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 허균의 사상
인기멤버
hanjy9713
2023.10.28. 04:55조회 1
댓글 0URL 복사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 언어영역
허균의 사상
1. 교과서 속 주개념
허균과 양명좌파의 학문
양명학(陽明學)이란 중국 명(明)나라 왕수인이 주창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왕수인은 명나라의 지배적 사상이었던 주자학에 대항하여 인간평등관에 바탕을 둔 주체성 존중의 철학을 확립하고 만물일체의 이상사회 실현을 지향하는 심즉리(心卽理)·지행합일(知行合一)·치양지(致良知)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양명학은 사회적으로 공인되어 사상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왕수인의 제자들 사이에 여러 가지 경향이 생겨났는데, 이 중에 마음을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 하여 기존의 성리학에서처럼 개인적 수양을 존중하는 일파를 양명학정통파·양명우파 등이라고 하였다. 이와 달리 마음을 무선무악(無善無惡)으로 보고, 속박을 벗어난 절대 자유의 인간 생활 방법을 추구한 일파를 양명좌파라고 하였다. 양명좌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지는 유교의 전제(專制)에 맞서 사상의 절대 자유를 주장한 중국 명대의 지식인으로 문예와 사상을 포함한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옹호하는 사상 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조선에 양명학이 도입된 시기는 17세기 무렵으로 초기에는 그 내용이 유교사상에 대항하는 것이라 하여 배척을 받았다. 실용과 실천면에서 유학사상의 도덕률을 반대하는 점과, 불교와 도교까지 받아들이는 자세가 유교지상주의자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명학은 허균·이수광 등으로 이어지면서 점차 거론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 정제두가 강화학파를 이루며 학문적 체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양명학을 단지 학문적으로 공부한 정제두 등의 강화학파는 양명우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허균은 양명좌파의 이념에 입각하여 공적 질서의 억압에 맞서 인간 본연의 감정을 옹호하고 개인의 내면적 자유의 해방을 위한 문예적 실천을 지속하였다.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서자의 불우한 처지를 드러내고 봉건체제의 모순과 부당성, 사회비리를 고발하였으며 또한 평등사상을 주장하였다. 〈홍길동전〉에 나타나는 허균의 진보적인 사상과 실천을 양명좌파의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양명좌파의 사상적 영향으로부터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2. 확장 개념
허균의 호민론
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 백성들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운 것이다. 한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이들 백성을 학대하고 부려먹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가?
무릇 정세에 대해 깊이 살피지도 않고 순순히 법을 만들고 윗사람에게 잘 따르는 것을 항민(恒民)이라 한다. 이들 항민은 전연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다음 살을 깎고 뼈가 망가지면서 애써 모은 재산을 한없이 갈취당하고서 탄식하고 우는 백성들이 있다. 이들은 윗사람을 원망하는 자, 즉 원민(怨民)이라 한다. 이 원민들도 별로 두려운 존재는 아니다.
다음, 세상이 되어 가는 꼴을 보고서 불만을 품고 인적이 없는 곳으로 종적을 감추고서는, 세상을 뒤엎을 마음을 기르고 있다가 기회가 닥치면 그들의 소원을 풀어보려고 하는 자, 즉 호민(豪民)이 있다.
이들 호민은 참으로 무서운 존재이다. 호민은 나라의 귀추를 엿보고 있다가 적절한 기회를 타서는 분연히 주먹을 쥐고 밭이랑이나 논두렁에 올라서서 한번 크게 소리 지른다. 그러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든다. 그들과 모의 한번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호응을 받는 것이다. 이때, 항민들도 그들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하여 호민과 원민을 따라 호미와 쇠스랑을 들고 따라온다. 이로써 무도한 자들의 목을 베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후략)···
인용한 글은 허균이 지은 〈호민론〉의 전반부이다. 오늘날의 논설문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이 글을 통해, 허균은 이미 심히 부패해가고 있던 조선 후기 사회의 지배층에 따끔한 일침을 가하고 있다. 〈호민론〉은 그 제목이 의미하는 것처럼 기존 지배층이 가지고 있던 백성에 대한 관점,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론과는 전혀 다른 개혁적이고 혁신적인 정치사상을 보여준다.
유교적 정치이데올로기를 사회 기반으로 하는 조선 사회에서 기존의 지배층들은 백성을 단지 ‘항민’이나 ‘원민’으로 인식했을 뿐이었다. 유교의 정치사상대로라면 지배층은 어버이가 자식을 다루듯 백성을 인(仁)과 덕(德)으로 다스려야하고, 그리하면 백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수동적 집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백성을 생산의 주체로 보는 시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는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이 없다(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생산 곧 삶의 여유가 없으면 유교에서 강조하는 윤리적 가치와 덕성도 있을 수 없다는 뜻)’는 맹자의 언급에서나 ‘원민’에 대한 단서를 약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허균은 〈호민론〉을 통해 백성이라는 자들은 적극적이고 정치적 행동이 가능하며 때로는 매우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역사적 사례를 들어 주장하고 있다. 물론 허균의 목적은 백성의 위험성을 알리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호민’이 생기지 않도록 위정자들이 올바른 정치를 하여 백성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라는 데에 있었다.
이 〈호민론〉은 정치를 지배층의 관점이 아닌 백성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쓰일 수 있는 글이었다. 수동적이지 않은 백성, 정치적 힘을 가진 백성에 대한 허균의 인식은 교화의 대상이자 양육해야 할 대상으로서 백성을 바라보던 당대의 정치이념과 완전히 대비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백성에 대한 인식은 허균의 창작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그것이 소설로 표현된 것이 바로 〈홍길동전〉이라 할 수 있다.
3. 관련 지식
1) 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으로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난설헌’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이름은 허초희이다. 허난설헌은 한문학을 했던 몇 안 되는 여류 시인 가운데서도 문학을 하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었고, 여성에게 주어진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데서 생기는 갈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허난설헌은 허엽의 딸이고,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의 누나이며,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과 어린시절의 행복했던 교육 환경과는 달리 매우 불행한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허난설헌의 불행은 결혼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녀의 재능을 인정하고 북돋아주던 친정과는 달리, 시댁에서는 그녀의 재능이 오히려 문제가 되었다. 명문가였던 안동 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지만, 남편인 김성립은 물론 시댁 식구들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다. 지적으로 앞선 여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당대의 분위기로 인해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딸과 아들이 이어서 죽는 불운까지 겹쳐 마음의 상처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허난설헌의 정신적인 지지자는 둘째오라비였던 허봉이었다. 허봉은 허난설헌에게 두보의 시집을 보내면서 두보 못지않은 시인이 되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의 재능을 사랑하였다. 하지만 허봉은 허난설헌이 괴로운 결혼 생활을 할 때는 정치적인 사건에 휘말려 갑산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배에서 돌아와서는 포부를 접고 방랑하다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 고통들 때문에 허난설헌은 시작(詩作)에 더욱 힘을 쏟기도 했지만, 허봉이 죽은 다음 해에 27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허난설헌은 중국은 물론 후대에까지 높이 평가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이룩하였다. 한시는 물론 〈규원가〉와 〈봉선화가〉 같은 가사 작품의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가사는 작자 시비가 있기도 하지만, 한시는 허균이 편찬해서 중국에까지 알린 시집에 실려 있다.
2) 허난설헌의 문학세계
허난설헌의 한시는 두 계열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초탈을 염원한 시이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사회적인 반감까지 나타내려는 방외인 문학의 기풍을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아리따운 상상을 수놓은 솜씨에서 독자적인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유선시〉는 허난설헌의 시대를 앞서갔던 정신이 마음껏 표출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허난설헌은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낸 것이고 윤리의 분별은 성인의 가르침’이라면서, 성인이 가르친 윤리보다 하늘이 준 감정과 정욕이 먼저라는 대담한 주장을 아름답고 화려한 모습 속에서 밝은 분위기로 나타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자기 삶의 고민을 보여주는 작품을 지으면서, 시야를 확대하여 다른 미천한 여성의 처지를 다루기도 하였다. 아들을 잃고 지은 〈곡자〉에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 애절하게 드러나 있다. 사대부 남성이 한시를 수식과 수양의 수단으로 삼는 동안에는 나타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표현되어 있는 작품으로 다듬을 만큼 다듬은 작품이면서도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넋두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잘 살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의 고사 역시 한 소절에 들어가 있을 뿐, 대구를 맞추고 글자를 배열한 것이 모두 자연스러운 작품이다.
가난한 여자의 처지를 읊은 〈빈녀음〉은 내용의 진실됨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넘어섰다는 평을 듣고 있다. 모두 네 수로 이루어진 시인데, 오언절구의 응결된 형식을 사용하여 못 다말할 사연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허난설헌은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지만, 사실 작가로서는 당시의 여성이 누리기 힘든 혜택을 고루 누린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천부적인 시적 재능을 지니고 태어나,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았고, 최고의 문학 교육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형제로 가졌다.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그녀의 천재성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게 만드는 요소였다는 지적도 있다. 이와 같은 재능은 명나라에서 온 사신들이 ‘난설헌의 시집을 구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균의 사상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 2007. 12. 15., 한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