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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포 김행 묘역(파주 향토유적 24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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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포 김행선생 묘는 그나마 찾기가 수월합니다. 묘역 입구 우측에 선생의 사당이 있으며, 좌측 묘역 입구에서 장포 선생의 묘역이 보입니다. 이 묘역의 석물은 화강암이 아니라 모두 대리석으로 만들어 졌으며 특히, 신도비의 머릿돌(이수) 조각이 굉장히 멋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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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포선생 묘역 입구 전경 |
▲ 장포선생 영당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주도(周道), 호는 장포(長浦)이며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조부 사희(士熙)는 진산군수이고 아버지 국봉(國棒)은 일찍 작고하였다.
19세에 감시(監試)에 장원하였으며 초시에 시와 함께 뛰어난 필법으로 선발되었다. 그 뒤 알성과에 올랐으나 천재(天災)로 해서 방을 내리지 않았다. 1558년(명종 13) 생원 ․ 진사 양시에 합격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소년시절 아버지를 여의어 백인걸과 청송 성수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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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포선생 묘역 전경 |
백인걸은 청렴하기로 세상에 알려진 분이고 청송은 우계 성혼(成渾)의 아버지로 은둔생활을 하던 덕망이 높은 선비였다. 어려서 이 두 문하에서 배울 때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청송이 그 아들 우계에게 특별히 당부하여 이르기를, “우리 집의 뒷일은 반드시 김행과 논의하라”고 할 정도로 그를 애중히 여겼다. 김행은 이를 평생지켜 형제처럼 지냈다.
또 공부의 여가에 필적까지 본받으니 스승을 흠모함이 이와 같았다. 교우 청강 이제신과는 그 우의가 매우 두터웠다. 그의 집이 소실되자 청강이 별당의 기와를 뜯어다가 쌓아 두었는데. 그는 그 기와로 지붕을 덮지 않았다. 사람들이 기와 이기를 권하면, “옛날 사람들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여도 짚으로 지붕을 이었는데 어찌 기와로 해야 하겠느냐.” 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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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포선생 묘역 후경과 문인석 모습 |
관직은 경관으로는 성균관전적, 형조 ․ 호조 좌랑, 예조정랑, 한성부서윤, 내섬시 ․ 사섬시 ․ 사도시정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무장현감, 고양군수, 서천군수, 양주목사, 광주목사를 지냈다. 성품이 강직한 탓에 주로 외직에 머물러 크게 현달하지는 못하였다. 자신의 생각이 합당한 것이라고 여기면 남을 개의하지 않았고, 강건하고 엄하며 꼿꼿해서 통속과는 타협하지 않았다.
한결같이 해학과 방관으로 스스로를 어둡게 가렸다. 익살스러운 말이나 웃음으로 보아서는 조심하는 것이 없는 듯하지만 행적을 살펴보면 그 진실함에 부끄러울 바가 없었다. 역임한 고을마다 추호도 취한 것이 없으며, 어머니를 극진한 효성으로 섬겨 살림이나 봉급을 모두 어머니께 드렸고, 비록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사유로 하는 것이 없었다. 누님 한 분이 일찍 홀로 되어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가르치고 기르기를 자신의 아들처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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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포 선생의 신도비 모습 |
평생을 청렴근고로 가다듬되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여 남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집에 불이 나 이웃이 와서 도왔는데 집에 값나갈 만한 물건이 거의 없음을 보고 놀라와 할 정도였다고 하여 죽은 뒤에도 염을 할 것이 없어 문객들이 옷을 벗어서 염을 하였다고 한다.
문장은 뛰어났지만 후세에 전하지 않으려고 지은 후 진한 먹으로 개칠해서 버렸다. 필법은 호탕하고 웅장하며 살아 움직이는 듯하여 당시의 명필들도 따르지 못했다. 무장군수로 있을 때에 조송설의 「증도가(證道歌)」의 원본이 뭉개어진 것을 보고 그가 절반 이상을 손수 써서 인쇄 간행했는데, 원본과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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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변사 신립이 광주(光州)에 왔다가 그와 여러 달 동안 활을 쏘는데 그 재주가 김행의 그것을 끝내 따르지 못했다. 임금이 신립에게 묻되, “수령 중에 장군 될만한 자가 누구냐?” 하니 답하되, “광주목사 김행이 활에 있어 당할 자 없고 지략이 뛰어났습니다.” 라고 천거하여 선조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실행되지 전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
김행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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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살표 ↑ 위의 성임 묘역 우측 편에 김행 묘역이 있음. 소재지 :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산 2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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