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15일 문민정부는 식민 잔재의 청산을 기치로 국정목표로 삼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시켰습니다.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현재 경복궁 정문 쪽에 있었지요. 같은 날 광복 50돌 기념식장에서는 교향악단이 '감격시대'를 연주했습니다. 아마도 기념식을 준비한 주최 측에서는 <감격시대>를 해방의 감격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연주하기에 적당한 곡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일각에서는 <감격시대>는 일본군의 승전을 기원했던 친일가요였다며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친일가요 긍정론은 <감격시대>가 일제강점기라는 상황 속에서 진취적이고 낙관적인 내용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제국주의에의 열정을 북돋우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감격시대>는 광복의 기쁨이 아니라 황군을 격려하는 노래였다고 낙인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같은 <감격시대>에 대한 친일가요 낙인은 오랫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최근 <감격시대>가 친일가요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요. 친일가요 부정론은 <감격시대>는 조선의 광복에 대한 열망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감격시대>는 1939년 4월 오케레코드에서 발매한 가요입니다. 오케레코드 직원이었던 강해인 님이 가사를 썼습니다. 강해인 님은 해방 이후 < 굳세어라 금순아 >를 쓴 분입니다. 작곡은 인기 작곡가였던 박시춘 님이 담당했습니다. 음반사는 이 곡을 신문광고에 실어 대대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결국 이 곡은 당시 인기 가수 남인수 님의 미성에 실려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렇다면 <감격시대>는 과연 어떤 가사로 구성되어 있을까요.
https://youtu.be/5K-i_l3sklM
1.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쉬는 거리다 미풍은 속삭인다
불타는 눈동자 불러라 불러라
불러라 불러라 거리의 사랑아
휘파람 불며 가자 내일의 청춘아
2. 바다는 부른다 정열이 넘치는
청춘의 바다여 깃발은 펄렁펄렁
바람세 좋구나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저어라 바다의 사랑아
희망봉 멀지 않다 행운의 뱃길아
3. 잔디는 부른다 봄향기 감도는
희망의 대지여 새파란 지평천리
백마야 달려라 갈거나 갈거나
갈거나 갈거나 잔디의 사랑아
저 언덕 넘어 가자 꽃피는 마을로
먼저 <감격시대>를 친일가요로 보는 입장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 감격시대 >를 친일가요로 보는 입장을 대표하는 분은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님, 이영미 님입니다. 이 분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첫째, 친일가요 긍정론자는 <감격시대>의 발매 시기를 문제삼습니다. 즉 <감격시대>가 발매된 1939년은 일제가 징용과 징병, 중일전쟁의 확전을 자행하던 시기로서 일제는 조선인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고자 이 곡을 권장했다고 주장합니다.
둘째, <감격시대>는 장조 음계이고 군가 행진곡풍임을 강조합니다. 즉 이 곡이 군가를 연상시키는 강한 트럼펫 연주로 시작되고 있는 점을 지적합니다.
셋째, <감격시대>의 가사에는 선동성이 내재해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감격시대>의 가사는 시종 전진을 선동하는 분위기이며, “특히 ‘희망봉 멀지 않다’나 ‘저 언덕을 넘어 가자’ 등에서는 선명한 선동성을 드러낸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희망봉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 노래가 발표되는 시점에 난징을 돌파하고 싱가포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므로 이 곡은 난징의 함락과 황군의 연승을 축하하는 노래라고 평가합니다. 한마디로 이 곡에 대해 '전진'을 선동하는 노골적인 친일 가요라고 평가합니다.
네째, <감격시대>가 창작된 목적은 일제 식민정책에 대한 동조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즉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군 장성 출신인 미나미 총독이 부임한 후 이전까지의 유행가가 모두 금지된 가운데, <감격시대>는 국민가요라는 이름으로 황군의 미래지향 음악만을 허가했던 시기에 나온 대표적인 천왕 찬가라고 주장합니다.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 숨 쉬는 거리다'라는 가사는, 대동아공영의 기치를 드높이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미화한 곡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 감격시대 >를 친일가요로 인정하지 않는 입장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이 주장을 대표하는 분은 대중음악 연구자 이준희 님, 장유정 님입니다. 이분들의 주장의 근거를 살펴보도록 합니다.
첫째, <감격시대>가 발매된 해인 1939년에는 음반사가 조선총독부의 강요로 군국가요를 낸 적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1937~1938년에는 음반사 강제할당 방식으로 군국가요가 나왔지만 1939년에는 발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시 음반사 간부 좌담회를 통해 확인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감격시대>의 음반에 함께 수록된 '달없는 행로'는 친일 혐의가 없음을 지적합니다. 또 '감격시대' 발표를 전후한 1939년 상반기에 같은 음반사 '오케'에서 발표한 곡은 '어머님 전상서'(2월) '세상은 요지경'(3월) 등이 보일 뿐 친일적인 노래는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 무렵 각 음반사에서 발표한 대중가요 200여곡에도 친일 혐의가 있는 노래는 거의 없음을 지적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유독 '감격시대'만이 친일 의도로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감격시대’는 일제의 지시에 의해 탄생한 노래로 보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둘째, 군가풍 멜로디는 < 감격시대>에 나오는 장조 음계는 대중가요 상당수가 사용하는 음계이고 행진곡풍도 친일 군국가요와는 질감이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 분들은 군국가요가 등장한 시기는 일본에서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부터이며, 조선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조선에서 군국가요가 집중적으로 제작된 시기는 미일전쟁 이후인 1942년 이후라고 주장합니다.
세째, 가사의 해석 문제입니다. 이 곡에 드러나는 낙관적인 분위기는 해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행운의 뱃길' '희망의 대지' 꽃피는 마을'이 언덕이라는 장애물을 넘어야 이를 수 있는 장소인 점에서 이 노래가 막연한 낙관주의만을 표출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1절 '불러라' 2절 '저어라' 3절 '갈거나'가 상대의 의견을 구하는 형식으로 청자에게 힘들어도 함께 넘어가자고 권유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이곡의 드러난 낙관주의는 고난을 겪은 뒤에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부정론자들은 대중가요에서 중요한 것은 작사자의 의도보다 그 노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라고 강조합니다. 따라서 '감격시대'를 친일가요라고 규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네째, 이 곡의 성격에 대해 부정론자는 광복을 그려보며 부푼 감정을 밝고 약동적인 정서로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감격시대'가 해방공간에서 인기를 얻은 것은 노랫말이 광복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조응하면서 광복이 주는 이미지와 잘 어울렸기 떄문이라고 해석합니다. 부정론자들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자료를 검토한 결과 ‘감격시대’ 는 군국가요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상과 같이 이 곡을 둘러싸고 엇길린 해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곡을 어떻게 보아야할지 살펴보도록 합니다.
이 곡의 가사를 분석하면 온통 희망의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희망, 봄향기, 휘파람, 환희, 청춘, 불타는 눈동자, 정열, 지평천리, 백마, 사랑, 꽃피는 마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전쟁을 찬미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호전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지요. 전반적으로 이 곡은 청년들은 도시, 농촌, 바다, 어디에 있든 젊음을 구가하라는 메시지로 보입니다. 열렬한 사랑을 하든, 맘먹은 인생 목표를 추구하든 역동적인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긍정론자들이 이 곡에 친일의 낙인을 찍은 이유는 이곡이 조선인 징병을 시행했던 시점에 창작됐다고 보고 있고, 군가를 연상시키는 멜로디가 들어 있으며, 명령형의 가사가 많다는 점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긍정론자가 근거로 제기하는 조선내 징병제는 1944년 개시되어 이 시기에는 아직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또 희망봉을 반드시 남아공의 희망봉(喜望峰)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희망봉을 희망이 넘치는 곳, 즉 희망봉(希望峰)으로 볼 필요도 있습니다. 1,3절의 가사에 나오는 내용이 모두 한반도 내의 지명인데 2절만 굳이 아프리카의 지명을 넣는 것은 어색하다고 보입니다.
이곡을 친일 가요로 본 것은 이곡을 만든 작곡가와 가창한 가수가 친일 군국가요와 연관이 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 선입견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거나 불렀던 가요 중에서 친일가요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부분 조선의 정서를 노래한 것들입니다.
전쟁이 확산되고 조선인에 대한 통제가 극심해진 시기 이런 곡이 나온 이유는 음반 판매량을 늘려보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일제시기 조선인들은 군국가요를 선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선호했다면 음반사들이 돈벌이가 되는 군국가요를 대량으로 제작하여 신문광고도 내고 노래책도 인쇄했을텐데 그런 사례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음반사는 총독부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팔리지도 않을 곡을 일부러 만들어 신문에 광고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대가 어둡다고 노래까지 어두울 필요는 없습니다. 1942년 출시된 남인수 님의 낙화유수는 낙관적 희망을 고취합니다. < 감격시대>와 같이 1939년에 출시된 <바다의 교향시>, <청춘의 바다>도 청춘을 구가하라고 외칩니다.
< 바다의 교향시 >
어서 가자가자 바다로 가자 출렁출렁 물결치는 푸른파도 저편에
산호수 풀 우거진 곳 로맨스를 찾아서 어서 어서 어서 어서 가자 어서가
젊은 피가 출렁대는 저 바다는 부른다 저 바다는 부른다
어서 가자가자 바다로 가자 가물가물 하얀 돛대 쓰러지는 수평선
섬아가씨 얽어주는 로멘스를 찾아서 헤이 어서 가자 어서가자 어서가
젊은 꿈이 넘실대는 저바다는 부른다 저바다는 부른다
어서 가자가자 바다로 가자 뭉게 뭉게 구름이는 명사십리 바닷가
안타까운 젊은 날의 로맨스를 찾아서 어서 가자 어서가자 어서가
젊은 꿈이 꿈틀대는 저바다는 부른다 저바다는 부른다
< 청춘의 바다 >
모래를 걷어차고 바다로 가자 갈매기의 노래가 너울 거릴 때
푸른 물결 흰 물결 사랑의 물결 오오오오 부르자 바다여 바다여 바다여
옥당목 돛을 달고 바다로 가자 구름 피는 하늘에 달이 밝으면
은빛 물결 금물결 청춘의 물결 오오오오 부르자 바다여 바다여 바다여
그대와 노를 저어 바다로 가자 산들바람 놀러와 포근거릴 때
적은 물결 큰 물결 인생의 물결 오오오오 부르자 바다여 바다여 바다여
<바다의 교향시>, <청춘의 바다>는 <감격시대>와 같이 1939년도에 유행했던 곡입니다. 세 곡의 공통점은 청춘들에게 젊음을 구가하라고 권유합니다. 멜로디도 모두 경쾌합니다. 한결같이 청춘들에게 젊음이 넘치는 바다로 가라고 권유합니다. 비슷한 곡들이 동시에 출시된 것은 이같은 성향의 곡들이 인기를 끌었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따라서 < 감격시대>는 이러한 가요의 유행을 따른 곡이라고 평가됩니다. 아울러 친일가요라고 낙인을 찍을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청춘을 장점을 설파한 유명한 수필 <<청춘예찬>>(1929)도 청춘의 미덕을 나열하며 이 열정의 시절을 즐기라고 권유합니다. 해방 직후 유행한 청춘의 꿈(1947)은 어수선한 시기인데도 발랄한 청춘을 노래합니다. 전후 1950년대 곤궁한 시기에도 청춘을 노래한 가요가 많이 등장했지요. 군사정권 때도 낭만적인 사랑을 노래한 곡, 역동적인 청춘을 노래한 청춘가요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 가요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