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안다는 것은 나의 기준과 나의 판단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고 합니다. 상대방을 알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상대방의 마음과 함께해야 합니다. 저 역시 저의 판단과 기준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많습니다.
책에서 읽은 글입니다. 오해와 편견을 버릴 수 있는 좋은 내용 같아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도의 갠지스강에서 강물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묵상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차를 파는 노인과 친해졌고, 매년 가면 노인과 대화하며 차를 마셨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노인과 인사를 하려는데 노인은 갠지스강에서 주전자의 물을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오염된 강물로 차를 끓인다는 생각에 마음이 상했습니다. 노인과 대화 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다음 해에도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반갑게 인사하면서 차를 한 잔 주는데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노인은 이번에도 갠지스강으로 주전자를 가지고 가서 물을 채워 왔습니다.
기분이 상한 나머지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어째서 오염된 강물로 물을 끓입니까? 노인은 ’아닙니다. 저는 한 번도 오염된 강물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의심되면 저와 함께 계단으로 내려가 보세요.’ 확인해 보니 계단 아래에는 펌프가 있었습니다. 땅속 깊이 파이프가 연결돼 있었고 맛있는 지하수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의 차는 맛있었던 겁니다. 남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는 계단 끝까지 함께 가야 합니다. 노인의 정성과 노인의 친절함을 외면했던 자신의 오해를 깊이 뉘우쳤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오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세례자 요한과 계단의 끝까지 가지 못한 사람입니다. 다만 세례자 요한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쉽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제 막 시작했는데 벌써 결말을 예측합니다. ‘견지망월(見指忘月)’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서 볼 것은 단식과 옷차림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그의 설교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을 알아보고 ‘나는 저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라고 했던 그의 겸손입니다.
예수님에게 볼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겉모습이라는 손가락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오신 그분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두려움과 걱정으로 숨어 있던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평화를 빌어주시는 자비입니다. 담대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셨고, 앉은뱅이도 일어나게 하셨고, 눈이 먼 사람은 뜨게 하셨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은 어찌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 의심이 자꾸만 다른 곳을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의지하는 건 오해와 거짓이라는 손가락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길이요,진리요, 생명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빛’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받는 사람이나 복권에 당첨되는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단 하나만 말하라고 하면 바로 ‘그릿(Grit)’입니다. 그릿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얼마까지 다그칠 수 있는지의 정도입니다. 머리고 좋건 나쁘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줄 아는 만큼 성공합니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공통점을 조사한 내용이 있지만, 이번에는 한 스튜디어스가 비행기 일등석, 퍼스트클래스의 승객들만의 행동과 습관을 발견하여 낸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퍼스트클래스는 비행기 좌석의 3%이고 부유층 구성비도 3%입니다.
첫째, 일등석 사람들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항상 메모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펜을 항상 지니고 다닙니다. 기록하고 쓰는 행위는 자신의 머리를 믿지 않는 겸손함에서 나옵니다.
둘째, 일등석 사람들은 전기와 역사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유독 퍼스트클래스에서는 신문을 가져달라는 요청이 드뭅니다. 그들은 지독한 활자의 중독자들이나 베스트셀러가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투박하고 묵직한 책을 읽습니다. 비행기 내에서도 재미를 찾지 않고 자기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일등석 사람들은 자세가 다르다고 합니다. 퍼스트클래스의 승객은 일단 자세가 바릅니다. 일등석이 자세가 가장 흐트러지기 좋은 조건인데도 그들은 좋은 자세로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것입니다. 좋은 자세를 갖기 위해서는 평소에 육체의 편안함을 거스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넷째, 일등석 사람들은 대화를 이어주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경청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쓰는 말들은 주로, “그래서 어떻게 됐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등의 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를 끄집어내기 위한 말들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일등석 사람들은 승무원에게 고자세를 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더 겸손한 말투로 승무원을 대합니다. 항상 “바쁜 중에 미안하지만”이란 말을 덧붙입니다.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몸에 밴 사람들입니다.
여섯째, 일등석 사람들은 아내를 극진히 모신다고 합니다. 아내뿐만이 아니라 동승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폭넓은 인사를 합니다. 사람에게 열려있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야합니다.
우리는 부자들이 부모를 잘 만나서, 운이 좋아서, 시대를 잘 타고나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없어서 자신은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댑니다. 어떤 책을 읽어봐도 부자는 항상 자기 자신, 특별히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과 싸워 이긴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돈을 모아 편하고 게으른 생활만 꿈꾸면서, 먹고 마시는 생활만 꿈꾸면서,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잃고 싶지 않으면서 부자가 되지 못하는 핑계를 대고 있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세상에서 부자가 된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과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자신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돈을 좋아하고 권력과 쾌락적인 삶을 좋아하던 바리사이들은 이런 가르침에 끄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가르침을 비웃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주었던 세례자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자 이렇게 핑계를 댑니다.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예수님께서 같은 가르침을 말씀하시자,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라며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지혜란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세 욕구와 싸워 이겨야만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그 가르침대로 산 믿음의 선조들이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통해 자아를 실현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이 신앙을 가지면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됩니다. 자아는 실현시킬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입니다. 이 주장을 한 이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삼구와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요한의 세례의 목적입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는 신앙인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자기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물리쳤다.”(루카 7,30)
우리도 말씀에 무감각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재물에 대한 욕구, 육욕에 대한 욕구, 권력에 대한 욕구를 가난의 마음, 절제의 마음, 겸손의 마음으로 바꾸려는 싸움을 시작해야합니다. 그래야 바리사이-율법학자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삼구와 싸우지 않으면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지혜의 자녀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