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녀] 도련님이여 도련님이여 진실로 가련하고 또 측은하오이다 행하지 못할 방법으로 이루지 못할 일을 하려시니 그 정황이 어찌 딱하지 않으리오 수성궁 안평대군 대왕의 셋째 아드님 지엄하고 근엄하기 온 세상이 으뜸인데 손에 닿지도 않는 절벽 위의 꽃을 어찌 꺽으려 하시오? 어찌 꺾으려 하시오?
[김생] 운영이를 한번 본 후부터 마음이 날고 혼이 흩어져 능히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매양 서편을 향하매 거의 촌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소. 하늘이 굽어 살피시고 귀신이 도와 생전에 이 한을 씻게 해 준다면 마땅히 몸을 부수고 뼈를 갈아서라도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겠소. 그러니 신녀 내 간절한 부탁을 꼭 들어주그려.
[무녀] 진정으로 죽어도 여한이 없으시겠소?
[페이지] 020
[김생] 내가 살아서 기원한 일을 죽어서 후회할 리가 있겠소.
[무녀] 좋소이다. 어떠한 글인지 그것부터 보도록 하십시다.
[김생] 바로 이 글이오. (김생 편지를 품에서 꺼내 무녀에게 준다. 무녀 글을 펴보다 난감하다)
[무녀] 이렇게 어려운 글을 어찌 읽겠소이까? 도련님이 풀어서 한번 읽어보시구려.
[김생] 누각은 깊고 깊어 저녁문 닫혔으니
나무그늘 구름 그림자 모두 희미하여라
떨어진 꽃과 흐르는 물은
개천으로 흘러가니
제비는 흙을 물고 처마 끝을 넘나든다
베개에 기대어도 호접봉 못 이루니
눈 돌려 남천을 바라보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
님의 얼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그리 말없는고
푸른 풀에 앉아 우는 꾀꼬리 소리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장] 4장
서 궁
(운영과 자란 생각에 잠겨 앉아 있다)
[자란] 여자고 세상에 태어나매
낭군을 두고싶은 마음 뉘 없으랴
우리들은 전세에 무슨 죄업 그리 많아
[페이지] 021
어릴 적부터 궁안에만 갇혀
덥고 추움은 때를 알아 돌아가건만
우릴 찾아오는 도령은 하나도 없구나
[운영] 꽃 피는 봄철이나 추야장 긴긴 밤에
나위는 적막하고 수막은 비었는데
청등한침에 잠 이루기 어렵도다
인생은 유한한데 이런 심회 뉘 물으리
젊음은 덧없어 초목과 같이 썩힐지라
마음속에 병 있음을 위에게 하소연하리.
[자란] 요새 너의 형용을 살펴보니 안색이 너무 수척하였구나. 진사님도 무심하시지 아무리 한낱 궁녀에 지나지 않는 너지만 죽음을 무릅쓰고 보낸 편지에 일언반구 대꾸도 안하시다니---
[운영] 회신을 바라고 쓴 글은 아니다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본 애뜻한 마음이었기에 서운함이 더 큰 듯하구나.
[자란] 서운함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날로 수척해 가다 자칫 짧은 명을 미칠듯 하여 저윽이 염려가 되서 그런다.
[운영] 어차피 이런 신세로 평생을 산다면 죽어 서러울 것이 없다.
[자란] 운영아.
(방에서 비취 옥녀 은섬 나온다)
[비취] 얘 운영아, 연못에 잉어 구경하러 가자.
[은섬] 그래, 우리 같이 가자.
[옥녀] 자란아, 너두 가.
[자란] 너희들 남궁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거지?
[옥녀] 남궁 아이들도 연못으로 나오면 보는거지 뭐 우리가 만나러 가나?
[자란] 대군저하께서 우리를 남궁과 서궁으로 갈라놓으신 뜻을 모르냐?
[페이지] 022
[비취] 우리 공부 많이 했어. 그러면 잠시 쉴 수도 있는 일이 아니냐.
[옥녀] 그럼, 그렇구 말구. 남궁과 서궁에 담을 쌓고 평생 만나보지를 말라고 그러셨나.
[은섬] 한 궁에서 살면서 우리가 어떻게 남궁 아이들하고 상면을 하지 않을 수 있겠냐. 남궁 아이들을 만나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을거야. 그러니 어서 가자.
[비취] 그래, 너희들도 가.
[자란] 너희들이나 가 봐라.
[옥녀] 그럼 우리끼리만이라도 가자.
(세 궁녀 퇴장한다)
[운영] 저 아이들의 저러는 마음도 알듯하다. 새장속에 갇혀 채바퀴 돌아가듯 살아야 하니 어찌 누군들 만나고 싶지 않겠느냐.
[자란] 그거야 우리가 타고 난 팔자인걸 어찌 하겠느냐
[운영] 산곡에선 자주 그림자 짓고
못가엔 푸른 그림자 흐르도다
날아서 돌아가니 찾을 곳 없고
연잎에 이슬 맺힌 구슬만 머물려라
[자란] 네 시감이 아주 뛰어나구나. 서왕모에게 천도를 드린 동방삭이의 글과도 같다.
[운영] 우리의 심사가 그러하지가 않느냐.
[자란] 정녕 그러하기는 하다.
(운영, 자란 다시 소침해지는데 무녀 살며시 등장한다)
[무녀] 여기가 서궁 틀림없겠지?
[자란] 무산신녀가 아니시어요?
[페이지] 023
[무녀] 그래, 나로다. 너는 나를 알아보는구나.
[자란] 궁안의 신사일을 모두 맡아하신 무산신녀님을 어찌 몰라 보겠사와요. 여긴 어인 일로 오셨죠?
[무녀] 어인 일이긴 어인 일이겠느냐. 신사일 말고 내가 입궐할 리가 없지 않겠냐. 후정을 돌아 나가던 길에 길을 잘못들어 이 서궁에까지 온 것이다.
[자란] 오신 김에 저희 운수나 봐주시구려.
[무녀] 궁녀의 운수가 달리 뭐가 있겠느냐. 네가 운영이렸다.
[운영] 제 이름을 어찌 아시지요?
[무녀] 다 아는 길이 있지. 네 운수만은 내가 봐 주도록 하마.
[운영] 제 운수라고 다를리가 있겠소이까?
[무녀] 있지. 네 비록 지금은 궁녀의 몸이지만 앞으로 닥쳐올 풍파가 대단할듯 하구나.
[운영] 네?
[자란] 그게 무슨 말씀이지요?
(무녀 요란히 흔들면서 주문을 외우며 돌아간다. 불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초조해하는 운영. 무녀 주문을 마친다)
[자란] 어인 까닭인지 어서 말씀을 해 보구려.
[무녀] 운영이한테만 살짝 말할 일이니 너는 물러가 있거라.
[자란] 그래요.
[무녀] 어서.
[자란] 그러리다. (자란 운영을 되돌아보며 걱정스러운 듯 퇴장한다. 기다렸다는듯이 무녀 운영에게 다가간다.)
[페이지] 024
[무녀] 너희 둘이만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구나.
[운여] 제 운수가 어떠해서 그러시오?
[무녀] 호접의 꿈을 이룬 운수로다.
[운영] 예?
[무녀] 김진사를 알고 있겠지?
[운영] 예.
[무녀] 이 편지를 네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 (편지를 내어준다)
[운영] 진사님이?
[무녀] 어서 읽어보아라.
(운영 급히 받아 읽는다. 감격과 감동으로 곧 눈물이 얼룩지는 운영. 무녀는 조심스레 주위를 살펴준다)
[운영] 어쩌면 이런 글을---
[무녀] 너의 글을 받아 진사님이 감동한 바가 적지 않아 너와의 연분을 이어줄 것을 간곡히 부탁을 드렸으니 내일 궁을 나오게 되면 곧 동문밖에 있는 나의 집으로 찾아오도록 하여라.
[운영] 궁녀의 몸으로 어이 궁을 나가겠나이까?
[무녀] 너는 아직 완사소식을 못 들었느냐?
[운영] 완사라니요?
[무녀] 대군저하께옵서 너희들이 궁안에만 갇혀사는 것을 측은히 여기시어 내일은 모두가 개울가로 나가 빨래를 하고 인하여 주석을 갖도록 하라고 안상궁께 분부하시더라.
[운영] 그래요?
[무녀] 그러하니 편지속의 가기가 저절로 다가온 것이 아니냐.
[페이지] 025
나는 여기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러면 내일 보도록 하자. (급히 퇴장한다)
(운영 편지를 품에 안고 한껏 황홀하다)
[운영] 베개에 기대어도 호접봉 못 이루니
눈 들어 남천을 바라보니 기러기도 날지 않네
님의 얼굴 눈앞에 있는데 어찌 그리 말없는고
푸른 풀에 앉아 우는 꾀꼬리 소리에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자란, 등장한다)
[자란] 운영아, 무슨 일이 있었느냐?
[운영] 너한테마저 어이 말을 하지 않겠느냐. 진사님께서 회신을 보내셨다.
[자란] 회신?
[운영] 이것이다. (편지를 내준다)
[자란] 어디 보자. (편지를 읽으며 점차 황홀해진다) 어느 고문진보가 이보다 더 귀하랴. 절절히 흐르느니 그리운 사연이고 후리쳐 맺느니 상봉의 소망이로다.
[운영] 내일 완사때 무산신녀의 집에서 상봉을 하자는구나.
[자란] 완사?
[운영] 대군께서 명을 내리셨단다.
[자란] 그러하면 작소가기가 바로 내일이 아니냐. 소격 소동으로 나간다면 왕래할때 그 무녀의 집엘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운영] 그렇겠지.
[자란] 세상일이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고?
[페이지] 026
녹양방초는 세상에 만만하고 임 맞을 너의 가기는 눈앞에 다가왔도다.
[운영] 큰 소리 낼 일이 아니로다. 누가 알까 두렵구나.
[자란] 하늘이 너에게 내린 은혜 행여 깨어져 땅에 떨어지랴
(희색의 만연한 궁녀들 좋아하며 등장한다)
[궁녀들] 완사로다 완사로다
주렴을 걷어놓고
완사를 나가보자
화란 춘성하고 만화방창이라
만산홍록 너 본지 오래로다
기화요초 난만중에
나비처럼 날아 보세
완사로다 완사로다
창송취죽 찾아 완사로다
백운간에 높이 떠서
산새 들새 다 날으고
기암층층 장송은
광풍에 춤을 춘다
무릉도원 예 아니냐
양유세지 사사록이로다. (궁녀들 기뻐서 서로 얼싸안고 돌아간다)
[소옥] 너희들도 완사 소식을 알고 있겠지?
[자란] 그래, 안다.
[페이지] 027
[비경] 우리가 도를 닦는 도사가 아니고 또 이승이 아니니 심궁 독서당에만 갇혀 있을수야 있겠느냐.
[금련] 완사를 나가면 어디로 가지?
[비취] 그윽한 꽃과 고운 풀이며 흐르는 물과 꽃다운 수풀이 있다면 어디든 좋다.
[비경] 해마다 완사는 탕춘대로 나갔으니 올해도 그리로 나갔으면 좋겠다.
[보련] 그래, 그래. 탕춘대 경치가 가히 절경이다.
(운영과 자란은 놀란다)
[자란] 해마다 탕춘대로 갔는데 또 탕춘대로 가다니 너희들이 거기가 지겹지도 않으냐?
[소옥] 탕춘대가 아니면 어디로 간단 말이냐?
[자란] 소격서동의 물과 돌이 아름답기 그지없으니 그리로 가는 것이 좋을듯 하구나.
[부용] 소격서동은 하늘과 성신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니 완사를 하필 그러한 곳으로 갈게 무어냐?
[운영]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꺼릴것이 무엇이냐. 그래서 동명을 삼청동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우리들 열 사람은 필시 삼청선녀로서 황정경을 잘못 읽고 인간세상에 귀양 왔거니와 기왕 인간세상에 있을진댄 야가촌사와 농박어점인들 상관할 것이 없다.
[금련] 궁밖으로만 나가면 맑은 시냇물이 허다한데 어디 갈 곳이 없어 하필 사당 근처로 간단 말이냐.
[옥녀] 사당 근처처럼 조용한 곳을 버리고 저 번화한 곳으로 간다면 유협한 소년들이 우리의 미모를 보고 혼이 빠져 어떠한 짓을 할지 모르니 너희들이 그것이 두렵지도 않느냐?
[비경] 우리가 여염의 아낙이 아니고 노류장화가 아니거늘 무뢰배와 협객이
[페이지] 028
아무리 강포하다 해도 궁녀들에게 감히 욕을 보이겠느냐.
[은섬] 우리가 아무리 서궁과 남궁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한번 완사를 나가는데 이렇게 의견이 분분할 수가 있느냐. 그렇다면 나는 그만 두겠다.
[소옥] 아니다. 아니다. 무룻 모든 일에는 정도도 있고 권도도 있는 법이니 하찮은 일에 갑론을박을 할건 없다. 완사만 나가면 됐지 어디로 나가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자란] 서궁 너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노니 이번만은 소격서동으로 나가도록 하자. 그건 내 소망이고 또 운영이의 소망이기도 하다.
[소옥] 어째서 운영이 너마저 그렇게 간절히 소망을 하지?
[운영] 그 연유는 다 말을 했다.
[소옥] 너희 둘이 그렇게 간절히 소망을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저버릴 수가 있겠느냐. 비취의 말대로 그윽한 꽃과 고운 풀이며 흐르는 물과 꽃다운 수풀이 있다면 어디든 좋은 것이 아니냐.
[비취] 그래, 그래. 완사만 나가면 그만이다.
[소옥] 그러면 이번 완사는 소격서동으로 나가도록 하자.
(궁녀들 일제히 호응한다)
[운영] 소옥아, 고맙다.
[궁녀들] 완사로다 완사로다
주렴을 걷어 놓고
완사를 나가 보자
화란춘성하고 만화방창이라
만산홍록 너 본지 오래로다
가화요초 난만중에
나비처럼 날아 보세
[페이지] 029
완사로다 완사로다
창송취죽 찾아 완사로다
백운간에 높이 떠서
산새 들새 다 날으고
기암층층 장송은
광풍에 춤을 춘다
무릉도원 예 아니냐
양유세지 사사록이로다
[장] 5장
무녀의 집
(스산한 바람이 분다. 특과 광대들 등장한다)
[광대패들] 고금에 호걸문장 절창으로 지어
후세에 휴전하나 다 모두 허사로다
인간의 부귀영화 일장춘몽 가소롭고
유유한 생리사별 뉘 아니 감탄하리
거려 천지 우리 행락 광대행세 좋을시고
그러하나 광대행세 어렵고 또 어렵도다
[광대1] 오늘은 이 무산신녀의 집이 조용하니 웬일이지?
[광대2] 어디 또 굿이나 하러 간게 아닐까?
[특] 굿이 아니라 요새 궁의 신사일로 다니는걸 모르느냐.
[광대1] 궁? 궁이라면 값진 보화도 많이 얻어 가지고 올걸.
[광대2] 그러면 우리가 그걸 좀 나누어 써서 안 될거 없지 않겠나.
[광대1] 물론이지.
[페이지] 030
(광대 1, 2, 집안을 기웃거린다)
[특] 명색이 광대란 놈들이 좀도적이 되겠다는거냐?
[광대2] 우리 신세가 고달퍼서 그러지.
[특] 아무리 신세가 고달프기로서니 좀도적이 될 수는 없다. 도적이 될려면 큰 도적이 되야지. 구야구야 가리갈가마구야.
[광대패들] 신에 신곡산 가리갈라무구야
검다고 한탄 마라
속조차 검을소냐
백로야 백로야
희다고 자랑마라
겉이야 희다마는
속조차 희다말가
(광대들 퇴장하면 다시 스산한 바람 소리. 김생 주변을 살피며 무녀의 집안에서 살며시 나온다. 한 쪽으로 가서 멀리 바라보는 김생, 몹시 초조하다. 무녀 등장한다)
[김생] 오, 어찌 되었소?
[무녀] 수성궁 궁녀들이 소격서동으로 완사를 나온 것은 틀림이 없소이다.
[김생] 그러하면 어떻게 이리로 올 수가 있겠소?
[무녀] 완사 나오자마자 올 수가 있겠나이까. 빨래도 하고 주찬도 벌리다 보면 살짝 빠져 나올 기회가 있겠읍죠.
[김생] 그러면 언제쯤이나 올 수 있을고?
[무녀] 나온지가 이제는 한참 될 것이니 도련님을 찾아올 때도 이제는 된듯 하오이다. 안에 들어가 기다리고 계십시요.
[페이지] 031
(김생 몸을 천천히 돌리는데 운영 숨가쁘게 등장한다. 운영을 보자 활짝피는 무녀)
[무녀] 오, 네가 왔구나, 네가 왔구나.
[김생] 오, 낭자!
[운영] 진사님! (반갑게 마주가는 두 사람)
[김생] 그대 오기를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었소.
[운영] 진사님의 회신을 받고 감동하여 밤새 잠을 못 이루었나이다.
[무녀] 이목이 번잡하니 안에 들어가서 긴 사연을 나누소서.
[운영] 긴 사연을 나눌 수는 없소이다. 진사님을 뵌 것으로 족하니 이만 떠나도 한이 없소이다.
[김생] 그러할 수야 있소. 우리가 서로 인사도 나누지를 못했으니 초면은 아니나 인사부터 나누도록 하오.
[운영] 그러하시지요. 저는 운영이라 하옵니다. 제 고향은 배죽송음 속에 묻혀있는 남방이옵니다.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삼강행실과 칠언당음을 가르치며 애지중지 하셨으니 열 세살때 대군의 부르심을 받고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나이다.
[김생] 나는 김재상의 두째 자제로 나 역시 어려서부터 부모의 총애속에 자라 사서삼경을 마친지가 이미 오래 되었소. 이제 겨우 진사급제만 하였으나 곧 대과에 장원을 할 생각이오.
[운영] 진사님은 능히 그렇게 되실 것이옵니다.
[김생] 수성궁에서 그대를 일차 본 후 상사가 극심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대의 편지를 받고는 어떻게 해서든지 상봉의 기회를 갖고 싶어서 무산신녀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였었소.
[페이지] 032
[운영] 진사님!
[김생] 낭자!
[운영] 맹시단에서 진사님을 잠시 뵙고 천상의 신선이 귀양왔나 싶었는데 이제 다시 뵙고 보니 그 감흥이 새로와 무어라 말을 못 하겠소이다.
[김생] 서시나 우미인을 내 본바 없으나 두 미인이 천단을 헤치고 내려와 앉아있는 듯 하였소.
[운영] 진사님을 한번 뵌 후로는 배꽃에서 우는 두견의 울음과 오동잎에 듣는 밤비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였고 뜰앞에 고운 풀이 돋아남과 하늘가에 외로운 구름 날리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나이다
[김생] 태을사 앞물이 한번 감돌아 천단에 구름 걷히고 이제 구문이 활짝 열려 그대를 이렇게 재봉하게 되었으니 우리의 애뜻한 인연 어찌 이어 보리오?
[운영] 제가 서궁에 있으니 낭군님께서 밤을 타 서쪽 담을 넘어 들어오시면 삼생에 미진한 인연을 거의 이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김생] 월담을 하여?
[운영] 예. 낭군님이 저를 더럽다 아니하시고 천금같은 귀한 몸을 굽혀 더러운 집에 이르러 이렇게 기다리시니 제가 비록 불민하오나 또한 목석이 아닌지라 감히 죽기로써 허락하리이다. 제가 만일 식언한다면 이 금반지가 있으니 이것으로 신표를
[페이지] 033
삼으소서. (반지를 내어준다)
[김생] 오, 낭자! (김생 운영을 포옹한다 한가로운 새소리)
[운영] 빨리 가는 행차에 양궁의 시녀들이 다 모여있는 까닭으로 여기서 오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나이다.
[김생] 그러오. 내일밤에라도 당장 월담을 하여 그대 곁으로 가겠소.
[운영] 그러면 심궁심야에 진사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김생] 이목이 번잡하니 어서 가보도록 하오.
[운영] 예. (퇴장한다)
[김생] 오, 낭자!
[장] 6장
서 궁
(밤. 빈채 고즈녁하다. 운영 방에서 조심스레 나온다. 그리고는 살며시 담쪽으로 가서 살펴보는 운영. 방에서 자란 역시 살며시 나온다.)
[자란] 이 깊은 밤중에 너는 누구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지?
[운영] 네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거늘 그러한 것을 꼭 물어야 하겠느냐.
[자란] 완사날 네가 진사님을 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는 모르겠다.
[운영] 내가 오늘밤 진사님과 더불어 금석같은 약속을 했는데 오늘 만일 안오시면 내가 월담을 하여서라도 나갈 것이다.
[자란] 우리는 한날 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는 아니다만 네 기쁨이 내 기쁨이고 너의 슬픔이 내 슬픔이 아니었더냐. 우리 같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조용히 진사님이 오기를 기다려 보자.
[운영] 그래.
[운영.자란] 공중에 날아올라 비를 뿌리고
땅으로 떨어져 구름이 되네
어두움은 산아래 가득한데
그윽한 생각은 임을 그리노라
(안상궁 급히 등장한다)
[안상궁] 너희들은 아직 잠들지 않았었구나. 대군저하께서 납신다.
[운영.자란] 대군께서?
(안평대군 등장한다)
[안평] 영특한 것들, 내가 이밤에 서궁에 찾아올 것을 알고 있은듯 하구나.
(운영, 자란, 부복한채 꼼짝을 못하고 있다)
[안평] 오늘 완사나간 재미가 진진 했더냐?
[운영.자란] 예.
[안평] 너희가 완사를 나가서도 서로 차운을 하여 글을 지었다니 기특하기 짝이 없다. 궁안에만 있다 계곡과 개울을 대하여 지은 글이니 더욱 그 정감이 싱싱한듯 하더라. 그 중에도 특히 운영이의 글이 창공을 날으는듯 시원하여 내 마음마저 활짝 열어주는 듯 하더라.
[안상궁] 대군저하께 그 글을 다시 한번 읊어 드리도록 하여라.
[안평] 그래, 네 활기찬 기상을 다시한번 보도록 하자.
[페이지] 036
[운영] 예.
[안상궁] 어서 읊어 올려라.
[운영] 산아래 찬 연기 쌓이고 쌓여
궁궐의 나뭇가지를 빗기 날았어라
바람이 불매 스스로 가느지 못하고
비낀 햇빛이 창천에 가득 하도다
[안평] 얼마나 시원한 글이냐? 글이란 사람의 성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너의 호연지기도 알만하다. 그러한 너를 궁안에만 가두어 두고 금서에만 오로지 하게 하였으니 측은한 일이 이니었더냐. 오늘 너한테만 내 요대의 즐거움을 나누어 주려고 하니 자란이는 물러가 있도록 하여라.
[자란] 예.
[안상궁] 성은이다 성은이다. 승은의 은총이 이보다 더 하겠느냐.
[운영] 하오나 대군저하.
[안평] 그래, 말하여 보라라.
[운영] 성은의 은총 망극하오나 이제 저하를 모심은 부인의 은총을 저버리는 것이니 통찰하여 주시옵소서
[안상궁] 무엄하다. 저하의 지엄한 분부를 거역하다니
[운영] 열 세살 어린 나이 입궁하여 부인의 가르침을 하나같이 받자옵고 삼종지덕 칠거지악 모두 다 익혔거늘 저하의 은총에만 망극하여 외람되이 성은을 받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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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궁 한궁에서 어찌 감히 부인을 우러러 뵐 수가 있겠나이까.
[안평] 그러하냐.
[안상궁] 궁녀란 저하의 시녀이거늘 방자한 생각을 할 것은 없으니 저하가 하늘이면 부인은 땅이라 하늘과 땅 사이에서 두루 모심이 너의 도리이니라
[안평] 운영이 본시 영특하여 오늘 나를 거절함은 필시 까닭이 있으렸다 네 스스로 내키지 않는다면 내 생각은 잠시 거둘 것이니 후일 다시 생각하고 안상궁께 알리도록 하여라
[운영] 망극하옵니다.
[안상궁] 운영이 저하를 거약함은 금침을 더럽힐듯 하여 그러는것 같아오니 후일 저하께 다시 택일을 하여 드리도록 하겠나이다.
[안평] 그러도록 하여라.
[안상궁] 예.
(안평대군과 안상궁 퇴장한다)
[자란] 네가 감히 대군의 뜻을 거역하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로구나. 앞으로 어떤 벼락이 떨어질지 심히 염려스럽다.
[운영] 진사님하고 이미 약속을 했는데 대군께서 아무리 지엄하다하신들 어찌 내 몸을 드리겠느냐. 설사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페이지] 038
그러할 수는 없다. 너라면 그러했겠느냐?
[자란] 그렇기는 하다만 앞으로의 일이 염려되어서 그런다고 안했느냐. 대군의 마음이 너한테 기울어져 계신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오늘은 무사히 넘겼다만 반드시 후일에는 거역치 못할 것이다.
[운영] 며칠 날이 지났다고 내 마음이 변할 리 없다. 이미 내 절개는 진사님을 위해 지켜질 것이니라.
[자란] 부럽고 두렵구나. 네가 궁녀의 몸으로 어찌 그러할 수가 있겠느냐?
[운영] 수성궁의 담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넘을 마음만 있으면 넘을 수 있을 것이니라.
[자란] 뭐라구?
[운영] 진사님이 월담하여 오시는 듯이 나라고 월담하여 나갈 수가 없겠느냐.
[자란] 운영아.
(후면 담 위로 김생 살며시 올라온다. 그리고는 담을 날쌔게 넘어와 곧 뒷곁으로 몸을 숨긴다)
[자란] 네 기상이 실로 장하고 나도 너의 뒤를 따르지 못함이 한스럽구나.
[운영] 내 죄 죽어 마땅하나 죽어 여한은 없다. 궁녀로서 평생을 궁궐에 갇혀만 살아 무슨 뜻을 펴겠느냐.
[자란] 네 말이 백번 지당하다. 내 낭군님은 언제나 내 앞에 나타나실고?
[운영] 너의 도량이 활달하고 인품이 자애로우니 하늘이 굽어 살피실거다.
(후면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자란 놀라 후면으로 간다)
[운영] 무슨 소리가 들렸지?
[자란] 누가 있는 모양이다.
[운영] 누가?
[자란] 어떠한 사람이 이곳에 왔느냐?
[페이지] 039
[김생] (뒤에서) 향을 도적하고 나비를 따르는 광객이 대수풀에 숨어서 꽃 피기를 기다리고 있소.
[운영] 낭군님이!
[김생] (뒤에서) 그대 능히 달 아래 다리 놓기를 효칙 하겠는고?
[자란] 진사님이시여. 그대의 말이 가소롭소. 향을 도적하려면 청루주사와 옥창규합에 꽂힌 향을 줍지 아니하고, 나비를 따루려하면 삼춘가절 꽃필 때와 추국 단풍짙은 맑은 시냇가에 나는 나비를 쫓지 아니하고 어찌 어두운 한밤중에 이곳에 와 그리 방황하고 있소. 나로 하여금 다리 놓기를 바라나 집짓기 좋은 때가 아닌데 어찌 오작의 지음을 알겠소.
(김생 후면에서 비로소 나온다)
[운영] 낭군님!
[김생] 나이 어린 사람이 풍류의 흥취를 이기지 못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히 여기에 이루렀으니 바라건대 낭자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자란] 진사님이 오시기를 대한에 비를 바라는 것 같이 했더니 이제야 다행히 뵙게되어 저희들이 살아났사옵니다. 원컨대 진사님은 의심하지 마옵소서.
[김생] 이미 그대 두 사람의 우정을 들어서 알고 있소.
[운영] 오셨군요. 정녕 오셨군요.
[김생] 금석같이 맺은 언약을 내가 배약할 리가 있겠소.
[운영] 이제 진사님을 맞아 손님과 주인의 예로서 동서로 나뉘어 먼저 인사를 나누는 것이 상례인 줄 아오나 이미 이 서궁은 제가 더 이상 주인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아오니 양찰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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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 그게 무슨 말이오?
[자란] 운영이가 곧 성은의 은총을 입을듯 하여 월담을 하여 진사님한테로 갈듯 하옵니다.
[김생] 오, 그러하오. 그것은 오히려 내가 바라던 바라 내가 할 말을 그대가 먼저 하여 주었소.
[운영] 그러하면 낭군님은 저를 받아 주시겠나이까?
[김생] 내가 그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가 받아 주겠소. 이처럼 월담을 하여 입궐을 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매양 이러하다 남의 눈에 뜨이기라도 한다면 나는 당장 육시를 당할 것이오.
[운영] 낭군님이시여, 낭군님이시여
이 정절 모두 바칠 낭군님이시여
저의 부모 재산 많아
입궐할 때 갖은 보화
수레 가득 실어 주셨고
대군저하 총애 받아
재화 의복 하사 하셨으니
그 보화 재화만 있다면
낭군님과 한 세상
여한 없이 살으리다
[김생] 절대 가인 낭자 맞아
그 소원 어찌 저버리리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많은 보화 갖고 가서
심산궁속 외진 곳에
초모 삼간 지어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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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한평생을
여한 없이 살으리다
[운영] 낭군님!
[김생] 오늘은 밤이 깊어 달리 도리가 없으니 내일 당장 믿을만한 하인을 시켜 그 보화를 내어가도록 하리다.
[운영] 그러하면 날이 새는대로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겠나이다.
[김생] 밤이 어느 때나 되었소?
[자란] 오, 진사님이 어이 오신지를 이제야 알았소이다. 이 우둔함을 관서하소서.
[김생] 거북 새긴 금향로에
유리서안 태평광기
심야 심궁 옥등 하나 외로운
운영 낭자 방 구경을 하고 싶고
백옥잔에 유하주를
가득 부어 마신다면
오늘 밤 정취를
그 어디에 비하리까?
[자란] 탁문군의 봉구황곡은
천고의 미사요
무산녀의 구름 되고 비됨은
사람마다 바라는 바라
이제 낭군님이 상여의 곡을
맞춘 바 없고
초왕의 꿈을 얻은 바 없으나
요대의 즐김을 누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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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의 날개를 이어
거문고 줄을 맺으소서
[김생] 내 매양 소저의 퉁소소리
듣지 못함을 한하다
오늘 주목왕이 팔준마를 타고
요지에 이름을 얻었으니
조비연의 박복함을 효칙치 마오
[자란] 어서 드시어 월앙과 운우의 즐김을 누리소서.
[김생] 그 즐거움이 산과 같고 바다와 같다고 하니 낭자는 나와 같이 산과 바다엘 다 다녀 보도록 하오.
(운영 수집은 듯 김생을 따라 들어가는 가운데--- )
[장] 7장
무녀의 집
(빈채. 스산한 바람 소리와 함께 집안에서 무녀의 주문소리 한참 들려오다 이윽고 방울을 흔들어대며 무녀 밖으로 나와 계속 주문을 외워대며 사방으로 돌아간다. 김생과 운영 숨이 턱에 닿아 급히 등장한다)
[김생] 이제는 다 되었소.
[운영] 다 왔나이까?
[무녀] 어찌 이리 늦으셨소? 혹시나 하여 무사굿을 올리고 있던 참이었소.
[운영] 안상궁이 무슨 눈치를 채었는지 밤새 불침을 놓아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나이다.
[김생] 보화는 무사히 도착을 했소?
[무녀] 진사님댁 하인들이 날렵하여 벌써 다 안에 들여 놓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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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 그러면 되었소.
[운영] 월담을 하는 일을 마침내 성사시키셨소이다.
[김생] 이제는 되었소. 곧 포졸들이 우리의 뒤를 쫓을 것이니 어서 여기를 떠나도록 하오.
[무녀] 특재가 곧 와 은신처로 모실 것이옵니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시옵소서.
[김생] 그자는 믿을만 하오?
[무녀] 원래 광대패들이란 돈만 조금 집어주면 극진히 모실 것이니 인색하지만 마시옵소서.
[김생] 우리 두 사람이 이 세상을 등지고 숨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만 준다면 백냥 이백냥 아까울 것이 없소.
[무녀] 그러할 것이옵니다. 어떻든 진사님과 운영이가 속히 여기를 떠나야 저도 안심을 하겠소이다. 해가 더 높이 솟기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도록 하시옵소서.
[김생] 그러리다.
(무녀 다시 주문을 외워대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운영] 지난밤 꿈에 얼울이 영악한 자가 나타나 자칭 보돈선우라 하면서 말하기를 <이미 약속한 바가 있음으로 장성 아래서 기다린지 오래다> 하거늘 놀라 깨어보니 꿈이 심히 불길하옵니다.
[김생] 꿈은 허탄하다고 하는데 어찌 믿을 수가 있겠소?
[운영] 그 꿈에 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궁장이요, 모돈이라고 하는 자는 특재란 자가 아니겠소이까. 그자를 믿을만 할런지요.
[김생] 한 두번 본 적 밖에 없으니 그자에 대해서 내가 어찌 알겠소. 하지만 이런 절박한 때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달리 없으니 믿어 보도록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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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 어디로 데려갈런지 알 수도 없는 일이 아니오니까?
[김생] 어디로든. 우리 두 사람만이 평생을 같이 동거동낙하며 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무슨 상관이 있겠소?
[운영] 그러한 곳이 어디겠나이까?
[김생] 동주밤 겨우 새워 북판정에 올라하니
삼각산 제일봉이 하마면 뵈리로다
궁왕 대궐터에 오작이 지저귀니
천고 흥망을 아는다 모르는다
희양 옛 이름이 맞추어 같을시고
급장유 풍채를 고쳐 아니 불게이고
[운영] 영중이 무사하고 시궐에 삼월인제
화천 시내길이 풍악으로 뻗어 있소
행장을 다 떨치고 석경에 막대 짚어
백천동 곁에 두고 만폭동 들어가니
은같은 무지개 옥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리에 잦았으니
들을 제는 우뢰더니 보니 눈이로다
[김생.운영] (함께) 예로다 예로다
우리 평생 이 절경에서 살고지고 살고지고
천지 삼기실제 자연이 되었마는
이제 와 보게 되니 유정도 유정할사
어와 조화봉이 우리를 보냈어라
천만겁 지나도록 이 고장에서 살아보세 (김생, 운영을 포옹하고 먼 시선을 보낼 때 특과 광대패들 등장한다)
[페이지] 045
[특] 어이구, 진사님은 벌써 와 계셨구려.
[김생] 어서 오오. 그대들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르오.
[특] 일은 급하게 되었소이다. 수성궁으로 포졸 포교들이 개미떼처럼 몰려가는 걸 보니 이미 월담한 것이 알려진 모양이오.
[김생] 날이 밝았는데 어찌 모르겠소.
[특] 궁안에서 가지고 나온 보화는 급히 옮길 길이 없사오니 우선은 은밀한 곳에 숨겨두고 나중에 처리를 하도록 하소서. 얘들아, 일을 속히 서둘러라!
[광대패들] 그러지, 그러세. (광대패들 들어가려는데 무녀 안에서 나온다)
[무녀] 응, 다들 왔소?
[특] 보화부터 속히 치우도록 하리다.
[무녀] 그러오. 포졸들이 들이닥친다면 꼼짝없이 내가 도적누명을 쓰게 될 것이니 어서 어서 서두르오.
[특] 속히 내 오도록 하여라.
(광대패들 안으로 들어간다)
[무녀] 행여 일이 잘못되어 포졸들한테 잡히더라도 우리 집에 보화를 숨겨두었다가 가져가는 것이라는 말을 절대로 해선 안되오.
[특] 그럴려면 무산신녀에께서도 숨겨놓은 보화를 다 내어 놓으셔야지요.
[무녀] 뭐가 어째?
[특] 그런 것은 하나도 없소이까?
[무녀] 나를 도적으로 알다니 괘씸한지고.
[특] 그렇다면 다행이구만요.
(광대패들 보화상자를 들고 나온다)
[특] 그래, 되었다. 그러면 속히 여기를 떠나도록 하자.
[김생] 어디로 가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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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 우리를 어디로 데려 가려오?
[광대1] 어디?
[광대2] 어디?
[특] 우리가 가려는 곳이 그 어디더라?
[광대패들] 소향로 대향로 눈 아래 굽어보며
정양사 진철대 고쳐 올라앉아 타니
여산 진면목이 여기야 다 뵈나다
어와! 조화옹이 헌사도 헌사할사
[김생] 소향로 대향로가 다 보인다니 거기는 금강산 만폭동이 아닌가?
[운영] 만폭동은 말로만 들었지 한번도 구경을 해본 적이 없나이다.
[무녀] 만폭동이건 천폭동이건 어서 어서 모시고 가오.
[특] 모시고 가다니? 만폭동이 어디라고 모시고 간단 말이냐?
[무녀] 뭐라구?
[김생] 그러면 지금 가겠다는 말이 아닌가?
[특] 지금이건 내일이건 우리가 너희 둘을 데리고 갈 까닭이 무엇이냐?
[김생] 무엇이 어째?
[특] 우리는 이 보화를 가지러 왔지 너희들을 데리고 갈려고 온 것이 아니다.
[운영] 낭군님.
[특] 궁녀가 월담을 하여 궁밖으로 나왔으니 그것만으로도 죽을죄를 지었고, 김진사 자네도 죽을죄를 짓기는 마찬가지니 이미 죽은 두 목숨이니 보화는 해서 무얼 하겠나? 그러니 이 보화는 우리가 차지하도록 하겠네.
[김생] 이 흉칙한 놈!
[광대1]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걸. 우린 광대패들이지만 단검쓰는 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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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하니까 어린아이 하나쯤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광대2] 둘인들 열인들 식은 죽 먹기지.
[특] 아서라. 송장 치고 살인 날라. 저 두 연놈은 우리가 아니라도 관가에서 능히 처형해 줄 것이니라.
[무녀] 배은망덕도 유만분수지 너희놈들이 이러할 수가 있느냐?
[광대2] 이 무당년은 처치를 해 놓는 것이 좋을 걸. 그러하지를 않았다간 우리의 소행을 참새가 볍씨 까듯이 몽땅 고해 바칠테니 말이야.
[무녀] 너희놈들이 나를 해쳐?
[광대2] 그래, 광대패의 재주가 신출한가 무당의 재주가 신출한가 어디 한번 볼까. (단검을 빼어 들고 다가간다)
[무녀] 내 당장 신령을 불러 너희놈들에게 천벌이 나리게 하리라. (무녀 급히 안으로 들어가 방울을 요란히 흔들며 주문을 외워댄다)
[특] 어서 들어가 후환을 없애거라.
(광대2 단검을 든채 안으로 들어가자 곧 무녀의 비명 소리 들리고 광대2 나온다)
[특] 무산신녀가 죽었으니 조문이나 외워 볼까? 유세차
[김생] 너희놈들은 광대패들이 아니라 무뢰배 협객패들이었구나.
[특] 이제야 우리를 알았느냐
[김생] 아무리 너희놈들이 그러하다 해도 그 보화를 내어줄 수는 없다.
[운영] 아니옵니다. 그깐 보화 아무 소용이 없으니 낭군님은 존체를 보존하소서.
[김생] 아니요. 낭자가 평생을 모아온 보화를 저런 불한당 놈들에게 한꺼번에 뺏겨버릴 수는 없소. 그 상자를 놓고 썩 물러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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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겠느냐!
[광대1] 스스로 명을 재촉하겠느냐.
[특] 아니다. 더는 언행을 함부로 못하게 물고만 내어버리거라.
(광대 1, 2, 달려들어 김생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운영도 아울러 폭행을 당한다. 실신한 듯 쓰러져 있는 김생과 운영. 광대패들 유유히 보화상자를 들고 퇴장하며 노래한다)
[광대패들] 소향로 대향로 눈 아래 굽어보며
정양사 진헐대 고쳐 올라앉아 타니
여산 진면목이 여기야 다 뵈나다
어와! 조화옹이 헌사도 헌사할사
(스산한 바람소리와 함께 까치소리만 들려온다. 김생과 운영 실신한채 쓰러져 있다. 포졸들 천천히 등장하여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장] 8장
맹시단
(중앙에 운영과 김생 포승 지워진채 있고 특과 광대 1, 2도 포승 지워진채 있으며 단좌 좌우에는 궁녀들 모두 부복하고 있고 포졸들이 삼엄히 둘러서 있다)
[사동] (밖에서) 대군저하께서 납시오.
(안평대군 등장하고 뒤따라 안상궁과 사동 등장한다. 단상 중앙에 정좌하는 안평대군 단하를 내려다본다)
[안평] 이번 일은 우리 수성궁에서 벌어진 일이니 내가 치죄를 하겠다. 너희 광대패들은 패악무도한 무리들로서 치죄를 논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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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끌어내어 참형에 처하도록 하여라.
[특] 대군저하, 한 말씀만 아뢰리다.
[안평] 네놈처럼 흉악한 놈이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특] 대군저하 두루 통찰 하시옵소서 궁인이 월담하여 궁안 재화를 꺼내옴은 죄중에도 가장 큰 죄로 능지처람 마땅하오나 성은을 입은 우리 광대들은 그 보화를 고스란히 저하전에 되돌려 드렸사오니 후한 상은 내리지 못하시더라도 참수형이 웬 말씀이시오니까? 애통하고 원통하오이다 성은이 망극하사 목숨만을 살려주시옵소서
[안평] 죽어도 패악한 네놈 근성은 못 버리는구나. 네 광대 아닌 무뢰배 협객패거리로서 강포한 욕까지 보였으니, 그러하고도 살기를 바라겠느냐? 네놈들이 그 보화를 들고 수성궁으로 향하였다니 두번 죽어 마땅하다. 저 흉칙한 무리들을 어서 끌어내도록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