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3월 27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이 일요일인데 대화창이 좀 여의치 못해서 지금 들어와 있는 분들이 스물 세분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여기 나타나 있습니다 만은, 이름이 보이지가 않으니까 좀 답답 합니다.
내가 그 전에 불교 라디오 방송국에서 불교입문도 한 석 달인가 했고, 그 다음에 천수경 강의 등등 초기 불교 라디오 방송이 생겼을 때 몇 해 드나들면서 경전 강의를 했는데 그 때는 정말 혼자 했습니다. PD도 건너 창문 넘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그저 책 펴놓고 나 혼자 마이크보고 경전강의를 하던 생각이 납니다. 오늘 마치 아무도 안 보이니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도 부처님 말씀이고 또 경전 이야기고 해서 곧 잘 했습니다. 오늘 스물 일곱 명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기록이 되고 스물 여덟 명 또 들어 오시는 분들의 숫자가 자꾸 불어납니다. 평일처럼 많이 동참 하셔서 열심히 경전강의를 듣고 계시는 줄로 알고 어제 이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법화경 70쪽 38번부터 할 차례입니다.
38 나에게 방편의 힘이 있어서 삼승법을 열어 보였으나 일체 모든 세존들은 일승법만을 설하느니라.
불교를 총정리 하는데 이 법화경 같은 것이 없지요. 법화경은 그 동안 많은 가르침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49년 그 교화의 말년에 설해진 것으로 되어 있고 그러다 보니까 수많은 불교 가르침을 총정리 해서, 한 권의 어떤 진리서로 써 남겨놓고 싶은 그런 뜻이 역력히 보이는 내용이지요. 그래서
삼승법을 열어 보였으나 일체 모든 세존들은 일승법만을 설하느니라.
일승만 설한다 그랬습니다.
이제 여기 모인 대중들은 모두 다 의혹을 풀도록 하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다르지 않아서 오직 일승뿐이고 이승은 없느니라.
오직 일불승 뿐이고 이승은 없다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누차 이야기가 되어온 것이지 만은 반복해서 이렇게 우리에게 이 깊은 뜻을 알려주려는 그런 간절한 마음에서 이렇게 누차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번 말씀을 드려도 중생들의 그 습이 두텁기 때문에 쉽게 떨쳐버리지를 못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방편에 오랫동안 습관이 들어져 있어서 방편설이 진실인 것처럼 그렇게 이해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제 그런 점들이 참 문제인데 부처님도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아주 누누이 했던 이야기 또 하고 했던 이야기 또 하고 그렇지요.
(4) 과거 부처님의 방편(方便)과 진실
과거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이라는 제목인데 이것이 미래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 그 다음의 현재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 이런 과목으로 쭉 나가면서 과거에도 이러했고 미래에도 이렇게 될 것이고 현재도 그렇고, 그 다음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도 역시 그렇다 이런 형식으로 되어있습니다.
39 지나간 세상 수 없는 겁에 열반하신 무량한 부처님이 백 천 만 억인지라 그 수효 헤아릴 수 없네.
그러니까 깨달으신 분들이 한량이 없다 이것이죠. 한량 없는 백 천 만 억이어서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보더라도 부처님의 대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지만 모든 깨달은 분들이 다 부처님이다 라는 그런 원칙에서 항상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 세존들이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무수한 방편의 힘으로 온갖 법을 연설하시니라. 이러한 여러 세존들이 모두 다 일승법을 설해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부처님의 도에 들게 하시니라.
모두 다 일 승법을 설해서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부처님의 도에 들게 하시니라.
그야말로 부처로서의 삶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의 도에 들게 하시니라."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사람 사람들이 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더라도 그래도 부처님의 도로서 부처님의 삶으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는 그런 뜻으로 이해 하셔야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일불승사상이고 회삼귀일(會三貴一) 법화경의 종지(宗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여러 거룩하신 성인(聖人)들께서 일체 세간의 천신과 인간의 여러 중생들의 마음속의 욕망을 아시고, 또 다른 방편으로 제일가는 도리를 드러내시니라.
뭐 별별 중생들의 성향들이 있기 때문에 그 중생들의 성향에 맞추어서 별별 방편이 다 나타난 것이죠. 염불이 체질에 맞는 사람들은 염불을 권하고 주력이 체질에 맞는 사람들은 주력을 권하고 또 경을 보는 것이 취미가 있는 사람들은 경을 권하고 참선이 소질이 있고 그것이 재미있는 사람들은 참선을 권하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이제 불교 생활이고 또 생활불교이고 그렇습니다. 더 이상 뭐 달리 다른 사람이 된다 하는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그대로 현재에 사람 이대로 부처의 삶이다 하는 것입니다. 너무 어의 없게 들리고 힘 빠지는 그 말같이 들릴 지는 모르지 만은, 현재의 사람의 삶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있다 라고 하는 그것이 처음부터 환상이었고 착각이었어요.
그러니까 먼 길을 가서 어디에 도달하려고 하는 그 목적지는 우리가 설정을 해놓고 이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노력을 들여서 도착한 그 자리가 만약에 있다면은 그 자리는 본래 출발하던 그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전번에 눈이 참 많이 왔는데요. 옛날 산중에서 외딴집에 눈이 하도 많이 쌓여 가지고 밤에 그 눈을 피해서 다른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이제 갔습니다. 가족이 모두 짐을 꾸릴 수 있는 만큼 꾸려 가지고 한밤중에 출발을 했어요. 그런데 눈이 상당히 많이 와서 길이 분명히 드러나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빛에 대충 길을 잡아서 가노라고 한창 걸어가다 보니까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더라는 것이죠. 이것이 또 다른 이웃집에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로 아마 간 길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 발자국을 따라서 계속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아무리 가도 나타날 만한 그 시간이 됐는데도 불구하고 마을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또 사람 발자국도 있고 해서 밤새도록 그 발자국을 따라서 짐을 지고 걸어 갔습니다. 오래도록 걸어가서 날이 새어 주변을 살펴보니까 결국은 자기가 살던 집을 나와 가지고 집을 빙글 빙글 원을 돌고 그렇게 있었더라 는 것이죠.
그 발자국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가족들이 밟은 그 발자국이고 또 자신이 밟은 발자국이고 항상 그 집만 밤새도록 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출발한 그 자리더라 는 것이죠. 결국은 마치 그와 같이 우리가 부처의 경지 또한 견성 성불의 경지 이것을 저 하늘 높이에다 설정을 해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많은 방편의 이야기가 있는고 하니 삼아승지겁 이라고 하는 길고 긴 세월을 필요로 하는 그런 이야기 까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도 다 그런 가르침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위한 방편설이죠. 그러나 정작은 그런 세월이 걸리는 것도 아니요. 무슨 육바라밀을 꼭 닦아야 되는 것도 아니요. 별별 그런 수단과 방법을 제공하는데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출발하던 그자리, 원래 한걸음도 옮기지 않은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사람의 삶이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불을 하고 간경을 하고 무슨 주력을 하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활 이예요. 그대로 참선 생활이고 염불 생활이고 간경 생활이고 아무리 우리가 사람이 본래 부처라 하더라도 무엇을 하든지 나름대로 그 사람의 삶은 생활은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 몸뚱이가 있으면 몸짓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몸짓은 누워있는 것도 누워있는 몸의 한 모습이고 몸짓이고 앉아 있는 것도 역시 하나의 몸짓이고 걸어가는 것도 하나의 몸짓이고 운동을 하면 운동을 하는 것도 그대로 하나의 몸짓이듯이, 몸이 있는 한 어떤 짓이든지 그 행위는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삶을 영위해 가는데 있어서는 어떤 삶이든지 그 삶의 모습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오직 일불승을 자꾸 주장하는 이유가 다른 어떤 그 목표를 설정할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 모습 이대로 아주 훌륭한 삶이다 라고 하는 것을 제발 좀 깨닫도록 하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선도 참선 생활이고 염불도 염불 생활인 것이고 간경도 간경 생활입니다. 부처냐 아니냐 하는 것은 성불의 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은 더 이상 이 대승불교나 선불교에서는 이야기 할 거리가 아닙니다. 사실은 솔직하게 그것은 이야기가 다 끝난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끝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법화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 사람이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그런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염불하는 사람으로서의 생활은 어떠냐? 그 모습과 그 정신과 그 아름다움은 어떠해야 염불하는 사람이겠는가? 또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의 정신이 있고 참선의 아름다움이 있고 또 참선의 향기가 있고 참선의 맛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이 참선의 정신이고 참선의 맛이고 참선의 향기고 참선의 몸짓이고 참선의 정신이냐 하는 이런 것은 이제 우리가 심도 있게 또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런 그런 선 생활의 모습을 우리가 다듬어가고 가꾸어가고 해야 할 일이지 뭐 깨달아서 부처가 되느냐 못 되느냐 이런 것은 이제 문제의 그런 초점이 아닙니다. 이제는 대승불교가 들어오면서부터 원래로 사람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이 사실이 명명 백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여기서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 밑에 쭉 소개됩니다. 예컨대
만약 어떤 중생들이 지난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뵈옵고 법문 듣고 보시를 행하며, 계행을 갖고 인욕을 행하며 정진도 하고 선정과 지혜를 행하여 갖가지 복과 지혜를 닦았으면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불(成佛)하였느니라.
한문 경전에 “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라.” 모두 개(皆)자 이미 이(已)자 성불도! 불도를 이루었느니라. 이미 성불하였다고 그랬습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면서도 확고하게 사람 사람들은 본래로 부처의 삶을 살고 있다 하는 것은 아주 심오하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만은 그것을 이렇게 드러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만약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착하고 부드러우면 이와 같은 여러 중생들은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착하지 않는 사람 몇이나 있습니까? 또 여기서 계행(戒行)과 인욕 (忍辱)과 보시(布施)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이것을 이야기 했는데, 사실은 구태여 뭐 육바라밀 닦는다고 하고 닦는 사람보다도 세속적인 그런 삶이 정말 모두가 이 육바라밀의 삶입니다.
인욕 없이 세상에 어떻게 사나요? 이런저런 희생 없이 어떻게 세상에 살아집니까? 그 나름대로 자기가 지켜야 할 도리 지키면서 사는 그것이 계행이지요. 또 정진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꾸준히 새벽부터 나가서 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평생을 살아갑니다. 어떤 수행자가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는 수행자가 있습니까? 정작 수행한다고 간판 걸고 하는 사람보다도 훨씬 그 수행이 진지하고 아주 대단합니다. 그런 모든 삶이 그대로 부처의 삶이다 하는 거예요. 개이성불도! 이미 성불하였다 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밑으로 내려가면 더 하지요.
41 여러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사리에 공양하는 사람이 천 만 억의 탑을 세울 때 금과 은과 파리와 자거와 마노와 매괴와 유리와 진주 등으로 만들고 아름답고 훌륭한 장엄거리로써 찬란하게 탑을 꾸미며, 또는 석굴을 파서 불당을 짓기도 하고, 전단향과 침수향으로 짓기도 하고, 목밀(木밀) 나무나 다른 재목이나 벽돌이나 진흙으로 짓기도 하고, 넓은 벌판에 흙을 쌓아서 불당을 짓거나, 또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다면 이런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참 아주 제가 법화경 중에서 지금 현재의 게송으로 나오고 있는 모두 이미 성불하였다 하는 이 대목을 좋아하고 정말 환희심을 가지고 읽습니다. 여러 가지 불교적인 어떤 인연을 소개하고 있지 만은 궁극에 가서는,
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든다면
그러니까 어디 강가나 바닷가에 나가 가지고 모래사장에 모래를 이렇게 쌓아 올립니다. 또 물이 흔치 않은 모래사장은 아이들이 자기가 오줌을 누어서 모래를 뭉칩니다. 그래 가지고 불상도 만들고 탑도 만든다는 그런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그것 만으로라도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성불에는 조건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바라밀도 소용없고 참선도 소용없고 간경도 소용없고 그런 것을 가지고 성불하는 차원이 아니지요. 그런 것을 가지고 성불했다면은 그 성불은 한이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은 말하자 면은 퇴보가 있는 것이고 그것은 나중에 무너질 수도 있고 없어질 수도 있는 그런 성불입니다.
성불이라고 하는 그 의미를 우리는 이런 경중의 왕인 이런 법화경을 통해서 정말 아주 정확하게 우리가 이해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지요. 원래 성불이라는 사실이고 이것이 변함없는 것이고 이것이 만인에게 평등한 것이고 본래 성불의 의미를 알아야 우리가 되겠지요. 알든 모르든 사실 관계없이 이미 성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또 그것을 인식 시키기 위해서 뒤로 가면서 계속 이야기가 나오지요. 또 한번 보기로 하지요.
42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님을 위해서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거나 불상의 여러 가지 모양들을 조각한 이들도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불상 조각하는데 인연 조금이라도 안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인연 좀 된다고 뭐 그렇게 성불 하기로 하면은 그 성불 세상에 사실 쉽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조건이 되지 않고 본래로 이미 성불이라고 하는 그런 사실이죠. 참 이것이 정말 깊은 뜻이고 최상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칠보로 부처님의 형상을 조성하거나 황동이나 백동이나 함석이나 연이나 주석이나 철. 나무. 진흙으로 만들거나 아교나 옻칠과 천으로 불상을 조성한 이들도 이러한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인간이 불교와 인연 지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조건들을 여기서 다 이야기 하고 있지 만은, 본래 성불이라고 하는 것을 이런 방편을 빌어서 표현하고 있지요.
스스로 하는 경우도 있고 돈을 들여서 품을 사가지고 남을 시켜서 할 수도 있고 그렇지요. 기도할 때 자기 스스로 기도 하기도 하고 가는 사람이나 도반에게 어떤 기도 금을 부쳐서 자신은 절에 가지도 않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기도 하는데 정성이 있느니 없느니 이런 이야기들을 곧잘 하는데 그것도 상관없어요. 본래 이 성불이라고 하는 것만 우리가 알면은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방편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은 약간의 모순은 있어요. 모순은 있는데 그 모순이 상당히 방편과 어떤 조심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그렇죠.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으로 나무 꼬챙이나 붓이나 또는 손가락이나 손톱 따위로 불상을 그린다 해도
대충 이렇게 손가락으로 땅에다 대고 또는 꼬챙이로 땅에다 그려가지고 이것이 불상이다 한다 이거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그것이 무슨 성불의 조건이 되겠습니까? 성불이란 조건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이 경중의 왕이다. 경중의 최고의 경전이다. 이러한 본래의 부처의 도리를 여지없이 이렇게 명명백백 하게 드러냈기 때문에 법화경이 높이 추앙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나무 꼬챙이로 그림을 그릴 줄 알고 장난을 칠 줄 아는 바로 그 사실, 기도금을 남에게 부치든지 아니면 본인이 직접 가든지 그런 일을 할 줄 아는 그 사실 그 능력이 바로 부처인 것이죠.
다만 여러 보살이 되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이미 다 해탈되어 있다 하는 그런 표현을 여러 방면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죠.
43 만약 어떤 사람이 탑이나 등상불(等像佛)이나 탱화에 꽃과 향과 깃발과 일산으로써 공경 공양하였거나, 또는 남을 시켜 풍악 울리고 북 치고 소라 불고 퉁소와 저와 거문고와 공후에 비파와 징과 요령등 이러한 여러 가지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상에 공양 하였거나,또는 환희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거나, 내지 아주 작은 음성으로 공양하더라도 이러한 이들 모두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보십시오. 부처님 앞에서 찬불가 한번 부르고 그것으로 서 모두 이미 성불이다. 이렇게 부처 되기가 쉬운 거예요.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 성불하는 일이고 견성하는 일이고 얼마나 쉬운가?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더 쉽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은 코 만지기 보다 더 쉬운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코 만지려면 손이 있어야 되는데 손 없는 사람은 못 만지지 않느냐? 그런데 이 성불은 손 없는 사람도 가능하다 이것이죠. 그러니까 세수하다 코 만지기 보다 더 쉽다 이렇게 표현한 예들도 있습니다.
성불이란 본래 성불이라는 것이고 본래 부처로서의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그것을 알고 믿어라. 그리고 그렇게 살아라.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또는 모든 생명이 다 부처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존중하고 공양하고 찬탄하고 그러고 위해줄 때, 나도 행복하고 그도 행복하다. 행복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다른 것 가지고는 도저히 행복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인불사상(人佛思想)! 사람이 부처님이다 하는 이 사상만이 우리가 제대로 실천하고 이해한다면 바로 그 세계평화 나라의 평화 또 모든 사람의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따라올 수 있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이라고 생각을 하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긴다면 거기에 무슨 사기가 있고 시기 질투가 있고 모함이 있고 억울함이 있고, 남을 빼앗고 빼앗기고 죽이고 무슨 영토 넓히기 위해서 자기 세력 넓히기 위해서 쓸데없는 그런 조그마한 조건을 달아 가지고 침공을 해서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같이 취급하고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사상이 사실 우리가 일반화 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런 부처로서의 위대성을 모두가 인식하고 서로 부처님으로 존중하고 받들 때, 인류의 그 과제! 모두가 언제나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그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44 만약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라도 꽃 한 송이를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무수한 부처님을 친견하느니라.
산란한 마음은 이 꽃 한 송이를 샀는데 이것이 괜히 돈이 아까운 것이 아닌가? 이것 뭐 꽃 한 송이 바쳐도 될까? 별별 그 나름대로 망상을 많이 부리겠지요. 그리고 부처님에 대한 어떤 공경심은 고사하고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산란한 마음이라고 하는 여기에는 중생들의 그런 모습이 잘 나타나 있지요. 그런 인연으로 라도 모두 이미 성불한다 하는 그런 뜻이지요.
혹 어떤 사람이 절을 한 번 하거나, 합장만 한 번 하거나, 손만 한 번 들거나,머리만 조금 숙이어도 이러한 일로 불상에 공양하면 점점 한량없는 부처님을 친견하고 스스로 최상의 도를 이루고는 무수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하기를 마치 나무가 다 타고 불이 꺼지듯 하느니라.
절을 한번 하거나 합장만 한번 하거나 아니면 절도 귀찮고 합장도 귀찮고 그래서 마지 못해서 친구에게 손 한번 들듯이 이렇게 한 것도 이미 불도를 이룬다 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정말 성불 하는 것은 공짜입니다.
하등의 돈들 까닭도 없고 노력이 들 까닭도 없고 이것 참 이렇게 쉬운 것이 성불하는 거예요. 그러한 사실을 이 법화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법화경은 경중의 왕이라 하고 옛날부터 높이 받들어 모시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또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은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보십시오.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 하고 이렇게 하더라도 그것으로 이미 성불했다는 거예요. 범어사에 오시는 분들 저 일주문 옆에 탑이 있는데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에 그 탑을 향해서 모두 합장 배례하고 갑니다. 들어갈 때 합장 배례하고 가고 또 떠나갈 때 또 거기서 탑을 향해 합장 배례하고 갑니다. 그분들 이미 성불 끝났습니다.
사실은 그렇게 하기 전에 이미 성불을 마쳤습니다. 절에 오려고 한 생각 일으켰을 때 이미 성불 끝난 거예요. 오고 가고 사실은 상관 없습니다. 합장 배례하고 안 하고도 상관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합장하고 절하고 나무불 하는 것 하고 상관없기 때문에 그래서 여기 뭐라고요?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이렇게 표현되는 것이지 무슨 합장하고 절 한번 하는 것이 조건이 된다면 그 무슨 조건이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지나간 세상의 부처님들이 혹 생존해 계실 때나 열반에 드신 뒤에 이러한 법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
과거 부처님이 계실 때나 현재나 또 이 순간 우리가 법화경을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라도 이렇게 듣고 있고, 또 녹음을 해뒀다가 재방송을 듣는 사람도 아니면 책을 보는 사람도 모두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듣고 보고 하는 그 순간 이미 다 성불입니다.
성불이라고 하는 사실을 몰랐을 때 그것은 자기가 성불하고 있는데도 단 모를 뿐이지요. 그러니까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이 법화경을 통해서 확고하게 해 둘 필요가 있고 여기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되고, 또 자기 나름대로의 어떤 확신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정말 아주 멋진 법문입니다. 내가 그래서 이 대목을 법화경에서 제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힘들게 온갖 무슨 노력을 들이고 정말 참고 견디고 온갖 난행 고행 다해가면서 성불 하려고 했고, 또 정말 피나는 고행을 하면서 성불 하려고 하고 그런 큰 희생을 치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아무 쓸데없는 것이고 하등의 그것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니까 얼마나 속이 후련하고 좋습니까?
이 보다 더 훌륭한 가르침은 없어요. 사실은 누구를 염불을 많이 하라고 합니까? 무슨 절을 많이 하라고 합니까? 무슨 능엄주를 외우라고 합니까? 그 외우기 힘들고 발음하기 힘 드는 그런 진언이나 주문을 외우라고 합니까? 아무런 그런 것이 공덕의 조건이 되거나 성불의 조건이 되거나 견성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이 좋아서 할 뿐이 예요.
참선이 좋아서 그저 참선 할 뿐이고 경이 좋아서 경을 읽을 뿐이고 주력이 좋아서 그저 주력을 할 뿐이지, 무슨 그것을 해서 성불 하겠다. 법문을 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아예 하지 말아야 됩니다. 절대 그런 이치는 없어요. 여기 법화경을 보면 알지 않습니까?
오늘 저녁에 약간 톤을 높이고 열을 내는 이유가 이 대목을 내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랜 세월 정말 잘 못 알고 억울한 고생을 너무 많이 했고 지금도 그렇게 억울한 고생을 수없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물론 그 당시는 고생이 고생으로 생각이 들지 않고 좋아서 한 것이지요.
좋아서 한 것은 고생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것이 고생도 자기 마음에 들고 자기 마음이 내키고 해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활이지요. 그렇게 우리가 이해해야 할 그런 내용입니다. 지금 읽은 것은 과거의 부처님이야기고 그 다음에 미래 부처님도 그렇고 또 현재 부처님이 그렇고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렇다 하는 그런 내용으로 쭉 이어집니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저녁 법화경의 이 대목은 아주 궁극의 가르침이고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최상의 가르침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 해요. 어린아이들이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놓고 그 인연으로 이미 성불이다 그랬습니다. 앞으로 성불 한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성불했다 그랬어요.
그리고 산란한 마음으로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탐 진 치 삼독과 남을 해치고자 남을 모함하고 시기 질투하고, 온갖 그런 중생의 감정과 약점과 모순을 다 한아름 가지고 있는 그런 망상 구더기 그대로 다 성불해 마쳤다 하는 그런 사실입니다. 아! 기가 막히지요. 이러한 깊고 오묘한 이치가 바로 법화경인 것이고 이와 같이 쉬운 것이 또한 불교인 것입니다.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지요. 사실은 코 만지기가 너무 쉬워서 어쩌면 매일 매일 수없이 만지고도 만지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듯이, 성불의 경지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이미 알고 보면은 이미 진묵겁전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 이라고,수억 만년 전부터 자신이 성불해있었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될 것이고 아마 알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이란 말도 있지 않습니까? 옛부터 본래로 부처다. 신라의 성자인 의상스님께서 화엄경을 집약해서 법성게라고 하는 짧은 그 게송으로 표현했지요. 거기에 마지막 구절이 그것 아닙니까? 구래부동명위불! 옛부터 오면서 그대로 변함없는 부처님이다.
그리고 진묵겁전 조성불(塵墨劫前早成佛)! 진묵겁부터 그러니까 이 지구를 갈아 가지고 먼지를 만들었다 그랬을 때 그 먼지 수효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 먼지 숫자보다도 더 많은 겁의 세월 전에 그 먼지 하나를 1겁으로 쳤을 때 주먹만한 바위 하나만 갈아도 돌 하나만 갈아도 그 먼지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먼지 하나하나를 1겁으로 쳤을 때 그 겁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성불이다 그랬어요.
이 지구를 갈아서 먼지를 만들고 그 먼지 숫자 하나를 1겁으로 쳤을 때 그 많고 많은 먼지의 겁 세월 이전부터 이미 우리는 성불이다 그런 표현입니다. 그것이 우리 선가에서 불교의 궁극의 내용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법성게의 구래부동명위불 이라고 하는 말도 그 뜻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궁극의 가르침을 오늘 이 법화경에서 다 표현하고 있고, 또 너무 아주 참 이해하기 쉽도록 정말 우리들의 기존의 그런 성불의 대한 그 관념들을 확 바꿔놓은 그런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 삼아 모래를 쌓아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불상이라고 하든지 탑이라고 하든지 그것으로서 이미 성불해 마쳤다 라고 했고, 망상이 부글 부글 끓는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 앞에 나무불! 한번 한다든지 손을 한번 든다든지 절할 필요도 없어요. 손 한번 부처님 앞에 번쩍 드는 것 얼마나 참 장난스럽고 거만하고 오만불손한 행위입니까? 그런 행위가 이미 성불이라고 하는 이러한 사실입니다. 아주 정말 이것만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은 정말 인간의 위대성과 본래로 부처라고 하는 그런 의미를, 우리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이 대목은 정말 법화경을 공부하면서도 제일 좋아하고 부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나타나 있고,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 불교의 요체가 바로 여기에 아주 확연히 드러나 있는 대목입니다. 다음 시간에도 보면 미래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 현재 부처님의 방편과 진실 역시 그런 이야기를 보충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법회는 여기까지입니다.
첫댓글 큰스님 , 법문 감사합니다. 인쇄해서 많이 읽고 사유하겠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나무묘법연화경.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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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已成佛道(개이성불도)라....나무묘법연화경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탑에 들어가서 ‘나무불(南無佛)’하고 염불 한 번 하더라도 모두 다 이미 성불하였느니라...나무묘법연화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