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에 이수근이 있고 건축계엔 김수근이 있다면 미술계엔 박수근이 있다.
국토의 정중앙, 양구를 방문하면 10년이 젊어진다 등 양구를 나타내는 말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것은 역시 평화와 생명의 땅, 자연생태의 보고라고 표현되는 것들이다. 한반도의 배꼽이란
위치답게 생명의 근원으로 무한한 신록의 활력 넘치는 기운이 샘솟고 있다. 양구는 6.25 전쟁의 격전지로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고 두타연과 대암산, 파로호 등 몸과 마음이 저절로 치유될것 같은 싱그러운
자연환경이 있지만 양구가 낳은 위대한 한국의 대표화가인 박수근 선생을 만나지 못하면 양구를 절반만
알고갔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경춘고속도로를 지나 몇개의 물길위의 다리들과 긴 터널을 지나 만나는
양구. 비록 잘 닦인 도로덕분에 거리는 무척이나 가까워졌지만 아직까지 사람들의 뇌리에는 멀고 먼
오지로 남아있다.
그곳을 새롭게 문화와 역사의 고장으로 만들어준 곳이 바로 양구읍내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이다.
미술관은 읍내에서 양구를 가로질러 흐르는 서천을 건너 5분정도만 가면 만날 수 있을만큼 지척이다.
한국건축대상을 받을 만큼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 만든 외관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창작센터를 포함해 연못과 산책길, 작은 공원 등 미술관 관람 뿐 아니라 휴식과 여가의 장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고구려시대에 요은홀차라 불리며 고려시대부터 양구란 이름을 얻게된 춥고 척박했던 땅 양구는
금강산까지 불과 52km 정도 되지 않는 곳이며 북한산보다 높은 1,000여m의 험준한 고산들이 소양호와
파로호에 둘러싸여 태고적의 청정한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바로 그 양구의 정림리에서
태어나 한국 미술사에 큰 획을 긋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한국 화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나러
가보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전철로 갈 수 있는 춘천에서 양구시티투어 버스가 출발하니 이것을
이용하면 훨씬 편하게 갈 수 있다.
양구읍 정림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은 지금 한창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연못을 만들고 작은 오솔길이 있는 산책로도 조성하고 있다. 미술관 옆에는 젊은 예술인들의 창작과
예술을 지원하기 위해 1년에 1팀만 뽑아서 스튜디오를 제공해주는 창작스튜디오도 있고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도로변에는 정림리갤러리도 있다. 이런 지자체중에서도 제일 작은 규모에 속하는 산골의
군에서 이런 문화와 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던 힘은 아마도 박수근이란 걸출한 인물때문이 아니었을까.
반원형의 높다란 돌담을 한바퀴 돌아야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날 수 있다.
멀리서 보면 돌담을 올린 작은 성처럼 보일수 있겠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에 개관했으니 벌써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곳 박수근 화백이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터에 지은 미술관은 그 모습이 한층
고풍스러워졌다. 물론 옆의 공원들이 조성되면 지금의 단촐하고 고고한 멋은 약간 사라지지 않을까.
시골 초가집에서 번듯한 한옥집처럼 바뀔 수 있으니까. 미술관 건물 자체도 박수근 선생의 화풍을 닮아 있다.
미술관 자체를 통해서도 박수근 선생의 그림세계를 엿볼수있는 것이다. 이곳의 관장을 맡고 있는 분은
25년 경력의 40세의 여자분인데 젊고 지적인 모습과 박수근 화백에 대한 화풍의 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람객에게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줘서 고마웠다.
양구에 사는것이 힘들지 않느냐 했더니 공기좋고 물맑아서 그리고 미술관 자체가 좋아서 불편은 없다고 한다.
미술관 가는길. 높은 돌담은 한번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돌담과 담벼락에는 빨간 담쟁이들이 얽히어 한결 멋스러운 자태를 자아낸다.
농구공 정도의 크기로 부숴진 화강석 덩어리를 촘촘히 쌓아올렸다.
화강석 덩어리들은 결코 반듯하게 잘려진 대리석 뭉치가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만약 이 돌덩어리들이 반듯하게 담처럼 쌓아져 올렸다면 지금과 같은 조형미가 나올 수 있었을까.
화강석들은 시멘트로 채워지지 않은 채 층층이 쌓여 있다.
박수근 선생의 작품에서 보는 마티에르적인 감각이 미술관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는듯하다.
박수근 선생이 미술관 뜰 양지바른 마당에서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있다.
어릴적 생활했던 이곳에서 보고 느끼고 소통했던 모든 생활과 자연이 그의 평생의 그림들의 소재가 되었고
밑거름이 된 것이다. 1914년 이곳에서 태어나 광산업을 하던 부친덕분에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사업실패로 인해 지금의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만 간신히 졸업만 하고 정규적인 교육의 혜택은 더 이상
받지 못했다. 어릴적부터 그림실력과 재능을 높이산 보통학교 시절의 은사가 그림을 멈추지 말고 계속 하라고
권유하여 독학으로 미술을 깨우쳤다 한다. 12세때 밀레가 그린 만종을 보고 깊은 감동과 전율을 느끼며
그와 같은 화가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한다. 만약 그의 집이 계속 부유했다면 지금의 박수근이란
한국미술사의 걸출한 인물이 나왔을까. 인생은 그 당시에는 알수없는 요지경이다.
뒤에 가서야 그 인생이 평가받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하루 하루 노력과 열정으로 인생의 돌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야만 좋은 평가가 나오겠지. 이곳 양구는 소박한 인정 가득한 시골마을이지만
그 속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과 꿈을 만들어가던 거름진 땅이었다. 그가 수없이 스케치했던
나무, 여인네, 빨래터 등등이 이곳에서 본 풍경으로 탄생했으니까.
박수근 미술관의 정원에는 졸졸졸 흐르는 시내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위쪽에서 산책길 공사도 하고 있고
물이 가물어진 갈수기라 그냥 댓돌만 남아있다. 고 박수근 화백은 우리나라보다 외국에 더 잘 알려진
세계적인 유명 화가이다. 그의 작품은 아무리 작은 호수의 그림이라도 몇억원을 호가한다. 그의 그림은
1996년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인 미국 소더비에서 '강변에서 빨래하는 여인'이 당시 2억 5천만원에
팔리며 한국의 대표화가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하면 보석과 그림, 장신구, 골동품,
문화재 등을 취급하는 알아주는 세계적인 경매회사의 투톱이니 세계적인 화가로 인정받은 셈이다.
박수근 선생은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이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선을 이용해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 민족이 가진 소박한
정서를 거친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다.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그는 소소하고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한 서민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는 인물중의 하나이다. 간결한 필치로 힘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던 이중섭과도
쌍벽을 이루는 화가이다. 2002년 선생의 생가터에 건립된 미술관은 작가의 작품세계와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혼을 기리는 한편 작은 마을이지만 지역의 대표적인 문화와 소통의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재정자립도가 열악한 양구군에서 미술관에 투자하고 또한 근처를 예술과 문화공간으로 꾸미는 것은
자금만 가지고는 될일이 아닐것이다. 예술을 이해하고 문화를 지역에 심고자하는 노력과 응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산업단지나 공장, 놀이시설 및 리조트와 같은 수익면에서 도움이 되는 시설도 필요하겠지만
점점 각박해지고 인간미를 잃어가는 이 시대에 마음과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문화공간을 마련하는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정원을 지나 산길을 100여m 정도 오르면 양구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전망대와 박수근선생과 그의 부인이 잠들어 있는 묘원이 있다.
미술관으로 들어가면 박수근 선생의 작품으로 만든 기념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숍이 있고 볕이 잘드는
복도를 지나면 박수근 선생의 생애와 작품을 볼 수 있는 기념 전시실이 있다. 이곳에는 생전에 사용했던
안경, 연적, 물감 등 선생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유품과 사진, 편지, 메모 등 그의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작은 규모지만 작가의 삶의 역사와
그림에 대한 열정, 가족에 대한 사랑을 알 수 있는 의미있는 공간이다.
잠깐 그의 삶의 이력을 살펴보면 1914년 일제에 의해 강제합병되어 암울했던 시절 강원도 양구의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국민학교만을 졸업한 그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우고 부두 노동자, 면서기,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리고 월남 후에는 교편을 잡고 미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그는 삶의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냈다.
절구질하는 여인, 광주리를 이고 가는 여인, 길가의 행상들, 아기를 업은 소녀, 할아버지와 손자 그리고
김장철 마른 가지의 고목들... 그는 예술에 대하여 거의 언급한 일이 없고 또 그럴 처지도 아니었지만
그의 부인 김복순 여사가 쓴 [아내의 일기]를 보면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진 마음을 그려야 한다는
극히 평범한 예술관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예술혼을 불태운 그는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한 근대적이고도 시대를 앞서갔던 소박한 서민화가이기에 그 이름이 오늘까지 빛나는 것은 아닐까.
박수근미술관은 박수근 선생의 손길이 담겨있는 유품과 유화, 수채화, 드로잉, 판화, 삽화 등 여러 작품을
소장하고 이를 선별하여 전시 하고있다. 또한 박수근 선생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근 현대 한국 화단의
주요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문화의 전당이다. 선생은 특히 옛 석물, 석탑, 와당등에서
그 아름다움을 본떠 표현하기를 즐겨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술관의 외부도 화강암을 잘라 층층히 쌓아올려 만든것같다.
박수근선생 기념관을 벗어나 회랑을 따라 걸어가다보면 선생의 작품들이 전시된 곳에 이른다.
그의 작품들은 몇억원대를 호가하는 고가이기에 많은 작품들이 있지는 않지만 진품들도 유리액자속에서
순수한 예술의 빛을 발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질감이 투박하고 판화에 찍은듯한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마티에르란 기법이라고 한다. 상설전시실의 부제는 화강암과 흙벽에 새긴 마음의 풍경이다.
그의 작품경향은 주로 회백색으로 표현하여 단조롭지만 한국적인 주제를 서민적 감각으로 다룬 점이다.
그의 작품중에 빨래터, 나무와 두여인, 아기 업은 소녀 등이 대표작으로 통한다.
고향인 이곳 양구의 풍경이 선생에겐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마음의 멘토가 아니었을까.
박수근의 그림은 그려진 것이라기보다 새겨진 것이며, 나타낸 것이기보다는 드러낸 것이다.
그의 마티에르는 화면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며 그리려는 뜻은 마티에르 속에서 함께 작동되고 있다.
예술은 고양이 눈빛처럼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니라 뿌리 깊게 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것이다. - 박수근 -
나는 그림 제작에 있어서 붓과 나이프를 함께 사용한다. 캔버스 위의 첫 번째 층을 충분히 기름에 섞은 흰색과
담황갈색으로 바르고 이것을 말린다. 그 다음에 틈 사이 사이의 각층을 말리면서 층 위에 층을 만드는 것이다.
맨 위의 표면은 물감을 섞은 매우 적은 양의 기름을 사용한다. 이런식으로 해서 그것은 갈라지거나 깨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검은 윤곽선을 이용한 대담한 필법으로 주제를 스케치한다. - 박수근 -
전시실에는 한국적인 문양들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석물들의 드로잉작품과 탁본들이 있다.
생전에 그는 경주의 오래된 유물들의 선과 모양을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박수근미술관에 있는 그의 작품집과 흘러나오는 영상. 굴비를 그린것인지 전어를 그린것이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10억원을 호가한다는 그 굴비란 말인가. 문외한이 보기엔 굴비 한두릅이면 살수있겠지만
박수근화백의 손때가 묻은 작품이니 그 진가는 뭐 말할필요도 없을테고. 유명한 화가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생전에는 빈곤함에 시달리다 사후에야 비로소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 예술활동에
매진하니 언제 재테크며 벗듯한 집하나 구입할 수 있었겠나. 요즘에는 그 사정이 예전과는 달라졌지만.
이 작품은 갤러리현대의 박명자 회장이 친분이 있었던 박수근 화가의 부인으로부터 결혼기념선물로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어려운 살림살이에 25,000원을 주고 팔았는데 후에 선생과 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자꾸 생각나 30여년이 지난 어느날 수소문 끝에 2억 5천만원이란 거금을 들여 다시 구입해서
이곳 양구 박수근 미술관에 기증했다. 그에게는 2억 5천이란 돈보다는 작품에 대한 사랑과 박수근 선생에 대한마음이 더 소중했던듯하다. 굴비 두마리에 지금은 10억이니 한마리에 5억원짜릴쎄, 눈하나에 천만원은 넘겠군.
박수근 화백의 특유의 투박하고 거친 질감이 잘 표현된 드로잉과 마티에르 기법의 작품들.
언제나 그렇지만 고향냄새 가득한 모습이 참 소박하니 서민적이어서 더 공감가는 것같다.
박수근 화백의 양구미술관을 가봤으니 다음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양대 화가중의 하나인
이중섭 선생의 제주도 미술관도 가봐야겠다. 아직 제주도를 못가본 나로써는 언제가 될런지는..
가을빛이 한창인 비온뒤의 흐릿한 양구의 공기는 맑고 깨끗하다.
미술관의 가을 풍경은 언제나 찾아도 싱그럽고 향긋하다.
그냥 마음을 비우고 산책처럼 미술관 나들이에 나서기에 좋지 않은가.
박수근 미술관 옆에 있는 창작스튜디오와 기획전시실의 모습.
매년 공모를 통해 국내의 재능있고 참신한 작가들을 선정해 창작과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미술관의 작품 구입에도 꽤 많은 돈이 들어갈텐데, 이렇게 작가발굴까지 하는 미술관의 열정이 부럽다.
어디 도심의 시립미술관이나 사립미술관들이 쉽게 엄두도 못낼 일을 이 조그마한 고장에서 하고 있다니.
이곳에 입주하게 되면 1년동안 창작공간과 숙식을 함께 할 수 있는 개인화실이 제공된다고 한다.
1년에 두명 한팀밖에 못들어가니 경쟁이 치열할 듯하다.
박수근 미술관과는 달리 세련된 타운하우스처럼 몇동의 콘크리트 외벽건물이 있다.
10월 말부터는 이곳 기획전시실에서 떠오르는 서양화가인 특이한 성향을 가진 오치균 화가의 전시가
준비중이다. 그는 셋이 모인 자리에도 가지 않는다는 약간은 폐쇄적이면서도 대인기피적인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그림들은 마니아층을 이루고 있다. 밝고 화사함보다는 어둡고 음울한 그림들을
화폭에 담는데, 오치균 화가의 작품을 보기에 쉽지 않은 자리여서 꼭 한번 와볼것을 추천해본다.
오치균의 겨울밤. 회색빛 가득한 언덕마을에는 썰렁한 어둠만이 가득하다.
겨울골목. 붓을 사용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물감을 화폭에 그려서인지 질감이 상당히 거칠지만
붓으로 표현하지 못한 독특한 색감이 이색적이다. 세밀함보다는 투박함, 밝은빛보다는
어두운 응달속에 가려진 삶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작업을 많이 한다고.
감. 투박한 모습이지만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치는 감의 모습은 캔버스를 뚫고 나올것 같다.
잘 익은 감을 보니 어릴적 뛰어놀던 시골집 옆의 감나무밭이 생각난다. 손으로 그렸다고 하지만
색감은 붓으로 그린것보다 더 사실적이면서도 가을의 풍요를 잘 나타낸듯하다.
힘이 느껴지는 그의 작품 풍경. 캔버스위에 물감을 짜서 손가락으로 일정한 방향과 힘으로 화폭을 구성해갔다.
풍경이라고 하나 겨울철 어느 집의 굴뚝과 흐릿한 달만이 밤의 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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