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371] 청음서원 훼파사건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입력 2022.11.07 00:00
경북 봉화는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있다. 난세를 피해서 사는
평화주의자들의 공간이었다. 그 대신 호랑이가 많았다. 왜정 때까지 호피(虎皮) 담요를
사용한 집들이 더러 있었고 호육(虎肉)을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수목원
에는 호랑이가 사육되고 있다.
봉화의 유명한 양반 마을이 해저(海低·바래미) 마을이다. 바래미에서는 호랑이 기운을
타고난 송암(松庵) 김경헌(金景瀗·1690~1744)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마디로 기절탁락
(氣節卓犖·기백이 뛰어남)의 사나이였다. 송암의 기절이 드러난 사건은 1738년 영조
14년에 안동에서 일어난 청음서원 훼파사건이었다.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노론의
상징적인 인물이 청음 김상헌이었고, 노론들은 이 김상헌을 추모하는 서원을 청음의
고향인 안동에다 세우려고 하였다.
당시 안동은 야당인 남인의 헤드쿼터였다. 남인의 심장부에다가 반대당인 노론의
상징적인 서원을 세운다는 것은 안동 유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집권당이 권력으로 밀어붙이는 사업이었다. 이걸 반대한다는 것은 집안이 멸문이
되고 당사자는 죽음을 각오하는 배짱과 신념이 있어야만 하였다.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일을 송암이 나서서 총대를 멨다.
당시 40대 후반의 송암은 안동향교의 상재(上齋·교장)였고, 70대 초반의 김몽렴
(金夢濂)은 안동좌수였다. 상량식을 앞둔 청음서원 현장에 가서 송암이 직접 대들보에
밧줄을 걸고 잡아 당겼고, 청음서원은 붕괴되었다. 노론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엄청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영조 임금의 등극을 인정하지 않았던 1728년의 무신란
(戊申亂)의 재판이 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영조는 영남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어사 박문수를
앞세워 일처리를 시켰다. 그런데 어사 박문수는 해저마을의 송암 김경헌과 100년 지기를
맺은 사이였다. 박문수가 암행어사 초임 시절에 해저마을에 왔다가 마패를 잃어버렸던
사건이 있었고, 이 마패를 김경헌이 찾아주는 과정에서 각별한 우정을 나누어 왔던 사이
였다. 노론들은 김경헌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영조의 오른팔이었던 박문수는
임금을 설득하여 가벼운 처벌로 마무리하였다. 바래미 학록서당(鶴麓書堂)의 손님방
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문 밖에는 옹기로 구워 만든 도깨비상이 서 있다. “웬 도깨비요?”
“송암공을 모시던 도깨비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조용헌 살롱#읽어주는 칼럼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컨텐츠학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11/07/UVDV4FYDYZC3XCAIV2IOUJ5C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