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八章 연정(戀情)과 피. 2
공동묘지처럼 황량하기만 하던 비가보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은 두 손을 들어 반길만한 일이다. 하지만 화화부인과 취영
은 좋은 기분으로만 대할 수 없었다.
앞 뒤 좌우를 둘러봐도 온통 여족인이란 것이 마음에 걸렸
다.
전에도 여족이 득실거렸지만 지금과 사정이 틀렸다.
그 때는 주인이 분명했다.
비가보.
비가보를 거슬릴 목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금은 여족이 주인이다. 형식으로는 적엽명이 주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돈을 댄 사람은 종으로 있다 면종된
황함사귀였고, 황담색마가 있는 곳을 알려준 사람은 백석산의
황유귀다.
이제 해남파에는 뭐라고 말할 것인가.
그것 역시 적엽명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부인마님, 이제 그만 침소(寢所)에 드시죠."
아직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중년부인이 가까이 다가와 말
했다.
그녀는 남편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비가보에 머물기로 했다.
상처가 나으면 여모봉으로 숨어들 수도 있지만 중상(重傷)을
입은 몸으로는 무리였다.
그녀는 화화부인을 대부인으로, 취영을 소저로 깍듯이 모시
며 자잘한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앞으로 서른 명에 가까운 식
솔들의 먹을 것을 장만하고, 빨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큰 일이
라면 큰 일. 그녀의 도움은 컸다.
"휴우! 그래요."
화화부인도 예전처럼 함부로 부리지는 못했다.
모두가 은인인 셈이다.
"비해는?"
"벌써 잠자리에 드셨어요. 대공자님은 큰 마님께서 워낙 정
성을 다하는 바람에 별로 도와드릴 일이 없네요."
"수고 많았어요. 이제 그만 리(貽)아에게 가 봐요. 어린것이
하루 종일 엄마와 떨어져 있어도 안 좋아요."
"호호! 그 애는 지금 한참 책을 읽느라고 정신 없을 텐데요,
뭐."
"책을?"
중년부인은 실수를 했다 싶었는지 얼굴색이 급격하게 굳어졌
다.
"대공자님께서 심심파적으로 가르치신다고……"
"그래요. 잘 됐네요. 여자도 글을 알면 쓸데가 있죠."
- 여자가 글을 알면 뭐해! 얼른 시집가서 튼튼한 놈이나 쑥
쑥 낳아야지. 머리가 굵어지면 바람만 들게 되어있어.
대부분의 여족은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한족이 여족
을 보는 눈이기도 하다.
중년부인은 화화부인이 예상외로 격려를 해주자 굳혔던 얼굴
을 활짝 피고 웃었다.
"대부인 마님,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옆에서 화화부인과 함께 긴 한숨만 내쉬고 있던 취영이 중년
부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맙기는요. 오히려 살림을 잘해 주시니 저희가 고맙죠. 그
런데 언제까지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거예요?"
"추(秋)…… 추라고 불러주세요."
"어멋! 가을이라. 예쁜 이름이네요. 여족 여인 이름 같지 않
아요."
추는 그 말에 얼굴을 홍시처럼 붉게 물들였다.
그 때였다.
다정하게 말을 주고받던 세 여인은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예
감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여인들은 다급
히 사내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적(靜寂).
이상한 것은 정적이었다.
세상이 떠나가라 고함을 치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이 쥐죽
은듯이 조용해졌다. 특히 덩치가 황소만 한 사내는 작게 말하
는 목소리가 천둥처럼 크지 않았던가.
만천강 수귀라는 사람의 음성도 특이해서 여러 사람들 음성
이 섞인 가운데도 단번에 집어낼 수 있었다. 감은성 호귀라는
사람의 음성은 또 어떻고? 별호가 여우귀신이라더니 무슨 놈의
사내가 여인처럼 간드러지게 말한단 말인가.
모두가 조용했다.
그들은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어둠이 깃든 곳.
그 곳에는…… 아!
언제부터 서있었는지……
어둠에 동화되어 희미하게 밖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사람
이 서 있었다.
화화부인이 있는 곳에서는 불청객(不請客)의 모습이 뚜렷하
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적엽명 일행을 긴장시킬 사람이 나
타난 것만은 분명했다.
비가보 사람은 아니다.
황함사귀가 사온 종들은 하루 종일 고된 일을 했기 때문에 어
둠이 깃들기가 무섭게 거처로 들어가 꿈쩍도 않고 있다.
거한이 일어나려는 것을 적엽명이 만류하는 모습이 보였다.
적엽명이 일어서려 했다. 이번에는 황함사귀가 만류했다. 하
지만 적엽명은 작은 소리로 뭐라고 몇 마디 나누고는 몸을 일
으켰다.
끄르릉……!
적엽명 옆에서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엎드려 있던 늑대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비가보에 들어 설 때만 해도 늑대는 꼴이 말이 아니다. 그러
나 그 동안 휴식을 충분히 취했는지 요즘은 제법 활기차게 돌
아다녔다.
염왕은 참으로 묘한 놈이다.
자연의 섭리대로라면 말과 늑대는 공존할 수 없다.
말은 늑대의 사나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그리고 경계태
세를 취한다. 늑대는 서둘지 않고, 여유 있는 몸놀림으로 서서
히 희생자를 찾아야 정상이다.
염왕은 달랐다. 어찌된 놈이 오히려 말을 무서워했다. 호기
심 때문에 축사 근처를 기웃거리지만, 성난 말이 앞발이라도
치켜들 냥이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일쑤였다.
화화부인과 취영은 공연한 걱정을 한 셈이다.
처음, 적엽명이 늑대를 데리고 나타났을 적에는 적지 않게
염려가 되었는데.
적엽명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더니 유등(油燈)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까지 걸어갔다.
불청객이 있는 곳.
달이라도 밝으면 윤곽정도는 알 수 있으련만 장마가 또 다시
몰려오려는지 하루종일 찌뿌드드하더니 칠흑 같은 어둠으로 이
어져 별빛 한 점 없었다.
사귀와 낯선 사내 두 명은 긴장을 푼 모양이다.
수귀는 술잔을 들어 입안으로 털어 넣었고, 황함사귀와 호귀
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황유귀는 말이 없었다. 유삼이
썩 잘 어울리는 사내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지 땅바닥만 응시했
고, 거한은 구운 오리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순간에 먹어치우고
는 손가락을 쭉쭉 빨아댔다.
적엽명과 불청객은 잠시 무슨 이야기인가를 나눴다.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은 어색한 걸음으로 어둠 깊숙이 묻혀
갔다.
"들어가자. 아는 사람인 모양인데."
"휴우! 건이가 오고 난 다음부터는 이상하게 긴장이 되요.
찾아오는 사람들도 한결같이 이상한 사람들뿐이고."
"……"
화화부인은 대답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심정도 딸과 다를 바 없었다.
앞으로 어찌 될 것인가. 비가보의 운명은? 핏줄이라도 남겨
야 할 텐데. 큰 아이는 이미 틀렸다. 그렇다면 남은 자식은 비
건. 건이에게서 비가의 핏줄을 얻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핏줄을.
육삭둥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세상에 팔삭둥이는 들어봤어도 육삭둥이가 있다는 소리는 들
어보지 못했다.
'릉릉(綾綾)……'
화화부인은 가을 풀잎처럼 맑은 인상에 부끄러움을 특히 많
이 타던 릉릉을 떠올렸다.
그녀가 시녀로 들어왔을 때의 앙증맞은 모습은 지금도 입가
에 웃음을 짓게 했다.
그래, 큰 아이에게 글을 배우고 있다는 리아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다. 여족인치고는 약간 당돌했고, 글을 배우려고 했고,
또……
이름을 릉릉(綾綾)이라고 지어줬다.
다른 한 아이는 초초라 지어주었고. 나이 각각 열두 살, 열세
살.
릉릉은 가냘프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 초초는 통통한
몸에 활발한 성격을 지닌 소녀로 자랐다.
두 아이는 늘 옆에 붙어 있었다.
그게 아직도 이상하다. 초초는 이성(異性)에 관심이 많아 틈
만 나면 사내들과 노닥거렸고, 릉릉은 반대로 따르는 사내가
제법 많아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 사내를 만났고, 아이를 가졌단 말인가.
하기는 아무리 시녀라 해도 잠자리까지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겉으로는 새침한
척 하면서 속으로 무슨 짓을 하는 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첩실로 들어앉는 것도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남편에게서 통보나 다름없는 일방적인 결정을 전달받았을 뿐
이다.
첩을 들인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웬만한 사내들은 첩을
둘, 셋씩 거느리고 있으니 그 동안 첩실을 들이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하필이면 볼썽사납게 왜 시녀란 말인
가. 그것도 여족아이를.
그로부터 여섯 달 만에 태어난 아이, 비건.
다른 사내의 아이다. 릉릉은 아이를 낳고 난 다음 워낙 몸이
부실해져서 바깥출입도 못하다가 죽고 말았다.
어느 놈의 아이인지 알아낼 도리가 없게 되었지만 확신한다.
다른 사내의 자식이다.
비가보를 적엽명 핏줄로 이어간다면……
비가의 대는 끊기고 만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선택의 여지
가 없다.
적엽명이 다른 사내의 씨를 이어받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
는 일.
하늘을 원망할까, 죽은 남편을 원망할까. 유난히 손(孫)이
귀한 집안에 시집온 것을 원망할까.
비해가 불구만 되지 않았더라도……
"휴우!"
화화부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백사구에서 흘러내린 냇물은 비가보에 풍족한 수원(水源)을
제공한 다음 흘러 흘러 창화강(昌化江)에 뒤섞이고, 오지산에
서 발원(發源)한 창화강은 육백 사십 리를 흘러 해남도 서북
창화항(昌化港)으로 빠져나간다.
창화항에서 배를 타고 서북쪽으로 팔백 이십 리를 가면 남만
(南蠻)이 나온다. 해남도와 남만 사이의 바다는 북부만(北部
灣)으로 남쪽 바다 칠주양(七州洋)보다는 잔잔한 편이다.
적엽명은 수건을 냇물에 적셔 목덜미를 닦았다.
밤이 깊었는데도 날씨가 무척 더웠다. 혼자만 있다면 옷을
벗어 던지고 냇물을 끼얹고 싶은 그런 날씨였다.
유소청도 손수건을 꺼내 물을 적신 다음 이마를 가볍게 토닥
거리면서 말을 꺼냈다.
"세 번째 와보네."
"언제 또…… 와 본적 있나?"
"보주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우리 유가에서는 아버님과 내가
향을 올렸거든."
"그랬군."
비가보가 있는 백사구와 유가장(劉家莊)이 있는 앵가해는 오
십여 리 거리다.
유소청은 오십여 리가 얼마나 먼지 몰랐다.
비해의 혼인식이나 비사보주의 장례식에 참석할 때는 마차를
타고 왔다. 마차 안에는 대화를 나눌 상대도 있어 지루한 줄
몰랐다. 그러나 혼자서 마차도 타지 않고 와보니…… 먼 길이
었다.
적엽명은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고, 땀에 흥건히 젖은 모습
으로 말에서 뛰어내릴 때면 옷차림이 허술하다며 구박하곤 했
었다.
당시, 한 번이라도 오십 리 길이 얼마나 먼 거리인지 생각해
봤다면 오히려 진한 사랑에 감동했을 텐데. 만약 그랬다면 같
이 떠나자고 했을 때 따라나섰을 지도……
"사람이 꽤 많네?"
"훗!"
"미안해. 비웃자고 한 말은 아냐."
"알아. 그렇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옛날에는 저들과 어울리는 것을 무척 싫었다.
여족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것도 싫었지만-그들이 형수
(兄嫂), 제수(弟嫂)하며 농을 건넬 때는 송충이가 살 위로 기
어가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필이면
여족 중에서도 가장 쓸모 없다는 인간들만 골라서 사귀다니.
황함사귀, 황유귀, 수귀, 호귀.
한결같이 정상적인 인간이 없었다.
"내가 괜히 술자리를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네."
유소청은 답답한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적엽명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다. 그는 결코 용기 있는 사내
가 아니다. 최소한 자신 앞에서만큼은. 그는 항상 여인 쪽에서
무슨 말인가를 해주기 바란다.
팔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늦은 밤인데…… 무슨 일로?"
"확인할 게 있어서."
"……?"
유소청은 적엽명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마, 눈썹, 눈, 코, 입……
뇌주반도에서는 바로 보지 못했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었다.
지금은 눈을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다.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
속으로, 간간이 뿜어져 나오는 호흡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유소청은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말 아직도 이 사람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사랑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럼 그 때 왜 같이 떠나지 못했을까? 사랑하면서 같이 떠나
지 못한 이율배반적인 행동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복잡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는 순간, 유소청은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팔 년 간 끊임없이 부정했지만 한시도 잊지 못했다는
편이 더 맞는 말일 게다.
적엽명은 세상에서 가장 잘 생겼다거나, 매력적이라거나, 무
공이 탁월하다거나 하는 여인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특별
한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만이 지닌 오직 하나의
장점은 모든 단점을 감싸고도 남았다.
강렬한 사내의 체취.
적엽명은 부드럽지 못했다. 너무 곧아 언제 부러질지 모를
만큼 위태로웠다.
과연 그는 부러졌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은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
"소청."
"말하지 마. 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게 내버려둬."
무안해진 적엽명은 어둠 속에 묻힌 들녘 저편을 바라보았다.
'못난 사람! 나는, 나는…… 사랑을 확인하고 싶단 말야!'
껍질 한 겹만 벗겨내면 옛날처럼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그 때보다 조금 더 사랑하고, 조금 더 이해하는 연인
이 될 것 같은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적엽명은 날카로운 가시로 온 몸을 감싼 고슴도치처럼 곁으
로 다가설 틈을 주지 않는다. 그는 단지 앉아 있을 뿐이다. 얼
굴을 마주 보지 않고 어둠 저 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
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진다. 지나 온 세
월만큼이나 먼 거리를 느끼게 만든다.
"흑월인지 아닌지 알고 싶어."
"……"
"꼭 확인해야 돼."
울컥! 하고 부화가 치솟았다. 늘 이렇다. 적엽명을 만나면
마음과 다른 소리가 튀어나오고, 돌아서서는 후회하곤 했다.
"아냐."
"아냐? 그럼 무엇 때문에 해남도에 들어왔어?"
"너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그런 질문은 하지
마."
기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간단한 말에
불과하지만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기뻤다. 하지만 이어지는 뒷
말은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다.
마치 남남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하는 적엽명.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허공에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등뒤에 나무가 있는가? 나무라도 있다면 등을 기대고 쉬고
싶은데.
벌써 두 번째 만남이거늘, 그것도 늦은 밤에 비가보까지 찾
아온 자신이거늘.
옛날의 적엽명이 아닌 것 같았다.
문득, 그녀는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비가보를 찾아올 만큼 절박한 이유.
이대로 속마음만 들킨 채 가벼운 여자로 기억되기는 싫었다.
처음 적엽명을 만나다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처럼 창피하고 불
안했다.
"내가 만들어낸 말이 있어."
"……?"
"들풀이란 말. 바로 이런 것."
유소청은 앉은자리에서 들풀 한 줌을 뽑아 허공에 흩뿌렸다.
바람도 없었다.
들풀은 허공에 잠시 머무는 듯 하더니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
다.
"무인들은 객사하기가 십상이라면서? 나는 그렇게 죽기 싫
어. 죽음을 선택할 방도는 없겠지만."
"……"
"제일급 관찰대상자로 선정될 거야. 해남도 들풀로 만들기
위해서."
"그렇겠지."
적엽명은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또 못내 속상했다.
"건의는…… 내가 할 거야."
신경질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그리고는 이내 후회했다. 이
렇게까지 격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적엽명의 무관심
한 태도를 대하자 까닭 없이 섭섭했다. 이 남자야 당연한 건
데. 연인이라고 해봐야 오래 전에 끝난 사이이고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
이번에는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 팔 년 전…… 백부님을 죽였지?
우리 유가와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야."
"……"
"이것도 말해줄게. 나, 사람을 죽였어. 두 명이나."
"소청!"
그의 안색은 놀람으로 가득했다.
걱정하는 눈빛, 염려하는 눈빛…… 옛날의 그 눈빛.
이렇게 말이 삐뚤어지기 전에 말해주었다면 옛날처럼 다정한
연인사이가 되었을 텐데.
유소청은 지금이라도 '장난이야. 놀라는 것 보니 재미있네.'
하고 가볍게 농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조건이었어. 관찰자가 되기 위한. 사람을 죽여 보니까 아주
흥미롭던데? 쾌감을 느꼈어. 손끝이 짜릿하게 울린다는 말은
많이 들었는데 실감해보니 정말 그래. 많이 느껴봤지?"
거짓말이다.
유소청은 그 때 이후로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 음식
을 대하면 두 눈을 부릅뜨고 죽은 두 사내의 영상이 떠올라 도
저히 먹을 수 없었다.
손에는 아직도 목을 자를 때 전해진 충격이 남아있는 듯 하
다.
코에서는 비릿한 혈향(血香)이 지워지지 않아 속이 울렁거린
다. 몸을 박박 씻어내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건만 아직도
피가 튀었던 곳에서는 끈적끈적한 무엇이 남아있는 듯 하다.
사람을 죽인 충격은 음화(陰火)로 각인되어 등줄기를 스치고
내리꽂혔다.
견딜 수 없었다.
아마도 그런 괴로움이 그녀를 비가보까지 오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으면 적엽명을 만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으리라. 어쩌면 그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만.
산을 어떻게 내려왔고, 어느 길을 걷고, 어디로 걷는지 의식
할 틈도 없었다. 무조건 발길 닫는 데로 걸었다. 그러다 문득,
야지(野地)에 걸어놓는 유등(油燈)을 보았고, 여러 사람의 따
가운 눈총을 느꼈고, 적엽명이 얼굴이 앞을 가렸다. 비로소 알
았다. 비가보에 왔다는 사실을.
"소청!"
적엽명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름 부르지 마!"
유소청도 마주 언성을 높였다.
"네가…… 다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적엽명이 염려스러워 했다. 그의 마음은 믿어도 된다. 지금
한 말도 진심일 게다. 그러나,
"적이 된다면…… 죽이겠다는 말처럼 들리네."
유소청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말을 하려고 찾아온 것은 아닌데.
"그런 말이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나도 해남오지의 일원이야."
"해남오지라 해도 같은 해남오지가 아냐. 넌…… 넌 파리 한
마리 못 죽였어."
"호호호! 이제는 사람도 죽여. 넌 백부님을 죽였단 말야!"
가까이 다가서려던 적엽명이 뒷말을 듣는 순간 멈칫거렸다.
그는 끝내 다가서지 못했다. 한 걸음만, 한 걸음만 더 가까
이 다가왔으면, 그래서 손이라도 잡아줬으면.
"내가 저지른 잘못은 책임진다. 목숨으로 갚으라면 갚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때가 되면 내 스스로 찾아가지."
"그럴 필요 없어. 조만간 내가 찾아 올 테니까."
유소청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정을 참을 수 없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앞으로 치달렸다.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슬픔이 구름처럼 넓게 퍼져 가슴을 메우고, 뜨거운 격정이
작은 몸뚱이를 사정없이 뒤흔든다.
적엽명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
지 모른다. 검을 뽑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모봉에서 했던 대
로 그의 목을 베려 할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면서도 저주를 퍼붓고 만 자신.
미웠다.
자신이 미웠고, 적엽명이 미웠다.
적엽명, 그는 말뚝 박힌 냥 꼼짝 않고 서서 뒷모습만 바라본
다.
야속한 사람, 야속한 사람……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