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가 화제가 되면서 영화 터미네이터에 나왔던 스카이넷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과학과 기계문명의 발달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제 인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중요한 시기에 이르렀다.
1) 과학의 발전은 정녕 어디까지 갈 것이며, 인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2) 과학의 발전으로 인한 지구환경의 파괴와 문명의 위기는 어떤 상태인가
3) 과학발전의 주체인 인간은 우주 안에서 어떤 존재이며, 우주의 주인은 진정 누구인가
인간은 삶을 편리하고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근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인간적 노력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삶도 놀라운 진보를 거듭했다. 불과 2~3백 년 전까지만 해도 30~40세였던 인간의 평균수명은 80세에 이르렀고, 백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에 불과했던 인간의 우주생활이 현실로 다가왔다. 자연의 정복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와 과학기술의 활용으로 인한 문명의 효율성은 극대화되고 있다.
이제는 과학의 발전과 물질적 풍요가 오히려 인류와 인류가 살아가는 기반인 지구환경에 재앙으로 다가오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때문에 인간은 과학기술 발전의 의미와 위기의 상태를 점검해야 한다. 나아가 우주 안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이며, 이 우주의 주인은 진정 누구인지를 따져야 한다. 인류는 현대문명의 종말은 물론 지구환경 전체의 침몰과 붕괴를 막을 수 있는 지혜를 찾아내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과학기술은 인류 최고의 발명이다. 또한 그 위대함은 지적 발전의 차원에만 있지 않다. 전 시대와 단순 비교해도 과학은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변화를 몰고 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과학기술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수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경제적 풍요, 빠른 정보와 의사소통의 기술, 건강의 개선, 수명의 연장 등을 통해서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편의와 복지가 인류 전체에게 ‘축복’과 ‘선물’처럼 다가왔다.
희망적으로만 본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더욱 발전된 과학기술에 의해서 값싼 청정에너지, 식품, 물의 무제한 생산이 가능해지고, 인간은 더 건강하게 무병장수하며 평균수명을 최대한 끌어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과학의 발전은 곧 기술의 발전이다. 기술은 인간이 생물학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짜낸 행동의 실용적 절차이거나 만들어낸 연장으로서의 제품들이다. 근대 과학지식의 탄생 이래 기술은 규모와 기능 면에서 도약을 거듭했다.
또 기술을 산업에 적용함으로써 인류 사회는 수공업적 농업사회에서 대규모 생산기술 중심의 근대적 산업사회로 눈부시게 발전했다. 고대나 중세에 비해서 현대의 인류는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생물학적으로 장수하게 되었으므로 과학기술의 발전은 찬양받기에 마땅하다.
과학은 예술의 발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0세기의 새로운 발명이라 할 영화예술과 근래에 급속히 발전하는 컴퓨터그래픽 영역에서 그 사실은 뚜렷해진다. 과학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오늘날의 사이버·디지털 과학기술 시대에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현대인들의 일상적인 문화영역까지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 수준이다.
과학이 예술문화에 미친 외형적 혁명은 양적으로는 문화의 대중화와 민주화로 나타난다. 급속히 발달한 정보전달 기술로 인해 문화는 더 이상 소수계층의 특권이 아니다. 대중들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화를 쉽게 접하고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자신들이 원하는 음악, 미술, 연극, 영화를 전자장치, 전자악기, 비디오, 오디오, TV, 모바일폰 등의 고도로 발달된 전자통신 매체를 통해서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즐길 수 있다. 문화의 민주화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과학은 인류의 발전 욕구와 지적 성취 욕구로 인해 앞으로도 끝없이 발전해 나갈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편리함과 속도에 익숙하게 만들었고, 인간은 이것을 포기하지 못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완성 단계가 없는 지속적 추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과학은 이미 인간을 거의 모든 능력에서 앞서고 있다. 특히 20세기 이후 정보화 사회로 들어오면서 개별적 인간의 능력은 문화생활 전 분야에 걸쳐 과학기술의 힘에 절대적으로 뒤지고 있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진 영역마저 과학기술에 지배당하고 있다.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세계적 바둑 천재 이세돌이 패배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징표일 따름이다.
이제 과학은 신이나 창조주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복제나 생명탄생까지 넘보고 있다. 인간복제를 통해 병든 장기를 대체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한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제어 영역을 넘어서려 할 뿐 아니라, 인류문명의 파괴는 물론 지구환경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무너트릴 수 있는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우리는 과학기술의 영속적 발전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기초적인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현재 과학기술이 제공하는 혜택을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지속적으로 누리려고 들 때 자연고갈, 환경오염 등의 부정적 문제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아울러 과학기술의 무제한적인 발달은 머지않은 미래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몰고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지금까지 드러난 핵무기나 원자력 발전소로 인한 전 인류적 재앙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때문에 과학기술의 발전은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고 맹목적으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
지구 환경적인 면에서 보자면 수십억 년 동안 북극과 남극을 덮고 있던 빙산이 녹아내리고 있어서 20년 후에는 심각한 위기가 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생태계가 파괴되면 북극과 남극의 동식물이 멸종하여 죽음의 세계로 변하고, 해빙으로 해수면이 상승하고 많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상상하기조차 힘든 혹독한 기후 재앙이 올 수도 있다.
근자에는 히말라야 산맥을 덮고 있는 만년설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어, 언젠가는 그 산맥 밑에서 농사가 불가능하고 식수마저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인도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갠지스 강의 물도 점차 말라 없어지고, 인도 대륙 전체의 농사, 산업, 생태계, 인간의 주거 자체에 미치게 될 악영향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모든 현상은 자연개발과 산업화의 결과이며, 그 배후에 과학기술이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과학기술은 그 어느 때, 그 어느 것보다 더 기피와 제거의 대상으로 부각될지도 모른다. 과학기술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생태계 파괴나 환경문제는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는 맞을 수 있다. 그러나 과학기술 자체가 자동적으로 생태계와 환경의 파괴를 동반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오늘의 생태계와 환경문제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잘못 활용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생태계나 환경문제도 결국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과학기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풀어갈 수가 없다. 문제의 해결은 인간의 지혜와 의지에 달려 있다. 지금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적 사고와 기술에 대한 감상적 규탄과 거부가 아니다.
근시안적이 아니라 원시안적인 차원에서, 기술적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에서, 국가 경쟁력만이 아니라 지구적 협력의 차원에서, 물질적 차원만이 아니라 정신 및 윤리적 차원에서 사유하고 행동하는 성숙한 철학적 안목이 중요하다. 인문학은 과학을 알아야 하고, 인문학적 가치인식과 소양이 과학자, 기업인, 행정가 및 정치가에게도 갖추어지고 강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식으로서의 과학은 잠재적인 힘이다. 지난 두 세기 동안 과학적 인식양식이 다른 인식양식을 제치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과학이 발휘할 수 있었던 힘에 근거한다. 힘 자체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선악은 인간이 그것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아편은 인간의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지만 중독자로 만들 수 있고, 다이너마이트나 원자력은 유익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건설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대량학살이라는 파괴적 도구로도 악용될 수 있다.
과학이라는 지식이 갖고 있는 잠재력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생태계의 파괴와 자연훼손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생태계의 보존과 자연보호를 위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오늘 우리의 삶, 우리가 대처해야 할 문명의 위기는 과학적 인식의 틀이 제외된 상태에서는 극복이 불가능하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생산, 대기와 수질오염의 해결, 파괴되는 생태계의 보존은 기도와 불공, 무술이나 점술, 역학이나 풍수지리학으로는 결코 불가능하다.
과학의 문제는 곧 인간의 문제이며, 과학과 자연의 관계는 곧 인간과 자연의 관계다. 생태계 파괴, 자연훼손이 초래한 위기의 책임은 과학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과학을 잘못 활용한 인간에게 있으며, 과학은 아직도 인간·생태계·자연을 위해 잘 활용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은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잠재적 힘이다. 오늘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으며,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과 의무, 책임을 갖고 있는 존재 또한 오직 인간뿐이다.
책임은 곧 자율적 선택을 의미한다. 생태계의 유지와 자연보호, 문명의 장래와 인류의 생존, 이 모든 것의 운명은 과학이 아니라 인간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 있다. 선택은 언제나 가치선택이며, 가치선택은 도박이 아니라 냉정한 현실인식을 전제로 한다. 여기서 현실이란 자연과 인간 자신, 그리고 그것들 간의 관계에 대한 객관적 조건을 뜻한다. 이런 뜻의 현실인식에 기초한 합리적인 가치선택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새벽을 열 수 있는 패러다임이 될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은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시각, 다시 말해 ‘세계관’의 혁명적 전환을 통해서만 만들어지고 고안될 수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청하는 세계관의 전환은 이원론적 형이상학에서 일원론적 형이상학으로의 전환과, 인간중심적 가치관에서 자연중심적 가치관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그에 앞서 미시적인 시각에서 거시적인 시각으로, 근시적인 시각에서 원시적인 시각으로, 부분적인 시각에서 총괄적인 시각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질이라는 외면적 가치를 강조하고 물질적 풍요만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정치경제에 제동을 걸고, 대신 내면적 가치를 강조하고 정신적 풍요를 경험케 하는 새로운 정치·경제이념이 고안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전환은 자연에 대한 대립적이고 도구적인 태도를 지닌 서양적 세계관에서, 자연 친화적이고 조화로운 태도를 지닌 동양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뜻한다. 그러나 일부에서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동양적 사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는 감상적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장사상의 ‘도’나 ‘무위’, 불교의 ‘무’와 ‘해탈’만으로는 공허하다.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으로서의 동양사상은 서양이 발명한 과학이라는 위대한 지적·기술적 유산을 스스로 소화하여 통합할 때에만 비로소 공허한 주장으로 남지 않고, 내용 있는 실천적 도구로서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인류문명의 큰 맥락에서 볼 때 환경과 자연파괴의 문제는 인류가 대처해야 할 가장 급하고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및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혁명적 전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사유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결코 지구와 우주의 주인이 아니고 공존해야 할 일부일 뿐이다.”
첫댓글 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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