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 양반 고장인 경북 안동은 조선 말기~일제시대 항일운동도 활발했던 곳이다. 명성황후가 일제에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린 데 분격해 1895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안동에서도 예안(禮安)의병이 봉기했다. 이때 의병대장이 퇴계 이황의 11대 손 이만도였다. 이렇게 시작된 안동의 항일운동이 식을 줄 모르자 일제는 1907년 안동의 정신적 지주였던 퇴계 종택(宗宅)을 불질러 버렸다. ▶안동 도산면 토계리에 자리잡은 퇴계 종택은 퇴계의 손자 이안도가 지었다. 퇴계는 만년에 고향 시냇가에 한서암(寒棲庵)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안도는 할아버지의 자취가 배 있는 한서암 동남쪽에 후손들이 살 집을 마련했다. 세월이 흘러 퇴계의 10대 손 이휘녕이 원래 집 건너편에 또 한 채 집을 세웠다. 두 집은 1907년 모두 불타 없어졌다. ▶지금의 퇴계 종택은 퇴계 13대 손 이충호가 1929년 인근 다른 집안의 종택을 사들여 옮겨 세운 것이다. 숙종 때 학자 권두경이 퇴계를 남달리 흠모해 세운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도 재건했다. 이제 퇴계 고택은 인근 도산서원, 계상서당, 퇴계 묘소와 함께 명소가 됐다. 2001년 퇴계 탄신 500년을 맞아 안동에서 세계유교문화축제가 열렸을 때는 2000여명이 모여 제사를 올렸다. ▶34칸, 2119㎡에 이르는 퇴계 종택을 지키는 사람은 지난해까지 15대 손인 이동은(99) 옹과 아들 근필(75)씨뿐이었다. 이 옹의 부인과 며느리가 세상을 뜨는 바람에 살림살이도 바깥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쓸쓸하기까지 하던 퇴계 고택은 서울에서 공부하던 손자 치억(32)씨가 올해 초 결혼해 내려오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지난달에는 종부(宗婦) 이현주(31)씨가 아들을 순산하면서 4대가 함께 살게 됐다는 소식이다. ▶종손(宗孫) 3대는 가학(家學)도 잇고 있다. 동은 옹은 일제시대 경북중을 다니다 “왜놈 교육 받지 말라”는 문중의 엄명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성리학을 공부하며 종택을 지켰다. 근필씨는 대학 졸업 후 인천에서 고교 교사로 출발했지만 곧 고향의 초등학교 교장으로 옮겨 정년퇴임했다. 치억씨는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유교철학 박사논문을 준비 중이다. 세상의 변화에도 퇴계 종택이 면면히 이어지는 것에 지하의 퇴계 선생이 흐뭇해할 것 같다.
첫댓글 退溪(16대)宗孫 李根必 씨/가 작고한지도 얼마 되지는 않았으나 온후한 면안이 어제본듯 아연합니다,
지금도 종택앞에는 여전하게 쓸쓸히 붙어있는 《秋月寒水亭》란 ! 이 表題 간판의 의미를 알아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