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시너지 효과
성경본문 : 느헤미야 3:1-32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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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214년 로마 군대가 그리스를 쳐들어오자 군사들에게 거울을 나눠 주었습니다. 로마군의 함대가 바다 위를 새까맣게 덮고 밀려오는 판에 거울을 나누어 주는 것은 터무니없는 궁여지책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군사들은 제각기 손에 든 거울로 반사된 햇빛을 한 곳에 모아 로마군대의 배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작은 에너지가 한 곳에 집중되어 예상치 못한 엄청난 힘을 발휘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시너지 효과라고 부릅니다.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란 이렇게 둘 이상의 서로 다른 개체가 힘을 합쳐 둘이 지닌 힘을 단순한 합한 것보다 더 큰 힘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1+1=2가 아니라 3, 4, 10 그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시너지(Synergy)의 어원이 그리스어 ‘수너지아 (Sunergia)’로‘함께 일하다, 협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듯이, 다른 개체가 결합하여 서로에게 상호 작용을 함으로써 더 큰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을 말 합니다.
말 한 마리는 겨우 4톤 정도의 무게밖에 끌지 못하는데 두 마리가 힘을 합치면 22 톤을 끌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4+4=22
디지털 기술은 시너지 효과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에서 따로 분리되어 있는 시각정보와 음성정보를 하나로 융합하여 멀티미디어를 만들어 낸 디지털 기술은 무한한 상승효과로 미래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너지 효과는 더 엄청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두뇌는 무게가 약 3파운드 밖에 안되지만 약 100억 개의 신경 조직과 1,000억개의 세포들이 끊임없이 결합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고 있으며, 그런 두뇌들이 모일 경우 그 힘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 예측 불가능한 힘이야말로 인류가 현대의 역사를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임에 분명합니다.
이미 기업들은 기업 내 조직을 유기적으로 묶어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두 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큰 역사가 있을 것이라 하셨고, 사도 행전의 일곱 집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가 되었을 때 모든 분열과 분쟁의 위기를 극복 할 수 있었으며 120문도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을 때 초대 교회의 역사가 바뀌었고 사도행전이 기록 되기 시작한 것 입니다.
망해가던 미국 자동차 회사 크라이슬러를 재건하여 경영의 귀재로 일컬어지던 리 아이아코카(Lee Iacocca)에게 어느 신문기자가 경영의 비밀을 물었을때 그는 유명한 3-P로 대답했습니다.
1) principle(원리 혹은 원칙)
2) practice(실천)
3) persistence(일관성 혹은 집중).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되 일관성있게 집중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리 아이아코카는 처음 원칙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면서 리더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바로 원리 원칙을 세우는 일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원리 중심의 리더십'(Principle-centered Leadership)이란 말도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전 느헤미야라는 지도자는 이미 예루살렘성을 재건하면서 바로 이런 원리 중심의 리더십을 잘 발휘하여 위대한 프로젝트를 완성할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중시한 리더십의 원리들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그 대답을 느헤미야 3장에서 찾아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목장에서나 직장 혹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서도 주의 일을 하고자 할 때 반드시 중시해야 할 원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서 배우는 함께 하는 사역의 원리들은 무엇입니까?
1. 협동의 원리
2. 분담의 원리
3.은사의 원리
4.격려의 원리
1. 함께 동역 할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직업과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협력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 보면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노동하므로 백성들에게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느 3:1“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여리고 사람들은 멀리 살았지만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성벽재건을 돕고 있습니다.
*금장색(도금, 세금)들은 손이 부드러운 사람들이지만 험한 일을 열심히 했습니다.
*향품 장사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지만 과한 노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 [8, 31, 32]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과 마주한 부분을 중수 함으로써 최선을 다했고 시간도 절약했습니다.
*정치인들의 아들과 딸들도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하고 희생적으로 일했습니다. [3:12]
*쓰레기와 오물은 버리는 분문이라고 해서 소홀히 다루지 않았습니다. [3:14]
*빈부귀천 없이, 다스리는 자들도 솔선수범하여 참여했습니다. [3:17]
*어떤 사람들은 보통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힘써 중수 했습니다. [3:20]
진정한 지도력은 혼자만의 우수함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개인주의나 영웅주의가 용납되지 않습니다.
본문에는 적어도 75명 이상의 사람들, 15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팀웍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10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11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12 한 사람이 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요즘 독일 월드컵 때문에 지구촌 전체가 축제 분위기입니다.프랑스의 축구 감독 에메 자케는 스타플레이어 무시하고 팀워크중시 했습니다.
*뉴욕 양키스의 조 토레 야구감독은 모래알 구단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 기적의 마술사였습니다.
*화란과 우리나라를 월드컵4강으로 끌어 올렸던 히딩크 감독도 마찬가지 입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결승전에서 프랑스가 거함 브라질을 3:0으로 격침시켰을 때 세계가 놀랐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9차례 올랐지만 한 번도 결승까지 간 적이 없던 프랑스가 거둔 개가는 프랑스인들조차 믿기 어려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회가 끝난 뒤 세계축구연맹(FIFA)이 도대체 어떻게 프랑스가 이길 수 있었는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기술위원회가 직접 나서서 철저히 해부한 프랑스 팀의 우승 비결은 결국 “감독”이었습니다. FIFA 보고서는 철저한 팀 플레이가 용병술의 요체라고 분석하고, “에메 자케(Aime Jacquet)처럼 유능한 감독이 없었더라면 프랑스 우승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케 감독 리더쉽의 핵은 무엇이었을까요?
자케 감독은 선수 기용에 있어 팀웍을 중시하는 선수를 우대하고 스타 플레이어를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단독 드리블로 골을 터뜨리는 선수보다는 마지막 순간에 패스해 골로 이어 주는 겸손한 선수를 중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선수였던 에릭 칸토나(Eric Cantona)가 대표선수 명단에서 빠지자 프랑스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나 언론의 집중 포화에도 자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습니다.
자케 감독의 용병술은 결국 결승전에서 두 골을 터뜨린 지네딘 지단(Zinedine Zidane)이라는 스타를 탄생시켰습니다. 자케의 축구 철학에 충실한 선수였던 지단은 화려함을 즐기기보다는 묵묵히 다른 선수들의 플레이를 돕는 선수, 팀을 위해 자신을 헌신할 줄 아는 선수였습니다.
자케는 지단을 중심으로 11명 모두가 공격과 수비에 나서는 전방위작전을 펼침으로써 몇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는 막강한 브라질의 삼바 축구를 3대 0으로 꺽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은 팀웍의 승리였습니다.
실리콘 밸리의 전설적인 벤처 투자가로 불리는 존 듀어(John Doerr, 로터스, 컴팩, 넷스케이프 같은 기업들이 그의 지원으로 태동했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세상엔 기술이나 기업정신, 자본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훌륭한 팀은 정말 찾기 어렵다.”
듀어의 회사는 매년 보통 2,500개 회사들이 지원요청을 하는데, 그 중 100개 정도를 심각하게 검토하고 실제 투자하게 되는 회사는 25개 미만이라고 하니, 선택될 확률은 100분의 1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듀어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투자 대상을 골라낼까요?
“내게 투자 요청을 해오는 회사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기술과 상품, 서비스를 선전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보는 것은 그들 자신에 관한 것들입니다. 회사 핵심을 이루고 있는 팀 구성원들의 실력과 인격, 그리고 그들이 과연 함께 팀웍을 잘 맞출 수 있는가를 봅니다.”
MLB 메이저 리그 베이스 볼의 최강 양키스 우승을 못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뉴욕 양키스가 1999. 2000년 연속으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일궈 낼 때 올스타에 선정된 선수가 없었고, 타이틀을 따낸 선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우승한 것은 명장 조 토레감독이 적재적소에 선수기용을 했고, 선수들도 단단한 팀 웍과 팀플레이로 만들어낸 결과 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최근 몇년간 우승을 못하고 있는 것은 메이저리그 특급 선수들을 모으면서부터였습니다. 선수 구성원으로만 보면 당연히 우승해야 하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팀웍과 팀플레이가 깨지면서 고비를 못 넘기고 있습니다.
52일 만에 성벽 재건의 기적을 일으킨 느헤미야를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자기 홀로 이 사역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치 않은 것입니다. 그는 문자 그대로 함께 하는 협동의 사역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협동의 원리를 중시한 리더였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 3장을 읽어보면 무려 75명이상의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왜 느헤미야는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느헤미야 혼자 이 사역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까? 1절을 읽어보십시오. 느헤미야가 어떤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지요? "때에 대 제사장 엘리아삽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여기서 강조된 말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어떤 단어가 두드러지게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습니까?
이 느헤미야 3장에 제일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지요?
네, 맞습니다.
"그 다음은--"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 '그 다음'이라는 표현은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동시에 나란히 서서 협동하여 이 성의 재건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협동의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리더십에서 결격사항 제 1호가 바로 이런 협동의 정신이라고 지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요?
성경은 교회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가르칩니다.
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여러 지체들이 연결되어 협동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요즈음 말로 하면 인간의 몸이야말로 가장 탁월하게 네트워킹된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교회를 몸이 되게 하셨을까요?
주의 일이야말로 혼자 할 수 없는, 해서도 안될 팀-스피리트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또 한번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우리가 자주 말하는 상생의 철학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목장에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성전 건축이라는 과제가 힘들어 보이지만 우리들이 이렇게 협동과 협력의 정신을 갖고 힘을 모은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 하기 힘든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줄로 믿습니다.
2. 은사의 원리를 따라 분담해야 합니다.
본문 느헤미야 3장에는 적어도 15가지 이상의 다양한 직종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모두 성의 재건사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모두 자기들이 일하게 될 사역의 자리를 책임지고 건축에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잘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열심히 일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큰 일 일수록 모든 사람들과 함께 분담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22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예컨대 1절을 보시면 제사장들은 양문 건축을 담당합니다.
양문(sheep gate)은 제사장들이 제물인 양들을 가지고 출입하는 문이었던 것입니다. 그 문의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제사장들이 그 부분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에는 어문(fish gate)이 나옵니다.
이 어문은 아마도 지금의 예루살렘 성의 북으로 향한 다메섹 문 근처였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두로쪽에서 오는 생선들이 이 문을 통과하여 시장에 가서 팔렸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스나아의 자손들은 아마도 이 문을 가장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이거나 어업에 종사했던 사람들로 판단됩니다. 그들이 이 문의 건축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전문성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 집 부분의 건축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곳은 23절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내가 사용할 부분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내가 책임지는 형식으로 공사가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 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은사배치의 원리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4:10에서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가 은사를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은사에 적합한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내 은사에 맞는 사역인 것입니다.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의 사회에서는 전문성이라고 말합니다.
한 공동체가 잘 돌아가려면 전문성이 존중되고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굴하여 적합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이 맡겨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더 자원하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나라면 나에게 적합한 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객관적 평가를 받아 사역의 장에 서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역은 소위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마슬로우(Abraham Maslow)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가장 고도의 욕구를 자아실현의 욕구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은사에 맞는 봉사를 발견한다면 인생의 살맛을 느끼시게 될 것입니다. 희랍어로 은사를 나타내는 말인 카리스마는 본래 카라라는 말 즉 기쁨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은사에 맞는 일을 하면 너무 기쁘고 좋은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런 은사의 원리를 잘 사용하여 적재 적소에서 지도자들이 일하게 함으로 단시일에 예루살렘 성의 중건이라는 대업을 실현하게 된 것입니다.
3. 서로 격려할 때 능력이 생깁니다.
느헤미야 3장에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세심하도록 여러 지도자들의 이름과 사역의 내용을 상술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격려하기 위해서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격려 받지 못한다면 어떤 일에 지속적으로 헌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격려의 반대는 낙심입니다. 영어로는 격려를 'encouragement'(in+courage)라고 합니다. 격려 받으면 용기가 생깁니다. 낙심은 영어로 'discouragement'라고 합니다. 낙심하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말합니다.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유교문화의 전통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습니다. 그런데 유교문화는 성경적으로 율법주의적 경향을 갖습니다. 따라서 책망과 정죄에는 빠르지만 격려의 전통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좀더 서로를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크리스챤 유머리스트인 마크 퉤인은 "칭찬보다 공동체를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갈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칭찬을 모르는 가정을 들여다 보십시오. 감옥이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부부관계를 보십시오. 원앙(원한과 앙심으로 맺어진 부부)의 부부가 아닙니까? 칭찬을 모르는 목장이나 교회를 들여다보십시오. 찬바람이 불고 있지 않습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20절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여기서 느헤미야는 바룩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은 특별한 수식어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 있음을 보십시오. "그 다음은 사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였고--"라고 말하면서 그의 특별한 '힘써서' 노력한 헌신을 격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임종 하면서도 교회 건축에 최선을 다 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이번 양권사님도, 조권사님도…)
느헤미야의 격려가 사역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격려가 분위기 띄우기 용도의 감상적이 아닌 진지한 격려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격려가 사실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시적 효과밖에는 가져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격려한다는 것이 결코 평가를 간과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실 느헤미야 3장에는 사역을 소홀히 한 사람에 대한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도 동시에 존재합니다.
예컨대 5절을 보면 드고아의 귀족들에 대하여는 "--그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합니다. (프랭크 틸라파 목사라는 분은 어떤 사역의 현장에도 한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존재한다는 교훈을 위해 이들이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지나친 자신들의 신분을 의식한 나머지 주의 일에 팔을 걷어 부치고 헌신하는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제발 이런 귀족(귀챦은 족속들)들이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느 3: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요삼 1: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필요 이상의 비판을 조심하고 있는 것도 유의해 보십시오. 그리고 이런 예외적인 사람들의 비 협조에도 불구하고 3장 전체의 톤은 지극히 긍정적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명 무명의 모든 공동체원들의 헌신으로 이 위대한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하며 일일히 그들을 격려하고자 한 것입니다.
독주보다 합주가 아름답고, 한그루 거목보다 숲이 아름답습니다.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느헤미야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 부분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느헤미야가 남들을 격려하기 위해 너무 바쁜 나머지 자신을 격려하는 것을 잊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한 격려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격려자가 또 한 사람 있었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이 사람은 이름 조차도 '격려자'였습니다. 바나바이지요. 그는 본래 안디옥 교회의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자 사울이라는 방금 회심한 청년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를 격려하여 그를 지도자의 반열에 세웁니다.
그리고 세계선교 여정에 나서며 그를 동반합니다. 처음에 이 두사람의 관계를 기술하며 사도행전은 "바나바와 사울이--"하다가 나중에는 "사울과 바나바가--"로 바뀝니다.
리더십의 주도권이 이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이 된 사울이 세상을 바꾸는 놀라운 지도자가 되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역의 무대 저편으로 조용히 퇴장한 지도자 그가 바로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바나바가 이런 느헤미야가 우리 시대에 우리 사회에 우리교회에 필요하지 않습니까? 당신이 그런 격려자가 되지 않으시겠습니까?
1849년에 미국 뉴 잉글랜드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세관 감정관으로 일하던 한 남자가 너무 고지식하다는 이유로 해고되어 실직을 당했습니다.
그때 아내는 뜻밖에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잘된 일 아니에요. 이제야 말로 당신이 하고 싶었던 꿈을 이루실 때가 되신 것 같으네요. 글을 쓰고 싶어 하셨잖아요. 소원대로 글을 쓰시지요."
그리고 아내의 부탁으로 교회친구 몇 사람이 그날 밤 그를 찾아와 그에게 창작활동을 할 것을 격려합니다. 그리고 불과 반년이 못되어 소설 하나가 세상에 태어납니다.
이 소설이 유명한 "주홍 글씨"였던 것입니다. 이 남자는 청교도 문학사에 불멸의 발자취를 남기게 된 나타니엘 호돈(Nathaniel Hawthorne)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실직하던 밤부터 꾸준히 그를 찾은 친구가운데 한 사람은 유명한 시인 롱펠로우였습니다.
그에게 만일 아내의 격려가 없었다면 친구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그리고 그에게 만일 자기의 은사를 발휘하여 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인류는 위대한 정신사의 유산을 잃을 뻔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진실로 저와 여러분이 협동의 원리, 은사의 원리 그리고 격려의 원리를 다시 배워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 받으시는 주의 종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