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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민주화운동은
저번에한번올라온적이있는데내가좀더수정해서쓸게
광주사람이건아니던 광주를빨갱이라고생각하던아니건 한번씩만읽어줘 좀지루하고복잡할지도몰라그래도진짜읽어주라
우리모두를위해서 조금글이길지도몰라 그래도 부탁할게
지루하지않게하려고 글도사진도많은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가끔 시체사진같은거 나올수도있어 일부러 언니들위해서 너무 수위가 센 사진은 안올리는데 피는나온다..ㅇ..
최대한정치적발언안하려고는하는데 어쩔수없이가끔튀어나오는건어쩔수없다미안
그리고지금어른들께계속물어보고있는중이니까 알게된거있으면 계속 추가하도록할게
화려한휴가, 26년그건아무것도아니다
우리 엄마아빠 모두 광주사셨고 할머니할아버지 모두 광주에 사셨었어. 지금도 광주에 살긴하지만
할아버지는 다행히 딱 그시기에 사우디가셔서 그당시엔 광주에 없으셨지만 할머니엄마아빠모두 그때 광주에 있어서 그때 이야길좀 해주려고해 내가 물론 그때 산건아니지만 엄마가 그당시에 충장로살아서들은게많아
(518은금남로에서일어났었고 충장로는 바로 그옆, 걸어서 5-10분정도야
우리엄마는 금남로와충장로 한가운데에서 사셨어.)
우리학교에서도518대해서많이알려주기도하고
그당시충장로는시체랑피로물들고난리였었고
충장로살던사람들은 총알들어온다고 창문 다 솜이불로막고
그때우리할머니가충장로에서슈퍼하셨는데슈퍼에한톨도남김없이사람들다나눠주고
구들방까지사람들숨겨주고 우리엄마도기억난데
계엄군들이들어와서집다뒤지는거 mbc불타는것도보고
막시체들때문에밖에도못나갔었데
막엄마는그때어려서막구경가고싶고그랬다는데
그때임산부는배갈라서막애꺼내고 여자들은가슴다도려냈다고하고 그런소문도되게많았데
소문이근거없이일어났겠어?진짜일어났으니까그러지
그리고분명히같은반에있었던애가몇일뒤에학교가보니깐없고..그랬었었어.
진짜화려한휴가랑 26년보고와 솔직히그영화들봐도그건진짜아무것도아니야 그분이아직살아계시니까더심하게만들수가없는거지
화려한휴가는좀덜하고 26년은진짜 그후손들까지어떤영향끼쳤는지진짜알게되
광주가빨갱이라고? 빨갱이는무슨빨갱이 우리가전두환쿠데타일으켰다면서거부하니까전두환이빡쳐서우리없앨려고생각해낸게
우리빨갱이라만들어서이유없이죽인거아냐
26년처음에웹툰으러나오는거ㅇㅇ 거기서아저씨가그래
우리가뭔죄가있어서죽이냐고
진짜그당시에우리엄마친구도총소리들린다고신기하다고밖에쳐다보다가 총맞아서죽은사람도있어
그리고그때돌아가시지않았어도 팔없이다리없이살아가시는분이나 피를흠뻑맞고살아가셔서 정상적으로못사시는분도있어
이래놓고광주의아픔을잘안다니
참...대단하다 이대통령도518기념행사한번도오신적이없어 그런데과연박근혜가잘올까모르겠다 516도인정안하시는분인데
광주사람아니면5.18뭐별거아니라는듯이옛일이라고무시하지말자
6.25도당연히크지하지만5.18하고6.25는아예시초부터다른거야비교하지마;;
6.25는미국과소련그런식으로갈라져서서로싸운거지만
5.18은우릴위해우리의권리를위해정부와싸우다가돌아가신분들이야
혹시라도소풍이나현장체험학습등으로518국립묘지와본사람있어? 거기가보면영정사진들이진짜많아 되게높은건물에벽면에사진쫙걸려있어 26년보면알수있을거야 한혜진이다치고나서간곳 한혜진하고진구가손잡던 거기가 518국립묘지야 근데그사람들은시체를알아보고신원파악이됬으니깐모시는거야 과연그사람들이다일까 정말많아 그것보다셀수없이희생되신분이많아
거기만있는게아니고 정말옆에묘지있는데 묘지가서보면 애기부터할머니할아버지들까지정말많은분들이희생당하셨어
그리고이번광주에서문재인후보퍼센트높다고이게어떻게민주주의냐고하면서욕하는사람많은데 이건당연한거아냐?
박근혜가후보직에나온것만으로도민주주의가아닌거아닌가 저사건을겪었는데어떻게박근혜를뽑나 박정희나그분이나
똑같은독재자고쿠데타일으킨사람들인데 당연히못뽑지
지금우리가이렇게투표하고누굴지지할수있다는거누가이룬건지생각해보자;;
물론 광주만 민주화운동을 한것도 아니고 대단하다고떵떵거리는것도아니야
민주화운동중가장크게사람들에게 인식된운동이기도하고
세계사람들이아는운동이기도해서 그러는거야
제발 5.18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지말아줘
폭동이라고생각하지말아줘
지금아래부턴 그냥 지식백과에있는 5.18에대한 정의올려볼게
근데 난 이것도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
아래부턴 보기싫으면 안봐도되.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광주(光州)와 전남(全南)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중항쟁을 국가 차원에서 기념하는 날.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한 다음 해인 1981년 5월 18일 피해자 집단, 학생, 재야운동 세력이 망월묘역에서 추모행사를 거행한 것이 발단이었다. 국가는 이 추모행사가 재발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가했으나, 5월 계승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하게 실행되어 마침내 1997년 5월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정권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사망과 함께 붕괴된다. 이를 틈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가시화되었다. 민중운동 및 반(反)군부 세력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신군부의 집권으로 인해 더욱 후퇴하고 억압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1980년 5월 초에 절정에 이르러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집회와 시위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의 주도로 시국성토대회가 연일 개최되었다. 학생들은 5월 14일부터 광주 도심으로 진출하였고, 시민들과 대규모 가두 정치집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민족민주화성회’로 불리던 이러한 집회와 시위는 5월 16일까지 계속되었다.
시위가 확산되어 가자 신군부는 5월 14일부터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집회와 시위를 진압할 계획을 현실화하였고, 17일 오후 7시에 공수부대 투입명령을 내렸다. 신군부는 5월 17일 밤 11시 40분에 ‘비상계엄이 18일 자정을 기해 전국으로 확대되었음’을 발표하는 한편, 전국에서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기 시작했다. 광주에서도 5월 18일 자정이 다 된 무렵부터 십수 명이 광주 505보안대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제7공수여단은 전남대와 조선대에 계엄군으로 배치되어 학교에 있던 학생 112명을 연행하였으며, 언론사와 방송국, 비롯하여 광주 시내 주요 기관에 제31사단 군인이 투입되었다.
5월 16일에 개최된 집회를 해산하면서 약속한 대로 학생들은 18일 오전에 전남대 정문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학생들의 해산을 종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첫 충돌이 발생하였다. 계엄군의 진압을 피해 도심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시민들에게 계엄 확대와 계엄군이 자행한 만행을 알렸다. 제7공수여단에 이어 추가로 파병된 제11공수여단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진압봉을 휘둘렀고, 무차별 연행하였다. 이에 시민과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도심은 전쟁터로 변해갔다. 제3공수여단이 추가 투입되는 등 계엄군은 계속 늘어났고 발포까지 이루어져 사상자가 급증하였다. 시위대는 계엄군의 만행을 널리 알리고, 무력에 맞서기 위해 전남 지역으로 진출하여 무기를 획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5·18민주화운동은 광주뿐만 아니라 전남 일원으로 확대되었다. 무기를 획득한 시민들은 이른바 ‘시민군’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5월 21일 시민군은 계엄군을 후퇴시킴으로써 27일까지 ‘민중자치’가 실현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시민군은 광주의 치안과 행정 업무를 담당했으며, 다수가 도청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
계엄군이 철수한 광주는 5·18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학생민주투쟁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해가면서 죽음으로 확보한 성과를 지속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5월 26일까지 매일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를 개최하여 민주주의의 사수를 위한 광범위한 동의를 구하였다. 또한 ‘투사회보’를 비롯하여 다수의 홍보물이 발간되어 대안언론의 기능을 했다. 시민들은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음식물과 생활용품을 기꺼이 제공하였다. 계엄군과 신군부의 지시를 받던 행정권력이 기능을 상실한 기간은 ‘시민들이 각자의 생명과 동료 시위대 그리고 광주시민들의 생명과 완전히 동일시했던 절대공동체가 형성되었던 시기’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충정작전을 개시하여 전남도청을 다시 점령함으로써 종결되었다. 2001년 12월 18일을 기준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218명, 행방불명자 363명, 상이자 5,088명, 기타 1,520명으로 총 7,200여명에 이른다. 비록 5·18민주화운동은 비극적으로 종결되었으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보상, 기념사업을 쟁점으로 한 ‘5월운동’을 통해 계속되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보상등에관한법률’이 제정(1990년 8월 6일)되어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 및 기념사업이 이루어졌고,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이 제정(1995년 12월 19일)되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가해자 다수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에도 5·18민주화운동의 청산작업에서 발생한 오류와 미흡한 점들을 바로잡기 위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2000년대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과거사 청산작업’을 위한 선례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또한 5·18민주화운동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국가에서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단체 및 사람들의 활발한 교류의 구심이 되어 다른 나라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기념일에 개최하는 행사는 크게 중앙정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행사와 기념행사위원회가 주관하는 관련 행사로 구분된다. 전자는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국립 5·18묘지에서 개최하는 기념식과 광역시도 주관 하에 개최하는 지방 기념식으로 구체화할 수 있다. 국가보훈처가 주관하는 기념식에는 대통령,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3부 및 헌법기관의 주요인사, 국회의원, 장관, 차관급 관료, 5·18민주유공자, 유족, 5·18관련 단체 회원, 각계 대표, 공무원, 시민, 학생이 참석한다. 식순은 개식, 국민의례, 헌화·분향, 5·18민주화운동 경과보고, 기념공연, 시 낭송, 기념사, 기념노래 제창, 폐식 순으로 진행된다.
기념행사위원회가 주관하는 관련 행사는 해마다 특정한 대주제를 선정하고, 5월 한 달 동안 개최된다. 5월 행사 프로그램은 일반적으로 10여개 부문(기념정신 계승 행사, 시민참여 행사, 특별행사, 청소년 행사, 문화예술 행사, 국제연대 사업, 학술심포지엄, 기타 행사, 타 지역 기념행사, 전남 지역 행사)으로 분류되는데, 40여개의 세부행사가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행사는 5월 17일에 개최하는 추모제와 전야제, 20일에 개최하는 민주기사의 날, 27일에 개최되는 부활제이다. 그 밖에도 해마다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며, 다양한 문화 및 국제연대 행사가 광주와 전남 일원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5·18민주화운동 정신이 전국으로 널리 확산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6개 도시에서 행사가 개최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계승하려는 활동은 사건이 종료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활동이 해마다 5월에 개최한 ‘5월제’ 혹은 ‘5월행사’였다. 이러한 활동 가운데 하나가 5월 18일 희생자들이 안장되어 있는 망월묘역에서 추도식 또는 추모식이라는 이름으로 추모행사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추모행사를 열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관련자들을 구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5·18희생자단체와 민주화운동 세력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매년 추모행사를 개최하였고, 해를 거듭할수록 확대되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민주화운동은 국가 차원에서 재평가되었고, 각종 기념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주시의회는 1996년 4월 30일 기념일 제정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고, 5월 18일을 ‘5·18민중항쟁기념일’로 지정하는 광주시 조례를 제정하였다. 광주시는 이러한 의견을 수렴하여 1997년 2월 정부에 법정기념일로 제정해 줄 것을 건의하였고, 1997년 5월 9일 이 요구가 수용되어 법정기념일로 제정되었다. 그리하여 1997년부터 5월 18일에 새로 조성된 국립 5·18묘지에서 정부가 주관하는 기념식이 거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광주 시민사회에서는 광주시 기념일도 5월 18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을 수년 전부터 제기하여 점차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다.
{5·18민주화운동(五一八民主化運動)의 명칭변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의 공식 명칭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이루어지는 흐름에 따라 몇 차례 바뀌었다. 전두환 정부에서는 ‘광주사태’로, 노태우 정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김영삼 정부에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으로,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서 ‘5·18민주화운동’이 되었다. 사건의 명칭에서 ‘광주’ 이름을 배제한 것은 5·18민주화운동이 지역을 넘어 보다 광범위한 시민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진 민주화운동이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민 혹은 민주화운동 단체, 학계에서는 ‘광주민중항쟁’ 또는 ‘5·18민중항쟁’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재 광주와 전남 일원에는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한 장소로 국립 5·18묘지, 5·18민주공원, 5·18자유공원을 비롯하여 100여개에 이르는 표지석, 안내표시판, 소공원이 조성되었으며, 5·18기념관을 건립하기 위한 활동이 진행되고 있다.
첫댓글 진짜 광주의 지역감정이랑 경상도쪽의 지역감정은 같은 선상에 놓을수가 없는건데 왜 자꾸 광주 물고 늘어지는지 모르겠어;;
막말로 저렇게 힘들게 민주화 안 됐으면 몇몇빼고 다들 거지처럼 살고있었을텐데 뭘 믿고 빨갱이 빨갱이 이러는지
3333이건 지역감정이 아니지ㅠㅠ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인데. 감사는 못할망정, 5.18국립묘지에 한번이라도와서 인사는 못할망정 빨갱이 빨갱이거리다니. 원숭이 욕할 자격없다
저때동원됐던 군인들중에서는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는죄책감에. 미쳐서 지금 정신병원에계신분도 있대....권력으로 희생당한사람들.....
진짜 우리나라 지키려고 희생하신 군인이랑 민주화 운동 해주신 분들한테 제일 감사해야대....
스피드뮤비보고 찾아서 왔다..
진짜 ...;아 말이 안나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