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균수출액(백만불) |
분포(%) | ||
1962-1963 |
1966-67 |
1962-63 |
1966-67 | |
미국 |
18.2 |
116.7 |
25.74 |
40.95 |
일본 |
24.2 |
75.2 |
34.23 |
26.39 |
아시아* |
20.6 |
40.2 |
29.14 |
14.11 |
계 |
70.7 |
285.0 |
100.00 |
100.00 |
*: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권 국가들
출처: U.N.; Naya (1971).
〈표 2〉한국의 대동남아 수출 현황, 1962-66 (단위: 백만불)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총수출액 |
54.9 |
86.6 |
119.5 |
175.1 |
249.7 |
대만 |
1.4 |
0.7 |
2.0 |
1.9 |
2.2 |
필리핀 |
0.3 |
2.6 |
1.2 |
1.4 |
0.8 |
태국 |
0.4 |
1.6 |
2.6 |
4.3 |
4.8 |
말레이시아 |
0 |
0 |
0 |
0 |
0.6 |
월남 |
0 |
1.2 |
6.3 |
17.7 |
23.8 |
출처: 상공회의소(1969)
〈표 3〉 한국의 대월수출 현황, 1961-1972 (단위: 백만불)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상업수출 |
0.07 |
0.8 |
12.1 |
6.3 |
14.8 |
13.9 |
7.3 |
5.6 |
12.9 |
12.8 |
14.5 |
12.5 |
군납 |
0 |
0 |
0 |
0 |
2.8 |
9.9 |
15.9 |
32.4 |
34.2 |
57.3 |
21.2 |
15.0 |
총액 |
0.07 |
0.8 |
12.1 |
6.3 |
17.7 |
23.8 |
23.2 |
38.0 |
47.1 |
70.1 |
35.7 |
27.5 |
총수출대비 |
0.17 |
1.46 |
1.39 |
5.29 |
9.02 |
9.55 |
6.84 |
7.99 |
5.86 |
4.44 |
2.58 |
2.77 |
출처: 한국은행; 한국 중앙정보부(1970)
〈표 1〉에서 참전이전 한국의 수출대상지역과 참전이후의 지역을 나누어 비교해 본 결과, 한국의 수출시장에 있어 아시아지역의 비중이 참전이후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표 2〉에서 보듯이 지역내 국가들로의 수출비중이 현상유지상태이거나 지속적으로 줄어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전이후 월남으로의 수출량은 급속히 늘어났다. 1964년에 630만불에 불과했던 수출액이 참전직후인 1966년에는 4배에 가까운 2,380만불에 이르고 있다.
〈표 4〉한국의 대미수출현황, 1961-75 (단위: 백만불, %)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수출총액 |
40.9 |
54.8 |
86.8 |
119.1 |
175.1 |
250.3 |
320.2 |
455.4 |
622.5 |
835.2 |
1,067 |
1,624 |
3,225 |
4,460 |
5,081 |
대미수출 |
6.9 |
12.0 |
24.3 |
36.6 |
61.7 |
95.8 |
137.4 |
237.0 |
315.7 |
395.2 |
531.8 |
759.0 |
1,021 |
1,492 |
1,536 |
비율 |
16.3 |
21.9 |
28.0 |
30.7 |
35.1* |
38.3* |
42.9* |
52.0* |
50.7* |
47.3* |
49.8* |
46.7* |
31.7 |
33.5 |
30.2 |
*가 표시된 해는 미국이 한국의 수출대상국중 1위에 기록된 연도
출처: 한국은행.
한편 월남전 참전 이후 한국의 대미수출 물량도 〈표 1〉에서와 같이 3배이상 급증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참전에 대한 미국의 특혜성 보답에 기인한다. 하지만 대미수출량중의 증가분 중 정확히 어느 정도가 한국의 참전으로 발생된 것인가는 파악이 어렵다. 또한 '한국의 수출증진은 이미 1961년 부터 시작됐다'라는 논리도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표 4〉에 나타난 것처럼 전투병력을 파견하기 시작한 1965년을 기점으로 급증하였으며 전쟁이 종결된 1973년 까지 대미수출의 증가추세는 멈추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이나 대만과는 달리 산업기반이 극히 취약했던 한국경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전쟁특수로 인한 급격한 대미 수출 증가가 갖는 의미는 특별하다.
〈표 5〉는 한국의 대월 수출이 가장 왕성했던 1965∼1969기간 중 1966∼1967기간의 주요 대월수출품목의 구성비와 전체 수출물량에서 이 품목들이 차지하는 비율을 비교해 보여주고 있다. 구성비율상 일반적인 수출품목과 대월수출품목간에 현격한 구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들은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생산품 -- 섬유물, 합판, 플라스틱류, 가발 등 --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월 수출품목들은 철강, 기계류, 수송장비 등 비교적 중공업에 기반을 둔 제품들이었다. 철강제품, 수송장비, 화학제품등의 경우 각각 총생산량의 94.3%, 51.75%, 40.9%가 월남으로 수출되었다. 이는 당시 박 정희 정부가 급부상한 지역내 최대의 수출시장을 십분 이용하여 전략적 기간산업의 발전을 꾀하려는 노력이, 기존의 3공화국 경제정책관련 연구에서 제시된 시기보다 훨씬 이전임을 반증하는 매우 중요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표 5〉수출주요 품목이 수출총액과 대월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비교, 1966-67
|
품목 |
구 성 대월 |
비 율 총수출 |
대월수출/총수출 |
총액(백만불) % |
|
9.7 100.0 |
282.9 100.0 |
3.41 |
품목의 총비율 |
|
87.27 |
18.60 |
|
|
농산물 |
5.19 |
13.55 |
1.31 |
|
식음료 |
1.70 |
0.13 |
44.20 |
|
인쇄물 |
1.50 |
0.16 |
32.84 |
|
화학제품 |
0.53 |
0.04 |
40.87 |
|
철강제품 |
45.87 |
1.66 |
94.29 |
|
기계류 |
15.53 |
1.30 |
40.77 |
|
수송장비 |
9.50 |
0.63 |
51.75 |
|
유리, 석재류 |
3.91 |
0.40 |
32.98 |
|
비합금철 |
3.54 |
0.73 |
16.53 |
출처: U.N.; Naya(1971)
앞서 밝힌 바와 같이 1967년에 들어서면서 미국정부는 월남특수를 기대하고 있던 미국내 동품종 생산업자들의 한국 특혜정책에 대한 극심한 항의로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자 가장 많은 수의 한국군 병력을 파병한 2차 파병이 1966년말에 완료됨에 따라 한국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된 미국정부는 1967년 부터 위의 수출품목에 대한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안보관계 특별 보좌관이었던 William Bundy가 주한 미국대사에게 보낸 비밀전문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국내(미국)의 업자들로 부터 월남특수 정책 기조에 대해 심한 반발과 한국정부와의 파병을 둘러싼 '뒷거래'에 관해 심한 의심을 받고 있음. 극동아시아 국가, 특히 한국의 '가격파괴'적인 수출 정책을 미국이 지원하고 있다는 의견이 거의 사실로 인정되고 있음. 현시점부터 한국이 원래의 무역규정을 엄격히 지키도록 대사께서 한국 정부에 강력히 촉구하여 미국제품과 경쟁이 될 수 없게끔 협조해주기 바람...4)
〈표 6〉1968년도 대월 주요 수출품목과 구성비율
|
수출액(백만불) |
비율(%) |
총액 |
38.0 |
100.0 |
군복, 신발, 침구류 |
13.1 |
34.6 |
C-Ration |
12.7 |
33.5 |
시멘트, 건축자재류 |
2.9 |
7.6 |
유리, 산업장식물 |
1.6 |
4.3 |
화학비료 |
1.3 |
3.6 |
맥주, 담배류 |
1.1 |
3.0 |
제초기 |
0.4 |
1.2 |
한약제 |
0.3 |
0.9 |
철강류 |
0.1 |
0.3 |
수송장비 |
0.1 |
0.3 |
기타 |
4.1 |
10.8 |
출처: 중앙정보부(1969, 69-70).
미국이 이러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기 시작한 후, 한국정부는 참전국가로서 대월수출의 당위성을 지닐 수 있는 전쟁관련 물자들로 주요 수출품목을 교체하기 시작한다. 교체된 군납목적의 수출품목들은 주로 한국이 이미 수출을 목적으로 적극 권장하고 지원해오던 섬유산업 중심의 군수물자와 미국이 한국군에게 보급하던 C-Ration의 대체하기 위한 김치등의 한국음식을 담은 캔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섬유제품이 수출주력품목이 된 것은 당시 한국의 산업구조를 고려해 볼 때 매우 바람직한 변화였다. 최대의 수출 산업품목이었던 섬유류는 1965년 당시 이미 9천2백만 킬로그램의 생산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국내 소비량을 충족시키고도 남는 수준이었다(UN 1967, 30-31). 후술하겠지만 1965년 이후 미국의 대한원조중 농수산 원조(PL-480)의 비율을 집중적으로 늘리기 시작함과 동시에 당시 미국내 생산과잉 현상을 보이던 면화의 구성비가 급증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한국입장에선 면화의 국내 과다공급이 우려되던 차였다.
한편, 1966년말 30,000명에 이르게 된 파월한국군에게 지급되던 부식의 전량이 지방함유량이 지나치게 과다하고 한국인 입맛에 안맞았던 미군용 C-Ration이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한국군의 전투의욕을 향상하고 성장초기 단계에 있던 캔 산업의 육성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측에 한국음식(특히 김치)이 담긴 부식을 하루에 한 끼 정도 지급하여 줄 것을 미국측에 요청하였고 미국측도 가격등 여러 사항을 검토한 후, 1966년말 한국의 생산업체와 계약을 맺게 되어 1967년에만 1천백만불의 수출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는 1966년 11월에 "주식회사 대한식품"이라는 정부출연 식품회사를 설립하여 이듬해 2월 1968년에 외무부장관에 임명된 최 영희 예비역 장군을 사장으로 임명,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끔 하였다.5)
위와 같이 미국측이 한국의 캔 산업의 발전에 적극협력한 데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파월 한국군의 전투의욕 향상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판단되었고, 미국이 지급하던 C-Ration보다 가격이 훨씬 낮았던 관계로 재정부담을 덜을 수가 있었다. 둘째, 군사적인 지원보다 간접적인 경제적 지원을 통한 우방 지원을 선호하던 정책과 그 괘가 맞아 떨어졌으며, 셋째, 한국이 미국측의 견제로 대월수출에 있어 중공업품목의 수출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심기를 건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6) 따라서 1967년 3월 정 일권 국무총리가 미국을 공식 방문했을 당시 캔공장의 설립에 미국이 적극 후원할 것을 약속받았으며, 1973년 한국군이 완전철수할 때 까지 캔류는 가장 중요한 대월수출품목의 하나가 되었다.
대월 무역으로 발생한 한국의 유형수익(tangible earnings)은 1965년 부터 1973년까지 총 2억8천3백만불에 이르렀는데 그 중 9천4백만3천불은 상업수출로 인한 것이었다. 총매출의 2/3은 전쟁관련 물자의 수출로 인한 것이었다. 무역부문의 유형수익이 한국의 수출위주 고도성장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이 베트남전을 통해 벌어들인 유형수익(tangible earnings)총액의 1/4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2. 비무역 부문: 월남 진출업체, 민간 노무자, 군인의 송금 등
한미양국은 공식적으로 파월된 한국군은 전원 '자유세계의 수호를 위한 자발적인 지원자들'이라고 밝혔지만, 1964년의 비전투 목적의 공병대 파병을 위한 협의 과정에서 이미 임금에 대한 합의를 본 바 있다. 하지만 정규 전투요원을 파병하기 시작한 1965년말 부터 한국정부는 비공식적으로 임금의 20∼25%인상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결국 1966년 7월 2차 전투 병력 파월직전 미국의 동의를 이끌어 냈다〈표 7〉.
〈표 7〉파월한국군 급여 (일당 기준)
계급 |
1964 |
1966 |
병장 |
$1.50 |
$1.80 |
상병 |
$1.20 |
$1.50 |
일등병 |
$1.00 |
$1.35 |
이등병 |
$1.00 |
$1.25 |
출처: U.S. Congress, Senate(1970, 1572).
〈표 8〉파월한국군의 송금내역, 1965-72 (단위: 백만불)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총액 |
급여 |
1.8 |
15.5 |
31.4 |
31.4 |
33.9 |
30.6 |
32.3 |
26.8 |
201.5 |
사상보상금 |
|
1.1 |
4.6 |
4.6 |
10.8 |
15.2 |
13.9 |
12.0 |
65.3 |
출처: 주월한국군사령부(1974, 1142); 아산사회복지재단(1988, 215); 국사편찬위원회(1975)
미국측 입장에서는 한국의 파병을 통한 전투지원이 재정절감의 중요 요소였다. 미국은 자국병력을 파견했을 경우보다 단지 1/5의 인건비만 들이면서도 훌륭한 병력을 쓸 수 있었으며, 기타 장례비용등도 미군의 경우와는 상대도 안되는 절감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군은 미군과 똑같이 PX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으며 불과 1불60전의 월급을 국내에서 지급받던 그들은 평균 40불 이상의 월급을 벌 수 있었다. 한국군은 사령부가 직접 군인들의 봉급을 관리, 본국으로 송금시켜 엄청난 저축률과 더불어 외환보유율을 늘려 갔다. 1972년 까지 약 2억불이상의 달러화가 송금되었으며, 그 중 40%는 은행에 저축되었다(국사편찬위, 10권 1975, 539). 한편, 〈표 8〉에 소개되었 듯이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사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도 늘어나기 시작하여 1972년까지 약 6천5백만불이 지급되었다.
미국의 또 다른 특혜는 서비스·건설등 분야의 한국업체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 졌다. 한국업체들은 주로 건설, 토목, 물품수송, 세탁소나 유흥업체등의 서비스 업종에 주력했는데, 서비스업은 한때 50여개 이상, 건설업체는 최다 12개의 회사가 공사를 진행하였다. 1972년까지 이들 업체들로부터 송금된 외화 총수입은 2억3천8백만불에 달했다〈표 9〉.
〈표 9〉월남에 진출한 기업 및 서비스업체로부터의 송금내역 (단위: 백만불)
연도 |
서비스업 |
건설업 |
1966 |
8.32(10) |
3.30(5) |
1967 |
35.47(25) |
14.20(9) |
1968 |
46.06(41) |
10.39(12) |
1969 |
55.27(56) |
11.54(12) |
1970 |
52.35(48) |
10.65(12) |
1971 |
31.98(38) |
8.53(11) |
1972 |
9.20(23) |
3.10(7) |
총액 |
238.65 |
61.71 |
( )안의 숫자는 해당년도 진출기업 수
출처: 중앙정보부(1969, 71); 국사편찬위원회, 4집(1975, 1139; 아산복지재단(1988, 216).
건설업체들은 1966년 이후 군사기지 구축, 군사적 용도의 건물 건축, 교량 토목공사 등에 종사하였다. 1967년 이후 적용된 "Buy American"정책에 의해 한국업체들은 주로 미국기업들로 부터 하청을 받아 공사하였는데, 이들 업체들이 벌어들인 공사대금의 총 송금액은 1972년 까지 약 6천1백만불에 달했다. 베트남에서 쌓은 한국의 건설·토목기술 경험은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1970년대 중반 이후 중동등 해외건설사업을 통한 외화획득에 크게 기여하였다.
〈표 10〉은 위와 같은 업체들에서 근무한 인력의 송금액을 소개하고 있다. 거의 2/3이상의 한국 근로자들이 RMK-BRJ, PAGE, PHILCO, VINNEL등과 같은 외국업체에서 근무했으며 나머지 1/3은 한국의 진출 건설업체를 위해 근무했다. 이들은 전쟁기간중 베트남에서 근무한 외국이력의 40%를 차지했으며 봉급과 보상비등을 합해 1972년 까지 약 1억6천6백만불을 벌어 들였다. 연 7만명 가까운 이들 근로자들은 동기간의 군인을 제외한 한국출신 해외 근로인력의 63%에 달하는 인원이었다.
군인을 포함한 월남 진출인력의 송금을 통한 저축률의 향상은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국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업체에서 근무한 근로자들의 귀국 당시 평균저축액은 대개 5천불에서 8천불사이를 기록했으며 만불이상을 벌어 들어오는 경우도 상당수 있었다(S. Kim 1970, 521). 대개가 농촌 출신이었던 연 30만명의 군인들의 송금을 통한 저축량도 경제적으로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표 10〉주월 한국근로자수와 송금내역
|
1. 한국기업소속 |
2. 외국기업소속 |
1 + 2 |
송금액(백만불) |
해외근로자 대비 주월근로자 |
1965 |
0 |
105 |
105 |
확인불가 |
0.6 |
1966 |
2,187 |
7,834 |
10,021 |
9.1 |
80.1 |
1967 |
3,983 |
8,964 |
12,947 |
34.3 |
64.1 |
1968 |
4,284 |
11,287 |
15,571 |
33.6 |
70.9 |
1969 |
3,941 |
8,678 |
12,619 |
43.1 |
38.8 |
1970 |
2,739 |
3,997 |
6,736 |
26.9 |
12.9 |
1971 |
2,672 |
3,106 |
5,778 |
15.3 |
3.8 |
1972 |
857 |
850 |
1,707 |
3.9 |
0.9 |
계 |
|
|
25,179 |
166.2 |
39.6 |
*는 연인원.
출처: 아산복지재단(1988, 176-182).
3. 유형이익의 경제적 영향
표 11에서 보듯이 1965∼1972기간 동안 위에서 살펴 본 여러 부문의 총수입액은 10억3천6백만블에 달한다. 참전으로 인해 증가한 미국의 무상원조를 제외한 이 금액은 동기간의 외환보유고의 29.83%에 이르며 총GNP의 2.07%에 이른다. 따라서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발생한 직접적인 외환보유고의 증가는 1966년에 시작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1966∼1971기간 동안 일인당 GNP는 약 11.7% 증가했으며 이는 1963∼1971기간의 연간 평균 증가율의 두배에 다다르는 것이다 (US Congress 1973, 15).7)
〈표 11〉한국의 월남전으로부터의 가시적 수입내역 (단위: 백만불)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65-'72 |
% |
상업수출 군납 |
14.8 2.8 |
13.9 9.9 |
7.3 15.9 |
5.6 32.4 |
12.9 34.2 |
12.8 57.3 |
14.5 21.2 |
12.5 15.0 |
94.3 188.8 |
9.1 18.2 |
무역부문 |
17.7 |
23.8 |
23.2 |
38.0 |
47.1 |
70.1 |
35.7 |
27.5 |
283.1 |
27.3 |
군인급여 근로자송금 사상보상금 서비스업 건설업 지급보험금 |
1.8 -- 0 0 0 0 |
15.5 9.1 1.1 8.3 3.3 1.1 |
31.4 34.3 4.6 35.5 14.2 4.6 |
31.4 33.6 4.6 35.5 14.2 4.6 |
33.9 43.1 10.8 55.3 11.5 3.8 |
30.6 26.9 15.2 52.4 10.7 2.1 |
32.3 15.3 13.9 32.0 8.5 1.3 |
26.8 3.9 12.0 9.2 3.1 0.7 |
201.5 166.2 65.3 238.8 61.7 19.4 |
19.4 16.0 6.3 23.1 5.9 1.9 |
비무역부문 |
1.8 |
38.4 |
123.6 |
130.7 |
158.4 |
137.9 |
103.3 |
55.7 |
752.9 |
72.7 |
계 |
19.5 |
62.2 |
146.8 |
168.7 |
205.5 |
207.8 |
139.0 |
83.2 |
1036.0 |
100 |
출처: 〈표 1∼10〉
참전으로 인한 직접수입은 전투병력이 본격적으로 파견되기 시작한 이듬해인 1966년의 6천2백2십만불을 시작으로 계속 급증하여 1969년에는 2억5백만불, 1970년에는 2억7백만불을 기록했다. 70%이상의 수입이 비무역 부문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원자재나 반가공품의 수입등에 소요되는 수출행위와는 다르게 자본의 회수율이 거의 전무하다는 데서 그 기여의 의미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은행의 외환보유고은 1965년에 1억3천8백만불이었으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72년에 6억9천4백만불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외화보유고의 증가는 대외적인 재정 신용도의 확보로 차관이나 외국인 투자를 유리하게 하였으며, 수출입능력의 증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표 12〉한국의 유형적 수입이 GNP와 외환보유고에 미친 영향 (단위: 백만불)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총계와 평균 |
A.월남수입 |
19.5 |
62.2 |
146.8 |
168.7 |
205.5 |
207.8 |
139.0 |
83.2 |
1036.0 |
B.GNP |
3,006 |
3,671 |
4,274 |
5,226 |
6,625 |
7,834 |
9,145 |
10,254 |
50,035 |
C.외환보유고 |
138 |
236 |
347 |
388 |
550 |
584 |
535 |
694 |
3,472 |
A/B |
0.6% |
1.8% |
3.7% |
3.6% |
3.5% |
3.1% |
1.5% |
0.8% |
2.07% |
A/C |
11.1% |
28.3% |
45.3% |
48.2% |
42.9% |
41.2% |
26.0% |
12.0% |
29.83% |
출처: 경제기획원; 〈표 11〉.
한편, 이러한 '월남전 수입'은 국내 산업기반과 소비수요의 창출에도 크게 기여했다. GNP는 1965년의 30억불에서 1972년의 100억2천만불로 늘어났으며, GNP성장률은 참전이전의 7%에서 13%로 증가했다. 일인당 GNP도 1964년의 105불에서 1973년의 373불로 늘어나 300%의 증가율을 보였다. 위와 같은 변화는 외화충당의 주공급원을 무상원조에서 외환보유로 바꾸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것이다.
IV. 산업화에 미친 구조적 영향
1. 참전관련 차관도입이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기간산업 발전에 미친 영향
참전기간 동안 한국은 직접수입을 제외한 막대한 공공 및 상업차관을 미국과의 '월남 협상'을 통해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금의 대부분이 다른 용도가 아닌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과 전략적 기간산업시설의 확충에 집중적으로 유용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한국정부의 차관도입에 대한 열의는 한국의 새 지도자들이 1960년대 초반 부터 미국의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을 향한 정책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통해 자립경제의 기틀을 확립하려는 노력에 기초한다. 수 년간에 걸친 미국과의 파월 협상테이블에서 이러한 한국 지도자들의 자세는 증명되고 있다. 한국의 지도자들이 세 차례의 파병에 대한 댓가로 수많은 협상에서 "계획차관(program loans)에 더욱 관심이 있을 뿐아니라 항상 다른 목적을 위한 차관을 요청하였으며," 미국대표도 "원조정책을 유연하게 이용하여 계획차관을 협상도구로 적극 활용하였다."8) 이러한 사실은 한국군 확보의 첨병 역할을 했던 맥죠지 번디가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에서 쉽게 확인 된다.
...이러한 계획들은 당신이 지난 5월(1965)의 박정희와 가진 회담에서 약속 한 1억5천만불 차관에 의해 추진 될 것입니다.... 월남전의 수행에 있어서 미국측의 요구에 한국측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고 우리는 그들에게 긴 급히 증파를 요구하고 있는 시점에서 당 차관의 조기지급 여부는 한국 정 치상황을 고려할 때 박정희에게는 '체면'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차관 이 한국측에 금년내에 지급될 것을 촉구합니다.9)
그러나 한일외교정상화를 적극 추진하는 대가로 한국에 약속한 이 1억5천만불의 차관이10) 한국의 지도자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1억5천만불 이외의 거래"를 요구하였다.11) 미국측이 한국의 참전에 대한 공식적 댓가로 1966년 3월에 합의된 "브라운 각서"(Brown Memorandum)는 이러한 한국측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되었다.12)
위와 같은 차관의 도입이 시작되면서 한국정부는 외자도입의 단순한 양적 확대를 지양하고 질적 선별을 강화하기 위해 주요 법안을 개정 혹은 신설하기 시작했다. '외자도입 촉진법' '차관에 관한 지불보증에 관한 법률' 및 '장기 결제방식에 의한 자본재 도입에 관한 특별조치법' 등 3개 법을 1966년 8월 '외자도입법'으로 통합, 일원화하여 외자도입의 효과적인 규제를 도모하였다. 외자도입법은 당시의 외자도입정책방향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차관에 대한 정부의 지불보증을 제한함으로써 무분별한 차관도입을 억제하였다. 또한 1967년 11월 경제장관회의는 당시의 일부 불합리한 외자유치책으로 인하여 야기된 대외부채의 급속한 증가를 억제하고, 불건전한 외자도입기업을 효율적으로 규제하기 위하여 '외자도입합리화를 위한 종합시책'을 의결, 집행하였다(재무부와 산업은행 1993, 92-93).
〈표 13〉한국의 외화유입 현황, 1966-72 (단위: 백만불, %)
|
1962-65 액수 %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66-72 액수 % |
공공차관 상업차관 은행융자 외국인투자 |
6.3 7.1 7.1 8.0 -- -- 13 1.5 |
73 110 -- 14 |
106 124 -- 11 |
70 268 40 19 |
139 410 30 13 |
115 367 25 66 |
303 345 90 43 |
324 326 20 61 |
1,130 26.4 1,950 45.6 205 4.8 227 5.3 |
누계 |
147 16.6 |
197 |
241 |
397 |
592 |
572 |
781 |
731 |
3,512 82.2 |
미국&UN원조금 청구금 |
739 83.4 -- -- |
103 30 |
97 30 |
106 34 |
107 31 |
83 25 |
51 31 |
5 27 |
552 13.0 211 4.8 |
총외화도입액 |
886 100.0 |
330 |
368 |
537 |
730 |
680 |
863 |
763 |
4,275 100.0 |
출처: 재무부 외(1993, 110).
1966∼1972기간 동안 35억불의 외자도입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 45.6%에 달하는 19억불이 상업차관이었다. 한일외교정상화 및 베트남 참전의 영향으로 60년대말까지 상업차관은 계속 증가하였으나 부채부담의 증가로 1970년대 이후 급격히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의 '월남협상'에 크게 힘입은 공공차관은 11억불을 기록, 총외자도입의 26.4%를 차지했다. 공공차관은 주로 발전소 건설과 철도 및 고속도로 건설에 쓰여졌으며, 상업차관은 정유, 화학, 시멘트, 철강 등의전략적 기간산업시설의 확충에 쓰여졌다.
〈표 14〉공공차관 도입 내역, 1966-72 (단위: 백만불)
|
1962-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66-72 액수 % |
미국 |
38 |
54 |
71 |
42 |
105 |
86 |
140 |
187 |
685 60.6 |
일본 |
-- |
14 |
26 |
17 |
21 |
13 |
102 |
63 |
256 22.6 |
기타 |
25 |
5 |
9 |
11 |
13 |
16 |
61 |
74 |
189 16.8 |
계 |
63 |
73 |
106 |
70 |
139 |
115 |
303 |
424 |
1,130 100.0 |
출처: 재무부 외(1988, 110).
참전기간 동안 공공차관 총액의 60%가 미국으로부터 도입되었는데 〈표 14〉에서 보듯 파병이 이루어진 이듬해이거나 전쟁말기 미국군의 철수후 한국군만 월남에 외국군으로 주둔하고 있던 1967, 1969, 1971, 1972년도들의 수치가 불규칙하게 급속히 증가한 것은 '월남 협상'의 결과이다.13)
〈표 15〉월남전관련 미국공공차관과 추진사업, 1966-72
도입기관 |
추진사업 |
차관 제공처 |
액수(백만불) |
연도 |
농수산부 |
농산물 수입 |
PL-480 |
415 |
1968-71 |
수출입은행 |
산업원자재 수입 |
PL |
32.5 |
1966 |
철도청 |
디젤기관차 수입 |
AID&EXIM |
25 |
1966 & 68 |
서울시 |
수도시설 확장 |
ADB |
9 |
1972 |
한국전력 |
당인리화력발전소 |
AID |
21 |
1966 |
산업은행 |
중기지원, KIST설립 |
AID |
12 |
1966 |
중소기업은행 |
중기지원 |
AID |
8 |
1966 |
총계 |
|
|
522.5 |
|
출처: 재무부 외(1988); LBJ 도서관 문서들.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총 5억2천2백50십만불의 '베트남전 관련 공공차관'은 공공차관 총액의 45.5%, 외국인 직접투자액을 합친 총차관도입액의 16%, 총외자도입액의 12.7%에 해당하는 규모의 자금이다. 〈표 15〉에서와 같이 주로 곡물차관(PL-480)이 '월남협상'에 의해 지급되었으며 이 자금은 주로 섬유산업등의 수출전략산업부문에 집중 투자되었다.14) 수출입은행에서 도입한 3천2백50만불의 차관은 미국으로 부터 산업 원료와 원자재 등을 수입하는 데 쓰여졌다.15) 그 외의 차관들은 집중적으로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 쓰여졌다. 2천5백만불은 증기기관차를 디젤기관차로 대체하기 위해,16) 9백만불은 서울시 수도시설 확충에, 그리고 2천백만불은 당인리 화력 발전소의 건설에 각각 쓰여졌다. 위와 같이 미국으로 부터 도입된 공공차관은 월남전에서 미국을 위해 "정치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돕고 있는 박정희의 "체면"(matter of face)때문에 약속된 시기에 정확히 미국으로부터 도입되었다.17) 한편, 중소기업지원 명목으로 도입된 2천만불의 차관은 한국과학기술의 요람이 된 한국과학기술원(KIST)의 1966년 개원을 위한 교수확보와 교육자재 구입에 사용되었다.18)
〈표 16〉월남전 관련 미국상업차관과 추진사업, 1966-72
도입기관 |
추진사업 |
액수(백만불) |
연도 |
한국전력 |
여수원자력발전소 건설 |
88 |
1970 |
한국석유공사 |
나프타융해공장 건설 |
47 |
1967 & 71 |
호남정유 |
제2정유공장 건설 |
45 |
1967 |
경인에너지 |
발전·정유설비 건설 |
60 |
1969 |
총계 |
|
240 |
|
출처: 재무부 외(1988, 119); LBJ도서관 문서들.
일본 및 유럽국가들로부터의 상업차관이 주로 수출생산품목을 위한 경공업시설 투자에 쓰여진 반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베트남 관련 상업차관'은 사회간접자본 및 중화학공업등의 기간산업에 투자되었다. 위의 차관들은 존슨 대통령이 한국군의 증파를 확답받기 위해 방한했던 1966년 11월에 실무장관의 비공식회담에서 결정되었다. 한국측의 김 정렴 재무장관은 2차 5개년계획의 추진사안중 첫째, 300 메가와트 발전용량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 둘째, 석유화학고업단지 조성 지원을 위한 차관, 셋째, 가족계획 실천을 위한 기술적 지원 등을 위해 매년 1억불의 상업차관을 제공할 것을 미국측에 요구했다. 거의 모든 요구가 미국측에 의해 이행되었음을 1966년 11월에 존슨 대통령에게 보고된 보고서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19)
2. 월남전 관련 곡물원조(PL-480)와 섬유산업의 발전
앞 절에서 미국이 동맹국들의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주 수단으로 곡물원조를 이용하였음을 밝힌 바있다. 미국 내수시장의 경기부침여부와 깊이 관련이 있었던 이 정책은 한국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미국 외교정책의 전략적 측면에서 곡물원조 정책은 크게 세 가지의 장점을 갖는다. 첫째, 쉽게 현찰화 되며, 둘째, 의회의 동의 절차가 필요없으며, 세째, 외무당국이 임의 대로 양을 조절하여 여타의 원조정책들과 호환이 가능한 융통성을 갖는 정책이라는 점이다(Wallerstein 1980, 130).
〈표 17〉에서 보듯 참전전(1961-1965)과 참전중(1966-1972) 두 기간을 비교해볼 때, 곡물원조가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전체 경제원조액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크게 차이가 난다. 참전전 기간은 40.2%를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참전기간 동안은 59.7%를 차지하고 있다.
〈표 17〉원조총액과 곡물원조액의 비교, 1961-72 (단위: 백만불)
|
1961 |
1962 |
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66-'72 |
A.PL-480 |
47.8 |
60.1 |
84.5 |
122.3 |
82.9 |
63.5 |
89.6 |
105.8 |
183.4 |
122.5 |
115.7 |
200.7 |
881.2 |
B.AID |
192.8 |
245,.5 |
252.3 |
164.8 |
176.9 |
173.2 |
229.8 |
197.5 |
239.7 |
181.8 |
185.9 |
241.4 |
1449.3 |
A/B(%) |
22.1 |
24.4 |
33.4 |
74.2 |
46.8 |
36.6 |
38.9 |
53.5 |
76.5 |
67.3 |
62.2 |
83.1 |
59.7 |
출처: Krueger(1979).
우리는 왜 한미 양국 모두 곡물원조를 선호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국내 경기의 부침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미국의 곡물원조 선호는 미래 시장의 개척이라는 현실적인 면에서라도 충분한 당위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측 입장에서는 자칫하면 국내 농산업계의 저발전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이 정책을 통한 원조수혜를 선호한 까닭은 과연 무엇인가? 강력한 경제성장 드라이브를 추구하던 한국 지도자들의 입장에서는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측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자, 월남협상 테이블에서 곡물원조의 품목중 한국의 수출위주 경제성장 정책에 유리한 제조 원자재의 비율을 늘릴 수 있는 권리가 자연스럽게 부여되었으며 이는 참전기간 동안 한국측에 의해 지속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면화가 곡물원조중 차지하는 비율이 급증하면서 한국의 수출전략산업인 섬유산업의 성장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20)
〈표 18〉PL-480(곡물원조)중 면화와 밀의 비율, 1956-65, 1966-71 두 기간의 비교
연도 |
면화/PL-480 (%) |
밀/PL-480 (%) |
계 (천불) |
1956 1957 1958 1959 1960 1961 1962 1963 1964 1965 |
24.7 3.9 0.9 61.0 3.8 47.8 46.4 32.8 50.0 49.9 |
75.3 96.4 99.1 39.0 96.2 52.2 53.6 67.2 50.0 50.1 |
32,955 45,522 47,896 11.436 19,913 44,926 67,308 96,787 60,985 59,537 |
'56-'65 평균 |
32.1 |
67.9 |
|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
70.4 76.8 44.0 52.1 44.4 46.6 |
29.6 23.2 56.0 47.9 55.6 53.4 |
37,951 44,378 55,027 74,830 61,703 33,651 |
'66-'71 평균 |
55.7 |
44.3 |
|
출처: 한국은행
〈표 18〉을 살펴 보면 참전전인 1956∼1965 기간중 면화가 곡물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2.1%에 불과했으나 참전기간중인 1966∼1972기강중에는 55.7%로 크게 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66, 1967 두 해동안에는 면화가 곡물원조품목중 70%이상을 차지했다. 참전기간 동안 약 1억8천만불 가치의 면화가 무상 수입되었으며 동기간 미국의 경제원조액 5억5천2백만불의 32,5%가 면화였음을 알 수 있다.
〈표 19〉총수출액 대비 섬유수출액, 1961-72 (단위: 백만불)
연도 |
A. 섬유류 |
B. 총수출 |
A/B(%) |
1961 1962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
4.1 7.6 17.6 32.7 54.5 79.6 124.5 190.3 249.3 330.2 467.5 660.2 |
38.6 54.8 86.7 118.8 174.9 247.6 320.3 455.2 622.6 835.2 1,067.6 1,632.6 |
10.6 13.8 20.2 27.5 31.1 32.1 38.8 41.8 40.0 39.5 43.7 40.4 |
출처: Krueger(1979); Cathie(1979, 173).
이렇게 무상원조된 면화가 한국의 수출주력산업인 섬유산업의 원자재로 공급됨에 따라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의 수출총액중 섬유류 수출로 인한 액수 가 최대의 비율을 차지하게 되었다.
3 '월남재벌'의 등장과 특혜성 다각화
박 정희 정권은 5.16 쿠데타 직후 급속한 경제성장의 지름길은 중앙집권화된 권력을 활용, 민간기업을 육성하여 지원하는 길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경제정책을 운용해 나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민간기업의 발전여부는 국내외 투자 자금의 배분권을 쥐고 있는 정부의 절대적인 결정권에 달려 있었으므로 정부의 간섭과 정책적 유도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주종관계 유형의 정부-기업간의 밀월관계는 한국의 월남전 참전을 계기로 더욱 심화되었다. 몇개의 건설, 운송, 섬유산업분야에서 독점적 대기업들이 새로이 떠올랐으며 이들 '월남재벌'들은 정부의 특혜속에 비관련 업종으로의 무분별한 다각화를 통해 2차대전 이후 일본의 대기업들과 맞먹는 크기의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즉 한국 민간기업들의 월남 진출은 외화의 획득 차원 뿐 아니라 신 계층구조의 형성과 전 산업구조의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월남재벌'로 분류된 여러 기업들중 현대, 한진, 대우 등의 경우를 살펴 보기로 한다.
〈표 20〉부가가치세 납세실적으로 분류한 10대 기업, 1966, 1975, 1986
|
1966 |
1975 |
1986 |
주력 업종 |
1 |
삼성 |
삼성 |
삼성 |
무역, 전자, 섬유, 보험, 제당, 반도체 |
2 |
삼호 |
LG |
현대 |
건설, 자동차, 조선, 시멘트, 전자 |
3 |
삼양 |
현대 |
LG |
정유, 전자, 부역, 보험, 금융 |
4 |
개풍 |
한진 |
대우 |
무역, 조선, 자동차, 전자 |
5 |
동아 |
효성 |
선경 |
섬유, 정유, 무역, 화학 |
6 |
럭키 |
쌍용 |
쌍용 |
시멘트, 정유, 건설, 무역 |
7 |
대한 |
대우 |
한진 |
항공, 해운, 육송, 관광 |
8 |
동양 |
동양맥주 |
효성 |
섬유, 무역, 기계 |
9 |
화신 |
동아건설 |
한화 |
화학, 식품, 보험, 증권 |
10 |
한국가스 |
신동아 |
롯데 |
식품, 유통, 호텔 |
출처: 조 동성(1990, 211).
(1) 현대 그룹
1947년에 정 주영에 의해 설립되어 1960년대 중반까지 교량수리, 도로굴착, 군대 막사 건축, 소형 댐이나 저수지 토목 등을 주 업종으로 하는 소규모 군소 건설업체중의 하나였던 현대는 월남전으로 인한 건설붐 참여를 계기로 대기업으로 성장한 경우이다. 기존의 군사시설 건축 및 토목공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는 월남내의 항만 준설공사를 미국측과 거의 독점 계약으로 따냄으로써 1969년 현재 월남에 진출한 한국 건설업체의 총 송금액의 절반이성을 차지하는 실적을 올리게 된다.
〈표 21〉월남진출 한국건설업체들의 송금실적, 1966-69 (단위: 천불)
|
1966 |
1967 |
1968 |
1969. 9 |
누계 |
현대 |
2,405 |
4,966 |
6,481 |
760 |
14,612 |
대림 |
805 |
138 |
311 |
547 |
1,801 |
공영 |
1,902 |
1,024 |
822 |
750 |
3,688 |
삼환 |
111 |
1,181 |
693 |
643 |
2,628 |
한양 |
0 |
638 |
1,238 |
1,407 |
3,283 |
기타 |
40 |
886 |
1,166 |
702 |
2,879 |
출처: 중앙정보부(1970, 72).
〈표 22〉현대건설의 월남에서의 주요 사업실적 (단위: 천불)
|
기간 |
금액 |
준설공사 1 2 |
1966-70 1967-69 |
9,143 3,758 |
평화마을 건설 |
1967-68 |
4,701 |
기타 |
1967-68 |
235 |
계 |
|
17,838 |
출처: 현대건설, 2집 (1982, 614).
월남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는 고도의 군사시설 건설기술을 미국으로부터 전수받아 기술경쟁력이 뛰어난 건설업체로 발돋음 할 수 있었다. 현대는 현재 세계 5대 건설업체로 성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월남전에서 미군으로부터 습득한 다음과 같은 네가지의 기술분야가 큰 역할을 하였다. 첫째, 미군 시설공사에 응찰하는 방법; 둘째, 미국 연방정부의 건설규정등 서구식 공법과 기준의 숙지를 통한 기술력의 향상; 세째, 건설회사 운영의 효율적 운영방법; 네째, 기존의 정비기술을 바탕으로 전쟁기간중 생긴 중고 건설장비의 정비와 사용법 등을 전수받았다(Amsden 1989, 232). 이러한 기술 경쟁력을 바탕으로 현대는 월남의 건설특수이후 태국의 굴직한 건설 프로젝트, 호주의 대형 항만 준설공사, 알라스카의 교량건설, 괌의 대형 주택단지 건설 등의 사업을 맡아 그역량을 계속 키워 나갔다.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후 현대는 중동의 건설 시장에 진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의 건설업체가 중동지역으로부터 올린 수입 2백20억불 중 60억불을 차지하는 혁혁한 기업성장을 이루었다.
정부의 실적위주 특혜방침(performance-based incentives)에 힘입은 현대 그룹은 중공업 위주의 업종 다각화를 시도, 국내 최대의 재벌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경험이 없으며 투자 위험도가 높은 산업분야에 과감히 뛰어든 현대는 정부로부터 절대적 특혜를 받았다. 이를 배경으로 1968년 현대는 자동차산업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현대는 한국정부가 파병을 댓가로 확보한 3백만불의 상업차관으로 현대시멘트를 설립, 1970년대 초반에 국내 최대의 시맨트회사로 성장시켰다.21) 또한 1973년 현대건설 소속이었던 조선업 분야를 독립시켜 현대중공업을 설립, 1980년대 중반 유럽 및 일본의 조선회사를 물리치고 세계최고의 조선회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2) 한진 그룹
1945년 창사이래 1965년까지 한진은 중견의 운송 및 수송전문업체였다. 그러나 1965년 창업주 조 중훈이 월남에 육해상 운송 전문회사를 설립, 1966년 3월 베트남에서 첫 운송사업 계약을 따낸 뒤로 한진은 월남전에서 주로 미군의 퀴논지역 중심의 전투수행을 지원하는 수송관련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진은 1966년 한 해동안 미국 및 일본회사의 하청업체로써는 최고의 매출액인 천5백80만불의 실적을 올려 200만불 이상의 순이익을 올리기 시작했다.22)
월남전쟁은 한국의 해상운송업의 위상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한미 양국의 행정적, 법적 지원에 힘입어 한진은 한국업체로는 유일하게 구수물자의 해상수송계약을 독점하여 1966∼1970기간중 천4백50만불의 계약실적을 올렸으며 이 수익의 도움으로 조 중훈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국내 최고의 소득세 납부자가 되기도 하였다 (박 동순 1972, 101).
〈표 23〉한진이 미군당국으로부터 수주한 해상운송 계약실적, 1966-70 (단위: 백만불)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계 |
3.0 |
3.0 |
3.0 |
3.0 |
1.5 |
14.5 |
출처: U.S. Congress, Senate, Republic of Korea....(1975, 1545).
월남에서 이룬 한진의 사업실적을 높이 산 한국정부는 한진이 국내 항공 및 해상운송시장의 사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으며, 미국정부에게 한미노선 및 아시아지역내에서 항공사업을 할 수 있게 끔 배려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23) 대규모의 한국군 3차 파병이 간절했던 미국은 긴밀한 내부협의를 거쳐 1968년 1월 존슨 대통령이 한국 민간항공사 설립지원 건의안에 사인을 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실질적인 민간항공업체가 등장하게 된다.24) 국제항공법상의 복잡한 문제때문에 정부가 형식상 소유하고 있던 이 항공회사는 1969년 한진측에 공식인수됨으로써 한진은 기존의 월남전을 위한 육해상운송망에 항공운송망까지 보유하게 되어 명실공히 아시아 굴지의 운송전문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한항공은 현재 세계10위권의 민간항공회사로 성장하였다. 한진은 현재 항공, 해상운송, 관광, 보험 및 증권, 건설회사 등의 계열회사를 거느린 국내 10대 기업의 하나가 되었다.
(3) 대우 그룹
1967년 단돈 몇 만원의 자본으로 창사된 대우는 1967년부터 미국의 월남특수정책에 적용된 "Buy American"정책에 따른 한국정부의 수출품목 변경으로 인해 군복등의 섬유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한 기업이다. 1967년도에 단지 58만불의 대월 수출실적을 올렸던 대우는 2년뒤인 1969년에 그매출액이 400만불로 증가하면서 미국측으로부터 품질의 우수성을 평가받아 미국 내수시장을 향한 수출을 시작한다 (Steers 외 1989, 64). 이러한 성장가도를 달린 대우는 1975년 국내기업중 투자대비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Roy 1985, 63-65).
대월남 수출실적으로 박 정희에게 인정받은 김 우중회장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토대로 사업기반을 확장하면서 부실기업들을 저가에 인수하는 특혜를 누리면서 규모를 급격히 늘려 갔다. 신진 자동차, 옥포 조선소 등의 기업을 인수, 합병한 대우는 국내 4대기업중의 하나로 성장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대월 무역과 일본의 경제침투
월남전의 개전과 더불어 한국은 월남특수를 향한 공격적인 수출정책을 펴나갔지만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한국의 무역구조에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참전직후 특별화 된 품목(중공업 위주)의 수출량 증가는 '자주경제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Watanabe 1978, 385). 한국의 산업구조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반가공품의 완전가공을 위한 중간 연습장(workshop)화 할 가능성이 많았던 것이다.
일본은 1960년대 중반부터 정치경제적인 측면에서 아시아지역내에서의 활동을 적극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본의 움직임은 아시아권내에서 재정부담을 줄이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환영할 일이었다. 이 시점에 한국은 월남전에 참전함과 동시에 외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경제적 침투의 위험을 더욱 고조시켰다.25)
전쟁이 점차 확전되면서 월남특수로 활황을 이루던 미국 산업계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경쟁력을 잃기 시작하자, 미국은 많은 전쟁물자의 조달을 일본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권 국가들로 부터 구입하기 시작했다. 자립적인 산업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한국과 동남아 국가들은 일본으로부터 원자재 및 반가공품들을 수입하여 단순 재가공하여 수출하는 무역구조를 피할 수 없었다. 이런 역내 무역 구조속에서 일본이 얻은 간접이익은 대월직접수출로 인해 발생한 수익보다 훨씬 많다.
〈표 24〉월남전으로 인한 일본의 유형이익, 1965-67 (단위: 백만불)
|
1965 |
1966 |
1967 |
계 |
직접이익 |
55.0 |
161.0 |
218.8 |
434.8 |
간접이익 |
240.9 |
689.7 |
833.8 |
1,764.4 |
8계 |
295.9 |
850.7 |
1,052.6 |
2,199.2 |
출처: 산완은행, 노무라 소고 연구소, 일본 간꾜은행, MITI 자료를 종합.
〈표 25〉지역별로 본 일본의 무역수지, 1964-69 (단위: 백만불)
|
동아시아 8개국* |
서아시아 |
서유럽 |
북미 |
남미 |
1964 |
566.4 |
689 |
49 |
-707 |
-220 |
1965 |
737.5 |
-788 |
359 |
-29 |
-219 |
1966 |
1191.6 |
-872 |
427 |
116 |
-225 |
1967 |
1457.4 |
-1163 |
-359 |
-56 |
-221 |
1968 |
1988.3 |
-1318 |
375 |
246 |
-219 |
1969 |
2564.7 |
-1372 |
571 |
679 |
-218 |
계 |
8505.9 |
-6202 |
1422 |
249 |
-1322 |
*는 한국, 홍콩, 대만, 필리핀, 태국, 오키나와, 싱가폴, 월남
출처: 일본경제백서; 일본 해외시장백서; OECD 자료의 종합.
〈표 25〉는 1964-69년 기간 일본의 수출지향성과 무역수지현황을 나타내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최대 수출 대상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역수지의 측면에서는 월남전으로 인해 갑자기 부상한 아시아권역내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큰 이익을 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외교정상화와 더불어 활성화된 양국의 무역활동에 힘입어 대일무역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월남전특수에 의한 한국의 산업 원자재 및 반가공품의 수입이 그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월남전 초기 한국의 주요 수출품목은 철강제품, 화학비료, 기계류 등의 반가공품들로 국내 생산기반이 전혀 없던 품목들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공급자의 역할을 전쟁기간중 하였음을 알 수 있다. CIA보고서에 의하면 이러한 품목들은 일본정부에 의해 선택되었으며 한일기업군간의 합의하에 품목별로 일본의 침투가 가능했다. 일본이 위와 같은 품목들을 위주로 한국에 공급한 이유는 바로 1960년대 중바이후 일본내에서는 공해산업생산품목에 대한 강력한 제재와 함께 상승하는 공해방지비용에 대한 투자를 일본기업들이 회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6)
〈표 26〉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의 상호의존성으로 인해 일개 제품의 생산량 증가는 관련 부속 생산품들의 생산량 증가를 동반한다. 예를 들면, 기계류의 수출을 위한 생산 증가는 철판, 강재 등의 원자재의 생산을 증가시키는 원인을 제공한다. 만약 수출 주문의 폭주로 공급이 부족할 경우에는 수입을 통한 공급량의 보완도 가능 하다. 따라서 국내 생산과 수입은 수출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절대구성요소이다. 한국의 대월수출을 위해 공급되었던 원자재의 대부분이 국내생산보다는 수입에 의존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면 일본의 경우는 양부문이 공급량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거의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1965∼1967기간동안의 중화학공업생산품 중심의 대월수출은 외환보유율의 증가에는 크게 기여했지만 이 수입은 단지 총매출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원자재를 수입하였으므로 총수입의 많은 부분이 원자재수입으로 발생한 지불로 누수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 대통령 비서실 산하의 '한국 파견팀'(Presidential Task Force)의 한 보고서에서 쉽게 확인 된다.
... 높은 원자재의 수입가 때문에 한국이 실제로 철강류 수출을 통해 얻은 이익은 미미하다. 또한 이런 현상은 우리(미국)가 90/10(미국-90%/미국외 -10%)규정을 월남시장에 적용할 경우 더 심화되리라 믿어진다. 미미한 수출 순이익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계속 이러한 수출정책을 견지하려는 것 은 단지 표면상의 수출총액 극대화에만 급급하기 때문이다...
〈표 27〉한미·한일 무역수지의 비교, 1962-73 (단위: 백만불, %)
연도 |
수출 |
수입 |
일본 미국 |
일본 미국 | |
1962 1963 1964 1965 |
24(43.6) 12(21.8) 25(28.7) 24(27.5) 38(31.9) 35(39.4) 44(25.1) 62(35.2) |
109(25.8) 220(52.1) 159(28.4) 284(50.7) 110(27.2) 202(50.0) 167(35.9) 182(39.3) |
누계 |
131(32.3) 133(28.5) |
545(29.3) 888(48.0) |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
66(26.5) 96(38.3) 85(26.5) 138(42.9) 100(22.2) 237(51.7) 133(21.7) 315(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