탬파베이 레이스의 마스코트 Raymond
영화 ‘메이저리그’가 21세기에 현실이 돼 돌아왔다. 10년 동안 평균 100패를 하던 팀이 하루 아침에 우승을 다투는 팀으로 변신했다. 그것도 전통 명문 강호들이 즐비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말이다. ‘변신’과 ‘기적’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팀, 바로 탬파베이 레이스(Tampabay Rays)다.
탬파베이 레이스는 미국 플로리다 탬파를 연고로 하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소속 팀이다.
창단
플로리다의 탬파 지역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메이저리그 구단 유치를 위해 노력해왔다. 메이저리그의 구단 확장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이를 유치하기 위해 움직였다. 1993년 리그 확장이 결정됐을 때 플로리다 지역의 마이애미로 결정되면서 탬파베이는 한 번 더 실패했다. 앞서 1988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연고지를 탬파베이로 옮기는 방안을 추진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일리노이주에 새 구장 건설을 요구했고, 이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탬파베이로 연고를 옮길 준비를 끝냈다. 일리노이 주의회는 새 구장 건설과 관련한 표결 마감시한이 지나도록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이를 중계하던 탬파베이 지역 방송국들은 구단 유치를 축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톰슨 주지사는 의사당 시계를 일부러 고장 낸 뒤 의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새 구장 건설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톰슨 주지사는 “의사당 시계가 마감 시간을 넘기지 않았기 때문에 적법하다”고 설명했고, 탬파베이 중계진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1992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인수해 연고를 옮기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구단 매각과 연고 이전이 모두 합의가 된 상태였지만 샌프란시스코 팬들의 반대와 함께 기존 구단주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이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오랜 열망 끝에 드디어 탬파베이에 구단이 생겼다. 오랫동안 탬파베이 지역 메이저리그 구단 유치에 앞장섰던 빈스 나이몰리 구단주는 결국 1995년 메이저리그로부터 구단 유치 승인을 얻어냈다. 메이저리그 구단주 회의에서는 1995년 새로 2개 구단을 승인하면서 리그 확장에 동의했다. 서부지역 애리조나의 다이아몬드백스, 그리고 동부지역 플로리다 탬파베이 지역의 레이스다. 탬파베이는 1998년 메이저리그에서 첫 시즌을 시작했다.
팀 명칭
팀 이름이 탬파베이 데블레이스에서 탬파베이 레이스로 바뀌었다.
창단 당시 명칭은 탬파베이 데블레이스(Devil rays)였다. 사실 플로리다 지역에 ‘탬파베이’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탬파와 세인트피터스버그 인근을 묶어 ‘탬파베이’라고 부른다. ‘탬파베이’는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프로구단들의 이름에만 쓰인다. 데블레이는 가오리의 종류 중 하나인 ‘쥐가오리’로 크기가 5m가 넘는 대형 종이다.
1998년 창단 때부터 탬파베이 데블레이스라는 이름을 쓰다가 구단주가 바뀌고 첫 해였던 2008년부터 팀 이름을 탬파베이 레이스로 바꿨다. 당초 ‘에이시스’, ‘캐넌즈’, ‘스트라이프스’ 등 완전히 다른 이름들이 고려되기도 했지만 연속성 차원에서 ‘레이스’로 바꿨다. 주술적인 차원에서 ‘악마’를 떼냈다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름을 바꾼 뒤 팀 성적 또한 완전히 달라졌다.
역사
• 1기: 잃어버린 10년
탬파베이는 1998년 창단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함께 메이저리그에서 역사가 가장 짧은 구단이지만 그동안 극적인 반전을 겪은 팀이기도 하다.
1998년 창단 때 구단주는 빈스 나이몰리였다. 창단 이전, 탬파베이 구단 유치 때부터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다. 창단 초기에는 적극적인 투자가 이뤄졌지만 재임 중반 이후에는 ‘자린고비’ 형태의 경영으로 바뀌었다.
창단 동기였던 애리조나가 창단 이후 4번째 시즌이었던 2001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과 달리 탬파베이는 초기 적극적인 투자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성적이 나지 않았다. 선수 층이 엷은 신생 팀의 한계일 수도 있지만 효율적인 투자가 이뤄지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대형 유망주들을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하면서 실패한 사례가 늘어났고, 대형 FA 들을 영입했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나 좀처럼 활약을 하지 못했다.
유망주 트레이드 실패의 사례로는 바비 어브레유가 첫 손에 꼽힌다. 탬파베이는 특급 유망주 어브레유를 필라델피아의 케빈 스토커와 트레이드 했지만 스토커는 탬파베이에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반면 어브레유는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했다.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조시 해밀턴이 뒤늦게 텍사스에서 대형 타자로 성장한 것도 탬파베이 창단 초기 겪은 실패 사례 중 하나다. 구단 소속 지역 스카우트의 적극적인 추천에도 불구하고 내야수 치고는 덩치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유망주를 지명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탬파베이가 무시했던 내야수는 앨버트 푸홀스였다.
반면 창단 초기 영입한 웨이드 보그스, 윌슨 알바레스, 호세 칸세코 등은 이름값에 비해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탬파베이는 래리 로스차일드 감독에 이어 2003년에는 명장으로 꼽히는 루 피넬라 감독을 영입했지만 피넬라 감독 또한 탬파베이를 상위권에 올리는데 실패했다.
탬파베이는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시즌 동안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꼴찌에 머물렀다. 단 한 번의 예외 역시 고작 4위였다. 10시즌 모두 90패를 넘겼고, 이 중 3번은 100패를 넘었다. 탬파베이는 10시즌 평균 97.2패를 기록했고, 승률은 4할에 못 미치는 3할 9푼 9리였다.
나이몰리 구단주는 팀 성적 추락과 함께 적자가 계속되자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허리띠를 졸라매기 시작했다. 구장 내 식음료 매출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외부 음식을 먹는 팬들을 적발해낼 정도였다. 나이몰리 구단주는 음식을 빼앗는 대신 들어온 출입구를 물었고, 해당 출입구 담당자를 해고하는 식으로 괴롭혔다. 탬파베이는 성적과 함께 인기도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 2기: 기적과 변신
조 매든(Joe Maddon) 감독
2008년 탬파베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바뀌었고,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자린고비 경영을 하던 빈스 나이몰리 구단주가 결국 구단을 팔았다. 이를 인수한 사람은 월 스트리트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스튜어트 스턴버그 구단주와 앤드류 프리드먼 단장은 모두 증권가 출신이다. 이들은 주식거래 방식과 똑같이 “싸게 사서, 비싸게 판다.”는 원칙으로 팀을 리빌딩 하기 시작했다. 단지 투기가 아니라 선수들의 성장 가능성을 파악하는 여러 가지 방식을 도입했다. 메이저리그 구단 중 가장 많은 통계 전문가를 고용하고 있는 팀이 탬파베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탬파베이는 2008년 구단주가 바뀌었고, 팀 이름과 유니폼, 로고 등을 모두 교체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LA 에인절스 벤치 코치 출신의 조 매든 감독을 영입한 것이었다. 매든 감독은 취임하자마자 ‘9=8’이라고 적힌 셔츠를 나눠줬다. 9명이 힘을 모으면 8팀이 겨루는 포스트시즌에 진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조 매든 감독은 다양한 작전을 구사하고, 통계를 잘 활용하는 감독이었다. 매든 감독은 4점차로 앞선 2사 만루 텍사스 조시 해밀턴을 상대로 고의4구를 지시한 적도 있다. 2000년대 후반 메이저리그에 불기 시작한 세밀한 수비 시프트는 탬파베이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매든 감독은 야구 외적인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끌어들이는데 능했다. 매든 감독은 선수단 미팅에서 알베르 카뮈의 책 내용을 인용하기도 하고, 와인에 대한 소믈리에 수준의 지식으로 선수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탬파베이는 2008년 97승 65패를 기록하며 지구 1위를 차지했다. 비록 월드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에게 패했지만 앞선 10년 동안 평균 97패를 당하던 팀이 단숨에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구단주와 경영진이 바뀐 뒤 적극적인 유망주 육성에 성공한 덕분이다. 이후 탬파베이는 ‘강팀’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8시즌 이후 6시즌 중 3번 더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탬파베이가 속해있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는 ‘죽음의 조’나 다름없다. 메이저리그 최고 인기 팀이자 리그 최고의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 보스턴 레드삭스가 함께 동부지구에 속해 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또한 전통의 강호이고 토론토 블루제이스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탬파베이는 이런 강팀들의 틈바구니에서 창단 후 10시즌 동안 바닥을 깔아줘야만 했다.
하지만 2008년 이후 탬파베이 역시 강팀으로 변모하면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는 ‘지옥의 조’가 돼 버렸다. 2011시즌 탬파베이는 33경기를 남겨두고 와일드카드 1위 보스턴에 8.5경기나 뒤져 있었지만 남은 경기에서 21승 12패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보스턴을 끌어내린 바 있다.
주요선수
에반 롱고리아(Evan Longoria)
•에반 롱고리아: 탬파베이 2기 출범과 함께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3루수로 탬파베이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다. 2008시즌 데뷔한 롱고리아는 그 해 27홈런 85타점, 타율 2할 7푼 2리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따냈다. 롱고리아는 탬파베이의 기적과 함께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3할에 육박하는 타율과 30홈런-100타점이 가능한 타자이면서 3루 수비 능력도 갖춰 골드글러브를 2번(2009, 2010) 수상했다.
대형 스타답게 무시무시한 클러치 능력을 가졌다. 롱고리아는 탬파베이가 ‘미라클 시즌’을 만들었던 2011년, 뉴욕 양키스와의 최종전에서 8회말 따라붙는 결정적 홈런을 때린 데 이어 연장 12회말 끝내기 홈런을 터뜨려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 롱고리아의 2008~2013 포스트시즌 성적은 타율 1할 9푼 1리. 그런데 장타율이 0.470이나 된다. 포스트시즌 30경기에서 홈런을 9개나 때린 덕분이다.
야구 실력만큼 인기도 엄청나다. 롱고리아는 2010시즌 메이저리그 컴퓨터게임 MLB 2K10의 표지 타이틀로 선정됐다. 독학으로 배운 드럼 실력도 수준급이다.
데니스 퀘이드(좌)와 짐 모리스(Jim Morris)(우)
•짐 모리스: 영화 ‘루키’의 실제 주인공이다. 과학교사를 하다가 메이저리그에 도전했고, 결국 빅 리그 마운드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탬파베이에서 중간계투로 2시즌을 뛰었고 21경기에 나와 15이닝 동안 0승 0패, 평균자책 4.80을 기록했다.
단결력
탬파베이의 특징은 메이저리그 팀답지 않게 팀의 단결력, 이른바 팀 워크가 단단하다는데 있다. 마치 한국야구나 일본야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도 있다. 2008 시즌 막판에는 단체로 모히칸 머리를 하기도 했다. 2012시즌을 앞두고는 선두단 전체와 프런트 포함해 70여명이 아예 단체 삭발을 했다. 소아암 환자들을 돕기 위한 이벤트였지만 다른 팀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영구결번
웨이드 보그스(Wade Boggs)
•웨이드 보그스(12번): 웨이브 보그스는 메이저리그 18시즌을 뛰는 동안 보스턴 레드삭스, 뉴욕 양키스 등을 거친 뒤 마지막 2시즌을 탬파베이에서 보냈다. 전형적인 교타자로 타격왕을 5번이나 차지하면서 3,010안타와 통산타율 3할 2푼 8리를 남겼다. 3,000번째 안타를 홈런으로 장식한 2명(또 한 명은 데릭 지터) 중 1명이기도 하다. 탬파베이 창단 첫 홈런을 때린 것도 보그스다. 탬파베이 출신 중 유일한 명예의 전당 선수이기도 하다.
트로피카나 필드
탬파베이 레이스 트로피카나 필드 전경
탬파베이 최고의 골칫거리다. 트로피카나 필드는 탬파베이 지역이 메이저리그 구단 유치에 열을 올리던 1980년대 후반에 지어졌다.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멋진 돔으로 세울 생각만했지 위치를 고려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탬파베이가 2008년 이후 성적이 급상승했음에도 관중 수는 오히려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야구장 쪽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지옥 같은 교통체증을 뚫어야 하기 때문이다. 탬파베이는 이 때문에 보다 접근성이 좋은 곳에 새 구장을 짓기를 원하지만 지자체와의 협의가 원활하지 않은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