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믿음이 심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좋은 땅이 실제로 됨에 있어서, 또한 그 의미와 누림에 있어서는 대체로 막연하거나 또는 실상은 잘 모르거나, 아니면 따지고 보면 자꾸만 자신의 힘이나 세상적인 방식에 초점이 맞춰지는 경우들이 많은 것을 적지 아니 보게 되는 것인데..
참으로 이러한 좋은 땅에 있어서의 제대로 된 사실과 의미는 생각보다는 쉽지 않고,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것보다는 더욱 복잡한 부분들이 포함된 면도 있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삼위일체적인 통찰로 보게 되면 생각 이상으로 단순할 수 있으며, 아주 명료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사실상 잘 통찰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위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그러한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의 방법과 통로 외에는 달리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어쨌든 분명한 것은 내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로는 아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설명에서와 같이 나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음에 있어서의 마귀의 방해와 공격들, 나 자신의 연약과 한계들, 세상적인 시련과 막힘들, 인간적인 염려와 두려움들, 현실적인 유혹과 시험들, 치명적인 정욕과 세속들 등을 원론적으로는 온전히 이기고 해결하며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반드시 하늘의 힘과 은혜가 없이는 안 되고 그 외에는 결코 불가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좋은 땅이라는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 깊이 관계있고, 근원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별개일 수 없는 것이며, 사실은 생각보다는 더 많이, 전적으로 직결되지 않을 수 없는 개념과 실제인 것으로 한 인생에 있어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진정 그러한 믿음이 실제로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가장 먼저 그 위치와 역할 상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그와 함께 직접적, 경험적,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약속과 말씀들을 모두 실행하시고, 특히 그 한가운데 계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다 이루신 구원의 일들을 시간과 공간들을 초월해서 믿음과 함께 말씀대로 모두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며,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곧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 모든 우선과 전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는 것으로 악한 세력들이 가득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서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까지, 또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살아가는 동안 삶의 자리와 사역의 현장과 인류 역사의 상황들 속에서 옛 사람과 같이 죄악과 세속과 정욕들 등으로 인해 잠자고 미지근해 지며 병들고 죽은 듯한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자기 자신의 힘과 의, 세상적인 능력과 방법들도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 악한 세력들, 온갖 유혹과 시험들, 연약과 한계들 등과 싸우고, 혹 그러면서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즉시로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면서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인데..
바로 그러한 것이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바로 그러한 믿음의 실체와 실제인 것이자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믿음인 것으로 그와 함께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더욱 충만하고 강렬하게 되는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과 풍성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특히 온갖 은혜와 은사와 응답들, 승리와 복과 부흥들 등으로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차고 넘치게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말씀,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으로 인한 백배의 결실들, 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들이 가능한 것이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도 실제로 현실적, 실질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살아 있고 깨어 있는 말씀의 신앙이, 아니 오직 그와 같은 말씀대로의 믿음, 말씀의 열정이, 다시 말해 오직 말씀, 말씀의 신앙의 관점과 기준으로만 아래 본분 뒤에 이어지는 마태복음 8장 21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라고 증거되어 있는 것이듯이..
구주 예수님의 실질적인 가족의 의미와 개념에도 합당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이유는 조금도 복잡할 수 없는 것으로 바로 그 구주 예수님께서야 말로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어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기 때문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며,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 말씀의 영이신 것이고, 근원적으로는 그렇듯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중심, 근본,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신 것이며,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누가복음8:11~15)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6월 20일(목)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