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에게로 걸어 들어가네 외 1편
박현솔
저 빛깔을 어쩌면 좋은가, 두 팔로 품어
물들고 싶네, 맨발의 설렘으로 다가간 언덕 위에
오랜 약속처럼 도화나무가 있고
전하지 못한 안부들이 도화 꽃으로 만발하네
청춘은 불안하고 무모했으며 위험천만이었다
먼데서 꼬드기던 소리들은 오간데 없고
어떤 향기에는 슬쩍 눈 감을 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도화나무 아래에서 뛰어놀고
강아지들도 꽃잎을 따라다니느라 분주하다
도화 꽃잎들 분분히 날리는 오후의 경사를
꽃물 든 손을 맞잡고 그와 꽃그늘을 거닌다
도화가 우리에게, 우리가 도화에게로 걸어가네
폭풍을 견딘 연분홍 꽃잎들이 황홀하고 향기롭다
도화가지 늘어진 자리에 흘러내리는 꽃물이
두 눈에 차고 넘쳐서 오후의 아이들을 물들이고,
강아지를 물들이고, 경사진 시간의 언덕을 물들이고,
손을 맞잡은 우리들의 맹세를 물들이네.
커피 카피 코피 카피 커피
나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내 알맹이엔 고산지대 아이들의 커다란 눈동자가 들어 있어. 바람에 검게 그을린 살갗. 살짝 삐져나온 덧니, 신이 보낸 선물인 듯 나를 어루만지는 손길. 겉과 속이 다른 것과는 기원전부터 악연이지. 차갑게 식어버린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질긴 인연을 이어줬다고 원망하지 말 것. 추파는 늘 던져지는 것이니.
내 이름을 매번 다르게 부르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나는 본질인데 나를 가리키는 기호는 수십 개. 누가 나를 그런 기호들로 부르라고 했나. 나의 근원은 커피나무이고 나는 커피, 카피 아니고 커피. 내 인생을 카피한 놈들. 수많은 이름들로 나를 포장하고 그 대가로 동전 몇 닢을 던져준 인간들. 나를 씻기고 말린 고산지대의 아이들은 아직 글자도 모르는 까막눈인데…….
밤마다 나를 부르며 잠을 좇아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싹싹 빌어놓고선 눈 밑의 다크서클이 나 때문이라니. 잠을 못 자서 그렇게 됐다니. 왜 그리 변덕이 심한가. 종착역은 아직 멀었고 생의 한도가 한참이나 남았는데 나를 그렇게 오남용하다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다니. 끝없는 욕망들이 하늘에 구멍을 낼 것 같아. 설마 맨 정신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믿는 거야. 독성이 너를 마비시키는 걸 어떻게 기록해둘까. 영혼을 다독이는 걸 더는 미루지 마. 각성은 또 다른 환각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니까.
예전엔 해충들 때문에 생존을 염려해야 했지. 이제 나를 먹어치우는 건 영리한 영장류들. 인간은 순환을 모르는 종족들이야. 남김없이 따고 남김없이 털어가지. 고산지대 아이들의 눈물까지 쏙 빼가는 몰인정한 부류들. 겉으로 사랑을 얘기하고 속으론 남의 걸 빼앗는 그 이중성은 어디서 오는가. 끝없는 욕망에 고산지대 아이들의 손목이 말라간다.
저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 인간이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군. 승진 시험에서 미끄러지면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 거라나. 그 엉성한 사다리에서 한 번 미끄러지는 게 뭐 대수라고. 염소 떼를 몰고 높은 바위에 올라가는 고산지대 아이들은 매번 미끄러져도 살아난 것에 감사하는데. 남보다 높이 올라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그림자들…….
▪박현솔
제주 출생.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2001년 《현대시》 신인상 등단.
시집으로 <달의 영토> <해바라기 신화>가 있음.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현재 아주대 출강.
전자주소 : phspoe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