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핸드백을 놓고 내린 것은 어느 평일의 고요한 정오였다.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들중 많은 수는 아니지만 간혹 소지품을 두고 내리는 경우가 있다. 연갈색 서류봉투라든지, 헬로키티가 대롱대롱 묶여있는 핸드폰이라든지, 어린 딸의 빨강머리 앤이 쓰곤 하던 캐노티에 타입의 모자라든지 말이다. 언제나 다툴 수 밖에 없는 문제로 말싸움을 하던 부모가 딸의 모자가 없어진 걸 알게 되는 건 훨씬 후의 일이다. 어린 딸은 자신의 모자가 없어진 걸 알아주지 않는 부모를 못마땅한 얼굴로 올려다 볼 뿐이다.
소지품을 두고 내린 사람들은 먼저 화를 낸다. 어떤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그저 보이지 않는 대상을 향해 분풀이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아주 잠시 슬퍼한다. 이런 사소한 실수가 분명 자신의 어떤 본질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이었어. 당신은 늘 이런 식이었기 때문에 딸의 모자가 없어진 줄도 모르는 거야.” 하고 참담하게 밟혀진 생일 케잌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태풍이 지나간 아침 해변가의 파도처럼 격해졌던 감정이 누그러지고 대개는 체념하게 된다.
“똑 같은 모양의 똑 같은 색깔의 모자를 이번 주말에 사자. 그냥 실수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
누구나 실수를 한다. 고등학교 수학경시의 컴퓨터 답안지 마크를 밀려쓰는 실수 같은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전의 햇볕을 물끄러미 지켜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쉬는 시간의 아이들 잡담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뒤에 앉은 친구가 손가락으로 등을 톡톡 치고는 영어참고서를 빌려달라고 해서 그것을 가방에 꺼내어 건네주지만 방금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복도로 아이들이 뛰어가는 소리가 탕탕탕 하고 들린다. 교탁 위의 싱싱한 백합이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조금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생각한다.
아, 나는 실수를 했어. 그건 돌이킬 수 없어.
누구도 실수를 하게 될 것이란 걸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부러 실수를 하는 사람도 없다. 이미 의도된 실수란 실수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길 거리의 맨홀 뚜껑처럼 인생에 있어 실수를 불행히도 만나게 될 뿐이다.
파란 신호등이 켜지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건너듯, 애인과 함께 커피숍에 들어가 가장 먼저 그의 눈을 바라보듯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실수 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녀가 핸드백을 놓고 내린 것은 실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떻게 알 수 있냐 하면 그저 막연한 직감의 일종이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거려 놓아둔 안경을 찾아내는 그런 타입의 직감이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내 택시에 타는 손님이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호텔에서 3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인근에 방송국이 있는 공원까지 갔다. 항상 코스는 정해져 있었다.
호텔에서 콜을 받고 도착하면 그녀가 라운지의 핫도그처럼 생긴 가죽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듯 일어나는 모습을 회전문의 거대한 유리너머로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다리는 내가 여태껏 본 것중 어느 쪽이냐 하면 훌륭한 세계에서 마주치는 훌륭한 조각품에 속했다. 매끄럽게 바닥 카페트로 흘러내리는 다리 선은 내가 모르는 어떤 장소로 건너간 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왜 그녀가 내 택시만을 탔는지는 모른다. 왜 일부러 내 택시만을 선택해서 부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녀는 왜 그 호텔에서 공원까지 규칙적으로 다녔고, 다른 장소는 가지 않았는지, 거꾸로 공원에서 호텔까지 가는 데에는 왜 나를 부르지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며, 무슨 고민으로 다른 사람과 다툼을 하는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을 바라보는지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녀는 소리없이 올라탔다. 그리고 화초가 숨을 쉬는 것처럼 조용히 말했다.
“무슨 공원을 부탁해요.”
“네”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후우 하고 길고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무척 나쁜 공기가 자신의 폐 속에 가득 차있어 그것을 일순간 모두 빼내버리듯이 그녀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룸미러로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가에 물기가 어린 듯하지만 금세 말라버릴 정도이다. 어떤 생각이나 의지에 의해서 길러온 듯한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다. 호텔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테니스장에서 방금 나온 것 같은 가벼운 차림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살짝 다물어진 입술은 그녀만이 가진 유일한 장소에서 만든 유일한 침묵을 보여주는 듯 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라고 그녀는 한겨울 잠에서 깬 소년이 창문을 열 듯 입술을 조금 열었다.
“재즈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차 안은 이미 내가 플레이 시킨 재즈 스탠다드 곡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까지는 없는 질문을 받은 여학생의 표정처럼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이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정지했을 무렵 그제서야 생각난 듯 “아, 네.” 라고 대답했다.
이 재즈 CD를 얻게 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택시 기사를 하지 않던 때로 어느 크리스마스의 백화점에서이다. 어차피 혼자 지내야 하는 크리스마스에 딱히 갈 데도 없어 백화점 식당에서 혼자 전골찌게를 먹고 나오는데 카운터에서 잠시만요 손님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수증과 함께 재즈CD를 한 개 내밀었다.
뭐죠, 했더니, “감사의 선물입니다.” 하고 테가 없는 안경을 낀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명찰에 적힌 이름이 예전에 사귄 여자와 같은 이름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혼자 침대에 드러누워 그 재즈CD를 들었다. 오버 더 레인보우라든지, 스타 더스트라든지, 뉴욕의 가을 같은 곡이 있었고, 나머지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 곡들이었다. 한번 다 듣고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플레이 시켰다. 그리고 팔 베개를 하고 누워 천장 위의 형광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가끔 골목을 오가는 차들로 창문이 번득이곤 했다.
무척 말 수가 적은 여자였다.
백화점의 여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
그녀가 대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나를 좋아하기는 했던 건지 그것도 불분명했다.
“어디선가 들었는데, 시가란 말이야” 라고 그녀는 마주앉아 두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채 몸을 내 쪽으로 조금 기울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듯 말했다.
“응?”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거래.”
“그래?”
“다른 어떤 것도 안돼. 반드시 성냥이어야 해.”
“음.”
“음.” 이라고 그녀는 내 말투를 따라 한다.
나는 웃었다.
“당신, 웃는 모습이 좋아.”
“고마워.”
“그럴 때는 고맙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럼?”
“스스로 생각해 내.”
“음. 좋아 계속 얘기해봐.”
“뭘?”
“아까 말했던 시가 얘기.”
“아, 그 얘기. 그러니까 성냥으로 정성을 들여 골고루 불을 붙여야 시가는 꺼지지 않고 오래도록 켜져 있을 수 있거든. 그래서 성냥으로 불을 붙여야 하는 거야. 시가는.”
“그랬구나.”
“그런 것과 같아.”
“응?”
“그런 것과 같다구.”
“뭐가?”
“지금 내 마음이.”
그녀가 핸드백을 두고 내린 날은 특별한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날도 건너편 차창을 통해 공원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자전거와 인라인을 타는 사람들, 산책을 나온 사람들 사이로 그녀는 걸어갔다. 공원의 나무들 사이로 난 조그만 산책길로 접어들자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단 한번도 내 쪽은 돌아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럴 리 없었지만, 한번만 돌아봐주기를 나는 바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차를 타고 있는 동안 딱 한번 그녀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다. 어딘가에서 걸려온 것으로 그녀는 핸드폰을 열어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받았다. 멋진 귀였다. 한숨을 쉴 정도로.
“……”
“네”
“……”
“네”
“……”
“네”
라고 그녀는 대답만을 했다. 상대는 그녀에게 뭔가를 지시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이미 결정된 것에 대해 서류의 검증을 받듯 확인을 구하는 것인지 그녀는 네 라는 대답만을 했다. 룸미러를 통해서 본 그녀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렇지 않아요.” 라고 그녀는 말했다. 높은 톤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자신의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반박을 한 것이다. 그순간 나는 그녀가 클러치백 타입의 핸드백을 한 손으로 감싸쥐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한 눈에도 재래시장에서 파는 조잡한 무늬와 값싼 염료로 착색된 싸구려 제품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적어도 그녀가 좀더 제대로 된, 가령 프라다나, 구찌 또는 루이뷔통 쪽의 핸드백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계산을 할 때도 그러한 핸드백에서 돈을 꺼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째서 나는 핸드백의 존재를 지금까지 몰랐던 것일까 하고 반문해보았다. 다시 한번 룸미러를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
핸드백을 감싸쥐는 바람에 스커트 자락이 무릎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동안 길고 긴 상대의 설명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마지막으로 그녀의 네 라는 대답과 함께 전화통화는 끝났다. 그녀는 핸드백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뒤로 핸드백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고, 그녀는 그것을 항상 손에 놓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역시 알게 되었다. 미대생이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회에 옮기듯 소중히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감싸쥐고 있다는 것을.
어느 평일의 고요한 정오.
그녀가 내린후 얼마후 뒤쪽의 클랙션 소리에 놀라 순간 고개를 돌렸는데, 핸드백이 그녀가 앉은만큼 살짝 들어간 뒷자리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핸드백을 들고 공원까지 뛰어가보았지만 그녀는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한동안 나는 그녀가 다시 호텔에서 연락하기를 기다렸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있던 여자아이가 전학을 간 적이 있다.
그러자 그애와 짝꿍이었던 남자아이가 심하게 울었다. 선생님과 우리들, 그리고 전학을 가는 당사자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다음날 두툼하게 스웨터를 챙겨 입고 수업을 일찍 종료한 채 그애를 기차역까지 배웅하기로 했다. 로코코 양식을 본뜬 고풍스런 기차역이었다.
지금 기억에 그애가 가야 하는 곳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먼 곳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린 나로서는 모잠비크나 그린랜드에 다름없이 아주 멀고 먼 장소라고만 느껴졌다.
그애는 등에 빨강색 가방을 매고 한 손에는 일기라든지, 중요한 책을 싼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기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자신의 자리에 있는 창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애는 끝없이 손을 흔들었다. 우리들도 모두 손을 흔들었고, 그애의 짝꿍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선생님 품 안에서 울고 있었다.
그런데 그애가 갑자기 손 흔들기를 멈추고 차창을 똑똑 두드렸다. 울고 있던 짝꿍은 얼굴을 들었다. 우리도 손 흔들기를 멈추고 그애를 바라보았다. 그애는 차창에 입김을 후 하고 불었다. 차가운 초겨울의 날씨라 창문에는 하얀 입김이 서렸다. 그애는 검지를 펴서 거기에 글자를 썼다.
기 다 려 줘.
기차는 선로를 따라 움직였다. 움직이는 대로 우리도 기차를 따라 걸어갔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기차의 속도는 우리의 걸음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기차는 하나의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음 해, 우리들은 모두 학년이 올라 여러 반으로 다시 편성이 되어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아무도 그애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지만 돌이켜보면 정말로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호텔 부근에 주차를 하고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안되겠다 싶어 호텔 배차계에서 근무하는 사람중 한 두 번 인사를 했던 남자에게 혹시 그녀에 대해 물었더니, 그녀라는 존재가 과연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이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무척 미안해 했다. 물어본 내가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아마도 그녀는 이제부터 내 차를 타지 않기로 결심한 것만 같았다. 아니면 어떤 이유로 해서 앞으로 내 차를 타지 못하게 되었다든지.
어느날, 호텔 부근에 차를 세워두고, 담배를 끊은 대신 씹곤하는 껌을 사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내 차의 지붕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앉아있었다. 자줏빛과 노랑빛이 절묘하게 섞인 작고 아름다운 새였다. 처음 보는 새였다. 애완용으로 키우던 것이 어찌어찌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새는 내가 다가가는 것과 상관없이 이쪽저쪽을 분주하게 보았다. 그러다 역시 나와는 상관없이 해가 지는 방향으로 훌쩍 날아갔다.
가을의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멀리 새 한마리가 노을 속으로 사라질즈음 나는 알게 되었다.
이제 그녀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핸드백 속에 있는 것중 그녀에게 연락할 수 있는 단서가 될만한 물건은 성냥갑 뿐이었다.
신분증도 없었으며, 핸드폰도 없었으며, 신용카드도 없었고, 메모 수첩조차도 없었다. 단지 얼마의 현금이 들어있는 지갑과 샤넬 제품의 콤팩트와 장미 문양이 그려진 핑크빛 손수건 그리고 호텔이나 카페 같은 곳에서 나눠줌직한 성냥갑 한 개 뿐이었다.
앞 면에는 가게 이름이 적혀있었고, 뒷 면에는 간단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가게 이름은 정원(庭園)이었다.
정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심의 한적한 골목에 자리잡고 있는 중국인 소학교의 맞은편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국식의 잡화점 같았다. 어느 쪽이든 중국과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핸드백을 왼손에 쥐고 오른손으로 문의 손잡이를 당겼다.
손잡이의 감촉이 미끌미끌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특유의 향내가 났다. 어디선가 길고 축축한 복도에서 마주쳤던 오래된 공기의 냄새였다. 어디선가 분명히 마주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떠오르지는 않는다.
안은 어두웠다. 하지만 어둠에 적응이 되자 실내의 윤곽이 오히려 선명해졌다.
몸집이 큰 중년의 여자가 카운터에서 장부를 들척이다 고개를 들었다. 마치 공무원이 잘못된 서류양식을 접수받았을 때의 표정처럼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그녀 너머 벽에 걸린 용의 그림을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라디오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말했다.
“실례지만, 이곳은 어떤 곳입니까?”
이런 나의 질문은 여자를 더욱더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서서히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나에 대해 품은 못마땅함의 깊이가 이십미터는 깊어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라디오의 채널을 벽 너머의 누군가가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그러다 뚝 멈췄다. 오래된 옛노래가 벽과 벽 사이를 통과해 연기처럼 흘러들어왔다.
“여기는 중국인들이 회합을 갖는 곳입니다.” 라고 가게의 여자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저의 어머니도 중국인이십니다.”
나의 어머니는 중국인이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부모는 중국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다. 무슨 이유로 어머니의 부모님이 중국에서 배를 타고 한국으로 왔는지는 모른다.
어릴 적 한번은 어머니와 함께 인천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의 차이나타운 거리를 걸었고, 점심으로 그 부근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었다. 그리고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공원에 올라가 벤치에 앉았다.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어린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바다를 보았다. 햇볕을 받아 바다는 유난히 반짝였다. 멀리 수평선에는 큰 바다로 나가는 원양어선이 아슬하게 걸려있었다. 아마도 태평양이나 인도양으로 가는 배일 것이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분명히 나와 똑같은 곳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울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수면 밑에 흔들리는 풀처럼 내면에 흔들리는 슬픔이란 것이 투명한 손목을 통해 내게 전해져 왔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는 몇 년 전 모두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다음 해 아파트 근처에 산책을 나갔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깊이 사랑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깊이 사랑했다면 외아들인 나말고도 형제를 세네명은 낳아야 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랬어야만 했었다고 말이다.
가게의 여자가 말해준 것으로는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성냥갑은 분명히 자신의 가게 것이 맞지만 모임의 인물들중 젊은 아가씨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아마도 손에 손을 거쳐 전해졌을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나서 분명히 어머니가 중국인이냐고 내게 재차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회합은 화요일, 금요일 저녁 여덟십니다.” 라고 말하고는 다시 장부로 눈을 돌렸다.
나는 그녀가 내 준 중국차를 천천히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올즈음에도 벽 너머에서는 누군가 라디오 채널을 신경질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그녀와 연결된 고리는 간단히 끝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핸들을 껴안다시피 하며 두 손으로 핸드백의 걸쇠를 딱딱하고 열었다 닫았다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무수한 사람들이 내 차 앞으로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핸드백을 옆자리에 놓아두고 오른손을 올려 뒷목을 만졌다. 목을 한번 뒤틀었다. 우드득 소리가 났다. 왼쪽 어깨도 만졌다. 뻐근하다.
차 안에는 곡명을 알 수 없는 재즈가 흘러나온다. CD의 표지를 살펴보면 되지만 일부러 그러기에는 싫었다. 그저 음악이란 잠자코 듣고 있는 편이 낫다.
파란불로 신호등이 바뀜과 동시에 바로 건너편에 있는 호텔 길목으로 차를 몰았다. 오랜만에 호텔로부터 호출이 왔다. 물론 그녀는 아니다. 인천 공항으로 가는 아가씨 두 분이라고 알려주었다.
호텔 입구에 정차하자마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도어맨의 도움을 받아 두 명의 여자가 재빠른 동작으로 뒷자리에 탔다. 둘은 서로 무슨 장난을 하고 있었는지 서로의 몸을 티격태격 하며 까르르 웃었다. 나이는 아가씨 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려보였다. 아무리 많이 보았자 여고생 정도였다. 둘 다 차림도 가벼운 티셔츠에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다.
“인천 공항까지 가시죠?”
“네, 하하하. 하지마 이제. 하하하” 라고 스트라이프 무늬의 티셔츠를 입은 쪽이 대답했다.
호텔을 빠져나와 차가 많이 몰리는 백화점 지역을 피해 우회를 했다. 그리고 고가도로를 탔다. 그 다음은 한강이 나오고 다리를 넘었다. 생각보다 차들이 없었다. 순식간에 그녀가 내리곤 하던 공원이 옆으로 지나갔다. 건너편 창문을 통해 공원을 무심결에 쳐다보았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람들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녀가 없어진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뒤에선 여전히 여자애 둘이 서로 장난을 하고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인천공항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가 나온다.
“아저씨!”
룸미러로 슬쩍 보았다.
아까의 스트라이프 티셔츠의 여자애가 몸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네?”
스누피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여자애가 스트라이프 여자애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하지마. 너. 저, 아저씨.”
“네.”
“왜 안물어보세요?”
“네?”
스누피 여자애는 스트라이프 여자애의 머리를 끈질기게 만지작거린다.
“하지 말래두.”
빨강 신호등에 차를 정지시켰다. 창을 조금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저씨” 이번에는 스누피 여자애가 몸을 앞으로 쑤욱 내밀고 내 옆얼굴을 보다시피 하며 말했다.
“아저씨. 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말이죠. 우리가 어떻게 아저씨를 부르게 되었는지 왜 안물어보냐는 거예요. 그렇지? 그 뜻이지?”
“야! 내가 물어본다고 했잖아. 빙신아!” 스트라이프 여자애는 소리쳤다.
“빙신이라고 하지마, 너! 네가 더 빙신이잖아!”
“저기, 아가씨들 죄송한데 지금 무슨 말씀이죠?”
둘은 서로 엉겨붙었다가 처음으로 말을 붙인 내게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이번엔 스트라이프 여자애가 내 머리 뒤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가 호텔에서 불러준 차를 탄 게 아니라, 일부러 아저씨 차를 부른 거라는 거예요. 그리고 아저씨 차를 부를 수 있었던 건 어떤 사람 때문이었어요.”
“어떤 사람?”
“네. 어떤 사람. 호텔에 있는 동안 그 언니하고 많이 친해졌는데 우리가 떠난다는 것을 알고 마침 잘 아는 사람이 모는 택시가 있으니 그 편에 가는 게 어떻겠냐는 거였어요.”
언니?
“그 말도 했잖아. 너, 왜 빼 먹어.” 스누피 여자애가 끼어들었다.
“알았어. 근데 언니에게 저희가 물었어요. 그 아저씨하고 도대체 무슨 관계냐고요? 호기심이 많거든요. 그리고 확실히 해둘 필요도 있구요. 우린 아직 어리니까.”
“너만 어리겠지.” 스누피 여자애가 다시 끼어들었다.
“그래서요.”
나는 고속도로 진입로 쪽으로 차선을 서서히 바꿨다.
“그래서 언니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궁금하시겠죠?”
“무척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이야, 난 그 아저씨를 좋아해 하고 말했어요.” 스누피 여자애가 여자 목소리를 흉내내며 또 다시 끼어들었다.
“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두 분 서로 좋아하는 사이신가봐요.”
“저기, 미안한데요, 어떻게 생겼죠? 그 언니라는 분?”
“어?”
둘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럼 아저씨는 모르는 분이었어요?” 둘은 동시에 물었다.
“네. 도대체 누가 손님들에게 제 택시를 타라고 했는지 전혀 짐작도 못하겠는데요. 전 그 호텔에 아는 사람이라곤 배차계에 있는 남자와 예전에 단골로 탔던 한 여자손님 말고는 없습니다.”
“그래요? 그거 재미있네요.”
“글쎄요. 재미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선 조금 혼란스럽습니다.”
“그 언니요.”
“네.”
“음, 외모에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어요. 그래서 설명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대신 만나기는 쉬우니까, 아저씨가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만나기가 쉽다니요?”
“그 호텔 그랜드볼륨에서 행사가 있어 내일까지 일한다고 했어요. 어차피 호텔에는 그랜드볼륨이 하나 뿐이고 거기서 일하는 여자는 언니 한 명 뿐이니까 만나기 쉽죠.”
“잠깐만요.” 스누피 여자애가 다시 몸을 불쑥 내밀어 이번에는 카오디오를 보며 말했다.
“나, 이 재즈 제목 알아요.”
“제목이요?” 나는 스누피 여자애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네. 무척 유명한 곡이에요. 커티스 퓰러의 Love, your spell is everywhere 이예요. 당신의 사랑이 세상 어디에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져요. 택시에서 재즈를 들으니까 정말 좋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둘은 다시 서로의 장난에 엉겨붙다시피 하였다. 자리 싸움을 하느라 서로의 엉덩이를 부딪혔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진입 표지판이 나왔다. 나는 부드럽게 핸들을 돌렸다.
회전을 하면서 각도가 바뀌자 차 안으로 햇볕이 환하게 비쳐들어왔다. 그 빛이 너무나 환했는지 뒤에서 와 하고 탄성이 울렸다.
얼마만에 보게 되는 햇볕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얼마만에 보게 되는 진짜 햇볕인지 모르겠다.
이제 그녀가 말한 대로 내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내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아이도 세네명은 낳아야 좋겠다고 생각했다. 깊이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미리 그런 것을 나는 생각했다. 뒷자리에 앉은 저 여자애들 정도면 딸로는 괜찮겠다. 활동적이라 좋다. 조금 시끄러울지도 모르지만 스트라이프와, 스누피 티셔츠와, 그리고 스키니진이라니, 얼마나 멋진가.
그렇다. 이제 내 스스로 생각해내야 한다. 지금 그녀의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깊이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