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그리스도
갈 2:11-21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11-21 / [베드로에게 면박을 준 바울] 그런데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매우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12) 처음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야고보의 친구인 유대인 몇 사람이 찾아오자 그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들을까봐 무서워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13) 그러자 다른 유대인 신자들도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그를 따라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 행동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14) 나는 그 광경을 보자 그들의 믿음이 진실하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 위에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당신은 원래 유대인이면서도 이미 오랫동안 유대교의 율법에 구애를 받지 않고 지내오지 않았소?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갑자기 이 이방인들에게 율법만을 지키게 하려는 겁니까?' 하고 나무랐습니다. 15) [믿음으로 얻는 구원] 우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니 이방 죄인이 아닙니다. 16)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요, 유대교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모두 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비로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만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7) 그러나 만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일이 나중에 가서 잘못된 것으로 밝혀져 우리가 할례를 받고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망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18) 만일 내가 전에 파괴해 버린 그 낡은 제도를 다시 세운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죄인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19) 그 많은 율법을 다 지켜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성경을 읽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결코 입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안 것입니다. 20) 그리스도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그 몸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은 덕분에 지금 내가 참생명을 얻었습니다. 21)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서 다 구원을 얻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적 행위를 책망했던 일화를 통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11-16)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책망한 사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수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이방인과 교제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이 왔을 때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이방인과의 교제에서 그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행 10장). 그럼에도 이와 같은 외식을 보이는 것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 위에 확고하게 서 있지 못함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행위는 믿음이 연약한 다른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끼쳤습니다. 만일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복음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의 공적인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를 개인적으로가 아닌 공개적으로 책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복음의 핵심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는 것(17-21)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를 범법한 자로 만들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되고자 하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그런데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가 죄를 짓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리스도는 죄를 짓게 하는 분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논리를 배격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새 생명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이끄는 삶이고, 자기중심적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입니다.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기중심적 인생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인생으로, 자기 힘을 의지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삶으로 변했습니까?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도록 더욱 힘쓸 때 성도는 하나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변화의 삶 속에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며 체험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면 주님을 더 많이 알게 되고 열매 맺는 삶을 살게 되며 실족하지 않게 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며 상속 받는 길이며 그 나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설 교 >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활
갈 2:11-14 / 김형익 목사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에게 자신이 전했던 그 복음은 어떤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하여 주신 복음이라는 것을 자신이 회심한 이후에 사도들과 접촉했던 역사적 사실들을 가지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루살렘을 두 번 방문했던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밝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밝히는 또 하나의 배경은 수리아의 안디옥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에서 아마도 ‘안디옥 스캔달’이라고 알려질만큼 유명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이라 할 베드로와 바울이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맞붙은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1. 초대교회의 위기: 안디옥 스캔달
안디옥 스캔달은 초대교회의 위기였습니다. 신약성경은 초대교회의 상세한 역사 기록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구원에 관하여 반드시 필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성령님께서 사도들을 감동하사 기록하게 하신 책입니다. 오늘 이 사건도 단순히 두 사도의 마찰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과 우리가 믿은 복음의 내용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디옥 스캔달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을 약간 알 필요가 있습니다.
A. 안디옥 교회(행 11:19~26)
첫째는 이 사건이 일어난 안디옥 교회에 관한 배경 지식입니다. 초대교회에 스데반의 순교가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대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그 많던 그리스도인들이 주변의 유대와 사마리아 등지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행 8:1). 그들은 각지로 흩어져서 비록 피난민의 처지였지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이 꽤 멀리 북쪽으로 나가서 베니게와 구브로 섬 그리고 안디옥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1:19). 이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대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구브로(가령, 바나바의 고향이 지중해의 섬 구브로였습니다, 행 4:36)와 구레네(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가운데 북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그날 베드로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행 2:10) 출신의 몇 사람들이 처음으로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데 ‘주의 손이 함께 하사’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행 11:20~21). 이것이 소위 안디옥 교회의 설립 역사입니다.
당시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대도시로서 로마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였고 로마 제국의 속령인 시리아 주의 수도였습니다. 때문에 어느 도시보다도 안디옥은 그 주민 구성원들의 인종에 있어서나 문화에 있어서 국제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 최초로 이방인이 대다수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는 이 이방인 교회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듣고 적잖이 당황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신뢰하는 바나바를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조사를 하였고 그들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친히 목격하고 많은 이방인 교인들을 격려하였습니다(행 11:22~23). 이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머물면서 복음을 가르쳤고 그의 됨됨이와 가르침은 큰 열매를 맺어 큰 무리가 더해지는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행 11:24). 그러면서 바나바는 너무 교회가 성장하는 바람에 아마도 자기 혼자서 목회를 하기에는 힘이 부친다고 생각했던지, 10여년 전에 회심을 한 유명한 박해자 사울이 안디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인 다소(안디옥에서 약 20 miles)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다소에 가서 사울을 불러와 안디옥에서 그 두 사람은 함께 수많은 이방인 초신자들인 안디옥 교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의 사역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열매가 있어서 최초로 안디옥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누가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행 11:25~26). 안디옥 교회는 이렇게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명실상부한 위치를 가지며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이나 바나바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도 인식하지 못하였지만, 안디옥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곧 이방 기독교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될 모든 준비를 갖추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B. 베드로의 복음에 대한 이해(행 9:43~11:18)
우리가 안디옥 교회의 설립 역사에서 잠깐 엿볼 수 있었듯이 초대 기독교는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수많은 유대교 순례자들이 붐비던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과 함께 놀라운 역사적 출발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성도들 뿐 아니라 사도들의 생각 속에 기독교는 유대교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구약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디옥에 이르러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게 되었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였을 뿐 아니라 교회가 설립되고 또 성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이루신 일들임에 분명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도들 중에 수장격인 베드로가 받은 계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1~12장)는 사도 베드로의 전도 사역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있고 후반부(13~28장)는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이 중심입니다. 이것은 또한 유대인 중심의 전도 사역과 이방인 중심의 전도 사역으로도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이 구분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도행전 9장에서 11장에 걸쳐 나오는 베드로가 받은 계시와 고넬료라는 로마 백부장의 회심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욥바라는 항구 도시에 사는 시몬이란 제혁업자(tanner)의 집에 있을 때였습니다. 물론 베드로는 유대인들 가운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낮 12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시몬의 집의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그는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게 되는데 하늘이 열리고 보자기 같이 생긴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거기에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는 율법에서 정한 먹어도 되는 정결한 짐승 뿐 아니라 부정한 것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하늘의 음성이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완강하게 ‘그럴 수 없습니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언제든지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음성이 다시 들리는데,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거절한 것 같습니다. 세번째로 같은 음성을 들은 후에 그 보자기 같은 그릇은 하늘로 다시 올라갔고 베드로는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행 9:43; 10:9~16).
베드로가 그 환상의 의미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고넬료란 로마 백부장에게 먼저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베드로를 청하라고 해서 고넬료가 보냈던 사람들이 마침 그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때 성령의 ‘가라’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가 있는 가이사랴로 갔고 거기서 고넬료와 모인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동행한 유대인 신자들은 이 일로 인하여 매우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와 동일한 역사 즉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고?이것은 그들을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다는 뜻입니다?수일 동안 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행 10:44~48).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역사에 최초의 이방인 고넬료의 회심이지만 사실, 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베드로의 회심이라고 말할만큼 베드로의 복음 이해에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의 내용의 중요성입니다.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수일을 더 머무는 동안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서 거리낌없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경계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 것입니다.
C. 초대교회의 여전한 난제: 식탁의 교제(행 11:1~3; 15:1; 21:20~21)
이렇게 이방인이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은 처음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 회심 사건 이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런 소식을 들어 알고 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할례자들)이 베드로를 비난하였습니다(행 11:1~2). 그 비난의 핵심은 놀랍게도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내용이 아니라 베드로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인 무할례자의 집에 들아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행 11:3). 이것이 초대교회가 가진 문제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이방인의 구원까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설명하듯이 성령이 그들에게 분명하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행 11: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을 감히 유대인이라고 해서 막을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행 11:17). 여기까지는 OK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았습니다. 바로 식탁의 교제의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왜 식사의 문제가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유대인의 음식과 식사 규정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중요성을 가진 문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먹는 것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느냐 하는 것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규정해 주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그토록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셨다는 것을 문제로 삼았던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도,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유대인 신자가 식사를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허락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방인이냐, 유대인이냐 하는 정체성이 신자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정체성 보다 중요한 일차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살펴야할 배경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베드로(게바)의 외식(hypocrisy)
이야기의 배경은 한참 바나바와 바울의 사역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이방인 교회인 안디옥 교회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이 아니라,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베드로가 바울의 사역지인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A. 베드로의 습관: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12b).
12절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먹다’는 동사의 헬라어 시제로 보아 정확하게 번역하면 ‘게바는 이방인과 함께 먹는 습관이 있었고 그 때도 습관대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의 환상과 고넬료 회심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믿음으로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것은 단지 전도와 구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제의 문제이기도 함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베드로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먹은 것은 성찬이 아니었겠는가 라고 합니다마는 그것이 성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식사였는지는 본문으로 볼 때 분명하지 않고 또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 날도 베드로는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잘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B. 베드로의 동료로부터의 압력(peer pressure):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 할례자들’(12a; 행 15:24)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것은 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이들이 도착한 순간이었습니다. 막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아마도 누군가가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다고 전갈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 때 갑자기 베드로는 180도 돌변하여 그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그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유대인들 곧 할례(를 받은)자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전에 고넬료 회심 사건 직후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던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이 사람들은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방인 신자들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의회가 모여 결의한 내용을 편지로 각 이방인 교회에 보내려고 할 때 그 편지의 내용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행 15:24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여기서 ‘우리’라는 주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야고보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로 보건대, 안디옥에 왔던 그 사람들은 실제로는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아니고 야고보의 이름을 팔던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이 얼마나 이 식탁의 교제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저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순간적이고 반사적으로 그는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하던 식사 자리를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베드로의 약점이 또 다시 작용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압력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동료들이 가진 생각과 판단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Peer pressure 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녀를 두려워하여 주를 부인했던 바로 그 베드로가 지금은 할례당을 두려워하여 또 다시 그의 주님을 부인한 것이 된 것입니다.
C. 외식: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2c)
그들을 두려워해서 베드로가 취한 행동은 그 식사 자리를 떠나 물러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러가다’라는 단어는 군사적으로 후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때 복음을 부끄러워 한 것입니다. 한 순간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이기게 되면, 그것이 곧 우리가 믿는 복음을 부인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게 될 때 외식을 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행동을 지금 바울 사도는 ‘외식’을 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외식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hypocrisy 는 헬라어에서 온 것인데, 본래 연극에서 배우들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하는 ‘연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연기를 했습니다. 아닌 척 했다는 말입니다. 그가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가 누군가의 앞에서 자기의 본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가지고 행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신자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시자’들이 등장하자, 그는 그들 앞에서 자기가 믿고 알고 있는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들 앞에서 아닌 척하고 연기를 한 것입니다.
D. 베드로의 외식의 결과(13): ‘바나바 마저도’
그 결과가 너무나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와 함께 이방인 신자들과 더불어 부담없이 기쁨으로 식탁의 교제를 누리던 유대인 신자들이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는 자기들도 베드로와 같이 연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안디옥 교회의 담임 목사라고 할 수 있으며, 유대인 중에서도 레위인이기도 하였던 바나바 마저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을 받아 그 식탁을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베드로 한 사람의 외식은 한 사람의 외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탁월한 지도자 ‘바나바 마저도’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안디옥 교회의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 신자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돌변하는 베드로와 바나바, 유대인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상처를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2등 신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3. 바울의 책망
바울 사도 역시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던 식탁을 떠나 저쪽에 떨어져 있는 사도 베드로에게 모두가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책망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바울 사도의 이 태도는 베드로의 외식 사건보다도 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숨을 죽였을 것입니다. ‘자, 이제 사도 베드로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에 대해서 밝혀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알 수는 없습니다마는, 앞으로 진행되는 바울 사도의 논지에 따라 볼 때 사도 베드로가 그 책망을 겸허하게 수용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AD 65년 이후에 쓰여진 베드로후서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바울을 가리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벧후 3:15b)
짐작컨대 이 위대한 두 사도에게 있어서 이 안디옥 스캔달은 전혀 두 사람 사이를 벌려놓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었고, 또 전했던 복음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왜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대 사도인 베드로를 책망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바울 사도의 동기에 대한 문제입니다.
A. 바울의 동기: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을 위한 싸움’
사도 베드로에게서 늘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던 바울 사도가 사도 베드로의 약점을 발견하였을 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많은 사람 앞에서 베드로를 꺽은 것인가? 아니면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는 성격적 약점이 이 때 터진 것인가?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바울 사도의 동기를 해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안디옥 스캔달을 바울 사도가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들은 이미 복음의 진리 안에서 교제의 악수를 나눈 사이였고(갈 2:9), 바울 사도가 지금 이 사건을 소개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은 복음의 진리로 인하여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유명한 사도에게도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복음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천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 바울 사도의 입장은 베드로라고 하는 대 사도 앞에서도 동일한 것이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표면상의 문제는 이방인과 유대인 신자들의 식탁 교제의 문제였지만, 사실 이것은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거저 주어지는 은혜의 복음을 위한 싸움이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B. 바울의 책망의 역사적 중요성
베드로가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과의 대결을 회피하기를 원했고 대결을 싫어했다면, 바울은 달랐습니다. 바울 사도의 태도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감당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지켜내겠다고 한 것은 평화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였습니다. 그는 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일치된 삶이 나타나지 않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이를 따라가는 지도자인 바나바와 다른 유대인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악한 영향을 주는 나쁜 본보기를 깨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사도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이 안디옥 스캔달을 기점으로 당시의 많은 교회들은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로 분열되었거나 ‘한 주가 아닌 두 주님을 섬기는 성찬’을 대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개인적인 죄는 개인적인 책망을 필요로 하지만, 공적인 일은 공적인 노출과 책망이 필요할 때가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딤전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거의 모든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단인 아리우스주의를 포용할 때 다섯 차례나 주교직을 박탈 당하면서도 그것을 대적함으로써 복음의 진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일과, 마틴 루터가 로마의 교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생명을 걸고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그에게 도전장을 내민 것을 인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4. 교훈과 적용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 죠이선교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 시대의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A. 그리스도 안에는 구별이 없다(갈 3:28).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의 뒷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그리스도 안에는 구별이 없습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여러분이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회의 신분과 구분과 차별을 넘어서서 우리를 그 진리 안에서 하나로 만들어주는 능력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더 소중한 것일 수는 없습니다. 죠이선교교회는 한국교회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학력, 학교, 출신 지방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눌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동창회가 교회보다 편하게 느껴지신다면, 동네 사람들과의 모임이 교회보다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어준다면, 여러분이 한인회나 기타 모든 다양한 동질 그룹들 속에서 교회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소속감과 친밀감을 느끼신다면, 여러분은 복음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거나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나눌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우리가 세상의 기준으로 기호와 취미와 학력과 지방색과 학교 등으로 신자들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가 교회라는 사실을 행동으로써 부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책망을 받아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의 실수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 있는 대상을 두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일 여러분께서 여러분의 일터의 현장이나 가정에서 하나님과 복음을 위해 굳게 서있지 않다면, 우리는 매 주일 교회에서 베드로처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여러분의 일터의 현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동료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복음을 부인하지 마십시오.
C.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부인하면 행동으로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나 바나바는 이방인 신자들이 2등 신자들이라고 생각하거나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했다. 이것이 바로 연기하는 것이고 외식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행동이 말보다 더 크게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베드로의 이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지를 말한 후에, 서로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복음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형제와 자매들과의 교제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행동으로써 복음을 부인하는 셈입니다. 여러분, 혼자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면 우리는 부수적으로 그리고 자동적으로 형제와 자매들과 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그들과 교제의 식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는 생활입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의 삶 속에는 그 복음의 진리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있고 싶은,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싶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교제의 열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예배와 코이노니아는 동일하게 중요한 짝을 이루는 신앙의 실천인 것입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실천에 대한 싸움을 바울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문제는 두 복음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동일한 복음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D.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닌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어떤 댓가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날의 교회에 이것처럼 중요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평화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가치가 되었습니다. 아무도 평화를 깨는 것을 달가와 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라도 할 채비가 된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서 평화를 깰 준비가 되어있는가 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여러분은 복음의 진리를 타협하면서 평화를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거짓 평화를 깨는 자리에 서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역사의 길을 걸어갈 때, 안디옥 스캔달과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때 여러분은 평화를 추구하겠습니까, 아니면 복음의 진리를 지키시겠습니까? 비참하게도 긴 교회의 역사 속에서 많은 교회는 성경의 원리를 따라, 복음의 진리를 따라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덤으로부터 부활하심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죄용서를 얻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또는 영생의 소망을 얻기 위해서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 즉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입니다. 이것을 믿어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께 의탁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것이라도 더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더하는 것처럼 보이게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위한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면책
갈 2:11-16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 도 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말했습니다.더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임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사도 된 사람들과는 만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대등으로 대면하며 그들의 공적인 인정을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아마 신약 성경 가운데서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일화 중 하나라고 생각이 됩니 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지도자격인 사도가 얼굴을 맞대고 완전히 충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은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에서부터 안디옥으로 바뀌었는데 안디옥은 이 문단의 초반부에서 언 급된 수리아, 아시아까지의 수도요, 이방에 전도를 시작한 곳, 그러니까 선교사를 처음으로 파송 한 곳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맨 처음 그리스도인 이라고 불리게 된 곳도 안디옥입니 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나누 었습니다. 그랬는데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바울은 면전에서 베드로를 공박했습니다. 베 드로나 바울이나 모두 그리스도인들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용서를 받고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임을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두 사람이 다 예수님에 의해 특별히 부 르심을 받고 사도로 위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교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지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다 하나님에 의해서 능력 있게 사용되는 종들이었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은 크게 나눠서 두 부분으로 볼 수 있는데, 첫 부분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은 바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인데 사도 바울이 그의 면전에서 사도 베드로를 공박하고 반박하며 엄히 책망하고 비난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그 자신을 구별되게 행했고 더 이상 함께 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장 1∼10절절 말씀대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베드로나 그 밖의 예루살렘에서 전하는 복음의 이해에 있어서 같았습니다. 본문 14∼16절에서도 그것을 반복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 아 베드로가 그의 교훈에서 복음을 부인했던 것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면박했습니까? 본문의 내용으로 보아 베드로의 복음에 대한 실수는 그의 행실에 있는 것 같습니다. J. B. 필립스의 말에 의하면 그의 행동은 복음 진리 에 모순이 있었다 고 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무슨 일을 했습니까? (11∼13절)베드로가 처음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방 신자들과 함께 먹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입니다. 그것은 단 한 번만 먹은 것이 아니고 반복하여 습관적으로 먹은 것을 가리킵니다. 아마 베드로는 사도행전 10 장 9∼28절에 나타난 대로 이방인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 고 하신 주님의 환상에 의해, 또한 안디 옥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이 교제하는 아름다운 분위기에 감동되어 자신도 이방인 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먹었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사도 베드로가 욥바에서 경험한 사실을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어느 날 오후 베드로가 욥바의 어느 집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인데 비몽사몽 중에 환상으로 그에게 보여준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네 귀퉁이를 매어 땅에 드리워진 보자기를 보았습니다.그 안에는 각색 불결한 것들, 새나 짐승이나 파충류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 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제가 속된 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환상이 세 번이나 계속 강조되었습니다.
이래서 베드로 사도 는 백부장 고넬료가 보낸 이방 전달자를 맞아 그의 집으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그 당시 유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이 이방 사람 을 집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날의 환상에서 확 신을 얻고 유대인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위반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환상의 지시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줄 내가 아노라. 믿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이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를 받고 교회 안에 들어오 는 것을 환영하는 일에 베드로가 합의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이방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모임에 같이 참예하던 베드로가 고넬료의 가정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일을 잊어버 렸을까요? 아니면, 그가 하나님이 당시 그에게 준 계시로 되돌아갔다고 생각합니까? 절대로 그렇 지는 않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베드로의 마음이 변했다고 하는 암시 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는 왜 안디옥에 있는 이방 성도들과의 교제를 철회했을까요? 이 대답을 사 도 바울이 본문 12절에서 합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 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하였습니다. 헬라 원문대로 직역하면 물러가고, 그리고 스스로 떠나가더라 입니다. 렌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역시 두 낱말이 미완료 과거형인 것은 그때 베드로가 그 유대 인 방문객들에게 노여움을 줄 교제에서 서서히 물러가면서 우물쭈물하고 눈치를 보는 것을 사실 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미완료 과거형은 그가 단호히 물러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물러간 계속적 동작을 표시하는 것으로 베드로의 비겁한 태도를 지적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는 한이 있어도 부인하지 않겠노라 고 맹세했 었지만 예수님이 막상 고난당하시는 것을 볼 때 어린 비자 앞에서도 주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적이 있는 비겁한 성품의 소유자입니다. 센키빗츠의「쿠오바디스」(Quo Vadis)에 보면 베 드로는 말년에 교회의 핍박이 일어날 때 견디기 어려워 로마성을 떠나서 피하러 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Quo Vadis Domine)? 나는 네가 지금 버리고 가는 로마를 향해 가노라. 베드로는 이 말씀을 환상 중에 듣고 로마로 되 돌아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때 역시 베드로가 약해진 또 한번의 경우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베드로를 바울은 엄히 책망했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엄했지만 순수했습니다. 베드로와 다 른 사도들이 외식으로 행하긴 했지만 개인적인 신념에서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 의 식탁에서 물러난 것은 무슨 신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한 일은 아니었고 어떤 작은 압력 단체를 두려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도 예루살렘에서 압력을 받았습니다.그러나 그는 그 압력을 버티고 이겼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그만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하녀를 두려워하여 주를 부인했 던 베드로가 이제는 할례당을 두려워하여 또 다시 그의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하여 복음을 믿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의 행실은 복음과 일치되지 않았 습니다. 베드로는 그 확신의 용기가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서 실제로 모순을 자아냈 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권력에, 금력에, 세상 정욕에, 명예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습니까? 그러면 베드로가 이렇게 함으로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본문 13절을 보세 요.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라이트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외식은 모든 것이 씻겨 내려가게 하는 홍수와 같다. 예루살렘에서 그 와 함께 견고히 섰던 바울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선교 동지인 바나바까지도 이제 안디옥에서 그렇 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일에 그 당시에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해서 바로 잡지 않았다면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가 유대인의 침체 상태로 흘러 들어가 그대로 악화되었거나 한 주가 아닌 두 주의 성찬에 참예하는 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의 기독교와 유대인의 기독교 사이에는 영원한 틈이 생길 뻔했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에게 저항하는 바울의 놀라운 담력은 복음의 진리와 교회의 형제 관계를 모두 보전시켰습니다. 이 구절은 사실 베드로의 권위에 큰 영향을 주고 베드로를 직접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법왕의 무오설에도 치명적인 타격이 됩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여러 가지로 변명합니 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여기 나오는 게바는 베드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오리겐이나 제롬은 두 사도의 대립은 유대주의자들을 경계하기 위해 미리 짠 연극이었다고 합니다. 혹은 어 떤 이들은 바울과 베드로의 문제는 일시적이고 큰 문제는 아니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왜곡되게 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본문의 분명한 사실을 오히려 왜곡되게 해석하는 것일 뿐 입니다. 베드로든 누구든 과오를 범할 수 있고, 또 과오를 범한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외식은 사람의 선한 정신을 은폐하여 부패시키고 나아가 전염병처럼 다른 사람에게 파급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대사도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여기 남은 유대인 이란 안디옥에 있던 유대인 신자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베드 로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하고 있었고 무조건 거기에 맹종했던 것입니다. 여기 바나바도 했는데 바나바까지도 라는 말입니다. 바울과 더불어 제 1차 전도 여행을 했고 복음의 자유를 가르치는 예루살렘총회 때에도 바울과 행동을 같이 하여 율법주의자의 부당한 기반을 타파한 바나바까지 이때 베드로의 외식에 감염이 되어 이방 사람을 멀리하는 태도로 나왔습니다. 그러니 그밖의 유 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실로 중대한 위기였습니다. 모처럼 쌓은 복음의 자 유탑은 무너지고 예루살렘총회에서 패배한 율법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은 이방 교회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이 소식은 곧장 갈라디아 지방으로 파급 되어 그곳의 율법주의자들에게 활기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신앙을 교란시켰고 그것 때문 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사도 바울이 분연히 일어나 대선 배인 베드로를 면박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째로,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14∼16절)본문 11절에 보면 바울은 그의 면전에서 베드로에 게 면책하였다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이것을 반항했다, 혹은 대항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극적인 행동의 이유는 베드로가 비난받을 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베 드로가 분명히 잘못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를 책망했습 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누구인가를 따지거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그보다 먼저 사도 된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분명히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교회의 기둥 가 운데 하나라는 사실도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잊어버리지도 않았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베드로를 면전에서 공박했고 위축되지 않고 공공연히 원리를 논했습니다. 바울더러 조심해서 하라는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학상의 수치를 공적으 로 드러내는 것을 피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논쟁을 조용히 하려고 하거나 사적으로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오는 압력을 피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논의는 사적인 것이었으나 안디옥에서 일어난 것은 공적이어야만 했습니다.이방 신자로부터 베드로가 물러간 것은 공적인 스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를 공적으로 반박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의 베드로에 대한 반박은 그의 면전 에서 (11절) 모든 자 앞에서 (14절) 했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교회가 어떻게 해서라도 피하려고 하는 바로 그 공공연한 충돌이었습니다. 어떻게 바울이 함께 사도 된 베드로를 감히 공박할 수 있으며 그것도 공공연히 할 수 있었습니 까? 그의 성미가 급해서 그랬습니까? 그의 혀를 억제하지 못해서 그랬습니까? 바울의 성품이 논 쟁을 좋아해서 그랬을까요? 그가 베드로를 라이벌로 간주하고 깎아 내릴 기회만 노렸다가 실수를 하니까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울은 베드로에게 결핍되어 있는 중요한 원리를 분간시켜 주기 위해 그렇게 행했습니다. 그는 문제가 되고 있는 신학적 원리가 하찮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사소한 문제가 아닌, 기독교 교회 중 가장 중요한 문 제에 부딪쳤습니다. 베드로는 누구며, 바울은 누구입니까? 하늘로부터 온 천사는 누구입니까? 칭 의 교리에 해당한 모든 피조물들이 무엇입니까? 무엇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우리는 밝은 빛 안에 거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거기에 대해 경시한다면 우리는 가장 비참한 암흑에 있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기 문제가 되어 있는 신학적 원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본 갈라디아 서 2장에서 두 번씩이나 복음의 진리 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에서도 문제가 되었으나(5 절), 안디옥에서도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14절). 바울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사 람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았다고 선언함으로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는 바울의 영적 통찰력을 주의해 보세요. 복음의 진리 는 바르고 좁은 길을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 는 그것을 충실히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거기서 빗나갔습니다. 그러면 복음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를 읽으셨다면 그 답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던 우리 죄인들이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어떤 행위나 공로에서 가 아니고 그의 온전한 은혜와 자유, 그리고 분에 넘친 호의에 의해서 용서함받고 영접받는다는 것이 바로 복된 소식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복음의 진리는 본문 15∼17절에서 계속 설명하는 대로,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써만 얻어지는 칭의의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빗나가는 것은 그대로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는 한 번도 유대주의자들에게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복음의 진리가 보전되게 하려 함이라 고 2장 5절에 말씀했습니다.
이제 안디옥에서도 복음에 대한 동일한 열광적 충성에서 그는 베드로가 행동으로 실수를 했기 때문에 그의 면전에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베 드로를 책망하는 것을 기쁨으로 한 것이 아니요, 그는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예의 없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형제 사도에게 공공연히 창피를 주면서까지 어쨌든 복음을 방어하 고 견지하려고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공중 앞에서 면책을 받은 것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열두 사도의 머리 며 그리스도로부터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해서 그를 절대시하고, 또 베드로를 직접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법왕의 무오설에 대한 결정적 타격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법왕 한 사람에게 묶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감탄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 바울의 이와 같이 날카로운 면 책에도 베드로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후배 사도에게 이렇게 무안 할 정도로 면책을 받으면서도 어떠한 사적인 감정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후대에 바울의 사도권 을 높이 천거한 바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절에 보면 주님의 날을 기다리라 고 하면서 이 말은 사도 바울, 사랑하는 형제도 그 받은 지혜대로 이같이 썼다 고 하였습니다. 만일 베드로가 이때 인간적인 감정으로 바울과 대립되었다면 교회는 처음부터 베드로파와 바울파로 분열이 되었 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의 주장이 무엇입니까? 본문 15∼16절을 보세요.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 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 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노라. 이 말은 안디옥에서 바울이 베드로에게 한 말의 일부입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죄인을 영접하시며, 그리스도의 사역은 십자가에서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이든, 이 방 사람이든 똑같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죄 문제에서만은 어떤 구별도 없 으며, 그러므로 그들을 구원하는 수단에도 어떤 구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만을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방 법으로 의롭게 하시고 그들 사이에 어떤 구별을 두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신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누가 막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영접하시기 위해서 할례를 요구하지 않으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례를 강요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영접하는 사람을 사람이 거절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구로 삼으시는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친구 삼는 것을 거절하겠습니까? 이 원리가 로마서 15장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 자신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알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행했으며, 칭 의를 받기 위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 이상 유대인의 음식 먹는 습관을 조사하 지도 않았습니다. 14절에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고 하였습니다. 안디옥에서의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충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일시적 이고 개인적인 사건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문제는 오늘 교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장소는 다릅니다. 참여자도 다릅니다. 논쟁의 근거도 다릅니다. 그러나 문제의 기본 핵 심은 아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들이 영접되는 것은 전혀 행위에서가 아니고 다만 믿음에 의해서이다 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따라서 살 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는 것, 그것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 다.우리는 복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어서 실수를 범했습니다. 비겁했습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베드로의 실수를 반 복하고 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어떤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 (sola fide)에 있 습니다. 하나님도 요구하지 않으시는 사실을 사람이 요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독선입니다. 우리는 독선적인 자세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겠습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흔들려는 압력 단체에게 대항해야겠습니다. 모든 기독교계가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포용할 때 전 세계에 대항한 아타나시우스처럼, 공중의 새도 떨어뜨린다는 교권을 가지고 있던 교황에게 감히 도전한 마틴 루터처럼 복음의 진리를 반대하는 어떤 세력에도 항거하는 데 망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의 믿음을 지킵시다.
복음의 진리
갈 2:11-21 / 이삼규 목사
어떤 젊은 목사가 대학 교회에 부임하여 몇 주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배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대학생들과 교수들로서, 특별히 지식이 많은 교수들 앞에서 설교를 하자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목회 경험이 많은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예. 교육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교육학 교수가 보이고, 역사에 대한 예화를 들려고 하면 역사학 교수가 보이고, 화학에 대한 예화를 들려고 하면 화학 교수가 눈에 보입니다. 또 문학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국문학 교수와 학생들 눈치가 보입니다."
이에 경험 많고 신실한 아버지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간단한 문제를 갖고 괜한 고민을 하는구나."
"간단한 문제라니요 ?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그래. 간단한 문제이고말고. 앞으론, 설교를 할 때 아무 신경도 쓰지 말고 복음에 대해서만 설교하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님에 대해서만 설교하려무나."
오늘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바로 알고 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몇몇 유대인 신자들이 외식하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음으로 바울에게서 책망을 받은 사건이 나타납니다.
1.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않은 베드로(11-14절)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 최초로 이방에 세워진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이방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담임목사로 파송하여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을 돌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가 너무나 급속하게 성장하므로 바나바 혼자 감당할 수 없어 바울을 불러서 공동목회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은혜 가운데 성장을 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사도를 만나서 그로부터 직접 말씀을 듣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기둥과 같은 베드로 사도가 왔기 때문에 베드로를 초대하여 대접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으로부터 사람들이 그 현장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파송 받은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앉아서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는 친밀한 교제를 하다가 율법주의자들인 그들이 오자마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간 것입니다.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까지 외식적인 행동에 유혹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키던 율법주의자들 혹은 바리새인들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개처럼 취급되어도 좋은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들이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징표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 할 수 있습니까?’이런 고발과 비난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베드로는 그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 위선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하게 되니까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까지도 외식적인 행동에 유혹을 받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저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베드로 자신이나 바울이 전하여온 영광스러운 복음의 진리를 근본적으로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성령의 지시로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였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들에게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지만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어서 유대인이라는 장벽을 뛰어 넘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오순절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그들에게도 임하였던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 물로 세례 주는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명하여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하였습 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였으나 유대인의 높은 장벽을 뛰어 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외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의 진정한 코이노니아(교제) 짓밟는 것이 되며,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중대한 벽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한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자 앞에서 게바를 책망하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의 책망(14절)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그대로 묵과할 수 없었던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된 행동을 교정시켜 모든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의 바른 진리 안에서 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베드로와 바울을 비교해보면 감히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나이로 보아도 그렇고 사도가 된 순서로 보아도 베드로는 바울보다 대선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분연히 일어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베드로와 개인적인 시비를 가리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베드로를 무시하려는 마음도 전혀 없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인물로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9절). 문제는 이것이 교회의 운명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중대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에서 바울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바울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베드로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바로 잡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개적인 책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갈 2: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베드로가 바울의 책망을 듣고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요? 바울의 표정을 바라본 베드로는 처음에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얼굴은 수치심으로 빨개졌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탈취해 가려고 했던 이 율법주의자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큰 죄였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록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들어 쓰시는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행적은 한참 과거로 회귀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찍 뭐라고 하였습니까?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이미 목격하고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음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자신들에게 임한 동일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누가 세례줌을 막으리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행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 15: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토록 놀라운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한 베드로가 아닙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과거 율법주의로 회귀한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와 타협을 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잘못된 결과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할 의무와 책임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진수가 무엇입니까?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3.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진수(15-21절)
1)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15-16절)
①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할 육체가 없습니다. 율법은 99%의 순종도 용납하지 않는다. 100%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약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약2: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②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것은 모순된 행동입니다(17-18절).
1>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이 자신의 행위로써 의를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2>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죄를 지으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3>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오직 그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고후1:12)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4>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18절)
①헐었던 것-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으려고 했던 과거의 바리새적인 율법주의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②다시 세우면-율법을 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린 자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그 율법을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③누구든지 은혜로 구원받고 회개한 후에 율법주의에 빠진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범법행위입니다.
(히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히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히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3)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란?(19-21절)
1>바울은 과거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애썼으나 오히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고 전적으로 그를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2>이러한 삶은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죄의 권세로부터 분리되는 자유로운 삶이요,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새로운 삶입니다(고후5:17).
3>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맙시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떤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행함은 지푸라기와 같은 것입니다. 썩은 동아줄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는 순간 영원한 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닥다리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그 사닥다리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십니까? 베드로 사도나 바나바와 같은 위대한 주의 종들도 외식하고 그 외식에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겠습니까? 사람의 심리는 뭔가를 해야 의롭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잘못된 생각을 완전히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십시오. 그러면 살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바로 우리 성도님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신칭의
갈 2:15-21 / 김형익 목사
1. 칭의 교리: 기독교의 심장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교리이며, 복음의 핵심이고,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말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교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칭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크랜머는 말했습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이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낸다.”
A. 칭의 교리는 최고로 압축된 복음이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말할 때, 크게는 성경 말씀 전체가 다 복음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전체를 줄이고 압축하고 요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칭의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가르침 위에 존재합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 복음의 토대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이 됩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여기 칭의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반대말은 바로 ‘정죄’(condemnation)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무죄 선언은 어떻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 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죄 선언을 얻기를 원해서 열심을 내서 살다가 그 완벽하신 재판장 앞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기의 열심과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값없이 그 무죄선언을 얻게 되고 의롭다는 선언을 듣게 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우리 시대 교회의 문제: 무지(ignorance)와 냉담(apathy)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무지와 냉담입니다. 영어로, ‘I don’t know and I don’t car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그리고 교회 역사 속의 모든 참된 신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그것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믿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전혀 없고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이런 질병이 있지는 않습니까? 고치고 돌이켜야 하는 문제입니다.
2.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 ‘의롭다 함’(justified)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입니다.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에 ‘의롭다 함’을 받는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이생에서 잘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라는 최종적 선고를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잘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통도, 환난도, 질고도 겪었고 입은 상처도 많지만, 하나님께 의롭다는 선고를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산다면 그는 잘 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선고를 그 날에 가서야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날에 있을 선고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괜찮게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느냐 입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jusified)라는 단어가 무려 5번 나오는데, 16절에 세 번, 17절에 한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A.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기’때문입니다. 성경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선언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3:10).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의롭지 않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죄 선고를 받는 것,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 외에 없습니다.
B.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여기에 길이 오직 하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신칭의의 교리이며, 바울 사도가 오늘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 논리를 잘 들어보십시오.
3. 위대한 선언(15~16)
오늘 본문의 처음 두 절인 15절과 16절은 하나의 선언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절부터 20절은 이 가르침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또 거기에 대답을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위대한 선언을 봅니다.
A.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보통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하여 쓰던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 두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이방 죄인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그들이 언약 밖의 외인들이고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이 선민의 모든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용납된다는 점에서는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즉,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는 구원에 있어서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도덕군자나 살인강도나 구원을 받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군자가 살인강도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마 일반적으로 우리를 포함하여 인간이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요? 우리의 태생, 우리의 행위, 우리의 공로 등이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너무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B.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바울 사도가 생명을 걸고 주장하며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우쭐대고 싶어하는 자존심을 부추겨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산산조각냄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바로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16절에서 세번의 거듭된 진술을 함으로써 바울 사도는 이 교리를 설명합니다.
i. 일반적(general) 진술 (16a)
처음에는 일반적 진술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 모두가 동의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복음의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일반적 진술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개인적(personal) 진술 (16b)
그래서 이 법칙, 이 원리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개인적 진술을 전개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대목입니다. 헬라어에서 믿는다는 단어는 목적어 앞에 전치사를 동반하는데 into에 해당하는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위탁(commitment)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그분 안으로 내가 들어가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그에게로 달려가 자비로우신 주님을 부르는 실제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위탁했습니다. 이것이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을 받을 만한 의가 없음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선함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 저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습니다. 이제 저의 삶을 저의 능력과 자존심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 안에 들어가서 나의 피난처를 삼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의로우심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 자신의 힘, 자존심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사십니까?
iii. 보편적(universal) 진술 (16c)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느니라”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보편적 진술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 법칙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에도 칭의의 개념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칭의는 ‘이행칭의’(以行稱義)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말하기를, 이행칭의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C.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칭의
칭의에 대하여 종교개혁 당시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설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칭의의 교리를 잠시 정리하기 위해서 제가 이것을 읽어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는다. 비록 나의 양심이 고소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심각하게 범하였고, 그 중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았으며 모든 악을 향하여 기울어져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단지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만족과 의와 그리스도의 거룩을 허락해주시고 전가해 주십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는 것 처럼, 마치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다 완전하게 이룬 것 처럼 해주시는 것인데, 이것도 내가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반론: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다(17~18).
이런 칭의의 교리는 바울 사도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반론에 부딪혀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다’라는 반론입니다. “마지막 심판날에 있을 선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선하게 살아서 그날을 준비하라”고 해야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칫 칭의의 교리가 마지막 심판날의 선고를 앞당겨서 무죄로 선언해주면 오히려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고 방종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 즉 참된 구원을 얻은 사람의 삶은 결코 방종으로 이끌려 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구원얻은 사람이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17절과 18절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사람의 도덕적 책임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반론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그의 단호한 부정문으로 대응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였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참 설교는 늘 그것에 대해 제기되는 이런 비난(도덕률폐기론)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만일 구원의 복음에 대한 내 설교와 표현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자신이 헐었던 것 즉, 유대교가 가르치는 이행칭의의 교리,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넘어졌던 문제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나서, 마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혹을 받고 있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5. 바울의 4가지 주장(19~20)
바울 사도는 19절과 20절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네 가지 분명한 선언을 합니다.
A.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19)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파괴되었고 나는 그런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구원의 방법,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위해서 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께만 자신의 신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며 율법이 우리를 노예로 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율법을 향하여 죽어야만 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0a).
우리는 여기서 아마 바울 사도의 기록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애송되는 구절인 갈 2:20로 들어갑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 두번째 선언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첫번째 선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밖에 머무시는 한,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사실 이 말씀의 원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강도들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이것은 바울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성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한 흑인 노예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C.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20b).
바울 사도는 여기서 기독교의 완전주의나 신비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삶에서 완전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경지를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연합되게 하고 묶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D.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20c).
비록 칭의의 선물을 받았어도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삽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삶도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또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은 결코 한 순간의 결정이나 과거의 경험만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이신칭의를 오해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결점이었습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신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이 믿음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는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상이십니다. 무엇이 구주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사랑하사!’ 이것이 바로 아들을 죽게 한 동인입니다. 그 어떤 물리적 힘이나 강제력 또는 어떤 다른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버리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래 전에 애창되던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한 것입니다.
6. 십자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21)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서, 선한 사람이 됨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욕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신뢰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내가 그토록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는 최종적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즉,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갈 2:15-16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갈라디아서의 중심이고 복음의 핵심이며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킨 힘의 원천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15절에서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말합니다.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렇다고 유대인이 하나님 보시기에 완벽하다거나 죄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이방인라고 무조건 도덕적으로 악한 백성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백성인 이스라엘의 자손인데 반해 이방인은 그 언약의 밖에 있는 족속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표지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있고 이방인은 그 율법을 모른다는 것이 그들 사이의 차이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죄인이라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알지 못하고 따라서 지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유대인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하는 기준은 될 수 있으나,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구별되는 되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님을 사도 바울은 역설합니다. 본문 16절을 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모든 율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실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는 것은 무슨 대단한 선행을 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설 수 있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제안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안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는 것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운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와의 바른 관계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든 아니든, 자유인이든 아니든 사회적 신분이나 남녀노소의 차별 없이 의인이라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쓰기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1-22) 하고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27-28) 합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입니까?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복음을 잊어버렸습니다. 로마천주교가 평신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고 성경을 읽지도 못하게 하다가 아예 성경책 자체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학적 변질과 함께 윤리적 부패가 교회에서도 신자들 사이에서도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중세 말기에 유럽사회는 크나큰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끊임없이 전쟁이 빈발하고 또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기근 같은 재난도 연달아 발생했습니다. 게다가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퍼져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슬람 터키의 군대가 침공해 들어와 비엔나 성문 앞까지 이르렀습니다. 결정적 위기는 교회의 분열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교황이 둘이 되고 한 때는 셋까지 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교회가 갈라진 이후로 죽어서 천당에 간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제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모두 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중세 말에 나온 미술작품 속의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죽음의 공포에 짓눌린 표정들이라고 하는 미술사가들은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 앞에서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의 때가 되었으며 최후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심각하게 대두된 것이 구원의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어디서 구원의 확신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로마천주교가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면죄부교리였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바치고 면죄부를 사면 죽은 후 연옥에 가서 지낼 기간을 탕감 받을 수 있다는 교리입니다. 이 면죄부교리 밑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공덕사상입니다. 선행을 많이 해서 공덕을 쌓으면 자기의 구원을 이룰 수 있을 뿐 아니라 자기의 구원을 이루고도 남을 만큼 선행을 아주 많이 행한 성자들의 잉여분의 공덕을 교회가 비축하고 있으며 헌금으로 선행을 대신하는 사람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비판한 <율법의 행위로 인한 구원>사상이 그대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런 말도 되지 않는 교리가 어리석은 신자들에게 먹혀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시대에 구원과 구원의 확신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이고 비복음적인 신학을 고발하며 개혁의 횃불을 든 이가 마틴 루터입니다. 루터도 처음에는 로마천주교의 한 수도승이었습니다. 그 또한 중세 말기의 사람으로서 그 시대의 온 유럽이 앓고 있던 구원의 문제로 고뇌하며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수도와 고행을 많이 했지만 구원의 확신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서를 읽는 가운데 그 자신뿐 아니라 유럽인 전체가 함께 고뇌하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한 것입니다. 복음의 재발견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17에서 이미 쓰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한 바 있습니다. 루터는 여기서 <이신칭의>의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이 <이신칭의>의 교리는 사도 바울이 이미 오늘 본문 16절에서 아주 정확히 표명한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구원의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구원자시라”는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구원자시라”는 것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나 로마천주교가 성자라고 부르는 인물들에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중보적 능력이 있다는 로마천주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로마천주교가 그들의 초대 교황이라고 받드는 사도 베드로 자신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는 말입니다. 마리아나 아무리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기도와 찬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기도하며 찬양을 드리는 행위는 우상숭배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것을 가르치거나 실행하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신칭의>교리 즉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라고 하는 교리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율법폐기론입니다. 즉 믿음만 있으면 율법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입니다. 율법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신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우리는 힘껏 지켜야 합니다. 단지 우리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지킬 수 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3:31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구원에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율법을 지키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를 배격했지만 결코 율법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롬7:12에서 쓰기를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율법은 아직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지을 경우 벌 받는 것이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도록 억제합니다. 또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고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기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귀한 말씀을 우리는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2:16)이라는 말씀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잘 조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균형 잡힌 믿음으로 늘 기쁨과 감사와 충성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율법과 십자가
갈 2:15-21 / 정용섭 목사
여러분은 오늘 설교 제목 ‘율법과 십자가’를 확인하고, 무슨 생각이 들었습니까? 각자의 생각이 다르겠지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분이 있을 거고, 저런 정도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별 감동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요. 율법과 십자가의 관계는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토대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알면 기독교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중요한 기독교의 가르침을 오늘 얼마나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긴 하지만, 설교자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차원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여러분을 ‘율법과 십자가’가 가리키는 신앙의 세계로 안내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 여정에서 오늘이 일종의 터닝 포인트로 기억되는 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제2독서인 갈라디아서 2:15-21절에서 바울은 율법 중심의 신앙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강한 어조로 분석하고 비판했습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만 간추려서 읽어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세 번, 19절에 두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그게 다 율법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행해야 할 삶의 규범들을 가리킵니다. 그 내용은 구약성경 중에서 주로 모세오경에 나옵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압축입니다. 율법은 기본적으로 다 좋은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 자체라기보다는 율법을 절대화하는 율법주의, 또는 율법 이데올로기입니다. 그런 신앙이 개인과 공동체를 어떻게 파괴하는지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의 바로 앞 구절인 갈 2:11-14절에서 구체적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것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은 안디옥 교회에서 벌어진 겁니다. 안디옥 교회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거기서 교회 지도자로 활동했습니다.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 머무는 동안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아무런 문제없이 잘 어울려서 지냈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 교회(대표자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파송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밥을 먹던 베드로가 자리를 피했습니다. 이유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이 이방인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서 그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인 것입니다. 어느 장로가 술 담배를 하다가 목사가 들어오자 자리를 피한 것과 비슷합니다. 바울은 이런 행동을 가식적인 것이라고 보고, 베드로를 따끔하게 충고했습니다. 일종의 해프닝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을 언급한 뒤에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의 문제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자세하게 피력했습니다.
율법의 길
이런 논쟁적인 문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할 점은 논쟁의 대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대상이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되 토라, 즉 율법도 지켰습니다. 더 나가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도 토라와 할례를 강조했습니다. 이들의 주장을 무조건 잘못된 거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 안에 자리하고 있어야 안전할 뿐만 아니라 율법 자체가 교회의 질서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신앙성장에 현실적인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십일조와 성수주일을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는 거와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 유대 기독교인들은 현실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너무 과격하게 전함으로써 유대교와 충돌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들과 달리 바울은 과격한 쪽을 선택했습니다. 유대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복음의 본질에 천착한 겁니다. 16절이 중요합니다. 다시 읽을 테니 잘 들어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고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에서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사실 ‘의롭게 되는 것’은 모든 인생의 목표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옳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훨씬 포괄적인 뜻입니다. 자유, 행복, 성공, 기쁨, 구원 등등이 여기에 다 포함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성실하게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영웅들을 살펴보십시오. 아브라함, 요셉, 모세, 그리고 여러 선지자들은 모두 율법을 성실하게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인 차원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실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 잘하고, 사회 규범을 잘 지키고, 모범생으로 사는 사람들은 누가 봐도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람들을 인정합니다. 그런 인정을 받으려고 사람들은 평생 율법의 행위에 매달립니다. 바울은 그걸 부정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b).
근거가 무엇일까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이룰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도 이미 이런 대답이 나옵니다. 시 143:2절은 이렇습니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게 아니라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롬 3:20절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바울이 볼 때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율법 없이 죄에 빠지고, 율법이 있는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죄에 빠집니다. 일상적인 것으로 바꿔 말하면, 법을 잘 아는 법조인들은 법과 함께 죄에 빠지고,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법 없이 죄에 빠진다는 겁니다.
둘째, 율법은 사람을 상대적인 우월감에 빠지게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경건생활을 더 많이 했다거나, 다른 사람보다 도덕으로 더 우월하다는 생각에 치우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을 당연히 죄인으로 여겼고, 더 나가서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못하는 유대인들도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자신들만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도 이상한 사람으로 비쳤습니다. 예수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에 매달려 살았습니다.
마 6:1-18절에는 유대인들의 세 가지 경건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이 나옵니다. 구제, 기도, 금식이 그것입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 세 가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표시가 나도록 열정적으로 수행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할 때 표시 나지 말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마 그들은 구제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도할 때도 거리서 서서 자랑하듯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서 표시 나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라면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을 겁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 중의 어떤 분이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평생 교사생활을 하던 분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자신이 기도생활에 대한 열등감이 많았다는 겁니다. 교사생활에 충실하니 교회의 기도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못했던 겁니다. 개인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옳습니다.
믿음의 길
바울은 의로움을 얻는 데에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실천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허황된 것으로 들릴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다고, 오히려 더 이기적이라고 비판할 겁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만한 구석이 우리에게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도덕재무장 운동을 펼쳐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나쁜 건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그런 운동을 펼친다고 해도 기독교인의 삶이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의 본질만 왜곡시킬 위험성이 큽니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믿음으로써 의로워진다는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신앙의 토대로 돌아가는 게 쉽지 않다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이곳에 앉아 있는 분들 중에서도 바울의 이 말에 실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더 나가서 뭔가 어색하게 느낄지도 모릅니다. 바울의 설명에 좀더 귀를 기울이십시오. 바울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모르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은 자기의 영적 실존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 되었다는 뜻입니다. 십자가 처형 자체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말고도 십자가 처형을 당한 사람은 로마 시대에 많았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일반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거룩한 존재입니다. 그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그를 십자가에 처형한 이들은 율법을 절대화하는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법을 절대화하는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입니다. 종교와 정치를 대표하는 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종교법과 정치법이 악이라는 증거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율법의 무효화 선언입니다. 즉 율법이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바울의 표현은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로 더 이상 율법은 의로움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의 당연한 선택입니다. 아침에 태양이 뜨면 밤에만 필요했던 손전등을 손에서 내려놓는 거와 같습니다.
삶의 혁명전 전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달라진 겁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는 말이 너무 관념적으로 들리지요? 시인이나 예술가는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시와 예술이 자기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겁니다. 바울은 이제 종교적인 업적을 쌓는 방식으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을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저의 입장에 비추어서 바울의 주장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목회에 성공해야 한다거나 교회를 성장시켜야 한다거나, 내 이름을 떨쳐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만 집중합니다. 여기서만 내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목사나 신학자는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저와 똑같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는 이런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을 겁니다. 이런 설명이 실감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율법중심의 삶에 완전히 길들여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율법에 매몰되면 예수 사건, 즉 예수 세계에 들어올 수 없고, 예수 세계가 또렷하지 않으면 율법에 매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완전히 기울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한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둘 수 없습니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존재지향적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없는 거와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경우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이 대목에서 혹시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고 오직 교회생활에만 전념하라는 말이냐, 하고 저의 설교를 오해할 분들은 없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육체’(사르크스)로 살아야 하기에 세상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일상의 삶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것들은 ‘믿음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우리가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좋게 ‘해방’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 해방되었습니까? 그 해방을 향해서 가고 있는 중입니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 자기를 성취해야 한다는 율법의 강요에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까? 말이 해방이지 실제로는 그와 반대되는 길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아주 거대하고 매력적인 힘으로 작용합니다.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도 역시 많은 경우에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바울 혼자 이에 저항했습니다. 그 저항의 단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근거로 율법주의자들과 치열하게 투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일종의 업적주의, 성공주의라 할 율법주의를 극복하고, 거기서 해방 받게 하는 힘입니다. 이 사실을 실제로 믿으십니까? 믿기 어렵습니까? 아예 아무런 생각이 없으십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시기를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b).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갈 2:15-16 / 이한규 목사
<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라 >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받는다. 결국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의를 자랑하지 않고 남을 쉽게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 구원받을 가능성이 크다. 즉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보다 더 구원받을 가능성이 크다.
자기중심적인 행위보다 하나님중심적인 믿음을 앞세우라. 사람이 자신의 죄 값을 어떤 행동으로 갚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갚으려고 하겠지만 죗값은 어떤 행동으로 완전히 치를 수 없다. 예를 들어 살인마의 살인죄를 어떤 선행을 통해 온전히 덮겠는가? 사람을 죽인 후 평생 고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죄는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 한다.
죗값은 인간이 다 갚을 수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죄를 용서해 주는 길을 열어주셨다. 결국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은 용서다. 세상 법도 마찬가지다. 사형수에게 살 길이 그의 선행으로는 열리지 않아도 대통령의 사면으로는 열릴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을 진실로 믿으면 죄를 사해주시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신다.
그 복음의 원리를 “예!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존심을 내세운다. “하나님! 어떻게 아무 행위도 없이 의롭게 됩니까?”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의로울 거야.”라고 생각하고 그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 앞에 더 떳떳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그런 행동을 통해 드러내는 인간의 알량한 자존심을 오히려 더 싫어하신다.
<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
하나님 앞에서 알량한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라. 인간적인 자존심을 내세울수록 하나님은 조만간 비참하고 절박한 현실을 맞이하게 하신다. 성경을 보면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가끔 누군가에게 자존심 상하는 말씀을 하시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자존심을 꺾어야 한다는 도전의 말씀이다. 그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하라. 자존심을 꺾을 수 있는 만큼의 절박함은 오히려 축복이다. 왜 사람에게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한가? 그때 자존심이 꺾이며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에게도 ‘갈멜살 정상에 선 엘리야의 때’만 펼쳐지지 않고 ‘로뎀나무 아래에 앉은 엘리야의 때’가 펼쳐진다. 위대한 영웅이 금방 왜소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성공한 후 무력감과 공허감에 젖을 때도 많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로 부르면 그저 “예!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라. 사랑할 줄 아는 것만큼 사랑을 잘 받을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유대인 율법주의자들은 행위로 자기 의를 자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이방인들을 부르셨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택함 받은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한 사람들이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려야 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구원 얻고 천국 간다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살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짐을 맡기는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원리는 스스로 질 수 있는 짐은 맡고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은 주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고 달려든다고 해서 어떤 일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을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땀을 흘리되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사람들
갈 1:15-21 / 성홍모 목사
맥스 루카도 목사님이 쓰신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목은 “It's not About Me”입니다. 이 말은 저자가 서문에서 한 친구와 나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맥스 루카도 목사님이 어느 여름날 우연히 호텔 로비에서 절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있었고, 목사님은 배가 고팠습니다. 목사님은 샌드위치를 사서 테이블을 찾아 두 사람이 함께 앉았습니다. 목사님이 그 친구에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올해 무엇을 가르쳐주고 계신가?” 그의 대답은 “올해, 그 분이 내게 뭘 가르쳐주고 계시냐고?” 그는 되받아 묻고는 “중요한 건 내가 아니다. 그걸 가르쳐주고 계시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을 루카도는 친구의 말을 오랫동안 묵상하면서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게 되었고, 바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삶의 문제가 더 커진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루카도 목사님을 우리에게 조언하기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의 의제와 시간표를 내려놓으라고 합니다. 자기의 의제와 시간표를 내려놓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계획이 놀랍고 위대하심을 깨달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자화자찬에 빠지고, 자기 보호에 민감하고, 자기중심으로 살면서 중요한 것은 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살고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율법을 행하고 선하게 살려고 하던 자신을 내려놓으며,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을 죽었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라고 하십니다. 19절 말씀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자세히 보려면 새번역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는 율법과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어버렸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을 대하여 사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사도 베드로의 행동을 책망하는 자리였는데, 가장 중요한 교리를 말씀하는 것으로 사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게바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바울이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나 바울 두 사람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도 율법을 지키며 살았고, 사실 그런 관습이 몸에 젖어서 지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해도 유대인으로 살고, 율법을 준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에 와보니 이방인들이 많았고, 이방인들이 대사도 베드로가 왔다고 음식을 준비하여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는 주의 동생 야고보와 함께 신앙생활하던 유대인들이 오니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던 중에 할례 받은 교인들이 들어온다는 말에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대인답지 않게 행동한다는 말을 들을 것으로 두렵게 생각하여 도망을 치는데,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를 따라 자리를 피하였고, 그동안 교회를 유익하게 하며 복음을 전하던 바나바도 그의 외식에 유혹을 받아 함께 피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는 사도 베드로를 불러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듣는 자리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갈 2:14)고 하셨습니다. 한 점 책망하거나 나무랄 것도 없이 유대인으로 살아갈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유대인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고 유대인처럼 살아서 구원받으라고 하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다 똑같은 죄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는 하나님이 있고, 성전이 있고, 율법을 가진 사람으로 이방인들을 사람으로도 보지도 않았습니다. 개나 돼지 같은 자들이요, 장차 멸망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고, 나중에 가면 유대인들의 노예로 전락할 자들이라고 천박하게 보았고, 사람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말씀하는 중요한 핵심적인 주제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아닙니다.
16절 말씀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는 율법으로 구원받고, 율법이 주는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며 율법이 요구하는 대로 모두 준행하여 구원받겠다고 하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라도 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하는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일찍이 깨달은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죄를 죄 되게 정죄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으로 무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 되게 할 수 없고, 죄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되고, 율법이 없으면 조금 양심적으로 살았다는 것으로 자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주어지므로 죄를 죄 되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고, 율법 앞에서 무능한 존재임을 알게 하시니, 그러한 의미에서 보면 율법도 은혜의 선물인 것을 알게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복음주의자 프레드 브라운(Fred Brown)은 율법의 목적을 묘사하는데 세 가지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율법은 치과의사가 환자의 입안에 넣는 작은 거울과 같다고 했습니다. 치과의사는 이 거울을 가지고 충치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 충치를 치료하거나 뽑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 거울은 단지 충치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한 비정상인 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입니다. 거울로는 진단은 가능하지만 치료는 할 수 없습니다. 둘째) 브라운은 다른 유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또한 회중전등과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한 밤에 전기가 나간다면 여러분은 회중전등을 사용하여 전기차단기가 있는 어두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전등을 비추어 퓨즈를 살펴 볼 것이며, 곧 차단기 안의 퓨즈가 타버린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당신은 전원이 다시 들어오게 하기 위해 그 타버린 퓨즈를 제거한 후, 새로운 퓨즈로 갈아 끼울 것입니다. 회중전등은 이런 작업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셋째) 그는 율법은 마치 다림줄과 같다고 했습니다. 건축가는 종종 세우고 있는 건물이 수직으로 잘 올라가고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무거운 추를 달아 점검을 합니다. 그래서 만약 삐뚤어져 수직에서 벗어난 실수가 발견된다면, 그 건축가는 망치와 톱을 사용하여 그것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건축가는 다림줄을 통해 수직여부를 검사하며, 고칠 때는 망치와 톱 같은 다른 연장을 사용합니다. 이처럼 율법은 죄의 문제를 지적할 뿐이지 그 문제의 해결을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죄의 문제의 해결은 오직 복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나의 죄만 지적해주고, 무능한 것만 깨닫게 할 뿐입니다. 바울은 일찍부터 율법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혼에 새겨두는 율법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유학하여 유명한 율법의 대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준행하여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착각이었고, 그는 율법의 무능함을 뼈저리게 느낀 사람입니다. 그는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죄인일 뿐이었습니다. 율법을 놓고 조금 고민하는 죄인과 아예 처음부터 율법을 무시하고 죄를 짓는 사람이 있을 뿐인데, 둘 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으로 설 뿐입니다.
2.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16절 말씀은 두 가지 주제가 함께 섞여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미 앞에서 말씀드린 내용이 중복되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는 구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지를 순례한다고 준비하면서 몇 권의 책을 보는 중에 “한눈에 보는 종교개혁 키워드”란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 정성욱목사는 하버드대학에 석사학위를,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덴버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으면서 트라이시티 한인교회 담임목사로 있었습니다.
이 분은 오늘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꿰뚫어보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주님이신 것을 선포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번은 멕시코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하신 어떤 목사님이 서울 시내 여러 교회를 방문하면서 설교를 들은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에 따르면 슬프게도 자기가 방문한 교회들, 그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보혈과 십자가와 부활을 설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사례는 아니라 하더라도 현재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교회가 번영의 신학, 긍정적인 사고력, 예수 믿고 복을 받는다는 기복적인 설교가 판을 치고, 복음이 빠져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희생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은혜롭다고 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으로는 안 되고, 오로지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하는 그 깊은 의미를 말해야 합니다. 19절에서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선행을 쌓아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서 하나님 앞에 무조건 나아갈 것입니까?
다시 맥스 루카도목사님이 쓰신 “나는 작아지고 하나님은 커진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 한 인쇄공의 딸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아무도 그녀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감정이 있다면 하나님은 다만 두려우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성경조각을 주었습니다. 한 면에 이런 말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고 “주셨으니” 그리고 나머지는 아직 글씨가 찍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자는 그 말씀만을 가지고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주셨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기쁨으로 변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태도의 변화가 그의 어머니의 눈에 띄었습니다. 어머니가 딸에게 즐거워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딸은 주머니에서 성경구절이 찍히다만 구겨진 종이쪽지를 내어놓았습니다. 어머니가 그 글을 읽고서 물었습니다. “무얼 주셨는데?” 어린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도 몰라요. 하지만 뭔가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두려워할 필요가 없잖아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에게 뭔가를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조금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겠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셨기에 다시는 같은 죄값을 물을 것이 없다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무엇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밖에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 범죄한 자를 반드시 벌하시고야 마시는 심판의 하나님이신데, 그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 없는 제물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죄 없는 제물이 될 수 있는 이는 오직 성자 예수, 하나님의 아들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인을 대신하여 피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놓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신 약속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 믿고 나아오는 사람을 구원해주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창세기에는 이미 완벽한 복음을 사례를 들어 말씀했습니다. 창15:6에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주시고, 약속을 변치 않고 이루시는 하나님만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나보다 더 큰 존재에 대한 열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시고 불러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헨리나우엔의 “춤추시는 하나님”이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서커스팀에서 공중그네를 타고 있는 프라잉 로들라이(Fiying Rodleighs) 가족에 대하여 쓰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절친한 친구인 로들라이의 초청을 받아 서커스를 여러 번 관람하였습니다. 헨리가 생각할 때에 서커스는 참으로 매력 있는 공연이었습니다.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아름다움과 스릴, 손에 땀을 쥐는 긴장이 넘쳤습니다. 나우엔 박사는 공중그네를 바라보면서 나는(날으는) 사람과 잡아주는 사람 사이에는 아주 특별한 관계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대에서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는데, 이편에서 저편으로 그네에다 발목을 걸고, 거꾸로 그네를 타면서 두 손을 하늘로 뻗치면서 몸을 날리면 저 편에 있는 사람이 나는 사람의 손을 잡아 줍니다. 아주 오랫동안 서커스에 몸을 담은 로들라이가 나우엔에게 해준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사람은 잡아주는 사람을 먼저 잡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나는 사람은 잡아주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나우엔은 그 말을 한참 음미하여 보았습니다. 나는 사람이 자기가 살겠다고, 잡아주는 사람보다도 먼저 잡으려고 하면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사람은 두 손을 힘껏 뻗치고 있으면 잡아주는 사람이 정확히 잡아주어, 두 사람 다 안전하게 공중그네를 즐길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나우엔 박사는 이 말을 들으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바라보았는데, 아브라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무슨 말인지 완전히 이해합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잡아주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더러운 손을 내밀고 맡겨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3.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안에서 살고 있으면 주님이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말은 내려놓았다는 말보다 훨씬 더 결단을 요구합니다. 버린다는 말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는 없어져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렇습니다. 나로서는 구원받을 재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믿지 못할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제일 구제불능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이 고상하기에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나의 구원을 위하여 어느 것 하나도 이룰 수 없는 완전 무능하고 완전 타락한 사람입니다. 온전하신 하나님,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셔야 구원받은 것이요,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셨고, 하나님의 완전하신 의로움이신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므로 우리는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칭의와 함께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귀한 성화도 내 안에 주님이 사시면서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어 가시도록 위탁해야 합니다. 성화는 자기 부인과 회개와 순종으로 주님을 따라가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합니다. 세상을 행하는 나는 죽었다고 선언하시고 이제 이후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이 일평생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갈 2:15-21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 486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각 신학대학에서는 종교개혁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세계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여 특강을 듣고, 연구, 학술논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 교수는 그가 가르치고 있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당 문에 로마 가톨릭 교회가 판매하는 속죄권, 즉 면죄부의 부당성에 대하여 95조문의 반박문을 내어 붙였습니다. 이것은 대학에서 주로 하는 토론 논제였습니다. 그래서 개신교회에서는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기념주일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스스로 개혁하고 고쳐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장신대학의 김명용교수는 바른 교회 되기 운동 세미나에서 "한국교회 개혁의 이유"라는 발제에서 9가지의 과제를 드러내고 있다. 1)샤머니즘 2)성장제일주의 3)비민주적 교회 4)지역사회에 쓸모 없는 교회 5) 세습과 교회재정의 불투명성 6)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 신앙과 공격적 행위 7) 변화하는 문화에 능동적이지 못한 교회 8) 교회분열과 성직자의 품위와 자격의 문제점 9) 세상을 변화시키는 평신도를 만들지 못한 교회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외쳤습니다. 오늘 다시금 마르틴 루터와 요한 칼빈 같은 개혁자들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서라는 자리에 서고, 앉으라는 자리에 앉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칼빈 선생님은 에배소서를 좋아하였고,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좋아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그의 생전에 갈라디아 주석을 두 번이나 쓰셨는데, 그것은 그만큼 갈라디아서를 좋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갈라디아서는 나의 편지요, 나의 아내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서신학자들은 갈라디아서를 극찬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선전포고였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헌장이다"라고 합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쓰신 분은 사도바울이십니다.
기독교회는 사실 유대교회에서 나온 것인데, 유대인의 오랜 전통을 깨고, 새로운 기독교를 세우는데는 아주 어려운 고비를 겪고 넘어가야만 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유대인들은 그동안 믿어오고 가지고 있던 모든 관습을 버리고 어떻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조심스러운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 과거 그들이 받았던 할례는 자식들에게 계속 시행하면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 믿을 때 할례는 받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는 믿는데, 그동안 지키던 안식일은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지키지 않아도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신약의 서신들 중에 유대교와 마찰을 직접 논한 것은 갈라디아서와 히브리서 뿐입니다. 히브리서가 변증적이라면 갈라디아서는 공격적이라고 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열심히 개척하여 교회를 설립하고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지방을 떠난 후 오래 되지 않았는데 유대인들이 이곳 갈라디아에 찾아와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혹하며 현혹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율법을 엄수하며,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현혹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란 자는 사도가 아니면 예루살렘의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믿어야 하지만,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도 받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유대인들의 유혹은 다른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좋으나 율법을 지켜야 하고, 안식일도 지켜야 하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이것은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이질적인 복음이요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요, 다시금 유대교로 돌이키려는 유혹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때 강력한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잘못 즉 과오라거나 마귀의 명칭으로 오는 이단도 없고, 마귀의 모양으로 오는 마귀 자신도 없다"고 했습니다. 악한 마귀가 마귀의 모양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가장하고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기독교 율법주의는 천사로 가장한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예수는 믿어야지, 그래 믿어두면 좋지, 그러나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 다다익선(多多益善) 얼마나 좋습니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외길을 걸어가는 것이지, 사람이나 기쁘게 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핍박이나 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본질을 변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6-8)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갈5:2-4)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한 마디로 말하면 이신칭의,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핵심입니다. 인간의 공로, 도덕, 선행, 철학적인 지식 이런 것을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루터가 말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부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요, 가장 강력한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먼저 의롭다는 말을 들을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있어 그것이 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하나님의 온전하심, 하나님의 표준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와 다르신 분,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생각하시는 기준과 우리의 판단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있습니다. 자신의 무죄하신 완전함이 하나님의 판단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신 기준에 도달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님에게 다그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예수님을 고발을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에 우리 주님은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고 있으셨습니다. 그들은 계속하여 물었습니다. 이때 우리 주님은 일어서시면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악 덩어리인 나 한 사람도 죄가 없으신 주님만 남게 됩니다.
나는 분명히 돌에 얻어맞아 죽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충분히 돌을 들어 던질 수 있는 깨끗하고 정직하고 순결한 사람이라고 하실 것입니까? 우리는 의인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먼저 율법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율법을 주시므로 우리 사회는 바르게 살게 되고,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을 다 이루고 살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온전히 더럽혀져 있으므로 율법을 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으며, 죄의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무력한 존재입니다. 나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났으며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고, 타락하고 부패하고, 영적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나 스스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필립얀시는 "놀라운 하나님 은혜"라는 책에서 "은혜"를 "최후의 위대한 단어"라고 했습니다. 은혜(Grace)라는 고어의 뜻은 "분에 넘치는 하사품"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모든 죄를 다 탕감해주려고 하셨습니다.
지금 신용불량자들이 많은데, 카드 빚을 다 탕감해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다시 5년만 지나가면 다시 300만명의 신용불량자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5년마다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하면 우리나라는 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고 오는 세대의 전 인류가 안고 있는 죄, 이 빚을 어떻게 해결할 방안이 없었습니다. 율법을 주었건만 그 율법을 가지고는 구원할 자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탕감하고 해결하고 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을 들어도 먼저 의심하고 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을 때에 충격도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받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주는 사람이 모든 대가를 치르신 선물입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있고 없고 따지지 않습니다. 고맙다고 생각할 수도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의롭다고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이지, 나의 의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는 수준이 율법이 아닌 법을 초월한 은혜입니다. 여기에는 내 의가 없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 다 해결하시고 다 갚아주시고, 대신 죽으시고 이루신 은혜입니다. 구원은 공로의 대가인데,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죽으신 공로의 대가로 우리에게는 은혜입니다.
우리 자신을 조금이나 나은 사람으로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낫다, 경건하고, 도덕적으로 수준이 있다고 좋게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반쪽 죄인이나, 부분적인 죄인이나, 그다지 흉악하지 않은 죄인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반쪽의 죄인, 부분적인 죄인, 그 다지 흉하지 않은 죄인, 중간정도의 죄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율법을 가지고 행함으로, 공로로, 선행으로 인정받겠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박국2:4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루신 구속을 받아들입니다. 구원에 있어 은혜는 원천이요, 믿음은 수단이 되며, 구원은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잡는 믿음조차도 알아보고, 깨닫고 보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이란 나 자신으로 도무지 구원 얻을 수 없다고 깨닫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언은 "다 이루었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테테레스타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상업적인 말로 "완불되었다", "빚이 다 갚아졌다", "끝내다", "완성하다"라는 말입니다. 범죄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다 갚아주셨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죄를 처벌하지 않고는 내버려두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모든 죄에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찮은 죄라고 하여도 하나님이 적절한 처벌 없이 용서하신다고 하면 그분은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되실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 다름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그 죄에 대하여 처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랑의 하나님, 그러나 죄를 묵과하실 수 없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하나 뿐이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죄 값을 치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 치르시고 이루신 것이기에 같은 죄를 가지고 두 번 처벌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처벌을 받겠다고 나갔더니 이미 완불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값은 예수님의 피로 완전히 지불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졌으며, 그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란 신뢰입니다. 기대는 것입니다. 나의 힘을 다 빼고 그냥 기대는 것입니다. 나의 지식, 나의 공로, 나의 고상한 척 하던 자존심 그런 것 다 포기하고 주님의 십자가만 기대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 잘 때에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기대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재판관이십니다. 아주 나쁜 소식은 당신은 유죄라는 것입니다. 유죄이기에 영원한 형벌, 지옥에 들어가야 합니다. 또 하나의 소식은 아주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다 갚아주었으니 예수님과 함께 하늘나라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복음을 나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확신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을 마음에 믿어야 합니다.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이해하였습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은 구원의 유일한 소망인 것을 받아들이고 의지하고 의탁하여야 합니다.
저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조종사를 신뢰합니다. 높은 창공에서 무사히 착륙할 수 있다는 것은 조종사를 믿기 때문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 갈 때마다 의사를 신뢰합니다. 그를 믿기에 수술을 맡기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을 걸고 우리 주님을 신뢰합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했기에 그 분에게 저의 더러운 모든 죄를 다 맡기고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합니다. 나는 나를 믿으려고 아니합니다. 제 자신을 믿을 만큼 정직하지도 않고 성실하지도 않기 때문에 성실하신 주님만 믿습니다.
우리는 값없이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찰스 스펄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결코 군중에 휩쓸려 얼떨결에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우르르 무더기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한 사람씩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지 대중이나 집단, 단체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불신의 죄는 하나님이 보시는 가장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사랑하시는 여러분, 율법을 이루시면서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나아가시려고 합니까? 부끄럽지만 하나님의 은혜만을 사모하면서 나아가시렵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의롭게 보시기로 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사는 내가 있을 뿐입니다.
로마에 가면 [스칼라 상타]라는 유서깊은 성당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예루살렘에서 옮겨놓은 것으로 빌라도의 법정에 올라가는 계단인데, 예수님이 밟고 올라가신 계단이라고 하여 유명합니다. 저도 이 계단을 기어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것은 천주교인들이 하는 고행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겪어보려고 한 것이요, 로마에 온 기념으로 한 것입니다. 이 28개로 된 계단을 기어올라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어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며 계단마다 입을 맞추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계단을 피가 나도록 올라가고 내려왔지만, 죄사함의 기쁨은 없었습니다. 이것이 아니라고 깨달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걸어 내려왔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죽었습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 다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을 위하여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의 확신과 감격이 그리스도 안에서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의 삶의 본질
갈 2:15-21 / 박종수 목사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인간 구원을 말합니다. 구원받아야 함을 말하고, 또 구원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저마다 구원을 이해함이 다르고, 또한 제시하는 구원의 길도 다릅니다.
불교의 경우 구원은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부처가 대중들에게 설파한 초전법륜이라는 것을 보면 인간 구원을 고집멸도(苦集滅道)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이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苦이고, 이 고통이 생기는 원인이 集이고, 이 고통이 사라진 상태가 滅이고, 이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道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고통을 멸하는 방법을 팔정도(八正道)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가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고 있는 고통을 깨달음을 통해서 이겨내게 하는 것입니다.
무속 신앙의 경우 구원은 ‘당면한 현실 문제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액땜을 하고, 악귀를 쫓아내서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풀고 복을 불러들이는 것을 구원이라고 이해합니다. 이를 위해서 굿을 해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악귀를 쫓기 위해 부적을 부치는 등 샤마니즘적 종교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속이 말하는 구원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를 여러 신의 힘을 빌어서 해결하고 복을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구원은 전혀 다릅니다. 불교처럼 인생의 고통의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무속신앙처럼 인생의 현실적 문제 해결을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한 마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마 1:21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가 이루시는 구원은 바로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여기서 죄는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을 어겼다든지, 법적으로 볼 때 문제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단절시켜놓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진노하시게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어떤 부부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큰돈을 벌어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꿈꾸던 일이 이루어져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어떤 부자 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고 소리를 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싫다고 가출을 합니다. 아버지가 출세를 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 돈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출세를 해도 그 출세가 우리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아무리 가지고 싶은 것을 다 손에 넣는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과의 심각한 관계가 해결되지 않고는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저 유명한 신학자 폴 틸릭은 우리 인간에게는 궁극적 관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돈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출세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에 대한 관심보다 더 깊은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관심입니다.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이 궁극적 관심이 해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화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어 우리를 향하신 진노를 푸시고, 우리는 용서받은 존재로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인간 구원을 말할 때 오늘 본문 16절이 말씀하는 대로 “의롭게 되는 것”이란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은 바울신학에게 가장 핵심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죄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6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친히 준비하신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행을 한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칭하시는 사람은 오직 예수를 믿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직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렇게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본질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 옛 사람의 죽음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Cristw'/ sunestauvrwmai:’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그대로 마 27:44절에 나와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강도를 설명할 때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완료형 수동태입니다. 영어성경 RSV에서 “I have been crucified with Christ”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십자가에 못박혀왔고, 또한 지금도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저 유명한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고민하던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발가벗은 채로 “나는 발견했다”고 소리쳤답니다. 얼마 전 게놈 프로젝트가 발표될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드디어 우리가 찾아냈다고 흥분하면서 TV 인터뷰하던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바울이 예수 믿게 되면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이미 저 십자가 위에 못 박혀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기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진정 예수를 제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왔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박혀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이미 2000년 전에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있었고, 지금도 그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초대교회 교부 성 마카리우스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마카리우스가 그 사람에게 이렇게 시켰답니다. “공동묘지에 가서 무덤에 대고 그 안에 누워있는 시체에게 욕을 한 바탕 퍼부어보게”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하고 왔습니다. 마카리우스는 그 사람을 다시 공동묘지로 보내서 이번에는 칭찬을 하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그 사람에게 마카리우스가 물었습니다. “자네가 욕을 퍼 부어대니까 시체들이 화를 내던가?” 그가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칭찬을 하니 그들이 좋아하던가?” 이번에도 그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성 마카리우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 죄가 나를 유혹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욕해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도 시체처럼 대꾸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대해 시체처럼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내가 죽어야 하는데...” 탄식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옛 사람이 죽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탄식과 기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죽어 있습니다. 죽은 시체를 또 죽여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목의 정욕이 나를 유혹하고, 육신의 정욕이 나를 시험하고, 이생의 자랑이 나를 요동케 할 때 이렇게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혔다. 내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 그래서 응답할 수 없고 반응할 수 없다.” 소리를 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과 원수 마귀에게 소리치십시오. “나는 이미 죽었다. 그러니 너희들과 더 이상 인연을 맺을 수 없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 곁을 떠나라!” 그러면 저들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새 사람의 출생
본문 20절을 보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다 쉬운 말로 원문을 직역을 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산다. 그러나 내가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실존 자체가 바뀌게 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요 새 사람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올바로 예수를 믿다보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과 함께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후 13:5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마음을 사로잡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식사하기 위해서 어떤 식당에 간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식당을 둘러보면서 예수 믿는 식당인지 아닌 지를 둘러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주인이 앉은자리 옆에 이런 표구된 족자가 걸려있었습니다. “늘 주님”. 저는 그 글귀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늘 이 주인의 마음이 주님께 가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늘 주님이 이 식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늘 주님처럼 손님을 맞겠다는 것이리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늘 주님께 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하는 것처럼 늘 우리 생각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 것을 말합니다.
둘째,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것입니다.
술 먹는 사람들은 술기운이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엉뚱한 일들을 하곤 합니다. 소심한 사람들이 아무에게나 큰 소리를 칩니다. 배짱이 없어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합니다. 술에 취해서 술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담대하게 또한 능력있게 감당할 때가 참 많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사 41:10을 보면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체험한 사람들은 이 약속이 내게 이루어짐을 느낍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 4:13에서 고백했던 것을 함께 고백하게 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셋째,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작곡한 헨델은 삶의 극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1741년 파산했고, 감옥에 들어갈 처지가 됐습니다. 그 화려했던 삶이 하루아침에 끝장이 난 것입니다.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이 인생의 사망의 골짜기에서 저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변화하여 새사람이 됐습니다. 그 이후 그는 세상 군왕을 위해 작곡하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연주하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주님의 인도를 받으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음악만을 작곡하고 연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만들게 된 음악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심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목표로 삼는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새 사람의 삶
본문 20절을 보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변화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삶의 방법론이 달라지게 됩니다. 과거에 ‘내 실력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내 가진 것으로’ 살았다면, 과거에 ‘처세술로 살았다면’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맡기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가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창가로 다가가서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이 저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 이 교회가 저의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것입니까? 만일 하나님의 세상이고 하나님의 교회라면 이것들을 돌봐주십시오. 저는 잠을 자러 갑니다 하나님 부탁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내 짐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짐을 나 혼자서 지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불신입니다. 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둘째,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꿈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경솔하게도 그 꿈을 자랑삼아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를 복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복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실수, 우리의 허물 그것을 탓하지 않으십니다. 크신 은총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실수도 복으로 바꿔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허물 때문에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면 그것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복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셋째,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가족들을 이끌고 먼 가나안 땅으로 이민을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자기의 경험으로 판단하지 않고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앞 날 때문에 두려워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말씀만 의지하고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살리라
갈 2:15-21 / 김근중 목사
이스라엘의 우화 가운데 "새들의 불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동물의 창조를 끝냈을 때 새들이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은 "짐승들에게는 무거운 짐을 안 주셨는데 왜 우리 새들에게만 짐을 지워서 이렇게 걷기도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투덜거리며 창조주에게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용기 있는 독수리가 먼저 어깨에 붙은 그 무거운 것을 움직여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온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면서 공중을 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부착물은 짐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인 날개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큰 짐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짐으로 준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 줍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이 땅의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가게 됩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는 생활을 하게 합니다.
바울 사도가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병이 생겨 갈라디아 지방에 가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바울은 복음전파에 힘써 여러 곳에 교회까지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후 그곳을 떠났는데 바울이 떠나가자 갈라디아 지방에 이상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들어와 교인들을 미혹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를 미혹케 하는 자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주의적 기독교인들로서 그들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반드시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설파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영지주의자들로서 예수를 믿으므로 영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육적으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두 가지 거짓 사상이 갈라디아 교회를 어지럽히고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은 다시금 유대교의 형식주의로 되돌아가거나 영과 육을 극단적으로 구분하는 이원론에 빠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에 대한 바울 선생의 교훈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문제가 되고 있는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는 이미 역사 속에서 사라져간 사상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러나 사실은 오늘날에도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유형의 사상들이 복음의 본질을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대가 바뀌고 사고의 형식은 바뀌어도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은 언제나 동일하게 계속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이 무엇이며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누구에게나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도록 잘 준비되어 있어야겠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교회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많이 내야 되는데 아직 여러 가지 형편이 어려워서 지금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떳떳하게 천국 문을 박차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원대한 꿈에 부풀어 있는 분은 안계신지요? 나중이 아니라 만약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내 생명을 찾으신다면 내 영혼이 어떻게 될까, 과연 내 영혼이 천국과 지옥 중 어느 쪽에 가 있을까 염려가 된다든지 확실히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만약 그런 분들이 우리 중에 계신다면 오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그래도 마음의 확신이 안 서시면 교역자들이나 속회 인도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만 가지고는 충분한 것이 아니고 육체의 할례를 받고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물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던 점에서 일반 유대교인들과는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율법주의적 사고, 즉 무언가 행위가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을 강조하고 할례를 받아야 할 것을 공공연히 가르쳤습니다.
실상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학자로서 율법에 정통하였고 삶에 있어서도 율법에 충실하려고 철저히 실천적인 삶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율법의 권위에 도전하는 스테반을 처형하는 데도 사명을 가지고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남은 잔당을 처치 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예수를 만나고서는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한 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율법을 잘 지키는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16절).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도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16절)라고 단언합니다.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에도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선행을 쌓고 공로를 쌓아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무효화시키는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는 완벽하게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하고 교회에 봉사하며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값없이 구원하여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표현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감사해서 우리의 삶을 드리고 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참으로 감사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실이 모든 것을 우선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2. 오직 믿음으로 죽어야 합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지 벌써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적 사건으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구원의 감격으로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시절에 어느 부흥회에 참석하여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저는 하늘이 열리는 듯한 감격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은 생의 한 전환점이었고 꿈이요 영광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 뒤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아내와 심한 언쟁을 하면서 감정을 억제하기 못하고 그만 할 말 못 할 말을 다 쏟아놓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의 슬퍼하는 모습을 본 뒤 그 다음날 새벽에 기도하면서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면서 저를 쳐다보시는데 그만 저는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저를 위해서 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치 "너 때문에 또 다시 십자가에 죽는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모세는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하라"(민 20:8). 모세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기보다는 혈기 때문에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쳤습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책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고 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출애굽기 17장에서는 백성들이 물 때문에 야단이 났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그 말씀대로 반석을 치자 그곳에서 물이 솟아났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민수기 20장에서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명령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말씀대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백성들의 행동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반석을 내리치면서 마치 자기의 능력으로 물을 내는 것처럼 혈기를 부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4에서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반석이 깨지며 물이 솟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찢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사건은 인류 역사 가운데 유일회적 사건이지 두 번 다시 되풀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하게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다시 반석을 친 것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의 유일회성을 무효화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를 또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큰 죄입니다. 이 죄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무효화시키는 일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가 되고도 혈기를 참지 못하고 아내에게 서운하게 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서 다시 십자가를 지시는 모습을 보고는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20절)라고 고백한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또 다시 죽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나도 망하고 가정도 불행하고 교회도 안됩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설 수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함께 내 자신을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3.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의 신자들은 신앙과 생활이 분리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믿음은 좋은데 생활은 불신자들과 구분이 잘 안됩니다. 주일성수, 새벽기도, 교회봉사는 잘 하는데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는 도무지 믿는 자의 생활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옛사람인 자기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야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요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20절의 말씀처럼 그는 죽고 오직 그의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는 삶의 주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희망은 죽고 대신에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뜻, 그리스도의 희망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내 인생의 주체는 오직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삶의 주인은 그리스도시니까 우리도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직 예수
갈 2:16 / 오정호 목사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말틴 루터가 비텐베르그에서 95개조 반박조항을 발표함으로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주일을 통해 개혁교회의 전통이 무엇인지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대명제를 가집니다.
2.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구원은 인간의 행위와 업적이 아닌 오직 은혜에 근거합니다.
3.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면죄부가 아닌 믿음의 법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4.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종교개혁은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전통보다 앞세웠습니다.
5. 만인제사장의 원리(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 성별,나이,인종에 관계없이 예수를 영접한 자는 사람의 중보를 거치지 않고 언제든지 하나님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걸고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붙들었던 구원의 교리를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현대어 성경은 본문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요, 유대교의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율법만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믿은 구원의 도리가 어떤 것인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은 권위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해준 순전한 복음을 통해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믿음이 견고하지 못한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위에 교회의 전통을 더해야 온전한 구원을 받는다고 그릇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사도의 전통, 즉 사도의 교훈과 사역 위에 세워졌습니다. 사도의 교훈은 복음입니다. 만약 교회의 전통과 말씀이 충돌할 때에는 교회는 말씀 앞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세의 교회가 사도의 전통 위에 군림할 때 교회는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말씀의 권위를 다시 회복하는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가 타락했을 때 계시의 말씀, 곧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외에는 교회를 회복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복음의 권위를 다시 회복할 것을 명령합니다. 바울은 오직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의 선행과 공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외쳤습니다(16절).
2. 예수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뜻은 '자기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입니다. 믿음은 구원자이신 예수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참 인간이십니다.
셋째,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주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성품과 사역을 올바로 믿는 것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본질중의 본질입니다.
3.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습니까?(1장11-12절)
의롭게 되는 것은 사람의 뜻이나 철학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공로나 종교적인 자격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습니다(12절). 하나님께서 구원의 원리를 직접 예수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또한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하셨습니다(4절). 세상의 어떤 종교의 교주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대신 죽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값을 몸으로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진리의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신 분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거짓교사들에 대해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복음은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7-8절) 사도바울은 이 진리의 문제가 생명과 죽음,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기 때문에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종교다원주의가 사람들의 믿음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인본주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계시인 예수그리스도만을 통하여 거듭날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구원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의 희생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2장21).
4.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떤 열매를 맺게 됩니까?
첫째, 사람이 의롭게 됩니다.(16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리를 깨닫고 믿으면 의롭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둘째,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됩니다(3장7절).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반열에 서게 됩니다. 믿음은 말틴루터,칼빈,쯔빙글리와 같은 믿음의 선각자들과 같은 대열에 우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자, 곧 믿음을 가진 자는 믿음의 선조들과 하나가 됩니다(3장29절). 믿는 자들은 믿음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됩니다(3장26절). 믿음은 인종과 성별과 신분의 모든 장벽을 무너뜨리는 능력이 있습니다(3장28절). 이러한 믿음을 강조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1장10절).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했습니다(1장2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6장14절).
여러분은 무엇을 자랑하며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유형 무형의 은혜를 자랑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십자가 밑에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그의 혈통, 학식, 권위를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영광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도저히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롬1:16).
신앙의 선조들은 이 십자가를 자랑하고 구원의 도리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사도들과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 받은 이 복음을 올바로 지킬때에 우리의 자녀 세대가 희망이 있습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물려줌으로 우리의 교회를 반듯하게 세우고 가문과 자녀를 주님앞에 일깨워 세우는 은혜가 이 종교개혁주일에 여러분과 저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누가 가짜인가?(2)
갈 2:16 / 이삼규 목사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저는 지난 주일에 누가 가짜인가라는 제목으로 세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 가짜는 인스턴트다. 둘째,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셋째,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로 착각한다. 오늘도 지난 주일에 계속 이어서 누가 가짜인가를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1. 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인간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이단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율법주의(律法主義)에 빠지기 쉽습니다. 인간의 이성은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은혜를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 이유는 은혜가 이성과 모순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은혜교리’를 계시를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가 ‘은혜의 교리’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율법주의 본질은 ‘자기 속죄’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려는 것입니다.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생긴 피해를 배상함으로써 하나님께 용서를 받으려고 애를 씁니다. 물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은 칭찬받을 만한 것이지만,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범한 죄를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없앨 수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행을 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죄를 용서 받을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를 사함받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이단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왜 이단 사설에 잘 현혹됩니까? 그들은 어떤 행함을 강조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니 한 번 빠져들면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행함을 통해서 용서를 얻겠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100%의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100%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약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율법은 99% 순종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습니다.
죄는 너무나 무서운 것이고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사고나 행위도 죄의 치명적인 결과를 조금도 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낼 수 있습니다. 이 무서운 원수에게서 구원받은 영혼은 후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평안과 끝없는 감사의 감정을 느낍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가 그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방법은 한탄이 아니라 감사입니다. 만일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믿지 않았다면 그는 잔치에 참여하기는커녕 한쪽 구석에 가서 탄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과 용서를 믿었기 때문에 그는 죄 많은 과거를 잊을 용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누가 가짜입니까? 가짜는 행함으로 죄를 용서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우리의 행함으로는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 행함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친다면 그것이 바로 가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가짜는 신조(信條)를 무시하고 신학을 경시한다.
우리교회는 12가지 신조(信條)를 믿습니다.
대한예수장로회에서 이 아래 기록한 몇 가지 조목을 목사와 강도사와 장로와 집사로 하여금 승인할 신조로 삼을 때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를 설립한 모(母) 교회의 교리적 표준을 버리려 함이 아니요, 오히려 찬성함이니 특별히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와, 성경 대·소요리문답은 성경을 밝히 해석한 책으로 인정한 것인즉 우리교회와 신학교에서 마땅히 가르칠 것으로 알며 그 중에 성경 소요리문답은 더욱 우리 교회 문답책으로 채용하는 것이다.
1)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本分)에 대하여 정확무오(正確無誤)한 유일(唯一)의 법칙이다.
2)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니 오직 그만 경배할 것이다. 하나님은 신(神)이시니 스스로 계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다른 신과 모든 물질과 구별되시며, 그 존재(存在)와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과 사랑하심에 대하여 무한하시며 변하지 아니하신다
3)하나님의 본체(本體)에 세 위(位)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신데 이 세 위는 한 하나님이시라.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同等)하시다.
4)하나님께서 모든 유형물(有形物)과 무형물(無形物)을 그 권능의 말씀으로 창조하사 보존하시고 주장하시나 결코 죄를 내신 이는 아니시니 모든 것을 자기 뜻의 계획대로 행하시며 만유(萬有)는 다 하나님의 착하시고 지혜롭고 거룩하신 목적을 성취하도록 역사 하신다.
5)하나님이 사람을 남녀로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사 생물(生物)을 주관하게 하셨으니, 세상 모든 사람이 한 근원에서 나왔은즉 다 동포요 형제다.
6)우리의 시조(始祖)가 선 악간 택할 자유능(自由能)이 있었는데 시험을 받아 하나님께 범죄한지라 아담으로부터 보통 생육법(生育法)에 의하여 출생하는 모든 인종들이 그의 안에서 그의 범죄에 동참하여 타락하였으니, 사람의 원죄(原罪)와 및 부패한 성품 밖에 범죄할 능(能)이 있는 자가 일부러 짓는 죄도 있은즉 모든 사람이 금세와 내세에 하나님의 공평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7)인류의 죄와 부패한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고자 하사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그의 영원하신 독생자 주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으니, 그로만 하나님께서 육신을 이루었고 또 그로만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사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자시라.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승좌하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저리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
8)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 성령께서 인생으로 구원에 참여하게 하시나니 인생으로 죄와 비참을 깨닫게 하시며 그 마음을 밝혀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권하시며 권능을 주어 복음에 값없이 주마 한 예수 그리스도를 받게 하시며 또 그 안에서 역사하여 모든 의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9)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사 사랑하므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고 그 기쁘신 뜻대로 저희를 미리 작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삼으셨으니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저희에게 두텁게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로되 오직 세상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는 온전한 구원을 값없이 주시려고 하여 명하시기를 너희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믿고 의지하여 본받으며 하나님의 나타내신 뜻을 복종하여 겸손하고 거룩하게 행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하는 자는 구원을 얻는지라. 저희가 받은 바 특별 한 유익은 의가 있게 하심과 양자(養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의 수(數)에 참여하게 하심과 성령의 감화로 거룩하게 하심과 영원한 영광이니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도 구원 얻는 줄로 확실히 알 수 있고 기뻐할지라. 성령께서 은혜의 직분을 행하실 때에 은혜 베푸시는 방도는 특별히 성경 말씀과 성례와 기도다.
10)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성례(聖禮)는 세례와 성찬이라. 세례는 물을 가지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씻음이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병합하는 표적과 인(印)침인데 성령으로 거듭남과 새롭게 하심과 주께 속한 것임을 약속하는 것이라.
이 예(禮)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자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푸는 것이요, 주의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이니 믿는 자가 그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나는 유익을 받는 것을 인쳐 증거하는 표라. 이 예(禮)는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백성이 행할지니 주를 믿고 그 속죄제를 의지함과 거기서 좇아 나는 유익을 받음과 더욱 주를 섬기기로 언약(言約)함과 주와 및 여러 교우로 더불어 교통하는 표라. 성례의 유익은 성례의 본덕(本德)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성례를 베푸는 자의 덕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의 복 주심과 믿음으로써 성례를 받는 자 가운데 계신 성령의 행하심으로 말미암음이다.
11)모든 신자의 본분은 입교(入敎)하여 서로 교제하며, 그리스도의 성례와 그 밖의 법례(法例)를 지키며, 주의 법을 복종하며, 항상 기도하며,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주를 경배하기 위하여 함께 모여 주의 말씀으로 강도(講道)함을 자세히 들으며, 하나님께서 저회로 하여금 풍성하게 하심을 좇아 헌금하며, 그리스도의 마음과 같은 심사(心思)를 서로 표현하며, 또한 일반 인류에게도 그와 같이 할 것이요, 그리스도의 나라가 온 세상에 확장되기 위하여 힘쓰며, 주께서 영광 가운데서 나타나심을 바라고 기다릴 것이다.
12)죽은 자가 끝 날에 부활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심판하시는 보좌 앞에서 이 세상에서 선 악간 행한 바를 따라 보응(報應)을 받을 것이니 그리스도를 믿고 복종한 자는 현저히 사(赦) 함을 얻고 영광중에 영접을 받으려니와, 오직 믿지 아니하고 악을 행한 자는 정죄함을 입어 그 죄에 적당한 형벌을 받는다.
교회의 신조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 것으로 내가 믿으며 이를 또한 나의 개인의 신조로 공포하노라.
신조는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적어도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스도를 믿은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을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믿는 것이 곧 우리의 신조인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의 신조라는 것은 곧 우리가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신조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가장 고상하고 순수한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조건 좋은 말만 늘어놓는다고 전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는 전도자가 그리스도를 향한 자신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불타는 사랑은 설교를 더욱 향기롭고 따스하게 만들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이 영속적인 의미를 가지려면 지식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효과적인 설교가 되려면 지적인 내용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성이 있는 곳에는 신조가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분들도 허다한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공식적인 신조 없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배하려는 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이 만족할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식이 우리가 믿는 신조 즉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진리는 명문화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한 것이 바로 신조 즉 신앙고백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독교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 그리스도인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적어도 성경에 계시된 풍성한 진리를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진리를 진술하고 자기의 진술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진술되고 방어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조입니다. 그런데 가짜는 신조를 무시하고 신학을 경시합니다.
3. 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긴다.
영국의 심리학자 드리버는 ‘감정’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감정은 마음이 차분한 상태에 있지 않고 강한 느낌에 이끌려서 특정한 행동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 자주 빠지곤 합니다. 복잡하고 갈등이 많은 이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가슴에 하루에도 수백 번 이런 감정이 찾아왔다 사라지곤 합니다. 어떤 특별한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상적인 사람들이 겪는 경험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실 때 주신 정서적인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없다면 온전한 인간의 생활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지적인 인식이 예수님의 동정심을 자극했고, 동정심에 이끌린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심리작용은 지성에서 감정으로, 다시 감정에서 의지로 진행된 것입니다. 동정의 감정이 의지에게 가서 충돌하여 그것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긍휼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바로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진리가 우리를 도덕적 행위로 나아가도록 움직이게 만드셨습니다. 정신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마음속에서 심상으로 변화시켜 받아들이는데, 이것이 바로 관념입니다. 관념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감정은 의지가 진리에 따라 행동하도록 감동시킵니다. 이것이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심리작용의 과정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의 심리작용의 세 요소들, 즉 진리와 감정과 행동 중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창조된 마음은 종종 거짓에 치우치게 되고, 그런 과정에서 생긴 감정은 의지를 악한 행동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예가 바로 다윗이 목욕하는 밧세바를 오랫동안 쳐다 본 것입니다. 다윗은 그가 본 것에 의해 마음이 움직였고, 그에 따라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죄를 범한 그는 죽는 날까지 죄의 비극적 결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는 보고 느끼고 행동했습니다. 그로부터 수 세기 후에 그의 주님도 병자들을 치료하실 때, 보고 느끼고 행동하셨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도덕적 차이는 감정적 차이에 기인합니다. 그리고 그 감정적 차이는 감정을 불러일으킨 대상의 차이에 기인합니다. 다윗은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고,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대중을 본 것입니다. 전자는 죄로, 후자는 긍휼의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모두 심리 작용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진리-감정-행동’이라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기적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거슬러 스스로를 강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인간의 감정을 모두 봉쇄하고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정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감정이 경박해서는 안 됩니다. 일상의 안일함을 기뻐하거나 구차한 평안을 즐기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도의 기쁨에는 고난의 연단을 기뻐하는 성숙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기쁨도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고작 마음의 평안, 영적 기쁨 및 하나님의 은혜의 가시적 증거로 해석되는 상당한 정도의 ‘물질적 풍요’를 추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성숙한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여러분의 어떤 것들을 희생시킬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 가짜는 영적 균형 감각이 없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1)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 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습니다.(ex: 베드로-산헤드린 앞에서, 바울-아그립바 왕 앞에서)
2)우리는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습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발견됩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3)깨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적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는 적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 적을 찾아내려는 습관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류와 싸우다 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좇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드린 사람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깁니다.
4)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경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우울하다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거나 신앙이 없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그는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입니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서 지나치게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는 새와 같기 때문에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한쪽 날개를 아래로 쑤셔 박은 채 다른 한쪽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이며 날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두 날개를 모두 퍼덕여야 균형이 잡혀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누가 가짜입니까? 오늘 저는 네 가지를 더 말씀드렸습니다.
1)가짜는 행함으로 죄 용서함을 받으려 한다.
2)가짜는 신조(信條)를 무시하고 신학을 경시한다.
3)가짜는 감정을 등한히 여긴다.
4)가짜는 영적 균형 감각이 없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입니까? 가짜입니까?
즐거운 교회
갈 2:16-21, 3:13-14
I. 즐거운 교환
남자들이 제일 신나하고 여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 셋이 있다지요. 첫째 군대 얘기, 둘째 축구 얘기, 셋째 군대에서 축구한 얘기랍니다.
남자들만이 살았던 군대 생활엔 많은 추억거리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용돈을 많이 갖다 쓰는 졸병이 있으면 고참들이 심부름을 시킵니다. 라면 사와라, 빵 사와라 - 그런데 그냥 사오라고 하면 강탈이 되니까 천원짜리 한 장을 줍니다. "이거 가지고 가서 라면 다섯 개, 빵 다섯 개 사오고 2천원 남겨 와." 이런 엉터리 교환법이 통하는 곳이 옛날 군대였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이보다 더 터무니 없는 엉터리 교환의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모든 저주를 갖다 주고 온갖 복으로 바꿔오는 곳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영원이 바뀌는 곳입니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즐거운 교환"(fr hlicher Wechsel) 행복한 교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인생의 저주가 하늘 복으로 교환된 곳이 십자가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성도들의 "즐거운 교환" 장소입니다.
· 우리는 그 분 앞에 죄를 가지고 나아가 용서를 안고 돌아갑니다.
· 상처를 가지고 나아가 치유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가난을 가지고 나아가 부요를 가지고 돌아갑니다.
·죄책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유함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염려를 가지고 나아가 평강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나아가 자존감을 가지고 돌아갑니다.
·영벌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영생을 얻어가게 됩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교환입니까? 이 얼마나 행복한 교환입니까?
영화에서 종종 보는 마약거래 장면은 거의 예외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마약과 돈의 교환에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지요. 혹시 돈 가방이 비어 있거나 위조 지폐로 가득차 있지나 않은지, 혹은 밀가루 탄 마약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가 번뜩입니다. 그러다 빈 가방이나 쓰레기를 가지고 나온 눈치가 있으면 양측의 총구는 불을 뿜으며 피를 튀깁니다. 모두다 손해 보는 교환을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교환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참 이해할 수 없는 교환을 하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이란 모조리 "쓰레기"들 뿐인데 하나님은 그것을 모두 천국의 복으로 교환하여 주십니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언짢아하시거나 짜증을 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고통, 절망, 미움, 원망, 분노의 쓰레기를 다 받아주시고 즐거워하십니다. 그리곤 평안, 행복, 희망, 사랑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나님은 참 이상한 교환을 즐기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나도 즐겁고 하나님도 즐거우신 "즐거운 교환"입니다.
고난절기를 보내고 부활절을 기다리며 참으로 즐거운 교환을 시도하고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몸과 가슴 그리고 삶의 환경속에 남아 있는 모든 저주를 주께 가져가 천국 복으로 교환해 보십시다. 이 땅의 모든 상처 입은 가정들이 즐거운 교환의 복을 누렸으면 합니다. 이 고난주간 멀어졌던 부부, 부모와 자식, 친구 관계들이 온전하게 회복되었으면 합니다. 나아가 갈등을 빚고 있는 교회들, 분쟁 중에 있는 교회들, 분열된 교회들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화해하고 하나 되었다는 소식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로 교회를 떠난 성도들이 돌아오고 목회자들의 영성과 리더십이 회복되고 교회들마다 예배의 영광이 회복되는 소식으로 이 땅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사회, 우리민족의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모습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한일 양국이 '독도 영유권'을 놓고 날카로운 예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제정으로 한국민들의 반일감정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한일 국교수교 40주년 기념의 해에 자행된 "제2의 침탈행위"로 양국간 갈등의 골이 더 깊게 패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한일간의 갈등뿐만 아니라 남북간의 문제, 통일의 문제, 북한의 핵의 문제까지 회복되어 이 땅에 자유와 희망이 선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II. 세상 종교와 생명의 기독교
자! 우리가 어떻게 즐거운 교환, 이토록 행복한 신적교환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람이 밖에서부터 안으로의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주장하는 바입니다. 둘째는 정반대로 안으로부터 밖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종교인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런점에서 기독교가 종교라면 세상 모든 종교는 종교일 수가 없는 것이며 만약 세상 종교들이 종교라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인간이 조금씩 행위를 고쳐나가고 선행을 쌓아 가다보면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에 문제가 생겼을 때 병든 가지를 짤라주고 시든 꽃도 따주고 하다보면 나무가 건강해 진다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고행도 하고 깊은 묵상도 하고 종교에 심취하다보면 어느날 도를 깨달은 부처가 되고 유교의 하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철학이 기독교 안에서도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계명을 지켜 나감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에 이르고 복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이해하려는 사람 - 소위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지치기로 병든 나무를 고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뿌리입니다. 뿌리를 치료하고 뿌리를 바꾸어 줄 때 나무는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갈라디아서 2:16 말씀을 같이 읽어 볼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여기 대명사가 3번 나오는데 "사람이"라고 시작했다가 "우리도" "우리가"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입니다. 그리고 이 한절 말씀속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을 3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왜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너희 힘으로 저주를 물리칠 수 없다. 너희 노력으로 복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율법지켜 의롭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이지요.
한국 천주교 지도자 가운데 윤 모 신부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가 천주교의 연옥교리를 변증하는 글에 서창제라는 개신교 교인이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윤 신부에게 고백한 내용이 나옵니다.
서씨가 개신교로부터 천주교로 개종한 후에 천주교의 교리들 중 가장 만족이 여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서씨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연옥교리입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내가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자문자답해 보았습니다. 지옥 갈 만한 죄악은 물론 없지만 내가 천당 갈 것인가 물으면 양심의 대답은 '노(No)'였습니다. '너같이 게으르고 불평 많고 종종 남을 미워하고 흉보고 시기하는 것이 어떻게 천당에 가겠다는 것이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갈 곳은 지옥밖에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천주교에 개종하여 천당도 지옥도 아닌 거시서 덕을 쌓아 천당 간다는 연옥교리를 알고 나니, 이제 저 크나큰 인생의 난제가 완전히 해소되었습니다."
얼른 듣기엔 신앙이 진실하고 겸손한 인품에서 나온 고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기독교 진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인간적 생각입니다. "눈을 감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니 천국 갈 확신이 없었다." 기독교는 눈을 감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듣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눈을 부릅 뜨고 성경의 약속을 바라보는 종교입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지옥갈 만한 죄악은 물론 없고" 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입니까? 기독교는 자기가 자신을 판단하여 의롭고 안의롭고를 결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또 "그러면 내가 천당 갈 것인가 물으면 양심의 대답은 '노'였습니다" 이 또한 얼마나 한심한 생각입니까? 이 얼마나 우스꽝스런 판단입니까? 성경적 기독교는 내 양심의 대답이 천 번, 만 번, 억만 번 '노(No)' 하더라도 예수께서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말씀하시면 그 죄는 사라집니다. 그때 "아멘 믿습니다" 그러면 구원받는 겁니다. 할렐루야.
III. 먼저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라
어떻게 우리가 즐거운 교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먼저 자신의 문제를 올바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망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시대는 썩고 역사는 병들고 백성들은 망하게 생겼는데 자신만 의로운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백성들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상중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쌓은 의란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구나." 여기 더러운 옷이란 부상병의 피고름을 감싸고 있던 냄새나는 붕대를 말합니다. 타락한 남편, 방탕한 자식을 위해 기도하다가 자신의 부족함, 옹졸한 가슴, 변화되지 못한 성품의 못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가정이 회복되는 겁니다.
이사야는 어느날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사회가 너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 이 사회를 고쳐주세요'하고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이사야가 자기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고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오! 주여, 나는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을 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입술을 가립니다. 왜요? 그 당시 전통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성한 사람을 만났을 때, 입술을 가리며 '나는 부정하다' 소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한 사람이 그를 돌로 쳐죽여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사회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였구나, 가정의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내 문제였구나,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나병환자 같은 죄인입니다." 고백할 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정결케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로 강물로 빠졌습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구조대원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건질 생각은 않고 서서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빨리 들어가서 건지라고 야단을 해도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허우적거리다가 지친 나머지 기진맥진합니다. 그제야 구조대원이 물에 뛰어들어가서 그를 건져냅니다. "왜 사람을 빨리 건지지 않았소?" 구조대원은 말합니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발악할 때에 물에 들어가면 나도 죽고 저도 죽습니다. 완전히 기운이 빠져서 손을 들어야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히 항복한 다음에야 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버둥버둥하고 있으면 안됩니다. 스스로 의롭게 해보겠다며 자기 노력과 자기 의지로 백 번을 맹세하고 손을 자르고 해본들 될 일이 아니예요. 혈서를 쓴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성경은 말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 그 노력까지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길이요, 의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이것은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롭게 되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의 의를 수용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수용합니다. 그 거룩한 능력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거기서 바로 즐거운 교환은 시작되는 겁니다.
IV. 십자가를 통해서 내 저주를 담당하시고 나를 복되게 하신 사실을 받아 들여라
주려 죽게된 자신, 저주의 물에 빠져 망하게 된 자신의 실존을 발견했으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그 신적교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저주받은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겁니다. 기준이 없으면 잘못도 없고 정답이 없으면 오답도 없고 과녁이 없으면 오발탄도 없는 거지요. 인생의 정답을 주신 이유는 지금 내 상태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육체적 저주, 정신적 저주, 영적 저주, 환경적 저주, 물질적 저주에 빠진 너는 희망이 없다. 너는 죽어 마땅하다"라고 율법은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 죄를 담당하고 내가 져야할 모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거기서 "다 이루었다. 다 갚았다" 말씀하시며 내가 감당해야 할 형벌을 다 갚아 주셨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읽어 볼까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한 절 속에 "저주"란 말이 세 번씩이나 나옵니다. 왜 그냥 돌아가셨다고 말하지 않고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굳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받았다고 말씀합니까? 여기에 배경이 있습니다. 그냥 살다 죽으면 땅에 묻지요. 그러나 율법을 범하고 저주받아 죽으면 돌로 치고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내가 저주를 짊어지고 돌에 맞아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내 대신 저주를 받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을 받아 들여야 즐거운 교환이 내게 일어납니다.
본문 2:19-20에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언합니다. 예수께서 죽으실 때 내 저주도 죽었습니다. 그가 살아날 때 내 의도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하나님, 저 김 아무개 성도를 저주하셔야 합니다. 저주의 구렁텅이에 그냥 버려두셔야 합니다. 저가 자신의 죄와 허물로 저렇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변호하십니다. "아닙니다. 저희 저주를 내가 다 담당했습니다. 저가 나를 믿고 이 즐거운 교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피흘리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선언하십니다. "다시 정죄함이 없으리라" "다시는 저주가 없으리라!"
받아들이세요. 아멘하고 수용하세요. 즐거운 교환을 당당히 받아들이세요!
오 주여, 이 신나는 교환이 제게 일어났음을 믿습니다!
성경에 제일 뻔뻔스러운 한 사람이 나옵니다. '돌아온 탕자'입니다. 아버지가 잔치를 벌여준다 해서 떡하니 잔치상을 받아먹는 그 아들을 좀 보세요. 얼마나 뻔뻔 스럽습니까? 형이 투덜거릴만도 합니다. 아버지 재산을 다 없애고 돌아왔는데도 아버지가 영접해 주니까 그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염치없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 되고, 영원히 죽을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서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것 - 이것을 깨끗이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이것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즐거운 교환은 시작됩니다. 아버지가 주시겠다는데 나는 의로워질 때까지 받을 수 없다? 이 얼마나 교만한 태도입니까?
수용! 이것이 내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도 즐겁고 아버지도 즐거운 신적 교환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교환이요 즐거운 교환입니다.
V. 즐거운 교환을 경험한 사람의 즐거운 사명
즐거운 교환을 맛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친히 행하신 그 교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제 그 즐거운 교환을 경험한 사람들이 당연히 하게 되는 즐거운 사명이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은 즐거운 사명으로 완성되어집니다.
즐거운 교환은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뿌리를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이 접붙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접붙임 이후에 가지가 하는 일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맺는 열매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품의 열매요 다른 하나는 사역의 열매입니다. 여기 성품의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즐거운 교환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열매란 이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오지요.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 본문에서는 늘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20절에서는 어떤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까? "산다"는 단어가 세 번씩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맛보았으면 그대로 산다는 겁니다. 그 복된 존재로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삶을 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잘 18절 후반부에서 19절 말씀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기서도 세 번씩 반복되어 나오는 "화목"이란 말은 원문에서 "교환한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교환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교환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교환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즐거운 교환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즐거운 교환의 소식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상처에 갇혀 살아가는 사람들, 저주에 눌려 살아가는 사람들, 율법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상처를 낫게 하고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② 그분께 나아와 당신의 짐을 맡기고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받으십시요.
③ 십자가는 당신의 능력입니다. 축복입니다. 즐거운 교환의 장소입니다.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얼마나 즐거운 소식입니까? 이 얼마나 즐거운 사명입니까? 이 얼마나 즐거운 직분입니까?
H.A.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한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을 하고 궁에 들어갔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래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여왕이 친히 나와 재판을 합니다. 심문을 받는 그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된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이런 엄청난 죄를 지었지만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왕이 그에게 "그래, 내가 너를 살려준다면 그 댓가로 무엇을 하겠느냐?"하고 묻습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순간에 죄인은 "조건이 있는 은총은 은총이 아닙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왕은 그를 석방했습니다. 무조건 석방했습니다. 그 후 역사는 이런 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고 헌신적인 종은 없었다." 평생 여왕의 명예를 높이는 일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을 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은혜입은 삶이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즐거운 교환은 즐거운 사명으로 완성됩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매주일 「즐거운 교환」이라는 주제아래 말씀을 듣고 실제적으로 즐거운 교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이 영생으로 ·상처가 치유로
·죄책감이 자유함으로 ·염려가 평강으로
·열등감이 자존감으로 ·우울증이 유쾌함으로
·가난이 부요로 ·위기가 기회로
·갈등이 화목으로 ·저주가 축복으로
교환되는 즐거운 교환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축복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갈 2:17-21 / 곽선희 목사
오늘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부끄러운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3월에 뉴욕에 있는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었는데 집회를 마치고 나서 하루 시간을 내서 차를 하나 빌려 가지고 드라이브를 좀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틀란타 시티에 가서, 그게 도박장이 있는 도시입니다. 슬롯머신을 통해서 도박을 해 가지고 130불을 땄습니다. 그것 가지고 모든 비용을 다 치르고, 아주 후하게,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도박 따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땄을 때 일어서야 합니다. 이제 얼마 벌렸는데, 그 쿼터가 500개가 쏟아져 나옵니다. 이만한 통에 가득 돼요. 이거 쏟아진 다음에 벌떡 일어서고 말았어요. 그게 어렵습니다. 꼭 더 나올 것 같거든요. '좀 더 따면 안되나?' 그러다가는 다 집어넣고 맙니다. 그게 망조예요. 그러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땄을 때 벌떡 일어서는 거, 그거 보통 위대한 용기가 아닙니다.
두 번째는 얼마를 잃었습니까? 잃었으면 이제 잃은 것으로 끝나야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만회하려고 들면 안됩니다. 그것이 패가망신하는 이유입니다. 얼마를 잃었든 잃은 것은 잃은 거예요. 그냥 끝난 거예요. 다시 시작을 해야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고 하다가 자기 생명 다 바치는 거예요. 여러분 얼룩진 과거, 잘못된 일, 후회스러운 게 너무 많아요. 그 명예에 있어서 경제에 있어서 인권에 있어서 많은 손해가 있어요. 이 분하고 억울한 것, 이거를 봉창을 내겠다는 거죠. 만회하겠다고 하다가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가는 거죠. 지나간 건 지나간 거예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예요. 손해를 본 것은 본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을 내야 됩니다. 바로 여기에 자기 자신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올시다. 자기와의 싸움이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리버라고 하는 유명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앙하는 사람들의 윤리생활을 말하면서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유형을 말합니다. 첫째는 Man the Maker, 자기 중심적으로 살며 스스로 행동합니다. 무엇인가 만들어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에요. 내가 무엇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한 의식의 존재가 있고, 둘째는 Man the Citizen.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를 시민전체 속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이 시민들과 나와의 관계, 이 윤리성에 있어서 의무와 율법을 잘 지켜가겠다. 그 누구에게도 손해를 끼치지 않고 바른 시민의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거기에 모든 힘을 기울이며 사는 사람이 있다. 세번째 사람은 Man the Responser, 그것은 항상 응답하는 자로 삽니다. '나는 너무 사랑을 많이 받았어. 나는 분에 넘치는 신세를 졌어. 사람에게도 하나님에게도. 나는 늘 부족하고 이렇게 형편없는데 받은 사랑 받은 은혜가 너무 크다. 이것은 내 한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서 그는 Responser로 오직 응답적 존재로 자기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쪽입니까? 이 모든 문제를 제가 더 분석해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란 무엇입니까? 예수를 배우는 것입니까?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까? 예수를 본 받겠다는 것입니까? 예수처럼 살아보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예수를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겁니까? 다 귀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가지고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엄격히 말하면 오순절 성령받을 때까지는 예수의 제자가 아닙니다. 그저 예수를 따라 다니는 사람이죠. 이걸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말까지는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여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체험이 있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체험과 함께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올시다.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거기에 문제가 있고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올시다.
그래 '예수를 믿는다'란 곧 십자가 이해에 있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쳐다볼 때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요 내 대신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가 죽어야 할 존재인데 그가 대신 죽었습니다. 아직 나는 살아있으나 의미상으로 법적으로나 영적으로는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내 대신 그리스도가 죽었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체험이 확실해야 됩니다.
또한,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 계시입니다. 우리는 '사랑' 할 때 여기 좀 문제가 있어요. 아이들도 크면서 보니까 가끔 속상할 때 그래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정말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 사랑을 의심해요. 그러나 부모님으로서는 이것 참 깜짝 놀랄 일입니다. "안 사랑하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 당연하고 얼마나 사랑하고 정말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데 이 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이 안 되는 거예요. 왜요? 사랑의 방법이 다르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할 때, '아! 하나님의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건강해야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 사업도 잘 돼야지. 그리고 세상에서도 명예도 얻고 잘 살아야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는데 왜 나는 이 모양이냐 이거야, 한평생.'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거,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그거 맘에 안 들어요. 그게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마음에 들어야 되는 거예요. "독생자를 주셨다" 그것으로 충분해야 됩니다.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그 속에 엄청난 사랑의 계시가 있으니까요.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그 사랑의 감격함.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바로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에요.
또 십자가를 보면서 십자가와 부활과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바라봅니다. 세상은 어둡지만 십자가를 쳐다보면 십자가 뒤에 부활과 영생의 길이 환하게 관조됩니다. 이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주 신비로운 신학적 정리를 해줍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I am crucified with Christ. 내가 십자가에 죽었다, 놀라운 얘기입니다. 유명한 칼 바르트는 언제나 이것을 말해줍니다. 저는 그 이론을 매우 좋아합니다. Double image of the cross.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저만큼 죄인이라는 것이죠.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살아서는 안 되는 죄인이요. 십자가를 쳐다보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아요. 단 한마디 의견도 자기 의견을 고집할 수 없어요. 왜?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죠. 내 죄가 이만큼 많다는 거예요. 무슨 할말이 있어요?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도 그저 할 말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죄인이다' 하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십자가의 대가를 지불해서 구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 그만한 소중한 존재예요. 나의 존재는 나의 인물도 아니요 나의 능력도 나의 지능도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의 가치가 계시되어 있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에요.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나는 벌써 죽었다. 사도바울은 그래서 말합니다. Daily Die.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를 쳐다볼 때마다 새롭게 죽음을 확인해요. 마틴 루터는 이것을 받아서 좀더 깊은 말씀을 합니다. Daily Baptism 이라고 합니다. 매일 세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율법으로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 매일 같이, 날마다 새롭게 세례를 받는다,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나를 이겨보려고 했습니까? 가끔은 그런 말하데요. "마음을 비우세요." 비운다는 말을 쓰기도 하고 "자기와의 싸움이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그러나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을 본 일이 없어요. 마음을 비웠다고 큰소리 빵빵 치지만은 남보고 비우라고 하지 자기는 안 비우더라고요.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이기는 일이 나로 가능하냐는 얘기지요. 이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합니다.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내가 확인하는 것이올시다.
바로 며칠 전에 제가 저 평양에 갔다가 고향을 좀 방문하는데 차를 타고 사리원을 거쳐서 재령 거쳐서 신천을 쭉 가는데, 제가 신천을 지나갈 때 옛날에 제가 신천 가서 다른 일로 간 일은 없고, 김익두 목사님을 만나러 갔었어요. 그래서 김익두 목사님의 설교하시는 것, 연로하신 분이 설교하시는 것, 성경공부 가르치시는 것을 제가 들은 것이죠. 너무너무 제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젊었을 때. 그분은 언제나 설교나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자기가 경험한 거 자기 젊었을 때 경험한 이야기를 자꾸 하십니다. 그게 생생한 살아있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그가 예수를 믿었습니다. 믿기 전에는 신천 장의 유명한 깡패입니다. 아주 소문난 깡패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이제 전도사가 되어서 아직 목사가 되기 전에 너무 불같이 열심히 끓어올라서 매일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 저 사람 얼마 전까지 깡패였는데" 그러면 "옛날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이러고 다녔단 말이에요. 부엌에서 설거지하던 아주머니가 '김익두 죽었나 살았나 한번 시험을 해보자.' 문 앞에 와서 "예수를 믿으세요" 하는 걸 설거지물을 갖다가 얼굴에다 확 뿌려버렸어요. "죽었나 살았나 보자"했더니 김익두 전도사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죽었으니 네가 살았쟎느냐" 했답니다. 그렇지요? 내가 죽었으니 당신이 살았지 내가 만일에 옛날 사람이라면 이게 살아남아요, 오늘이 장례식 날이지. 안 그렇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어요. 누가 뭐라고 하던 말던 상관이 없어요. 나는 벌써 죽었어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어요.
특별히 오늘 본문 성경은 이렇게 강조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여러분,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율법 앞에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하나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완전히 지킬 때 자유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 것입니다만은 그건 이론이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누가 율법 앞에 의인이 있습니까? 작으나 크나 죄인은 다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 자유할 수 있는 심령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벌을 다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받든 대신 받든 벌을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 내가 죽어야 됩니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이라도 감옥 안에서 죽으면 그 시체는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율법은 살아있는 자를 정죄합니다. 죽은 자를 심판하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죽어질 때, 여러분 율법 앞에서 완전히 죽어질 때, 내 영혼이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쳐다봅니다. 십자가가 나 자신을 죽여버립니다. 쳐다볼 때 나는 죽었습니다. 이미 죽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자유, 그 신비로운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인입니다.
A. W. 토저 라고 하는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는 한 방향만 보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십자가만 보아요.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아요. 두 번째는 뒤로 후퇴할 수 없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과거가 없습니다. 과거는 다 십자가에 묻어버렸습니다. 생각할 것도 없고 피할 것도 없고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과거는 없습니다. 자랑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중심해서 생각합니다. 십자가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는 아무 공로가 없습니다. 한평생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일 뿐이지 내가 하는 일은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람에게는 아무 의도 공로도 없습니다.
캐나다의 마크 피셔라고 하는 분이 "골퍼와 백만장자"라고 하는 재미있는 책을 썼는데요 그 책 속에도 재미있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운동으로나 사업으로나 혹은 공부로나 성공하는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확실한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정입니다. 정열적으로 삽니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죠. 열심히. 그게 아주 필요해요. 두번째는 집중입니다. Concentration. 요새 보니까 박세리도 그러데요. 성공의 비결이 뭐냐고요? Concentraion. 그 젊은 나이에 애인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댄스홀에 가고 싶기도 하고 뭐 또 현장에 서서도 '남이 잘하나 못하나 남들이 뭐라고 하나' 막 신경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잊어버리고 오로지 Concentration. 심지어는 내가 지금 몇 점을 맞고 있느냐, 몇 점을 지고 있느냐 그것도 잊어버려야 됩니다. Concentration, 십자가에다가 집중적으로 주의를 집중하게 될 때 이제 그 안에서 모든 해답이 나옵니다.
갈라디아 5장 24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정과 욕심을 함께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정과 욕심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으니 나는 욕심이 없어요. 나는 정도 없어요. 바로 그 마음, 그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십자가 안에서 자기 존재를 발견합니다. 자기 의미를 발견합니다. 자기 운명을 결정합니다. 이게 그리스도 인입니다.
한국전쟁 때 있었던 이야기는 너무나 귀중한 이야기입니다. 지뢰가 터지면서 이 군인이, 저도 그런 걸 많이 보았습니다만, 몸이 공중으로 올랐다가 떨어졌어요. 아무 데도 다친 데는 없는데 이 두 눈알이 빠져나갔어요. 의사가 수술을 하게 될 때 "봉합수술을 하지만은 수술은 하나 자네는 안구가 없어서 장님이 될 수밖에 없겠네." 이 청년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장님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고 나를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의사는 말합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강제로 붙들고 마취를 해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붕대를 감아 놓았는데 며칠 후에 붕대를 풀게 될 때 의사는 이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분명히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자네를 위해서 안구를, 자기 눈을 빼준, 제공해 준 분이 계셔서 눈 하나는 볼 수 있게 됐네." 그랬더니 "애꾸눈으로 살면 뭘하나요" 이러더랍니다. 아니라고 붕대를 풀어주었습니다. 뿌옇게 앞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좀더 환하게 보이기 시작할 때 자기 앞에 서있는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어머니 눈 하나가 없습니다. 그때 그는 그 앞에 꿇어 엎드리고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저는 온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하게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살 것입니다." 여러분, 어머니의 눈 하나가 없는 것을 보고야 이 청년이 자기 삶의 가치를 재발견 한 것이올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 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런고로 골로새 3장 1절에서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아라. 위를 보라. 오직 위를 보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그 속에 내 생명이 감추어져 있느니라 그랬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 사랑으로 살아갈 때 무한한 자유를, 용기와 능력을 충만함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중심의 신앙
갈 2:19-20 / 이규현 목사
우리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리스도의 한가운데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는 예수의 죽으심에 관한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살았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리스도의 생애는 거의 많은 부분을 돌아가시는 마지막 한 주간에 할애하고 죽으심에 관련된 사건을 다양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바울은 1인칭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체험이 담긴 자전적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암송하고 애송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나의 고백으로 삼으며 많이 인용하고 다루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이니 암송하고 선포하며 입술에 익숙한 메시지가 된다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귀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본문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에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반역자를 향한, 죄인을 향한, 원수를 향한 사랑입니다.
아직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 앞에 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만나면서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율법 아래 자기의 의를 얻으려 몸부림쳤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그러니 그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전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앞에 그가 무너지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갈보리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은 마치 고압에 감전된 것과 같은 전율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나셨습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믿기로 결단하는 이유는 어떤 기가 막힌 교리를 이해하고 믿은 것이 아니고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농축된 사랑, 십자가에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난 다음의 고백이지 믿음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하고 난 후에 내가 믿는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시면서 그 사랑에 우리가 꽂히면 감동받게 되고 설득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2장 20절은 바울의 이러한 고백입니다. 사랑에 녹아 할 말을 잊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길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충분히 녹이고 채우고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그분 앞에 고백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사랑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나면 내 사랑을 드리고도 모자랍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하고, 헌금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게 하며 희생하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도 온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 헌신하고 생명까지 드리며 순교적 삶을 살았던 이들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내가 믿으려고 애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자, 창조자, 죄 없으신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에 바울 사도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리스도와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죽으신 사건 속에 나도 동일하게 손과 발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라는 고백입니다. 2천 년 전에 동떨어진 그분만의 사건이 아니라 나의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때 내 안에 있던 모든 저주가 끝이 나고 구원이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것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분의 죽으신 사건과 동일하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내가 지고 있던 거대한 죄의 쓰레기가 깨끗이 처리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이 고백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순간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더 이상 이전의 나는 살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면 이제 나의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제는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오셨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더 이상 주인 노릇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주인 되게 하시는 인생, 내 안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인으로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멋진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내가 죽는 삶입니다. 내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경험되어져야 할 삶입니다. 이제는 내가 삶의 주체가 아닙니다. 주님이 삶의 주체가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 안에서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잘 죽는 것입니다. 왜 삽니까?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죽어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죽어야 내 옛 삶이 죽고, 내 자아가 죽고, 내 욕심이 죽고, 내 탐심과 자존심이 죽어야 그곳에 예수가 드러나십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기가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나는 상대를 몇 번도 더 죽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비극과 불행은 무엇입니까? 경제적 위기도 오고, 어려움도 오지만 이것은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진짜 위기는 사랑의 위기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다면 그 돈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잘 살고 경제적으로 나아졌지만 왜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까요?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매장을 하는 사건들이 왜 일어날까요? 오늘날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랑의 실종입니다.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도 이전보다 못합니다. 무엇인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랑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치 사랑은 드라마 속에서만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사랑이 말라버렸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강한 자기애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이를 죽이고 암매장하고 자기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우울증이 만연한 이유가 뭘까요? 일종의 나르시시즘 때문입니다. 집단적으로 “병적 자기애”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고,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모두 병적인 자기애의 지독한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자기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묵상하고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이후에 후유증을 앓습니다. 소위 성공 우울증입니다. 홀로의 성공은 없습니다. 성공은 했지만 주의에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성공을 했는데 그 성공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 고립감… 이기적 삶을 살아온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자기의 업적에 파묻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실한다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갑니까?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면 사람 곁에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울증이 지독하고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입니다. 어떤 사역자가 이것을 밝혔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상처투성이의 삶을 삽니까? 상처를 받는 이유는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자아가 살아서 교회 봉사를 하니 날마다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의 자아가 살아 자기의 열심으로 자기를 충족하고 만족하기 위해 봉사하면 상처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보면 그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습니다. 내가 좀 불편하고 힘들어서 거추장스러워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만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끝났습니다. 그를 죽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살려내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를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살려내야 그로 인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산다면 살 것이라 착각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원리는 반대입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행위가 이타적이지만 결국은 그 사랑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자기 사랑에만 빠져 다른 사람을 자기 사랑에 끌어넣으면 불행해 집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불행은 대부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랑방 안에서 관계가 불편하고 힘든 이유는 죽지 않은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를 쌓은 곳에 행복이 찾아올 리가 없습니다. 이기심의 독소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죽지 않은 자아, 이기심의 독소는 남을 죽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먼저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려고 하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낯설어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이웃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는 모든 우울증의 가장 강력한 치료제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아보십시오. 우울증이 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애에서 빠져나와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자기를 희생시키는 삶을 살도록 요청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죽일 때, 행복이 옵니다. 참된 사랑을 원한다면 이기심으로 뭉쳐진 나의 자아가 매일매일,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줄 믿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누리게 하시고 나로 살게 하십니다. 행복을 구한다고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저절로 행복이 올 것을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아 만족, 자아충족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 내 기분을 잘 맞춰주는 목사, 나를 위해 완벽하게 맞춰진 사랑방을 구하면 실망하고 상처받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해도 그 교회는 그렇게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려면 반드시 한 번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나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깨어지며 나의 이기심이 십자가 앞에서 처리되는 경험을 만드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내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처리되고 끝이 나야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우리 삶이 바뀝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지는 경험을 해보십시오.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가정 안에 행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회복이 일어나고 깨어진 가정이 살아날 것입니다. 죽기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방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묶여 있던 모든 관계들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여러분의 욕망이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 뜻과 생각과 내 정욕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 모든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길 원하는 그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내 뜻과 욕심이 죽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만듭니다. 우리의 자아와 뜻이 강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죽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누가 죽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찾아온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이 찾아왔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십자가를 통과하고 난 이후 부활이 온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정중앙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원리는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죽는 경험을 계속해 나갈 때, 끊임없이 우리 삶이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내 자존심이 죽어질 때 창피하고 수치심이 오는 치욕적 경험을 할 때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멋지게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만이 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가 죽어야 부활의 예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주짐이 사심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고-Ego)라는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늘 사고를 치는 나라는 자아의 존재가 커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원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온전히 죽으면 주님이 나를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속에 여러분이 온전히 죽으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우리의 입술로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선포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죽어도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번씩 닭을 잡았는데 잘못 잡아서 완전히 죽이지 못해 목이 잘린 채로 집 곳곳을 반쯤 죽은 닭이 돌아다녀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반쯤 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죽어야 합니다. 내 자아가 살아날 때, 내 자존심이 살아나고 분노가 일어날 때, “나 000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했을 때 그 자신만 산 것이 아니라 그 민족까지 살렸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는 우리 삶에 정확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정이 삽니다. 내가 죽으면 내 직장이 살고, 내가 죽으면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괜한 자존심으로 괜한 자기 자만, 자아로 아직도 살아서 사는 동안은 남이 나를 죽이게 됩니다. 죽으면 산다는 원리를 깨닫고 살 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멋지게 살려주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곳에 예수의 향기가 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을 때,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내가 죽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고 십자가 안에 승리가 있습니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길임을 믿으시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살아나시게 할 때 새로운 내 삶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고난주간에 여러분 안에 죽고 또 죽는 경험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십자가 안에서 건강한 삶. 행복한 삶, 승리의 삶이 보장될 줄 믿습니다. 놀랍고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영역에 회복과 변화와 풍성한 삶을 약속하는 key가 되는 구절임을 기억하시고 그 십자가를 붙잡고 그 원리 아래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는 경험을 하실 때, 하나님이 또 살리시고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그리스도의 한가운데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의 공생애를 기록한 4복음서는 예수의 죽으심에 관한 마지막 한 주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살았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리스도의 생애는 거의 많은 부분을 돌아가시는 마지막 한 주간에 할애하고 죽으심에 관련된 사건을 다양하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음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바울은 1인칭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체험이 담긴 자전적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짧은 한 구절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암송하고 애송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일 뿐 아니라 나의 고백으로 삼으며 많이 인용하고 다루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이 말씀은 귀하고 은혜로운 말씀이니 암송하고 선포하며 입술에 익숙한 메시지가 된다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귀한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본문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중에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이유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호하거나 추상적이지 않고 철학적이지 않습니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자신의 온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반역자를 향한, 죄인을 향한, 원수를 향한 사랑입니다.
아직 우리가 연약할 때 사랑을 받을만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 앞에 깨어졌습니다. 십자가를 만나면서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율법 아래 자기의 의를 얻으려 몸부림쳤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모든 것이 깨어졌습니다. 그러니 그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전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 앞에 그가 무너지고 그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갈보리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은 마치 고압에 감전된 것과 같은 전율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로 온전히 드러나셨습니다. 사도요한도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화목제물은 십자가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믿기로 결단하는 이유는 어떤 기가 막힌 교리를 이해하고 믿은 것이 아니고 갈보리 언덕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농축된 사랑, 십자가에 무장해제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고 난 다음의 고백이지 믿음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경험하고 난 후에 내가 믿는다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아들을 죽이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당신의 사랑을 확증시키시면서 그 사랑에 우리가 꽂히면 감동받게 되고 설득을 당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본문 2장 20절은 바울의 이러한 고백입니다. 사랑에 녹아 할 말을 잊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 당신은 정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알 길이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을 충분히 녹이고 채우고도 남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그분 앞에 고백하고 그분을 찬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그 사랑이 나를 끌고 가는 것이 헌신입니다. 그 사랑을 깨닫고 나면 내 사랑을 드리고도 모자랍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헌신과 봉사를 하게 하고, 헌금도 드리고 예배도 드리게 하며 희생하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합니다. 이 모든 것 한가운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오늘도 온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의 삶, 헌신하고 생명까지 드리며 순교적 삶을 살았던 이들의 한가운데에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와서 내가 믿으려고 애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절대자, 창조자, 죄 없으신 그분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고 경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에 바울 사도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그리스도와 죽으실 때 나도 함께 죽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께서 홀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에 예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혀 죽으셨는데 그 죽으신 사건 속에 나도 동일하게 손과 발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라는 고백입니다. 2천 년 전에 동떨어진 그분만의 사건이 아니라 나의 사건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때 내 안에 있던 모든 저주가 끝이 나고 구원이 나에게 임하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이것은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분의 죽으신 사건과 동일하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을 때 내가 지고 있던 거대한 죄의 쓰레기가 깨끗이 처리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죽을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이 고백이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는 순간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대단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더 이상 이전의 나는 살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나도 죽은 것입니다. 내가 죽었다면 이제 나의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제는 내 속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주인이 오셨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살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더 이상 주인 노릇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주인 되게 하시는 인생, 내 안의 그리스도가 온전히 주인으로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멋진 삶을 사는 비결입니다.
나는 죽고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어떤 삶입니까? 내가 죽는 삶입니다. 내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사건으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경험되어져야 할 삶입니다. 이제는 내가 삶의 주체가 아닙니다. 주님이 삶의 주체가 되십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 안에서 기꺼이 죽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잘 죽는 것입니다. 왜 삽니까? 잘 죽기 위해서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죽어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내가 죽어야 내 옛 삶이 죽고, 내 자아가 죽고, 내 욕심이 죽고, 내 탐심과 자존심이 죽어야 그곳에 예수가 드러나십니다. 세상은 모두가 자기가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내가 살려고 다른 사람을 죽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투쟁적으로 살아갑니다. 누가 나를 죽이려고 하면 나는 상대를 몇 번도 더 죽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비극과 불행은 무엇입니까? 경제적 위기도 오고, 어려움도 오지만 이것은 별로 걱정이 안 됩니다. 진짜 위기는 사랑의 위기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 없다면 그 돈은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전보다 훨씬 잘 살고 경제적으로 나아졌지만 왜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까요? 자신의 아이를 죽이고, 매장을 하는 사건들이 왜 일어날까요? 오늘날의 가장 큰 불행은 사랑의 실종입니다.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녀와의 사랑도 이전보다 못합니다. 무엇인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랑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치 사랑은 드라마 속에서만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사랑이 말라버렸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강한 자기애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입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이를 죽이고 암매장하고 자기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우울증이 만연한 이유가 뭘까요? 일종의 나르시시즘 때문입니다. 집단적으로 “병적 자기애”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고,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모두 병적인 자기애의 지독한 자기중심적 개인주의 때문입니다.
자기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자기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자신을 묵상하고 자신을 생각하고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 이후에 후유증을 앓습니다. 소위 성공 우울증입니다. 홀로의 성공은 없습니다. 성공은 했지만 주의에 사랑을 나눌 대상이 없어졌습니다. 성공을 했는데 그 성공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 고립감… 이기적 삶을 살아온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자기의 업적에 파묻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실한다면 그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외롭게 살아갑니까? 자기밖에 없습니다. 자기만의 행복을 추구하면 사람 곁에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울증이 지독하고 기승을 부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입니다. 어떤 사역자가 이것을 밝혔습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만 살겠다는 생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상처투성이의 삶을 삽니까? 상처를 받는 이유는 내 자아가 죽지 않아서입니다. 자아가 살아서 교회 봉사를 하니 날마다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의 자아가 살아 자기의 열심으로 자기를 충족하고 만족하기 위해 봉사하면 상처받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보면 그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나도 죽습니다. 내가 좀 불편하고 힘들어서 거추장스러워 아이를 죽였습니다. 그런데 아이만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끝났습니다. 그를 죽이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살려내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죽여야 내가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죽어야 내가 사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를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고 살려내야 그로 인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만 산다면 살 것이라 착각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십자가의 원리는 반대입니다. 내가 살려고 하면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행위가 이타적이지만 결국은 그 사랑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자기 사랑에만 빠져 다른 사람을 자기 사랑에 끌어넣으면 불행해 집니다. 오늘날 우리 삶의 불행은 대부분 거기에서 비롯됩니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사랑방 안에서 관계가 불편하고 힘든 이유는 죽지 않은 자아 때문입니다. 자아를 쌓은 곳에 행복이 찾아올 리가 없습니다. 이기심의 독소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죽지 않은 자아, 이기심의 독소는 남을 죽이기 전에 이미 자기 자신이 먼저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세워주려고 하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사는 것에만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을 위해 나를 희생한다는 것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낯설어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려고 하면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이웃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십자가는 모든 우울증의 가장 강력한 치료제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나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살아보십시오. 우울증이 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자기애에서 빠져나와 타인을 사랑하는 쪽으로 자기를 희생시키는 삶을 살도록 요청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사랑하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죽일 때, 행복이 옵니다. 참된 사랑을 원한다면 이기심으로 뭉쳐진 나의 자아가 매일매일, 매 순간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될 줄 믿습니다. 내가 죽으면 나의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때 주님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을 누리게 하시고 나로 살게 하십니다. 행복을 구한다고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저절로 행복이 올 것을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와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자아 만족, 자아충족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교회, 내 기분을 잘 맞춰주는 목사, 나를 위해 완벽하게 맞춰진 사랑방을 구하면 실망하고 상처받고 분노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교회가 있다고 해도 그 교회는 그렇게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신자다운 신자가 되려면 반드시 한 번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나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깨어지며 나의 이기심이 십자가 앞에서 처리되는 경험을 만드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내 모든 것이 십자가 안에서 처리되고 끝이 나야 우리의 신앙이 새로워지고 우리 삶이 바뀝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꺼이 우리의 옛 자아가 죽어지는 경험을 해보십시오. 지금이라도 여러분의 가정 안에 행복이 넘쳐날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회복이 일어나고 깨어진 가정이 살아날 것입니다. 죽기만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사랑방이 천국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묶여 있던 모든 관계들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할 때도 여러분의 욕망이 죽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내 뜻과 생각과 내 정욕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 모든 뜻이 죽고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길 원하는 그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내 이기심을 만족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내 뜻과 욕심이 죽어지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만듭니다. 우리의 자아와 뜻이 강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실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해야 생명의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죽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누가 죽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찾아온 부활을 믿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이 찾아왔습니다. 승리의 비결은 십자가를 통과하고 난 이후 부활이 온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정중앙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놓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원리는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죽는 경험을 계속해 나갈 때, 끊임없이 우리 삶이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어떤 때는 내 자존심이 죽어질 때 창피하고 수치심이 오는 치욕적 경험을 할 때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멋지게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자만이 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고 내가 죽어야 부활의 예수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주짐이 사심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죽는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고-Ego)라는 자리에 “그리스도”가 대신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늘 사고를 치는 나라는 자아의 존재가 커지면 소망이 없습니다. 나는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나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원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고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이 예민해져서 화낼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온전히 죽으면 주님이 나를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가정 안에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속에 여러분이 온전히 죽으시기 바랍니다. 매 순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우리의 입술로 날마다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을 내가 믿음으로 선포할 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죽어도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번씩 닭을 잡았는데 잘못 잡아서 완전히 죽이지 못해 목이 잘린 채로 집 곳곳을 반쯤 죽은 닭이 돌아다녀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반쯤 죽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죽어야 합니다. 내 자아가 살아날 때, 내 자존심이 살아나고 분노가 일어날 때, “나 000은 이미 죽었습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했을 때 그 자신만 산 것이 아니라 그 민족까지 살렸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는 우리 삶에 정확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하나님께서 살려주십니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정이 삽니다. 내가 죽으면 내 직장이 살고, 내가 죽으면 내 인생을 하나님께서 붙드십니다. 괜한 자존심으로 괜한 자기 자만, 자아로 아직도 살아서 사는 동안은 남이 나를 죽이게 됩니다. 죽으면 산다는 원리를 깨닫고 살 때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멋지게 살려주십니다. 우리가 죽을 때 그곳에 예수의 향기가 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선한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을 때,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내가 죽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안에 능력이 있고 십자가 안에 승리가 있습니다.
잘 사는 것은 잘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길임을 믿으시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가 온전히 살아나시게 할 때 새로운 내 삶이 시작될 줄 믿습니다. 고난주간에 여러분 안에 죽고 또 죽는 경험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을 잡아줍니다. 십자가 안에서 건강한 삶. 행복한 삶, 승리의 삶이 보장될 줄 믿습니다. 놀랍고 아름다운 삶의 비결이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이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의 전영역에 회복과 변화와 풍성한 삶을 약속하는 key가 되는 구절임을 기억하시고 그 십자가를 붙잡고 그 원리 아래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 죽는 경험을 하실 때, 하나님이 또 살리시고 살리시는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갈 2:19-21 / 김광일 목사
‘네 인생을 주님께 걸어라’는 최하진 선교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입니다. 그는 ‘배운 만큼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세상 상식을 역류하며 카이스트 박사의 영예를 뒤로하고 장래가 보장된 스탠포드 연구원 자리도 버리고 중국의 청소년들을 위하여 혈혈단신으로 광야에서 사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리라’는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 광야에 길이 나고 반석에서 샘이 터지고 만나와 메추라기가 공급되는 것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세상이 아닌 주님께 인생을 걸 때 어떻게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지 생생히 증거하였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 꿈을 실현하기 원하는 자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해주시는지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자신만이 주님께 인생을 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며 망설이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기적을 체험하게 하는 ‘주님께 인생을 걸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 미션(Dawn Mission) 선교회를 설립하여 중국에 열방학교를 세우고 공적인 직책도 없이 학교 청소부 겸 수위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학생들을 섬겼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 대덕단지에서 연구원 생활을 할 때 도박에 깊이 빠졌습니다. 모태신앙이었지만 교회에 가서 졸다 돌아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니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아들과 손자를 데리고 가던 중 하란에 머무는 장면이 나옵니다. 데라는 하란에서 205세를 살고 죽었습니다. 그것이 데라 인생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로 데라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정신 차리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때 ‘중국의 학생들을 위해 사역하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을 받고 중국에 건너가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집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지내며 영어를 배워 주었습니다. 부인은 학생들에게 밥을 먹이고 빨래를 해주면서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기쁨으로 감수하였습니다. 어느 날 중국 학생이 묻습니다. “이렇게 부담스럽도록 잘 해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인생의 목적도 없이 살던 나에게 예수께서 사랑을 부어주셨다. 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며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행복해졌다, 그래서 내가 받은 사랑을 표현하고자 이렇게 행하는 것이다. 너희도 부담을 느낀다면 받은 사랑을 누군가에게 베풀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날 부인이 거울을 보다가 말합니다. “내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해졌어요.” 바쁘다 보니 얼굴을 관리할 시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말합니다. “그래도 행복해요. 주근깨가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오잖아요.” 최하진 선교사 부부의 모습이야말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본문은 직설법 현재 시제로 현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의 ‘내 안에’는 ‘엔 에모이'인데 ‘나의 의식 안에’가 아니라 ‘나의 생애 속에, 나의 심령 안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지 못하였을 때는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하며 인본주의적 삶을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율법에서 해방된 이후부터 자신이 죽고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인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십니까? 과거는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현재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가고 있습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정체성이 분명하여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는 내안에 내가 살아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고, 별것도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고 목숨도 걸었지만 이제는 십자가에 자신은 죽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자’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는 의미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자유로 사는 것이라
성경을 공산세계로 밀수하는 일을 하였던 브라더 앤드류(Brother Andrew) ‘는 하나님의 밀수꾼’ (God’s Smuggler)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젊은 시절 네덜란드 군인으로 인도네시아에 주둔 할 때 원숭이 한 마리를 길렀습니다. ‘기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가족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기본이는 목 근처에 손을 대기만 하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새끼였을 때 목을 묶었던 철사가 기본이의 몸이 커지면서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목을 조였던 것입니다. 앤드류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원숭이의 목에 걸려있는 철사를 간신히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기본이는 피를 흘리며 고생을 했지만 고통이 없어진 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기뻐합니다. 그 모습을 보던 앤드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본이와 나는 하나가 되었다. 아픔에서 풀어준 일은 그와 나를 묶는 사랑의 끈이 되었다. 가질 만큼 가지고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죄악의 줄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여전히 묶여 있는 이유는 영혼을 옭아매고 있는 마귀의 사슬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께서 이 죄악의 줄을 제거해주시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실 때 우리의 얽어매고 있는 죄악의 사슬을 끊으시고 자유를 허락하실 것입니다.
본문 19절입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여기의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는 ‘노모 아페다논’ 로서 ‘율법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서 더 이상 요구를 받는 일도 더 이상 지배되는 일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영향력 아래에 머물러 있지 않은 자신의 상태를 ‘죽었다’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던 율법 의식을 끊어버리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께 대하여 자유할 수 없음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믿기 전에 가졌던 고정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와 의식의 틀을 마련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요, 섬기는 자는 낮은 자라는 생각이 완전히 죽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운 의식과 생각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필립 얀시 (Philip Yancey)의 저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는 인간이 겪는 엄청난 고통에 대해 성경적 해석을 하는 탁월한 책입니다. 그는 장애아를 낳은 어머니의 고통, 우울증에 시달리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 부모의 이혼과 자신의 우울증으로 고통당하는 신학생의 이야기, 두 자녀를 불치병으로 잃은 어머니, 심지어 필립 얀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가 태어나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는 소아마비에 걸려 교인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게 되어 필립 얀시는 하나님께 대한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책에 나오는 실제 이야기들은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으로 하나님께 실망을 느끼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공평,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숨어계심’입니다.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하신가?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하나님은 숨어계시는가?’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알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 실제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지 않으시고, 숨어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언젠가 공평하게, 드러나게, 분명하게 나타내실 날이 올 것입니다. 얀시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보이는 세상이 진짜이고 보이지 않는 세상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반대의 주장을 한다.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점점 더 진짜 세상이 되어 가고, 믿음은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길을 결정하게 한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상, 보이는 사람이나 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보이는 출세보다 내 안에 계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합니다.
본문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엔 피스데이 조’인데 ‘자신은 죽었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은 죽었기에 육체 가운데 사는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주신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함을 자각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희망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기쁨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태도입니다. 조금만 불이익이 다가오고 손해가 된다고 믿음과 상관없이 세상적 원리로 살아서는 결코 안 됩니다. 무릇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은혜로 사는 것이라
수도원에 영성이 깊은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기 위해 수도사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예수의 마음을 담기 위해 온갖 수련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분노, 세상 욕망과 정욕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수도사들은 원장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원장은 수도사들에게 깨어진 조그만 항아리를 주면서 물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수도사들은 열심히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물을 계속 부어도 깨어진 틈으로 물이 새어나가 항아리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황해 하는 수도사들을 보고 원장은 항아리를 가지고 따라 오라고 말하고는 물을 길어온 연못에 그 항아리를 집어 넣으라고 합니다. 수도사들은 깨어진 항아리를 연못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깨어진 틈으로 물이 스며들어 항아리에 가득 채워졌습니다. 물이 빠져 나가던 곳이 물이 스며 들어와 채우는 곳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때 원장이 이르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수고와 노력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어지고 금이 가 있는 약한 곳으로 스며들어 올 수 있도록 자신을 은혜의 강에 던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은혜는 수고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한 곳을 통해 스며들며 채워지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여기의 ‘폐하지’는 ‘아데테오’로 ‘거절하다, 저버리다’의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복음을 버리고 율법주의에 굴복하여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상태의 지속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사용되어 바울은 이러한 태도를 계속 유지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이 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게 합니까? 은혜는 거저 받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은혜가 거저 주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 받는 자들이 은혜 받은 것에 대하여 값을 지불한다면 더 이상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은혜를 베풀기 위하여 치러진 그리스도의 희생은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존심과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오직 기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어리석음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날마다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사 초기에 최봉석(崔鳳奭) 목사는 많은 능력을 행하였다고 최권능 목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예수의 사람이었습니다. 입만 열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습니다. 술집에 가서도 외치고, 남의 집에 가서도 외치고 일본 순사에게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조사를 받으면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일본형사들이 그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예수”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이렇게 매를 쳐도 “예수”, 저렇게 쳐도 “예수”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도 “예수”만을 외쳤습니다. 참다못한 형사가 “왜 입만 열면 예수만 외치는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최목사는 “내 몸 속에 예수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아무리 때려도 예수밖에 나올 것이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최목사는 가혹한 고문으로 병이 들어 병원에 실려 가는 중에도 “예수천당!”을 외쳤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습니까? 마음에 분노합니까?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안에 예수가 사십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면
갈 2:19-21 / 송기성 목사
‟아 하나님의 은혜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빌3:5,6). 그런데 그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갈2:19). 여기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려 함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 위함이라’ (in order that I might live for God.)는 뜻입니다.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의로운 자로서 살았을 때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박해한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으며 (행9:1),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고 (all the terrible things that he has done, 행9:13) 여겼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결단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20절 전반 부분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I have been put to death with Christ on his cross.) 라고 한 말은 사도 바울이 그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영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뜻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이제까지 자기가 메고 있던 율법의 멍에와 속박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유대교에 철저했던 그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며, 진정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이전에는 율법에 대하여 살았을 뿐 하나님께 대하여 살지 않았으며,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심으로 그는 더 이상 율법에 대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되었으며, 더 이상 율법적인 자기 의에 대하여 살지 않고 복음적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결코 더 이상 자기중심적으로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 것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If any of you want to come with me, you must forget yourself, carry your cross and follow me. 마16:24) 것입니다. 그 길은 물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 곧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롬8:17) 될 줄 믿습니다.
성 어거스틴 (St. Augustine, 354-430)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아주 믿음이 좋은 열렬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방황을 했습니다. 그는 쾌락주의에 빠져 도둑질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372년에는 그의 나이 불과 18살 때 어느 소녀와 동거해 오던 중 아들까지 낳기도 했습니다. 그 다음 해 마니교에 빠져 9년 동안 마니교 신도가 되었으며, 마니교와 결별한 후에는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집어 들고 읽으라. 집어 들고 읽으라. (Tolle lege, Tolle lege)” 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근처에서 놀던 어린 아이의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음성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음성에 순종하여 성경을 펴고, 첫 눈에 들어온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때 그가 읽었던 말씀은 로마서13장13-14절 말씀이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아멘!
어거스틴은 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말씀으로 깨닫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주후386년 32세 때 회심한 그는 33세 때 세례를 받았으며, 37세에 성직 안수를 받았고 43세 때 히포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주교가 된 그는 그때로부터 3년간「참회록」을 집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430년 76세에 소천한 그는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의 무거운 짐을 모두 당신께 맡깁니다. 나의 생명을 살리시고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119:18). 당신은 나의 미숙함과 허물과 연약함을 아시니 나를 가르치시고, 나를 고쳐 주옵소서.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분 (골2:3), 즉 하나님의 독생자가 흘리신 보혈로 인해 내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나 죄악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5장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의 육체와 모든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입니다 (Those who belong to Christ Jesus have put to death their human nature with all its passions and desires.).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힌 사람은 그 안에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미숙함과 허물과 연약함 등 여러분의 무거운 짐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생명을 살리시며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되시기를 우리를 위해 보혈을 흘리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2장20절 후반 부분에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라고 한 말은 ‘이제 내가 사는 내 인생은’ (This life that I live now.) 으로써 사도 바울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으로 변화되었음을 뜻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사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고백한 것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이며, 진정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는 세 가지 변화로 말하였습니다. 이제 그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① 나 대신에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고, ②율법 대신에 복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며, ③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현재의 새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겠노라고 했습니다. (I refuse to reject the grace of God.) 그 이유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 은혜 (카리스) 의 선물은 기쁨이고 감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I am what I am by the grace of God. 고전15:10) 라며 ‘그리스도 예수만을 자랑하고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을’ (빌3:3) 줄 믿습니다.
오늘은 존 웨슬리 목사님의 회심기념주일입니다. 그는 22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32세에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가서 2년4개월 동안 (1735.10.14-1738.2.1) 사역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믿음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었음을 번민하여 실토하였습니다. 1738년1월24일 일기에 그는 당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아메리카로 인디언들을 회개시키러 갔다. 오! 그런데 나를 회개시킬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누가 무엇으로 이 불신앙적인 악한 마음에서부터 나를 구해낼 것이란 말인가?”
존 웨슬리 목사님, 그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말한 믿음, 세상 모든 사람에게 권고한 믿음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고 부르짖을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738년5월24일 수요일 저녁 올더스케이트 거리에 있는 어느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설명을 할 때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꼈다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꼈으며 구원을 위해, 다만 그리스도만 믿고 있음과 주께서 내 죄를 아니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을 얻었다.” 아멘!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13장5절에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이 지적했듯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다가’ 버림받은 자가 되지 말고 주님께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건져 주셨음을 믿는 확신을 갖게 되시기를 내 죄까지도 다 거두어 가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14장7-8절에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해,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사나 죽으나 주님께 속한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그 사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심으로 사나 죽으나 주님께 속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나니
갈 2:19-21 / 이종윤 목사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절)고 고백했습니다.
Ⅰ. 신앙의 사람(The personality of the Christian faith)
①오늘 본문 20절에서는 1인칭 단수 대명사인 (내가, 나를, 내안에)가 6번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갈2:20절c). 이 고백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개별인간을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②하나님은 개인의 죄와 그 위험을 각자에게 보여주시고 성령의 조명으로 그 죄의 결과를 알게 하심으로 구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각자가 보고 믿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도, 헌신도 각자에게 주시고 받으십니다. ③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자는 나요, 그런즉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케 하시며 구원하십니다(요20:21절). ④나 자신이 모태신앙이라고 하면서 가족 뒤에 숨어 스스로 구원받는 성도라고 착각하는 이들도 있습 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거듭난 사람만이 참된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Ⅱ. 우리 개인이 그리스도와 연합해야 합니다.
(The interweaving of our personality with that of jesus Christ)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절)고 고백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와 성도가 함께 있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①“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20절a).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대표성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②“...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2:20절b).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근원이 되십니다. ③"...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절c).
Ⅲ.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품에 주어진 생명(The life that results from this blended personality)
①그리스도와 연결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새 생명은 비록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오늘 성도에게 있어서 옛 사람이 죽은 것이 곧 새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고전15:31, 고후5:17절). ②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는 거듭난 자의 삶이 됩니다. ③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새 생명이 되십니다. 오늘 우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각도 이상도 같아야 합니다.
맺는말.
하나님의 자녀는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나 자신이 육체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려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믿은 안에서 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도의 삶은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이 죽으심으로 성도는 새 생명을 얻었으니 힘과 용기를 다해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시는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