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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순을 앞둔 권 선생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국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진취적인 정신을 강조한 선생은 삶의 도의가 바탕이 된뒤 진취적인 정신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
바람직한 인생에 대한 지혜를 구하기 위해 올해로 창간 17주년을 맞은 본지는 연중 기획으로 손원조 발행인이 한 달에 한 차례씩 각 분야에 걸쳐 경주지역의 명사를 모시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만 옳은 삶인가에 대한 지혜를 듣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애독자 제현께서는 매월 마지막 주에 게재될 이 난에 많은 관심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현재까지도 일부학자들은 삼국시대 당시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불러들여 동족이던 고구려를 멸망시켰기에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니라고 역사를 왜곡시키는 말을 예사로 하고 있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구순을 바라보는 향토의 대표적인 국사학자 권오찬 선생(87)은 평생 동안 연구한 국사학의 바탕과 반평생을 교직에 몸담으면서 체득한 역사관으로 볼 때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계 속의 강국으로 우뚝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라의 도의(道義)를 바탕으로 한 진취적인 통일정신을 계승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20대에 이미 경주시내의 최초 사립초등학교이던 계남(啓南)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학교를 인수해 3년 동안이나 운영했던 경험을 가진 권 선생은 교육만이 우리 민족을 깨우치게 만드는 첩경임을 미리 알고 광복 후엔 대구사범대학교 전문부 2학년에 편입한 뒤 본과 4년을 졸업하고 교직의 길로 나섰다가 1997년 72세 되던 해에 모교인 경주중·고등학교의 교장직에서 퇴임할 때까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오직 2세 교육에 몸 바친 교육자 이기도하다.
퇴임 후에도 권 선생은 바로 경주문화원 원장으로 추대돼 4년 동안의 임기를 마쳤으며 겹친 5년 동안은 경북도 청소년연맹 총장직도 맡아 청소년들의 뒷바라지 역할을 자임하면서 인재 교육에 남은 정열을 불태웠다.
-현대인들이 신라인의 통일정신을 이어 받아야 할 당위성과 구체적인 방향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 까요. 1400년 전 한반도의 삼국 중 가장 작은 나라이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그 정신은 도의를 바탕으로 한 진취적인 민족정신이 기초가 된 것이라고 본다. 반도의 동편 변방에 위치했던 신라는 지도자와 백성들이 많은 노력으로 스스로 국력을 신장시켜 북진정책을 펴 오던 중 삼국을 통일한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스스로 더 많은 노력으로 정신적 바탕이 되는 도의(道義)를 지키며 국력을 신장시키는 길만이 우리나라가 세계 속의 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사를 되짚자면 연개소문이 노쇠해지자 서로 권력다툼을 벌여오던 그의 아들 삼형제가 자중지란을 일으켜 이미 쇠퇴해져가던 고구려가 쉽게 제압된 것이다. 당시 연개소문의 장남인 남생이 동생들로부터 권력에서 축출되자 이 원수를 갚기 위해 당나라에 항복한 뒤 당의 힘을 빌려 조국을 쳐 고구려가 망해 갈 때쯤 신라가 쉽게 제압한 것이지 신라가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를 폐망시켰다는 인식은 큰 오류란 사실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특히 삼국시대 당시에는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신라가 외세를 불러 동족인 고구려를 쳤다는 논거는 그 자체가 엄청난 망발에 해당한다.
평생을 역사 연구에 힘써 온 권 선생은 “정부도 현재 청소년들에게 통일교육을 시킨다고는 하지만 자립정신과 자강정신이 앞서야만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철칙을 등한시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고 “신라가 스스로 자신들만이 민족의 중심이며 출발점이란 정신으로 진취적 사고를 가졌기에 어려웠던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하는 게 정도(正道)라고 봅니까. 인간이 사람답게 살아간다고 말하려면 먼저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남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 기준이 서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윤리도덕을 귀하게 생각하는 도의(道義)를 지켜 내가 아닌 타인에게도 베풀고 희생하고 기여하는 삶이라야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초등학생부터 시작해 중·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들까지 두루 남을 가르치는 일을 반평생 넘게 했으나 나도 제자들에게 ‘부디 공부 많이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만 강조했을 뿐 남을 위해 살도록 하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지는 못한 것 같아 민망하게 생각될 때가 많다.
요즘은 나 자신 아흔이 가까워지도록 살면서 이 사회에 정말로 어떤 도움이 될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종종 반문해 보는 시간이 생길 정도다.
영천출신으로 조선조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5명의 2등 공신 가운데 한 사람인 화산군(花山君) 권응수(權應洙) 장군의 후손으로 경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유·소년기를 보내 뒤 광복 한해 전인 1944년에 5년제 경주중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다음해엔 일본 히로시마의 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해 출국을 기다리던 중 한·일 연락선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격침됐다는 소식에 일본 유학을 포기했던 권 선생은 특히 1945년 8월 18일자로 입대하라는 통지서를 받고 대기 중이었으나, 사흘전인 이 해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군에도 면제되는 행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시절엔 청와대에서 개최된 경주종합관광개발사업을 주제로 한 회의에도 참석해 고도 주민으로서의 경주시민들의 어려움을 직언한 사례도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지켜나가야 할 사항이 있다면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요. 이미 시대의 흐름이 물질만능시대로 기운지가 오래다. 부모를 반드시 봉양해야 자식 된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정신이 희미해진지가 이미 오래됐으며 부모를 봉양은커녕 외면하는 자식들이 많아진지도 역시 오래된 풍토여서 아쉽기 짝이 없지만 지금이라도 제도만 탓 하지 말고 가정과 학교에서 윤리와 도덕 교육을 제대로 시켜 청소년 등 공동체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서로 독려해야 한다.
젊은이들도 개인 개인이 크게 각성해야 한다. 자신도 반드시 늙어간다는 사실을 명심한다면 자연히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를 터이다. 부모의 은공으로 태어나고 키워진 자신이 부모를 홀대하고 외면하면 자식인 내 아들과 딸도 또한 그 본을 봐서 반드시 자신을 내칠 것이란 사실을 왜 모르는가 싶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낳고 키워 준 부모를 잘 봉양해야 다시 내 자식이 부모인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만고진리를 잘 이해해서 부모를 해치고 버리는 폐륜을 범치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시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신라의 저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소국인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저력은 도의교육의 기반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의 대학인 국학(國學)의 첫 번째 순위는 윤리와 도덕이었으며 그중에서도 효(孝)의 교육이 바탕이었다. 화랑오계 역시 대부분이 도덕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백제는 역사를 유기(留紀)라고 표현했으며 고구려는 역사를 신집(神集)이라고 했으나 신라는 진흥왕 당시 나라의 역사를 편찬한 거칠부가 이미 국사(國史)라는 명칭을 사용할 정도로 지도자와 국민들의 역사의식이 투철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아직도 양력과 음력을 겸용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견해인지 듣고 싶습니다. -아직도 양력과 음력을 겸용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떤 견해인지 듣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음력을 사용한 역사는 이미 오래전부터다. 나라의 힘이 허약해 중국을 대국으로 섬겨야 했던 먼 시절부터 사대주의에 따라야만 했던 조상들은 중국의 연호를 비롯해 달력도 얻어다 사용할 수밖에 없던 세월을 겪었다.
당시에도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중국은 마테오리치가 양력을 동양에 전파할 당시에도 물론 음력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24절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세월을 지냈다.
우리나라는 해마다 중국의 달력을 구해 와서 그 것을 기준으로 삼아 우리 기준에 알맞게 사용할 24절기가 들어간 달력을 만들어야 했던 터였다. 조선조에 와서도 우리는 중국을 따라 당연히 음력을 사용해야 했으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뒤에도 한문은 진서(眞書)로, 한글은 언문으로 불러야만 했으며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이 양력 사용을 강요했기에 백성들은 기를 쓰고 음력을 지내려 반항하기도 했다.
또한 양력은 과학적이고 편리한 내용인데도 음력은 과학적이지 못해 반드시 날짜에 차이가 난다. 1592년 임진왜란의 발발 날짜가 일본은 4월 12일이고 우리는 4월 13일로 기록해 사용하게 된 사연도 여기에 연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학적이고 편리함 때문에 주위의 대부분이 설과 팔월 한가위를 음력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나는 30년 전부터 양력을 고집하며 사용해 오고 있다. 특히 인간생활에는 음양이 있지만 생활자체가 대부분 양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전 세계 각국이 모두 양력을 사용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 있기에 당연히 양력을 사용해야 옳다고 본다.
일본도 오래전에 이미 양력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도 점점 음력이 쇠퇴돼 가고 있는 실정이라니 우리나라도 이중과세 등 번거로움 등을 피하는 길은 양력으로 통일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가진 좌우명이 있다면 어떤 내용인지요. 나는 항상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오고 있다. 그러하니 이 말이 좌우명인 셈이다. 다시 말하면 주역에 나오는 말로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라는 의미의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지난날을 영위해 온 셈이다.
특히 나는 청년시절에도 적지 않은 일본인들의 만행을 겪으면서 일제 강점기를 지낸 탓에 해방 후 가장 먼저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삼창을 불렀으며 을유동지회(乙酉同志會)라는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선봉에서 좌익단체에 대항하는 데도 앞장섰다.
나는 교육에 대한 일념으로 대구사범대학교 전문부에 편입한 다음 본과 4학년에 재학하면서부터 대구여중의 영어 과목 교사직을 시작으로 교단에 선 다음 대구농고와 대구상고를 거쳐 경북여고 등에서 교편생활을 할 때도 당시 경북교원노조의 학술부장을 맡는 등 반골사상이 없지 않았으며 1961년 5.16 혁명이 난 뒤엔 교원노조 출신이란 낙인이 찍혀 6개월 동안이나 안강농고로 좌천되는 수모도 겪었기에 그 뒤부터는 항상 내일을 도모하는 마음으로 생활하려 노력해 왔다.
평소에도 화합형으로 온건한 성품이면서도 열정적인 성격인 권 선생은 대학서 국사학을 전공해 중등학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서 20년 동안이나 국사학을 강의했는데 군사혁명 이후인 1963년에야 일제 강점기인데도 육영사업의 큰 뜻을 세워 경주중학교를 설립한 수봉 이규인 선생의 고귀한 정신과 친구이며 당시 경주중·고등학교의 재단이사장이던 이상열 선생 등 주위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모교인 경주중·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겨 온 다음 1년 만에 교감에 승진했으며 이어서 중학교 교장에서 다시 경주중·고의 통합교장으로 취임해 1997년 72세에 퇴임 때까지 34년 동안을 모교에서만 후진양성에 매진해 와 경주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교육자로 호칭되고 있다.
국사학 중에서도 특히 신라사에 정통한 권 선생은 1980년에 경주시의 의뢰로 ‘신라의 빛’이란 제목의 경주 소개 책을 발간했으며 경주문화원장과 경북청소년연맹 총장직을 그만둔 2000년 초 이후부터는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논어를 읽으면서 한국 역사를 재음미하는데 전념해 오고 있다. 자녀 3남 3녀를 모두 잘 키워 출가시켰기에 주위로부터 복 많은 분으로 불리는 권 선생이다.
연치에 비해 비교적 건강이 좋은 편이지만 팔순이후부터는 몸이 마음 같지 않아 하루 한 차례씩 서천강변을 돌아오는 2km 구간의 산책으로 생활하며 최근부터는 종교에도 관심이 생겨 불교에 관한 서책의 독서 등으로 소일하고 있다.
서재에서 대담을 마치고 일어나자 배웅 길에 나선 권 선생은 “팔순을 넘으면서부터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해 요즘엔 가족은 물론 지인들과도 통화를 하는데 적지 않은 불편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역시 참 인생이란 것은 살아보지 않고는 똑바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영역이라서 살아 본 다음에나 겨우 조금씩 깨닫게 되는 가 봅니다”라고 덧붙였다.
권오찬 선생은 1924년 7월 경주서 출생 1944년 5년제 경주중학교 졸업 1946년 경주 계남학교 교사 1947년 대구사범대학교 전문부 수료 1952년 대구사범대학(경북대학교)문학부 사학과 졸업 1954년 경북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수료 1952년부터 대구여중, 대구농림, 대구상고, 경북여고 교사 1960년부터 1977년까지 17년간 경북대학 사범대학 강사 1963년까지 안강 농고, 경북대학교 사대부고 교사 1963년 3월부터 모교인 경주중·고등학교 교사로 옮김 1997년 경주중·고교장 퇴임 1975년 2년간 경북도 문화재위원 1978년 2년간 특별단지 건설 청와대 자문위원 1984년 4년간 경주전문대학 강사 1983년 2년간 경북도 학생생활지도위원회 위원장 1984년 3년간 경북도 사립중·고등학교 교장회 회장 1986년 4년간 경주·월성지역 현장장학협의회 위원장 1988년 5년간 국민정신교육 경북도 연구회장 1983년 한국청소년연맹 경북도 협의회장 1987년 3년간 경주시 정화위원 2000년까지 4년 간 경주문화원 원장 1971년 문교부장관 표창 수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수상 1990년 경주시문화상 수상 1991년 한국청소년연맹총재 청소년 대훈장 수상 1992년 국무총리 표창 수상 등 다수 대담=손원조 발행인. 사진=이상욱기자 |
첫댓글 선생님 존안을 뵈오니 정말 감회가 새롭고 눈물이 나네요.정정하신 모습을뵈니 너무 마음이 좋습니다
선생님 만수무강하십시요
참말로 정정하시네. 장인어른과 경주중학교 2회 동기생이신데.......................만수무강하십시오.
선생님을 뵈니 감개무량합니다. 학창시절에 재미난 역사이야기가 귓가에 맴돕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