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자대전(宋子大全) 제172권
묘갈명(墓碣銘)
송익필(宋翼弼) 묘갈(墓碣)
구봉 선생(龜峯先生) 송공(宋公) 묘갈(墓碣)
지난번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이 나에게 말하기를,
“문원공(文元公) 김 선생이 율곡 이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도(道)가 이루어지고 덕(德)이 높게 되었는데, 그가 관건(關鍵)을 열 수 있도록 기초를 다져 준 분이 구봉 선생(龜峯先生)이었다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오. 선생의 문하에서 상당수에 달하는 명현(名賢)ㆍ거공(巨公)이 배출되었는데도 선생이 세상을 뜬 후 70여 년이 되도록 묘도에 비갈이 없으니, 아마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니오.”
하였다. 나도 일단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 원위(源委)를 캐 보았더니 자손들이 미약하여 겨우 있는 정도일 뿐 그 원위를 캐기에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얼마 후 동춘마저 세상을 뜨고 말아 그 일을 함께 추진할 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지금 형조 참의(刑曹參議) 이선(李選 이택지(李擇之))이 바로 김 선생의 외증손(外曾孫)으로서 일찍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조야(朝野)의 기록을 모두 들춘 끝에 사실의 자초지종과 제공들이 자세히 논의해 놓은 것까지를 다 찾아내어, 한 통의 장문(狀文)을 써 가지고 나에게 보여 주었다.
옛날 홍경로(洪景盧)가 전대(前代) 사람이 저술하지 못하였던 것을 저술하여 도술(道術)의 원류(源流)를 밝혔던바 주 선생(朱先生 주희(朱熹)를 말함)이 말하기를,
“사기를 기록한 사람은 이러한 일에 공로가 있다.”
하였는데, 지금 택지가 아마 그러한 사람이리라. 여러 노선생(老先生)들이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이루게 될 것인가.
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성은 송씨요, 휘는 익필(翼弼)이며, 자는 운장(雲長)인데 집이 고양(高陽)의 구봉산(龜峯山) 아래 있어 그곳에서 학자들을 교수하였으므로 학자들이 구봉 선생이라 칭하였고 그의 친구들도 구봉이라고 불렀다. 그의 선대는 여산인(礪山人)인데, 현조(顯祖)로는 고려의 정렬공(貞烈公) 송례(松禮)가 있으며, 그후로는 미진하여 떨치지 못하다가 조부 인(璘)이 처음으로 잡직(雜職)의 직장(直長)이 되었고, 아버지 사련(祀連)은 위계가 통정(通政)이었는데 그 사실이 율곡 선생이 쓴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의 묘비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사련이 연일 정씨(延日鄭氏)에게 장가들어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선생은 셋째 아들이었다. 나이 7, 8세 때 이미 시(詩)에 소질을 보여 ‘산속의 초가지붕에 달빛이 흩어지네.’란 시구를 읊었고, 조금 자라서는 아우 한필(翰弼)과 함께 높은 성적으로 발해(發解 향시(鄕試)에 합격한 것을 말함)되어 그때부터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제일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는 이산해(李山海)ㆍ최경창(崔慶昌)ㆍ백광훈(白光勳)ㆍ최립(崔岦)ㆍ이순인(李純仁)ㆍ윤탁연(尹卓然)ㆍ하응림(河應臨) 등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팔문장(八文章)이라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과거 이외에 달리 마음 써야 할 곳이 있음을 알고 성리(性理)에 관한 모든 서적을 가져다 밤낮으로 읽고 연구하였는데, 스승에게 배우지 않고서도 이해하였다.
문(文)은 좌씨(左氏 좌구명(左丘明))ㆍ사마씨(司馬氏 사마천(司馬遷))의 문을 주장하고, 시(詩)는 이씨(李氏 이백(李白))ㆍ백씨(白氏 백거이(白居易))의 시를 주장하였으며, 이치를 논설함에 있어서는 이론이 투철하여 조금도 막히는 데가 없었다. 배우러 온 학자들이 종일 그칠 사이가 없었지만 응대하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그중에는 아는 것 없이 왔다가 많은 것을 알고 돌아간 자들이 매우 많았고, 율곡 이 선생ㆍ우계 성 선생도 그에게 학술(學術)이 있음을 알고 마음으로 깊이 사귀어 의리(義理)를 변론하면서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이 선생이 한번은 과장(科場)에 들어가 천도책(天道策)을 보고 찾아와 묻는 거자(擧子)에게 말하기를,
“송운장(宋雲長 송익필(宋翼弼))이 고명(高明)하고 아는 것이 넉넉하니, 그에게 가 묻는 것이 옳다.”
하여 장옥에 있는 거자들이 물결처럼 몰려갔다. 선생은 그들을 좌우로 수응(酬應)하여 묻는 대로 대답하니 그 많은 거자들이 서로 돌려 가며 베꼈는데, 그것은 과거 시험에만 응용되고 말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자신이 고도(古道)를 지키는 입장에 서서 제아무리 공경(公卿)ㆍ귀인(貴人)이라도 이미 그와 허교를 했을 경우 모두 대등한 위치에서 대하였고, 호칭도 그들의 자(字)를 부르고 관직으로 부르지 않았으므로 욕을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선생은 개의치 않았다. 만력(萬曆) 계미년(1583, 선조16)에 율곡 선생이 군소(群小)들의 미움을 사 그들이 소성(紹聖)시대보다 더 모함하였는데, 때마침 성 선생이 부름을 받고 서울에 와 있었으므로 글을 올려 누가 옳고 그른가를 소명(昭明)하려다가 ‘산야(山野)에 묻힌 사람으로서는 언제나 염퇴(斂退)하는 것이 의리인데 갑자기 이때 와서 시사(時事)를 극론하는 것은 아마도 어묵(語默)하는 도리가 아니다.’ 하고 있는데, 선생이 서신을 보내 권하기를,
“존형(尊兄)이 성주(聖主)의 인정을 받고 이미 조정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사람으로 자처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금 선과 악이 판가름이 나게 되는 이때 왜 분명히 선(善)을 주장하여 공의(公議)가 펴지게 하지 못하십니까.”
하였다. 성 선생은 그의 말을 따랐고, 상도 간사한 무리들이 어진 이를 시기하고 있는 정상을 깊이 알아 호오(好惡)를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그 일 때문에 성 선생은 크게 헐뜯김을 당했고, 선생의 경우는 더욱 심하여 드디어 그들로 하여금 보복을 꾀하는 마음을 먹게 하였던 것이다. 마침 이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이 선생을 위하여 억울함을 하소하려 하였는데 선생이 그 소본(疏本)을 기초(起草)하였다. 그러자 군소배들의 감정이 더욱 악화되어 다투어 선생을 해치려 하였으나 트집 잡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정민공(貞愍公) 안당(安瑭)의 자손들을 부추겨 ‘선생의 조모가 원래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는데, 천적(賤籍)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안당 가족을 멸살시킨 것이다.’라는 구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사실은 정민공의 숙부인 감사(監司) 관후(寬厚)의 여종이 있었는데 정민공의 아버지 사예공(司藝公) 돈후(敦厚)와의 사이에서 딸을 두었다. 그런데 그 딸이 바로 선생의 조모로서 사련(祀連)을 낳았고, 천문학(天文學 관상감(觀象監))에 소속되었는데, 안씨 자손들의 주장은 사련의 어머니가 사예공의 딸이 아니라 바로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양녀(良女)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산해(李山海)가 선생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오늘의 화근을 아는가? 이게 모두 그 원인이 율곡에게 있는 것이네. 그대가 만약 남들을 따라 율곡을 헐뜯는다면 화를 면할 것이네.”
하자, 선생이 대답하기를,
“비록 죽을지라도 어떻게 차마 그 짓을 하겠습니까.”
하였다.
안씨 집안에서 송사를 일으키자 선생은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닥칠 것을 알고 형제가 모두 피신하였고, 이산해는 송강(松江) 정철(鄭澈) 등 제공과 함께 서로 감싸 주었다. 그러나 그때 산해는 시배(時輩)들에게 붙어 있었고 또 권신들과 결탁함으로써 자기 위치를 굳히려고 하였다. 선생이 한번은 시를 읊어 조롱하였는데, 그 시 속에 ‘여지(荔枝)ㆍ연리(連理)’ 등의 말이 있어 산해의 뜻을 크게 거슬렸다. 또 문열공(文烈公)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상소하여, 율곡ㆍ우계의 억울함을 끝까지 밝히면서 시배들을 기척(譏斥)했으므로 산해는 더욱 앙심을 품고 드디어 유언비어를 퍼뜨려 그 말이 대궐 안에 들어가게 하였다. 하루는 상이 형조(刑曹)에 하교하기를,
“사노(私奴) 송모(宋某) 형제가 조정에 원한을 품고 일을 저지르려 하는데 조헌이 소를 올린 것도 그 자가 부추긴 것이 분명하다. 매우 통탄할 일이니 잡아들여 엄히 다스리라.”
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옥(獄)에 나아가 아우 한필과 함께 극변(極邊)으로 정배되었다. 한필 역시 시에 능하고 의론(議論)을 좋아하여 남에게 많은 원성을 사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 귀양살이 하던 희천(煕川)에서 적을 피하여 명문산(明文山) 속으로 들어갔다가 계사년에 사면을 받았다. 그 고을에 김한훤당(金寒暄堂 김굉필(金宏弼))ㆍ조정암(趙靜菴 조광조(趙光祖)) 두 선생의 사당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분들이 화를 입었던 당시를 회상하고 감개하여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려 자신의 뜻을 나타낸 후 돌아왔다.
그때부터 선생은 온 집안이 근거를 잃었고 또 시배들이 안씨들을 종용하여 마지않으므로 비록 임금이 억울한 정상을 알게 되었는데도 선생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처세에 조심을 다하였다. 그러나 친구와 문인들은 서로 다투어 처소를 제공하였고 학도들은 쉴새없이 몰려들었다.
한번은 면천(沔川) 사는 첨추(僉樞) 김진려(金進礪)의 집에 우거하고 있을 때 성 선생이 서신을 보내오기를,
“주인은 인자하고 어질며 후생들은 모두 따르는데, 늘그막까지 떠돌다가 거기에 정착하게 되었으니 그도 다행이오.”
하였다. 만력 기해년(1599, 선조32) 8월 8일, 면천 우사(寓舍)에서 향년 66세로 세상을 마치니 문인들이 당진(唐津) 북녘 원당동(元堂洞)에 장례를 모셨다. 부인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선생보다 먼저 죽었는데 묘는 같은 곳에 있다. 아들 취방(就方)과 서출(庶出)인 취대(就大)ㆍ취실(就實)이 있다.
선생은 높은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처음에는 문지(門地)에 구애를 받고 중년에는 세상에서 번거로움을 당하다가, 끝내 성우계ㆍ이율곡 두 선생 사건에 연루되어 사방을 떠돌며 갖은 곤욕을 다 겪고서 세상을 떠났으니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오직 의리를 강명(講明)하여 자기 자신을 닦았고, 또 그것을 후세에까지 전함으로써 지금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을 가리킴)의 학문이 세상의 으뜸이 되고 있으니, 선생은 사문(斯文)에 간접적으로 큰 공을 남겼다 하겠다. 그 밖에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성취(成就)된 사람들로서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ㆍ수몽(守夢) 정엽(鄭曄)ㆍ약봉(藥峯) 서성(徐渻)ㆍ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ㆍ감사(監司) 강찬(姜澯)ㆍ처사(處士) 허우(許雨)ㆍ참판(參判) 김반(金槃) 같은 이들이 혹은 도학(道學)으로 혹은 환업(宦業)으로써 후생들에게 도를 전하거나 나라를 돕고 있으며,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선고(先考)인 군수 이창(爾昌)도 선생에게 수학한 나머지 동춘을 가르쳐 결국 명유(名儒)가 되었으니, 선생의 육신은 비록 세상에서 시달림을 받았지만 그의 도(道)는 빛을 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제공들이 선생에 대하여 논술(論述)한 것을 살펴보면 중봉(重峯)은 말하기를,
“늙도록 학문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성우계ㆍ이율곡 두 선생이 다 외우(畏友)로 대하였고, 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대를 잘 일깨우고 분발시켜 느껴서 뜻을 세우게 하였다.”
하고는, 자기 관급(官級)을 모두 바쳐서라도 그의 억울함을 씻어 주고 싶다고까지 하였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은 말하기를,
“천지의 이치를 가슴속에 간직하였으니, 공자ㆍ맹자의 도(道)도 진실로 멀지 않았다.”
하였고,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말하기를,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文章) 또한 절묘했다.”
하였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말하기를,
“타고난 자질이 투철하고 영리하여, 정미(精微)한 이치를 분석 정리하였다.”
하였고, 고청(孤靑) 서기(徐起)는 자기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알고 싶으면 송구봉을 보면 될 것이다.”
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과 비슷했으리라 여긴다.”
하였다.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이 매양 자기 형 영원군(寧原君) 가신(可臣)에게 충고하기를,
“형은 무엇 때문에 송모와 가까이 지내십니까? 내가 그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습니다.”
하니, 영원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송모를 모욕할 수 있겠느냐. 필시 못할 것이다.”
하였다. 그후 그가 선생을 만나자 자기도 모르게 뜰 아래로 내려가 절을 하고 맞아들였는데 ‘내가 절을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꿇어지더라.’ 하였다 한다.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金瑬)가 어렸을 때 자부심이 강하여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했는데, 어느 날 절에서 우연히 선생을 만나고는 자기가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날마다 선생의 말에 심취(心醉)되어 오래도록 떠날 줄을 몰랐다. 그가 결국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장상(將相)을 겸하게 되었을 때 말하기를,
“나에게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구봉에게서 직접 받은 영향력 때문이다.”
하였다. 당시 선생에 대한 이러한 말들이 이루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이상 몇 가지 말만 보더라도 선생의 대략을 알기에는 충분하다 하겠다. 선생은 포부가 크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여 세상을 바로잡는 데 뜻을 두었다. 언젠가 김 선생이 말하기를,
“재앙을 부르는 실마리가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으나 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종2)에 김 선생이 수몽(守夢) 정엽(鄭曄)과 함께 상소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등이 어렸을 때 송익필에게서 수학하였는데 익필의 문장과 학식이 당대에 당할 이가 없었고, 이이ㆍ성혼과는 서로 강마(講磨)하는 사이였습니다. 이이가 죽고 난 후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의 무리가 이이ㆍ성혼을 미워한 나머지 그 여파가 익필에게까지 미쳐 꼭 사지(死地)에다 몰아넣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그야말로 갑(甲)에게 품은 화를 을(乙)에게 분풀이 하는 것치고는 너무 심한 일이었습니다.
사련(祀連)의 어미는 이미 양민이 되었고 사련 또한 잡과(雜科) 출신(出身)이어서 2대가 양역(良役)일 뿐 아니라 연한(年限)이 지난 사람은 도로 천민(賤民)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발 등이 사련이 상변(上變)한 것을 안씨 자손들의 큰 원수로 삼아 기회를 타 사주하여 법을 무시하고 다시 천민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송관(訟官)이 혹 법대로 처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면 이발 등이 즉시 논박하여 송관을 두 번 세 번 갈아 내고서야 비로소 그들의 뜻대로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련이 비록 선류(善類)에게 죄를 얻었고, 또 익필이 비록 대중에게 미움받는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일시의 사분(私憤)을 가지고 조종조 금석(金石) 같은 법을 어기면서 자기 마음을 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 다시 개석(開釋)의 실마리를 열어 놓으셨으나 익필은 곧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해와 달이 다시 밝아 당시의 억울했던 일들이 모두 펴졌는데도 유독 죽은 이 스승의 억울함만은 펴지지 않아 아직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그 스승은 살아서 성주(聖主)의 지우를 받지 못하고, 죽어서는 또 천례(賤隷)의 이름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그것이 어찌 신 등만의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국법(國法)이 한번 무너지면 말류(末流)를 막기 어려운 것이어서 식자(識者)들로서는 그것을 깊이 염려하고 또 탄식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문집(文集) 몇 권이 세상에 간행(刊行)되고 있는데, 신상촌(申象村)이 일찍이 평론하기를,
“그 소재는 성당(盛唐)에서 따 왔기에 그 음향이 맑고, 그 의의는 격양(擊壤)에서 취했기에 그 말이 정연하다. 나그네의 궁색함과 귀양살이 속에서도 화평하고 관박(寬博)한 정취를 잃지 않았고, 풍화(風花)ㆍ설월(雪月) 사이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즐거움을 마음껏 누렸으니, 때에 편안하고 순리대로 살아 애락(哀樂)에 동요되지 않을 만한 이였다 하겠다.”
하였다. 또 《현승집(玄繩集)》 한 편이 있는데 그것은 이율곡ㆍ성우계 두 선생과 주고받은 서(書)를 모은 책이다.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일찍이 논하기를,
“율곡의 말은 솔직 평탄하고 우계의 말은 따스하고 공손하며 자세한 데 비하여 구봉은 의지와 기상이 높고 깨끗하며 자기 자신을 매우 무겁게 다루었기에 그 말이 조리가 있고 그의 학문도 해박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그의 의론(議論)을 보면 그 늙은이의 가슴속이 그렇게 초초(草草)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그의 시문(詩文)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람 됨됨이까지 알 수 있다.”
하였다.
내가 동춘(同春)과 함께 오랫동안 노선생(老先生)의 문하에 있으면서 선생의 언행(言行)에 대하여 익히 듣고 보았다. 그 선생에 대하여 지적할 만한 흠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안 되겠지만 만약 일부러 흠을 꼬치꼬치 찾아내어 이발ㆍ백유양의 무고에 동조하려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한 이론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성 선생이 평소 선생에 대하여 전혀 불만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것은 《춘추(春秋)》의, 현자(賢者)를 책비(責備)하는 뜻이었으니, 이에서 선생이 더욱 높고 위대했음을 볼 수 있다.
평소 노선생이 말하던 것으로 보면 뜻이 우주(宇宙)를 감싸고 용기가 고금(古今)을 덮는 것이 바로 선생의 마음이었고 세세한 일에는 다소 소홀했던 점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선생이 재주가 높고 학식이 해박하며 세상일에 능숙하여, 선생 생각에는 이것이면 성현(聖賢)의 문정(門庭)에 들어갈 수 있고 또 황왕(皇王) 사업도 할 수 있으리라 여겨 근본을 함양(涵養)하는 공부에는 다소 등한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게 헤아려 보면 선생에 대하여 혹 비슷한 표현이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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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경로(洪景盧) : 중국 송대(宋代)의 학자이다. 이름은 매(邁), 경로(景盧)는 그의 자다. 많은 저서를 남겼는데 그중 《사기법어(史記法語)》ㆍ《남조사정어(南朝史精語)》ㆍ《경자법어(經子法語)》ㆍ《야처유고(野處類稿)》ㆍ《이견지(夷堅志)》ㆍ《용재수필(容齋隨筆)》 등이 역저로 평가되고 있다.
◇ 거자(擧子) : 향시(鄕試)에 급제하고 다시 중앙에서 치르는 회시(會試)에 응시한 사람이다. 전하여 과거 볼 자격이 있는 자를 말한다. 거인(擧人)이다.
◇ 소성(紹聖)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이다. 철종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 고씨(高氏)가 함께 청정(聽政)하면서 사마광(司馬光)ㆍ여공저(呂公著) 등을 탁용하여 왕안석(王安石)이 행하던 신법(新法)을 모두 혁파하였다. 그 뒤 고황후가 죽고 제(帝)가 친정(親政)하면서는 장돈(章惇)ㆍ여혜경(呂惠卿) 등을 기용하고 신법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붕당(朋黨)의 화가 생겨났다.
◇ 성당(盛唐) : 중국의 당(唐) 나라가 융성했던 시기이다. 당(唐)의 시체(詩體)를 논할 때 대체로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중당(中唐)ㆍ만당(晩唐)의 4기로 나누는데 성당은 서기 712년인 현종(玄宗) 원년부터 대종(代宗) 초기까지의 약 55년 동안을 말한다.
◇ 격양(擊壤) : 송(宋)의 소옹(邵雍)이 지은 《격양집(擊壤集)》을 말하는데, 시법(詩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논리(論理)를 근본으로 삼고 수사(修詞)를 끝으로 다루었다.
[출처] 송익필(宋翼弼) 묘갈(墓碣)-송시열 (순흥안씨문숙공파) |작성자 치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