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ㆍ영해지역 유적답사 - 5대성 8종가 전통마을 인량리(仁良里)
2013. 5. 4 영덕 나라골(인량리:仁良里)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慶尙北道 盈德郡 蒼水面 仁良里)에 위치하고 있다. 인량리는 창수면의 가장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해안 7번 국도를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축산항과 강구항을 중심으로 한 어촌이 형성되었다면, 서쪽으로는 주로 동성 집단이 분포하는 평야촌과 산촌이 형성되어 있다. 인량리는 바로 그 중심 지점에 서고동저(西高東底)의 마을 형태를 갖고 있다. 인양리는 송천(松川) 다리를 건너 학(鶴)이 펼쳐놓은 것 같은 인량대산의 왼쪽 날개가 동으로 뻗어 해풍(海風)을 막아주고 오른쪽 날개가 서풍(西風)을 막아주며, 남으로는 수백정보(數百町步)의 너른 들판을 감싸고 송천의 맑은 물이 흐르는 우리나라 5대 명당으로서 풍수지리적 (風水地理的)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인량리 위치도
인량리는 삼한시대(三韓時代)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部族國家)가 있어 나라골이라 하기도 하고, 뒷산이 학의 날개가 펼쳐져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내래골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진 사람이 많이 난다하여 조선(朝鮮) 광해군(光海君) 때 인량리(仁良里)라고 칭(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량리 마을안 인량리에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안동권씨(安東權氏), 대흥백씨(大興白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재령이씨(載寧李氏) 등 소위(所謂) 5대성 8종가가 고려시대부터 거주하면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석학(碩學)과 인물(人物)을 배출(輩出)한 곳이다. 내륙(內陸)이지만 바다와 가까워 대륙성기후(大陸性氣候)와 해양성기후(海洋性氣候)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봄바람은 쌀쌀하고 겨울바람은 따뜻하다. 여름에는 미탄해협으로부터 남하하는 한류(寒流)로 말미암아 우량(雨量)이 적고 시원해서 피서(避暑)에 알맞다.
무안박씨 영해파 세거지(입향조) 종택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이며, 1400년대부터 1700년대 사이에 지어진 웅장한 口자형 고기와부터, 一자형 기와집, 정자(亭子)와 재사(齋舍) 등의 전통가옥(傳統家屋) 30동이 즐비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보기에도 전통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현재 경북도기념물 84호 갈암종택(葛菴宗宅), 중요민속자료 168호 충효당(忠孝堂), 경북도문화재자료 174호 지족당(知足堂), 경북도문화재자료 307호 우계종택(愚溪宗宅), 경북도민속자료 61호 용암종택(龍岩宗宅), 경북도문화재자료 209호 만괴헌(晩槐軒) 등과 지정되지 않은 고가(古家), 사묘(祀廟), 정자(亭子), 충효비(忠孝碑) 등이 있다. 고가로는 오봉헌(五峯軒), 삼벽당(三碧堂), 처인당(處仁堂)이 있다. 사묘로는 후곡재(後谷齋), 추모재(追慕齋)가 있고, 정자로는 우계정(愚溪亭), 서산정(西山亭), 집선정(集仙亭), 청계정(淸溪亭), 수택정(水澤亭), 임연정(臨淵亭)이 있다. 충효비로는 인량리정려각(仁良里旌閭閣) 등이 있다.
지금의 인량리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입향조(入鄕祖)인 이애(李璦 : 1469-1494)가 익동(翼洞)이라하였다가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 1627-1704)이 다시 비계곡(飛溪谷)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1602년에(光海君 때) 어질고 인자한 현인(賢人)들이 많이 배출되는 마을이라고 인량리(仁良里)라 불리었다고 한다.
각종 문집, 족보(族譜)의 문헌을 통해보면 이 마을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대흥백씨(大興白氏)이다. 대흥백씨는 토성(土姓)인 영해박씨(寧海朴氏)와 혼인하여 나라골에 정착하였으며, 이 기점으로 영양남씨(英陽南氏), 안동권씨(安東權), 재령이씨(載寧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야성정씨(野城鄭氏), 무안박씨(務安朴氏), 선산김씨(善山金氏), 신안주씨(新安朱氏),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먼저 이주한 성씨와의 통혼(通婚)으로 마을에 들어왔다. 인량리는 흔히 ‘필종가(八宗家)‘ ’삼십종가(三十宗家)‘가 거주한다고 하는데, 많은 종가들이 오랫동안 세거(世居)한 마을로, 괴시리(호지마을)와 함께 영해를 대표하는 양반마을이다. 시간이 촉박하여 많은 종택을 볼 수가 없어서 영남유학 대표 가문인 갈암종택과 재령이씨 종택인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을 살펴보았다.
재령이씨 종택인 운악종가(雲嶽宗家) 전경 갈암종택은 퇴계 학문을 이어받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선생이 살던 집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17세기에 영남 지역을 대표했던 대학자 갈암 이현일 선생은 문과에 급제한 분은 아니었지만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이른 데는 그의 인품과 학자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갈암이 당쟁(黨爭)에 휘말려 학문적 업적이 폄하(貶下)되고 정치적 핍박(逼迫)을 받았지만 그 종가의 위상은 오랫동안 실로 당당했다.
갈암(葛庵) 종택의 문간채-밖에서 본 그림
갈암(葛庵) 종택 문간채-안에서 본 그림
갈암(葛庵) 종택의 안채와 사랑채-1
갈암선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통(學統)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을 지지했다가 서인의 탄핵(彈劾)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葛菴集)‘과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갈암종택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ㅁ자 형태다. 갈암선생은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나 선생이 40세 되던 해에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英陽郡 立岩面 屛玉里)로 옮겼다. 그 후 선생의 10대손이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靑松郡 眞寶面 廣德里)로 옮기면서 1910년 종가를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지금 있는 자리인 창수면 인량리(蒼水面 仁良里)로 옮겼다. 갈암(葛庵) 종택의 사묘
인량리 마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재령이씨(載寧李氏) 종택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을 찾았다. 풍수가(風水家)들이 이곳을 우리나라의 최고의 명당(明堂)의 하나라고 칭송한단다. 재령이씨가 16세기 초에 입향(入鄕)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집의 구조는 통상 양반집의 형태인 口자로 정침(正寢)과 대청(大廳)과 가묘(家廟)가 있다.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의 사랑채-1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의 사랑채-2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의 안채-뒷부분
운악종가(雲嶽宗家)인 충효당(忠孝堂)의 사당 충효당(忠孝堂)의 특징을 살펴보면 지은 지가 500년이 되고 여러 번 중수를 했으나 정침 천정은 앙토(仰土-천정에 흙을 바르는 일) 하지 않았고, 대문채를 짓지 않았으며, (지금의 대문은 정부에서 보수를 하면서 없던 것을 세워 놓았다). 충효당은 처음부터 살림이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500년을 미완성으로 둔 채 살아온 것으로 보아 조상들의 검소한 생활을 엿 볼 수 있다.
사당(祠堂-가묘)에는 큰 회화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 계단(階段)을 받치고 있는데, 동쪽 가지가 무성하면 영해 쪽 자손이, 서족 가지가 무성하면 석포 쪽 자손이 더 번성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충효당에는 진귀한 유물이 많으나 다 일실(逸失)되고 다행히 고문서(古文書)가 100여점이 보존되어 국가로부터 문화재 중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 충효당 종택은 국가주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사당(祠堂-가묘)에는 큰 회화나무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 계단(階段)을 받치고 있다
사당 주변에 백일홍이 심어져 있다
여러 씨족(氏族)으로 구성된 인량리는 좀 특이한 부락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취락(聚落)형성에 있어서 배산임수(背山臨水)는 풍수지리(風水地理)적으로 명당에 해당된다. 인량리도 예외일수 없다. 풍수지리사상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생활은 풍수지리사상에 의하여 많은 영향을 받아왔다. 고려의 개성(開城), 조선의 한양(漢陽)을 도읍지로 선정한 바와 같이 풍수지리상의 입장에서 이곳은 거의 완벽한 명당(明堂)자리이다. 이 마을에 여러 성씨가 정착하게 된 이유도 명당자리를 차지하기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인량리 마을도 이성촌락(異姓村落)의 형성 원인을 따져보면 풍수지리설의 명당을 차지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운악종가(雲嶽宗家)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마을 풍경
서쪽에서 바라본 운악종가(雲嶽宗家)
이 마을에 5대성이 상생(相生)하면서 지금껏 마을을 구성(構成)하고 유지(維持)해온 것이 신기하다. 일반적으로 같은 성씨(姓氏)가 동성부락(同姓部落)을 형성하고 있으나, 이 마을은 여러 성씨가 사이좋게 각각의 자기 가문을 지키며 전통을 보존해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생활면에서 타 가문에 뒤지지 않는 재력이 확보되었고 후손들도 교육을 잘 시켜 가문의 명예를 계승하였다는 증거이다. 즉 인(人)과 재(財)를 겸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마을에 살면서 통혼(通婚)하여 혼맥(婚脈)의 인연이 이러한 관계를 유지 발전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마을에 여러 성씨가 사이좋게 상생 발전해온 인량리 마을이 참으로 놀랍다. 운악종가(雲嶽宗家)서쪽에 있는 수령 470년의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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