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의성은 한국의 대표적인 선비고을이다. 꿩이 상원사 종을 머리로 들이받아 구렁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로 말미암아
적악산을 꿩 치(雉)자 치악산(雉岳山)으로 바꿔 불리게 한 전설 속의 주인공도 의성에 사는 선비로 설정되어 있다.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는 선비고을 중의 선비고을이다. 이곳에는 선비의 혼이 깃든 만취당이 있고, 선비정신의 상징인 만년송
향나무가 있고, 서애 선생의 탄생 설화를 간직한 서림과 우물터가 있고, 선비들의 삶의 지표인‘경심잠’ (警心藏) 10조가
있다.
“와해(瓦海)라고 불릴 만큼 기와집들이 고색창연하게 자태를 뽐내던 마을이었어요. 왜놈들의 침탈과 6.25 전란으로 모두
소실되고 지금 이 건물 하나만 덜렁 남게 되었었지요.” 우연히 만난 젊은 후손 한 분이 보수 공사가 한창인 만취당을 가리
키며 분노가 치미는 듯 거칠게 말했다.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를 계기로 유림들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병신창의(1896년)당시 사촌마을은 의성지역
의병운동의 중심지였다. 운산 김상종과 좌산 김수욱 등의 의병장을 배출한 사촌마을은 의병장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촌리는 6·25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밤이면 인민군이, 낮이면 미 해병대가 점곡지서를 점거하는 1주일여에 걸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그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인민군에 사살당하자 이에 화가 난 미군들이 마을에 불을 질러 백여 호의 기와집이 소실되는 참화를 당하기도
했다.
“이 우물이 만취당을 지켜주었지요. 물이 곁에 있어 불길을 막을 수 있었답니다. 기적 같은 일이지요. 우물을 처음 팠을
때 나오는 붉은 황토물을 몇 바가지나 퍼먹고 서애 선생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스스로 생각해도 황당한지 젊은
후손은 싱겁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김사원 선생이 지은 집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지은 누각이다. 의성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양반건물로 T자형으로 꾸며져 있다. 당대 최고의 명필인 한석봉이 쓴 현판이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부속물들이 떨려나간 건물 내부를 옛 선비의 고고한 정신을 보여주는듯 대들보와 기둥들이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daegu.com%2Ffiles%2F2013%2F09%2F12%2F01010101401.20130911.000010684.02.jpg)
◆ 푸르름의 기상을 안은 만취당
만취당은 대대적인 보수가 진행 중이었다. 시간의 침식으로 허물어져 가는 선비의 고고한 정신을 되살려내기라도
하려는 듯 건물 전신을 기둥으로 떠받치고 있었다.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김사원 선생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582년(선조 12년) 건립한 건물이다.
평면 형태는 복재와 서소익실이 누각 뒤쪽에 동·서로 붙어 있어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룬다. 누각은 기둥머리에
초익공이 짜여진 5량 가구에 팔작지붕이며, 양쪽 익사는 맞배지붕이다.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과 함께 가장 오래된 사가(私家)의 목조건물로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어 1983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만취당 김사원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정재장이 되었고, 난후에는 휼민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신라시대 고찰을 뜯어낸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저 기둥은 천 년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 서 있는 셈이지요. 저 현판 글씨는 당대 최대의 명필 석봉 한호가 썼다고 전해지고요.
저기 있는 것이 서애 류성룡 선생의 어머니가 타시던 가마라고 하는데 산혈이 묻어 있었다는 말도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 하는 표정으로 젊은 후손은 만취당 천정을 가리켰다.
선생은 자신의 호를 따서 당호를 만취당으로 정한다.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거처를 마련
하면 대부분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나 이상을 담아 당호를 지었다.
‘만취’는 늦게까지 푸른, 겨울에도 변하지 않는 푸름을 뜻한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삶의 지조를 비유하는
변함없는 푸르름, 곧 ‘만취(晩翠)’의 기상은 선비들이 추구하던 최고 가치가 아니었던가. 선비들의 당호로 애용된
‘만취’는 송나라 초기 재상으로 노국공에 봉해진 범질이 쓴 ‘더디게 자라는 시냇가의 소나무는 울창하게 늦게까지
푸름을 머금는다(遲遲澗畔松 鬱鬱含晩翠)’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이다.
경상북도 지방기념물 제107호로 지정된 만취당 뒤뜰 향나무는 송은 김광수(1468년~1563년)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며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충렬공의 9세손으로 만취당 김사원 선생의 증조
이자 서애 유성룡 선생의 외조부이다. 선생은 1501년(연산군 7년)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입지를 넓히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사화로 인해 올곧은 선비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낙향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냇가에 영귀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은둔생활을 즐겼다. 자신이 심은 향나무인 만년송을
두고 쓴 선생의 시는 초야에 묻혀 살아가는 선비 정신의 청정함을 아래와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끼 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후미진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고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몸이라/
아름다운 사계절 풍경 홀로 기뻐하리./
그윽한 흥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평시에는 학문연마로, 난세에는 의병활동으로 그 이름을 만세에 떨친 의성 선비들의 본거지인 사촌마을의 역사는
오래고 깊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고운 최치원의 장인 나천업 정승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니 이 마을의 유래는
신라 중엽까지 거슬러 올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따르면 이 마을의 입향조는 고려 중기 충렬공 김방경의 후예인 김자첨 선생이다. 마을 이름은 1392년
김자첨 선생이 안동 회곡에서 이곳으로 이거하면서 중국의 사진촌을 본떠서 사촌이라고 한 것이 그 유래이다.
그 후 안동지방의 명문들과 혼인관계를 통하여 사촌의 안동김씨는 명문 거족으로 성장했고, 조선조 말까지
대과급제자와 소과급제자를 각각 13명과 31명 배출한 명문가가 되었다. 선비로서의 삶을 제일의 가치로 알았던
이들의 노력이 어떠했는가는 마을 이름의 유래에서뿐만 아니라 마을 서쪽 입구에 인공으로 조성한 숲에서도 잘
드러난다.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된 서림숲은 약 600여년전 사촌마을이 형성될 때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심은 방풍림으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daegu.com%2Ffiles%2F2013%2F09%2F12%2F01010101401.20130911.000010683.02.jpg)
◆ 경심잠 십조는 구국의 밑거름으로
서림은 마을 대표적인 상징물로써 그 길이가 약 1,040m이며 폭은 40m 되는 방풍림이다. 수령 300년에서 600년 정도
된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10여 종이 어우러진 서림은 입향조인 감목공 김자첨이 1390년경 조성한 숲이다.
1999년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된 이 숲은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조성했다고
한다. 서애 류성용 선생이 이 숲에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선생의 어머니가 그를 배었을 때 태몽으로 용꿈을 꾸게 되자 크게 될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류성룡 선생이 태어난 1542년은 사촌마을에서 ‘정승’이 태어나기로 정해진 해였다. 따라서 사촌마을의 모든 집에서는
시집간 딸들이 친정에 오지 못하도록 ‘출객령’을 내린다.
여장부였던 선생의 어머니는 배에 복대를 하고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마을로 와 친정에 머문다. 이 사실을 들킨 선생의
어머니는 친정집에서 쫓겨나 시댁이 있는 안동으로 돌아가다가 서림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기를 낳는다.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에 서림의 수많은 나뭇잎이 일제히 떨어지는 이변이 나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이 아기가 훗날 재상이 될 것을
알았다고 한다.
사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3명의 정승이 나올 곳으로 알려진 유명한 명당자리라 한다. 이 중 최치원의 장인으로 유명한
나천업이 그 첫 번째이고, 류성룡이 두 번째 정승이다. 그렇다면 사촌 마을이 기다리는 세 번째 정승은 언제, 어떤 모습
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인가. 사뭇 궁금해진다..
서림 숲 속 바위에 경심잠 십조가 새겨져 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풍속이 비루해지자 송은 선생은 탄식하며 잠(箴)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하고 자손들도 지키도록 했다.
첫째 부모에게 효도할 것.
둘째 나라에 충성할 것.
셋째 제사를 잘 받들 것.
넷째 집을 바르게 다스릴 것.
다섯째 동기간에 화목할 것.
여섯째 죄를 짓지 말 것.
일곱째 남을 헐뜯지 말 것.
여덟째, 여색에 빠지지 말 것.
아홉째, 친구를 잘 사귈 것.
열째 분수를 지킬 것 등이 그것이다.
이는 후대 사촌마을 선비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나라에 큰일이 생길 경우는 떨치고 일어나서 구국에 앞장서게 한
의병활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경심잠의 가르침은 수백 년 세월을 건너뛰어 오늘의 혼탁한 세태를 사는 우리에게도 깊이 깨우쳐 마음에 새겨야 할
잠(箴)으로 살아 있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07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각, 만취당 앞에서 나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세월의 무상함을 극복하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모여 문화가 되고, 문화의 정수인 유적이 되고, 유적의 가치를 후세에
알리는 전설이 되겠다.
앙상한 뼈대를 허공에 들어낸 만취당이 그랬고, 오백 살 먹은 향나무가 그랬고, 돌에 새겨놓은 ‘경심잠’이 그랬고,
서림 숲에 남아 있는 전설이 그랬다. 한결같이 스산한 이들의 표정은 간단없이 진행되는 세월의 풍화와 그것을 애써
막아보려는 인간들의 노력이 만나는 지점. 바로 그 지점의 빛과 그늘이 빚어내는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국
시인·녹색문화컨텐츠개발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