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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26-27 경주 성지순례07 참고자료 : 서울 보문사 석굴암
2007년 2월 17일과 같은 해 7월 29일 두차례에 걸쳐서 서울 보문동에 있는 보문사를 들렀다
서울 보문동의 유래가 된 보문사는 고려초 예종 10년 담진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여러차례 중수되었는데 옛 건물로는 조선 영조때 세워진 대웅전 건물이 있다
일제때는 절이 황폐화 된 상태로 있다가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스님이 취임하면서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이르른다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하여 동양 유일의 비구니 종단이 되었다
1972년 6월 16일 경주 석굴암을 본뜬 석굴암을 축조하였다
보문사 대웅전
보문사 대웅전의 영산회상도와 신중도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이다
보문사 석굴암 오르는 길
보문사 옆길에서 본 서울 보문동 전경
보문동의 보문사 석굴암 전경
2007년 2월 17일 방문때의 사진
동대문밖 보문사에 비구니들 손으로 재현된 석굴암(石窟庵)
"석굴암을 서울에 재현, 동대문밖 보문사에 비구니들 손으로"
작년 8월 착공 금년말께 완공예정
목조전실 없고 석가좌불만 약간 작게
5천 신도 시주에 석공 연 2만 5천 동원
화강암만 250트럭이 들고 철재 20톤, 시멘트 1만 부대 쓰여
<주간한국> 1971년 7월 25일호
공주에서 무녕왕릉이 1천 5백년의 긴잠을 깨고 발굴되어 백제문화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가고 있
다. 그것에 질세라 이번에는 통일신라불교예술의 꽃인 경주 토함산의 석굴이 서울에 재현된 데서
불교계의 화제다 .바야흐로 국보급 문화재의 붐이 부는 요즘이다.
<> 여승(女僧)들의 대역사(大役事)
서울의 보문사(普門寺)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도 동대문밖 '탑골승방'하면 이내 알아차린다.
비구니만의 절이다.
고려 예종 때 담진국사가 세운 이래 8백 50여년 끊이지 않는 불등을 밝혀온 유서깊은 곳이다.
이곳에서 석굴암을 수도 서울에 재현시켜 통일신라와 통일조국의 기원을 담자는 큰 공사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그 이름도 보문사 석굴암.
동녘이 밝아올 무렵이 되면 해돋이에 뒤질세라 벌써부터 돌쪼는 소리가 경내에 울려퍼진다.
이윽고 비구니의 목탁소리, 새벽 종소리.....
이렇게 화강암과 씨름하는 작업이 밤늦게까지 계속된다. 1천 2백여년 전 토함산 꼭대기,
멀리 동해의 해돋이를 바라보면서 정을 꽂은 신라인의 슬기를 오늘에 재현하려는 후손의 정성이
소리마다에 서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ㅡ 목탁소리, 염불소리에 발맞추어 돌쪼는 정소리는 영원으로 이어진다.
무녕왕릉이 1천 5백년 뒤에 옛모습 그대로 드러났듯 토함산 석굴암이 1천 2백년 뒤의 오늘에도
옛모습 그대로 살아 있듯 보문사 석룽망도 서기 3천년 혹은 4천년가지도 1971년의 오늘의 모습을
그대로 지커가리라는 염원을 쏟는다. 비구니들도 설계자도 석공들도 한결 같다.
일찍이 한국의 불교사상 비구니만의 손으로 이만한 규모의 큰 불사가 이루어진 일도 없었으니
불교계의 경사다
<> 10년 넘은 염원
지난해 8월 19일에 착공하여금 년말께 완공예덩이다.
보문사 석굴암은 목조전실(木造前室)이 없는 것과 석가여래좌상(석굴암 중앙에 앉은 불상)이
경주 것에 비해 약간 작은 것 말고는 크기와 모양이 똑 같다. 석굴암 전장 14.8미터하며 굴의
높이 9.3미터하며 그 규모는 물론 위형도 2층 돔을 이룬다.
서울 보문사에 석불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기로 생각한 지는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들 조각을 흠없이 책임지고 완수할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하던 중
봉원사(奉元寺)의 석가여래상을 조선한 서양화가 한봉덕(韓奉德)씨를 소개받은 것이 이 불사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석가여래좌상 한 분만 경주 석굴암의 것을 모방하여 화강암으로 높이 6척으로 조각하기로 했다.
그 비용을 30만원으로 잡았었다.
일을 하는 도중 모시는 장소가 또한 전암석(全岩石)이었다. 그 채석작업이 힘드는 관계로 불단을
콘크리트로 만들어 모시기로 한 것이 기왕이면 힘들어도 돌을 따내고 거기에 석굴암을 조성하여
그 속에 모시기로 설계가 시작되고 대체적인 측량으로 지형을 연구했다.
송은영 주지스님의 의견은 외부에만 금강역사 좌우 2상만 조각하여 모시고 내부는 그냥 돌로만
싸서 완성시키자고 했다.
그러자 작가인 한봉덕씨는 기왕이면 내부의 중심부에 11면관세음보살상과 제석천왕상 그리고
대범천왕상, 문수보살, 보현보살상의 다섯 상과 양 금강역사상을 조성키로 결정하고 다시 설계를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당초에 불상 하나에서 출발하여 일이 점점더 커져간 것이다.
그러한 큰 역사를 대담하게 단행하기로 한 사람이 송은영 주지스님이다.
그 규모를 보면 본존의 불상만은 경주의 것이 3.26미터인데 대해서 2미터로 1.26미터 작을 뿐
다른 점은 석굴암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다.
<>시주는 5천 신도
석굴암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예산은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조성자금은 5천 신도가
최하 1백 원에서 최고 3백만 원까지 시주하는 정성어린 돈으로 메워져 나가고 있다.
석공의 동원 총인원이 연 2만 5천 5백 명이며 화강암이 1천 2백 톤(250트럭분)에 철재가 20톤,
시멘트 1만포가 오늘까지 쓰였다.
석굴암이 자리잡은 위치는 보문사의 정문의 바로 안쪽. 그곳에 있는 돌산을 굴이 들어앉을 만큼
깎아내고 경주의 석굴암처럼 정동방(正東方)을 향해있어 석굴암 재현장소로는 가장 알맞는 장소다.
일이 이렇게 점점 커져가자 신도들 사이에는 그런 일이 실현될 리가 없다는 등 별의별 말이 나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현 석굴암을 이룩할 대암석에 남포를 놓는 첫 날이었다.
그날 저녁 초저녁가지 일을 하고 작가 한씨는 잠간 쉬는 사이에 꼬박 잠이 들었다.
그 동안에 꿈인지 생시인지 또렷하게 그 암석의 샘에서 맑은 물이 마구 쏟아지는데 잠깐 동안에
물이 온 보문사안을 호수로 만들고 보문사 정문에는 보문동의 주민들이 밀려와서 절의 정문이
열리면 큰 물사태가 나겠다고 야단들이었다.
한씨는 갈 곳이 없어서 나무꼭대기까지 올라갔으나 물이 발등까지 철철 닿아 야단을 치다가
깨어났다.
이 꿈이야기를 들은 스님들은 앞으로는 일이 잘 되겠다고 해몽을 하며 기뻐하면서도 일부에서는
여전히 그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고 걱정하며 심지어 작가에 대한 불신의 소리까지
올랐다.
<> 절 한번에 3백만 원
정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꼭 알맞았다. 공사비 걱정이 태산같았던 작년 연말의 일이다.
절에 40년을 불공드려온 한일관(韓一館)의 주인 신우경 할머니가 "간밤의 꿈에
보문사 석굴암의 부처님을 보았다"면서 절에 왔다. 신할머니는 놀랍게도 3백만 원 수표를
불상 앞에 높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좋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조성반대파의 최선봉이던 천혜안(千慧眼)스님은
꿈에 불교에서 길조(吉鳥)로 치는 관음조(觀音鳥) 수백 마리가 모여 돌을 쪼는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그 돌은 새들이 쫄수록 점점 불상에 가까워 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부터 천혜안 스님을 찬성파로 돌았다.
보문사 정문과 석굴암 자리까지는 약 2백미터 거리의 비탈길이다.
이곳으로 무거운 돌을 끌어올리는 일이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제일 큰돌인 18톤 짜리 화강암을 절의 정문 앞까지 트럭으로 갖다 놓았을 때의 일이다.
"그 돌이 현장까지 올라간다" "올라가지 않는다"로 말이 구구했다.
석공들이 기계장치를 하고 있을 때였다. 경관의 부인으로 이 절에 열심히 다니는 신도가
초 석 자루와 돈 3만원을 가지고 나타났다.
역시 꿈.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그 큰바위에 초 석자루를 켜놓고 불공을 드리라고 했다.
그래야 돌이 올라갈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 여신도가 불공을 끝내고 초 석자루가
다 녹아버렸을 때 기계장치가 완공되고 이어서 18톤 짜리 돌이 얼음 위를 미끌어지듯
험한 비탈을 올라갔다.
이런 꿈의 기적은 지금도 그 절의 신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부처님이 이 불사를 돕는 증거라고 신도들은 믿고 있다.
어느 할머니는 매일 한번씩 절에 와서 종이에 싼 깨끗한 1백 원 지폐 한 장씩을
작가 한씨에게 건네주고 간다. 그런 신도의 정성이 제일 고맙다는 것이 주지스님의 말이다.
공화당 국회의원 이원만(李源萬)씨는 불상 앞에서 절 한 번하고 돈 10만원을 놓고 갔다.
그밖에 익명을 요구하는 유명인사의 시주들은 수없이 많다는 것이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보문사는 서울 원근의 불교도들의 메카가 될 것 같다.
또 수학여행코스도 되고.
경주 석굴암의 8부신중상이 있는 전실은 생략하고
비도의 사천왕상과 주실의 본존상과 10대 제자상 보살상 감실등은 그대로 재현하였다
비도의 인왕상은 경주의 그 것과는 달리 사천왕상과 나란히 배치하였다
보문사 석굴암 건설당시 설계도
보문사 석굴암
전실의 8부신중상은 없고 비도와 주실만 있다
비도의 인왕상은 사천왕상과 나라히 배치되었다
주실은 유리로 막혀있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으로 주실 내부에 들어가볼수있다
비도 오른쪽의 사천왕상과 인왕상
비도 왼쪽의 사천왕상과 인왕상
보문사 석굴암 조성기
석굴암 본존불
본존불의 규모가 경주의 석굴암이 3.26미터인데 비해서 2미터로 1.26미터 작을 뿐
다른 점은 석굴암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다.
본존불 바로 뒤에 위치한 11면 관세음 보살상이 보인다
본존불 위치에서 본 바깥쪽 비도의 사천왕상과 인왕상
석굴암 감실과 감실의 불상들
석굴암 본존불과 옆의 10대 제자상과 감실등이 잘 보인다
10대 제자상
본존불과 앞의 공양탑 사이로 문수보살상이 보인다
공양탑 뒤에 계시는 조각상은 제석천왕이다
석굴암의 천개
보문사 석굴암 본존불
경주 석굴암과 본존불에 대한 평가는 아래와 같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
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
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
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
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본존불에서 보는 비도의 사천왕상과 인왕상
10대 제자상
보문사 석굴암 전경
보문사 9층석탑
은영스님의 명호를 딴 은영유치원
종각
보문사 석굴암 입구를 다시 나오며
8편 이견대와 대왕암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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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돈황의 막고굴에도 직접 다녀오시고..
사찰 기행에 대해 문외한인 제가 보더라도 취미 이상의 안목이십니다. 고맙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