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가 황건적 소탕에 공을 세우고, 천신만고 끝에 얻은 벼슬자리는 定州安喜縣(정주안희현:지금의 하북성 정현 동남쪽 지역)의 縣尉(현위: 녹봉은 200석에서 400석까지로 다양 하며, 도적을 막고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요즘으로 치면 파출소장 정도의 직급)라는 미관말직이었다. ***주: 파출소장이 미관말직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의 공적에 비해 내려진 직급이 너무 낮았다는 의미다.
아무튼 그가 안희현위(安喜縣慰)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장차 군공(軍功)으로 장리(長吏)가 된 자를 도태 시키겠다고 하였다. 군(郡)의 독우(督郵:군(郡) 태수에 소속된 관헌으로 군에 소속된 현(縣)을 감독하고 현의 관리를 심사하여 지방의 간교한 권세가들을 관리하거나 제어했다. 아울러 소송사건이나 도망자를 붙잡는 등의 형사소송 권과 소추권도 가지고 있었다. 대개 한 군에 셋 또는 다섯을 두었고, 각 군마다 달랐다. 암행어사와 비슷한 성격의 관리이며 오늘날 감사원과 같은 직책이다.)가 안희현(安喜縣)으로 가서 시찰을 하는데, 오만하고 예의가 없을 뿐 아니라 세력을 믿고 뇌물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유비가 뇌물을 주지 않자, 독우는 현의 아전을 협박하여 유비가 백성을 헤쳤다고 무고(誣告)하게 하였다. 유비는 몇 차례나 역관으로 가서 죄를 면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문밖에서 거절만 당한다. 장비가 이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역관으로 돌입하여 독우를 끌어내고 관아 앞 말뚝에 묶어 버드나무 가지로 놈을 뒤지게 팼다. 유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장비에게로 달려가 반쯤 죽어가는 독우의 목에 현위(縣慰) 인둥이를 걸어 두고 벼슬을 버린 채 떠난다. 바로 그 장면에서 백성들이 구름 같이 유비에게로 모여들어“쿠오바디스!!! 상공! 우리를 버리시고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며 온 縣(현)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유현덕의 가는 길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위의 얘기와 비슷한 고사가 우리의 역사에도 있다. 성웅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정유재란이 발발하는 1597년 1월부터 3월까지의 일기는 빠져 있다. 그 당시의 역사를 잠시 기록으로 뽑아 보자.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발발
1월 21일: 왜군이 거짓으로 꾸민 밀서를 그대로 믿은 조정에서 출동 명령을 내리나 이를 어기고 출동하지 않음
1월 27일: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됨
2월 24일: 한성으로 압송됨
3월 4일: 모진 고문을 받고 옥에 투옥됨
4월 1일: 투옥된 지 28일 만에 출옥하여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함
2월24일 한성으로 압송될 당시의 상황을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삼문 밖에는 이순신 장군을 실어갈 檻車(함거)가 놓여 있다. 장군은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오랏줄에 결박된 채 부자유한 몸으로 나졸에게 붙들려 함거 속으로 들어간다. 만고의 영웅인 장군이 까닭 없이 누명을 쓰고 한성으로 잡혀간다니 그곳의 백성들은 모두가 부모상을 당한 듯 황황하고 초조하다. 우리 사또를 왜 잡아 가시오, 사또가 가시면 우리는 어이 살라 하오, 망극하오. 우리는 장차 누구를 믿고 누구를 의지하고 산단 말이오,,,,,,,함거에 오르는 장군의 모습을 보자 백성들은 통곡을 하며 함거를 둘러싸고 장군을 얼싸 안는다. 금부나졸이 육모방망이를 휘둘러 백성들을 내쫓는다. 흰옷을 입은 백성들은 매를 얻어맞으면서도 흩어지지 않는다.”이상 두 가지의 역사적 사실은 영웅이나 성웅이 관리 또는 나라로부터 핍박을 받거나 危害(위해)를 당할 시, 그들의 공덕에 감화를 받은 백성들이 안타까워하고 미력이나마 항거를 했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노무현의 검찰 소환이 다가오자 봉하마을 주민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마을 광장 안 골목에“사생활에 피해 주는 망원렌즈 촬영을 그만해라.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현수막을 내걸고, 아예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앞을 막아서며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하여 동분서주하는 취재진을 방해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마을의 전 이장이라는 인물은“검찰의 수사는 대통령이 표적이다”라며 쌍심지를 돋우고 있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두고 볼 때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은 아니다. 밤낮으로 벌어지는 취재경쟁이 어쩌면 주민들이 불편해 하고 생활리듬이 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의 생활이 얼마간 불편하다고‘천하의 역적’을 斗護(두호)하며‘너무하다’는 둥 취재를 방해하며 국민의 알권리를 원천적으로 봉쇄 하겠다는 생각은 마치 유영철이나 유호순이 한 마을에 살았다고‘우리 마을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라는 주장과 다름없는 것이다.
차라리 유영철이나 유호순은 수십 명의 인명을 살상했지만, 만고역적 노무현은 국민과 국가 나아가 민족통일에 위해를 가한 악질인 것이다. 그런 자를 단지 한 마을에 산다는 것, 전직 대통령이라는 것, 이웃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그를 비호하며, 국가적 부도덕과 비리를 캐겠다는 의지를 방해한 다는 것은 이 또한 반역자와 다름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따지고 보면 유영철이나 유호순 그리고 노무현과 같은 고향으로 사는 주민들이 불운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난날 봉건시대에는 역적질을 한 놈이 나타나거나 흉악한 범인이 나타난 마을은 연좌제를 적용하여 마을 백성 모두를 역적에 준하는 형벌을 내렸고, 심지어 재수 없다며 그 마을을 폐하여 못(澤)을 만들어 자취를 없애 버렸다.
우리는 단지 죄 없는 자를 표적 삼아 마녀사냥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또 오순도순 이웃과 정 나누는 것을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만고의 역적을 이웃에 둔 죄라면, 당분간의 불편을 참아야할 것이다. 봉하마을 백성들의 인내와 희생으로 온 나라 백성이 행복할 수 있다면, 요즘 같이 어려운 시절에 가뭄의 단비 같은 희소식이요 바람직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차라리 봉하마을 백성들은 노무현을 향하여 마누라 치마폭을 만지작거리지 말고 훌훌 털고 죗과를 받으라고 촉구하는 편이 애국의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