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자의 사도와 이방인의 사도
갈 2:1-10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갈 2:1-10 / [바울의 다른 사도들] 그러고 나서 14년 뒤에야 나는 다시 예루살렘을 찾았습니다. 그때는 바나바와 디도도 함께 갔습니다. 2)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으로 그곳을 찾은 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에 관해 예루살렘의 형제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내가 가르쳐 온 복음의 올바른 해석과 또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교회의 지도자들과 개인적인 토론을 벌인 것입니다. 3) 그 결과 그들은 내 말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또 내 동료인 디도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4) 이런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써 누리는 자유를 의심하고, 또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어떤지를 정탐하려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몰래 스며들어오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노예를 쇠사슬에 묶듯이 자기들의 규칙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묶어 놓을 생각만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5) 그러나 우리는 단 한 순간도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여러분을 혼란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6)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선포하고 있는 내용에 어떤 새로운 것도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교회의 주요한 지도자라는 위치가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등하지 않습니까? 7-9) 사실 교회의 기둥으로 알려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얼마나 나를 유용하게 쓰셨는지를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베드로에게 큰복을 내리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사를 주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내게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유대인들을 위해서 일을 계속할 테니 우리는 이방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해 달라고 격려하였습니다. 10) 그들이 따로 내게 부탁한 일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들을 언제나 잊지 말고 도와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라면 이미 내가 열심히 해온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자신이 전한 복음의 신뢰성을 입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다른 사도들과의 만남을 예로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할례자의 사도로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의 사도로 보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1-5) 바울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례를 통해 현재 갈라디아 교인들이 처한 현실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바나바,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전한 복음을 유력한 자들에게 사적으로 제시했습니다(2).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통해 맺었던 과거와 현재의 열매가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복음의 진리 가운데 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어떤 이의도 없었던 것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유력한 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할례를 강요하였지만, 바울은 디도가 헬라인이었음에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약속하고 있는 진리 가운데 거하고자 하는 의지입니다. 복음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정받은 바울의 역할(6-10)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과의 만남과 바울이 제시한 복음을 듣고 바울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무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7). 이는 베드로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바울에게도 역사하셨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며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습니다(9). 여기에는 바울의 사역에 대한 인정, 축복, 격려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사람들이 재확인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입증한 것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서 부정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행하고 있는 일과 해 온 일들 중에 그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습니까? 또한 다른 사람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갖고 있습니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소원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이 순종으로 바뀔 때 바라는 것이 실상으로 다가옵니다. 예수께 나아가면 낫는다는 믿음이 중풍병자와 찬구들이 침상을 들고 예수께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게 되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믿음은 항상 행동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표현 될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 설 교 >
믿음에 행함이 없다면
갈 2:1-10 / 문기태 목사
만약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음 믿음입니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죽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구원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을 가져야 가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언제나 생명력이 넘치기를 원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마음으로 믿을뿐 아니라 믿는대로 행동하는 삶입니다. 믿기때문에 믿음이 삶속에 배어나와 변화된 삶이 자연스레 나타납니다.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잡화점 주인은, 최근 그 교회에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너무 잘한다'고 가게에 오는 손님마다 붙잡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건 다니지 않는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손님이 잡화점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주일에는 그 목사님이 무슨 설교를 했습니까 ?"
그러자 주인은 '글쎄요, 무슨 설교를 했는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님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아니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까 ? 그러면서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 목사님의 설교를 그도록 칭찬하는 거죠?"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전에는 외상값을 제때 갚지 않는 걸 예사로 알더니만 목사님이 새로 오신 다음부터는 외상값을 아주 잘 갚지 뭐예요.'
사람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들으면 혼란에 빠집니다. 성경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셨는데 왜 야고보서는 행함을 강조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만 받습니다. 아무리 착한 행동을 많이 하고 자선사업을 많이해도 예수를 모르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때문에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영원한 사망에 던지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본문이 행함을 강조합니까? 그것은 단순한 행함이 아니고 믿음에 반드시 따라와야 하는 행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단순한 지식에 머무르는 것은 진짜믿음이 아니라는 말슴입니다. 진실로 믿는다면 가치관이 바뀌고 행동의 변화가 반드시 찾아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못하고 지식적인 믿음으로 만족한다면 귀신들의 수준에 머무른다는 말슴입니다.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분이신줄 믿고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의 그런 믿음이 그들을 영원한 지옥의 심판에서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구원받고 하나님께 인정받으려면 믿음의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여러분안에 있는 믿음을 행동을 통해 입증해야 합니다. 속으로만 '나는 예수를 지지해'하고 믿음을 감추고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기생라합은 정탐꾼들이 그의 집에 찾아 왔을 때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민족을 통하여 가나안땅을 주시려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적하여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심을 속으로 믿는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정탐꾼들이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심을 깨닫는데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정탐꾼들을 맞아들이고 숨겨주는 행동을 통하여 입증이 되었습니다.
만약 기생라합이 보호해 주지 않았으면 정탐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래도 안전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중에 계셨고 얼마든지 보호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라합의 믿음을 보시려고 기다리셨습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하려고 라합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라합은 속에 가지고 있던 믿음을 멋지게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않고 꼭 붙잡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믿음의 영웅으로 믿음장에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의 합격자가 된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의 믿음이 관념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행동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중에는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것을 믿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강한 도전을 받는 것으로 하나님을 체험했으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시고 성령님을 통하여 도전을 주시는 목적은 여러분을 변화시키시고자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행동화해야 합니다. 받은 감동에 이끌려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해야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안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어떤 농부가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어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담장 가득 메운 나팔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황홀한 꽃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밖으로 나가 나팔꽃들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즐겼으면 좋으련만 오늘은 밀밭을 갈아 놓아야 하니 빨리 밭을 갈고 돌아와 저 꽃을 즐기리라' 그가 저녁 늦게 밭에서 돌아와보니 꽃은 시들어 낙화되고 없어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창문 밖 나뭇가지에서 귀여운 새들이 아름다운 소리로 지저귀는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젖소들의 우유를 짜 놓고 저 아름다운 새 소리를 즐기리라' 농부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새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또 다음 날 아침 농부는 집 밖에서 말 발굽소리를 듣고 일어나 문을 열고 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백마 한마리가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면서 농부를 향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마치 농부에게 어서 빨리 와서 승마를 즐기라고 손짓하는 듯 했습니다. 농부는 '오늘은 빨리 나가 동편에 있는 울타리를 수리해
놓고 저 훌륭한 백마를 타며 즐겨 보자'하고는 급히 일하러 나갔습니다. 일을 마치고 급히 돌아와 보니 그 아름다운 백마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습니다. 농부는 이렇게 매일 아침마다 신기한 일들을 즐기기 위해 다른 일들을 정지하고 시간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도 실천해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한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하지 않겠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순종하되 지금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해야할 급한 일을 하고나서 시간나면 그때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실천하기는 하겠으나 기회가 많으니 천천히 하겠다고 다음에는 꼭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영원히 좋은 기회를 놓치고 후회스런 인생을 살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뒤로 미루지 말고 최대한 빨리 순종하려고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사단이 여러분의 기억에서 그 말슴을 지워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께서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계산하지 말고 즉각 실천하십시오. 그렇지않으면 사단이 눈치채고 다가와 감동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식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뜻을 깨달으면 믿음으로 일을 저지르십시오. 그렇지않으면 사단이 다시금 여러분의 뜻을 더 중요하다고 속삭일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가 새로 부임했습니다. 모두 목사의 설교를 크게 기대하고 있는데 목사는 똑같은 내용의 설교를 세 주일이나 반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집사 한 사람이 목사를 찾아가 "목사님, 똑같은 설교를 세 주일이나 되풀이 하시는군요. 언제쯤 새설교를 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자 젊은 목사는 "제가 새설교로 바꾸는 것은 우리 교회 성도들이 설교의 메세지를 실천에 옮기고 난 다음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성도들은 뉘우치게 되었고 목사의 설교 중 같은 말이 되풀이 되기만 하면 자신들의 행동을 돌아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새롭고 달콤한 메시지를 듣고 즐기려고만 하지는 않습니까?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메세지를 듣고싶어하십니까? 우리교회안에서도 설교를 듣는 은혜받는만큼 변화가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 늘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10월달부터는 오후예배에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설교를 한 편 더 듣는 것보다 들은 말씀을 더 깊이 묵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후예배에는 찬양하고 간증하고 오전에 들은 말슴을 피드백하는 시간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특별히 나에게 또는 우리 교회에 하신 말씀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뭐라고 하셨는가? 그 말슴을 어떻게 적용하려고 하는가? 그리고 지난 한 주간의 삶속에서 말슴을 실천하면서 체험한 말슴의 능력은 무엇인가? 등을 모든 교인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나누며 말슴을 더 깊이 소화하는데 투자하려고 합니다. 물론 앞에서 제가 인도는 하지만 설교와 반대로 저는 주로 듣고 여러분이 말씀하는 형태로 말입니다.
저는 21세기에는 우리교회가 굉장한 믿음의 능력을 소유한 교회로 변화된 모습을 꿈꿉니다. 모든 교인들이 확신으로 충만한 믿음을 소유할뿐만아니라 실천을 겸비한 믿음을 소유하여 믿음의 위력이 입증되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얼마든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교인들이 도시를 움직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우리 교인들이 주일날 들은 말씀을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에 다시 설교하는 모습이 이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가득할 것입니다. 그 모습은 믿는 자와 불신자를 가리지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엄청난 감동을 불러올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했던 한 여인이 정원에서 보리밭을 밟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처음엔 정원사려니 했습니다.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병원의 원장이 아닌가.병원장은 정원사가 할 일을 대신하며 병원을 돌봐 환자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았습니다.이 원장이 바로 슈바이처 박사입니다.그는 "왜 의사가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말로써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대외 이미지
갈 2:1-10 / 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
헨리 키신저가 미국의 국무장관이었을 때 아마 그 이후의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헌법에 대통령은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만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느냐.’ 키신저는 독일태생의 유태인인데 열다섯 살에 미국에 이민해서 국무장관의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상의 야망이 있지 않느냐는 내용의 질문입니다. 키신저가 대답하기를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있지만 왕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은 없다.’ 농담입니다마는 왕은 사람들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그런 뜻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이라고 해서 여론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국의 왕실이 다이애나 왕비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엄청난 비판적인 여론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군주론제도를 폐지하자는 그런 주장까지 표면화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왕실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기 때문에 최근에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 60년을 기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나라의 왕실이 폐지됐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왕실이 1912년에 폐지됐지요. 그래서 영화 <마지막 황제>의 제목이 마지막 황제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왕실도 폐지되고 러시아의 왕실도 폐지되고 캄보디아의 왕실이 폐지됐습니다. 모두 사회적인 격변에 의해서 몰락했습니다. 왕도 국민의 여론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가 여론에 의한 정치를 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여론에 민감한 것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닙니다. 여론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는 한쪽에서는 서구화를 하라, 민주화를 하라는 요구가 빗발치지만 반대쪽에서는 과거 순수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주 신중해야 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여론을 봐 가면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우디 왕조를 지탱하는 것은 와하비 파, 아주 보수적 이슬람 신앙을 갖고 있는 부족이 킹 사우드를 도와서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했기 때문에 그들의 협조 없이는 나라를 지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눈치를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기독교인과 교회는 세상의 눈치를 봐야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눈치를 보시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느냐. 하나님이 세상의 눈치를 안 보시기 때문에 교회도 세상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 앞에 하나님을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둔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만 잘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동의를 구하지 않으시고 신임투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론을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인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인기든 예수님의 인기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지만 우리의 의견을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미지를 관리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는 어땠을 것 같습니까. 초대교회는 이미지의 문제를 염려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까. 우리는 초대교회가 완벽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교회는 한편으로는 존경을 많이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한방에 날아간 경우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핍박에 의하여 다 흩어졌습니다. 그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는 결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흩어진 다음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강한 적대감에 시달린 적이 많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로 구성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바울이 쓴 편지가 전부 다 초대교회 여러 교회에 쓴 편지들인데 만약 그 교회들에 문제가 없었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같은 것을 읽어보면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인 문제, 분열의 문제, 여러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 칭찬받는 교회는 두 곳 밖에 없고 나머지 다섯 교회는 꾸지람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단맞는 교회가 그 당시에도 더 많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 말씀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을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열한 사도보다 이후에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이 열한 사도와 같이 신앙생활을 한 적이 없고 같이 신앙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별도로 예수님을 만나서 별도로 사도의 부르심을 받고 별도의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야고보 · 베드로 · 요한을 만나는 이 자리는 그가 뉴커머(newcomer)로서 최초로 이들을 만나서 바울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들이 점검하고 그리고 인정하는 그런 아주 중요한 만남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검증을 받는 시간이에요. 여기에 세 명의 사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야고보, 사실 야고보는 열 두 사도가 아니고 예수님의 동생이에요. 야고보 · 베드로 · 요한 이 세 사람의 이름이 이 순서로 등장하는데 이 순서가 의미심장합니다. 야고보의 이름을 먼저 말한 것은 야고보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었기 때문이고 이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만 실제로 대표격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야고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바울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0절에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다’ 이건 의미심장한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염려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복음을 승인하는데 바울의 복음을 승인하면서 야고보가 노파심으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 달라고 추가의 부탁을 하고 있는데 이 노파심이 신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신학적인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미지 문제 때문이었을까, 바울의 이 신학이 갖고 있는 내재적인 유혹 때문이었을까.
사도 바울은 이 부탁에 대해서 평소에 하는 바라고 한 말로 일축했지만 야고보의 염려는 일리가 있습니다.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 이것은 우리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할렐루야! 이건 복음의 진리에요. 오직 믿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육체는 없습니다. 그것만은 분명한 복음의 진리에요. 그런데 문제는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이 자연히 소홀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안 해도 되는 것과 해야 되는 것의 차이는 천지차이에요.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자원봉사가 내신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하면 하루아침에 자원봉사 안 할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 같은 동기부여는 없습니다. 이슬람에 라마단이라는 게 있지요.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금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밤에 식사를 합니다. 수억 명의 이슬람 성도들이 라마단 기간 중에 금식을 합니다. 예외가 없어요. 이것은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라마단이 해야 되는 게 아니고 선택사항이 되면 하루아침에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기독교에는 라마단처럼 강요되는 금식이 없습니다. 선택사항입니다. 금식이든 구제든 봉사든 다 선택사항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본문에서 염려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은 맞는데, 바울의 복음이 맞는데 게을러질까, 행실이 나빠질까, 도덕적으로 나태해질까, 소위 모럴 해저드, 도덕적인 위험에 처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의 마음의 뒤편에 갖고 있을만한 염려는 세상이 우리를 볼 때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세상이 기독교인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을까, 기독교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비쳐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충분히 했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명의 인물을 비교하자면 야고보는 폭 넓게 생각하는 인물이고 바울은 본질에 집중하는 인물입니다. 두 종류가 다 필요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바울이 옳습니다. 그러나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야고보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만약 오늘날 야고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한경직 목사님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바울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았다면 누구를 닮았을지 알 수가 없지만 욕을 엄청 먹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욕을 엄청 먹고 오해를 엄청 받지만 굉장히 용감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야고보는 지혜로운 사람이요 어른이고 바울은 신학적으로 옳은 사람이에요. 이 두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면 사람의 눈치도 안 봐도 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안 봐도 된다는 말은 우리가 행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요. 왜냐하면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가 추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에 우리가 선행을 추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착함을 추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구제를 추가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거룩함을 추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만으로 족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고 떳떳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자유함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자유함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자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는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도 자유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안 봐도 되는 우리가 사람의 눈치로부터도 자유해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바울과 야고보는 약간 다르게 대답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 눈치 안 봐도 된다.’ 야고보는 ‘그래도 사람 눈치 안 볼 수 없다.’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바울의 지론은 이랬을 것입니다. ‘남에게 시험이 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내 자유함을 육신을 위한 기회로 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자유함을 누려라.’ 이렇게 말했을 것이고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라.’ 이런 지론을 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쓴 것입니다. 야고보서를 쓴 이유가 그는 바울과 다른 내용의 복음을 전하고자 한 게 아니고 그는 바울보다도 폭 넓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이 그 자유함을 누리려고 하는 그 위험에 대해서, 오해에 대해서 노파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야고보서에서 말한 것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는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늘 염려했습니다. 사실 바울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에서 ‘내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러니까 그 사랑이라는 말은 ‘믿음의 행함’ 이런 말로 바꿔도 똑같은 뜻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말씀을 다 이해하질 지 잘 모르겠지만 결론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치는 안 봐도 되지만 사람의 눈치는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여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이 더 엄합니다. 하나님보다도 사람들이 더 힘든 상전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상관하지 않는 일을 사람들이 상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든 기독교인이든여론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 세습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큰 문제에요. 그렇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할 수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떳떳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한 만큼 사람들 앞에서 자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건 위선 아니냐?’ 이렇게 물어볼지 모르는데 위선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만큼 이해심이 많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을 읽지만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만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유념해야 됩니다. 기독교인이 무슨 죄냐. 기독교인인 한은 죄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기독교인이 된 게 무슨 죄냐.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죄에요.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이에요. 이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것을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갈 2:1-10 / 박조준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교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의 진정한 교제를 깨뜨리려는 위협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라고 해서 예 외가 아니었고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들은 언제나 바울의 마음에 큰 부담을 주는 복음의 장애물로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거짓 형제 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 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가장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도 없었 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배경은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진리가 아 닌가 하는 것을 판별하는, 말하자면 종교회의가 모였습니다. 거기에는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 시하던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할례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할례의 중요성을 과 소 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할례를 반대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반대하려고 한 것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 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할례 를 반대한 것입니 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까? 할례가 구원 의 조건이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 들은 사람들에게 가만히 들어와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잘못된 가르침을 폈습니다. 언제나 이단이나 사이비는 처음부터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향해 정반대의 도전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합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지요. 그러나 이것은 꼭 하셔야 합니다 라고 합 니다. 그래서 나중에 가면 나중에 한 말을 처음에 한 말보다 더 중요하게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그 렇게 해서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진리를 탈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바울은 분해서 바나바와 그리고 몇 사람이 함께 예루 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 이 나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교훈은 바로 이 바리새파들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도 믿는다 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일어나서 구원을 받으려 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이 일을 의 논하러 모이자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 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 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 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했습니다. 이것은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베 드로가 한 대단히 중대한 발언이었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만일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이제부 터 율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니 그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멍에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가운데 누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습니까? 인간의 문제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지키지 말아야 하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 리는 다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했고, 하라 하신 것은 하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파괴해 버린 범법자들이고 따라서 율법의 진노 아래 놓여 있었습 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열어 주 셨는데, 이제 다시 구약 시대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구원의 조건처럼 제시한다면 이것은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의 사건을 무효로 돌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 다. 이런 배경을 두고 바울은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자들을 거짓 형제라고 부르면서 갈라디아교회 성 도로 하여금 경계하라고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들어왔어요? 가만히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했 습니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와서 활동하는 것은 숨어 있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세요. 저희 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 이로되 했습니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구원의 조건으로 한다면 우리는 지금부터 율법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절대로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 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또 구원을 받았으면 율법을 지키게 됩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율법을 안 지키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율법은 지금도 거룩한 삶의 표준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을 때만 구원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거짓된 형제들은 성도들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서부터 율법으로 옮기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 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육신의 소욕대로 살아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에 우 리가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헛되이 여긴다면, 그래서 자기 마음 대로 살고 방종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다시 말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심령이 심각한 병이 든 사람일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그러나 무율법주의도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성령을 통해서 저절로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주인 과 노예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있게 되어, 계약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 랑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은혜는 율법을 폐기하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복음이 흔들리는 것을 볼 때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해서 경고의 말을 던진 것입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 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을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 잘못된 복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아닌 문제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관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 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한해서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철저한 진리의 사람이었습니 다. 우리도 이 복음의 진리에 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근본적 인 문제가 아닌 데 대해서는 넓은 마음을 가지고 관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가능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요한 번연은 성도들 사이에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이 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 답답하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다 니.
우리는 원수와 동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의 진리에 관한 문제에서는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됩니다. 왜요? 오늘 주신 말씀 5절 하반절을 보세요.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 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지 않기 위해서, 복음의 진리가 순수하 게 지켜지지 위해서입니다. 다른 모든 문제에 관해서는 양보할 수 있지만 이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바울의 심정을 여기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아마 바울의 이런 분명한 자세 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지금 유대교의 한 분파로 전락해버렸을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율법주의자 들에 맞서서 자유의 복음을 지키고자 애쓰는 바울은 복음을 사랑하는 다른 성도들과 긴밀한 협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바나바를 보십시다. 사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제일 사랑의 빚을 지고 있던 사람이 바나바였 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에 가던 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변해서 그리 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제자들과 교제하려고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사람 들 앞에서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도 여러분 편에 서서 함께 복음을 전 하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을 잡 아죽이려고 펄펄 뛸 때는 언젠데 이제 예수를 전해? 무슨 전략을 바꿔서 또 우리를 괴롭게 하려 드 는 것이지?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제자 중 아무도 그를 믿어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에서 바나바가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에 보면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 들에게 가서 그가 그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했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진실하게 믿어 주 고 많은 사람 앞에서 사울을 변호했던 인물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 라는 이름의 뜻 그대로 그는 위로의 아들로 일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계속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바울과 가 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는 바나바가 얼마나 고마운 사람이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불신 하는 가운데서 오히려 믿어 주고 자기와 함께해 주었던 사람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니까 바나바가 목회를 할 때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되었 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 이라고 나오다가 뒤에 보면 그 순서 가 바울과 바나바 로 바뀝니다. 바울을 내세우고 바나바는 무대 뒤로 사라져 버립니다. 사라질 줄 아는 사람, 영광스럽게 은퇴할 수 있는 사람, 이 얼마나 귀합니까?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곁에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의 관계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둘이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 다. 그러다가 바울과 바나바의 의견에 차이가 생겨 다툼이 생겼습니다. 마가 요한이 전도 여행시 이탈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바울은 그런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함께 일할 수 없다 했고, 바나바는 그가 한 번 실수를 했지만 다시 기회를 주면 훌륭한 전도자가 될 것이니 함께 데리고 가자고 해서 결국 의견의 차이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갈라서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바울 이 마가를 데려오라고 하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골 4:10; 딤후 4:11). 젊은 날에 불성실했 던 마가 요한도 변화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변화 된 배경 속에도 바나바의 도움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바나바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오늘 우 리에게도 이 바나바와 같은 사람, 위로하고, 격려하고, 믿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둘째, 바울의 동역자인 디도를 보십시다. 디도서 1장 4절에 보면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 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는 말이 나옵니다. 디도는 바울의 전도를 받아 믿음의 아들이 된 사람입 니다. 그런데 디도의 생애를 볼 때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바울이 어려운 일을 다 디도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때 제일 문제가 많았던 교회가 고린도교회였는데 이 교회의 문제를 수습하기 위 해서 바울과 함께 그 현장에 뛰어든 사람이 디도였습니다.
디도서 1장을 보면 바울이 크레타 섬에 도착해서 거기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섬사람들이 보통 사람이 아니어서 문제가 일어났습 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야 했는데 그때 거기에 파송된 사람이 디도였 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어려운 일을 할 때마다 디도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 한 사람이 한 세기를 바꾸어 놓은 놀라운 복음 사역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 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바나바가 있었고, 디도가 있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을 보세요. 십 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바울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때 자기의 생각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기도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서 행동하는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발걸음을 옮 겼습니다. 아주 작은 문제까지 주님께 맡길 수 있는 삶,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사소한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그 감격이 얼마나 큽니까? 아주 세밀한 부 분까지 주님께 맡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간 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그리고 확신을 가지고 난 후 바나바와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 교제한 사람이 바나바와 디도만은 아니었습니다. 셋째, 아주 놀라운 사람, 베드로를 보십시다. 이 베드로 때문에 이방인 선교의 문이 열렸다고 해 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런데 역시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주요 대상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인에게는 바울이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해야 할 일과 베드로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가장 중요한 지체의 원리 를 발견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그리스도인은 지체입니다. 우리 몸의 각 부분이 얼마나 다릅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각각 할 일이 다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교제를 잘 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고,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겸손히 알고, 내가 할 일을 내가 하고, 다른 사람이 할 일을 참견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 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의 각 부분들은 모두 가 다 중요합니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또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알아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태도입니다. 각자가 자기 은사를 알고 자기 자리에 서 겸허하게 머물러 있는 지혜가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제가 잘 되면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잘 이루어 나갈, 중대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베드로를 찾아간 것은 아주 잘한 일입니다. 그 당시의 지도자는 사실상 베드로 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에게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잘못하면 그 앞에서 바른 말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베드로를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협력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의논하기 위해서 베드로를 찾아 예루살렘 에 올라간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초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는 선교입니다. 그들은 복음 전파에 초점 을 두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에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인에게 각기 선교의 목 적을 가지고 사역했습니다. 디도는 바울이 전도하고, 교회를 설립하고, 지나간 곳에 남아서 교회를 더욱 든든히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이들의 교제는 선교라는 한 가지 중요한 띠로 연결되어 있었습 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얻어지는 힘과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선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는 선교를 위한 교제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에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봉사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0절을 보세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사실 선교와 봉사는 나눌 수가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우리는 선교하기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봉사는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구 체적인 사랑의 행동이고,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봉사할 때 전도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가 왜 교회당에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교제합니까? 선교와 봉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여러 선교회와 봉사회가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합니다. 선교와 봉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교회가 교회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하 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나타내는 봉사의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이 충만히 임할 때 나타난 현상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교제를 통하여 선교하고 봉사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능력 있게 사는 길
갈라디아서 2장 6-10절 / 이한규 목사
사도 바울은 성령 충만한 삶을 통해 능력 있는 삶을 살았다. 바울처럼 능력 있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철저한 독립의식을 가지라
바울은 초대 교회의 유력한 사도들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역했다(6절). 그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아갔다. 그처럼 남의 힘을 너무 의지하거나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말라. 남이 나를 인정해야만 자신감을 얻지 말고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라. 독립적인 삶은 책임적인 삶을 낳는다. 약속을 지키면서 자기 책임을 다할 때 존중도 받고 능력 있는 삶도 펼쳐진다. 물론 독립심이 너무 지나쳐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하거나 기존 질서와 체계를 너무 배타하려고 하지 말라.
기존 질서와 체계도 명백히 잘못된 것이 아니면 힘써 존중하고 특히 하나님께는 최대한 의존적으로 살라. 나의 죄와 허물과 약점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면 사람을 불의하게 의지하지 않고도 누구보다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 독립심을 오해해서 남의 호의나 대접을 너무 거부하지 말라. 그것은 독립심이 강한 것이 아니라 개인주의가 강한 것이고 자존심을 너무 내세워 인색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성공한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은 되기 힘들다.
크게 성공했는데도 행복한 삶이 결핍된 것은 독립심을 개인주의로 오해한 결과다. 독립심을 가졌다는 것은 의존적으로 살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함께 살려는 것이다. 남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되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모든 일을 혼자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 독립심을 가지면서도 사람은 서로 의존하며 사는 존재란 현실을 겸손하게 인식하고 특히 하나님께는 더욱 철저히 의존하려는 좋은 의미의 의존성을 갖추라.
2. 친화적 인간관계를 가지라
바울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서 자기 멋대로 하지 않았다. 자기는 무할례자인 이방인의 사도로 생각해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베드로는 할례자인 유대인의 사도라고 하며 베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었다(7절). 당시 유대주의자들은 베드로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라면서 베드로의 사역을 인정했다.
바울처럼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도 잘 하면서 사람과의 수평관계도 잘 하라. 즉 수직적인 독립성과 더불어 수평적인 사회성도 좋은 성도가 되고 수직적인 계시성과 종교성이 탁월하면서도 수평적인 현실성과 윤리성도 탁월한 성도가 되라. 수직적인 절대관계와 수평적인 상대관계가 다 좋을 때 능력 있는 삶이 나타난다.
당시에 바울이 뚜렷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힘 있게 사역하자 초대 교회에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청하며 서로의 사역 영역을 존중해 주었다(9절).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고 게바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였고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제자였다. 그처럼 위대한 사도들이 서로를 인정했기에 초대 교회에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다.
혼자 해야 할 일은 혼자 하되 같이 할 수 있는 일은 굳이 혼자 하지 말고 같이 하려고 하라. 진짜 능력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혼자 다 하려고 하지 않고 내가 잘하는 일은 내가 하고 내가 잘할 수 없는 일은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게 적절하게 맡기는 사람이다. 나밖에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을 발굴하고 적절한 시점에 일을 넘기는 지혜와 리더십을 갖추라. 함께 일하면서 일과 비전을 이루는 과정에서 신뢰를 쌓아갈 때 성공도 얻고 행복도 얻는다.
친화적인 인간관계를 이루려면 공동체를 생각하고 공동체의 법과 질서와 상식도 존중하라. 법을 엄하고 무서운 것으로 여기지 말고 나를 보호하는 사회적인 안전장치로 여기고 어떤 틀 안에서 친화성을 발휘해야 복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또한 친화적인 인간관계를 이루려면 질투와 미움을 버리라. 잠깐 미워하고 질투할 수는 있지만 최대한 빨리 미움과 질투를 털어버리라.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잠 16:32).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아는 것이 능력이다.
3. 거룩한 사명의식을 가지라
바울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시고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믿었다(8절). 그런 사명의식이 뚜렷했기에 온갖 시련과 오해를 극복하고 선교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다. 삶의 목적을 인간적인 성공보다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에 두면서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물질과 지위가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물질과 지위의 복도 주실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면서 찬란한 꿈과 비전을 현실 속에 파묻고 살지 말고 늘 나의 사명을 생각하며 살 때 책임적인 삶과 복된 삶도 극대화된다. 특히 나의 삶 자체를 사명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소중히 여기고 살피라. 하나님은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들라고 나를 이 땅에 보내셨다. 그런 사명의식을 잃지 말라. 세상 영광을 너무 추구하지 말고 내가 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성찰하며 살라.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리에 있고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는 것이 능력이다.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왜 애완동물이 대부분 주인보다 일찍 죽는가? 주인은 애완동물이 없어도 자기를 지킬 수 있지만 애완동물은 주인이 없으면 자기를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을 사랑으로 지켜주려는 사람이 생명력이 넘치고 장수한다는 암시다. 반대로 미움으로 공격하려는 사람은 생명력이 고갈되면서 장수 가능성이 줄어든다.
하나님의 어떤 신묘한 뜻이 있어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일찍 천국으로 옮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사랑이 넘치면 생명력도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동안만은 늘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삶을 살고 나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를 살리는 데도 힘쓰라. 그처럼 다른 생명을 함부로 취급하지 말고 남의 땀과 남의 몫을 가로채지 않으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할 때 능력 있는 삶이 펼쳐진다.
4. 나누려는 마인드를 가지라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영역을 존중해주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난한 자들을 잘 돌봐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는데 사도 바울은 자기도 가난한 자를 돌보는 데 본래부터 힘썼다고 했다(10절). 예수님은 가난한 약자를 긍휼히 여기셨다. 영생의 진리를 추구하던 부자 관원 청년에게는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마 19:21). 그런 가르침을 따라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가난한 자를 잘 돌보라고 했고 바울도 가난한 자의 구제에 힘썼다.
삶에서 두 가지 편견을 버리라. 첫째,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 부자를 무조건 좋게 생각해도 안 되지만 무조건 나쁘게 생각해도 안 된다. 정당한 부는 존중되어야 한다. 둘째, 빈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 빈자를 무조건 편들어도 안 되지만 무조건 나태한 존재로 여겨도 안 된다. 바른 판단과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가난하지만 의의 길로 가려는 사회적 약자를 힘써 돌보라.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는 삶이 빠지면 믿음생활과 말씀생활과 교회생활의 핵심 부분이 빠진 셈이 된다.
예수님이 꿈꾸신 세상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으로 가는 길이 먼 것 같아도 낙심하지 말라. 갈 길을 찾았다면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나누려는 마인드를 가지고 거룩한 길로 가는 사람과 늘 동행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외모나 조건을 보지 말고 가난하고 의로운 약자를 힘써 도우면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산다면 누구나 능력 있고 감동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미국의 한 가난한 청년이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학교 근처 농장에서 일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남들은 다 도시락을 꺼내 먹는데 그는 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못 되어 헛간 뒤로 가서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며칠 후 인부 조장이 점심 식사 시간에 큰 소리로 벌컥 화를 냈다. “이 놈의 마누라가 내가 돼진 줄 알아. 이렇게 많이 싸 주다니. 누구 내 도시락 좀 먹어 줄 사람 없어?” 청년은 귀가 솔깃해졌다. 부끄럽게 얻어먹는 것도 아니고 남는 것을 먹어주는 것이기에 당당하게 그는 조장의 남은 음식을 먹어 주었다.
그 후 거의 매일 인부 조장이 비슷한 말로 소리쳐서 청년은 아무 부담 없이 조장의 남은 음식을 먹어 주었다. 한 달 후 학기가 시작될 무렵에 그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농장을 그만 두면서 조장 내외에게 감사 표시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넓은 농장에서 조장을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경리 직원에게 조장과 조장 부인에게 대신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고 하자 그 직원이 말했다. “조장님 부인이요? 그분은 몇 해 전에 돌아가셨어요.”
남을 도울 때는 가급적이면 도움 받는 대상의 자존심을 지켜 주면서 내가 가진 범위 내에서 힘써 도우라. 왜 주는 삶이 없이 인색하게 사는가? 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는 기쁨을 몰라서다. 없을 때의 나눔은 더 큰 감동이 되고 인생의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는다. 삶의 감동이 없는 것에 대해 핑계를 삼가라. 지금 형편에서도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살면 누구나 감동적으로 살 수 있다. 그런 감동과 능력이 넘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복된 미래를 예비하고 천국 생명책에 이름을 영원히 남기라.
내게 주신 은혜
갈 2:6-9 / 곽선희 목사
미국의 월리엄 헐스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문사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했고, 돈이 모이는 데로 취미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골동품 수집가였습니다. 귀중한 세계적인 미술품과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을 마치 생의 목적처럼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진귀한 미술품이 있다고만 하면 세계 어디라도 좇아가서 그것을 사들이곤 했습니다. 이미도 많은 귀중한 것들은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유럽에 왕가에서 사용했던 도자기하나가 있다는 것을 정보에서 알게되었습니다. 잡지에서 그 그림을 보는 동안 그는 마음이 뛰었습니다. 아주 그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저것을 내가 꼭 사들여야겠다.' 그리고 구라파를 여러 번 여행을 했고 추적을 해보았지마는 종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지고 있는 건지. 이 귀중한 물건이 어디가 숨어있나.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심지어는 실망을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잡지를 보는데 잡지에 골동품에 대한 이야기가 났는데 그 골동품이 미국인에게 팔렸다 라고 써 있습니다. 깜짝 놀라서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굴까? 하고 이름을 자세히 보았더니 자기 이름입니다. 벌써 그 소장품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마는 그것을 가져다 두기만 했지 살펴보질 않았어요. 자기가 가지고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다니면서 찾아보려고 그렇게 애를 썼던 거예요. 자기가 소장하고 있는 것,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바로 그 어리석음을 지칭하는 말씀이올시다. 은혜를 은혜로 알 때만 은혜가 됩니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은혜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자기자신, 가장 소중한 자기건강, 자기가 지금 처하고있는 이 현실의 귀중한 의미를 내가 깨닫지 못한다면 은혜도 은혜 될 수 없고 복도 복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멀리서 부러워할지 몰라도 자기 자신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은 나만 같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지만 나는 나 됨에 대한 만족이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느껴야합니다. 은혜로 감격해야합니다. 그리고 은혜로움 그 안에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은혜 된 현실을 보면서 은혜 앞에 자기자신을 위탁해야 됩니다. 이 큰 은혜의 사니 더 바랄 것이 없어요. 은혜에다가 자기 운명을 그냥 던져버리고 삽니다. 바로 그러한 생이 그리스도인의 생이요 바른 생이요 행복한 생입니다.
유능한 핼렌 켈러 여사를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그는 삼중 장애자입니다.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불행을 딛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하게 귀중한 일들을 많이 하며 심지어는 저술까지 하면서 살았습니다. 말년에 어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런 육체적 고통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은 하나님을 원망해 본적은 없습니까?" 헬렌 켈러 여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헤아리는 것으로 만도 시간이 없는데,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하는 것으로도 부족한데 어찌 원망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감사하고 그 은혜를 기뻐하는 것으로도 시간이 부족해요." 원망할 시간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그를 불행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 떠날 때에 그는 이렇게 유언을 합니다. "나의 일생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이 어찌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 땅에서 디아스포라 속에서 태어납니다. 사실 이것은 나그네의 생활 속에서 그리 행복한 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도 은혜였습니다.
요새 흔히 바이랭귀지라는 말을 합니다. 두 가지 언어를 다 할 수 있도록 태어나는 것 그 참으로 행복한 일이올시다. 여러분 영어 배우려고 그렇게 애쓰지마는 아에 그냥 미국에서 태어나면 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중고등학교 나오고 그리고 한국말로 여기 와서 공부하면은 영어 잘하지 한국말 잘하지, 아 이게 도대체 이런 대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이랭귀지라는 겁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두 말을 다 합니다. 헬라문화와 히브리종교 투 컬쳐스, 두 문화를 다 통달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 문화에서 훌륭한 공부를 했습니다. 이것들이 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내게 주신 은혜라고. 그래서 그는 이방인에 사도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렇게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는 택정함을 받은 엄청난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감격해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또 다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아주셨다는 겁니다. 잘못된 길로 갈 때,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할 때, 다메섹으로 갈 때 그가 계속 잘못될 때에도 오래오래 참아주셨어요. 기다려 주신데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구요. 그뿐 아니라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셨다는 겁니다. 내가 교회를 핍박했어도 몰라서 한 일이요. 스데반을 죽였어도 딴에는 율법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 마음속에는 확실한 붉은 진실이 있었습니다. 충성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한 충성.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마는 그가 진실되다는 것을 인정해주신 하나님, 너무너무 감사했습니다. 특별히 강권적으로 그를 불렀습니다. 사도바울을 설득한 것이 아니에요. 다메섹 도상에서 강제로 그를 붙들어 포로 했습니다. 강제로 붙들었다는 것, 강권적인 소명,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래 하나님께 감사하고 자기자신을 포기하고 그의 뜻을 따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장 12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가 나를 잡았어요. 포로 했는데 포로한 그것을 나의 목표로 삼고 좇아가노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그는 자기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 허물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약할 때에 강한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설적입니다. 내가 인간적으로 약할 때에 은혜로 강해집니다. 내가 세상적으로 약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에서 강해지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약할 때 강해지는 그 신비로운 은혜 그걸 알고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신비롭게 놀라운 계시의 영을 주신 것을 생각하고, 특별하게 내게 주신 계시의 영을 인하여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고요. 그가 깨달은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자기를 겸손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주었어요. 무슨 병인지 알 수 없지마는 계속 그를 괴롭히는 병이 있었어요. 모름지기 간질병이라고 한번 추리해 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설교하다말고 쓰러진 일도 있는 것 같이 그렇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병을 고쳐주시지는 아니하시고 '누가'라고 하는 의사를 계속 동반하게 했습니다. 병은 가지고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에는 지장이 없도록 해주었어요. 바울은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있슴으로 내가 겸손하다.' 도저히 교만할 수가 없어요. 잠시도 교만해지는 것을 하나님이 용납질 않아요. 가장 낮은 처지에서 온유 겸손하게 그렇게 살아가며 은혜를 지켜갈 수 있도록 해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있어요. 정말 은혜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런가하면 바울은 경륜적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골로새 1장 25절에 보면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아주 신비로운 고백을 합니다. God's Dispensation,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선지자를 통하여 또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상징적으로 혹은 예표적으로 역사하시고 그 모든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고, 그 다음에 교회가 설립되고, 그 복음을 만방에 전하기 위하는 바로 그 자리에 내가 있단 말이에요. 예수께서 이루신 그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방에게 전하는 데에 내가 심부름꾼으로 거기에 사역자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죠. 그는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속에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은혜를 깨닫고 있었어요. 간간이 그는 그 나름대로 의심도 많았고 생각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곳에서 지하실 감옥에 2년동안 처박혀 있을 때, 그와 배를 타고 로마로 갈 때에 바울이 탄 이 배가 왜 파손을 되는 겁니까? 그리고 로마에 가서 음침한 지하에 가서 몇해동안 썩을 때 얼마나 속이 컬컬하고 답답했겠습니까? 목이 터져라 하고 복음을 전해야될 바울이 어떻게 이렇게 죄명도 분명치 않게 감옥에서 살아야되느냐 이거예요.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주의 경륜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이 친위대에게 전파됩니다. 로마의 고관들에게 전파됩니다. 이것을 깨eke고 빌립보 1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라노라." 나의 당한 일이 이게 뭡니까? 이 모순되고 부조리한 삼년간의 현실이 헛된 일이 아니더라구요.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구요.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었어요. 놀라운 역사가 조용히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게 주신 경륜, 그 큰 시나리오 속에 내가 있음을 깨닫고 내 현실이 있음을 깨닫고 그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항상 그러기에 먼 밝을 빛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베스트 셀러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많이 팔린 책이다 그 뜻입니다. 그러나 롱셀러라는 많은 잘 듣지 않습니다. 오래 오랫동안 가장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팔리고 읽혀지는 책, 서양에서 제일 많이 읽혀지는 책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마가렛 미첼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하는 소설입니다. 영화로도 나왔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있습니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해서 많은 피해가 있는 그 고난의 역사를 기록한 것입니다. 스칼렛이라는 여주인공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정적으로 당합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작은 본래 그 제목을 "Tomorrow is Another Day"라고 지으려고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말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했습니다마는 역시 이 소설의 주제는 Tomorrow is Another Day 입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의 뜰 것이다. 그 마지막 장면에 광활한 대지를 바라보며 내일은 내일의 태양의 뜰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여기 멈추는 게 아닙니다. 과거의 연장으로 미래가 있는 게 아니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바로 이 한마디 때문에 롱 셀러가 되는 겁니다. 낙심은 없습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내일에는 내일의 태양이 뜰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경륜이 우리 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바울은 이 뿐만 아니라 맡은 바의 은혜를 알고있었습니다. 내가 맡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있어요. 오늘 본문에 자세히 보세요. 이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는 할례자를 맡겼어요. 유대사람을 맡겼고, 내게는 이방사람을 맡겼어요. 그 그리스도가 내게는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맡기셨다, 나는 이것을 맡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분담을 알고 있어요. 그는 분복을 알고있고 분담을 알고 있고 분직을 알고있어요. 내가 하는 일이 뭔가 하고요. 고린도서에서 보면 더욱더 자세하게 그는 갈파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었고 어떤 사람은 물을 주고 어떤 사람을 가꾸고 어떤 사람은 거두고. 그는 자기 역할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노라. 누군가가 거두게 되겠지.' 여러분 요새 보면 너무 사람들이 조급해요. 자기가 심고 자기가 거두려고 그래요. 오늘 심고 저녁에 거두려고 그래요. 그런 게 아닙니다 역사라는 것은. 나는 심기만 하고 다른 사람은 가꾸기만 하고 그 누군가가 거두게 되겠죠. 역할분담이 있습니다. 은사분담이 있는 걸 알아야되요. 여러분 때로 우리는 길을 내고 거름을 주고 그리고 기초공사를 하고 끝낼 수도 있어요. 다음 세대사람이 거두게 되고 영광과 번영을 누리게 해도 되겠죠. 여러분, 우리가 통일의 문제만 해도 그래요 너무 조급하게 통일하려고 해요. 통일의 준비만 하면 되지 다음 사람, 다음 사람, 해가면서 해야지. 내 눈앞에서 화끈하게 만들어 보려고 하다가 다치지 않습니까. 그건 잘못된 거예요. 내가 할 일이 뭐며, 우리가 할 일이 뭐요, 이 세대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은 나는 교회의 기초를 놓는 사람이래요. 심는 것으로 족하다. 누군가가 저 앞에서 거둘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 고로 이 같은 내게 주신 은혜를 앎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기둥 같은 분들과 교제의 악수를 했다. 당신이 맡은 것은 이것이요 내가 맡은 것은 이것입니다. 당신도 은혜요 나도 은혜요 은혜와 은혜 속에서 서로 교제의 악수를 했습니다. 악수라는 것은 동등하다는 뜻이에요. 이것이 바로 은혜의 교제였습니다. 그 옛날 공자 선생님께서 말입니다 "오악(五惡)을 용서하던가 등한히 여기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라고 말했어요. 5악, 다섯 가지 악이 있다고 했는데 한번 들어보세요. 만사에 빈틈이 없고 시치미를 딱 때면서 간악수를 쓰는 자. 둘째는 공정치 않은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정한 듯이 처리하는 사람. 셋째는 전부 거짓말 투성인데도 워낙 구변이 좋아서 진실인 것처럼 떠드는 사람. 넷째는 속으로는 음흉한 악당이고 그러나 기억력이 좋아서 아는 것이 많아 사람을 홀리는 사람. 다섯째는 못된 일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 다섯 가집니다. 여러분 무얼 생각하십니까? 전부가 거짓말쟁이예요. 진실이 없다 그 말이에요. 문제는 진실이요. 은혜 앞에 진실해야 됩니다. 다 없어도 진실은 있어야 됩니다. 다 가지고도 진실이 없으면 무너집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은 진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진실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께서 내게 대하여 나를 충성되이 여겨. 충성되다는 말이 피스티스 진실이라는 말이에요. 은혜를 앎으로 충성했고, 은혜를 깨달으므로 감사했고, 은혜 안에 삶으로 그는 가슴을 열었어요. 은혜 안에서 누구든지 용서할 수가 있었고, 누구든지 사랑할 수가 있었고, 누구든지 함께 할 수가 있었어요. 성도여러분, 내게 주신 은혜를 바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 진실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정직할 때 새로운 은혜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눔이 정의다
갈라디아서 2장 8-10절 / 이한규 목사
< 소명의식을 가지라 >
바울은 하나님이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삼으셨고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고 믿었다(8절). 그런 소명의식이 뚜렷했기에 온갖 시련과 오해에도 흔들림 없이 자기 사역을 수행할 수 있었다. 삶의 목적을 “돈을 벌겠다! 유명해지겠다!”라는 것이 되게 하며 나를 위해 살기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살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 그 삶의 목적을 위해 물질과 은혜와 축복이 필요하다면 물질과 은혜와 축복을 주실 것이다.
사람들이 왜 비상을 주저하는가? 불편과 오해와 공격을 감수하며 그렇게 비상하려고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또한 남들이 높이 비상하는 사람을 따돌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높이 날면 하늘의 신비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데 현실에 안주하면서 이상을 그냥 이상으로만 간직하며 살면 불행한 일이다. 믿음 생활을 할 때 가장 달라져야 할 것은 삶의 목적과 사명이다. 사명을 따라 살 때 책임적인 삶과 복된 삶도 극대화된다.
신약 성도는 이방인으로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어 혈통적인 아브라함 자손보다 더 큰 복을 얻었다.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감격하고 기억하며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며 살라. 그런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람과 사회의 변화의 동인이 된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복된 인생이 되겠는가? 늘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려고 힘쓰라.
< 나눔이 정의다 >
바울이 뚜렷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힘 있게 사역하자 초대 교회에서 기둥 같이 여기는 지도자들인 야고보, 게바(베드로), 요한은 뒤따라 은혜 받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를 악수를 청하며 그들을 인정해 주면서 서로 맡은 영역을 존중해 주었다(9절).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요한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 받는 제자였다. 그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영역을 존중해주면서 다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가난한 자들을 잘 돌봐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는데 바울은 자기도 가난한 자 돌보는 일에 본래부터 힘썼다고 말했다(10절). 당시 가난한 자는 복음 전파의 핵심 대상이었고(마 11:5), 예수님은 영생의 진리를 추구하던 부자 관원 청년에게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하셨다(마 19:21). 초대 교회에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구제를 부탁했고 바울도 구제를 중시하며 가르쳤고 힘써 행했다.
삶에서 두 가지 편견을 버리라. 첫째,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 많은 사람이 어떻게 벌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부자에 대해 무조건 좋게 생각하든지 아니면 무조건 나쁘게 생각한다. 둘 다 잘못된 태도다. 둘째, 빈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라. 그를 무조건 나태한 존재로 여기지도 말고 무조건 편들지도 말라. 물질 유무와 상관없이 바르게 판단하는 편견 없는 자세를 가지라. 동시에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 약자를 힘써 살펴주라.
가난한 사람과 사회적인 약자를 돌보는 삶이 빠지면 교회의 큰 부분이 빠진 셈이 되고 믿음생활과 말씀생활에서도 큰 부분이 빠진 셈이 된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다. 추수할 때 밭 한 모퉁이는 남겨두고 희년에 빚을 탕감해주라는 계명은 가난한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려는 계명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잠시 나그네로 온 자들이 혼자 다 차지하기보다 나눔을 통해 서로 지친 삶을 위로해주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은 선행이 아닌 정의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언약을 따라 회개 기회를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런 은혜의 흐름이 성도를 통해 흘러내려가 사회적 약자를 살펴주고 진심으로 그를 받아줄 때 비로소 복된 세상이 열린다. 자비의 사회화를 꿈꾸고 실천하라.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는 세상이다. 갈 길이 멀어도 낙심하지 말라. 가야 할 길을 찾은 사람은 낙심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 길에 늘 동행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샘물의 기둥같은 일군
갈 2:8-10 / 서화평 목사
하나님의 크시고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위대한 정치인. 군인. 학자. 기업인. 예술가 등 역사 위에 자랑스러운 업적을 남긴 이들을 존경하는 말로 큰 재목 혹은 나라의 기둥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값지게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켜 기둥 같은 인물이라고 말합니다.
1) 렘1:18 -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다 하셨습니다.
2) 계3:12 - 하나님이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신다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의 기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4) 다윗을 통일 이스라엘의 기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5) 세례 요한을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기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와 게바 곧 베드로와 요한을 기둥과 같이 여기는 자라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기둥과 같이 귀한 인물로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도 기둥과 같이 귀한 인물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야고보 베드로 요한을 향하여 고백하여 증거했습니다. 이처럼 오늘 서목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사람들 앞에 증거 할만한 기둥 같은 일꾼이 많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리며 축원합니다.
우리는 땔감이나 석가래 감이 아닌 귀히 쓰일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그럼 기둥이 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1) 기둥은 커야 합니다.
집을 짓는 재목의 크기는 집의 크기나 그 규모나 용도에 따라 다르지만 그 집을 짓는 중 기둥은 가장 비중이 있는 재목입니다. 따라서 건물의 규격이나 용도에 따라 굵기나 높이가 큰 것을 고르게 됩니다. 인간 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는 통이 크다는 말을 씁니다. 낭비하는 것과 통이 큰 것은 다릅니다. 낭비할 줄은 알면서 통이 좁은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낯을 내고, 인기를 얻는 일에는 후하나 꼭 필요한 일에는 인색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통이 큰 사람이 아니고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들거나 자신의 인기에 관계없으면 인색하고, 외면하는 이는 결코 큰 기둥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에게는 후하나 하나님께 인색한 이는 큰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사용될 일꾼은 풍부한 인간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둥을 포기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사울을 포기하시고 다윗을 다시 세우셨습니다. 다윗과 같이 선택되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둥은 곧아야 합니다.
바르지 못한 기둥은 힘을 쓰지 못합니다. 따라서 기둥은 곧아야 합니다. 큰 건물의 기둥은 나무나 콘크리트나 철물들을 사용합니다. 요즘은 H빔을 많이 사용합니다. 기둥이 비뚤어지거나 뒤틀려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중을 견디지 못하여 휘어지거나 부러져서 건물은 넘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생각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기둥은 즉시 빼어내고 곧고 바른 기둥으로 갈아 꼽습니다.
기둥이 되지 못할 사람은 첫째,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입니다. 둘째, 매사에 불평이 많고 삐뚤어진 사람입니다. 셋째,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보는 현대판 놀부입니다. 넷째, 남이 하는 일에는 꼭 비평과 이유를 다는 삐뚤어진 사고방식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곧고 바른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사용될 일꾼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합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다른 사람 앞에서는 다르게 말하는 사람은 곧고 바른 기둥이 아닙니다. 그 일이 옳더라도 다른 사람이 했을 때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은 곧고 바른 기둥이 아닙니다.
큰 마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기둥같은 사람입니다. 또한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을 말씀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 기둥같은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올바른 신앙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기둥같이 사용하시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기둥은 단단해야 합니다.
기둥은 언제나 많은 하중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기둥은 단단하고 강해야 합니다. 기둥은 어떠한 충격이나 하중에도 부러지거나 휘어지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기둥인 교회의 일꾼들에게는 이 단단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단단한 힘을 가리켜 성도들에게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무거운 힘과 충격에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힘이 성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와도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면 이는 기둥으로서의 값어치가 없게 됩니다.
샘물의 기둥 같은 일군은 어떠한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책임의식을 가지고 어려운 일에도 발벗고 나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남들은 피하고, 모른척해도 앞장서서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이 기둥 같은 일군입니다. 기둥 같은 일군은 일할 때는 힘들지만 나중에는 인정받게 됩니다. 더 큰 주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둥 같은 일군으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4) 기둥은 희생되어야 합니다.
제 아무리 좋은 나무도 다듬어져야 재목으로 사용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금속도 재련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 같은 일꾼도 희생하며, 다듬어져야 기둥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나무도 베임을 당하므로 기둥으로 사용이 됩니다. 교회 일꾼도 귀중한 기둥으로 사용되려면 나무가 뿌리에서 잘리어야하는 것과 같이 세상의 향락이 잘려져야 합니다. 자기 만족의 이기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혈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주의 궁전에 기둥처럼 쓰이는 주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5) 기둥은 다듬어져야 합니다.
좋은 기둥은 필요 없는 가지를 잘라내고 껍질을 벗기고 필요한 치수로 다듬고 잘라냅니다. 교회의 좋은 기둥인 일꾼은 지식이나 뛰어난 기량보다는 교육과 훈련이 되어있어야 합니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혈기. 교만. 욕심. 음란. 불평. 고집 등 나쁜 습관과 버릇 성격을 잘라내야 합니다.
목수가 나무를 다듬듯. 석공이 돌을 다듬듯. 철공이 쇠를 다듬듯 교회의 기둥인 일꾼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다듬어야 합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훈련받았습니다.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간 자신을 다듬었습니다.(갈1:17-18)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늘 말씀으로 다듬어 주의 교회에 기둥 같은 일꾼의 복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 기둥이 해야 할 일입니다.
1) 기둥은 정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기둥은 건물을 완벽하고 안전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기둥이 넘어가면 벽도 넘어가고 서까래도 내려앉아 건물 자체가 무너집니다. 어떤 경우라도 기둥은 건물을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둥은 제 위치에서야 합니다. 기둥은 반드시 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기둥이 서야 할 자리에 서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됩니다.(붕괴)
샘물의 기둥같은 일군은 각기 서야 할 위치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이 지켜야 할 본분을 다 해야 합니다. 만일 기둥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게 되면 상처납니다. 건물이 위험합니다. 그러므로 기둥같은 일군은 비가 오나 눈이 와도 있어야 할 정 위치에 있습니다. 사명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잘 지키는 자가 기둥과 같은 일군입니다.
2) 기둥은 건물의 품위를 드러내 주어야 합니다.
기둥은 단단한 반석 위에 곧고 반듯하게 서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을 안전하게도 하지만 품위를 드러냅니다. 결코 기둥이 기울어지면 안됩니다. 이는 위험한 일이요, 품위를 잃는 것입니다.
유다서1: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재목들과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건물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는 성도간의 아름다운 조화를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주의 교회에 크고 곧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기둥 같은 일꾼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셨습니다. 이처럼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영광을 돌리는 삶이 기둥같은 일군의 자세입니다. 샘물의 기둥, 교회의 기둥, 주님의 기둥이 되어 주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
갈 2:8-10 / 이동원 목사
우리는 문화를 초월하여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분들을 가르쳐 선교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issionary'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missionary의 어원인 mission은 본래 라틴어 missio의 “보낸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성경에는 선교사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는데 사도라고 합니다. 본래 희랍어에서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고 하는데 그 뜻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분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사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7:1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요한17:20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인데 이 제자들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전도 받을 후대의 모든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는 본래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상대로 당신이 진정한 주님의 사도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의 우선순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를 넓은 의미로 적용하자면 보냄받은 그리스도인 전체이기 때문에 사도의 우선순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라고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할 일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적 사역은 무엇일까요?
1. 불신자에게 가서 전도하는 선교사역입니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의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1:18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55:1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태11:28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계22:17의 말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의 소명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마태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 “가라‘가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본문 9절 하반부에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 사도는 선교의 대상은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를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저들의 동족인 유대인 선교에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합니다. 8-9절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8절에서는 베드로를 할례자인 유대인들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은사)를 따라 된 일이기에 유대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이방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피차에 협력의 필요가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사역하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부르심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2:7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무 할례자에게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 전할 책임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선교사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모두가 선교사요,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들이 바로 선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언제쯤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좀 영적으로 성장하고 훈련을 받은 후에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숙하고 훈련된 사람이 전도하면 더 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미성숙과 훈련 부족을 구실로 전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대체 언제 여러분의 성숙과 훈련이 완성된단 말입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만난 즉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을 배회하던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치유를 얻자 예수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네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십니다. 전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의 케이스를 보십시오. 그녀가 예수님 만나고 언제 전도를 시작했습니까? 그녀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자마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전도를 시작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그리고 그 결과를 요한4:39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제 경험에 의하면 예수 믿는분들이 성장 못하는 원인이 전도안하는 때문입니다. 전도하면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면 성경공부하게 됩니다. 전도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금년한해 얼마나 전도사역에 헌신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전도의 헌신으로 새해를 여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2.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구제사역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울사도에게 선교외에 한가지 더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한가지 사역이 그의 마음의 부담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읽어보실까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이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처음 사도들 모두 아니 초대 교인 모두의 공통적인 부담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도 이 사역을 힘써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사역입니까? 구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6:1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이 구제 사역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교회가 다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구제 사역을 포기하자고 결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초대 교회는 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구제 사역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역과 함께 구제 사역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목장 교회 사역의 두가지 목표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목장 사역의 비전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목장 교회 비전“ 급속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구촌 교회 안에서 마을별 혹은 특성별로 교우들에게 안정적인 가족구조를 제공하여 교회 정착과 영적 성숙, 공동체적 봉사 곧 선교와 구제를 실현하도록 섬기며 더 나아가 목장 재생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이것이 우리가 목장으로 모일 때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VIP 태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름철 단기선교에 동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목장들이 정기적으로 사회 봉사 기관들을 방문하고 주변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해마다 년말년시에 목장 교회를 중심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선교와 구제의 실천은 중요한 우리 모두가 “빚진자”라는 성경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누군가가 과거에 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만큼 살고 있는 것--하나님과 이웃들의 사랑, 그리고 이 사회에 빚진 때문이라는 자각-이것이 우리의 자비의 실천의 성경적인 모티브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요한3:16은 잘 기억하지만 요일3:16의 교훈은 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요일3:16은 요한3:16이 증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평생에 붙들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음 구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3:17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그래서 신학자들은 전도의 명령을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렀는가 하면 사랑의 실천을 위대한 명령(Great commandment)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에 포함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세상 모든 가난한 자들을 우리가 책임질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여리고 길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구제 사역에 헌신하기를 꺼리는 원인의 하나는 우리가 크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시작하듯이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구제를 포함한 사랑의 실천 사역 중에는 물질이 아닌 우리의 시간과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들중 적지 않은 분들이 참여하는 호스피스 사역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도소 사역도 그런 경우라고 할만 합니다. 양로원 봉사도 그런 경우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중에는 장애인 교우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올수 있도록 차량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부모들이 일할수 있도록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교회에서 무료나 실비로 돌보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은 교회에 나와 자원봉사로 이런 어린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우리 교회가 연구해 볼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의 사랑입니다. 혼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년전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 위스컨신주의 Mr.Stillwater씨의 이야기가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린 남편은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합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날 남편이 아내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하자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번 남편이라고 부를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그러나 한가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것-그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교회의 두 기둥 야고보와 요한
갈 2:9 / 장경준 목사
본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기둥같이 여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어떠한 기둥으로서 교회에서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함께 생각합니다.
1. 기도의 기둥 / 야고보
여기에 기록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입니다. 행15장을 보면 예루살렘 종교 회의가 열릴 때에 야고보는 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이었습니다. 어떻게 지도자 자격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기도 때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는 "낙타 무릎을 가진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야고보는 성의 높은 곳으로 끌려가서 성 밑으로 내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 밑으로 내 버려진 야고보는 성 절벽 저 밑에서 엎드러져 죽은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장사를 하기 위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야고보는 거기에서도 무릎을 꿇고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서 예수님의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기도를 실천하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약5:13-14에서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야 교회는 부흥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관상기도, 중보 기도, 능력기도를 작년부터 시작했습니다. 발전해야 합니다. 당회에서 선출된 모든 임원들이 기도의 기둥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2. 믿음의 기둥 / 베드로
본문에서 두 번째의 기둥은 게바 즉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믿음의 기둥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믿음으로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눅5:4을 보면 베드로가 밤이 맟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 할 때에 예수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이 말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에 자신도 주님을 의지하면서 물위를 걷게 해달고 말한 사람입니다.
또 오순절 성령의 세례를 받은 베드로는 잡혀가 심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라고 말을 하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을 합니다. 당시 기독교는 이단으로 몰려서 유대교인들에게 당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믿음을 보임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정말 초대교회의 믿음의 기둥으로서의 역할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말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우리는 믿음의 기둥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의 "믿음이 식어지리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은 재림까지를 믿는 믿음입니다. 재림의 믿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재림을 믿고 들림 받는 순결한 신아의 자리에 까지 이르르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기둥이 되어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으로 담대하게 승리하는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한우리교인들이 믿음의 기둥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3. 사랑의 기둥 / 요한
교회의 세번째 기둥은 사랑의 기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사랑의 기둥이었습니다. 요한이 쓴 5권의 성경은 그 주제의 핵심 언어가 바로 사랑임을 우리는 요한복음과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가는 곳마다 사랑을 외치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정도로 사랑을 대단히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기도하는 기둥도 있어야 하고 믿음의 기둥도 있어야 하지만 사랑의 기둥이 많아야 합니다. 꼬치꼬치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일은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계명을 어기는 사람입니다. 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사랑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또 가식이요 위선이요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어디에 있는가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사랑이 결핍되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되기 시작하니까 사회전체가 불신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진정한 사랑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도 성도의 교제가 거룩한 사랑의 교제가 아니라 거래와 같은 교제가 너무나도 많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 중심으로 형제와 자매와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여러가지 범죄나 질병도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가 병드는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이 외친대로 "말과 혀로만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는 거룩한 성도의 교제 속에서 사랑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사랑하자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의 기둥이 되기를 원합니다.
4. 진리와 전도의 기둥
여기의 또 하나의 기둥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바울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기둥입니까? 바울은 진리와 전도의 기둥입니다. 그는 신약성경의 반가량을 집필할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진리의 기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오직 전도하는 일에만 일생을 바친 전도의 기둥이었습니다. 우리는 맡은 직분은 달라고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막1:1:38에서 자신이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그들은 표적을 보고 병 고침을 받았지만 그것만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전도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시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전도는 해도 그만 한해도 그만인 선택이 아니라 전도는 반드시 해야 하는 필수입니다. 전도는 은사를 받은 특정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전도를 해야 하는 의무사항입니다. 바울과 같이 전도의 기둥들이 많이 나와서 우리 교회가 크게 부흥하기를 원합니다.
5. 화평의 기둥 / 바나바
마지막으로 여기 중요한 기둥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바나바인데 바나바라는 위로의 사람이었으며 화평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아주 소중한 화평의 기둥이었습니다. 교회에는 이 화평의 기둥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다메섹에서 변화된 사울을 기존의 제제들과 화합시킨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말씀하기를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 Maker입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정착되어야 합니다. 분쟁과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싸움이 있는 곳에 내가 들어감으로써 평화가 찾아오게 만드는 것이 바로 가서 "화평케 하는 자"는 Peace Maker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헐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담도 헐어버리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로 인하여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게 되고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나바와 같은 화평의 사람들이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내가 우리 교회의 화평의 기둥이 되어서 정말 이 삭막한 세상에 아름다운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튼튼하고 아름다우려면 기둥들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기도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진리와 전도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나바와 같은 화평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