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성공회대학만큼 자유로운 분위기의 대학이 있을까요? 예전에 신영복 선생님께서 "우리사회에서 성공회대학교가 일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우스개소리로 그곳은 해방구라고......" 언젠가 그곳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대학원과정을. 어제 아내에게 내일은 신영복 교수님의 강연회에 가겠다고 하니 또 뭐라 그럽니다. 아침에 저는 청소를 하고 아내는 막내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습니다. 첫째 아이에게 고구마를 구워주고 길을 떠났습니다. 150번 버스를 타고 종로2가에 내렸습니다. 예전에는 아주 자주 가던 곳이었습니다, 인사동은. 서울에서의 첫사랑, 그 사랑이 서려있던 곳, 출판계에 머물렀던, 20대후반에 열정적으로 모임을 갖고 술을 자주 마시던 곳이었습니다. 30대 초반에는 시인학교라는 카페에 가 술도 자주 마셨고, 그곳에서 잠도 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인사동길에 들어섰는데 서화전 전시장이 어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낭패였습니다.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수도약국이 생각나 조금은 늦게 도착했습니다. '신선한새벽'님께 드리려고 작년에 카페모임에서 만들었던 극미세사 스포츠타월을 가져갔는데 이동전화의 상태가 좋지 않아 뵙지 못하고 그냥 발길을 돌렸습니다. 2007.2.10. 집에서
네~ 가끔일도 볼 수 있으면 되지요. 뭐~ 그럼, 이따가 전시장에서 봐요~ 이승혁 선생님께, 어느새 2월도 둘째주에 접어듭니다. 제대로 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몸만 바쁘게 허둥대며 보낸 것 같았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신선한새벽'님이 봉사자로 계신 '더불어숲마라톤클럽'에 지인의 소개로 가입하여 정신없이 보낸 한주였습니다. 글을 통해본 그 분은 사려깊고 아주 겸손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예전에 이선생님께서 이야기하신 분이 아니었나 합니다. 신선한새벽님은 저와 같은 대학의 동문이었습니다. 지난번 문자메시지를 받고도 전화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여유가 자꾸만 없어져 갑니다. <처음처럼>은 엊그제 제가 아시는 분이 승진을 하셔서 난 대신에 보내드렸습니다. 오늘쯤 저도 한권을 사고, 막내아이를 맡긴 어린이집 원장님께 보내드릴 생각이었는데, 오후에 책을 받게 되어 아주 기쁨니다. 번번이 제가 신세만 지고 있습니다. 2.10.신선생님의 서화전에 집에서의 사정이 허락되면 갈 계획입니다. 아내랑 낮 시간을 서로 따져보아야겠습니다. 올 해에는 신경 좀 써서 모임에도 한번 가봐야겠지요. 나탈리 망세의 첼로연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그는 바네사 메이나 싱가포르 출신의 갱뱅을 한 여성 포르노운동가처럼 아주 파격적이었습니다. 2007.2.9. 허필두 올림 신임 여성 국무총리 한명숙씨 통일혁명당 주역들이 북한정권은 이미 수십년전에 웃기지 않은가. 한나라당의 이계진씨는 박정희와 그의 딸이 벌이는 일 들이 하지만 나는 한명숙씨를 좋아하지 않는다. 호적제 폐지는 나도 동의하는 사안이지만, 그러나 여성 총리의 탄생, 그 자체는 환영한다. 한명숙 환경부장관, 신인령 이대총장, 이와 관련, 검찰은 크리스찬 아카데미 간사 이우재, 한명숙(韓明淑·36), 김세균(金世均·32) 신인령(辛仁羚·36) 황한식(黃漢植·31), 장상환(蔣尙煥·28) 등 6명과 한양대 정창렬(鄭昌烈·42) 교수를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구속됐던 관련자들은 현재 각 분야의 주요인사가 됐다. 5년형을 살았던 이우재 씨는 현재 국민참여통합신당 국회의원이 됐고, 통혁당 주역 박성준의 아내이기도 했던 한명숙 씨는 2년6개월의 형을 살고 나온 뒤 여성부장관을 거쳐 현재는 환경부장관이 됐다. -출처 http://blog.naver.com/jhj7725?Redirect=Log&logNo=140033188730 김서중(신문방송학과 교수) 2006년 8월 25일 신영복 교수님의 정년퇴임 콘서트에서 왼쪽에서 두번째 성공회대 사회과학대 박경태 교수가 사회를 보았습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보였습니다. 꽁지머리를 길러도 받아들여지는 성공회대의 학풍이 부러웠습니다. 어쩌면 성공회대 학파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은 해방구일지도 모릅니다. 2006년 8월 25일 신영복 교수님의 정년퇴임 콘서트에서
신영복 -출처 :http://www.shinyoungbok.pe.kr/
신영복의 60년을 사색한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중략- 서구 근대를 뛰어넘는 관계론 구상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노촌선생을 만나기 이전부터였다. 60년대 대학 시절의 문화에 대한 반성과도 관련이 깊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한국 사회는 근대화 모델을 따라 줄달음쳐 갔다. 해방 이후의 격동과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 뒤의 부패와 가난을 겪는 동안 한국 사회는 오로지 서구적 문화, 서구적 가치 등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그쪽에 몰두했지, 우리 것에 자부심을 갖기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자존심이 없는 개인, 자부심이 없는 민족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반성 속에서 신영복은 감옥에 들어가서 동양 고전을 깊이 읽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고전의 지혜와 가치에서 찾아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거창한 문제의식 말고도 옥중의 신영복이 동양 고전에 빠져들게 된 데에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의 교도소 규정은 재소자가 책을 세 권 이상 소지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아주 까다로운 것이었는데, 징역 초년의 왕성한 지식욕에 하루 한두 권씩 책을 읽을 나이였으니 책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자연히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책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중국 고전이 딱이었다. <노자 도덕경> 같은 책은 5200자에 불과하지만 몇 달을 두고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신영복은 동양 고전을 통해 얻은 내용과 징역살이에서 깨달은 내용을 ‘관계론’이란 개념으로 정리해간다. 서구 사회는 개별적 존재성을 패러다임으로 하는 사회인 반면, 동양이나 근대를 뛰어넘는 사회는 관계론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2004년 말에 출간한 <강의>의 핵심적 내용이다. 신영복은 현재 서예가로도 이름이 높다. 곳곳에 들어서는 건물, 특히 민주화운동 관련 기념물은 그가 도맡아 글씨를 쓰고 있다. 어디 기념물뿐이랴. 최근 대박을 터뜨린 소주 ‘처음처럼’도 그의 글씨다. 얼마 전 어느 서예학회에서 ‘서예의 실용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는 기사를 보고 신영복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혼자 웃음지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된 것은 아마 ‘동상예방 주의사항’이나 ‘재소자 준수사항’ 같은 소내 게시물들이 아니었을까? 어려서 할아버지께 잠시 배우다가 잊어버렸던 붓글씨를 신영복은 옥중에서 다시 만났고, 감옥에 서도반이 생기면서 만당 성주표(晩堂 成柱杓), 정향 조병호(靜香 趙柄鎬)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특히 풍양 조씨 노론 대가집 후예인 정향 선생은 추사의 서법을 이은 민형식(閔衡植) 선생이나 한말의 서화 대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오세창(吳世昌) 선생에게 배운 분이었다. 교도소장이 글씨 한 점 얻을 욕심에 서도반이 생긴 뒤 한 번 모신 것인데,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시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오시어 글씨를 지도해주셨다고 한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보낸 20년을 ‘나의 대학 시절’이라고 종종 표현한다.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롭게 키우고, 생생한 역사의식을 길렀으며, 게다가 양화공·봉제공·목공·영선·페인트 등 여러 가지 기술까지 익히고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1988년 8월14일 잡혀간 지 꼭 20년 20일만(그러나 어머님 말씀에 따르면 음력으로 꼭 20년 만이다. 생일날 잡혀가서 생일날 풀려났다고 한다)에 출옥했다. 그는 20년의 징역살이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위를 넘어 일종의 성취감을 느낀 부분은 자신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는 것이다. 레닌을 포함해 수많은 실천가들이 성공하지 못한 자기 개조를 이뤄냈다는 것!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야, 너 하나도 안 변했구나”라며 칭찬하더란다. 신영복은 그렇게 세상과 다시 만났다. 하나의 나무가 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무들이 더불어 숲을 이뤄가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전해주던 그가 지난 6월8일 아쉬운 정년 고별 강연을 했다. 20여 년의 청년기, 꼭 20년의 귀양 생활, 그리고 귀양이 풀린 뒤의 해배(解配) 기간이 20년가량이었다. 해배 2기라고 할 수 있는 앞으로의 20년, 더불어 숲의 중심에서 신영복은 우리에게 어떤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들려줄 것인가?
12년만에 열리는 신영복 선생님 서화전
-----Original Message-----
From: "허필두"<traumwelt@empal.com>
To: namuso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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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nt: 07-02-09(금) 22:42:09
Subject: 책 잘 받았습니다
RE: 책 잘 받았습니다
한명숙의원의 남편이 성공회대학 사회교육원에서 겸임교수하고 있는 박성준씨이다.
박성준씨의 죄목은 자신의 부인을 포섭한 혐의 였었다.
박정희 정권이 주장한대로 진짜 빨갱이들이었다면,
그리고 북한이 박성준씨에게 부인을 포섭하라는 지령을 내린것이 사실이라면,
한명숙 의원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
나중에 얼마나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가를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부인을 포섭하는 지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 빨갱이 박성준의 부인,
한명숙 여사는 대한민국의 국무총리가 될 상황이 되었다.
한명숙 여사에게 연좌제를 묻지 않겠다고 한다.
하긴.... 한명숙에게 연좌제를 적용하면,
당장 박근혜는 당대표를 사직하고 실업자가 될 판이니까.
대를 이어서 코미디다.
여성운동하는 이화여대 출신들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네들이 지구인이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호적제 폐지를 제외한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대부분의 정책들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써는 감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그런 아스트랄 한 정책들이다.
그동안 남자만 너무 오래 해 먹었었다.
총리자리도 남자 여자가 반반정도 비율로 하면 서로 좋지 않으냐.
- 단순 반공법 위반
김세균 서울대 교수 등 검거
1979년 4월 밝혀진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은 간첩사건은 아니었으나 일단의 지식인들에 의한 체제변혁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1979년 4월 16일 김재규(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이우재(李佑宰·43·전 민중당 상임대표) 등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 내 불법지하용공서클을 구성, 아카데미에 입교하는 농민, 근로자, 청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중간집단이론강의를 교육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질서를 부정하고 이를 변혁함으로써 사회주의 실현을 획책했다”고 발표했다.
강인선(일본학과 교수)
김기석(신학전문대학원 전임강사)
김성수(성공회대총장)
김유순(사회복지학과)
김진업(사회과학부교수)
김창남(신문방송학과 교수)
박경태(사회과학부 교수)
1995년 서예작품집『손잡고더불어』에서
서예와 나
어린 시절 할아버님의 문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아버님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유지(油紙)에다 습자하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친구분들이 방문하시기만 하면
나를 불러 글씨를 쓰게 하셨다.
그러면 할아버님의 친구분들은 푸짐한 칭찬과 함께
자상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이때의 붓글씨란 한낱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정서는 훗날까지도 매우 친숙한 것으로
나의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여 년 후 내가 옥중에서 할어버님의 묘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나의 정서 속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당시의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 직후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싹텄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국악, 탈춤,굿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쪽으로 심취해간 이들이 상당수 있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붓글씨를 상기하고
붓과 벼루를 다시 꺼내놓았다.
학교 게시판의 공고문을 써붙이기도 하고
행사 때는 아치의 글씨를 맡아서 썼다.
다른 대학교의 아치를 쓴 기억도 있다.
당시 설립되었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부설 한국경제연구소의 목각현판이
나의 글씨로 씌어졌다고 기억된다.
그때까지 남들 앞에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붓글씨가
적어도 나의 경우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했던
민족적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로
나의 삶 속에 복원되게 된다.
내가 서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되는 것은
역시 20여 년의 옥중생활에서이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의 공장 부착물들을
붓글씨로 써붙이는 일이 계기가 되어
교도소내에 불교방·기독교방·카톨릭방 등에 추가하여
동양화방·서도방이 신설되면서 상당한 시간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온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8년은 되었다.
나는 당시 주로 동양고전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은 교도소 규정이 사전·경전을 제외하고
3권 이상 책을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가 동양고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들어와 앉은
서구적 사고방식을 반성하기 위해서였다.
시경·주역에서부터 섭렵하기 시작한 동양고전 공부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의 비판적 관점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나의 사고내용이
매우 취약한 것임을 깊이 반성하게 하였다.
특히 이 기간을 회상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과의 생활이다.
노촌 선생님과 한 감방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노촌 선생님은 우리나라 4대 문장가의 한분인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선생의 후손으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과 벽초(碧初)홍명희(洪命喜)선생께 사사를 받으신 분으로
드물게 보는 한학의 대가였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출신과 성분, 그러한 연배에서는 뵙기 어려울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을 체득하고 계신 분이었다.
진보적인사상이 그냥 진보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가 그 속에 무르녹아 있는
중후한 인격을 표현되는 그런 분이었다.
선생님의 술회와 같이 나는 선생님의 평생에
가장 오랫동안 한방에서 함께 지낸 사람이다.
하루 24시간 내내 무릎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징역살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노촌 선생님께서는 가전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하셨는데,
그때 번역하신 초고가 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필자는 그 시절 노촌선생님과 한방에서 그 번역 일의 일단을 도와드렸다기보다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선생님의 과분 하신 훈도와 애정을 입을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노촌 선생님은 많은 분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깊은 한학의 온축위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기개로 확고한 사관을 토대에 굳건히 서서 해방 전후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오신 분이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사회, 일제하 식민지사회, 6.25전쟁, 사회주의사회,
20여 년의 감옥사회, 그리고 1980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두루 겪어오신 분이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은 글씨를 모른다고 하시지만
나는 지금껏 많은 글씨를 보아오면서도
항상 노촌선생님의 글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학문과 인격과 서예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하나로 어루러져 이루어내는경지는
이른바 글씨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노촌 선생님과 함께 하였던 시절
선생님의 번역을 도우며 한문공부도 하였지만
그와 아울러 서도의 정신과 필법,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배울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서도반이 만들어진 후 처음 한동안은
아버님께서 들여주시는 법첩을 임서하고 서론집을 읽었다.
지금도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글씨보다는 고전의 탐독에 마음이 더 기울어 있었다.
나는 나의 붓글씨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선생님을
역설적이게도 옥중에서 모시게 된다.
처음 서도 선생님으로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한 선생님은
만당(晩堂) 성주표(成周杓)선생님이다.
해서(諧書)와 행서(行書), 특히 대자(大子) 현판(縣板) 글씨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이 걸려있고
당시에는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시기도 하였다.
만당 선생님은 특히 성친왕(成親王) 해서(諧書) 법첩과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행서첩으로 임서하게 하였고
현판 글씨를 서도의 최고 형식으로 꼽았다.
회심작을 얻으면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당장 붓을 놓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무슨 낙으로 사는가를 속으로 묻는 분이셨다.
도와 풍류를 함께 갖추신 분으로 기억된다.
또 한분의 선생님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 선생님이다.
정향 선생님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께 사사를 받으셨으며
원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1933년에 시서화사(詩書畵社)에 입문하시고
1939년 제1회 선전에 입선하자
일본인들이 벌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는 지인들의 비판을 받고
이후 서도계와 인연을 멀리하신 분이다.
우하 선생은 이완용 암살의 배후로 나중에 사면되기는 하였지만
사형을 받으셨던 분이고
위창 선생 역시 33인의 한분이어서 그 제자인 정향 선생님 역시
일제하에서부터 은거하시게 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 가운데 중국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지만
당신은 막상 서예가라는 말은 매우 싫어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서(篆書)의 권위자로
특히 와전(瓦篆)에는 독보적인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도소 당국이 정향 선생님을 교도소로 모셔와
우리들의 글씨를 선생님께 보여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사범들만 있는 줄로 알았던 선생님으로서는
이들이 사상범임을 알게 되고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으로 안다.
그 후 선생님은 우리를 귀양온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평양감사를 조부로 두셨던 선생님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당국이 선생님을 모셔오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하루를 할애하여 우리들을 지도하셨다.
내가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6년여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오셨다.
심지어는 교도소의 허락을 받아 선생님의 자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시기까지 하셨다.
당신 글씨는 배우지 말고 옛 명필들의 글씨를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예서와 전서 외에 특히 많은 시간을 미비(米비)임서에 바쳤다.
특히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과 엄한 지도를 받았다.
언젠가 교도소 당국이 독지가에게 사례할 넉 자 현판 글씨를
내가 쓰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그 글씨를 표구하여 보내기 전에
정향 선생님의 제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주일 동안 습자하여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아무말 없이 그 글씨 위에다 교정을 해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일곱 번
그러니까 약 2개월을 넉 자만 쓴 셈이 되었다.
정향 선생님께서는 서예가란 호칭을 매우 싫어하셨다.
까닭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고래로 직업적인 서예가란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원당(阮堂)·원교(圓嶠)만 보더라도 서예가이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뛰어난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고산(孤山) 황기노(黃耆老)
우리나라의 명필은 어김없이 학자이고 처사였다.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사자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상품화된 서예란 아예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신 분이었다.
?寬腑? 학문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란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서예는 예부터 6예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라는 것이었다.
정향 선생님은 물론 한글 서예를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예의 정신은 한글이나 한문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나는 한문을 쓰면서도 한편으로 혼자서 한글을 썼다.
한글은 물론 궁체와 고체를 썼다.
그러나 궁체나 고체를 쓰는 동안 나는 차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나 별곡, 성경귀절 등을 쓸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특히 민요·저항시·민중시를 궁체나 고체로 쓸 때에는
아무래도 어색함을 금할 수 없었다.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은 느낌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았다.
쓰기는 민중시를 쓰고 싶고 글씨는 궁체라는 모순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때 작은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어머님의 모필체의 서한이었다.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님의 붓글씨는 물론 궁체가 아니다.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더라도 유다른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
나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
한글은 한문과는 달리 그림이 아니다.
기호일 뿐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서의 각박한 한글체를
궁체가 그 고아한 형식으로 어느정도 누그러뜨려주는 면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궁체는 노봉·편필이라는 단순한 필법, 그리고 정형화된 결구로 말미암아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변화를 담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어머님의 모필 서한은
나에게 어떤 방향을 예시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님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체취와 정서는
궁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미학으로 이해되었다.
그림과 글씨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 가지만 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림은 '구체적 형식에 추상적 내용'인 반면
글씨는 '추상적 형식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한자의 경우는 그 형식이 원래 상형·지사 등
그림인 경우도 많아서
서(書)는 서(敍) 또는 여야(如也)라 하였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모든 글자가 그 형식이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에서는 그 형식을 어떻게 구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선 기존의 한문서법의 5체, 즉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의 다양한 획을
한글에 도입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한편 글자 한 자로써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경우는
여러 글자를 연결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하여 서예의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궁체를 한글서예의 정통으로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법은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
중봉(中鋒) 관직(管直) 희봉(藏鋒) 현완(懸腕) 현비(懸臂) 등 용필(用筆)의 요체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매우 불편한 필기도구를 효과적으로 운필할 수 있는
이른바 '방법에 관한 법'이다.
바둑에 정석이 있고 각종의 운동에 기본적인 틀(form)이 있듯이
붓의 운필(handing)에 있어서도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용필로서의 필법이다.
그리고 이 필법은 현재 거의 최고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필법이 개발될 수도 있지만
전통·정통의 계승은 이 필법의 계승으로서의 의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서의 또 하나의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사상·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
위당대(魏晋代)의주진한대(周秦漢代)의 전예(篆隸)에서 부터
조선 중기의 동국진체(東國眞體)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문화적 완성체로서의 서체가 갖는 의미 역시
전통·정통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명필들의 임서는 상기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도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명필들의 인격·사상·미학을 과제로 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서예도 현재의 사회·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도의 전통·정통의 문제 역시
계승과 발전의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제치하에서의 한글서예는
그것이 설령 당시의 민중적 시대미학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글 그 자체만으로서도 충분히 민족적 과제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가 변화된 상황에서는
한문서예든 한글서예든 어떠한 사상과 미학이 유의미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계승과 발전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무릇 모든 예술활동은 그 개인에 봉사하고
그 사회에 봉사하고
나아가 그 역사창조에 참여하여야 한다.
서예는 이런 점에서 다른 예술장르에 비하여 매우 특이한 전통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서예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전통이 완고하게 고수되고 있는 반면
그 사람과 그 작품의 통일성이
그 어떤 예술작품의 경우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강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법이 교조화하는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 비하여
반대로 글씨에서 인격을 읽으려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 '사람과 작품의 통일'은 매우 귀중한 전통이다.
예술작품과 예술활동이 당자의 인격을 높이는 일과 함께 추구된다는 것은
예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훌륭한 글씨를 쓰기 위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훌륭한 사람이란 당대 사회의 과제를 비켜가지 않고
그의 삶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 사회성과 역사성이 직접으로 표현된다.
이 점이 서예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서예가 어떠한 전통 위에서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많지는 않지만 나는
가능하면 우리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글들을 쓰고
민중의 역량과 정서를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 그 형식에 있어서도
아직 답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형식문제에 있어서의 고민은
그것이 내용과 조화되어야 한다는 일차적 과제 이외에
보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나의 생각 때문에
한층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냄으로써 멀어지기보다는
친근감과 자신감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까이 다가가서
민중적 역량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서예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곧 나의 사회학이며
나의 인간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글씨는 계속 마음속에만 들어있고
좀체로 종이 위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쓰거나 남들 앞에 내어보이는 까닭은
그러한 고민을 함께 나눔으로써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란 언제나 여럿이 더불어 달성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신영복은 그 시절 한학의 대가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방에서 지내는 행운을 얻게 된다. 박치음이 <소쩍새>란 노래를 헌정한 노촌 선생은 참 특이한 분이시다. 명문 연안 이씨 집안의 종손으로 조선 봉건사회에 태어나 일제 식민지 사회를 거쳐 전쟁을 겪으며 월북해, 사회주의 사회를 몸소 겪고 분단의 현실 속에서 남파되고, 일제 때 그를 체포했던 형사가 그를 알아보는 바람에 다시 체포돼 20여 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그리고 고도로 발달한 80년대의 자본주의 사회로 튕겨져나온 분이 이구영 선생이시다. 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대개 보수적이기 쉽지만 노촌 선생은 드물게도 더불어 고르게 잘사는 대동의 꿈을 간직한 채 사회주의적 사고를 체화하셨고, 또 고전에 대해 진보적 해석을 내리셨다.
민체, 우리 서예의 중요한 경지
신영복의 한글 글씨는 우리 서예의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이전 한글 글씨는 궁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정적이고 귀족적인 미학을 지닌 궁체는 시조나 별곡, 성경 구절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썩 잘 어울리지만, 신경림, 신동엽의 시나 민요, 또는 투쟁 현장의 목소리 같은 것을 쓰면 내용과 형식이 전혀 맞지 않게 된다. 신영복은 그런 내용과 형식 사이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던 중 어머니께서 보내는 모필 서간체 글씨를 보며 깊이 느낀 바 있어, 어릴 적에 춘향전 필사본 등 어머님이 갖고 계셨던 두루말이 글씨를 생각하면서 한문 서도에서 익힌 필법을 도입해 궁체에 대비되는 민체(民體), 또는 연대체(連帶體),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서체를 창안해 서민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을 담아내는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백원담(중어중국하과 부교수)
그는 백기완 선생님의 따님이시죠.
유동주(신문방송학과 부교수)
이영환(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지상(교양학부 외래교수)
정원오(사회복지학과 부교수)
조병은(영어학과 교수)
조은기(신문방송학과 부교수)
진영종(영어과부교수)
조희연(사회과학부 교수)
노무현시대 논쟁 2007/02/10 11:37 ysku
최영묵(신문학과 부교수)
홍윤지(소프트웨어공학과 교수)
아래는 신영복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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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담(중어중국하과 부교수)
그는 백기완 선생님의 따님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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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교양학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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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기(신문방송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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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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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지(소프트웨어공학과 교수)
아래는 신영복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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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기(신문방송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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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연(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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