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7. 14.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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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섬김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 (신현우)
2. 섬김, 기독교 신앙의 정수 (신광은)
3. ‘섬기다’ 동의어 사전 : 섬김의 숨은 뜻 (장경식)
출처 : 『섬김』 빛과 소금 2024년 7월호
1. 섬김의 모범, 예수 그리스도
글쓴이 신현우는 총신대학교 신학과 교수입니다.
출처 : 『섬김』 빛과 소금 2024년 7월호
예수님의 섬김은 성육신으로부터 시작한다. 하늘 보좌에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형수의 자리인 십자가에까지 내려가셨다. 탄생하여 성장하시면서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함으로 섬기셨고(눅 2:51), 공생애 사역 중에는 많은 치유사역으로 병자들을 섬기셨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이사야 53장 4절 말씀을 성취한 섬김이었다(마 8:16~17).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셨으며(마 9:10), 마침내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심으로 죄인들을 섬기셨다.
예수의 섬김의 모습은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과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원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곧 왕으로 취임하시리라 기대하고 왕 다음으로 높은 자리들을 차지하고 싶어 했다(막 10:37).
그러나 예수께서 왕으로 등극하신 자리는 십자가였다. '유대인들의 왕'이라고 적은 죄패가 붙은 사형수의 자리였다(막 15:26). 이 자리의 좌우편은 예수의 제자들이 탐낼 자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좌우편 자리가 높은 권력의 자리인 줄 기대하면서, 사실상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십자가에 매달리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예수께서 마시는 잔을 자신들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했다(막 10:39). 그들은 권력의 자리를 향하여 가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을 각오하며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고난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예수 믿으면 경제적으로 복 받아 부유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 기대하는가? 예수를 본받아 더 내려가서 많은 사람의 종이 되고자 각오하는가? 예수를 따라가면 더 높은 자리를 얻게 된다고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경고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4).
여기서 '되어야 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미래형('에스파이')이므로 이 말씀은 권력을 탐하는 자가 오히려 낮은 자리로 내려가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을 수 있다. 우리는 권력을 탐하다가 낮아지는 벌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본받아 낮은 자리로 내려갈 것인가? 둘 다 섬김의 자리이지만 벌로 받는 섬김의 자리와 제자도의 실천으로서 택한 섬김의 자리는 전혀 다른 자리이다.
우리는 어떤 섬김의 자리로 갈 것인가? 권력을 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권한이 주어지는 자리에 앉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교회에서 장로로 선출되어 봉사할 수 있고, 세상에서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상당한 권력이나 권한을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세상 사람처럼 권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한다.
세상 권력자들은 권력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막 10:42).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경우 다스리는 자가 되어도 마치 섬기는 자와 같아야 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6).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도 섬기는 자처럼 행동해야 한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의 섬김의 모습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것에서 잘 나타났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주 또는 선생이지만,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요 13:14). 이렇게 하신 이유는 제자들도 그렇게 서로 섬기도록 본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요 13:15).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하듯이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에 있는 자에게 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섬김의 모습이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잘 적용하여 가르쳤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종 노릇하라고 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 5:13).
이러한 종 노릇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적용된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에게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가르친다(엡 5:21).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본받아 그리스도인 부부는 서로 섬기는 상호 복종을 실천해야 한다. 바울은 이러한 상호 복종을 부부 관계에 매우 구체적으로 적용한다.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
부부는 자신의 몸에 관한 권리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배우자에게 있는 서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개인의 자기 결정권과 자유의 극대화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만이 아니라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 되기를 소망한다.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한편, 사실상 노예로 전락한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러한 세상에서 섬김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이다. 남을 노예화시키는 특권층의 방식이 아니라, 남을 해방시키는 노예 해방자의 삶의 방식이다.
바울은 섬김의 원리를 실천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우리를 위해 종의 역할을 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더 많은 사람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섬김의 원리를 가정에 적용하며 훈련하고, 세상에도 적용하도록 힘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살아갈 때 섬기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고자 하며, 특권을 누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섬기는 모습은 연약한 종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연약한 모습은 오히려 참으로 강한 모습이다. 바울은 우리가 약함을 통해 오히려 강해진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하나님은 작은 자들을 사용하셔서 세상의 큰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8). 하나님께서 택하신 소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서로 더 높다고 주장하며 다투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남을 서로 높다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따라간 그리스도인의 한 예로 반 고흐를 언급할 수 있다. 그는 섬김의 길로 내려가고 또 내려간 사람이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목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고전어를 공부했다. 그러나 목사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브뤼셀에 있는 선교학교로 갔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도 될 수 없었다. 선교사 교육을 마친 후 그는 탄광촌으로 가서 전도사로서 사역했다. 그는 광부들처럼 되고자 석탄 가루를 얼굴에 칠하곤 했고, 가진 돈과 옷들을 광부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는 낡은 군복 상의와 포장용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고, 처음 세 들어 살던 집에서 나와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옮겨 갔다. 마른 빵과 약간의 밥과 국물만 먹으며 광부들의 비참한 삶에 동참했다.
그러한 삶의 결과는 브뤼셀 선교회로부터 해고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화가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에게 화가의 길은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선교사도 되지 못하고, 전도사로서 사역하면서 광부처럼 살다가 해고된 후의 자리였다. 그 자리는 광부보다 낮은 밑바닥의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가 위대한 자리가 되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화가의 자리였다. 선교회로부터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하였으나, 말없이 그림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자리였다. 예수께서 가신 낮은 데로 내려가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 길이었다.
사도 바울의 길도 섬김의 모범 그리스도를 따라간 길이었다. 그가 사도의 증거로 제시한 모습은 그리스도의 섬김의 모습을 누구보다 더 열심히 따라간 그의 약한 모습이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5).
우리에게 섬김의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가는 길이다. 그것은 약한 것 같으나 강하고, 죽는 것 같으나 살고, 수치스러운 것 같으나 영광스럽고, 망하는 것 같으나 흥하고, 낮은 것 같으나 높고, 저주받는 것 같으나 복되고, 외로운 것 같으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길이다. 이 길은 잠시 사는 인생을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연결하는 길이다. 이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은 길이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가는 길인 듯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름을 불러 주시는 길이다.
이 길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길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길이다. 이 길은 마치 노예의 길 같으나 하나님 자녀의 길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할 왕 같은 제사장들의 길이다. 이 길은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길이지만, 마침내 큰 바다에 닿는 길이다. 세상 나라에서 작은 자의 길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의 길이다. 모든 것을 버리는 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얻는 길이다.
2. 섬김, 기독교 신앙의 정수
글쓴이 신광은은 열음터교회 담임목사입니다.
출처 : 『섬김』 빛과 소금 2024년 7월호
언젠가 어떤 목사님께서 자신을 "OO교회를 섬기고 있는 ㅇㅇㅇ 목사입니다"라고 소개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은 목회를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었나 싶다. 또 어떤 성도는 자신이 어떤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는 의미로 'OO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섬김을 NGO 단체나 딱한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그분들을 비난하려는 취지는 아니고 다만 섬김이라는 말이 성경의 가르침에 비해서 좀 가벼이 사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성경은 섬김을 기독교 신앙의 정수로 가르친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할 때, 기독교 신앙의 참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성육신과 구속의 사역을 한마디로 '섬김'이라고 표현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마 20:28). 이 말씀에 따르면 주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란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이 우리의 섬김의 영원한 모범이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섬김은 가장 먼저 자기 비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7)라고 하셨다. 종이 아닌 자가 스스로 기꺼이 종이 되는 데서부터 섬김은 출발한다. 이것을 빌립보서의 '그리스도 찬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6-7).
학자들은 '그리스도 찬가'를 초대교회가 예배 때 불렀던 찬송가 가사라고 본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을 찬송가로 만들어서 불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으나 당신의 권위와 명예, 권리를 포기하셨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진짜로 종이 되셨다. 종이 된다는 말은 그럴듯한 수사가 아니다.
가령 AD 6세기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들 중의 종'(Servus servorum Dei)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그가 평생에 걸쳐 했던 일은 동방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누가 더 높은지를 두고 논쟁한 것이다. 자기가 '최고'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를 '종들 중의 종'이라고 불리기를 원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이라는 칭호나 '섬김'이라는 말은 너무도 쉽게 립서비스로 남용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주님은 신이셨지만 실제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모양으로 오셨다. 왕궁이 아니라 동물 우리에서 태어나셨으며, 가난한 가정에서 부모님을 섬기며 자라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지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이들에 의해 끝내 죽임을 당하셨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이나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진짜로 자신의 신적 명예와 존귀를 버리셨다. 참된 섬김은 자신의 명예, 지위, 직함, 권리 등을 내려놓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모습만 종이 아니었다. 종이 하던 일을 직접 행하심으로써 진짜로 종이 되셨다. 그중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예수님께서 자신을 늘 ‘사용 가능한’(available) 존재로 내주셨다. 이는 개인적으로 내가 굉장히 찔리는 부분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막 가버나움에 도착하셨을 때 뜬금없이 백부장이 나타나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 부탁을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두 말 않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7)라며 일정을 급변경하셨다.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러 가시는 중에도 갑자기 뛰어든 12년간 혈루병 걸린 여인을 고쳐 주셨다(막 5:24~34). 마가복음 6장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잠시도 쉴 틈이 없이 사람들에 의해 닦달당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주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일정을 취소하고 시간을 내주셨다. 예수님은 마치 일정이나 스케줄이 아무것도 없는 분처럼 행동하셨다. 이렇듯 주님은 늘 스스로를 '사용 가능한' 존재로 내주셨는데, 이것은 종이 주인에 대해서 가지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둘째,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건조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걷다 보면 늘 발이 먼지로 뒤덮인다. 그래서 손님이 집에 찾아오면 먼저 발 씻을 물을 내주는 것이 예의였다. 그런데 바리새인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해 놓고도 예수님께서 발 씻을 물도 내주지 않았다(눅 7:44).
그런데 예수님은 물을 떠 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동을 상당히 소상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요 13:4~5). 이것은 충격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종들이 행하는 비천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셋째 사례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호수를 찾으신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자들은 갈릴리 호수에서 밤이 새도록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아마도 새벽녘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호숫가에서 숯불을 피워 그 불 위에다 생선을 구우셨다. 떡도 불 위에 얹어서 따끈하게 데워 두셨다.
갈릴리 출신의 어부가 4명 정도였음을 감안할 때, 주님은 자신을 포함해서 한 5인분 정도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을 것이다. 준비를 마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예수님의 이 모습은 아침밥을 준비하는 주부의 모습이고, 주방에서 주인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종의 모습이다.
넷째는 비유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혼인 집에 출타한 주인으로 등장한다. 종들은 아마 성도들일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종들로 하여금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깨어 있으라'는 교훈을 주셨다. 그런데 이 비유의 충격적인 장면은 뒷부분에 나온다. 그렇게 해서 깨어 있는 종들은 상으로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누가 종들을 섬길까?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눅 12:37). 만일 이 비유가 그리스도의 재림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이 잔치는 천국 잔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천국 잔치에서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허리에 띠를 두르시고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드신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도 주님은 종이 하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종의 형체만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정확히 종이 하는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피하려는 자신의 본능을 누르고 VIP를 위해서 총알을 대신 맞는 훈련을 오랫동안 받는다고 한다. 이렇듯 세상의 이치는 종이 주인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종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것이 십자가 죽음의 의미이다.
그런데 마가복음 10장 45절이 '예수님의 정치학 교과서'의 맥락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세상의 정치와 하나님의 정치, 두 가지가 존재한다. 세상의 정치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정치이다. 그래서 이방의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치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정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정치는 섬김의 정치이다. 종이 되어 백성들을 섬기는 정치이며,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는 정치이다. 이러한 통치를 행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 나라는 섬김의 왕국임이 분명하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두 섬기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밖에 없는 독자를 죄인들을 위해서 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도 섬김의 하나님이시다.
또한 성령님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로 불리는데, 위로하고, 상담하고, 세우고, 변호하는 존재다. 이러한 보혜사는 섬김의 어원을 떠올리게 한다. 섬김의 어원은 '세워서 기른다'에서 왔다고 한다. 이것은 정확히 보혜사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 아들, 성령은 모두 섬김의 신이다. 섬김은 삼위일체의 존재 양식이다.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는 섬김의 나라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놀고먹을까? 예수님은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를 남긴 종들에게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라고 하셨다(마 25:21). 천국에서 우리가 맡게 될 일은 무엇일까? 바울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말했다(딤후 2:12). 요한도 같은 말을 한다.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2:5).
왕 노릇을 다른 말로 하면 다스리는 일이다. 누가복음에서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인은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고 했고, 주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고 하셨다(눅 22:30). 또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계 2:26).
천국에서 우리는 더욱 큰일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여 고을과 만국을 다스리는 것이다. 만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처럼 섬김의 통치를 수행하는 권세를 행사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듯이 당신의 성도들도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의 분봉왕이요, 지방자치단체장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천국에서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예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 예배함’(출 7:16)과 '이웃을 섬김'(레 25:40)은 모두 '아바드'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마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듯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이웃을 섬기는 것은 하나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종처럼 낮아지고, 종이 하는 일을 할 때, 그리고 자신을 희생할 때 우리는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되고, 장차 천국에서 하게 될 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미리 연습하는 것이 된다. 이렇듯이 섬김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3. ‘섬기다’ 동의어 사전 : 섬김의 숨은 뜻
글쓴이 장경식은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입니다.
출처 : 『섬김』 빛과 소금 2024년 7월호
1) 섬기다 :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으로 채우다
그곳을 가기 전에는, 그곳은 아주 먼 곳이었다. '강원도 태백시 외나무골길 97'이라는 주소도, 그곳이 결코 서울에서 가깝지 않은 곳임을 증명했다. 외롭고 쓸쓸한 태백의 새벽 국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안개 뒤에서 문득 그곳이 나타났다. 예수원. 그곳은 생각보다 가깝게 있었다. 마치 일상의 뒤에 숨어 있었던 것처럼.
예수원의 일과는 아침 여섯 시 정각, 종 대신 트럭 바퀴의 통쇠를 타종하는 소리로 시작한다. 아침 예배인 조도이다. 한 시간 동안 시편, 구약, 신약을 한 장씩 읽고 묵상한다. 인도자는 돌아가면서 맡으며, 은혜 받거나 깨달은 말씀을 자유롭게 나눈다. 점심 예배인 대도는 열두 시에 시작해 삼십 분 동안 중보기도로 드린다. 저녁 예배는 일곱 시 삼십 분에 시작해서 요일에 따라 찬양예배, 구역예배, 강의 등으로 드린다. 하루에 두 시간 삼십 분 이상을, 시간의 십일조로 주님께 올리는 것이다. 예배를 전후해서 정해진 상차림으로 식사를 한다.
예수원 일과 가운데 중요한 두 가지는 노동과 침묵이다. "노동하는 것은 기도요, 기도하는 것은 노동이다”라는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이 대기도실과 도서실에 붓글씨로 붙여져 있어 예수원의 정신을 웅변한다. 매일 예수원의 가족과 손님은, 아침 식사 후 작업 회의를 거쳐 배수로 보수공사와 나무 자르기, 텃밭 가꾸기, 청소와 세탁 같은 노동에 참여한다. 예수원에서는 특별히 침묵을 지켜야 하는 시간이 있다. 점심 후 1시에서 2시까지 침묵하고, 소침묵 시간인 밤 9시에서 10시까지는 작은 목소리로 필요한 말만 할 수 있으며, 10시부터 아침까지는 온전한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며 안식한다.
예수원은 미국인이면서 중국에서 태어난 대천덕 신부와 가족, 그리고 뜻을 같이한 성 미가엘 신학원 학생들, 항동교회 신자들, 건축 노동자들에 의해 1965년에 설립되었다. 노동과 기도의 삶을 영위하되,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을 시험해 보는 실험실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었고, 신자 생활의 세 가지 실험을 위한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두 번째 목적이었다. 하나님과 개인의 인격적 관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신자 상호 간의 관계,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와 비기독교 사회와의 관계를 실험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실험적 공간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름을 ‘예수원’이라 지었다.
예수원의 건물들은 숲과 하나가 되어 있다. 개울 돌과 나무로 집을 짓고 마른 억새로 지붕을 얹어 산비탈에 의지해서 한 채를 올리고, 이어서 다른 한 채를 올렸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열린 듯 닫힌 듯 계단과 통로가 있다. 비탈길을 올라가면 산자락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또 한 채가 들어서 있다. 모퉁이를 돌아 나타난 빈 곳에 방이 있고, 벽장을 열고 올라가면 또 다른 공간이 있다. 건물들 옆으로 이어진 숲길로 접어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적혀 있는 십자가가 고즈넉이 우리를 맞는다. 숲 사이의 작은 공간마다 옥수수며 채소가 소박하게 자라고 있다. 숲길을 좀 더 따라가자 바위에 흰 글씨로,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레 25:23)"는 말씀이, 또 다른 비문에 “토지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이것은 하늘이 명령하신 인간의 기본 권리이고, 토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대천덕 신부의 말이 적혀 있다.
우리의 속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을 비워야 머물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수원이었다. 그래야 그 비워진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실 수 있지 않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서 누리는 참 기쁨과 자유, 섬김의 본질을 깨달은 사람들의 침묵과 기도와 평화가 있는 곳.
2) 섬기다 : 이웃을 사랑하다
낯선 도시 늦겨울의 짧은 해가 저물고 있었다. 전철이 지나가는 고가철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크고 번듯한 상가와 호텔과 병원과 고층 아파트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둠이 짙어지자 건물의 외벽에 달린 간판과 창문의 조명이 빛나기 시작했다.
고가철도 기둥 반대쪽에는 어둠 속에 잠긴 낡은 집 몇 채 뒤로 넓게 펼쳐진 평지가 보였다. 아마도 개발을 앞두고 농사를 폐한 땅이었을 것이다. 낯선 역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던 두 사람은 곧 겪어 보지 못했던 추위를 느꼈다. 그들이 떠나온 나라, 파키스탄 남부에서는 한겨울에도 영하의 날씨가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어깨를 움츠리고 옷깃을 여미며 불빛 밝은 쪽을 향한 그들의 시야에, 번듯한 상가와 호텔과 병원과 고층 아파트 사이로 솟아있는 붉은색 십자가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안도했다. 교회에 가면 하룻밤 의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이제는 완전히 어둠이 내린 낯선 거리를 지나, 자신들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는 낯선 피부색의 사람들 사이를 걸어, 십자가 종탑이 달린 건물을 찾아갔다. 그리고 곧 낙심했다. 건물의 입구는 모두 잠겨 있었다. 조명이 밝은 중심가를 벗어나 낮은 아파트와 주택단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면서 십자가 불빛이 켜져 있는 건물들을 찾아갔지만, 철문에 걸린 육중한 자물쇠나 완강히 닫힌 현관문만이 그들을 맞았다. 건물의 안쪽은 어두컴컴했고, 문에는 해독할 수 없는 문자들만 적혀 있었다. 그들의 수중에는 고국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쓰고 남은 얼마 안 되는 돈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 돈으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낯선 나라의 삶을 버텨야 했다. 그들은 불빛 화려한 중심가에서 쉴 곳 찾기를 포기하고, 고가철도 반대쪽으로 향했다. 어두운 거리 어딘가 폐가라도 있으면 하룻밤 쉬어 갈 요량이었다.
새벽 기도를 드리러 교회에 들어간 나이 든 목사의 침침한 눈에 낯선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예배 때 쓰는 방석을 깔고 덮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불을 켜자 그들이 놀라서 일어났다. 신도시 개발을 앞두고 원주민이 떠난 마을에 남아 있던 이 작고 낡은 교회는 목사가 오래 목회하던 곳이었고, 아직 이주하지 않고 남은 원주민들이 언제라도 들러서 기도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고 있었다.
나이 든 목사는 짧은 영어로 이방인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고, 곧 그들이 의대에 다니던 대학생들이었지만 어려운 정세와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 가운데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에서 새 기회를 찾으러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 태생인 목사는 낯선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 주변을 수소문해서 빈방을 알선해 주고, 입을 옷들을 구해 주었으며, 이웃 마트를 다니면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품들을 모았다. 다음 주가 되자 파키스탄 출신의 손님들이 더 찾아왔고, 그다음 주에는 나이지리아 손님들이, 그다음 주에는 카자흐스탄과 스리랑카 손님들이, 그다음 주에는 콩고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주일마다 이 낡고 작은 교회에 모여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국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오랫동안 예배를 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백여 명으로 늘었고, 나이 든 목사는 교회 옆에 대형 천막을 치고 이들과 예배를 드리고 식탁의 교제를 가졌다. 서로 언어가 다른 이들은 나이든 목사를 '파더'라고 불렀고, 사모를 '마더'라고 불렀으며, 서로 짧은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다. 시간이 지나 이 지역에 푸드뱅크가 생기면서 나이 든 목사는 토요일마다 봉고차를 몰고 다니며 식품을 구해다가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만, 돼지고기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부분 이슬람권 나라에서 온 손님들은 기독교인이더라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파더와 마더,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던 교인들은 이방인 손님들을 위해 주일마다 닭을 튀기고, 큰 솥에 감자와 당근을 썰어 넣고 카레를 볶았으며, 밥을 지었다. 아마도 손님들 가운데 기독교인이 아닌 이도, 다른 종교의 신자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좁은 천막 교회에서 열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드리는 식사 기도에 모두 '아멘' 하던 이들은, 모두 섬겨야 할 배고픈 손님이었고, 이웃이었으며, 하나님의 자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