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맹씨 행단 (牙山 孟氏 杏壇)』
종목; 사적 제109호 | 분류;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 면적; 7,856㎡ |
지정일; 1963. 01. 21.소재지; 충남 아산시 배방면 행단길 25 (중리 300) | 시대; 조선 |
소유자/관리자; 사유 / 아산시 문의; 041) 546-3027 | 답사일; 2014. 04. 08(화),
「아산 맹씨행단」은 조선시대 청백리(淸白吏), 명재상(名宰相)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집안이 살았던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古宅)과 사당, 정자가 있으며 뜰 안에는
600년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맹사성의 청렴한 선비정신을 말해주는 듯이 꼿꼿하게 서서
행단(杏檀)*을 지키고 있습니다.「아산 맹씨행단」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행단(杏檀); 학문을 닦는 곳을 이르는 말.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
맹씨행단 입구,
「아산 맹씨행단」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뒷쪽에는 "淸白吏 古佛 孟思誠 紀念館(청백리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맹씨행단의 대문이 있습니다.
「아산 맹씨 행단」안내문,
"杏檀 행단"이란 말이 아주 낯설었는데 '杏檀'이라고 부르게 된 사연을 적고 있습니다.
「아산 맹씨 행단」안내문 아래에 '산창맹씨 대종회 회장'의 안내문이 있어 소개합니다.
'아산맹씨'는 잘못 전해진 것이고 '신창맹씨'가 맞다고 합니다.
淸白吏 古佛 孟思誠 紀念館(고불 청백리 맹사성 기념관),
문은 잠겨 있었고 관리자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으나 내부 관람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로 지정된 고불 맹사성의 유물 5점인
"전세맹고불유물(傳世孟古佛遺物))"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전세맹고불유물 (傳世孟古佛遺物)』, <사진; 문화재청>
종목; 중요민속문화재 제225호 | 분류; 유물 / 생활공예 | 수량; 일괄(5점) | 지정일; 1990. 10. 10.
소재지; 충남 부여군 | 시대; 조선 | 소유자; 맹홍렬 | 관리자; 국립부여박물관
【전세명고불유뮬】고불 맹사성의 유품 5점. (……) 유품은 옥적과 백옥방인,
채석포도문일월연, 수정죽절비녀, 목칠도형배 등이다. 옥적은 피리의 일종으로
백옥으로 만든 것이며, 백옥방인은 손잡이에 당사자를 큼직하게 새긴 옥도장이다.
채석포도문일월연은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자색 벼루의 일종이며,
수정죽절비녀는 수정을 대나무 밑둥처럼 다듬어 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구리판을
말아 끼운 비녀이다. 목칠도형배는 해당화의 밑둥치로 만든 표주박으로, 휴대하여
쓰는 음료수잔이다. 유품들 가운데 옥적과 도장에 새긴 시문구 등은 음악과 시에
조예가 깊었던 맹사성선생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맹씨행단 건물배치도,
【맹씨행단】고려말에 최영(崔瑩, 1316~1388) 장군이 살던 집이었으며 이후 그의 손녀 사위인 조선초의 명정승 맹사성이 물려 받아 살았던 곳이다. 맹씨행단(孟氏杏壇)이란 이름은 맹사성 일가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린데서 유래했다. 참고로 행단은 은행나무 단(檀)을 의미한다.
맹씨행단은 14세기 중반에 지어진 집으로 현존하는 전통 가옥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된 만큼 맹씨행단은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그래서 원래의 모양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집이기도 하다.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전통건축과 장소),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맹씨행단 문간채,
대문 앞에 용트림을 하며 자란 소나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안채,
'행단관리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380여년 경에 맹사성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
600년이 넘도록 이 자리에 우뚝 버티고 서서 "맹씨행단"을 지키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는 은행나무,
가운데 원래의 나무는 인공수피시술을 받았고 2~300여 년 전에 원목 주위에 근맹아(根萌芽)가 자라 또 다시 거목이 돼었습니다.
보호수인 '쌍행수(雙杏樹)' 안내문,
맹씨행단의 고택(古宅) 앞면,
집의 구조가 "工 공"자나 영어 알파벳 "H"에 가까운 모습으로 매우 독특하였습니다.
▲ 맹씨행단의 사당과 고택, <사진; 문화재청>
【맹씨행단 고택】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맹사성은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하였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ㄷ자형 맞배집으로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집의 마당에는 600년이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감나무 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의 개울가에도 느티나무·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으며, 담장 안 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모서리에서 본 고택,
고택 뒤 언덕에서 본 모습,
맹씨행단 고택은 자연석으로 쌓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맹사성 (孟思誠)】고려 말 조선 초의 명재상.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올랐다. 《태종실록》을 감수, 좌의정이 되고 《팔도지리지》를 찬진하였다. 조선 전기의 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본관 신창(新昌). 자 자명(自明). 호 고불(古佛) ·동포(東浦). 시호 문정(文貞). 온양 출생. 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춘추관 검열을 거쳐 전의승·기거사인·우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고 악기도 만들었다. 또 청백리로 기록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작품에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가 있다. <출처; 두산백과>
별도의 담장을 두른 맹씨행당 사당,
맹씨행단에는 오래된 키큰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고
사당으로 가는 길 옆에는 괴석(怪石)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당인 세덕사(世德祠) 정면,
이곳에는 신창 맹씨 선조 3대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데
바로 고려 말 이군불사(二君不事)의 고결한 절개를 지키다 순절한 상서공 맹유(孟裕)와
돌포공 맹희도(孟稀道), 조선시대의 대표적 청백리인 맹사성의 위폐입니다.
사면에서 본 세덕사
▲ 구괴정(九槐亭), <사진; 네이버지식백과>
이번 답사에서 구괴정을 찾지 못해서 직접 둘러보지 못해 아쉽습니다.
【구괴정】이 가옥은 협문이 두 개 있다. 행단의 사당인 세덕사 옆으로 난 일각문과 남쪽 끝 언덕으로 나가는 일각문이다. 남쪽으로 난 일각문을 나서면 구괴정이라는 사연이 깊은 정자가 나타난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어우러진 언덕 위에 서 있는 팔작지붕의 건물. 봄이 되면 구괴정 가는 길목에 냉이꽃이 유난히도 많이 피어 마치 노란 양탄자를 밟는 느낌을 준다.
정자는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로 난간을 둘렀고 단청이 예쁘게 칠해져 있다. 민가에서는 보기 드문,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건물이다. 좌우에는 그당시에 심었다는 느티나무 가운데 세 그루만이 남아 있다.
정자를 마주하면 두 개의 편액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삼상당(三相堂)'이요, 다른 하나는 '구귀정(九槐亭)'이라 쓰여 있다. 삼상당은 당시 정승을 하던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이 방촌 황희 정승과 독수와인 권진 정승과 함께 이곳에 정각을 세워 놓고 세상살이를 이야기하거나 국정을 논의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구귀정은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해 한 사람이 느티나무 세 그루씩, 모두 아홉 그루를 심은 데서 유래한다. <출처; 한옥의 미, 2010.7.15, 경인문화사>
맹씨행단 답사를 마치고 고불로로 나서면 금곡초들학교 앞에 "신칭맹씨비림(新昌孟氏碑林)"이 있습니다.
뒷쪽에 "신창맹씨세거지비(新昌孟氏世居地碑)"가 보입니다.
비림(碑林) | 맹주상 / 23세손 기호(麒鎬) 건립
금곡엔 / 비림(碑林)이 있네 / 대나무 꽃 / 향기나는
금곡엔 / 비림(碑林)이 있네 / 비바람에 / 쓸리지 않는
큰 붕새 / 날아와 그 열매 찾는 / 금곡엔 비림(碑林)이 있네!
"영조대왕 사액문(英祖大王 賜額文) 비"
忠孝世業 충효세업 충성과 효행을 대대로 힘써 왔으며
淸白家聲 청백가성 청렴과 결백은 가문의 명예이니라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孟公 諱 世衡 神道碑(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맹공 휘 세형 신도비),
본 신도비는 맹공 휘 세형 하곡(霞谷)공의 신도비로
1674년에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엮고 쓰고 좌의정 문곡 김수항이 전서(篆書)로 천안 광덕 금동(金洞, 굇골)에 건립되어 내려오던 중
(……) 부득이 2013년 4월 이곳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신창맹씨의 정려(旌閭)
여러 곳에 흔어져 있던 단비(壇碑)를 이곳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맹사성 시비,
燕子樓(연자루) | 古佛 孟思誠(고불 맹사성)
駕洛遺墟畿見春 가락유허기견춘 가락나라 옛 터전에 몇 봄이 오고갔나
首王文物亦隨盡 수왕문물역수진 수로왕이 세운 문물 티끌따라 없어졌네
可憐燕子如懷古 가련연자여회고 가련하다 제비만이 옛 정을 못 잊은 듯
來傍高樓喚主人 내방고루환주인 이 누각에 찾아와서 옛 주인 부른다오.
이 시는 한국역대명시전서(韓國歷代名詩全書)에 수록된 것으로 맹사성이
가야의 옛 땅 김해에 있는 연자루(燕子樓)에서 가락국 쇠망의 애련함을 읊은 한시(漢詩)입니다.
高佛 孟思誠 時調碑(고불 맹사성 시조비)
江湖四時歌 강호사시가 | 孟思誠 맹사성
江湖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 흥이 절로 난다
濁醪溪邊 탁료계변에 錦鱗魚 금린어ㅣ 안주로다
이 몸이 閒暇 한가해옴도 亦君恩 역군은이샷다.
江湖 강호에 녀름이 드니 草堂 초당에 일이 업다
有信 유신한 江波 강파난 보내나니 바람이다
이 몸이 서날해옴도 亦君恩 역군은이샷다.
江湖 강호에 가알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小艇 소정에 그믈 시러 흘니 띄여 더뎌 두고
이 몸이 消日 소일해옴도 亦君恩 역군은이샷다.
江湖 강호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피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亦君恩 역군은이샷다.
【강호사시가】연시조(聯詩調)의 한 곡명. 일명 강호가(江湖歌). 세종(1418~1450) 때 맹사성이 지은 "강호사시가"는 4장으로 구성된 연시조이다. 그 가사는 『청구영언』에 전하는 데 강호에 묻혀 살면서 춘하추동의 네 시절에 한 수씩 시를 읊은 것이 "강호사시가"의 내용이다. 각 시조의 종장에 "역군은(亦君恩)이샷다"라는 문구가 붙은 것이 특색이다. <출처; 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첫댓글 오래전에 답사 한적이 있어 새롭습니다
좋은 자료 펌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6.26
박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