興海 裵氏 上系圖
裵詮-尙度- 屯 尙絅 尙志-權-孝長-袵-以純-巘-天錫-三益-龍吉 (안동 월곡면 도목) 禎 - 綸 - 女 權德凰-女 金誠一 女 權玠-叔衡 叔均 - 稑 - 好文 女 河源 桓-孝存-襟-碩宗 (북후면 평은면) 孝崇-裯-德文 孝騫-祐 孝思 楠-孝老-裕-承瑞 (길안면 다인면 봉성면) 杠-承源 (예천 보문면) 女 權自謙-哲經-輗-安世 女 鄭芝衍 女 邊鑛-永淸-慶長-中一 永淳 女 李繩直- 時敏 - 宗準-德淵-胤恭 弘準-德璋 尙恭-素-女 權雍-女 柳沼-子泂 子溫-公綽-仲郢-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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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죽당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4자 1壻가 모두 벼슬길에 나아감으로써 안동 지방의 명문으로 등장하였다. 장자 배권(1376-1427)은 지평, 차자 배환(1379- ?)은 감사, 삼자 배남(1384-?)은 감찰, 4자 배강은 이조정랑, 사위 경주 이씨 이승직(1378-1431)은 대사헌을 지냈다. 이승직은 연산군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사형에 처해진 용재 이종준의 조부가 된다. 용재 이종준(1454-1499)은 검제에서 태어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으로 金馹孫․權五福 등과 사귀었고, 성균관전적․경상도도사․사헌부지평을 역임했으며 경광서원에 배향된 인물이다.
배권의 후예들로 현달한 인물로는 임연재 배삼익과 금역당 배용길 부자가 있다. 배권의 증손자 배이순이 봉화로 이거 하였는데, 배이순의 손자 중 배천석(1523-1573)이 다시 안동 월곡면 도목촌으로 전거하여 아들 배삼익(1534-1588)과 손자 배용길(1556-1609)을 배출했다. 임연재 배삼익은 황해감사를, 금역당 배용길은 충청도사를 지냈다.
배권의 사위는 안동 권씨 복야공파의 權玠로 송암 권호문의 증조부 權玠는 덕망이 있고 의협심도 있어 단계 河緯之의 嗣孫 河源을 사위로 삼아 단계의 향화를 잇게 하였다. 종의 등에 업혀 봉화 외가에 숨어 자란 河緯地의 조카 河源을 사위로 맞이하여, 집과 토지를 주어 이웃에 살게 하니, 이런 연유로 하위지를 모신 창열서원이 서후면에 있게 된 것이다.
배환의 아들 배효숭과 배효사 그리고 배효숭의 손자 배덕문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배강의 사위는 안동 권씨 부정공파 권자겸이다. 권자겸은 이조판서를 지낸 마애 권예(1495-1549)의 조부가 된다. 마애 권예의 사위는 동래 정씨 정광필의 증손 정지연이다. 정지연은 선조때 우의정을 지냈다. 동호 변영청(1516-1580)은 마애의 생질이 된다. 변영청은 문과에 급제 대구부사를 지냈는데 평안감사 귀촌 류경심(1516-1571) 진주목사 성남 장문보(1516-1566)와 함께 ‘花山三傑’이라 일컬어진 인물이다. 1516년 동갑내기 안동출신으로서 성공한 목민관을 지낸 세 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동호 변영청의 손자 간재 변중일은 효행으로 정려되었고, 서후면 일대에 계거하고 있는 원주 변씨는 동호․간재의 후손들이다
고성 이씨 편에서 李增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학덕있는 안동 선비 12명(안동 권씨 3명·흥해 배씨 4명·영양 남씨 4명·안강 노씨 1명)과 함께 1478년 우향계를 조직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 안동의 향촌 사회를 대표하는 명문으로는 안동 권씨, 흥해 배씨, 영양 남씨 가 아닐까 여겨진다. 우향계원으로 참여한 흥해 배씨 4명은 예안 훈도 裵禎, 옥과 현감 裵孝騫, 부위 裵裯, 통례문 통찬 裵孝訥이 그들이다.
백죽당의 아우 공조전서 裵尙恭은 풍산 류씨 공조전서 柳從惠와 교유하며 하회마을에서 살았는데 아들 裵素의 사위는 안동 권씨 추밀공파 평창군사 權雍이고 권옹의 사위는 풍산 류씨 柳沼이다. 권옹은 양촌 權近의 조카이고 류소는 공조전서 류종혜의 아들이자 서애의 고조부가 된다.
진성 이씨를 비롯 의성 김씨와 풍산 류씨가 안동의 갑족으로 등장하기 이전 즉 조선조 전기까지 흥해 배씨는 과환이 이어짐으로써 당시 무과에 많은 급제자를 배출한 영양 남씨와 함께 ‘裵文南武’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배권(裵權) 1376(우왕 2, 병진) ~ 1427(세종 9, 정미)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장자. 음보(蔭補)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횡성현감(橫城縣監)․봉화현감(奉化縣監)․경기도사(京畿都事)․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했다. 서후 금계촌(金溪村)에 살았다. ■참고문헌 : 永嘉誌․興海裵氏譜
배환(裵桓) 1379(우왕 5, 기미) ~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서후(西後) 출생.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제2자. 조용(趙庸)의 문인으로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을 거쳐 1409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병조좌랑(兵曹佐郞)․봉화현감(奉化縣監)․공조(工曹)․형조(刑曹)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역임했다. 1423년(세종 5) 의주도(義州道)․삭주도경차관(朔州道敬差官)이 되었다가 1432년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으로 선위사(宣慰使)를 겸직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일본 사신을 접견하고, 1434년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명 나라 사신을 맞았다. 이어 황해도(黃海道)․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고, 1448년 진주목사(晉州牧使)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高麗史․興海裵氏譜
배남(裵楠) 1384(우왕 10, 갑자) ~ ?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서후(西後) 출생.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제3자. 권(權)의 제. 1411년(태종 11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興海裵氏譜
배강(裵杠)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서후(西後) 출생.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제4자. 조용(趙庸)의 문인. 성균생원(成均生員)을 거쳐 1426년(세종 8) 교도(敎導)로서 식년문과에 진사로 합격하고, 1428년 성균관직학(成均館直學)이 되었다. 이어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조(吏曹)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興海裵氏譜
배소(裵素)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공조전서(工曹典書) 상공(尙恭)의 자. 처부(妻父)는 우의정(右議政) 권진(權軫). 1408년(태종 8) 식년문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417년 사재감주부(司宰監注簿)가 되었다. 이어 풍해도(豊海道 : 現 黃海道) 수안(遂安)의 잠소(蠶所)에 파견되었고, 경상도 양잠채방판관(養蠶採訪判官)이 되었다. 1427년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를 지냈으며 뒤에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이르렀다. 하회촌(河回村)에서 살았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國朝榜目․永嘉誌
배효숭(裵孝崇)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관찰사(觀察使) 환(桓)의 자. 1438년(세종 20) 사마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여흥부사(驪興府使)를 역임하고, 세조 등극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올랐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興海裵氏譜
배효사(裵孝思)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관찰사(觀察使) 환(桓)의 자. 효숭(孝崇)의 제.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역임하고, 1455년(세조 1) 세조 등극 때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올랐다. 1467년(세조 13) 남이(南怡) 장군 휘하에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討平)하는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興海裵氏譜
배삼익(裵三益) 1534(중종 29, 갑오) ~ 1588(선조 21, 무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백죽당(栢竹堂) 상지(尙志)의 후손. 천석(天錫)의 자로 도목촌(桃木村 : 現 禮安面 道目里)에서 출생했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학록(學錄)․박사(博士)를 거쳐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으며, 풍기군수(豊基郡守)․양양부사(陽壤府使)를 지냈다. 158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이듬해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1587년 진사사(陳謝使)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1588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가 큰 흉년을 만나 구황(救荒)에 힘쓰던 중, 병을 얻고도 민정시찰을 강행하다가 순직하였다. 힘찬 필법(筆法)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월곡(月谷) 도생서원(道生書院 :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음)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임연재집(臨淵齋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國朝人物考․陶山及門諸賢錄
배용길(裵龍吉) 1556(명종 11, 병진) ~ 1609(광해군 1, 기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흥해(興海).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장륙당(藏六堂). 예안(禮安) 출생. 관찰사(觀察使) 삼익(三益)의 자.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어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 등에게도 사사(師事)하였다. 1585년(선조 18) 성균관에 입관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영남의병대장(嶺南義兵大將)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副將)으로 활약하였다. 1894년 세마(洗馬)․시직(侍直)․부수(副率)를 지내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화의(和議)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 1602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사(忠淸都事)에 이르렀다. 천문(天文)․지리(地理)․율력(律曆)․병전(兵典)․의학(醫學)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인 임연재(臨淵齋)와 같이 월곡(月谷) 도생서원(道生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금역당집(琴易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光海君日記․宣城誌
이승직(李繩直) 1378(우왕 4, 무오) ~ 1431(세종 13, 신해)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경주 출생. 이조판서(吏曹判書) 만실(蔓實)의 자로 송도(松都)에서 출생했다. 생원(生員)․진사시(進士試) 합격하여 태종(太宗) 때에 순금사호군(巡禁司護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고, 세종(世宗) 때에 양주부사(楊州府使)․공조(工曹)․형조참의(刑曹參議)․경상감사(慶尙監司)․대사헌(大司憲)을 역임했다. 재임시 청렴하고 밝은 정사를 펴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청백리(淸白吏)로 뽑히었다. 경기도 포천(抱川)에 살다가 만년에 처향(妻鄕 : 栢竹堂 裵尙志의 사위임)을 따라 서후(西後) 금계리(金溪里)로 옮겨와 살았다. ■참고문헌 : 永嘉誌․慶州李氏譜
이시민(李時敏) 1430(세종 12, 경술) ~ 1473(성종 4, 계사)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경주(慶州). 자는 자수(子修). 호는 금호(琴湖). 관찰사(觀察使) 승직(繩直)의 자로 서후(西後) 금계(金溪)에서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안악군수(安岳郡守)이던 형 명민(命敏)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되어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에게 세 아들과 함께 살해되자 벼슬의 뜻이 막혀 낙향했다. 이듬해 연좌(連坐)되어 예안현(禮安縣)에 안치되었다가 1472년(성종 3)에 풀려났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慶州李氏譜
이종준(李宗準) 1454(단종 2, 갑술) ~ 1499(연산군 5, 기미)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본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 서후(西後) 출생. 대사헌(大司憲) 승직(繩直)의 손자. 시민(時敏)의 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사귀었다. 1485년(성종 16)賜暇讀書)를 했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고, 1493년(성종 2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시명(詩名)을 떨쳤다. 이듬해 의성현령(義城縣令)으로서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를 제작하고, 봉록(俸祿)을 털어 향교를 중수하며 학문 진흥에 힘썼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 조정이 어지럽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에 있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어가던 도중 단천(端川) 마곡역(磨谷驛)에 이르러 벽에다 이사중(李師中)의 시(詩)를 써붙인 것이 불온하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 이듬해 사형되었다. 시문(詩文)과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추증되었다. 서후(西後) 경광서원(鏡光書院)과 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里祠)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용재유고(慵齋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燕山君日記․永嘉誌․안동금계마을(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권예(權輗) 1495(연산군 1, 을묘) ~ 1549(명종 4, 기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신(景信). 호는 마애(磨厓). 생원(生員) 철경(哲經)의 자. 서후(西後) 금계(金溪)에서 살았다. 1516년(중종 1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봉교(奉敎)가 되고,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관(史官)으로서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구원에 앞장섰다. 이 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으로 있을 때, 삼간(三奸)과 삼흉(三兇)의 죄상을 상주(上奏)하여 중죄에 처하도록 하였다. 1530년 직제학(直提學)․대사성(大司成)을 지내고, 1535년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거쳐 호조(戶曹)․형조(刑曹)․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1538년(중종 33)년 모친상을 당하여 향리로 돌아온 후 다시는 환로(宦路)에 나가지 않고 낙동강 언덕에 낙강정(洛江亭 : 南後面 丹湖里 所在)을 짓고 산수를 즐기며 노후를 보냈다. 문집에『마애집(磨厓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永嘉誌
변영청((邊永淸) 1516(중종 11, 병자) ~ 1580(선조 13, 경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원주(原州). 자는 개백(開伯). 호는 동호(東湖). 서후(西後) 금계(金溪)출생.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안렬(安烈)의 후손. 생원(生員) 광(廣)의 자. 이황(李滉)의 문인.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했다. 당시의 권간(權奸)들의 비행을 격렬히 상소로 고한 후 낙향해 있다가, 1955년 구봉령의 추천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크게 선정을 베풀어 명종으로부터 표리(表裏)와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청송부사(靑松府使)․대구부사(大邱府使) 등의 외직을 역임한 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지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대간(臺諫)으로 재임시는 강직한 성품으로 온 나라 안에 명성을 떨쳤다.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유경심(柳景深)․장문보(張文輔)와 더불어 세칭 ‘화산삼걸(花山三傑)’이라 불려졌다. 서후(西後) 금고서원(琴皐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동호집(東湖集)』『금고지(琴皐誌)』가 있다. ■참고문헌 : 永嘉誌․陶山及門諸賢錄․안동금계마을(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