빼앗으려는 그리스도인의 적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 {대적}으로부터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지키는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전쟁에서 이길 무장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영적 전쟁에서의 승리의 비결을 세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강건하라"는 것입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라"고 했습니다(10절). 둘째, 보이지 않는 적인 사단(마귀)을 대적하라는 것입니다.(11절-12절) 셋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라는 것입니다.(13-2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말세지말에 살고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제 때가 얼마 남지 않을 것을 알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허리띠를 풀고 무장해제한 상태에 있으면 마귀에게 삼키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쉬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과 죄와 싸우는 전투생활입니다. 정신이 차리고 영적으로 긴장하며, 마귀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가오는 사단의 간계가 무엇입니까? 또한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는 사단의 간계를 알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영적전투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싸울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제도도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는 혈기가 나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시기, 질투합니다. 우리가 진정 싸울 것은 악한 사탄과 그를 따르는 악한 영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이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하고, 전략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면 누구의 간계를 알아야 합니까? 사단의 간계를 알아야 합니다. 11절에 보면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지금도 한국에서 보이스 피싱 사기(Phising fraud)가 급증하고 있다고 합니다. 검찰, 우체국, 금융 회사를 사칭하여 전화나 문자 메시지로 사기 사건이 일어나는데 지난 몇 년간 보이스 피싱 피해 사건이 4만 2천건에 달하고 피해 규모는 무려 4,380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돈 뿐 아니라 사람을 잘못 만나서 인생 사기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불쌍하고 참담한 것은 사단에게 속임을 당하여 영혼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단은 속임수와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사단이 온 것은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로 그가 1년 6개월을 머물렀던 애정이 깊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가운데 여러 파벌이 생기더니 이제는 어떤 큰 죄를 저지른 교인을 징계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단의 교묘한 궤계를 조심해야 한다고 하면서 고린도교회에 두 번째로 편지를 보냈습니다(고후2:6-11). 성도들이 사단의 궤계를 궤뚫어 알지 못한다면 사단의 포로로 잡힐 수 있습니다.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사5:1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단의 궤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이요, 거짓으로 위장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사단은 전면에 등장하지 아니하고 배후에서 교묘하게 사람들간의 분쟁을 일으키며, 서로에 대하여 시기와 질투심에 빠져들게 만들며, 마음의 벽을 쌓게 만들며, 인간의 자존심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하도록 유혹합니다. 그 세계를 영적으로 보지 못하면 결국에는 사람과의 싸움으로 상처를 주고 받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원수처럼 지내게 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간계가 무엇입니까? 사단은 하나님이 명하신 땅으로 와서 아담과 하와에게 거짓으로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직접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는 따먹어도 좋으나 선악과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은즉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매 그의 여자인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뱀의 간계가 하와에게 시작됩니다. 이 뱀이 첫번째로 사용한 전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들은 아담에게 가지 않고 그의 아내 하와에게 갔던 것입니다. 하와는 성격이 보수적인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갔고 또 직접 하나님에게 듣지 못하여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사단이 하와에게 말을 건네는 첫번째 유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이 질문은 하나님은 독재자요, 사람에게 갑질하는 나쁜 신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달콤한 유도는 네가 이 실과를 따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고 그의 마음을 부추겼습니다. 그때에 하와가 침착하지 못하였고, 사단이 던지는 질문에 그의 마음속에서는 선과 악의 대립이 치열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단의 말을 따라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영원한 죄인으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단은 인간의 지성을 부추기거나 감정을 분노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사단의 간계는 크게 3가지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환란과 핍박을 통하여 사람들을 두려움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강한 핍박과 고난으로 인하여 교회를 떠나게 만들거나 하나님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둘째, 달콤한 거짓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돈이 최고이다는 것으로 유혹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최고의 행복이다고 유혹하며, 세상 부귀영화가 인생의 성공이다고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많은 그리스도인이 넘어지며, 영혼이 망하게 됩니다. 셋째, 인간의 마음을 높아지게 만들어 교만의 늪에 빠져들게 유혹합니다. 반면에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과 낙심에 빠져들게 만들어 우울증 환자가 되게 하거나 자살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단의 간계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마틴 루터가 은혜를 받아 옛날의 죄를 다 회개하고 종교 개혁 사역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이 와서 자꾸 전에 지은 죄를 생각나게 하고 죄인됨을 고발합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찾아와서 "위선 떨지마" 하고 속삭이고, 벽에다가는 옛날에 지은 죄를 가득 써놓고 "이렇게 죄가 많은데 너같은 죄인이 어떻게 종교를 개혁한다고 하느냐" 하면서 고발했습니다. 그것은 용기를 죽이려는 사탄의 계략입니다. 이에 루터는 "그 죄들은 이미 사함 받은 죄들이다"하고 외쳤습니다. 그래도 사탄이 끈질기게 달라붙자 잉크병을 집어 사탄의 머리에 던졌습니다. 그때 잉크병이 벽에 맞고 깨지면서 써 놓은 죄들을 모두 지워 버렸습니다. 그것을 보고 루터는 "지난날의 죄를 잊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말합니다. 사탄은 종교를 개혁하려는 그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것입니다. 사단의 간계는 매우 교묘하며, 우리의 마음과 환경을 통하여 각종 방법으로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어떤 문제나 사건 뒤에는 사단의 간계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내면을 깊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단의 간계는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사단의 간계는 성령의 지혜와 능력으로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아, 물러가라” 강력하게 선포할 때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게 될 것입니다.
2. 우리의 주적은 사람이나 환경이 아니라 악한 사단입니다.
이 당시에 네로황제의 폭정과 핍박에 대항하여 우리도 당하기도 하지 말고, 힘과 군사력과 강한 정치력을 키우자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시내의 화제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고 기독교를 이렇게 핍박하는데 왜 우리는 참고 인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인가? 더 이상을 우리도 참을 수가 없다고 분개하였을 것입니다. 로마정권과 싸워서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 악한 영들에게 대한 싸움이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로마정권이 우리의 주적이 아니라 악한 마귀이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의 주적이 누구입니까? 전쟁에서 주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 열심히 싸운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누구와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까?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싸움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나 세상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요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악하고 교활하고 집요합니다. 의인을 넘어지게 하고 사회를 파괴하며 인류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의도와 간교는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탄 앞에서 우리 스스로 강할 수는 없고, 우리 스스로의 준비 가지고는 지혜와 능력으로는 그를 대항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10-11절에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주안에서” 를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건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풀어 놓은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전신갑주로 온 몸을 빈틈없이 감싸주고 막아줄 때 사단의 간계를 능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1967년 6월에 아랍과 이스라엘 간에 3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을 이끌던 모세 다얀 장군은 이스라엘보다 100배나 더 많은 인구를 가진 아랍과 맞서면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새로운 무기가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온 세계는 신무기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사람들은 유대 민족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틀림없이 원자탄이나 수소탄이나 그보다 더 무서운 폭탄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런데 다얀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승리하게 할 신병기는 바로 시편 121편 하나님 말씀입니다. “내가 선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좋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들이 준비한 새로운 무기를 핵무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말에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대로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단 6일 만에 팔레스타인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점령하고 승리로 끝내면서 역사적인 "6일 전쟁"을 완결 짓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신무기이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부패한 인생을 살면서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위급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우시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도와 주심으로 모든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단의 궤계와 전략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은 크리스천이 믿음을 지키고 살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항상 우리를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벧전5:8) 우리는 세상의 타락과 부패, 각종 유혹과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사단을 향하여 정면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할 때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3.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응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강건하며, 적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영적 무기로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신갑주를 입는다는 것은 '싸울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와 싸울까요? 우리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닌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와 하늘의 악한 영과의 전쟁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인과 함께 할 수 없던 하나님은 떠나셨습니다. 세상은 사단마귀가 공중권세를 잡고 주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부터 이 땅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계속 됩니다. 그것은 곧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사탄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의와 죄의 싸움입니다. 진리와 불순종과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믿음과 사탄의 꿰임에 빠지는 유혹과의 싸움입니다. 영적 전쟁은 인간의 눈에 보이는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하나님과 영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의 싸움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백전 백승하기 위해서 우리는 완전 무장한 군인의 모습으로 영적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여기 전신갑주라는 말은 군인의 완전무장한 모습을 말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허리에는 진리의 띠를 굳게 띠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허리는 몸의 중심이요, 힘의 원천입니다. 허리가 느슨하면 힘을 모을 수 없습니다. 허리띠는 [진리]입니다. 역도 선수들이 큰 허리띠를 불끈 졸라맨 다음 그 무거운 것을 들어올립니다. 특히 군인들은 넓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거기에다 물통, 권총, 실탄, 대검을 차고서 싸우러 나갑니다. 이처럼 허리띠는 힘을 모아주는 무기인 것입니다. 둘째는 가슴에는 의의 흉배입니다. 일반적으로 흉배는 가슴의 보호 장비입니다. 영적 군사는 쇠가죽이나 구리나 쇠로 만든 흉배가 아니라 의의 흉배를 차야 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만이 우리의 확실한 보호이며, 사단의 공격을 막아줄 것입니다.
셋째,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은 발을 보호하며, 적의 무기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말씀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움과 근심의 노예에서 벗어나 참된 안식을 줍니다. 넷째,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영적 전쟁에서 우리의 온몸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마귀의 궁극적인 공격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으면 우리 온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신을 보호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방패인 것입니다. 다섯째,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투구는 머리에 쓰는 보호용 철모입니다. 머리는 우리의 신체 중 결정적 부분입니다. 머리를 다치면 그건 결정적 손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전투를 하려면 반드시 철모를 써야 합니다. 여섯째,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가장 겁내는 것, 사탄을 막을 뿐 아니라 쫓아내고 섬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귀가 공격할 때 말씀의 칼을 휘둘러야 합니다. 마4장에서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시고 배고픔 가운데 있을 때,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느니라(신8:3)"하고 말씀의 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신의 약한 점을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그 약점을 사단이 유혹하지 못하도록 막고, 혹시 죄에 넘어졌다면 죄를 자백하고,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싹이 얼어붙은 땅을 헤집고 돋아나려면 엄청난 힘과 에너지를 뿜어내야 합니다. 처절한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어야만 새싹은 찬란한 봄 햇살을 맞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의 봄을 맞이하려면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얼어붙은 신앙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의 시선을 날마다 십자가를 향하여 돌려야 합니다. 영적인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때에 사단과 죄악을 이기고 아름다운 영혼의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엡 10:11 /갬태환 목사
지난 주에는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이 강건해지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집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오직 저(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6).” 이렇게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마귀의 궤계(詭計, schemes)를 능히 대적(對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 the full armor of God) 를 입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음으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우리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명백합니다.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 10:17-18에 보면, 복음을 전하고 돌아온 70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기뻐 외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뭐가 그리 신기하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여러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읽어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은 하늘에서 떨어졌습니다. 자기 위신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한 때는 자기의 지배 밑에 있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생명과 진리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사탄의 지배 밑에서 죄악의 생활에서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던 사람이 이제는 성경 공부에 시간을 보내고, 기도에 시간을 보내니 사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패배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은 교묘한 전략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나중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습니다. 다른 어떤 무기 보다도 강력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의지하는 이상 영적 싸움을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그리스도인을 영적으로 각성(覺醒)시키고 무장 시켜 주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 성경을 읽지 않고, 그 말씀에 의지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대하여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뭔가 놀라운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조금만 도전을 받으면 도무지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로 무장되어 악한 행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도 넉넉히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자, 전신갑주에 대하여 좀 더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싸움에서 입어야 하는 전신갑주는 “하나님의 전신갑주(the full armor of God)”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라는 말은 그 전신갑주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은 무기를 지급(支給)받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물품을 지급 받습니다. 모든 병사들의 배낭 속에 든 것들이 똑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의 지휘관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병사들은 대장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영적 싸움을 싸우지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지휘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무장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상상력을 동원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것 이것으로 이렇게 무장을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그 외에 다른 것으로 무장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그 사람이 싸움에서 이겼다면, 분명 이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 이긴 줄 알 것입니다. 명령을 어긴 병사가 혹시 싸움에서 이겼다고 할지라도 처벌을 받는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점에 있어서 철저해야 합니다.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짜내서 유별나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누가 너 보고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나는 너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뭔가 자신들의 것을 보태려고 애를 씁니다.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지 않고 시간만 낭비했기에 “내가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런 일을 하라고 명하지도 않았다(예레미야 23:32).” 고 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들나름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겠거니 하면서 백성들 앞에 나가서 이러쿵 저러쿵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거짓 선지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지 않고 나기 나름대로 뭔가 해보려고 하는 사람은 거짓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시각(視角)으로 성경을 보십시오. 모든 말씀이 그렇게 보입니다. 모세가 자기 백성들과 함께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출애굽의 계획을 짰더라면 그는 애굽 병사들의 말과 전차와 무기를 탈취해서 백성들을 무장을 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무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간단한 봇짐을 싸서 맨 몸으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진을 치라면 치고, 행진하라고 하면 행진했고, 싸우라고 하면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의 하이라이트는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출애굽기 14:2).”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던 길을 돌이켜서 바닷가에 진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이 텐트를 쳐도 쳐서는 안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여름이면 물가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고, 장마로 산사태가 날 수 있는 자리를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겨울에는 눈사태가 날 수 있는 자리는 피해야 합니다. 60만, 아니 300만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아무 무장도 없이 광야로 나온 사람들이, 어쩌면 애굽의 바로가 지금 쯤이면 군대를 끌고 추격을 할지도 모르고, 또 광야에서 다른 부족들의 습격을 받을지도 모르는데, 바닷가에 진을 치면 만약의 경우에 어디로 피합니까? 애굽에서 전술학(戰術學)을 공부한 모세가 이런 초보적인 군사 이론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닷가에 진을 쳤습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에 나가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의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 이것으로 무장을 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군사들은 그 명령대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무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무장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전신갑주 자체 보다는 그 전신갑주을 입으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법궤를 통하여 자기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셨습니다. 법궤를 가지고 전쟁터에 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사람들이 하나님보다는 법궤 자체를 송배하려고 했을 때, 이스라엘은 더 이상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법궤 자체를 믿기 보다 하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보세요. 진리, 믿음, 의(義, righteousness), 구원, 말씀, 기도, 이런 것들이 무기가 될 수 있습니까? 이런 것들이 영적 싸움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그 자체로는 이런 무기들이 얼마나 효력이 있을지 의문이 갑니다. 좀 더 강력한 좋은 무기가 없을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 때마다 최신 무기들이 개발되어서 사용되지 않습니까? 미국과 이라크 전쟁에서도 강력한 최신 무기들이 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미국은 이런 무기들만 팔아도 막대한 돈을 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무기는 재래식 무기들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항상 똑 같은 무기들입니다. 그러나 재래식 무기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속에서 이런 무기들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똑 같은 믿음같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 엄청난 위력을 갖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위력이 엄청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있습니까? 내가 도대체 무엇으로 어떻게 무장하고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를 살펴 보십시오. 요즘 시장에 가면 값싼 모조품(模造品)들이 많습니다. 같은 물건 같이 보이지만 값이 쌉니다. 막상 사용하려고 하면 나사가 빠지고, 손잡이가 부러지고 해서 제대로 쓸 수가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믿습니다. 사탄의 궤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할 무기들의 모조품을 만듭니다. 겉보기에는 그럴듯합니다. 겉에서 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탄의 궤계가 얼마나 교묘한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런 모조품들을 들고 만족하게 만들고 자만하게 만듭니다. 사실은 그런 모조품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인데도, 그런 것들을 손에 들고, 걸치고 안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보세요. 교회만 열심히 나가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착하게 살면 되는 줄 아는 사람들, 쓸데 없이 고행(苦行)을 자처하는 사람들, 모두가 아무 짝에 쓸모 없는 모조품들을 들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손에 들지 않는 영적 벌거숭이 상태에 있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교묘한 전략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너희 중에 경건의 모양(form)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다. 너는 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돌아서라(디모데후서 3:5).” 누가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고 누가 경건의 모양만 가진 사람입니까?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모양도 더 번쩍거리고, 더 화려합니다. 더 좋아 보입니다.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도 모릅니다. 사탄이 이미 이런 사람들을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값싼 모조품들을 걸치고 있었는지,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았는지,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을 수 있는 사람만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가?” “나에게 경건의 모양만 있었지 능력이 없었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는가?” “나의 영적인 무장 상태가 얼마나 허술했는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 온 몸을 한군데도 빼 놓지 않고 무장을 해야 합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모두 무장해야 합니다. 만일 한 곳이라도 허술하거나 빈 곳이 있다면 사탄의 쏘는 “불화살(the flaming arrows, 에베소서 6:16)”이 어김없이 그곳에 꽂히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어떻게 죽은지 아십니까?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릴 때에 나라의 힘이 막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이 이렇게 강해지자 유다왕도 수시로 이스라엘을 방문해서 두 나라가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시리아도 이스라엘과 잘 지내기를 원해서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자기 힘이 강해지자 점점 교만해져 갔습니다. 어느날 그는 예전에 자기 영토였던 한 마을을 시리아가 차지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유다왕을 끌어들여서 그 마을을 찾고자 했습니다. 유다왕 여호사밧은 그러나 이런 일은 먼저 하나님께 묻고 난 후에 결정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400명이나 되는 선지자들을 불러서 이번 전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물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니 얼른 시리아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아직도 미덥지 않으니까 다른 선지자를 불러서 한번 더 물어 보자고 했습니다. 아합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나라에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한 사람 더 있는데, 나는 그 선지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놈은 항상 나에게 불길한 말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 여호사밧의 주장대로 이번 전쟁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물었습니다. 미가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지는 환상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번 전쟁에서 지도자를 잃게 될 것입니다. 내가 보니 주께서 보좌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계셨습니다. ‘누가 아합을 꾀어다가 이번 전쟁에서 죽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시는데 마침 어떤 영이 ‘제가 아합을 꾀어다가 죽이겠습니다.’ 하자 주께서 ‘네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겠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선지자들이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합 왕이여 똑똑히 들으시오. 왕의 선지자들에게 거짓말하는 영이 내렸습니다. 주께서 왕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고 시리아와 전쟁을 합니다. 아합은 시리아가 자기를 집중 공격해서 잡으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아합은 왕복을 벗고 사병 복장으로 전쟁에 나갑니다. 시리아는 변장한 아합을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운이 없었는지 화살 하나가 아합왕의 갑옷 솔기(between the sections of his armor )에 정통으로 꽂혔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피를 많이 흘리고 죽습니다. 이 이야기가 열왕기상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감쪽같이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갔지만 갑옷의 이음새에 화살이 꽂혔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공격할 때는 여러 중대로 나뉘어 치밀하게 작전을 구사합니다. 교란작전을 폅니다. 우선 영적인 부분을 공격해서 그 쪽으로 온통 정신을 쏠리게 해 놓고나서 은근슬쩍 육적인 부분을 공격합니다. 변장까지 하고 완전하게 자신을 보호했다고 생각했지만 화살은 의외로 갑옷 솔기에 와서 꽂혔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궤계를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사람은 사탄의 궤계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Put on the full armor of God.)”는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의 무기가 좋아도 그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나에겐 믿음이 있어.” “성경 말씀은 참 귀해.” “기도는 참 좋은 것이야.”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무기를 손에 들어야 하듯이, 영적인 무기도 손에 들어야 합니다. 성능이 좋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습니다. 이 무기를 손에 들고 사용해야 합니다. 믿음을 활용(活用)해야 합니다. 광풍이 불어서 배에 물이 들어와 침몰한다고 아우성치는 상황 속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Where is your faith?)?”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뭘합니까? 기도가 무엇인지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뭘합니까? 실제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전에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사탄의 궤계 중의 하나가 그것입니다. 이론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만 몇 십년 해서 말씀을 빠삭하게 잘 압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잘 알아요. 그러나 기도하지 않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잘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사랑이니, 겸손이니 하는 말들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와요. 그러나 그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사탄은 자기 전략대로 되었다고 쾌재를 부릅니다.
거어널이 이렇게 말합니다. 사탄이 자신의 도구로 즐겨 쓰기를 원하는 4가지 유형(類型)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권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사람이고, 둘째, 지적(知的)으로 뛰어나고 사교술이 좋은 사람이고, 셋째, 거룩하거나 아니면 거룩하게 보이는 사람이고, 넷째, 사람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가만 보세요. 이런 사람들이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모두 우리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되려고 목표로 삼는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사탄의 궤계는 이렇게 치밀하고 계획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욕망(desire)과 꿈과 비젼까지도 사탄은 이용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온 몸에 전율 (戰慄)이 일어납니다.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영적 싸움터에서 사탄과 싸워야 하는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라(2)
엡 6:10-11 / 김태환 목사
지난 주에는 “영적 싸움에 나간 성도는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고 설교했습니다. 오늘은 같은 제목으로 우리 크리스찬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그 힘의 근원(根源)에 대하여 말씀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이 강하고 담대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강해지는지 그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영적 싸움의 실체를 인정했다고 할지라도 단순히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강해지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Be strong in the Lord and in his mighty power.)”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조용히 묵상(默想)해 보십시오. 예를 들면, 지금 전쟁 중인 미국 군(軍)이 강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오늘 뉴스 보니까 미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답니다. 보급로가 막혀서 먹을 것이 공급되지 않아 굶주리고 있고, 이라크 군의 자폭 공격을 받고 는 충격과 공포에 떨고 있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막강하다고 믿었던 아파치 헬기가 이라크 농부들이 쏜 소총 사격을 받고 추락한 것이 이라크 국영 tv 방송 알-자지라에 방영됨으로 더욱 미군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어도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모두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은 군대의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힘의 근원입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힘도 능력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 여러가지가 나옵니다. 그중에 사무엘이 사울왕을 꾸짓는 말 중에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사무엘상 15:29).” 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을 “지존자(至尊者)”라고 불렀습니다. KJV에 보면 이 말이 “the Strength of Israel(이스라엘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는 점점 지존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사무엘상 15:12).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는 상대였습니다. 사울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 노장이라면 다윗은 양을 치던 소년이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사울이 다윗을 불러 자기 군복을 입히고, 놋 투구를 그 머리에 씌우고, 자기 갑옷을 입혔습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했습니까? “다윗이 칼을 군복 위에 차고는 익숙치 못하므로 시험적으로 걸어 보다가 사울에게 고하되 ‘익숙치 못하니 이것을 입고 가지 못하겠나이다’ 하고 곧 벗고,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사무엘상 17:39-40).”
다윗은 전쟁의 경험도 없고, 그 자신이 골리앗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이 칼의 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 다윗은 그 때의 경험을 이렇게 시편에 썼습니다. “나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저가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며, 손가락을 가르쳐 치게 하시도다……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편 144:1, 15).”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백성은 복이 있다고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사는 인생은 복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힘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함께 하셔서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5절).”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인 나에게서 진액을 받지 않고 나를 떠나 있는 사람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문제는 우리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으로부터 힘을 공급 받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엄청난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힘을 공급 받는 법에 대하여 무지(無知)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막상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하나님의 힘을 공급 받는 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하는 말씀을 읽으면서도 강건해지는 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강건해지는 무슨 비결(秘訣)이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무슨 instruction이나 manual 같은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무슨 전자 제품을 사면 설명서(instruction)가 따라 옵니다. 잘 읽고 그대로 따라서 설치하고 사용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데도 instruction 같은 것이 있을까요? 불행하게도 없습니다. 이 문제는 그동안 25년간 목회를 하면서 수없이 설교를 했고, 성경을 가르쳤던 저 자신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우리가 주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뜻에 완전히 순종을 해야 하며, 우리 영혼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으로 불이 붙어야 합니다. 냉랭하던 마음이 녹아 내려서, 마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 입에 기도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30분, 한 시간 우리가 기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기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말씀에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는 말씀(로마서 8:26)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듣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깨닫는 것도 있고 은혜도 받는 것 같은데, 우리의 삶은 좀처럼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실 때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고,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다윗왕의 예를 들어 볼까요?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부하의 아내를 빼앗은 것입니다. 아니, 그 전에 이미 그는 그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하를 최전방에 보내서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습니다. 그 후에 다윗이 어떻게 무슨 생활을 했을까요? 아무 일도 없었던 처럼 살았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소년 시절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골리앗과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런 다윗이 부하를 그렇게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살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는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나오지 않아요. 기도가 막혀요. 기도를 하려고 하지만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책을 펴 놓고 말씀을 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큰 실수를 했거나, 마음이 답답하거나, 큰 일을 앞두고 있거나, 불안할 때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 것처럼, 다윗도 율법책을 펴 놓고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나단이 그를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서 그의 냉랭한 마음에 불을 붙이셨습니다. 그 때 죽어 있던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났습니다. 그의 입에서 회개의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선하고 진실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다윗의 냉랭한 마음에 불을 붙이시고 그의 마음을 깨우쳐 주실 때까지, 말씀을 읽어도, 기도를 해도 그의 삶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의 체험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능력은 철저하게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들이 말한 것처럼 “오직 저(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6).”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실로 우리의 믿음은 이 사실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압니다. 우리 속에 이 말씀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본주의(人本主義, humanism)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타고난 능력을 중시(重視)하는 것입니다. 휴머니즘에서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의 근원이시다.” 이런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본주의 사상을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하나님은 휴머니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바벨탑을 무너뜨리시고 그분의 영원한 권위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하나님의 도움이 없어도 내 힘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나오면서도 믿음생활에 절박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熱情)이 없어요. 적당히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냥 교회에 나와서 좋은 말씀 들을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려고 하는 사람이지 좋은 말씀 들려 주려고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의 능력으로 강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윌리암 거어널(William Gurnall)은 두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거어널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는 아주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셨고,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만드셨고……” 하는 식으로 장황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어널은 딱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에베소서 1:6).” 하나님의 능력 중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다른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 중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강하고 능력 있는 분”으로, 혹은 “전능하신 분”으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님의 능력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나와 관계 없는 외부적인 사건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나의 삶을 바꾸어 나가시는 내적인 사건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옳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위대하시다고 해도 나와 상관 없는 일을 하시는 분이라면 그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의 능력으로 나의 삶을 바꾸어 나갈 때 참으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도 무슨 대단한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삶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시험을 받을 때나 어려움을 당할 때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저(하나님)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편 62:2, 6).”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면서 꼭 물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하나님이)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느냐(마태복음 9:28)?” 하고 물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장에 보면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가 그 부모도 알고 형제들도 아는 사람인데, 우리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남기시면서 나사렛을 떠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 이 일을 이렇게 평가하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소수의 병자들을 고치셨을 뿐 나사렛에서 아무 능력도 행하실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저희가 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다른 마을로 가셨다(마가복음 6:5-6).”
그렇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영적 싸움에서 이기기를 원하는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나의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힘과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확실하게 서 있는 사람은 사탄과의 영적 싸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능가하는 어떤 세력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미 이 사실을 선언(宣言)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對敵)하리요(로마서 8:31)?”
사탄은 아주 교활한 존재입니다. 사탄은 욥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욥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것입니다. 어느날 아침 그가 소유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갔습니다. 이런 경우가 왜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공격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주변에서 기도하라고 말들은 듣지만 그저 당황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욥기 말씀을 잘 보세요. 사탄이 욥을 치는 것은 사실은 욥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싸움터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합니다. 사탄이 성도들을 전면적으로 공격할 때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사탄의 공격을 방어할 엄청난 힘이 공급(供給)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군대는 홍해 근처에 이르렀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완전히 사로잡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습니다(출애굽기 14:3).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홍해는 무사히 건넜지만, 그들은 막막한 광야에 내던져진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년 간이나 먹이고 입히셨습니다. 출애굽 한 사람이 성경에는 60만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240만이 넘고 300만명에 육박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농사를 지을 경작지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웃 나라와 교역(交易)을 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웃 나라에 먹을 것을 구걸하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것을 약탈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 하나님에 대한 말씀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예전만 못합니까? 아니면 사탄의 세력이 예전보다 더 강해졌습니까? 모두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오히려 사탄의 세력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었습니다. 사탄은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습니다(창세기 3:15). 그런데 왜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사탄의 공격을 무서워 하는 것입니까? 거어널이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도대체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의 베갯잇에 어떤 수면제를 뿌려 놓았길래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마냥 잠만 자게 하는 것인가?”
사탄은 될 수만 있다면 별의 별 수단을 강구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볼 수 있는 눈과 담대함을 빼앗아 감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능력의 하나님을 깨닫는 순간, 그리고 그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사탄은 힘을 잃습니다. 죄의식으로 괴로울 때나, 유혹이 닥쳐 올 때, 혹은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지고 있는 짐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지체 없이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공산주의와의 영적 싸움
엡 6:10-12 / 김홍도 목사
전에 수도경비사령부 군종실장이었던 최학량 목사는 “북한의 김정일은 사탄이다”라고 했고, 조갑제 씨는 “김정일은 작은 적그리스도”라고 했고, 소련의 반체제 문학가 솔제니친도 “공산주의는 고칠 수 없는 미치광이 병이다”라고 했습니다. 참 믿음이 있고 심령의 눈이 열린 사람은 공산주의(communism)는 사탄의 사상(satanism)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7년 대환난 때 나타날 적그리스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마귀의 화신인 작은 적그리스도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북한은 사탄의 먹구름이 뒤덮여 있고, 남한은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는데 이는 남한에 5만 교회와 1,200만 성도, 그리고 기도하는 성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국을 말세에 선교하는 민족으로 쓰실 계획이 있으므로 사탄은 이를 진멸시키려고 합니다.
Dr. Joad 박사는 무신론자였는데 스페인 내전을 연구하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악한 영의 힘을 발견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은 놀이터(playground)가 아니라 전쟁터(battleground)다”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이 세상은 영적 전쟁터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파괴하고 타락시키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제 공산주의가 왜 사탄의 사상이며 왜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atheism)이며, 영혼도 정신도 없다고 하는 유물론(materialism)입니다.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정신은 물질의 생물학적 부산물”이라고 하면서 물질의 존재밖에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 인간은 영(spirit)과 혼(soul)과 몸(body)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식물(plant)은 몸만 있고, 모든 동물(animal)은 몸과 혼(정신)이 있고,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이 있습니다. 계란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또 칼 마르크스(1818-1883)는 “신은 필요 때문에 고안된 정신적 허구이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었다”라고 하면서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했습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무서운 사탄의 사상입니다. 북한에 교회가 있습니까? 남한보다 더 많던 교회들을 다 파괴했습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이 죽거나 극심한 노동자 수용소에서 일하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철저한 종교 말살론입니다.
2. 잔인한 살인자입니다
사탄, 마귀의 특징은 잔인한 살인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사탄의 성격을 살인자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도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사탄을 도적으로 표현하시면서 사탄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생명을 죽이고 재산을 도적질하고 빼앗는 놈이라고 하셨는데, 공산당은 사탄의 사상이기 때문에 남의 재산을 빼앗고 도적질하며 생명을 죽이고 살인하는 일을 자행합니다. communism은 satanism이기 때문입니다. 칼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전 세계 노동자들이여, 다 단결하여 공장과 기업의 주인인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고 공동소유로 만들자”라고 선언하면서 이 혁명완수를 위해서는 살인도, 방화도, 할 수 있고 거짓말도, 파괴도, 서슴지 말고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 한다”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도적질하거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귀의 뜻이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이 비행기를 폭파하고 자살 테러를 자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데 이것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잘못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가스로 독살했고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이는 그가 사탄의 화신이요, 작은 적그리도이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가 “엄청남 테러”(The Great Terror)란 책에서 흐루시초프는 폭로하기를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스탈린(1879-1953)은 1936~1938 년 사이에 감행숙청에서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당원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 사람은 50%를 처형했고 군장성급은 60%를 사형시켰다”라고 폭로했고, 비밀경찰 두목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갖다 바친 사형자 명단이 책으로 383권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스탈린이 죽은 사람은 총 4,500만 명이나 되고 모택동은 6,300만 명이나 됩니다.
만일 우리나라가 공산화되면 히틀러가 자행한 대학살(Holocaust)보다 더 많은 사람이 처형될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사탄의 사상이며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12절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마귀 사탄은 세상의 통치자들 즉 이 어두움의 세상 나라 주관자들 속에 들어가 대량살상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월남이나 캄보디아 등 모든 공산국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습니까? 수백만 명 이상씩 살해되었습니다.
3. 도적질하고 빼앗습니다
사탄은 도적질하고 빼앗는다고 했는데 공산당들은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고 도적질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귀와 예수님은 정반대의 성격입니다.
탈북자, 강철환 씨가 쓴 “평양의 어항”을 보면 그의 가정은 제일교포로 돈 많이 벌고 잘 살다가 공산당의 꼬임에 빠져 많은 재산을 가지고 북한에 갔는데 어느 날 지프 한 대가 오더니 금은보석과 금시계, 금잔들, 고급 옷들을 이유 없이 몽땅 빼앗고, 호주 되는 할아버지는 처형되고, 어머니는 강제 이혼시키고 남은 식구는 함경도에 있는 요덕수용소에 실려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영양실조로 매일 죽어나가는데,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강철환 씨는 개구리, 뱀, 쥐 같은 것을 잡아먹고 생명을 연장하다가 용케 탈출했다고 합니다. 공산당은 도둑놈들입니다.
그들은 노동자, 농민, 가난한 사람들을 무산대중이라 하고 프롤레타리아라고 합니다. 그 반대편인 지식계급, 부요한 사람들은 부르주아라고 합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유산계급, 부르주아에 대해서 죽도록 증오심을 갖게 하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빼앗게 만듭니다. 이런 사상에서 나온 것이 평등주의이며 “분배”(distribution 혹은 division)입니다. 그러니 잘사는 사람은 눈 뜨고 못 보는 것입니다. 탈취해서 나눠가질 생각만 합니다. 남이 노력하고 연구하고 열심히 일해서 잘사는 것을 증오하고 빼앗을 생각만 하니 복을 받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산국가들은 예외 없이 거지의 나라가 되고 만 것입니다.
중국에서 모택동보다 등소평이 더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은 그가 시장경제제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은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가릴 것 없다. 쥐만 잘 잡으면 된다”, 또 “소수의 잘 사는 사람이 있어야 다수가 잘 사는 날이 온다”라는 것인데 이 말은 공산주의 경제관과 전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중국의 경제가 크게 발전한 것입니다. 공산주의 경제관은 평등주의요, 남의 것을 빼앗고 강탈해도 된다는 사상이기 때문에 경제가 발전할 수 없고 축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소유욕이 있고 “내 것”을 갖기 원하는 본능이 있는데 이 소유욕이 충족되지 않는데 누가 열심히 일하고 창의력을 발휘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생산보다 “분배”에만 역점을 두는 것과 “평등”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도적질하고 죽이고 빼앗는 것은 분명한 사탄의 역사입니다. 4. 마귀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마귀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사탄 마귀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공산주의는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을 지어내고 온갖 속임수를 다 씁니다. 북한 공산당은 지난 50여 년 동안 수백 번, 수천 번, 약속을 어기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북한 공산당과는 약속을 믿으면 안 됩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진짜처럼 한다고 했습니다.
또 마귀는 참소자(accuser)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라고 했습니다. “참소하다(accuse)”란 “비난하다, 고소하다, 중상모략하다”란 뜻입니다. 마귀들은 온갖 거짓말로 사람들을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고소하는 일을 합니다. 공산당은 거짓말을 서슴지 않고 하며 이해관계에 따라 약속을 제멋대로 어기기 때문에 약속을 믿으면 안 됩니다. 온갖 속임수를 다 쓰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효선, 미선 양 사망했을 때 1년이 넘도록 촛불시위를 하면서 “사람을 죽여 놓고 60만원 보상이 무엇이냐?”라고 하면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증폭시켰는데 사실은 효선, 미선, 두 집에 1억 9천만 원 이상씩 보상해주었습니다. 또 사과 한 마디 안 한다고 선전했지만 그 부대 총 지휘관이 두 집에 찾아가서 무릎 꿇고 사과했습니다. 곤산주의자들은 온갖 거짓말과 속임수를 다 쓰는 마귀의 사람들이고 스탈린이나 모택동이나 김일성, 김정일은 적그리스도 즉 사탄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자들입니다. 얼핏 듣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무서운 계략과 파멸시키려는 악한 책략이 들어 있습니다. ◎ “민족공조”, “민족주의”는 미군을 철수시키고 적화통일하자는 속임수입니다.
◎ “국방개혁과 평화체제, 전시작전지휘권 환수”하겠다는 것도 대한민국을 무장해제시킨 후 무력 적화통일 하겠다는 계략이며 연방제로 갔다가 적화통일 하겠다는 것입니다. 국군병력을 대폭 줄이고 국방부 요직에 민간인을 채용하겠다는 것도 무장해제의 전단계입니다. 북한은 군사력을 더 강화합니다.
◎ “연정”은 당 통합과 연합정부를 만들어서 남북연방제를 만들어 적화통일 하겠다는 것입니다.
◎ 현 정부는 “참여”란 말을 많이 씁니다. “참여정부”니 “열린 우리당”이니 “시민참여”니 하는 그 밑바닥에는 무산대중 즉 프롤레타리아를 선동해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취하겠다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계급투쟁을 부추기는 내용입니다.
◎ “언론법개정”도 언론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민의식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 “사학법개정”은 종교교육을 폐지시키고 전교조의 공산주의 및 주체사상과 이념을 주입시켜 적화통일 하겠다는 것입니다.
◎ “과거사규명법”은 일제의 잔재를 털어버리고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지만 실은 과거 공산당원이었거나 공산당 협력의 전력을 말소시키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열린우리당의 신모 의원, 김모 의원은 지독한 친일파로 잔혹한 일을 했으나 그 명단에서 빼버리지 않았습니까? 친일파 명단을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 대표 임모 씨는 그의 부친 4형제는 모두 6.25 때 붉은 완장을 두르고 활동하다가 총살당했고, 임씨는 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공안 사건에 연루된 전력을 가진 자입니다. 거물 간첩 송두율은 6.25를 통일 전쟁이라고 하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사람인데 석방하고, 완전히 주체사상을 가진 강정구 교수를 구속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8.15 행사 때 말하기를 개성에 1,000개 업체를 투입시키고 북한의 각종 개발을 위해 3조 6060억 원을 투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말대로 북한은 “뇌사국가”인데 국가의 생명을 유지시키려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남아야 할 한국 국민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며 김정일이 제거되고 사탄의 정권이 붕괴되어 자유와 해방의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북한 주민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국민을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하거나 수입할 능력이 없는데 핵폭탄을 개발하고 가장 높은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국가가 아닙니다.
또 좌익분자들이 늘어놓는 궤변은 남한이 경제는 성장했지만 빈익빈, 부익부가 더 심화됐다고 트집을 잡지만 World Bank 자료에 의하면 상위 20%, 하위 20%이면 불평등도 가장 낮은 나라이고 부의 분배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증오심을 불 태워서 공산혁명으로 나라를 전복시키고 적화통일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몇 달 전, 황장엽 씨를 만나 대화하는 중에 남한은 낙원이고 북한은 지옥인데 젊은이들이 그것도 모르고 북한을 지지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다고 합니다. 또 강정구 같은 사람은 북한이 좋으면 북한에 가서 살지 왜 가지는 않고 자식들은 그렇게 미워하는 미국에 유학은 왜 시키는 겁니까?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사탄, 마귀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 전쟁이며 김정일은 마귀의 화신인 적그리스도입니다. 영적으로 대항해야 합니다. 사탄의 힘을 입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입니다. 에베소서 6장 11~12절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영적 전투
엡 6:10-13 / 엄기호 목사
피터 와그너 박사님은 훌러 신학대학의 교회성장학 주임교수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도 뚜렷한 병명이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와그너 박사님은 이렇게 병명도 모른 체 시달리며 살아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병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는 린버 교수를 찾아가 안수기도를 받았지만 여전히 편두통은 낫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두통에 시달린 목사님은 문득 혹시 이 편두통이 귀신의 장난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마귀를 쫓는 기도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으나 자기 부인 이 교수가 무슨 그런 짓을 하냐고 비웃을까 싶어서 부인이 겁이 나서 부인 듣는데 마귀를 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샤워 실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면서 샤워를 다 틀어 놓고 물소리가 나게 해서 부인이 못 듣도록 하고 “이 편두통의 원수 귀신아 물러가라! 편두통의 원수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샤워가 비눗물을 씻듯이 싹 나아버리더랍니다. “여태까지 나에게 편두통을 앓게 한 것은 마귀가 붙어서 짓눌러서 아프게 되었구나.” 그 다음도 가끔 편두통이 도로 돌아와도 똑같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 그러면 또 물러가고, 물러가고 하더니만 이제는 완전히 편두통에서 해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 이름으로 마귀를 대적하니까 물러가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됩니다. 마귀와 싸울 때 낙심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마귀는 끝까지 견디는 자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어떤 부류의 싸움이 되었든지 전쟁은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서 2:19절에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가 피터 와그너 박사처럼 이기면 하나님의 능력자가 되지만 만일 지면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이에 성경은 영적 전쟁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에덴동산의 전쟁
에덴’이란 뜻은 “즐거움”, “기쁨”,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 은 두 가지 음성 사이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 중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7절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 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금지조항을 어길 수도 있었고, 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동으로 조작되는 기계처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선택의 권리 즉, 자유의지를 소유한 인격체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하여 아담의 마음을 충동시켰습니다(창 3:4). 마귀의 유혹은 아담을 패망시키려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버리고 마귀의 음성을 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으며, 이로 인해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죄인으로 전락해버렸고, 죄의 대가인 사망을 이 세상에 가져오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지 마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됩니다.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지 정욕의 소리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마귀의 소리에 넘어지고 정욕에 넘어져 충성도 못하고 거짓 소리에 미혹을 받아 전도도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기도와 감사를 못하고, 세상 재미에 젖어 헌신을 못하고,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청산하고 그 올무에서 벗어나 양심의 소리,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광야의 전쟁
출애굽기 17장에는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던 중 르비딤 광야에서 전쟁을 좋아하는 아말렉을 만나 전쟁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 경험도 없고 무기도 없는지라 당황했습니다. 아말렉은 사납고 강력한 군대를 몰고 왔습니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패전할 수밖에 없는 미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조건에 구애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느 편에 계시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와 작전을 세웠습니다. 여호수아가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동안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여기 손을 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최후의 서원을 아뢰는 것이요, 막다른 간청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해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호소요, 생명을 건 중보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우리에게 닥쳐온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수단 방법 계획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이 나타나 이기게 하여 달라고 손들고 매달리면 마귀의 도전을 물리치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또한 모세는 아론과 훌의 협조로 승전했습니다. 불의 사자, 권능의 사자인 모세도 인 간이기에 올린 손이 피곤해서 자꾸만 내려왔습니다. 그럴 때 아론을 도와 기도에 힘쓰게 한 것이 아론과 훌입니다. 아말렉 군대의 공격은 우리 믿는 자를 공격하는 사단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먼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기도해야 합니다. 아론과 훌이 되어 교회의 지도자를 중보하고, 한마음이 되어 전혀 기도에 힘써 사단의 공격을 물리쳐야 합니다.
셋째로, 성도의 전쟁
사탄의 목적은 오늘날 살아가는 인간과 인간사회를 가능한 한 비참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생들 사이를 오가며, 우리의 삶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전쟁, 가난, 억압, 질병, 인종차별, 탐심을 가져왔고, 지역감정과 불의와 거짓이 난무하게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일보다 복권에 당첨되는 것을 더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을 소유하는 일보다 마귀의 종이 되어 지옥백성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날까요?
그 해답을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라”(고후 4:4).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사탄의 방해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자들 사이에서도 사탄은 계속 역사합니다. 우리 곁에는 밤낮 참소하는 마귀의 소리가 있습니다(계 12:10). 마귀는 쉴 사이 없이 우리의 잘못을 들추어내고 고자질함으로 우리가 괴로워서 살 수 없게 만듭니다. 마귀는 먼저 양심을 통해서 참소합니다(베드로전서 3:21). 늘 하나님께로 향해있는 우리의 양심을 공격합니다. 거짓말했을 때, 죄를 지었을 때 마귀는 정확하게 알고 우 리의 양심을 찌릅니다. 그래서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고 시달리며 고통하게 합니다.
또한 마귀는 율법을 통해, 인간을 통해 참소합니다. 요한복음 8장 1절 이하에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여인의 죄악상을 많은 사람 앞에서 폭로한 후, 여자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려는 무서운 공작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참소를 완전히 이기시고 여인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성경 이사야 43장 25절에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영적 전쟁 가운데 매순간 처하지만 담대하십시오. 기도할 때 아말렉 전쟁을 승리케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참소하던 무리에게서 여인을 보호하신 예수님께서 이 순간 우리를 보호하시고 자유케하십니다. 그러므로 굳건한 믿음 안에서 어떤 사탄의 공격과 영적 전쟁에 처해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만 바라보며 담대히 이기며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사단의 기원과 그 역사(役事)
엡 6:10-13 / 김홍도 목사
어느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목사가 “나는 마귀 같은 건 무섭지 않다”고 하니까 그를 아는 사람이 질문하기를 “마귀는 당신을 무서워합니까?” 하니 아무 말도 못하더랍니다. 오늘날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가 되어서 불신자는 물론 목사나 크리스찬들까지도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고 만화에나 나오고 농담에나 쓰는 정도로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요, 슬픈 일입니다.
조우드 박사(Dr. Joad)란 분은 무신론자였는데 스페인내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연구하다가 인간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한 영의 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어 훌륭한 성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도 모르고 사탄 마귀도 믿지 않고 체험을 못했다면 그는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이요, 마귀에 속한 사람이라고 단언할 수가 있습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놀이터(play ground)가 아니라 전쟁터(battle ground)”라고 했는데 참으로 명언입니다. 옳습니다. 정말 거듭난 신자라면 인간보다 강한 원수를 직면하게 됩니다. 원수 마귀는 끊임없이 주님의 교회와 우리 성도들을 대항하고 공격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 마귀의 존재와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영적인 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성도를 괴롭히는 사탄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창조주 하나님이 왜 이런 악한 존재를 만드셨을까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1. 사탄의 기원(Origin)
사탄은 원래 악한 영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인간이 창조되기 전) 가장 뛰어난 그룹천사장이었습니다. 용모가 뛰어나고 지혜도 충만하고 큰 권세도 부여받은 영적 존재로 어떤 분은 하나님의 정부(God's government)의 국무총리(Prime Minister)라고 합니다. 하나님 밑에서 온 우주를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부여받은 천사장이었습니다.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천사장이었습니다. 에스겔 28장 12~1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는 완전한 인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왔도다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예비되었었도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이제 15 절을 보면 “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도다”, 17절을 보면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열왕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용모와 지혜와 권세가 뛰어난 하나님의 걸작품, 천사장이었는데 자기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천사장 루시퍼(Lucifer)가 하나님의 보좌까지 강탈하려고, 뭇별 위에 자기 보좌를 높이려고, 천사들의 3분의 1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반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다가 저주받고 쫓겨나 사탄 마귀가 되고 그 부하 천사들은 귀신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하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아담이 창조되기 전(Pre-Adamic World), 온 세상이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로 되어진 세상이 창세기 1장 2절부터 기록된 우주입니다. “땅이 혼돈(chaos)하고 공허(void)하며 흑암(darkness)이 깊음(deep)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한 창세기 1장 1절과 1장 2절 사이에는 큰 시간의 갭(gab)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학자 스코필드(Scofield) 박사나 세계적인 성경학자, 영국의 로이드 존스(Lloyd Jones. MD) 박사는 의학박사이면서 성경학자인데 그분도 이 학설을 주장하고 그 외에 많은 영적인 목사님들이 이 설을 주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창세기 1장 1절에 나오는 “창조하다”는 “바라”(bara)인데 이것은 “무에서 창조하다”는 뜻입니다. 무에서 유를 끌어내는 이 창조는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행위입니다. 다음에, “아사”(asha)는 있던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창조이고 또 “야차르”(yatzar)는 기존 재료를 조립한다, 건설한다(construct)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 1절에 나타난 우주(Pre-Cosmic Universe)는 천사장 루시퍼의 타락과 저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큰 재난의 사건(Cataclysmic event)이라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한 말씀과 유다서 6절의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하는 말씀도 아담 이전 첫 번 창조(Pre-Adamic World) 때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8절에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한 이 말씀도 첫 번 창조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이드 존스(Lloyd Jones) 박사는 창세기 1장 2절부터의 창조를 “재창조”(Recreation) 혹은 “창조의 회복”(Restoration)이라고 합니다. 재창조(Recreation)를 믿는다고 이단도 아니고 안 믿는다고 이단도 아닙니다.
에스겔 28장에 두로(Tyre)와 바벨론(Babylon)이 왜 나오느냐 하면 부귀와 권력이 막강했다가 멸망한 나라로 천사장의 타락을 상징(symbol)합니다. 마치 다윗이 메시아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쓰여진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기원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기원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구나 화성의 돌이나 흙이 수억만 년 되었다고 하는데 첫창조(Original creation)와 타락 후 재창조(Recreation)를 믿을 때 해결된다고 봅니다. 또 전능하신 하나님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에서 창조하시겠습니까?2. 사탄의 성격과 하는 일
① 사탄의 성격
사탄, 마귀의 성격은 그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탄”(Satan)이란 “대적자”란 뜻입니다. 저주받은 원한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마귀”(Devil)란 “참소자”, “훼방자”, “고소자”란 뜻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 참소하고 음해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며 거짓말을 만들어서 주의 종과 성도들을 죽이고 매장시키는 일을 합니다. “귀신”(Demon)이란 이름은 “유혹자”란 뜻입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범죄케 하고 타락시키는 일을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한 말씀에 마귀는 잔인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은 궤휼한 자요, 간교한 자요, 속임수에 능한 자입니다. “옛뱀”이라고 했는데 뱀은 변장을 잘합니다. 바위색깔로, 나무색깔로, 풀색깔로 변장하는 것 같이 마귀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악한 계략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괴롭히고 축복을 가로막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② 사탄의 역사(Works)
사탄의 제일 큰 활동목적은 ⒜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일을 합니다. ⒝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멀어지게 합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루시퍼(Lucifer)처럼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영광을 받게 하려고 유혹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다가가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는다’는 것은 다 거짓 말이야 네가 먹으면 너도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는 거야” 하고 유혹하고 타락시킨 것처럼 오늘날도 유혹합니다. ⒟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③ 세상나라들에 대한 사탄의 역사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principalities)와 권세(authorities)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rulers)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는데 “정사”는 군주, 우두머리(首位), 주권자란 뜻이고 “권세”란 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권력자란 뜻이고 “주관자”들이란 나라와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나 대통령이나 지배자들을 의미합니다. “어두움(darkness)의 세상 주관자들”이란 사탄의 나라에서 부여한 권세와 능력과 계급을 가지고 세상을 혼란케 하고 하나님을 못 믿게 하고 혼돈(chaos)시키며 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부터 사탄, 마귀가 이 세상의 왕이 되어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에서 권세와 능력을 받은 왕이나 대통령이나 총통 같은 세상의 지배자를 통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사람을 죽게 하고 교회를 파괴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14장 30절에 “…이 세상 임금(사탄)이 오겠음이라…” 했고 요한복음 12장 31절에는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한 말씀대로 사탄이 세상의 왕 노릇 하며 세상을 어지럽게 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의 값을 치루어 주시고 빛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되어 세상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 하신 말씀이 사도행전 26장 18절인데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하며 해야할 사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골로새서 1장 13~14절에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흑암의 나라의 왕 사탄으로부터 권세와 능력과 치리권을 받은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선민 유대인 600만을 학살하고 세상을 어지럽게 했던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 사상과 잘못된 경제이념을 가지고 교회를 다 파괴하고 크리스찬들을 죽이고 투옥하고 핍박한 공산주의의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같은 사람이 바로 흑암의 나라, 사탄으로부터 정사와 권세와 주권을 부여받은 사탄의 종들입니다. 스탈린은 4,500만을 죽였고 모택동은 6,500만을 죽였고 김일성도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붉은용의 사상이라고 합니다. 김정일은 지난 3년 동안에 300만 명을 굶겨 죽이면서도 핵무기, 다량살상무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은 지금 빛의 나라와 흑암의 나라 사이의 전쟁터이며 하나님과 사탄의 권세 사이의 영적 전쟁터입니다. 가장 악독한 사탄의 나라, 북한과 5만 교회 1,200만 성도를 가지고 뜨겁게 기도하는 남한과의 대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싸움터이며 하나님과 사탄과 전쟁입니다. 특히 사탄은 선교의 사명을 가진 대한민국을 둘러엎으려고 합니다.
3.1절의 애국심도 없고 6.25전쟁의 처참함과 배고픔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사탄의 사상, 공산주의의 마귀병에 자꾸 오염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사탄의 마수에서 건져준 미국을 미워하게 만들고 외세를 몰아내자는 “자주파”, 공산화 통일이라도 하고 보자는 “민족주의”, “민족공조”파들이 이 나라의 정권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독실한 신앙의 사람으로서 9.11테러를 비롯해서 자살테러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사탄의 종교와 무신론, 사탄의 사상인 공산주의를 이 세상에서 몰아내고 자유, 민주, 평화를 이 세상에 가져오려고 하는데 총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영적으로 볼 때 흑암이 하늘을 덮고 있습니다. 수천 년 역사 이래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는데 즉 사탄, 마귀와의 영적 싸움이지 혈과 육의 육신 싸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방패와 기도로 승리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
엡 6:10-18 / 이수영 목사
내일은 6월 25일, 즉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공산군이 기습남침함으로써 한국전쟁이 시작된지 51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 전쟁은 세계전쟁사 속에서도 가장 파괴적이고 비극적인 전쟁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 비극성은 더욱 큰 것입니다. 제가 대여섯 살 때에 겪은 전쟁이지만 휴전 후 10여년이 지난 고등학생시절까지도 종종 저는 무시무시한 폭격으로 천지가 불바다가 되는 꿈을 꾸면서 두려움에 떨다가 깨곤 했었습니다. 그만큼 6.25전쟁의 그 끔찍한 기억은 전쟁을 겪은 모든 이의 뇌리 속에 지워질 수 없이 깊게 새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6.25는 다시는 이 땅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안보의 자세와 국방의 의지를 다지고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 변해도 너무 정신없이 변한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민족의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의 뒤를 이어 북한의 수령이 된 사람, 아버지 이상으로 반인륜적 민족적 범죄를 저지른 그 아들에게 사과 한 마디 요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내놓으라는 대로 다 갖다 퍼주면서 대통령이 앞장서서 제발 좀 우리 한국을 방문해달라고 애걸하다시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얼어붙은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보자는 것이 햇볓정책이라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로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과 군인들의 국방의지를 녹이는 것이 우리 정부의 햇볓정책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정책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음은 우리 영해 안으로 북쪽의 배들이 무단 침범을 하고 있는데도 국방장관,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들이 몽땅 골프장에만 몰려가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햇볓정책은 군수뇌부에게서만 그 성과를 거둔 것이 아닙니다. 일선지휘관들에게서도 그 성과는 확실한 것 같습니다. 축구경기에서 상대방 선수가 공을 몰고 와서 골을 넣으려고 하면 막고 봐야지 감독에게 막을지 말지 물어보며 경기합니까? 북쪽의 배들이 우리 해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는데도 막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정말 상선인지 아닌지, 그 안에 머지 않은 장래에 우리의 국방에 큰 위협이 될 무기의 핵심부품이라도 실어 나르는 위장선인지 아닌지 직접 우리 눈으로 확인할 생각도 하지 않고 다음부터는 미리 알려만 주면 더 편히 잘 모실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식의 통사정만 하고 있었으니 이제 국민들은 누굴 믿고 발뻗고 잘 수 있을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국방장관은 북한의 배들을 저지하지 않은 것은 잘 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한 것이라면 계속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지 왜 다시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때는 장관자리를 걸고 저지하겠다고 공언을 합니까? 또 공언을 했으면 그 다음에는 확실하게 저지했어야지요. 그런데 침범이 계속되는데도 여전히 막지도 않고 장관직도 내놓지 않으니 얼마나 국민을 바보로 여기면 그러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사람들은 그것이 아주 잘 대처한 일이라고 칭찬하며 감싸기에 바쁘니 지금 우리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6.25를 즈음해서 이제 우리는 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부나 군에서 말하는 안보논리나 국방계획보다 더 본질적인 몇 가지 생각, 즉 우리의 신앙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전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나고 안 나는 것,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위시한 국정책임자들, 외교·국방 등 관계부처의 담당자들이 가능한 한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하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날 수 있습니다. 만일 전쟁이 나면 그 때에는 그 전쟁이 오래 가지 않고 이길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 동원하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인 장수 골리앗을 앞세우고 침공해온 블레셋 앞에서 이스라엘이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소년 다윗이 골리앗에 맞서 나아가며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한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위기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위로와 평안과 담대함과 의연함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라를 위하여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재앙을 면하게 해주실 것을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한반도에 다시 전쟁이 나면 그것은 6.25보다 훨씬 더 큰 비극이요 재앙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전쟁은 피난 갈 곳도 틈도 없는 전쟁일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 속에서 아브라함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의 사람들의 부패와 타락과 죄악이 극에 달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멸망시키고자 하셨으나 아브라함이 그 성 안에 의인 50명이 있어도 멸하시겠느냐고 하며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간청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의인 50명이 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으며, 나중에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그 재앙을 면하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며 뜻을 돌이키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의인 열 명만이라도 있으면 멸망을 면하게 해달라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하나님께서는 들어주셨으나, 끝내 회개할 줄 모른 소돔과 고모라에게 하나님께서는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리셔서 멸하셨다고 창세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전쟁불사의 협박이 북쪽으로부터 올 때 우리는 그것을 단지 호전적인 미치광이들의 망언으로만 보거나 또 뭔가 얻어내기 위한 술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사회를 향해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할 줄 압니다. 북한의 지배층의 반인륜적, 반민족적 도발행위와 범죄는 그것대로 하나님께서 응징하시겠지만,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의 타락상과 죄악을 벌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김일성이 살아있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김정일에 대해서도 종종 민족의 학살자이고 1급 전범인 사람을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랫동안 그대로 두시는지 자문해보곤 했는데, 늘 남는 답은 갈수록 극심해지는 한국사회의 죄악상을 경고하시고 회개시키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아직 그들에 대한 조치를 미루고 계신 것이라는 결론이었습니다. 북한의 존재가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우리 나라와 사회가 정치, 경제, 사회,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불의할 때입니다. 우리가 정치, 경제, 사회,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정의로운 나라와 사회를 이룬다면 북한은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평화로운 통일을 선물로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따라서 만일 다시 전쟁의 재앙이 이 땅을 덮친다면 그것은 더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이 총체적으로 부패하고 거듭나기를 거부하는 사악한 사회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또한 이 사회를 구할 의인 열 명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위하여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지리라 믿습니다. 그것은 의인을 찾는 것입니다. 의인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선, 나 자신이 앞서서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의의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안전히 지키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군사적으로 전쟁억제력을 지녔다 해도 미친 자의 도발은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월등한 물량적 전쟁수행능력을 지녔다 하드라도 이기고 지는 것은 다른 데에 달려있습니다. 베트남과 싸운 미국이 경제력이 약했거나 군사력이 부족해서 패전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땅에서 전쟁의 재앙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진짜 준비, 가장 확실한 준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준비입니다. 소년 다윗이 가졌던 그 믿음의 무장만 우리가 확실히 하면 북한은 제 아무리 핵무기, 미사일, 생·화학무기를 갖고 있고 아무리 많은 땅굴을 파고 기습도발을 하드라도 물맷돌 한 방에 쓰러지는 골리앗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의 강함은 근본적으로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 찾으려 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강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진정 싸워야하는 싸움이 무엇이고, 그 싸움에서의 우리의 강함이 어디에 있으며, 그 싸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우리가 갖추어야 할 무장이 어떤 것임을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싸움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나 세상의 전쟁이 아니라 영적 싸움이요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악하고 교활하고 집요합니다. 의인을 넘어지게 하고 사회를 파괴하며 인류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의도와 간교는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 사탄 앞에서 우리 스스로 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의 준비 가지고는 그를 대항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10-11절에서 사도바울은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신갑주, 즉 온몸을 빈틈없이 감싸주고 막아주는 갑옷을 입으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공략하는 사탄의 수법이 얼마나 다양하고 치밀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약점을 보이면 어김없이 그 틈으로 파고들어오는 것이 사탄의 공격입니다. 이 다양하고도 치밀한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무장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될 무장들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본문 14절에 보면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띠는 우리의 몸과 동작에 힘과 안정감을 줄뿐 아니라 칼을 차는 수단입니다. 그런데 진리로 그 허리띠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힘은 하나님 진리와 그 진리를 따라 사는 진실된 삶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와 함께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탄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과 싸워 이길 우리의 힘은 오직 진리라는 것입니다.
또 "의의 호심경을 붙이라"고 했는데, 호심경은 가장 치명적이면서도 넓은 표적인 앞가슴을 가려주는 것입니다. 의로 그 호심경을 삼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만이 우리의 확실한 보호임을 말하며, 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확신과 그에 응답하는 의로운 삶이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편임을 말해줍니다.
15절에 보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으라" 했습니다. 신이란 군인에게 있어서는 군화를 말합니다. 군화는 군인이 막상 움직일 수 있게 해주고 어떤 상태의 길바닥 위에서도 달리며 적을 향해 뛸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안의 복음의 준비한 것"을 군화로 신으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탄과의 가장 효과적이고 실제적인 대결은 평화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인 전도를 통해서나 말없는 우리의 삶 자체를 통해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 보다 사탄이 싫어하는 것은 없으며, 그 것 보다도 더 사탄의 영토를 좁혀가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에 좋은 전투는 없을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고 했습니다. 불화살이란 요즈음말로 하면 다연발 미사일과도 같은 것일 겁니다. 그것은 사탄의 발악적 공격이 얼마나 맹렬한 것임을 보여 주는데 그것을 막을 방패는 믿음밖에 없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북한의 미사일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 무기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임을 확실히 기억합시다. 믿음은 격추율 100%의 방어무기입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의 적중률에 대해서 의구심을 갖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염려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의 믿음의 명중도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투구는 제일 중요한 우리의 머리를 보호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위에 울긋불긋한 깃털 등으로 장식하여 군대의 위용을 과시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의 투구를 가지라"고 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 우리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에 의해 확실히 보장된 것이며, 우리의 자랑과 뽐냄은 오직 그 구원의 은혜이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은혜의 향기가 풍기는 삶을 살고, 은혜 받은 자의 증거가 뚜렷한 삶을 살라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검은 방어용 무기이기도 하며 동시에 공격용 무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탄이 가장 겁내는 것, 사탄을 막을 뿐 아니라 쫓아내고 섬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말씀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봅니다.
이 여러 가지 무장을 소개한 후 사도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한 마디로 기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또 하나의 무장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 편에 원군을 요청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대신 싸워달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승리의 보증은 없을 것이기에 기도는 우리의 가장 큰 전술이고 전략인 것입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불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셨듯이, 이렇게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바로 입으면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그 어떤 위협과 재앙으로부터도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확실한 안보와 승리의 길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국방, 그것은 우리의 신앙적 무장에 달린 것입니다. 진리와 의와 복음전도와 믿음과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약령과 싸워 이기려면
엡 6:10-20 / 이재철 목사
여러분은 마귀나, 사탄, 악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성경에는 악령이 분명히 있고,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벧전 5장8절에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
또 고후 11장4절에는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한 영의 세계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합니다.
상당수의 교인들이 ‘예수 믿고 착하게 살면 되지...’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는데
악령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 악령에 대한 2가지 오해
첫째, 악령에 대해 너무 겁을 내고 집착하는데, 그럴수록 더 빠져들게 되고, 결국은 악령에 짓눌려 일상생활까지 어려워지게 됩니다. 우리가 집중해야할 대상은 악령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둘째, 마귀가 없다고 무시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자신이 마귀에게 속으면서도 속는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악령은 굉장히 교묘하고 간사하게 활동합니다.
가정에도 보면, 유난히 마귀가 잘 역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분란이 일어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마귀가 들어 쓰는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인의 의지대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에게 조정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가정뿐 아니라, 목장이나 교회에도 이런 사람 있지만,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없으면 마귀에게 속아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감옥에 갇힌 사도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끝으로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10절)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들을 상대하는 것’이라고. (12절)
이것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 악령과 싸워 이기려면
① 영적싸움의 대상부터 바로 알아야 합니다. (11~12절)
우리가 싸울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악한 영입니다.
그러나 악령이 우리 눈에 보입니까?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마귀의 궤계에 속고 있습니다.
태초에 마귀는 아담과 하와를 속여 선악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이처럼 마귀의 속성은
첫째,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 8:44)
둘째, 다른 사람을 헐뜯고 이간질하는 참소자입니다. (계 12:10)
셋째, 부부, 형제, 성도 사이 등 모든 관계를 깨뜨리는 파괴자입니다. (베전 5장)
이러한 마귀를 속성을 안다면, 더구나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는 영혼을 사랑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 악령이 일하는 방법
① 직접 활동하지 않고, 반드시 사람을 이용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준비된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연단과 훈련을 통해, 겸손하게 만드셔서 은혜의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마귀는 반대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겸손한 사람은 못 씁니다.
마귀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 최고로 교만해지면 그때 들어 씁니다.
▶ 마귀가 사람을 이용하는 방법은?
1) 극단적인 생각을 심어주고, 극단적인 감정을 심어줍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면 사람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자살입니다.
공부 때문에, 가정불화로, 돈 때문에, 배신당해서... 등 자살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자녀에게도 마귀는 절망감과 자살충동을 심어주는데, 이는 마귀의 방법입니다.
2) 교만하게 만들어서 이용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보기 드물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충동질하자, 다윗을 시기해 죽이려했을 뿐 아니라, 교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의 말도 안 들었습니다.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전쟁에서 두 아들을 잃고, 자신도 자기 칼에 쓰러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교만하게 만들어 악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귀의 궤계입니다.
▶ 교만에도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챌 뿐 아니라, 사람의 공로도 가로 챕니다.
사도행전 12장에 기록된 헤롯왕이 대표적인 인물인데, 결국 그는 벌레에게 먹혀서 죽었습니다. (행 12:23)
교만한 사람은 남이 잘되거나, 인정받는 꼴을 못 봅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자이기 때문입니다.
② 절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자는 특히,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절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더불어 하지 않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혼자 똑똑하고 잘났기 때문에, 남들과 함께 하는걸 싫어합니다.
‘수준이 안 맞아서, 얘기가 안 통해서...’ 등의 이유로 목장모임에 나오길 꺼려합니다.
이것은 분명,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라는 걸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② 마귀는 단단한 조직과 그룹을 가지고 일합니다.
보통 사람의 연수가 70세인데, 40세까지 살다가 죽은 사람은 남은 30년을 세상에 떠돌며
귀신 노릇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17살에 물에 빠져죽은 학생은 이 땅에서 못다 한 53년을 물귀신으로 산다? 이 또한 거짓입니다.
원래 마귀는 천사장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하고자 하는 교만에 빠져 하늘로부터
쫓겨나 사단이 된 것입니다. 그때 그의 부하들도 함께 땅으로 내쫓겼습니다. (계12:9)
마귀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사람만 망가뜨리지 않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모두 병들게 합니다.
본문 12절에, 마귀는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 모든 어둠의 권세자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 졸음이 쏟아지십니까?
이 졸음 뒤에는, 악한영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들을 때, 사단이 우리 영을 혼미케 해, 말씀을 못 듣도록 조정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5장에 ‘밤낮 무덤 사이나 산속에 살면서 소리를 질러대고, 돌로 몸에 상처를 내는 (5:5)’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자행하는, 귀신들린 사람입니다.
이럴 땐 예수의 이름으로 결박시켜, 악한 영을 물리쳐야 합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여자의 자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 죽게 하므로, 주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뱀의 머리를 치는 치명타를 입히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의 이름으로 사단을 이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다른 이름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사단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본문 10절에 ‘그 분의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라고 한 말씀처럼,
주님께서 이미 마귀를 이겨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악령의 존재를 분명히 인식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리쳐 승리하는 한 주 되시기 바랍니다.
담대함의 은총
엡 6:10-20 / 손상률 목사
현대인이 안고 있는 병의 원인은 대부분이 육체의 피곤함과 정신적인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게 되는 스트레스는 극도의 불안과 초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마음의 담대함과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남다른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고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 소년 다윗은 엘라 골짜기에서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맞아 싸울 때 조금도 불안한 기색이 없이 마음의 담대함과 평온함으로 나아갔고 결국 그를 이겼습니다. 사울 왕을 위시하여 그 많은 이스라엘의 병사들이 사십일 동안 숨을 죽이고 불안에 떨고 있었지만, 나이 어린 홍안 소년 다윗은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과 평안함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습니다(삼상 17:45).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전쟁에 나가는 군인으로 묘사하였습니다(딤후 2:4). 본문 말씀 11절에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성도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면서 매일 같이 숨 막히는 격전을 치러야 되는 긴장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통과하면서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주께서 함께 하시며 안위해 주시는 은총 속에 살게 됩니다(시 23:4-5).
재난과 질병과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에서 임마누엘의 특권으로 담대함과 평안함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비결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I. 담대하게 사는 사람
마음에 담력이 큰 사람은 외부적 환경이나 급격한 상황변화에도 충격을 받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합니다. 이러한 담력이 선천적인 경우도 있고 더러는 오랜 훈련과 경륜으로 오는 후천적인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그것이 육체적인 완력에 의한 것도 있고 다르게는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신앙적인 담력도 있습니다.
(1) 육체적인 담력
사도 바울의 경우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도 남다른 담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59애 보면 열심 있는 유대교 청년들이 전도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바울이 현장에서 그들을 진두지휘 하였습니다. 이 때만해도 산헤드린 공회가 인정해 주는 젊은 랍비요 패기 있는 청년으로서 내친김에 모든 기독교도들을 박멸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달려갔습니다((행 9:1-2). 어디까지나 자기의 완력을 의지하고 겁 없이 덤벼드는 담력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 중에는 특별히 체격이 좋거나 주먹이 세거나 뱃장이 있어서 두려움을 모르고 위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령 무인시대에 나오는 인물들이거나 폭력조직의 두목일 수도 있고 그와는 다르지만 불멸의 이순신 장군이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영웅과 장수들도 남다른 담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육체의 담력은 한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과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렘 17:5).
(2) 영적인 담대함
은혜 받은 사람의 변화된 심령에 자리 잡은 담대함을 뜻합니다.
죄는 사람의 마음에 불안과 공포를 안겨주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게 만듭니다.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육신의 법이 저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는다고 말한 바울은 그 사실을 두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비명을 지르듯 절규하였습니다(롬 7:23-24). 그러나 잠시 후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고 환희에 넘치는 개가를 불렀습니다(롬 8:1-2).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 불안의 요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평안하고 담대함이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
(3) 성령으로 공급되는 능력
스가랴 4:6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는 사람은 태산 같은 무거운 것을 안고도 아무렇지 않게 견디며 이겨나갑니다. 스가랴 4:7에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삼손은 블레셋으로 가다가 딤나의 포도원 사이 길에서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손에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어 맨손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습니다(삿 14:6).
그 이후에도 수없이 블레셋 원수들이 몰려왔지만 아무런 두려움 없이 태연하게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저와 함께 하시며 순간순간 필요로 하는 힘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의 서약을 저버리고 성령이 떠나갔을 때 무력하게 블레셋 사람에게 붙잡혀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리는 등 놀림감이 되고 말았습니다(삿 16:21).
Ⅱ. 담대함의 성격
본문 말씀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싸움에 임할 때 지피지기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아야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적수가 눈에 보이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 대응하는 자세나 전략도 적절하여야 됩니다. 곧 육체적인 완력이나 외부적인 담력을 가지고는 곤란합니다.
(1) 내적인 담대함입니다.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천하를 주름잡던 장수나 영웅들이 우상처럼 떠받들어 졌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당당한 체구와 풍채를 갖추고 위엄이 있어서 많은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그 당시 로마의 원형극장에서는 건강한 투사들이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하였고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시민들은 열광하며 환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싸움이란 이런 혈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대상 곧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대적과 마주설 때의 담대함도 겉으로 나타나는 외적인 것이 아니라 숨겨진 내적인 담대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사울 왕 같이 겉으로 볼 때 대단한 위용을 갖추고 힘이 있는 것 같으나 내적으로는 허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다윗과 같이 나타난 외모는 초라하고 볼품이 없어도 내적으로 단단하고 힘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실속 있는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6).
(2) 결단하는 용기입니다.
여기 “담대히”라는 말(παρρησία)의 어원을 살펴보면 첫째 언론의 자유(freedom of speech)를 뜻합니다. 곧 어떤 억압이 있어도 당당하게 말하는 자유입니다. 둘째는 ‘심적 용기’를 뜻합니다. 이것은 확고한 자기의 철학이나 주관에 따라 흔들리지 않은 마음의 담대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공중 앞에 선 엄연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경우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신앙과 변화된 인격의 공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과의 교통으로 심적인 담대함과 평안함에서 나타나는 행동인 것입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다음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억압을 당하며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자기가 소경이었던 것과 예수로 말미암아 그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무 두려움 없이 증언하였습니다(요 9:25). 오순절 이후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무서운 핍박이 몰아쳤을 때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하고 당당하게 대처하였습니다(행 4:19-20).
(3) 자기를 이기는 담력입니다.
빅트로 위고(V. Hugo)는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세 가지 싸움이 있다. 첫째는 자연과의 싸움이요, 둘째는 사회악과의 싸움이며, 셋째는 자신과의 싸움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렵고 힘든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지혜자 솔로몬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6:32). 옛날 중국의 시인 왕양명(王楊明)은 ‘산 중에서 만난 적은 싸워 이길 수 있어도 자기 안에 있는 적은 이기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고 하였습니다(롬 7:23). 그러므로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속에 있는 죄성과 육체적 소욕들을 제압하고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인간의 연약성을 알고 고백하는 자이기 때문에 확실히 거기에 대처하는 지혜와 능력을 힘입게 되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 육체의 정욕을 딛고 이긴 사람은 자기를 무너뜨리는 요소가 제어되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안심하게 되고 두려움 없이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Ⅲ. 담대함의 목적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남다른 특권과 은총을 베푸실 때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선용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일찍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5:1). 그 이유에 대하여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8:19). 여기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제게 담대함의 은총을 주셔서 그가 하여야 할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19-20절).
(1) 힘써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바울처럼 감옥살이를 하거나 법관에게 불려나가 심문을 받게 되는 경우 어떻게든지 자기를 변명하고 석방되기 위해서 기를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 바울의 경우는 로마 감옥에서 미결수의 몸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유리하게 재판을 받고 석방되어 나가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복음 증거자에게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어 보내실 때 사람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고 채찍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마 10:17-20).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담대하게 사는 은총을 받아서 하나님의 요구와 그 목적을 수행하는 일에 진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승리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24시간 근위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매우 답답한 처지에 놓여 있었으나 오히려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품위를 지켜 나갔습니다.
본문 말씀 20절에 보면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자신이 쇠사슬에 매여 있어도 하나님의 사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적인 수도요 정치의 중심지로써 여러 나라에서 외교적 임무를 띠고 나온 사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교관으로서의 신분을 보장 받고 치외 법권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거기 비하여 바울은 영어의 몸이 되어 비참한 지경에 있었지만, 그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사신이라는 엄청난 자부심과 담대한 은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신뢰를 받았으며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담대함과 능력이 행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 한다”고 하였습니다(고후 4:8-9).
그는 이와 같은 승리적 삶의 비결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빌 4:13).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0-20 / 이성우 목사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살아가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서거나 우리가 어떤 합당한 조건을 갖춤으로서 된 것이 결코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기초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불러주심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찾아오셔서 사랑의 품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우리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결단하며 응답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게 되는 온갖 특권들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었고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영적 자녀들과 마찬가지인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신령한 연합을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에베소서 4장과 5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생활이라는 것은 생명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공급해 주심으로 생명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야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구체적인 삶의 방법으로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더 나아가서 성령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빛의 자녀들의 구체적인 삶의 자세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삶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부모에게 보여주어야 할 삶의 자세로는 주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당시 사회 구성원의 또 하나의 중요한 축이었던 상전과 종의 도리를 언급함으로써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사회 제반 영역에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 본문 말씀이 시작되는 에베소서 6장 10절 말씀 직전까지 힘주어 말씀하고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온전하고도 하나님 앞에서의 합당한 삶을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언급한 사도 바울은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인 에베소서 6장 10절-20절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이러한 삶을 해치고 허물어 버리려고 하는 정체인 사단의 속성과 그들의 공격, 그리고 이런 사단의 공격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섬멸함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도들이 싸워야 할 영적 전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곧잘 영적인 전쟁으로, 그리고 신령한 영적인 경주로써 빗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그의 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영적인 전쟁이요 영적인 경주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의 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인 싸움의 대상이 있고, 영적인 경주의 경쟁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선 우리의 영적인 대적인 사단은 우리의 약점과 틈새를 언제든지, 항상 철저하게 노리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인정사정없이 공격해온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항상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의 대적인 사단의 정체와 사단의 주요 공격 방법에 대한 분명한 정보와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야만 사단에게 공격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있게 될 것이며, 설사 공격해 온다고 할지라도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방어해 냄으로써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몸인 교회를 지켜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이러한 영적인 환경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약점과 허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사전 분석과 여기에 대한 보다 철저한 대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영적인 대적인 사단과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쟁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적인 싸움은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과 뗄 수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과 관련해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만약에 우리 자신 한 사람이 영적인 싸움에서 지게 된다면 그 패배는 한 사람의 패배로 끝나지 않고 주변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패배로 이어지게 되어서 공동체 전체의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사단의 전술, 전략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곧 사단의 전술, 전략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공동체 전체를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고 가장 작은 단위로 조각을 내서 약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공격해서 서서히 공동체 전체를 잠식해 들어오는 방법을 즐겨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과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대적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대비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사단의 끊임없는 공격을 물리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철저하고도 완벽한 영적인 무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말씀의 10-11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하기 전에 10절 말씀에서 ‘강건하여 질 것’을 권면하고 있는데, 이 단어는 현재의 강건함이 날마다 경험되어져야 함을 의미하는 말로,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날마다 강건해야 함을 권면하면서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는 ‘주 안에서’라는 것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 그 뜻에 순종함으로 강건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강건해지기 위한 두 번째 방법으로는 ‘그 힘의 능력으로’라는 것으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고 그를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며,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구원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강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11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의 하 반절 말씀에서는 ‘이는 너희가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대적과의 싸움에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신갑주’는 전쟁에 나아가는 군인이 방어와 공격을 할 수 있는 모든 장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울은 그 앞에 ‘하나님의’라는 속격을 사용함으로써 전신갑주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전신갑주를 입음으로 철저하게 무장하되 이 세상의 최고의 무기와 방어용 장비로 무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를 사도 바울은 본문 12절 말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말씀은 우리의 영적 전쟁의 대적인 사단의 정체에 대한 설명으로, 한 마디로 말해서 ‘악한 영적 세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 악한 영적 대적인 사단의 정체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보았던 환상을 기록해 놓은 요한계시록 13장의 말씀을 보면, 1절과 11절에 각각 다른 두 짐승에 대한 환상을 말씀하고 있는데, 한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고, 또 한 짐승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짐승은 사단을 상징하는 용으로부터 각각 권세를 받아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고난을 주면서 그들을 유혹하고 시험에 들도록 역사하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전자는 이 세상의 각종 권력을 바탕으로 한 물리적인 힘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거짓선지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회의 내부에 들어와서 복음의 바른 진리를 말살시키고 부패하게 만들어서 시험에 들게 만드는 사단의 역사 방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단의 공격 방법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 14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성도들이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내용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이들 무장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도들의 온 몸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있는 방어용 장비들로, 이것은 결국 사단으로 하여금 공격할 틈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중에서 17절 하 반절에 나오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은 성도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 중에서 유일한 공격용 무기로,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와 감동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들 전신갑주의 내용 가운데서, 마지막 무장이라고 할 수 있는 18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의 영적 전쟁의 대적인 사단을 대적하고 승리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무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이 말씀은 곧 성도들의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끌어다 사용할 수 있는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9-20절 말씀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전쟁에 용감하게 임할 것을 권면했던 사도 바울이 솔선수범해서 영적전투의 모범을 보이면서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영적전투를 위한 중보의 기도로 함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싸움에 동참해 줄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복음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하며 영적 전쟁의 선봉에 서서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러내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의 사역의 승패가 성도들의 중보의 기도에 달려있음을 깨우쳐 주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단의 무리들을 철장권세로 무저갱에 가두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되기까지 성도들을 향한 사단의 공격은 끊임없이, 그리고 악랄하고 교묘하게 지속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을 지키고, 가족들의 믿음을 지키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지키고,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단의 손아귀에서 구원해 냄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대장되신 주님을 앞세우고 사단과의 영적인 전쟁에서 싸워 이기심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부활절 이후에
엡 6:10-20 / 강용규 목사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김연아 선수에게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아마도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나서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피겨스케이트 선수로 세계 정상에 선 후가 가장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12에서 “서 있는 자들아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신앙의 선배들이 넘어진 때를 살펴보면 가장 정상에 선 직후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면 나라가 가장 강했을 때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인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자신의 아내로 취하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도 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과 850대 1로 싸워서 이기고 난 직후에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이 “내가 기손 시냇가에서 죽은 바알 선지자 중의 한 명처럼 내가 내일 이 맘 때까지 엘리야를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엘리야는 로뎀나무 밑으로 도망가서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성경을 통해 보게 됩니다.
이렇듯 신앙의 위기는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때, 축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때가 바로 위기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날 부활주일을 보냈는데 부활절을 보내고 나서 우리가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 모시고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더 주님 모시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4장에 넘어가자마자 예수님께서 광야로 내몰리게 되고 거기서 40일 동안 금식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마귀의 시험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 물리치셨습니다.
부활절 이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우리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어떤 경우에 만나뵐 수 있겠습니까? 바로 예배 시간에 주님을 만나뵐 수 있습니다. 또 어디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뵐 수 있을까요? 바로 성경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디서 부활의 주님을 뵐 수 있을까요? 전통적으로 성찬식에서 만나뵐 수 있습니다. 예배 의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성찬예식입니다. 사도행전을 읽다보면 “성도들이 모여서 떡을 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찬예식을 통해서 예수님과 신비로운 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뵐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0년을 시작하면서 전 국민은 축제였습니다. 동계올림픽에서 선수들이 기대이상의 실력을 보여줘서 금메달을 많이 땄습니다. 500m 남자, 여자 모두 금메달을 땄고, 10000m에서도 금메달을 땄으며, 무엇보다 모든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김연아 선수의 금메달이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랬었는데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장례식 분위기로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요즘 뉴스만 틀면 온통 천안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즐거웠지만 내일은 슬퍼지는 그런 우여곡절이 많은 것이 바로 우리 인생인 것 같습니다. 굴곡이 너무나 심합니다. 그런데 이런 굴곡 가운데서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우리는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는 시편 1편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러분, 말씀에 뿌리 내린 사람은 시절을 좇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은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내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자주 음미하고, 하루를 말씀으로 시작하며 살아간다면 말씀에 대한 열매를 맺을 줄 믿습니다. 그 열매가 바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승리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부활 이후에 가져야 할 중요한 가짐은 축제를 벌이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나서 ‘근신하라, 깨어라, 우는 사자가 오늘도 너희를 삼키려고 두루 찾아다닌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다른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족들도 다락방에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 때 바람 같은 성령,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 능력의 성령이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족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서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살리는 한신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승리한 뒤에 ‘오히려 더욱 더 전신갑주를 입어라.’ 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해서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절대로 승리한 뒤에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이겼습니다. 누구도 여리고 성 무너뜨린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합지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한 바퀴씩, 창과 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일곱 째날 일곱 바퀴 도니까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그렇게 여리고 성을 점령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점령할 성은 여리고 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작은 규모의 아이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 점령에 실패합니다. 너무 자만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리고성을 점령한 후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 드리지도 않고 아이성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여러분, 부활절 이후에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더 깨어서 성경말씀 읽고, 기도하고, 겸손해지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교만한 자는 내가 물리치지만 겸손한 자는 세워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교만하거나 자만해 말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부활절 이후에 더 겸손하고, 더 낮아지고, 더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절 이후가 중요합니다. 어려울 때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는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어려울 때는 힘든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잘될 때가 문제입니다. 그때 다 쓰러집니다. 우리가 부활절 이후에 더 말씀에 뿌리를 내리셔서 말씀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을 늘 모시고 기도를 통해서 성령충만함을 받으시고 겸손하셔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더 귀하게 쓰임 받는 우리 한신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엡 6:10-20 / 김흥규 목사
본문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내용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10절에 보면 주 안에서와 주님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해지라는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이나 영어는 모두 능동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지만 희랍 원어 성경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스스로 강건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힘찬 능력 안에서 굳건해지라는 것입니다. 강건함은 우리 내부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둘째로,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면 강건해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 두 가지 권면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초점을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전신갑주가 무엇입니까? 전신갑주는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자기 몸을 보호하고 적군을 무찌르기 위하여 완전무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활동하던 주후 1세기는 로마 제국이 세계를 정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신갑주를 취한 로마 군인들을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을 자주 군인과 비유하고 있습니다(고후 10: 3-6; 살전 5: 8; 딤후 2: 3-4 참조). 바로 이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건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는데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초점을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맞추되 특히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본문 속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우리는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만 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어떤 무기로 이루어졌는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한 뒤 어떻게 해야지만 항상 깨어서 영적 싸움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⑴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만 하는 이유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11-13절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우리 다함께 읽어봅시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이 말씀 중에 특히 11절을 보면,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성도들이 악한 사탄과 영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입어야 할 영적인 무기인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고생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고후 11: 23-27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이 어떤 고난을 받았는가를 자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세 번 채찍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해서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에 떠있어야만 했습니다. 여러 차례 선교 여행을 하는 중에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도 당했습니다. 또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실로 바울이 겪은 고생은 소설책으로 다 써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정말로 위험한 것은 이와 같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겪는 모든 고난의 근저에는 어떤 우주적 악이 있는데 바로 사탄의 세력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서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 즉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로 하는 영적 싸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중에 권세 잡은 악한 영(엡 2: 2 참조), 즉 사탄의 힘과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는데 이 전투는 보이는 대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벧전 5: 8-9a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영적 전쟁터에서 영적 싸움을 하는 영적 군인은 영적 무장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와 같은 영적 무장을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 선생은 영적 전쟁에서 성도가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힘찬 능력으로 강해져야 하는데, 강해지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⑵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이루는 여섯 가지 무기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악한 마귀와 싸워 승리하기 위해서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어떤 무기들로 완전 무장해야 할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무기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철이나 가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영적인 무기들입니다. 이제 본문 14-1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다섯 개의 방어용 무기와 한 개의 공격용 무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진리의 허리띠
제일 먼저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동여야만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몸 중에 허리가 참 중요합니다. 허리에 이상이 생기면 우리는 무거운 물건을 들을 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균형이 깨집니다. 그러므로 허리를 튼튼하게 해서 허리띠를 꽉 조여 매는 것은 군인은 물론이고 보통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한 지 모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허리띠를 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지춤이 내려와서 도저히 전투를 할래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허리띠를 말할 때 그 당시 로마 군인들이 착용했던 가죽으로 만든 앞치마(leather apron)를 의미할 수 있는데, 이것은 병사의 하복부(lower abdomen)와 성기(groin) 부분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했습니다. 아니면 군인이 칼을 꽂기 위하여 허리에 둘러맨 벨트를 지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군인이 허리띠를 착용함으로서 몸의 균형을 잡아서 행동이 민첩해질 수 있으며 또 허리띠에 칼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기들을 주렁주렁 매달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싸움을 하는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동여매야 합니다. 요 14: 6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진리이신 것을 믿으며 이 진리로 허리를 동여 매 몸의 균형을 잡아야만 합니다. 그래야지만 바지춤이 내려와서 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이라는 진리의 허리띠를 튼튼하게 동여맬 때 가지가지의 영적 무기들--예컨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갈 5: 22-23)--을 이 허리띠 위에 꽂을 수 있습니다.
② 의의 흉배
둘째로, 악한 영을 대항하기 위하여 의의 흉배를 붙여야만 합니다. 흉배는 말 그대로 가슴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우리의 가슴은 식도(throat)와 심장, 폐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마 신체 기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 바로 이 가슴 부분에 집중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인들에게 흉배는 매우 중요한 호신용 무기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 즉 정의의 흉배로 무장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가 무엇입니까? 죄인된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합 2: 4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칩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 바울 역시 롬 5: 1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선언합니다.
여러분, 죄인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우리 가슴에 흉배로 붙여 무장합시다. 악한 사탄이 결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의를 뺏을 수 없으며 이 의는 흉배와 같이 우리의 가슴을 보호하여 줄 것입니다.
③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
셋째로, 악한 영과 싸워서 이기려면 신발을 잘 신어야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신발을 삼아야 합니다. 군인들이 신는 군화는 치열한 전투나 먼 행군으로부터 발을 보호해줍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서 군화를 삼아야 합니다.
복음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다 주고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소동이 있는 곳에 평안을 가져다 주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 9: 6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을 '평강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는 불안과 다툼을 가져다 주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놀라운 평화를 가져다 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 52: 7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오늘 여러분들은 평화의 복음을 신발 삼아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기에 바쁜 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④ 믿음의 방패
넷째로, 악한 영들과 싸우기 위하여 우리는 믿음의 방패를 손에 들어야 합니다. 방패는 적군의 칼날과 화살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급한 방패는 그 당시 로마 군인들 가운데 최전선에 서서 전투를 하던 병사들이 가졌던 특수 방패였습니다.
이 방패는 아주 두꺼운 두 겹의 나무 위에 천과 짐승 가죽을 덮어 씌워서 만든 초강력 방패였습니다. 제일선에 정렬한 병사들은 전투를 개시하기 전 이 방패를 물에 깊이 담급니다. 이제 물이 흠뻑 축여진 방패는 한 동안 축축한 물기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전투가 시작되어 적군이 아군 진영을 불바다로 만들 생각으로 마구 불화살을 쏘아댈 때 이와 같이 물기를 머금은 방패로 막아냅니다. 그러면 아무리 무서운 인화성 역청(pitch)으로 뒤덮인 불화살이 날라 온다고 할지라도 이 방패로 막기만 하면 다 피∼시식하고 꺼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믿음이야말로 이와 같은 초강력 방패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악한 영들이 격렬한 불화살을 마구 쏘아댄다고 할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 11: 6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이 믿음이라는 선물만 꼭 붙들고 있으면 어떠한 영적인 싸움에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을 방패로 삼으십시오!
⑤ 구원의 투구
다섯째로, 악한 영들을 대적하기 위하여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머리 역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든 오토바이를 타든 헬멧을 꼭 착용해야 합니다. 머리는 아주 예민한 부분이라서 조금만 부딪혀도 생명에 위험을 가져다 줍니다. 이렇게 중요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군인들이 철모를 쓰듯이 우리는 구원으로 머리에 뒤집어 써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이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때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은 죄와 죽음 속에 빠져 자유를 잃어버렸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자유와 영생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롬 10: 9-10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그리스도로 시인하고 고백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구원을 투구처럼 쓰셔서 악한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여러분들의 머리를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⑥ 성령의 검
이제 여섯 번째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이루는 최후의 무기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다섯 가지 무기가 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 무기인데 반하여 성령의 검 하나 만큼은 공격 살상용 무기입니다. 악한 마귀를 단칼에 무찔러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 선생은 '성령의 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 언제나 성령이 역사해서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 4: 12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마귀가 여러분을 괴롭힐 때 성령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마 4: 1-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40일 동안 광야에 나가 시험을 받으실 때 마귀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치셨습니까? 세 번 다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던지셨을 때 마귀는 두려워 떨며 예수님으로부터 떠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늘 말씀으로 충만하셔서 악한 영들을 제압하시기 바랍니다. 시 1: 2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실 때 악한 영들이 놀라 쫓겨갈 줄로 믿습니다.
⑶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뒤 항상 깨어서 준비할 수 있는 방법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지만 깨어서 전투에 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다 취해서 완전무장을 했는데 어떻게 해야지만 마귀와의 싸움에 당당하게 임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이 18절에 나와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깨어서 근신하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사탄의 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풀지 않도록 늘 기도의 줄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 자신만 위해서 기도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 즉 우리와 똑같이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힘을 얻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어느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그 약점을 타고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허점이 보이지 않도록 완전 무장하십시오!
무장이 다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여러분 자신과 이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 모두는 악한 영과의 우주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이 악한 전쟁에서 승리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소유하라
엡 6:10-20 / 오정호 목사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입어야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철학이나 유행의 허리띠가 아니라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진리로 허리띠입니다.
둘째는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흉배’는 심장을 보호하는 무기입니다. 심장은 우리 육체에 있어 생명이나 다름없는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의’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의인이라고 인정하십니다.
셋째는 평안의 예비한 것으로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은 평안을 주는 것이기에 복음을 접하기 전에는 마음의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일 때 내 마음의 분쟁은 종식됩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처지가 초막이든 궁궐이든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곳 복음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넷째는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악한자의 화전 즉 핍박, 의심, 절망 등 마귀의 모든 공격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에 견고한 방패를 들어야 나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영혼도 보호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가진 복음의 능력에 대한 확신,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강한 신뢰 등 구원의 확신으로 가득찬 투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소유하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높여야 합니다.<17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누리라는 의미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고 말씀의 권위에 도전하고 말씀을 곡해하는 시대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때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종교개혁은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수도사였던 루터는 젊을 때 성 베드로 성당을 순례했는데, 고행으로 하나님의 의가 얻어지는 줄 알고 언덕과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 가봤습니다. 자신을 철저하게 금욕주의로 다스렸지만 마음의 평화는 점점 더 사라지고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교황청에서 파견된 테질이라는 사람이 “여러분의 동전이 헌금함에 ‘땡그랑’하며 떨어지는 순간에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에 올라갑니다”는 성경에도 없는 말을 가르치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자로써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그러는 중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로마서1:17)는 말씀에 그 영혼이 부딪혀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나 면죄부나 헌금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진리를 붙잡게 되었고 신앙 양심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여러 가지 회유와 협박이 있었고, 결국 보룸스 회의에 참석하여 황제와 제후들, 선 제후들, 23명의 공작, 8명의 후작들 세상의 대표들이 화려한옷을 입고 즐비하게 늘어선 앞에서 루터는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최후통첩을 받았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요청하고, 하룻밤을 꼬박 세우며 “오 하나님, 제가 진리 가운데 서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했습니다.
많은 전기작가들은 ‘마틴 루터는 한 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주님 앞에서 진리대한 싸움에 대해 몸부림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날 다시 출두하여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분! 나의 양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습니다. 내가 인용하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입니다. 나는 그 진리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라는 선언을 하고 진리를 변증했습니다. 이 시대는 새로운 개혁이 필요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각자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서 물려준 말씀에 우리는 순종하지 못함으로 소홀히 대합니다.
첫번 종교개혁은 빼앗기고 닫혀진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성도들의 손에 되돌려주는 것이었고, 그 결과로 우리 손에 성경이 들려 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우리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높이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요한복음14:21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주님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무시(無時)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18절>
기도는 성도들의 내적인 상태를 결정짓습니다. 군인의 기강, 충성 등은 내면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군인정신에서 비롯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기강은 우리의 내면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원리대로 얼마나 질서 있게 훈련되어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기도야말로 십자가 군사의 내면의 상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었어도 이 전신갑주가 정상적으로 올바르고 힘있게 가동되기 위해서는 신앙자의 내면의 확신 즉 기도로 주님과의 관계가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마귀에게 기도를 약탈당하고 있습니다. 학식의 수준, 경제적인 수준 등 모든 것은 다 나아졌지만 기도의 수준만은 곤두박질했습니다. 당신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다른 것 다 갖췄어도 기도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결여되면 믿는 자가 믿는 자답게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사막으로 변합니다. 기도만이 성도의 심령을 기름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시로 성령 안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성령의 도움을 받아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번 40일 불꽃 새벽기도회가 우리 각자에게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은혜의 시간들이 되어, 우리의 내면이 무장되고 영적인 수준이 한 단계 높아지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게 많지만 그 중에서 기도를 반드시 물려주어야 합니다.
3. 말씀을 위해 값을 치뤄야 합니다. <19,20절>
사도바울은 자신을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의 사신으로 복음을 말하다 보면, 또는 말씀을 말하기 위해서는 쇠사슬에 매일수도 있고 매여야 합니다.
수많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값으로 지불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값을 치룰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희생하겠습니까?
바울은 자기가 증거한 복음 때문에 쇠사슬에 매여 남들에게 조롱 당하는 입장이지만, 묶여서도 복음을 담대히 외치겠다는 십자가의 용사였습니다.
1517년 10월 31일에 있었던 종교개혁 482주년을 기념하며 이 시대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며, 영적으로 기도로 깨어 있으며, 내가 전하는 복음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지불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높이는 삶을 통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삶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순종하고 전하는데 희생을 기꺼이 지불하여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게 하소서!”
영의 싸움
엡 6:10-20 / 김홍도 목사
어떤 청년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곧 제대를 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도 집안 식구들도 모두 알아보지를 못하고 자꾸 다른 아내만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몹시 추운 겨울 바람에 심한 쇼크를 받아 본래의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과거를 회상하게 되었고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도 알아보게 되었고 자기 자신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단 이 청년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들도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진정한 자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겨우 자기를 생각한다고 하는 것이 육신만을 생각하고 육신만 잘 먹고 입고 평안하게 살면 제일이요, 다 된 줄 아는데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이 발견하는 자기(自己)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99%의 전력을 다하지만 진정한 나, 즉 속사람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영혼을 위해서는 백분지 일의 시간도 노력도 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허다하게 많음을 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이는 육신은 제 아무리 잘났어도 백년 미만 살다가는, 반드시 늙고 병들어 숨을 거두고 땅속에 묻히고야 만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종종 말씀을 드립니다만 우리에게는 이 육신만이 아니라 육(flesh)과 혼(Soul)과 영(Spirit)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이 육은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육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신도 우리의 혼과 영을 담고 있으므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영원히 사는 우리의 속사람 곧 영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영혼에 대해서 더 잘 되도록 관심을 기울여야 할텐데 내 속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무시하고 육신만을 제일로 생각하여 육적인 삶만을 살아 보려는 인간들을 보게 될 때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마치 계란의 노란자위나 흰자위는 다 빼버리고 껍질만 굴러다니는 것과 같이 중요한 영과 혼은 다 빼버리고 육신만 살아 움직이는 한심한 인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8백여명 이상이 모여 앉았지만 모르긴 해도 중심의 영혼은 어디 가고 육신만 앉아서 졸면서 억지로 예배드리는 사람도 혹 있을 것입니다. 아내가 나가자고 졸라대니까 할 수 없이, 속장이 들들 볶으니 억지로, 또 이 주간 안 나가면 목사나 전도사가 지겹게 찾아올 것이니 체면상 억지로라도 나가 앉아 주자 하는 생각으로 나와 앉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 육신이 나와 앉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된 마음과 영적으로 드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여러분들은 이 영적인 면에 관심을 가시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현명한 척 했겠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육적인 삶만을 제일로 추구하던 분들이 계실 줄 압니다. 아무쪼록 무엇보다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삶, 곧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먼저 천국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영의 문제를 앞세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지금까지 영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영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聖靈)이 있고 다음에는 악령(惡靈)과 심령(心靈)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 믿어지지 않는 사람은 이상하게 들려질지 모릅니다. 또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캄캄한 사람은 하나님도 못믿겠는데 도데체 영이 어디있느냐고 의심하고 속으로 비웃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쉬운 예로, 라디오나 TV를 아무데서나 틀어 놓고 다이알만 맞추면 누구나 들을 수 있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파(電波)나 영파(靈波)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이라고 하는 다이알을 하나님에게 바로 맞추기만 하면 영의 세계를 탐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정확한 믿음의 다이알을 맞추면 하나님의 영인 성령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것이고 바로 맞추지 못하면 라디오 속에서 엉뚱한 방송이나 잡음이 들리듯이 혼돈된 악령의 세계에 붙잡히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자꾸 성령을 강조하는지 아십니까? 이 성령은 우리에게 어디까지나 소망적이요, 창조적이 요, 능동적인 삶을 살게 하여 승리하도록 하지만 악령은 우리를 혼돈케 하여 질서를 파괴하고 불안과 근심과 걱정을 끌어 들여 종국에는 패배케 하고 멸망케 하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예수를 잘 믿던 사람, 혹은 열심히 봉사 잘 하던 사람이 모두 못하게 되는 것, 이것은 다 악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영의 세계 속에 우리가 파묻혀 사는데 이 중에 어떤 영을 선택하느냐는 여러분 속에 있는 심령(心靈)으로 선택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령이 맑고 깨끗하면 성령을 모셔들일 것이고 반대로 더럽고 추잡하고 악하면 악령이 여러분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의지적으로라도 성령을 사모하고 모셔들이십시요. 그리할 때 여러분의 생애 속에는 놀라운 변화와 승리의 역사가 있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한 가지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악령은 우리가 싫다고 해도 강제로 들어와 역사하지만 성령은 인격자이시므로 우리의 심령이 의지적으로 믿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만 내 속에 찾아와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령의 내주하는 역사가 있고 진정 능력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체면적인 신앙이나 신사적인 기도 갖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하게 빈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이 되어 회개하는 심정으로 부르짖고 모든 말씀을 "아멘"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간청할 때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분명히 믿고 또 철저하게 회개하는 심령으로 성령을 사모하고 환영하며 모셔 들이게 될 때에 비록 우리는 자격이 없고 말구유와 같이 더러운 심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찾아오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다이알을 바로 맞추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역사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은 고장나지 않은 라디오와 같이 맑은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은 성령이 하시는 말씀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 주시고 탄식하며 기도해 주십니다(롬 8:26). 그리고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요 14:26).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죄가 깨달아지고 회개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성령은 또 슬프고 고통스럽고 낙심될 때에 위로해 주시는 분인 것입니다. 성령은 또 아무리 오해하고 곡해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겨도 이해하게 하고 용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도 약하고 불안과 공포속에 살던 사람이 담대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분명히 강권합니다. 성령을 바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비방을 받고 욕을 먹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바른 성령을 체험하여 본이 되고 따라서 능력있는 신앙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악령의 역사에 대해서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악령의 역사도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는데 하나는 육신적으로 또 하나는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럼 먼저 악령이 육신적으로 나타나는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병자를 향해서 괴롭히는 귀신아 물러갈지어다고 명령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육신적으로 대체로 질병을 갖다 줍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같은 이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평생 몸에 질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이 혹시나 교만할까하여 악령을 통해 질병을 얻게 하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정신적으로는 불안과 번민과 고민을 갖다줍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를 못합니다. 자살하고 싶은 마음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도벽이나 변태성욕이나 음란한 생각, 이 모두가 악령이 갖다 주는 정신적 질환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의지적으로도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기도하여 담대하게 악령의 세력을 탄압할 수 있는 영적 무장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도 보면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흉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신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의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다른 비결은 없고 성령의 역사와 마귀의 역사를 빨리 분별하여 믿음과 기도로 무장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악령의 세력을 물리쳤기 때문에 부흥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앞으로 계속하여 2천명, 3천명 부흥되려면 목사나 전도사만이 아니라 우리 온 성도가 다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고 영의 세계에서 늘 성령을 의지하여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게 될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있어질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린다면 악령의 결과는 말씀에서 이탈된 신비적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여 죄를 짓게 합니다. 그외에도 교만, 음란, 혈기, 의심 등이 모든 것이 악령의 역사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이러한 악령의 세력에 억눌려 인생의 패배자가 되지 마시고 매일 매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의 세계를 분별하여 악령의 세력을 물리치고 성공적이고 창조적이고 능력있고 승리하는 생애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의 승리
엡 6:10-20 / 박조준 목사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인에게 국한된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 스도인에게는 의미심장할 뿐 아니라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모든 그리스도 인들에게는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로 생각하면 이 편지는 그 당시 사람들보다 오늘 우리에게 더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왜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 이 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영적인 싸움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그리스도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좋아지고, 잘 되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쉽고 편한 것만이 아니라 투쟁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와 싸웁니까? 마귀와 싸웁니다. 이 마귀와 싸워서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 다. 마귀는 그렇게 강합니다. 마귀의 지혜는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히 높습니다. 마귀를 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 와 싸우라고 말씀하면서 우리 혼자 싸우면 질 수밖에 없으므로 주님과 함께 싸우라고 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싸울 때 이 싸움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승리할 수 있다고 보장해 주십니다. 로 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 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꼭 믿습니까? 우리는 약하나 주 예수는 강하십니다. 우리 는 어리석으나 주님은 지혜로우십니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적이 누굽니까? 우리의 적은 마귀입니다. 여기 오늘 주신 말씀이 종말로 라는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남편과 아내 와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상전과 종의 관계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그의 논리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종말로. 다시 말하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 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지금까지 제가 권고하고 격려한 그 모든 이야기가 모 두 헛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싶어도, 아무리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도 이 사실을 배우지 못하면 우리의 싸움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행복을 파괴하고, 우리의 삶을 패배로 이끌기 위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영적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 입니다. 경계를 늦추지 마세요. 여러분, 우리에게는 적이 있습니다. 그 적이 바로 마귀입니다 하 는 말입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역사를 하는, 다시 말해서 삶의 무대 저 배후에 있는, 보이지 않는 부분에 이 마귀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 인들은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마귀가 있단 말인가? 하면서 마귀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마귀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에게 마귀는 얼마나 안심하고 들어가 공작 을 시작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마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나 보세요. 요한계시록 12장 9∼10절입니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 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또 우리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비참하 게 만들어 우리 자신을 학대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마귀라는 말의 본래 뜻은 던진다 는 뜻입니다. 그 사이를 갈라놓는다 는 뜻이 있습 니다. 그러므로 이 말 자체가 마귀의 역사는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를 누가 갈라놓습니까? 마귀입니다. 아내가 짜증나 보입니까? 남편이 무능해 보입니까?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목사와 교인을 갈라놓습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형제와 형제 사이를 갈라놓 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시누이와 올케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이 모두가 마귀짓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쉽게 인간 관계를 파괴하는 마귀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마귀가 어떻게 자기의 목적을 달성합니까? 마귀의 궤계 라고 했습니다. 궤 계 라는 헬라어의 뜻은 방법 이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가정을 깨뜨리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교회를 깨뜨리기 위해서 요동을 합니다. 아마 우리 교회가 예배당을 신 축하려고 하나하나 진행되어 나가니까 지금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건축 을 위해서 힘써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매일 오전, 오후에 모여서 기도하는 데 참여하시기 바랍 니다. 형편이 여의치 못하신 분은 댁에서,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부대에서, 병원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의 궤계를 쳐부수는 것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도 교회에 마귀가 역사한 것을 아시지요? 고린도교회는 초대교회 중에서 가장 분열의 아픔을 심하게 겪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관계가 깨어져 파벌이 생겼습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하면서 갈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지도자를 불신했습 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까지 불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고린도교 회 성도들 사이에 긴장과 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현상의 배후에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을 보세요. 뱀이 그 간계로 이 와를 미혹게 한 것같이 하는 말이 나옵니다. 누가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갈라놓았습 니까? 마귀입니다. 여러분, 속지 마세요. 우리가 인간관계의 위기를 경험할 때 그것은 단순히 우리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이 문제의 배후에는 반드시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정신 차 리셔야 합니다. 깨셔야 합니다. 이 모든 역사의 혼미와 갈등의 배후에 마귀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 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한다 고 했습니다. 주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그 마음이 엷어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내 영 적인 삶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특별히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 고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와서 이 교회를 위협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이 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입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했습니다. 스스로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고 그럴듯한 이론을 가지고 들어와서, 영광스런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흔들리게 만들고 있는 이 세력의 기원은 마귀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이든, 직장이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든 간에 모든 종류의 관계를 파괴 하는 배후 세력은 언제나 마귀라는 사실을 여러분께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악령 들은 하나의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조직력으로 인간의 세계에 침투해서 사람들을 다스리는 세력, 그들이 정사들입니다.
이들은 아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궤계를 쓰는 지혜가 있습니다. 마귀의 지혜는 우리가 가히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 귀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전지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마귀는 능력이 있습니 다. 마귀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한 존재는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러므 로 그렇게 힘이 센 마귀와 싸워 이기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지혜롭습니다. 마귀는 심리학 박사입니다. 그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압니다. 교묘하게 인간의 생각 속에 들어와서 작은 생각 하나를 심습니다. 가룟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팔게 되었습니까? 누가복음 22장 3절을 보세요.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 단이 들어가니 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싸움의 배후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인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간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과 싸우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대적 마귀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주 안에 있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여기에 열쇠가 있습 니다. 주 안에서 입니다. 여기가 바로 승리의 자리입니다. 주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의 승리가 가 능합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울 때 후방의 지원이 잘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귀와 대결해서 싸울 때 우리를 지원하시는 주님, 우리에게 힘을 공급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어린 소년 다윗이 백전노장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쳐 이겼습니까? 그가 골리앗보다 키가 컸습니까? 골리앗보다 무기가 승했습니까? 전쟁 경험이 많았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면에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떠는 적장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이겼습니다. 물맷돌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이 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패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우리의 힘을 얻습니다.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귀와 싸울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나님께 구할 뿐 아니라 해 야 할 일이 있습니다. 11절 말씀에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 으라 했습니다. 무장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싸움 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에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 할 일은 없고, 하나님 이 다 하신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 책 임을 다해서 어떻게 하든지 승리해야 한다는 각오가 없이는 싸울 수 없는 싸움이 우리의 영적인 싸움입니다.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무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 으라 고 했습니다. 전신갑주라는 것은 우리의 온몸을 다 감싸는 갑옷을 입으라는 말입니다. 옛날 전쟁 때는 갑옷을 입었습니다. 만일에 이 갑옷에 조금만 틈이 있으면 적이 그 틈을 비집고 공격해 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이 악한 자의 화전을 소멸하고 했습니다. 옛날 전투에서는 불화살 이 등장했습니다. 갑옷에 틈이 있으면 그 틈을 비집고 불화살이 꽂힙니다. 이런 배경에서 바울이 한 말씀은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활 속에 마귀에게 틈을 내어주고 있는 부분이 없습니까? 틈이 생기면 그 즉시 마귀가 그곳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무장을 해야 합니까? 14절 이하를 보세요.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 라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머리부터 생각하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무장에 대해 말하면서 허 리부터 시작했습니다. 무장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허리 부분입니다. 허리가 허술하면 모든 것이 허술해집니다. 그래서 허리를 꽉 졸라매야 합니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라 했는데 진리는 참, 성실, 진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성실하게, 참되게, 진지하게 서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지하고 신실한 자 세에서부터 우리는 마귀와 싸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를 찌르는 가장 급소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조 금이라도 불의한 요소가 우리 삶 속에 들어오면 마귀는 하나님 앞에 달려가서 이렇게 참소합니다. 하나님, 신자라고 하는 저 사람을 좀 보십시오. 죄를 범하면 마귀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우리 를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도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고발하고 참소할 여지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무엇보다도 먼저 의롭다 함을 선 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보세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의롭게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주 님은 먼저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를 의롭게 살도록 지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었고 의롭게 살고 있다는, 삶에 대한 긍지를 갖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승리의 자리에 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여기서 복음을 평안의 복음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화목 하는 놀라운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끼리 서로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이 평화의 복음의 신을 신고 다니면서 우리는 평화의 복음을 전하며 이웃과 평화해야 하는 것입니 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그 위 에 꼭 이것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의 방패 말입니다. 옛날 전쟁에서는 방패가 아주 중요한 무기였 습니다. 방패 없이 싸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방패는 방어용 무기도 되고 공격용 무기도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방패를 믿음에 비유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이것이 우리를 적에 게서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라는 것은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하고 있는 놀라운 메시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 다. 내가 두려운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합니다. 마귀는 계속 우리를 겨냥하고 화살 을 쏘고 있습니다. 틈만 있으면 이 화살이 날아와 우리 몸에 박힙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의 이 불 화살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막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강한 믿음은 능히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내고 소멸시킵니다. 그리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무기는 대개 방 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공격용 무기인 칼이 나옵니다. 칼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이 마귀의 유혹에서 말씀으로 승리했습니다.지식으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도 아닙니다. 권력으로도 아닙니다. 경험으로도 아닙니다. 말씀으로만 이깁니다. 예수님께 서도 마귀를 물리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이 흔들릴 때, 의지가 약해지려 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세요. 그 말씀을 묵상하세요. 주님의 말씀에 푹 잠기세요. 유혹이 올 때마다 말씀을 생각하시고 묵상하세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무장해야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3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하나님 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선다 는 말입니다. 전쟁이란 한두 번의 전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 다.
수없이 많은 전투가 있는데 전세가 불리할 때도 있고 유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넘어져도 일어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아주 넘어지지 아니합 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이 모든 무장 위에 한 가지 더할 것이 있습니다. 내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 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필요한 능력입니다. 기도 없이 우리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말렉 군대와 싸울 때 모세는 산 위에서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팔이 내려가면 이스라엘 군대가 불리해지고 다시 팔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치열한 전투의 현장에서 기도의 팔을 든 모습,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제 기도를 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위해 기도해야 합 니다. 그래서 바울도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19∼20절에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 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 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우 리가 서로 위해 기도함으로 마귀와의 전쟁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