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머리에
세기의 말이었던 대망의 새 천년(서기 2000년)을 눈앞에 두고 16세기 점성가 노스트라다무스(프)의 예언이 빗나가기를 바라며 21세기에 무사히 안착한지도 6년이다. 3천기를 향하여 첨단과학, 정보과학, 생명공학이 어디까지 접근할 것인가 궁금해 하고 있지만 문화의 세기를 부인할 수 없으며 서둘러 웰빙의 흐름 속에 인간이 만들어 낸 생명공학보다 친자연화 친인간화로 시대를 불문하고 가장 이롭게 아껴왔던 인삼을 산업적 범주에서 문화적인 시각으로 살펴보고 아이러니하지만 가장 원시적인 것이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그 현주소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인삼이 인간에게 유익한 재료로 쓰여 진때를 거슬러 언제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인류역사 속에서 기록의 한계가 있고 근거가 있다 해도 기록만으로 가장 오래된 사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중국의 문헌에서 믿을 만한 근거를 먼저 찾아 볼 수 있으니 기원전 100년 신농본초경(양나라 도홍경)에서 인삼은 맛이 달다, 휘발이 있어 차게 느껴진다, 주로 오장을 보하고 정신을 편안하게하며, 혼백을 안정시키고, 나쁜 기운을 없애준다, 눈을 밝게해 주며, 마음을 열어주고 지혜를 더해준다, 오래복용하면 수명을 늘여준다(人蔘味甘 微寒 主補五臟 安精神 安魂魄 止驚悸 除邪氣 明目開心 益智 九服輕身延年)라는 기록이 있다. 15세기 중국 의약계의 거성 본초강목의 저자 이시진(서기 1518~1593)과 우리나라 의성 허준(許俊)선생이 동의보감에서 밝힌 효능 모두 인삼이 인간에게 주는 효력에서 별 차이가 없으며 오늘날 인삼 7효설이나 브레크만(러)교수의 아답토갠(Adaptogen)의 학설도 마찬가지다. 다만 인삼성분을 현대과학으로 본질을 찾아 좀 더 인체에 이롭도록 연구하여 샤포닌(인세노사이드:Ginsenosides)분석을 실용적 단계로 끝없이 지향할 것은 분명하다. 인삼재배의 기원이나 나라마다 주장하는 성분이 달라도 인삼은 인삼일 뿐 말하지 않는다.
가삼재배의 시작이 오백년이다. 천 오 백년이다 라는 주장은 그대로의 충분한의미가 있다. 산양삼을 재배인삼의 시원으로 볼 수 도 있고 기원전 246년 중국 진시왕이 진나라로 통일하고 군사를 풀어 우리나라(삼한시대)에서 불로초(不老草)를 찾아 헤맸다는 신초식물 인삼이 귀하고 신비하다하여 수 천 년 동안 수난을 겪어 온 역사를 돌아볼 때 시대의 상황에 따라 비밀리에 재배를 했거나 인위적으로 생산량을 늘여왔다는 주장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만초지왕의 별명과 신이 준 가장 큰 축복으로 명성을 가지고 있음은 신비의 영약 인삼이기 때문이며 태초부터 인연을 가지고 오늘날 각광을 받고 있기에 오랜 과정을 통해서 인삼이 인간과 어떻게 함께해 왔는가를 기록물과 구전을 통해 고찰해보고 인삼의 컨텐츠를 찾아 겸허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인류역사의 보편적 측면에서 인삼의 문화적 기능과 산업적 기능의 제고방안을 마련해 보고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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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산신령으로부터 인삼종자를 선물 받은 상상적인 神仙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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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양나라시대(BC 100년 경) 도홍경이 지은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중 인삼의 약효를 설명한 부분
2. 주요 연혁으로 살펴본 인삼의 추이
○ 신라진평왕 49년(서기 629년) 당고조에게 선물
○ 신라문무왕 2년(서기662년) 나당 연합군 편성시 수교품으로 인삼 200근을 보냄
○ 신라 성덕왕 33년(서기 734년) 왕의 조카 김지염이 사절단인솔 하정사로 당현종에게 인삼 200근 외 특산품선물
○ 신라효성왕3년(서기 739년) 발해 문왕이 인삼 30근 을 왜(倭)의 동대사에 보냄(일본 최초)
○ 신라신무왕 원년(서기 839년) 교역왕 장보고장군등장
- 청해진을 모항으로 하여 중국 내륙지방과 유구, 샴등 동남아 일 대에 인삼을 위시한 특산물교역(신라 천년역사의 재정적 뒷받침을 가져 옴)
○ 고려 태조 12년(서기929년) 왕건이 광평시랑 장분등 53명을 시켜 인삼을 당에 보냄
○ 고려 태조20년(서기937년)문화수준이 낮아 상대하지 않던 왜에 대해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수교함
○ 고려 광종 12년(서기961년)송과의 국교가 정상화 되어 무역을 시작함
○ 고려 현종 원년(서기 1009년) 고려의 무역항인 예성강 벽란항에서 아라비아상인이 자국의 토산품을 바치고 고려인삼을 무역해 감(고 려사)
○ 고려현종 21년(서기1030년)송나라 인종에게 고려삼을 보내 수교 (사신일행296명)
○ 고려 문종24년(서기1070년)에 1천근을 고려문종 34년(서기1080 년) 인삼 2천근을 송나라에 보냄
○ 고려인종원년(서기 1123년) 고려인삼을 소개한 송나라 사신 서긍 의 고려도경에서 인삼을 숙삼이라고 한 첫 번째 홍삼기록이 나옴
○ 고려충렬왕 3년(서기1277년~)부터 원나라에 공삼이 많아 어려움 이 많았으며 원나라왕족이던 충열왕비가 개인영리를 목적으로 인 삼무역을 하면서 민간원성이 컷음
○ 고려공민왕 7년(서기 1358년) 원나라 교역시 화약원료를 받음
○ 이조태조원년(서기 1392년) 명나라 태조에게 공물로 인삼을 보냄
- 인삼재배(삼농)가 이루어지고 송삼계(보부상 모임)가 활동하였으 며 연간 명나라에 보낸 공물이 500~600근, 문종이후 절반정도로 줄어 듬
○ 이조정조원년(서기1399년) 일본 사신에게 인삼 50근을 하사하고 같은해 아시가가막부의 사자에게 교증품으로 인삼 하사(사신은 막 부에게 예물로 바침)
○ 이조 정조2년(서기1400년~)이후 인삼의 절대량부족으로 교역을 억제하고 양직삼재배를 토착화하여 고려조 수도였던 송도 땅에서 는 삼농(蔘農)에 집중함(이조실록)
○ 이조태종5년(서기1405년)사무역이 금해지고 고려인삼외국반출이 금지됨(태종실록)
○ 이조태종13년(서기1413년)형조에서 관용고려인삼을 북경에 보내 견직물과 교역
○ 이조태종15년(서기1415년)개국 초기는 민폐 없이 지방수령에게 적정량을 받았으나 늘어나면서 수량감소를 상소(태종실록)
○ 이조 세종조(서기1419~) 명과 왜 그리고 유구국과 교역이 이어 짐. 교역시 포대에서 나무궤로 포장이 바뀜(조선왕조실록)
○ 이조예종원년(서기1469년) 상인 이길생 일본과 밀무역 적발 참수 및 재산몰수, 연루자 유형
○ 이조 중종33년(서기1538년) 요동군사로부터 만주인삼이 연간 800 근이 들어 옴.
○ 이조 명종11년(서기1556년) 재상 이항복은 국가재정재원으로 홍 삼을 관영으로 함.
○ 이조선조8년(서기1575년) 고려인삼 아라사로 전파-아라사인삼의 최초.
○ 이조선조25년(서기1592년)임진왜란시 일본장수 소서행장(한약종 상의 집안)이 인삼종자를 가지고 갔으나 재배실패
○ 이조 선조34년(서기1601년)에 전국인삼수집량이 1,900근으로 기 록 되고 선조왕조시 파삼(홍삼)제조가 금지되기도 하였으며 선조 40년 거상 심유경을 통한 교역이 활발하였음.
-인삼방납의 폐단을 막기 위해 국정가격의 매수법을 제정하였음.
○ 이조 선조39년(서기1606년)에 상인에게 인삼거래증명서 교부
○ 이조광해군8년(서기1616년)강계부판관 인삼탐욕과 민심피폐로 사 헌부에서 파직함
○ 이조광해군 14년(서기1622년) 면나라 상인 모문용이 금과 은을 가지고 들어와 대규모의 교역을 하였고 물의도 빚었음.
- 이조 중기 이후 왕조누대에 걸쳐 동일한 방법의 인삼교역은 이 루어 졌으며 다한 거래요구로 한정된 생산량에 인삼산지의 민심 이 흉흉해 거처를 떠나는 일이 빈번 함.
○ 이조숙종12년(서기1686년) 금삼사목(禁蔘事目)제정-대마도인삼밀 매금지, 북경행 사절의 한도초과인삼소지엄금, 월경채삼 단속, 청 과의 밀매단속 금지.
○ 이조숙종14년(서기1688년)강계금삼절목을 제정하고 군인이 관할 케하였으며 일본과 고려인삼 3천근 교역, 일본내에서는 귀중품으 로 취급되어 감찰제도하에 관영판매
-이조왕조시 일본과의 인삼교역이 많았었던 것이 특색이며 여러 차례 인삼종자를 가지고 가서 시험재배 하였으나 대마도에서 성공한 사례가 있고 본토에서는 실패함
○ 이조영조21년(서기1745년) 고려인삼종자로 생산한 인삼의 이름을 화국인삼이라 명명
○ 이조영조29년(서기1753년) 궁내약방제조 이천보가 왕에게 參商을 모조리 주살한 후에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다는 상언을 보아 인삼 상인의 폐해가 컷음.
○ 이조 영조32년(서기1756년)삼화세 제정
○ 이조 영조34년(서기1758년)일본 막부는 인삼을 관용으로 전국막 에 재배를 보급함.
○ 정조14년(서기1790년)내의원제조 홍억(洪檍)이 가삼이 성행한 후 자연생 인삼을 공납하지 않고 경상도 가삼을 사용한 듯 하다는 계 (啓)를 올림
○ 이조순조대(1800~1834)년 동방의 거상 의주출신 임상옥(서기 1779년~1855년) 등장
- 북방무역을 통하여 고려인삼을 대량 교역하고 은을 반입하여 국가재정에도 이바지하였으며 1811년 홍경래난을 진압하는데 군사비로 헌납함
○ 이조순조10년(서기1810년~)포삼근량이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2천 근이상 무역거래가 이루어지며 증포소가 개성에 한양으로 잠시 옮 겨갔다가 삼포주인 삼계원의 반대로 개성에 둠
- 양의학의 도래(순조26년)로 한방의 일부가 퇴조되기도 하고 홍 삼무역관련 속칭 연목세, 관안세등을 관헌에서 징수함.
○ 이조헌종6년(서기1840년~)미국학자에의해 삼 최초의 화학적검사 가 이루어지고 러시아에서는 책이 발간 됨
- 헌종13년 홍삼무역고가 무려 2만근, 세전 수입이 20만량, 철종 3년에는 4만근, 포삼세 16만량
○ 고종원년(서기 1864년~) 홍삼제조가 늘어나고 개화의시기 인천항 이 개항되어 무역이 늘어 나 홍삼제조권 전체가 황실권리로 귀속
○ 고종31년(서기1894년)청일전재이후 대한제국독립(1897년), 홍삼 에 관한 사역원이 탁지부소관으로 되고 홍삼세는 근당 50 량, 왜정간섭이 시작됨. 포삼(홍삼)규칙발표(서기1897년).
- 청일전쟁을 계기로 삼포에 적부병발생이 만연됨.
-포삼세의 국고수입이 10만원(국가재정의 10%이상 부담)
○ 고종37년(1900~)공무4년 홍삼판매권을 일본재벌 삼정물산합명회사 에 위탁판매계약하고 연간 100만원을 궁내부에 납임함.
- 일본 내정간섭이 시작되고 1905년부터는 세계학자들이 본격적 으로 고려인삼연구를 개시하였으며 홍삼위주의 인삼제조와 교역 이 이루어 짐.
○ 융희2년(서기1908년) 법륙 제14호로 “홍삼전매법 공포” - 이 때 부터 인삼전매 약 1백년간(1994년)국가 독점으로 인삼산 업이 관주도로 이루어져 왔음
○ 서기 1910년 6월 일제감점기가 시작되었으며 인삼산업사업이 조선 총독부 전매국 소관 하에서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 짐
- 고려인삼을 주도해 왔던 개성이 서울과 가까워 인산산업 전반이 개성 중심으로 각종 재배, 연구, 유통, 행사가 이루어지며 전매품 인 홍삼제품(홍삼분말, 내용삼정, 욕용삼정)이 제조 됨
- 서기 1934년~1940년(7년간)조선총독부 인삼전매국 소속 이마무 라 모토 주관하에 인삼사(人蔘史) 7권이 편찬됨
○ 서기 1937년 삼포면적 30%중가 홍삼수입금은 167만 8천 762원으 로 전매 총수입금의 1/40을 차지 함. 총수입액의 1/109
○ 서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 초대전매국장 윤상은
- 전매국 염상과에서 인삼업무 담당
○ 1956년 12월 26일 풍기삼업조합설립
- 자체기록보존이 없어서 한국인삼사편찬시 풍기인삼조합법인 등기 일자를 자료로 정리되어 있어 유감이나 보존되어 있는 중앙지 신문자료와 가까운 역사적 사실에서 1908년 12월에 삼포조합설립은 확실한 근거로 판단되며 일제강점기 발행된 일간신문과 개인소장 자료로 볼 때 조합의 활발한 실적이 확실한 바 재판발행 시 개정이 요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