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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성과 미학성
“본질을 잃을 위기감에 빠질 때, 나는 꽃의 세계로 간다.”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 극한의 외로움과 대면하는 자의 깨어 있는 의식처럼 꽃도 지고지순한 과정을 통해 어느 순간 피어난다. 그 존재가치를 아는 자에게 꽃은 단순히 인간의 삶을 장식하는 데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성찰을 위한 대상이다. 자신의 이성으로는 통제되지 않는 동물성에 절망한 적이 있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구절이다. -
I. 열며
타 장르에 비해 수필미학의 논리 개발이 더딘 현실에서 문학성과 미학성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은 수필미학의 체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여겨진다. 이 글은 수필이란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어야 한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문학적 접근 즉 수필이 일상의 사건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차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학적 장치를 예술적 장치로 승화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리란 관점에서다. 수필의 예술적 접근만이 수필의 '잡문성'을 해소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폄하되어온 수필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도 전제해 둔다. '누구나' 쓰는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씌여지는 글이라는 인식이 세상의 저변에 깔리지 않는 한 수필의 운명은 서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수필 쓰기의 출발점은 문학적인 취미에서가 아니라 심미적 취향이 되어야 한다. 적어도 감성과 지성의 균형 있는 조화를 통해 사물과 사회현상의 실재와 작가 스스로의 인생관을 동시에 노출한 작품이 나와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아는 심미적 의무와 무엇이 '아름다움'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아는 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가 붓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수필이 문학 단계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한 단계 업그래이드된 상위 개념으로 나아간 '예술'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쉽게 말해 수필은 내용을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주제와 제재 중심의 문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라는 식으로 진술되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미'는 어디서 오며, 수필문학과 수필미학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가. 수필문학의 지형
우리 문학 전체의 지형 안에서수필'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중적이다. 수필창작에 종사하는 인적 구성의 폭이 매우 넓어진 데 비해서 수필에 대한 비평이 빈핍하고, 창작이 보여주고 있는 활성화 수준에 비해서 수필이 주변성과 외곽성을 못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 다른 하나이다. 이와 같이 현 단계 우리 수필문학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모순된 위상은 수필만이 갖고 있는 고유한 장르적 성격을 알려주는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 정립해가야 할 수필정신에 대해 매우 암시적인 지표를 제공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같은 모순된 위상을 면밀하게 해석하여, 수필이 우리문학 전체 영역에서 풍요로운 역할과 기능을 담당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수필이 매우 활발하게 창작되고 있고 수필을 게재하고 있는 매체도 적지 않은 데 비해 수필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아직도 열악하다. 수필작가나 작품에 대해서는 일종의 신변잡기의 혐의를 씌우면서 본격적인 공론의 장으로 편입시키지 않는다. 나아가 수필작가들에 대해서는 그 흔한 문학상조차 인색한 것이 현실이다. 물론 수필이라는 것이 쓰기 전에 어떤 계획이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의 느낌「기분」정서 등을 표현하는 산문 양식의 한 장르라고 이해되고 있고, 나아가 무형식의 형식을 가진 비교적 짧고 개인적이며 서정적인 특성을 가진 산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지만, 문학이 갖는 고유한 미학적 성격은 다소 취약하다. 따라서 수필 안에는 수필 나름의 고유한 세계 이해방식과 표현방식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같은 주변 장르로서의 인식관행은 점차 완화되어야 할 것이다.
나. 수필미학의 과제
수필문학의 지형을 통해서 수필계가 떠안은 과제는 첫째, 수필의 비평의 활성화를 통해 문학의 본류에 합류하는 일이다. 둘째, 낮은 수필의 위상이다. 이를 한꺼번에 해소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수필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수필이라는 것이 전문적인 수필언어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장르적인 언어를 빌린다는 점에서 종합문학이다. 따라서 수필미학은 다양한 관점을 포괄해야만 된다. '미'란 미학에서 다루는 문제다. 수필이 예술에 속하는 한, 우리는 수필의 예술성, 즉 수필미학에 대해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현상에 대한 특성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의 대립항을 찾아 대조하면서 서술하는 것이다.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예술적인 아름다움은 자연 그대로의 '미'와 다르다.
결국 예술의 '미'는 조형미다. 그러면 이 조형성을 구성하는 인자는 무엇이며, 그 경계를 이루는 핵심 요소는 뭘까. 전통적으로 진에 대한 탐구를 추구하는 것은 종교와 과학이고, 현실적인 선의 원칙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고, 미래적 생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다. 적어도 한마디로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때, 수필미학은 존재의 토대를 얻게 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수필은 그 특유의 일상성, 무형식성, 평이성 등을 특색으로 하면서 비판적 문제제기보다는 공감의 영역을 지향하는 성과를 우리문학에서 만만치 않게 거두고 있는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수필문학의 낮은 위상 평가에 대하여 깊은 반성적 시선을 던지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필미학의 정립과 평가를 적극적으로 해가야 할 것이다.
다. 수필의 문학성과 미학성
지금까지 수필은 문학의 서자 취급을 받아왔다. 아직도 수필을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제 그 내용부터 작법까지 달라져야 한다. 오늘의 독자들은 이 혼돈스럽고 험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양식이나 정신적 양식을 달라는 것이다. 오늘의 독자들은 이같이 다양한 정서적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 삶도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데 대한 확인을 가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수필은 문학이요,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예술이다. 아무리 좋은 글이라 해도 예술성이 없으면 문학이 아니요, 문학성이 없으면 유명한 수필가가 쓴 글이라 해도 수필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수필의 형식을 갖춘 글 가운데 예술성 즉 문학성이 제고된 수필다운 수필만을 수필로 인정해야 한다.
수필의 문학성이란, 한 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만들어가는 구조적인, 형상화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심에 투영된 감정이나 정서가 세련되게 문학적 방식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호반에 떠 있는 달빛의 요요한 자태를 그리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그 달빛을 내 방에 끌어들여 나와 대화를 하고, 거기에서 어떤 정신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창조적 사상’이다. 늦가을 저녁녘, 지적지적 내리는 가을비에 젖어 병든 낙엽이 뚝뚝 떨어지는 쓸쓸한 풍경만을 그려서는 안 된다. 거기에서 생의 허무나 죽음과 같은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끄집어내야 한다. 그것이 낙엽에 대한 체험의 변용이다. 이것이 문학으로서 수필이요, 예술로서 수필이다.
1. '일상'이 아니라 '인상', '풍경'이 아니라 '절경‘
본래 수필은 작가 자신의 자기탐색 혹은 자기성찰의 성격이 짙은 산문문학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수필을 쓰는 주체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 삶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그리고 수필가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적인 감동과 자각을 매우 평이하고 친화력 높은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제시하게 된다. 그만큼 독자가 수필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해석하는 데 드는 품은 타 장르에 비해 그리 크지 않게 되고,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수필은 이해와 해석이 용이한 언어적 형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수필적 특성과 한계 때문에 수필은 예술의 문턱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잡문시되어 왔던 것이다. 이제 예술로서의 수필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야기의 차원을 넘어 '아름다움'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서술성이나 마음의 풍경에 중점을 두는 서정성에 더하여 미학성을 추구하여야 한다.
예술로서의 수필을 쓰려면, 먼저 '미'는 경계를 넘어서는 데서 생성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 경계는 바로 '일상성'이다. '일상성'에서의 이탈에서, 예술은 싹을 틔우는 것이다. 누구나 겪는, 누구나 아는, 누구나 보는 '일상'적인 '풍경'이 아니라 일상의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다가오는 '인상'적인 '절경'을 보고 우리는 적어도 '아름다움'을 느껴야 한다. 이런 경계를 넘어선, '일상'에서 끊어진 한 단계 업그래이드된 현실이나 상황 앞에 선 심미적 취향을 가진 수필가라면 심미적 의무를 다하리라 본다. 수필가 찰스 램(C. Lamb)은 “나는 평범한 것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찰스 램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평범'을 넘어 '다름'을 지향한다. 일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different'에서 '아름다움'을 얻게 되며, 'simple' 이나 'easy'에서 오는 '미'가 아니라 'difficult'하고, 'complicated'한 데서 '미학'이 싹을 피운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익숙한 일상이 아닌 낯선 인식에서 풍경은 절경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절경을 보는 눈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2. '경험'이 아니라 '체험'이며, '모사'가 아니라 '묘사'
공감이 가지 않는 인식능력만으로 장면에서 장면으로, 정경에서 정경으로, 옮아간다면, 아마 독자는 싫증이 나서 지쳐버릴 것이다. 이 말은 수필의 내용을 이루는 글감이 적어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흥미나 감동은 수필의 육체요, '미'는 그 혼이기 때문에 수필은 가치있는 체험이 내용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사실 개념 차원에서 수필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가치 개념의 차원에서 본격수필의 대상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술성은 평범함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독자가 알고 있는, 독자가 살아가면서 느껴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해서 '감동'을 엮어낼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술로서의 수필은 감동의 창출을 목표로 한다. 감동은 자기만의 독특함 체험에서 나온다. '경험'을 넘어선 '체험'은 생경함과 신선함을 주면서 감동을 주기 때문에 미학을 구축하는 것이다.
수필이 아무리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라 하더라도 사실의 기록만으로는 수필이 되지 않는다. '사실'을 넘어서는 변형과 보수가 있어야 문학이 되는 것이다. 조형성, 함축성, 탄력성이 통일성을 기반으로 문장 속에서 구축되어야 한다. 감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은 깊은 의미에서 문학은 아니다. 그것은 풍경의 재생이다. 있었던 것이다. 있어야할 일은 아니다. 수필은 'fact'가 아니라 'reality'를 추구하는 글이다. 또한 수필의 글이 감성과 지성이 조화된 세련된 묘사일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수필은 녹차의 다도와 같다. 생잎을 따 아무리 다려도 차의 색, 향, 미는 음미할 수 없다. 붓 가는 대로 써대는 글이 수필이라면 누군들 못 쓰겠는가. 차잎을 채취하여 덖거나 볶고 펄펄 끓는 물을 식혀가면서 관조와 여유로 다려낼 때, 두 번 세 번 우려내도 그 색향미가 남아있는 것이다. 수필은 묘사로 된 체험의 문장인 것이다.
3. '지식'이 아니라 '인식', '누구나'가 아니라 '누군가'의 글
수필은 자기가 체험한 리얼한 기록을 토대로 씌어지는 글이다. 그 창작의 시작은 '상식'이 아니라 상식을 넘어서는 '인식'에 있다. 수필은 표현 기술의 습득에서가 아니라 소재를 보는 특별한 '관'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을의 소리 앞에서 낙엽의 겸손을 배우고, 수필가가 되는 것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필다운 수필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과 들에는 수 만, 수 억의 꽃들이 피었다 열매를 맺고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달은 한번도 웃지 않았다. 아침마다 저녁마다 뜨락을 불고 지나가는 바람이 한번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꽃은 혼자서 웃고, 바람은 혼자서 춤춘다. 그것이 꽃의 존재성이고, 바람의 존재성이다. 달을 내 방에 끌어들여 대화를 하는 것도 바람을 내 뜰 안에 이끌어 들여 같이 춤추는 것도 다 나에게 맡겨진 과제다. 형이하학적 제재를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본질을 추적해 나갈 때 좋은 수필이 탄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필에 있어서 인생을 그리는 문과 창은 올바른 '인식'이다. 이 인식에 의해 '미'가 보여진다고 하겠다.
수필의 독자는 지적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따라서 수필은 교양인의 글이요, 지성인의 글이다. 심미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진짜 고상한 것, 진짜 훌륭한 것,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수필은 고상하고 세련된 지적 성찰을 요한다. “학교에 갔다와서 종일 놀다가 돌아와서 밥 먹고 잤다.”는 식의 글은 살아있는 사실에 대한 일반적 취미 속에 대치된 기록이다. 이런 글은 사실일 수는 있지만 문학은 아니다. 문학이나 예술은 감동의 창출에 목적이 있다. 수필은 시적 분위기의 산문이다. 그 방법은 '상'과 '정'의 조화에 있다. 수필은 따뜻한 마음이 그려낸, 심오한 발견에 실은 감동이다. 한 여인의 영상이 꽃 위에 머물게 됨으로써 탄생한 ‘국화꽃 옆에서’의 형상화 과정을 보면 인간의 정신세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이 시적으로 변용되어 '상'이란 찬란한 의상을 갈아 입게 된 것이다. 수필문학은 사물의 본질에 대한 천착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날카로운 지성적 성찰을 동반해나가야 한다. 미학이란 누구나가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필을 아는 누군가에 의해 세워질 것이다.
4. '정'과 '상'의 조화, '감성'과 '지성'의 조화
비평가인 루카치는 수필을 일러 좀처럼 붙잡기 힘든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리는 양식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은밀하고 신비로운 운명의 영역에 비춰보면, 수필은 시적 분위기의 산문이다. 말을 놓을 자리에 놓은 것이 시창작의 첫 걸음이요, 인물을 놓을 자리에 놓은 것이 소설 창작의 첫째 구상이라면, 마음을 놓을 자리에 놓는 것이 수필 창작의 요체다. 수필은 사상과 감정의 체험적 기록이다. 감동스런 체험에서 마음은 꽃이 된다.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수필은 두 가지의 낯을 가지고 있다. 수필은 이미지를 의미하는 '상'과, 인정을 의미하는 '정'이란 두 축으로 짜여진다. '상'이 머리로부터 오는 학술적, 철학적 느낌이라면, '정'은 가슴으로부터 오는 심정적, 정서적 감정이다. 수필은 문학이기 위해서 문학적이어야 하고, 예술에 속하기 때문에 예술이어야 한다.
수필은 지성에 바탕을 둔 상을 그린다든지, 감정이나 정서에 바탕을 둔 시적 분위기의 글을 썼건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문장은 때로는 머리로도 쓰고 때로는 가슴으로도 쓴다. 우리가 지향하는 예술 수필은 정신적 감동을 위주로 하는 시적 분위기의 수필이다. 감성은 수동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나타내는 반면, 인간과 세계를 잇는 원초적 유대고리의 역할을 한다. 즉 이론적 인식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위한 감각적 소재를 제공하고, 실천적․도덕적 생활에서는 이성의 지배와 통솔을 받을 소지를 마련하며, 미적인식에서는 자신의 순수한 모습을 나타냄으로써 인간적 생의 상징적 징표가 된다. 따라서 감성적 세계인식은 매우 소중한 감각적․도덕적․미적 계기를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다. 우리 수필문학이 이러한 감성에 토대를 여전히 두고 있다는 것은, 그 점에서 필연적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감성 편향이 될 때인데, 그 편향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기능은 인간의 합리성에 바탕을 둔 지성이라고 할 수 있다.
II. 닫으며
"수필가든 아니든 자신이 쓴 글을 수필이라고 부치려면 그 글에 예술성이 있는가를 먼저 판단해 보아야 한다. 적어도 이 글 어느 면에서 나는 문학적 가치 또는 예술적 가치를 제고하였다라고 스스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만일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다면 감히 수필이라고 명명하는 데 겸손해 하자."고 외치는 이승훈의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찬동한다. 왜냐하면 수필가가 쓴 글이라고 해서 모두 수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수필에 예술성이 있어야만 자신의 글이 심미적 취향을 가진 평론가에 의해 더 높이 평가될 수 있고, 수필가는 심미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단지 수필가의 지위를 얻었다고 해서 자신이 쓴 글을 모두 수필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내 인생을 내가 그린다고 모두 수필이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수필의 개념을 알고, 문학을 알고, 예술을 아는 사람만이 수필다운 수필을 쓸 수 있고, 적어도 예술적 차원으로 수필미학을 끌어 올릴 수 있다.
수필 창작에서 통섭이 요구되는 시대이니 만큼, 수필은 달라져야 한다.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수필가는 고뇌해야 한다. 사유와 언어의 조탁이 따르는 예술성은 대상과의 처절한 투쟁이나 자신과의 혹독한 싸움에서 얻어진다. 이처럼 수필문학의 심미적 기능을 제고할 때만이 수필문학의 본령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상상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을 쓴다고 하더라도 이를 수필로 승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정신적 질곡이 배어야 문학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결국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일반 수필론이 아니라 본격 수필 이론을 자주 접함으로써 나름대로 수필에 대한 예술성의 개념을 정립하고 자신의 수필을 끊임없이 예술로 끌어올리려 노력해야 한다. 수필의 개념이 이런 식으로 예술의 바운드리 안에서 엄격히 제한될 때 비로소 수필의 가치와 격이 높아진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예술성이 충분히 제고되어 있는 수필을 누가 잡문이라 폄하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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