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시리즈 교회란 무엇인가? 4-3강
전투하는 교회
오늘은 지난 양평 모임에서 했던 교회론 중에서 ‘전투하는 교회’ 구약 부분을 요약해서 다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전투란 무엇인가? 왜 전투하는 교회인가?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전투하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교회의 모형이지요. 모형으로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전투를 앞당겨 살아낸 이스라엘의 역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교회와 교회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그 십자가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오늘 우리에게 구약 39권을 넘겨주신 거예요. 긴세월 동안 잘 보존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넘겨주셨단 말이에요.
여러분은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첨탑이 있고 지붕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평화의 종소리가 울리는 곳, 또 예배당 안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세상과 구별된 공간.. 그러니까 속세를 떠나 고요한 평화가 있고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떠올리지요. 그래서 유명한 가톨릭 성당에 보면 건축할 때부터 그런 장식물로 치장을 합니다. 성당 창문은 모자이크로 되어 있고 마당에는 자비한 미소의 마리아상이 있고 성당 안은 파이프 오르간에 맞추어 성가가 울려 퍼지는 그런 엄숙한 종교적 분위기가 좋아서 이왕 종교를 가지려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톨릭 성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알고 있는 종교의 세계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그런 종교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다릅니다. 에베소서 6장은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10~20절까지에는 전투 장비를 죽 나열합니다. 소위 말하는 전신갑주지요. 로마서에도 보면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고 합니다. 병기는 사람을 죽이는 무기입니다. 그럼 교회가 살인자들의 모임? 병기는 전부 전투에 쓰이는 것이니까.
이렇게 세상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분위기의 교회와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전혀 다른데, 그 교회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전쟁이고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여주신 영적 전투를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싸울 대상이 없기 때문이에요. 싸울 대상이 없어서 전투도 없습니다. 지상 교회들이 악한 영, 악한 말, 다른 복음에 오염되어서 그들과 한 편이 되어버려서 전투자체가 없는 겁니다. 적이 없단 말이에요. 다른 영, 다른 복음에 대한 분별조차 하지 못하고 관심도 없고 ‘아니오’ 라는 증언이 없는데 무슨 전투가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봅니다. 한 마디로 세상과의 구별이 없어진 교회, 진리의 경계선이 사라진 교회, 십자가를 치워버린 교회에는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그런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사교모임일 뿐입니다. 친목계
그래서 그런 교회는 수천, 수만이 모여도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원수 된 종교인들의 집단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사단의 회당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바벨론이에요. 구약 시날의 바벨탑이 온 세상으로 흩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지붕에 십자가가 꽂혀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지상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랬고 예수님이 이 땅을 다녀가신 후에 세워진 이천년 교회 역사 내내 그래왔습니다.
그럼 그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까? 그렇죠. 여러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성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역사가 있고 교회의 역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위해서 어둠의 세상 역사가 세상 끝 날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양평 모임에서는 세상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과 영광을 나누었습니다.
(민수기 1장)
3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진영별로 계수하되
민수기는 제목이 Numbers, ‘수를 세다’라는 뜻입니다. 민수기는 처음 시작부터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군사를 세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진영은 지파입니다. 그러니까 지파별로 수를 세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이렇게 군사로 계수 하십니까?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으면 되었지 왜 다시 전장으로 몰아넣으시냐고요 애굽에서 구원하셨으면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보호하시면서 약속의 땅에 데리고 가시면 되는데 왜 굳이 전장으로 밀어 넣으시는가 하는 것이 민수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전투를 해야 하는 적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지금부터 그것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투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하시는 여호와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지켜 가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전투의 목적이에요. 하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은 왜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신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 성도의 성도됨의 정체성을 그들 스스로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광야 사십 년 동안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언약 공동체, 교회라고 하는 성도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는 사실,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사실이 민수기의 핵심 내용입니다.
(출애굽기 2장)
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무엇 때문에 그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셨다고 합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읽은 민수기 1장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지파들 가운데 군사로 불러내시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한 지파가 빠집니다. 계수를 하지 않아요.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것이 이스라엘이 전투를 해야 할 이유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의 전쟁은 지상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가나안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 아니란 말이지요. 그럼 왜 전쟁을 합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정체성, 즉 이스라엘의 거룩을 보여주기 위한 전쟁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빠집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는 성막 언약궤와 희생 제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거룩을 유지해야 하는 일을 담당하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적은 단순히 이방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이스라엘의 거룩을 모르는 자는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적이 됩니다.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교회의 적은 교회인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전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이스라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배우게 하시려고 그들을 전투에 밀어 넣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는 이스라엘,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 어느 민족보다도 작은 이스라엘에 자기 이름을 두신 겁니다. 그들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오직 언약궤 위에 부어지는 희생제물의 피에 있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들을 여호와의 군사로 전장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의 전쟁이 하나님의 붙이심의 전쟁, 다시 말하면 그들의 전투 능력이나 그들의 무기나 그들의 용감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나타내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전쟁에 불려나온 군사임을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난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면 약속에 전능하신 여호와, 자기 이름을 위해서 전쟁하시는 여호와의 전쟁에 관한 기록이 어디에 가장 먼저 나옵니까?
(창세기 3장)
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서로 원수인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싸움입니다. 뱀의 후손과 싸우시는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게 거룩의 전쟁, 언약의 전쟁, 여호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약속의 전쟁이에요.
(마태복음 12장)
22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26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 이 전투에 마귀의 세간으로 붙들린 죄인들이 무슨 힘이 있어서 전쟁에 도움이 되겠습니까?
에베소서 4장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시편 68편을 인용한 말씀이에요.
(시편 68편)
18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들을 취하시고 선물들을 사람들에게서 받으시며 반역자들로부터도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로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여호와의 전쟁에 불려나온 성도들의 찬송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악한 영과의 전투를 통해서 배워가는 사람들을 전투하는 교회, 이스라엘의 병기 든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예 그런 싸움을 모르고 악한 영, 더러운 말, 거짓된 말에 대한 분별이 없으면 그런 전투 자체가 필요 없겠죠? 이 말은 전쟁하시는 여호와, 언약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를 믿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전쟁은 만만한 전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쟁도 아니에요.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군사들의 행군 대열에서부터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와요. 우리에게 왜 이러십니까?.. 왜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이렇게 개고생을 시키십니까?..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들을 하나님의 전쟁의 군사로 행군하게 하시는데, 그 행군의 대열에서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건만 하나님의 인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불평불만을 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서 그들이 불살라집니다. 하나님의 동행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성이 낱낱이 폭로되고 날마다 불살라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군사로 불려나온 우리들의 실존입니다.
(민수기 11장)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적군에게 불이 떨어져 불살라진다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군사로 불려나온 백성들에게 불이 떨어졌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군사도 불평불만 좀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전장에 불려나온 자들이 그 전쟁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 받아야 하는 불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그런 겁니다. 불세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군사들, 전쟁에 불려나온 성도들이 가야하는 최종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이 불세례였잖아요. 내가 받을 세례를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가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를 받으셨잖아요. 여러분도 같은 세례를 다 받아야 합니다. 불세례를 받으신 골고다의 십자가, 피조물인 인간들에 의해서 묵묵히 피 흘리고 계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끌려가는 것이 복음의 군사들이며 하나나님의 전쟁의 목적입니다. 왜? 불평불만밖에 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입을 가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우리 자아의 죽음인 거에요.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설명하면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 했습니다. 나의 육적 자아, 불평불만만 터져 나오는 육의 몸이 불 심판으로 정결케 되는 그 자리를 가르치시려고 예수님이 불세례를 먼저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도 그 세례를 동일하게 받게 됩니다.
그런데 민수기에서는 그 여호와의 불이 모세의 중보 기도로 꺼졌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의 교회됨 역시 하나님의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로 인함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성경 지식이 많고 기도 많이 해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내용들 모두가 우리의 모습인 겁니다. 이들은 우리가 받을 것들을 앞당겨 살아낸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시는 주님이 계심으로 해서 기도할 바 조차 모르는 우리가 감히 영광스러운 교회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로 하여금 또 세상을 위한 중보의 기능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입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는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교회로 모였다는 말은 그냥 단순히 어느 한 날을 정해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 읽는 게 아닙니다. 교회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는 유일하게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중보의 기능을 합니다.
(민수기 11장)
25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
26 그 기명된 자 중 엘닷이라 하는 자와 메닷이라 하는 자 두 사람이 진영에 머물고 장막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나 그들에게도 영이 임하였으므로 진영에서 예언한지라
27 한 소년이 달려와서 모세에게 전하여 이르되 엘닷과 메닷이 진중에서 예언하나이다 하매
28 택한 자 중 한 사람 곧 모세를 섬기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말하여 이르되 내 주 모세여 그들을 말리소서
29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두고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의 영을 그의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가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모든 백성에게 신을 주사 그들로 하여금 선지자가 되게 하신다.. 그러니까 교회는 모세처럼 어떤 한 지도자가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심을 알게 하는 성신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죄인들에게 그냥 선물로 주어지는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이스라엘은 광야의 전투 속에서 배워야 하는 겁니다. 그 가장 표면적인 사건이 13장에 나오는 정탐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가나안 정탐을 위해 보낸 사건입니다. 광야의 거지 떼들 눈에 가나안 땅은 정복 불가능한 땅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민 13:33)라고 합니다. 가나안 땅에는 거인들이 살고 있어서 자기들과는 아예 게임이 되지 않는 군사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보낸 정탐꾼들이 완전히 기가 죽고 겁을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왜 모세를 통해서 정탐꾼을 보내셨을까요? 다 겁을 먹었지만 그 중 한 사람, 갈렙만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알았어요.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하나님, 즉 가나안 땅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땅임을 알았어요. 바꾸어 말하면 약속의 땅은 용감하게 잘 싸워서 들어갈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믿는 자들의 땅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여호와가 동행하심을 알았습니다.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여호와를 믿는 것이 무엇임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정탐꾼 사건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보이는 현실에 주눅이 들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여호와, 자기 약속에 전능하신 여호와를 보지 못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출애굽한 1세대가 광야에서 모두 죽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와 갈렙을 앞세운 2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죠.
이렇게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곳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그 나라를 갈 수도 없고 또 바라지도 않습니다. 죄인들은 절대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 나라, 약속으로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구원의 근거는 약속에 성실하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라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약속대로 창세전에 죽임당한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근거가 되고 그 언약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우리 구원의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게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세상이 다 싫어하죠. 모든 인간들은 훈련 열심히 하고 칼 잘 갈아서 적군을 쳐부수고 그 땅을 차지하는 이런 구원을 원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이 알았던 약속의 땅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으로만,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들어갈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이 구원을 설명합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들은 신약의 사도들이 달아놓은 해석을 따라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게 바로 여호와의 전쟁으로 우리가 거저 선물로 받게 된 구원,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시청각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이 방금 읽은 민수기의 사건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기능적인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천국이란 내가 사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를 위한 구원이고 주로 말미암은 구원이고 주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가 자랑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그 십자가의 승리에 나의 땀을 한 방울이라고 보태려고 하는 것이 우리 속에 감춰진 종교성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우리 죄인들의 탐심입니다. 내 열심과 내 노력과 내 지식과 내 기도와 내 헌신을 통해서라도 내 구원으로 내가 소유하려고 합니다. 이게 오늘날 세상 교회요 대한 유대교입니다.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고 은혜의 복음의 영광을 가리고 모독하는 사탄의 일꾼이 되어버린 세상 종교인들입니다. 이것을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앞당겨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의 하나님, 약속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천사의 심판에서 넘어가게 했음을 잊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눈으로 보자면 기가 막힌 일이잖아요. 수많은 기적들을 보았고 유월절 밤에는 애굽의 많은 장자들이 죽어가는 사건 현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기억하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여서 말씀을 나누다가 나가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잊으면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과 근거를 나에게서 찾도록 속이고 강요하는 마귀의 궤계가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끊임없이 깨어라, 기도하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민수기 14장)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누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으나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12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
전쟁하시는 여호와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나안이 이스라엘 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그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정복하려 하고 자신들의 소유로 가지려 한 자들은 그 믿음 없음으로 인해서 패망하게 됩니다.
(민수기 14장)
39 모세가 이 말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알리매 백성이 크게 슬퍼하여
40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
41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44 그들이 그래도 산 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45 아말렉인과 산간지대에 거주하는 가나안인이 내려와 그들을 무찌르고 호르마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전쟁은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이에요.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는 오직 주님의 죽기까지의 순종이지 우리는 그 십자가에 어떤 협조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모르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처럼 반드시 패망하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교회가 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서울 어떤 교회의 청년들이 절에 가서 땅 밟기 하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법당 안에 들어가서 찬송도 부르고 말입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여호와의 전쟁이 무엇인지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방금 읽은 구절처럼 법궤가 움직이지도 않았건만 앞장서서 전장에서 나대는 자들은 반드시 멸망을 당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법궤와 희생제사가 있는 이유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에 관심이 있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실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의 거룩한 이스라엘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고 있는 이스라엘임을 알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이스라엘,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피로 사신 자들, 거룩한 교회, 예수의 이름 앞에서 무릎 꿇는 자들로서의 교회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이 작동하는 공동체로서 어린양의 피 뿌림을 입은 거룩한 무리들이 바로 그 약속의 땅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나안은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속 확인시키는 용도로만 주어진 땅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땅에 거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치는 용도로서의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이 그 약속의 실현을 보여주시는 땅,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율법, 안식일, 안식년, 희년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용도로서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땅의 안식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칠십년간 바벨론 포로로 쫓아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자기 약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가나안 땅이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포로 됨의 경험,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는 심판의 경험을 함유하는 사람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여러분 교회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심판의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광야의 죽음과 이방의 포로 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선택하신 것도 광야 사십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그 중보의 기능, 즉 오실 그리스도의 중보를 앞당겨서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지 단순히 이스라엘 집단의 지도자로 세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살게 되는 이스라엘이었고 하나님의 언약이 유지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라는 구원의 메커니즘을 늘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한 모세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모세 자신부터 심판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속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목사, 장로들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전쟁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신명기 20장)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2 너희가 싸울 곳에 가까이 가면 제사장은 백성에게 나아가서 고하여 그들에게
3 말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
4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전쟁터로 내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마음에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며 떨지 말며 그들로 말미암아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두려워하고 떨 수밖에 없는 대적들을 붙여놓으시고 놀라지 말라고 하시면 어쩌라는 겁니까? 이런 것 없이 아예 서로 사이좋게 살도록 하시면 안 됩니까? 이게 오늘날 세상 정신이잖아요. 사랑의 하나님이 아예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리 하실 수 있잖아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구원이나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신약으로 말하자면 그냥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 세상교회의 존재 이유는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서로 사랑하기,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하나 됨,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재통일 됨, 새 창조..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교회를 통해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대한 심판, 악에 대한 심판의 근거로 삼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도구로서의 여러분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구원에는 심판이 먼저 따라야 합니다. 심판을 모르는 구원은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겠습니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십자가의 심판을 통해서 구원을 알게 하시느냐는 말입니다. 현대 세상 기독교가 잘못 가고 있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오해한 것처럼 오늘의 기독교도 똑같이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으로만 알지 왜 심판이 있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중심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시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구원과 심판을 앞당겨서 살아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만, 반드시 예수와 같은 사람, 예수와 관계를 가진 사람들만 약속의 땅에 들여보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선언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영생은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언약의 피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 오늘의 기독교는 다 가짜라는 겁니다.
신명기 본문 말씀대로 대제사장의 말씀을 믿는 자들, 교회는 그 약속의 말씀에 붙들린 복음의 군사들입니다. 자기 능력이나 됨됨이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침투해들어와서 약속에 장악된 자들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모두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이에요.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위해서 교회는 전투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시는 전쟁에 투입된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나가는 군사들이 자신들은 모두 하나님의 편이기 때문에 승리는 당연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만들어내시는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주의 이름과 주의 영광을 위한 승리임을 알게 된 자들을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 자체가 세상과 세상 힘을 의지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여호와를 진실로 의지하는 자들...
(이사야 10장)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이스라엘 주변에 이스라엘을 치는 자들이 항상 존재했던 이유가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들에게 깨지고 박살이 났을 때 진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란 말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 야곱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만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부 멸절당해 마땅한 야곱 같은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야곱, 환도뼈가 깨져서 절뚝거리면서 지팡이만을 의지하는 야곱을 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작정된 파멸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선택만으로 남기신 야곱..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야곱의 하나님이시고 그들만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해 있는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도 이 종말의 거센 바람 속에서, 치열한 전투 속에서 십자가의 승리를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교회, 다시 말하면 오늘도 나는 이렇게 깨지고 비참하게 짓밟히지만, 이 전쟁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에 있음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만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임을 배우게 됩니다.
(역대하 20장)
15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16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17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18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19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하잖아요. 이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이 이기라고 붙이신 전쟁이 아니고 그들의 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전쟁으로 자신들의 약함과 불가능함이 드러나고 또 처참한 패배를 통해서 마침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다른 현실에 눈이 열립니다. 살아계신 주 하나님께서 다 이루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어린양의 피, 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한 분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가 계심을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불가능한 전쟁,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적 앞에서 찬송할 수 있는 이스라엘.. 그래서 여호와의 신이 임한 여호사밧이 찬양대를 만듭니다.
(역대하 20장)
20 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23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이게 하나님의 전쟁 방식이에요. 아직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이미 승전의 노래를 부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쟁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성도들의 모든 삶 자체가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미 완료되고 확정된 묵시의 현실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펼쳐지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요 교회의 전투요 성도들의 현실입니다.
(신명기 20장)
1 네가 나가서 적군과 싸우려 할 때에 말과 병거와 백성이 너보다 많음을 볼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하여 내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어떤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 땅에서 너를 인도해내신 하나님... 하나님은 그렇게 어린양의 피로 구원해내신 유월절 사건을 역사 내내 이스라엘과 우리 교회에게 재연시키십니다. 다시 말하면 피가 없는 거룩이 없음을, 생명은 오직 피에 있음을 반복해서 재생시키심으로, 그러한 사건을 발생시켜 주심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죄 없이 희생당하신 어린양의 공로를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다 죽어야 하는 죄인들을 피로 덮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모든 성도는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매일 죽어나가는 전투를 통해서 배우고 고백하고 찬송하게 됩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어떤 죄인도 어린양의 피로만 구원 받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무능하기 짝이 없고 경건치도 않은 자들로 십자가의 승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사기에 나오는 겁 많고 무능한 사사들에게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해서 하나님의 붙이심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그 나라에 가서 한 번 물어보세요. 너희들은 어떻게 적들과 싸워서 이겼느냐고.. 너희들 믿음이 정말 좋더라.. 고 말을 붙이면 그들이 뭐라고 답할까요? 아니거든.. 내가 한 게 아니거든.. 그냥 주께서 붙여주신 거야.. 또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성 전투를 보세요. 이스라엘이 한 것은 나팔 불고 성을 돈 것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전쟁의 승리는 아무 한 것 없이 공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 우리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붙이심의 전쟁, 하나님의 전쟁 방식입니다.
자 그럼 이렇게 전투하는 교회인 우리가 전쟁에서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우리가 할 일은 잘 죽는 겁니다. 잘 죽으시면 돼요. 큰 성 바벨론에서 불려 나와서 큰 성 길가에 세워진 두 증인이 무엇을 했습니까? 큰 성을 향해서 증언을 한 후에 그 증언으로 인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죽임 당함,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우리를 합류시키시는 죽음, 창세전에 정하신 아들의 죽음 안으로 우리를 합류시켜서 살려내시는 것까지가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은 우리를 죽이시는 전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적이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것처럼 십자가의 원수 된 우리 안에 들어있는 죄성, 하나님을 그렇게 싫어하고 극구 대적하는 선악과의 죄성을 날마다 폭로당하면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의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게 되는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승리의 영광을 나누어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이기는 승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로 못 박히는 죽음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직도 인생을 살고 있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그런 겁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잖아요. 모든 교회가 바울을 버리고 떠났고 자신은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관제로 부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로마 감옥에서도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쇠사슬에 묶인 것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히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복음의 사신으로 감옥에 가두어버리셨다고... 이 바울이 바로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된 하나님의 군사인 것입니다.
우리의 전쟁은 오직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찬송하는 전투입니다. 그리고 그 전투를 통해서 세상에 맞아죽는 것이 우리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존재 자체를 세상의 위기라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으로 인해서 세상은 종말의 심판을 감지하게 되고 또 이 세상은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여러분들의 별세의 날입니다. 우리 모두 그 전쟁에서, 이미 확정된 승리의 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영광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약하고 겁 많고 무능한 우리를 하나님의 전쟁에 밀어 넣으시고 주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하는 싸움이 아니고 내가 차지하는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인정하기까지 많은 실수와 실패가 있었기에 이제 주님의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는 순종과 경건함이 우리 모든 교회에게 있게 하옵소서. 세상의 찌기로, 미말에 끌려가는 패잔병으로 살아갈지라도 주님과 함께할 그 영생의 소망으로 그 믿음 안에서 찬송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