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지앞 황금들판에서
2011.10.19. 수요일 오후
천 년의 미소를 간직한 아름다운 경주에서 3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2011.10.18.화~20.목(2박3일)
마이홈➡무장사지➡보문허브관광랜드➡불국사석굴암➡장항리사지➡골굴사
➡기림사➡감은사지➡대왕암➡감포 가곡항➡양북5일장➡괘릉➡대릉원➡마이홈
경북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골굴사
2편
장항리사지➡골굴사➡기림사➡감은사지
둘쨋날의 불국사 석굴암 관람을 마치고 양북면 장항리사지로 이동
석굴암을 탐방하고 甘浦로 나가는 토함산 둘레길을 내려오니
大鐘川 상류에 자리잡은 장항리사지(獐項里寺址)가 있었다.
도로에서 돌계단으로 내려가 구름다리로 간다.
돌계단에서 만난 가을빛 물든 곤충 한마리..
계곡의 구름다리를 건너서
나무계단을 오르면 절터가 나온다.
국보 제236호
이번엔 나무계단에서 곤충을.. 거미줄 거미를 만난다.
달맞이 꽃을 찾아 온 벌도 한컷 찰칵하고 애마에 오른다.
울 애마는 다음 일정인 골굴사를 향해 또 달린다.
직진하면 멀지 않은 곳에 기림사가 있고,
우린 좌측에 위치한 골굴사 일주문을 향해 오른다.
함월산 골굴사
층층이 바위를 뚫어 이룬 불국토
화랑이 수련한 禪武道 총본산
최근 '웰빙' 바람 타고 유명세
경주시 양북면 골굴사.
1천500년 전 인도에서 건너온 광유성인 일행이 함월산에 정착한 후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는 골굴사(骨窟寺).
불국사 보다 200년 앞서 창건된 사찰이다.
인도사원 양식을 본떠 지어진 석굴사원인 골굴사는
인도의 아잔타 석굴과 중국의 둔황 석굴처럼
여러개 동굴 문으로 된 석굴에 위치해있다.
신라 화랑들이 수련한 선무도 총본산으로도 유명하다.
사찰 내에 들어서면
응회암 지층으로 형성된 암반 정상에 주불인 보물 제581호 마애아미타불이
있고 조금 아래에 관음굴, 약사굴, 칠성단 그리고 12곳에다 석굴을 파서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한 흔적이 있다.
동해안 문무왕 수중릉을 향하고 있는 주불 옆 석굴은
조선중기 화가 겸재 정선(鄭敾)의 '慶州 骨窟 石窟圖'에도 나타나 있다.
이 그림에는 여러개 기와 지붕으로 지어진 석굴의 전실이 가람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외 수년 전 발견된 석굴 앞 남근(男根)바위는 삼신당 앞
여궁과 조화를 이뤄 음양조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이 깃든 곳으로 알려져있다.
최근들어 웰빙(Well being)바람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골굴사.
성인을 위한 주말수련과 기업체 연수가 잦고 특히 청소년 수련대회, 수학여행단
일일체험 등의 청소년 대안교육 현장으로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鉢盂供養, 다도학습, 부모은중경 강의, 활쏘기 및 선무도 교육으로
인성 교육과 참선, 명상, 불교무술을 체험할 수 있다.
골굴사 주지 적운(寂雲) 스님은 선무도에 대해
"부처님께서 가르친 수행법 중 오정심관(五停心觀)의 하나이며
선관(禪觀)명상의 핵심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의 조화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몸과 마음이 둘이 하나라는 것을 전제로 영과 육의 조화를
구한 화랑정신의 체험"이라고도 했다.
이와함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수련했던 무예"라고 덧붙였다.
선무도는 우선 선체조 요가, 기공 등 준비수련을 통해 몸을
유연하게 만들고 신체표현을 극대화한다.
이곳 스님들은 새벽 산사의 독경소리에 기상해 좌선, 선 사색,
선무도 수련 등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요즘 웰빙이 추세지만 불가에서는 오랫동안 이같은 삶을 살아왔다.
유행하는 '아침형 인간'도 마찬가지.
주지 스님은 "웰빙이 바로 이것"이라며 웃었다.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요가나 아나파나사티처럼 선무도 역시
수행하는 스님들에겐 그들만의 수행법 가운데 하나다. 일반인들은
스트레스 해소나 체중감량 등을 위한 대체의학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김광호님의 글에서 인용
일주문 들어 서자 바로 만나는 연지
둘 갈래길에서 좌측으로 오른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매우 쾌청한 날씨다.
경사가 있는 오름길을 오르다 보니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솟는다.
S자 오름길이다.
골굴사 기행시
골굴사를 향해서 이번엔 일자형 오름길이다.
오르는길에 전시된 골굴사 문화재의 사진과 해설을 읽으며
쉬엄쉬엄 오르니 몸도 마음도 가뿐이다.
우측 마애여래불 방향으로 오른다.
주변을 둘러보며 오른다.
발밑을 보니 빨간 단풍친구 둘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 오른다.
숲속에 방송이 흘러 나온다.
선원 앞에서 선무도 공연이 있단다.
뒤돌아 올려다 보니..
선원 앞에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관람을 끝내고 오륜탑으로 오른다.
오륜탑에서 바라본다.
오륜탑 앞 솔밭 쉼터..
입구로 내려 가는길에서..
기림사로 이동이다.
함월산 기림사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祇園精舍와 竹林精舍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토지의 신,
혹은 크다는 기 자와 수풀 림 자))이라 하니
경주 含月山 祇林寺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의 본산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기림사는 천축국(天竺國) 승려 광유(光有)가 창건,
임정사(林井寺)라고 하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원효(元曉)가 확장, 중수하고 기림사로 개칭하였다.
1863년(철종 14) 본사(本寺)와 요사(寮舍) 113칸이 불타 없어졌다.
당시 경주부윤이던 송우화(宋迂和)의 혜시(惠施)로 중건한 것이
현 건물이다. 다행히 경상도영주제명기(慶尙道營主題名記),
동도역세제자기(東都歷世諸子記), 부호장선생안(府戶長先生案) 등의
중요한 문적(文籍)과 근세조선 역대 왕의 어필(御筆) 등이
병화(兵火)를 입지 않고 보관되어 있다.
이 밖에
목탑지(木塔址), 3층석탑, 오백나한상(지방유형문화재 214) 등이 있고,
보물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
삼신불(三神佛:보물 958), 복장유물(보물 959) 등이 있다.
한편 왜구가 동해를 거쳐 경주로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의 지휘본부로 사용되었으며 진남루.나팔.목비 등이
남아 있어 호국사찰임을 증명해 준다
기림사 창건설화
먼 옛날 범마라국 임정사에 오십 년간 수도하면서 천안통과
숙명통 그리고 타심통을 얻은 도인 광유성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전생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전생의 부처님의 제자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에, 파사익 왕의
세 시녀는 늘 꿀물과 우유로 부처님과 제자들을 공양 올렸다.
제자들 중에는 인물이 출중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시녀들은 부처님 다음으로 공양하다가 그만 공경이 사랑으로 변해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스님은 여인들의 유혹을 제도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산 속으로 들어 가 버리셨다.
그러나 스님은 아름답고 상냥한 세 여인을 잊지 못해 번민하다가
결국 도를 이루지 못한 채 입적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그 스님의
도반으로서 먼저 도를 이루는 사람이 제도키로 약속을 했었다.
내 이제 금생에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도반인 그 스님과
세 시녀를 제도하려 하니 나와 숙세로부터 인연이 있는 이들을
누가 이곳으로 안내하겠느냐?"
그때 승열 스님이 말했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스승이시여!"
"오 장하구나, 너는 아라한과를 얻었으니 능히 할 수 있으리라.
그 스님은 금생의'수다라'라는 대국의 왕이고
왕후와 후궁은 전생의 시녀이니라."
"그럼 한 명의 시녀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곧 왕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여기로 올 것이니라.
수다라 왕국은 아직도 불법이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세명을 한번에
모셔오기 어려울 테니 먼저 후궁인 월해부인을 인도토록 하여라"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했을 때 ,왕은 마침 500궁녀를 데리고
강가를 거닐다가 숲속에서 잠이 들었다. 산책을 즐기던 궁녀들은
좌선에 든 스님을 발견하고는 이상한 모습에 의아한 눈길을
주고 받다가 가까이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신지요?"
"나는 범마라국 임정사에서 온 승려입니다."
스님은 궁녀에게 스님은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불법이 무엇인지를
설명 해 주었다.
이때 잠에서 깨어 이를 목격한 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소리쳤다.
"너는 누군데 나의 궁녀를 꼬이느냐? "
왕은 승렬 스님의 목에 칼을 대고는 인생의 참 진리가 무언지
알려주겠다며 불개미 집을 헐어서 스님의 몸에 풀어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불개미는 스님의 몸을 물지 않고
모두 흩어져 버렸다. 이것을 본 왕은 크게 놀라면서 예사로운 분이
아닌 줄 알고 스님을 궁중으로 정중히 모셨다.
승열 스님은 1년간 궁중에 살면서 왕과 왕비 그리고 후궁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다라 왕국의 최초의 절 범승사를 세웠다.
그리고는 며칠 후 승열 스님은 왕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떠날 차비를 하면서 월해부인을
모시러 온 뜻을 밝혔다.
왕은 보내기 아쉬웠으나 월해부인이 선뜻 나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후 월해부인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물긷고 차를 다리며
열심히 정진하였다.
어느 날 광유스님은 승열 비구에게 다시 수다라국에 가서
왕과 왕비를 모셔오도록했다. 승열 스님이 수다라국에 도착하니
왕과 왕비는 물론 지난번에 귀의한 십여명의 제자와 신도 및
백성들까지 영접하였다.
"월해부인은 대왕이 오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를 얻고 사바의 인연을 마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기가 막힌 듯 슬피 탄식했다.
"오, 참으로 세상은 허망하군요. 대왕이시여!
이 세상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식이시여, 저를 깨우쳐 주소서!"
"그것은 일체를 소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자신을 아는 일이지요."
승열스님은 자상한 설법과 함께 왕의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왕은 참회하면서 왕비인 원앙부인과 함께 광유성인에게 가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임정사로 향해
길을 떠났다. 만삭의 몸으로 길을 떠난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부인 힘을 내구려. 나와 함께 도를 이루자고 하지 않았소."
"대왕이시여! 저는 전생에 숙업인 듯 하옵니다.
저를 여기서 종으로 팔아 그 대가를 임정사 부처님께 올려 다음 생에
다시 공부하도록 빌어주십시오. 저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죽림국의 한 부자에게 만삭이 된 부인을 팔았다.
"대왕이시여! 아기를 나으면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요?"
"아들이거든 안락국이라 하고 딸을 나으면 아량이라 하여주오."
가슴이 터질 듯 아프고 슬픈 마음으로 부인과 작별한 왕은
광유성인의 제자가 되어 차 시봉을 하면서 세속 일을 잊고
정진에 몰두하였다. 그렇게 7년이 되던 어느 날, 임정사로
한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그는 원앙부인이 낳은
태자 안락국이었으니 바로 전생의 한 시녀이기도 하다.
반갑게 상봉한 부자는 공부하며 함께 지냈다.
수다라 왕이 도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이 안락국에게
전생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락국아!
너는 인연 있는 곳을 찿아 가서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하거라.
그 인연지는 여기서 이백오십만리 떨어진 해동국으로 그곳에는
문수보살이 부처님의 부촉을 받고 계신 곳이다. 가서는 거북이가
물 마시는 형상을 하고 있는 산을 찾거라.
동해바다의 기운을 들여 마시는 용이 사는 연못이 있고,
탑의 형상을 갖춘 남쪽 돌산에는 '옥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니
그 물을 먹으면서 수도하거라. 북쪽에는 설산을 닮은 돌 빛이
흰 산이 있으니 그 산 굴 속에 부처님을 조성하여 모시거라."
그리하여 해동 계림국에 도착한 안락국은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워, 이름을 칭하되 '임정사'라 하였다. 절이 창건된지 백오십년 후
신라의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기림사 카페에서 창건설화와 내용을 인용함-
대적광전의 주련
世尊坐道場(세존께서는 도량에 앉아 계시고)
淸淨大光明(청정한 대 광명을 놓으시네)
比如千日出(비교하건데 마치 천개의 해가 뜨는 것 같이)
照曜大千界(온세상을 밝게 비추네)
諸法歸本來(모든 법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니)
常自麻滅相(항상 스스로 삼을 멸해야 하는 것을)
千手千眼十一面觀音殿 (40개의 손과 눈에 25수를 곱하면 1000개가 된다)
좌.우 20개의 손과 손마다 눈이 하나씩 있어 40개의 손과 눈과
二十五有 思想 즉 25가지 因果應報를 나타내며 40개의 손에는
"해,달,乾坤帶,輪寶,法螺,寶傘,戟,鐵,劍,바리,연꽃,여의주 등"
法器와 兵器,寶石을 쥐고 있다.
기림사의 전설
기림사에는 많은 전설이 전한다. 그 가운데 이 절에는 천년에 한 번
핀다는 다섯가지 빛깔의 상서로운 우담바라(優曇癖) 라는 꽃이 핀다.
또한 예로부터 오정수(五井水 또는 五種水)가 유명하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은 물로
차를 끓여 마시면 으뜸이라는북암의 감로수(甘露水)
그냥 마셔도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후원의 화정수(和靜水)
마시면 기개가 커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3층석탑 곁의 장군수(將軍水),
눈이 맑아진다는 천왕문 앞의 명안수(明眼水),
물빛이 너무 좋아 까마귀가 쪼았다는 천왕문 안의 오탁수(烏啄水)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가운데 장군수는 조선시대 이곳에서 역적모의가 발각되어 나라에서
삼층석탑을 옮겨 샘의 물줄기를 막아 버렸다고도 하고
장군이 날까 두려워 한 일본이 그랬다는 전설이 함께 전한다.
한편 신라 제31대 신문왕이 감은사의 앞바다 대왕암에서
용으로부터 옥대와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고는
기림사 서쪽 시냇가에 와서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들고 쉬는데
때마침 태자(후의 효소왕)가 와서
"이 옥대의 한쪽 한쪽이 모두 진용(眞龍)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네가 어찌 아느냐"라고 하자
태자가 "옥대의 한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소서"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왼편 둘째 쪽을 떼서 시냇물에 넣으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그 땅은 못이 되어 용연(龍淵)이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팜플렛에서 옮겨씀
매월당 영당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상수도 보호구역이라는 푯말에 출입금지 표시를 하여
들어 갈 수가 없었다. 정말 맑고 깨끗한 계곡물이다
감은사지로 이동..
감은사(感恩寺)란 말 그대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31대 신문왕이 선왕인 문무왕의 은혜에 감사드리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감은사는
원래 삼한을 통일한 제 30대 문무왕이 불력으로 왜를 침략을 막기 위해
지은 절이다. 당의 도움으로 백제를 멸하고(660년) 한때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고구려가 내분과 당의 공격으로 멸망을 하자(668년)
한반도에도 평화가 찿아 오는 듯 했다.
하지만 당은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를 백제 땅에는 웅진도호부를 두고
심지어 신라 땅에도 계림도호부를 두어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야욕을
보이자 신라는 사력을 다해 당과의 전쟁을 통해 싸워 나가다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대승을 거두어 삼한 통일을 이룩합니다. 그러나 백제는 멸망
후에도 끈질긴 부흥운동을 운동을 전개했는데 왜의 원군을 받기까지 합니다.
663년 백제의 부흥운동이 막을 내리고 668년 삼한을 평정하였지만
신라는 십수년간의 통일 전쟁으로 땅은 피폐해지고 국력은 소진할대로
소진하였는데 문무왕은 혼신의 힘을 국력을 집결하여 감은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700년간에 걸쳐 사활을 걸고 싸운던 백제와 고구려가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 버렸지만
바다건너에는 아직 왜가 도사리고 있었기 떄문입니다.
신라 건국 초기 부터 왜의 공격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기에
불력을 빌어 왜침을 막고자 하는 일념에서 였습니다.
불국사가 완성에 25년 그외의 절들이 약 10~20여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을 감안하면 10년이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은 신라의 국력을
총집결시켜 절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왕때 짓기 시작한 감은사의 원래 이름은 진국사(鎭國寺)였지만
문무왕이 완공울 보지 못하고 죽자 아들인 신문왕이 선왕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완공을 시키고 절 이름을 감은사로 고쳤습니다.
평소 문무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내가 죽은 뒤에는 원컨데 나라를 수호하는 큰용이 되어
불교를 떠받들고 나라를 보위하리라" 라고 말했는데
문무왕은 죽기 직전 유언을 남깁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하여 장래를 간소히 치루어라.
큰 무덤을 만들어 보았자 세월이 흐르면 무덤에 풀이 우거져
사슴이 풀을 뜯고 토끼가 무덤에 굴을 파고 지다던 목동이
무덤에 올라 피리를 불터니 부질없는 짓이다.
태자(신문왕)은 내가 죽거든 10일 후 내 관앞에서 왕의 즉위식을
올리고 상복을 벗어 버리거라.
또 백성들을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거두지 말것이며...."
-chosun.com 박정호 블로그뉴스에서 인용-
감은사지 입구, 황금들판.. 고개 숙인 벼들..
*교통편*
팜플렛에서..
3편에 또 이어 집니다.
마지막편이 기다립니다.
대왕암, 이견대, 감포가곡항 양북면5일장, 영지, 대릉원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진촬영및제작찬란한 빛/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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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 좋고 글도 좋습니다.
다음 답사기도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