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당(忠孝堂)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선생의
종택입니다. 현재 서애선생의 14대 종손인 류영하어른과 종부 최소희 어른이 종가의 고택을 지키고 있습니다. 류영하 어른은 서울에서 생물교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13대 종손이셨던 부친 류시영선생이 돌아가시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택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때가
1971년이었습니다.
연로하신 류영하 어른을 대신해서 15대 직계손인 류한욱선생이 충효당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부친이
그랬던 것 처럼 이분도 언젠가는이 종가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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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효당에 얽힌 긴 내력은 들려주신 류한욱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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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애선생의 사후에 선생이 유덕을 받들고자하는 수많은 유림들의 도움으로 지어진 충효당
안채인 서애 선생님은 저의 15대 선조입니다.
이 집의 당호가 충효당이 된 것은 서애선생님의 유언으로 남긴 시에 따른 것입니다.
후손에게 남긴 그 유시(遺詩)에 '면이자손수 충효지외무사업(勉爾子孫須 忠孝之外無事業 권하노니 자손들아, 충․효 외에는 다른 사업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집은 서애 선생님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서애선생님께서는 8년 동안 정승을 하고 내려오셨지만 먹을 것이 없고 집한
칸이 없었습니다. 내려오셔서 초가삼간에 계시다가가 옥연정사에 가셔서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를 집필하셨습니다. 1604년에 징비록의
저술을 마치고 같은 해 학가산 골짜기 서미동에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을 지어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재산이 없고 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손자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 선생께서 지었습니다. '임란(壬亂)에 이렇게 공이 많은 분의 신주(神主)를 모실
사당이 없어서 되겠느냐'고 영남 유림에서 도움을 받아 집을 완성했습니다.
처음에는 'ㅁ'자의 이 안채만 짓고 증손인 눌재(訥齋)
류의하(柳宜河)선생이 사랑채를 짓고 당호를 충효당이라고 썼습니다.
그 글씨가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서예가이신 미수(眉叟)
허목(許穆)선생입니다. 영덕 도곡동의 충효당, 삼척 척주동해비문(陟州東海碑文)도 이 분의 글씨이지만 그 후손들이 지금도 탁본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부탁을 합니다. 집에 병풍을 해 두겠다고, 미수선생 글씨 중에서 제일 명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대문간채는 서애선생의
8대손 일우(逸愚) 류상조(柳相祖)선새이 여기에 계시면서 병조판서,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장관을 제수(除授)받으셨는데 국방부장관이니 병력이
와야되지않습니까? 당장 병력이 기거할 공간이 없어서 한 달 만에 지었습니다. 200여년전 한 달 만에 13칸을 짓는 게 기적이지요. 그렇게
이집이 완성되었습니다. 1964년 보물 제41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서애선생이 임종 무렵 자손들에게 남긴 시의 원문입니다.
林間一鳥啼不息 숲 속의 새 한 마리는 쉬지 않고 우는데 門外丁丁聞伐木 문 밖에는 나무 베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리누나 一氣聚散亦偶然 한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는 것도 우연이기에 只恨平生多愧怍 평생 동안 부끄러운 일 많은 것이
한스러울 뿐 勉爾子孫須愼旃 권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忠孝之外無事業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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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宗婦라는 職緘 ! 종갓집 맏며느리》
누구집 종부종부 말이좋아 종부지 열둣폭 치마폭이 다 닳도록 좌고우면 두루두루 뒤덮고 다독이며 노심초사 무거운 소임을 이기고 살아야 하는 고달픈 인생길의 안방 마님이 종부라고 표현하고 싶다,
이제는 시대가 변하여서 종갓집 며느리하면 우르러 보던 시대는 지났다
작금의 실태는 종부라는 명사도 평가절하가 되어버렸다, 신세대 여성들께 청혼간에 알만한 문중 뉘집 종부라고 혼담만 있어도 목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삼백구십리 달아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상만사
모든것은 변하는 것이다,
"附言컨데"
자유천지로 이렇게 개방된 세상 핫팬티에 빽 땐스치며 자유분방한 전경이 펄처지는 개방적 이시대에 열두폭 치마 졸라입고 접빈객 봉제사에 인생을 걸 여성들이 지금도 쉽게 바래 볼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