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의 표제에 관한 연구*
이 건 청**
<Abstract>
Lee, Geon-cheong. 2001. A Study on the Title of Korean Poetry. This dissertation attempts to investigate how the title of Korean Poetry is titled and what is the good way to title. Consolidating with Poetic elements and creating a new meaning, a title creates Poetic values and magnifies them.
Though a title often becomes fatal factor that decides the success or failure of the poem, hardly has it been studied seriously. This dissertation chose the collective poetic book, ≪Carnival of invisible things≫(Osungmunwha, 1999) as a analytical text. This book has 311 self-selected poems of 311 members of Korea Poet Association. Analysing these poems, this dissertation will investigate the tradition of titling of Korean Poetry and suggest the good way to title.
I. 서론
시의 표제는 시가 지니는 의미나 정서, 상상력은 물론 한 편의 시가 포괄하는 총체적 가치를 지시하는 기호이다. 그러므로, 표제는 단순히 특정 작품을 지시하는 이름으로 작품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제반 요소들과 상승적으로 결합하면서 작품을 규정하고, 의미론적 변용을 통해 시적 가치를 확대하며 창조한다. 그러므로, 시의 표제가 지니는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한 편의 시에 어떤 표제가 붙었느냐에 따라 한 편의 시가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사실은 실제로 시를 쓰는 입장에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에 표제를 붙이는 일은 실제로 시창작에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이고, 때로는 마땅한 표제를 찾지 못해 오랜 번민을 겪는 일도 많다. 가령, “흰 수염을 단 노인이/ 허 허 웃고 있다”는 글에 ‘노인’이라는 제목을 붙일 경우와 ‘옥수수’라는 제목을 붙일 경우(박목월, ≪문장의 기술≫(현암사, 1972)를 상정해보면 그런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시의 표제 붙이기에 대한 구체적 자각은 매우 미미한 실정이다. 그리고, 시의 표제에 대한 이론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실제로, 국내에서 간행된 ≪시창작법≫류의 저서나 ≪시론≫의 어디에도 시의 표제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현상은 시의 표제를 그냥 ‘작품의 이름’ 정도로 이해하는 데서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연구자는 오늘날, 한국 현대시의 표제 붙이기의 실태를 알아보고 바람직한 표제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아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시의 표제 붙이기 관행을 알아보고 어느 점이 잘못되었으며, 어느 점이 잘되어 있는가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자는 우선 한국 현대시의 표제 붙이기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의 회원 사화집을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연구자가 대상으로 선정한 텍스트는 한국시인협회 대표 시선집 ≪보이지 않는 것들의 축제≫(오성문화, 1999)이다. 이 시집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원 311명이 각자 한 편씩 자선한 31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연구자는 이 텍스트에 나타난 한국시인들의 표제 붙이기의 관행들을 살펴보고, 이런 분석을 통해 바람직한 표제 붙이기의 방법도 제시해보려 한다.
II. 표제의 이론
이희승 편 ≪국어대사전≫(민중서관))의 '표제' 항목에는 ‘1. 서책의 겉에 쓰인 그 책의 이름 2. 연설 담화 등의 제목 3. 연극 등의 제목 4. 서적, 장부 중의 항목을 찾기 편리하도록 베푼 항목 5. 신문 잡지의 기사의 제목’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제목’ 항목에는 ‘1. 겉장에 쓴 책의 이름 2. 글제’로 설명되어 있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표제’와 ‘제목’이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어에서 ‘표제’에 해당될 수 있는 말들로 title, headline, label과 같은 말들을 들 수 있겠는데 옥스퍼트 영어사전의 ‘title’ 항목에는 ‘name of book, poem, picture, ect.’로 간략히 나와 있다. 즉, ‘책, 시, 그림’ 등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Britannica World Language dictionary Edition of Funk & Wagnalls Standard에는 headline ‘신문이나 신문기사의 앞에 내용을 가리키거나 요약하기 위해 굵은 활자로 붙인 낱말이나 낱말군’, title ‘책이나 법률문서의 이름을 나타내는 제명, 일상적 의미의 제목’, label ‘어떤 물건의 특성이나 소유자 등을 나타내기 위해 그 물건에 붙인 종이조각'과 같은 설명들이 나와 있다. 물론 이런 설명들은 ‘표제’나 ‘제목’에 대한 문학적, 시적 특질과는 무관한 규정들일 뿐이다.
연구자는 ‘표제’와 ‘제목’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표제’로 통일해 쓰기로 한다. 그리고, ‘표제’의 특성과 역할을 구명하기 위하여 '구조'Structure의 이론을 원용하고자 한다. ‘표제’ 역시 한 편의 시를 이루는 ‘구조’에 포함되는 것이며 시의 ‘구조’에 지대한 힘을 미치는 요소라고 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조 없이 시적 전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R. S. Grane)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전체와 부분과의 관계를 말하면서 ‘부분은 그중 하나를 전치하거나 제거하면 전체가 지리멸렬이 되게끔 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한 이후 ‘구조’는 문학론의 주요관심사가 되었다.
시의 구조는 형태적 요소, 즉 시어, 운율,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의미와의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역동적인 체계이다. 즉, 한 편의 시는 수동적이며 무기력한 낱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통제와 조직 속에서 약동하는 낱말들의 세트이다.(W. K. Wimsatt, 1965) 그러므로, 구조란 비심미적인 질료로서의 언어에 심미적 효과를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비심미적인 질료로서의 언어가 구조 속에서 심미적인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은 왜인가. Ransom은 구조를 세분하여 ‘구조’와 ‘조직’으로 나누어 고찰한 바 있다.(Ransom, 1941) 구조(structure)란 논리적 요소로 구성, 이야기 등 줄거리의 배열이고 조직(texture)은 비논리적 요소로 운율, 말, 문장의 배열이다. 조직은 구조가 지니는 논리적 요소들을 다양하고 섬세한 광채로 바꿔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시는 이 ‘구조’와 ‘조직’을 포괄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하여, 시의 구조가 참으로 미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조직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거치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한다.
시의 표제는 시 구조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좋은 시의 표제는 구조를 심화시키고 완결시킨다. 또한, 시의 표제는 시의 구조와 조직의 세부 국면에 이르기까지 긴밀히 연결되면서 시의 세부를 전체적 통합과의 상관 속에서 새로운 의미 세계로 창조한다.
작가(author)와 독자(reader)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수정되고 고쳐 써진 용어이다. 작가는 작품을 쓰는 사람이고 독자는 쓰여진 작품을 읽는 사람이다. 과거와 같은 일방적 소통체계 속에서 독자는 작가가 텍스트 안에 숨겨놓은 의미들을 작가의 언표를 따라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이같은 전통적인 작가관은 20세기 들어와 변하기 시작한다. 러시아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 텍스트는 작가나 독자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지니는 미적인 가치 체계였으며, 독자수용이론가들은 오랫동안 텍스트의 주변부에서 맴돌았던 '독자'에게 해석의 권한을 주며 그들을 텍스트의 전면에 부상시켰다.
로만 인가르덴과 볼프간 이저 같은 독서현상학자들은 문학작품을 객관, 또는 주관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순수한 객관도 주관도 아닌 존재의 양상으로 본다. 그리고, 작가에 의해 창작된 작품의 궁극적 의미는 독자에 의해 완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독서 현상학에서는 문학 작품은 상상에 의해 채워져야 할 틈과 공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그 텍스트 속의 불확실한 틈 또는 부분은 결점이 아니고 오히려 심미적 반응을 일으키는 기본적인 요소로 본다.(린다 허천, 김상구 외 공역, ≪패로디 이론≫, 문예출판사, 1993)
시의 표제는 시인이 쓴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해 가는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특히, 독자 중심 문학관에서 볼 때, 과거처럼 시의 작자가 설명하고 채워주는 식의 진술적 표제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수밖에 없다. 바람직한 표제는 독자의 상상력이 참여할 수 있는 많은 여백과 비약의 단서를 내재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시의 표제가 지나치게 타성적이거나 관습적으로 되어있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내재적 의미를 심화 확장시킬 수 있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제목이 시어 하나, 비유 하나, 상징 하나와 긴밀히 연관됨으로써 의미론적 변용을 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다음에 제시된 두 편의 글을 비교해보면 표제의 중요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 詩人. 이건청
가젤영양 한 마리 물 속의 악어에게 먹히고 있다. 순간이었다. 가문 대지 목마른 가젤영양들이 가물어 말라붙은 초원을 걸어 물을 찾고, 그 물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코도 귀도 눈도 물 속에 감추고 숨어 있던 악어들이 돌진하였다. 정확히 몸통을 물린 가젤영양은 물린 채 깊은 곳으로 끌려 갔고, 먹이를 가로채려는 다른 악어 떼들의 싸움 속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가련한 이 짐승의 머리부분을 삼키는 예리한 이빨의 악어 모습을 끝으로 연못은 다시 적막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1. 생존 경쟁 2. 가젤영양의 죽음 3. 악어 이야기 4. 동물의 왕국
가젤영양 한 마리 물 속의 악어에게 먹히고 있다. 순간이었다. 가문 대지 목마른 가젤영양들이 가물어 말라붙은 초원을 걸어 물을 찾고, 그 물 속에 머리를 들이미는 순간, 코도 귀도 눈도 물 속에 감추고 숨어 있던 악어들이 돌진하였다. 정확히 몸통을 물린 가젤영양은 물린 채 깊은 곳으로 끌려 갔고, 먹이를 가로채려는 다른 악어 떼들의 싸움 속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잠시, 가련한 이 짐승의 머리부분을 삼키는 예리한 이빨의 악어 모습을 끝으로 연못은 다시 적막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앞의 시는 졸시 <··· 詩人>의 전문이다. 산업화 사회 속에서 상상력과 감성이 처한 난감한 처지를 알레고리적으로 보여주는 시이다. 약육강식의 본능이 지배하는 정글에서 악어 떼에 먹히는 초식동물인 가젤영양의 죽음을 묘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 詩人>이 보여주는 가젤영양의 죽음은 이 시의 표제가 되어 있는 ‘··· 詩人’과 연관되면서 심한 의미의 굴절과정을 거친다. 이 시에 선택된 모든 시어들이 표제 ‘··· 詩人’과 연관되면서 의미론적으로 변모되고 재창조된다. ‘목마른 가젤영양’, ‘물 속에 숨은 악어’, ‘초원’, ‘연못’과 같은 것들이 산업화 사회 속에서 시인이 처한 위난의 상황을 보여준다. 실제 TV 프로 ‘동물의 왕국’에서 흔히 보는 장면의 묘사이지만 표제에 의해 전혀 새로운 세계로 변용되어 재창조되고 있다.
‘··· 詩人’(A)과 ‘목마른 가젤영양(B)’, ‘물 속에 숨은 악어(C)’, ‘초원(D)’, ‘연못(E)’ 등이 상호 결합하면서 의미는 무한하게 창조된다. 그 결합의 일부를 보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아날로지를 각각 A1, A2, A3, A4···라 하고 ‘목마른 가젤영양’의 아날로지를 각각 B1, B2, B3, B4···, ‘물 속에 숨은 악어’의 아날로지를 C1, C2, C3, C4···, ‘초원’의 아날로지를 D1, D2, D3, D4···, ‘연못’의 아날로지를 E1, E2, E3, E4···라 하면
A1- 시를 쓰는 사람 B1- 목마른 가젤영양
A2-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 B2- 목마른 초식동물
A3-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B3- 목마른 작은 짐승
A4-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는 사람 B4- 목마른 채 사자에 쫒기는 짐승
··· ···
위와 같은 아날로지를 떠올릴 수 있다. 이제, 표제로 쓰인 ‘시인'(A)과 본문 속의 ‘목마른 가젤영양’(B)과의 의미의 결합양상을 일부만 보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A1B1- 시를 쓰는 사람은 목마른 가젤영양이다.
A1B2- 시를 쓰는 사람은 목마른 초식동물이다.
A1B3- 시를 쓰는 사람은 목마른 작은 짐승이다.
A1B4- 시를 쓰는 사람은 목마른 채 사자에 쫒긴다.
···
B1A1- 목마른 가젤영양은 시를 쓰는 사람같다.
B1A2- 목마른 가젤영양은 새로운 언어를 창조한다.
B1A3- 목마른 가젤영양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같다.
B1A4- 목마른 가젤영양은 수시로 상상의 날개를 펼친다.
···
A2B1/ A2B2/ A2B3/ A2B4···
B2A1/ B2A2/ B2A3/ B2A4···
···
A1C1/ A1C2/ A1C3/ A1C4/···
C1A1/ C1A2/ C1A3/ C1A4···
A1D1/ A1D2/ A1D3/ A1D4···
D1A1/ D1A2/ D1A3/ D1A4···
E1A1/ E1A2/ E1A3/ E1A4···
···
표제 ‘시인’이 본문 속의 시어들과 상승적으로 결합하고, 다시 역결합하면서 의미 역시 상승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글에 붙여진 <1. ‘생존 경쟁’ 2. ‘가젤영양의 죽음’ 3. ‘악어 이야기’ 4. ‘동물의 왕국’>과 같은 표제들은 본문 내용이나 제재들을 지시할 뿐, 의미의 확산이나 재창조에 관여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들 표제들은 시의 본문과 단순결합에 그치기 때문이다. 즉, 그 결합 양상은 다음과 같이 단순하다.
1- B/ 1- C/ 1- D/ 1- E···
2- B/ 2- C/ 2- D/ 2- E···
3- B/ 3- C/ 3- D/ 3- E···
4- B/ 4- C/ 4- D/ 4- E···
5- B/ 5- C/ 5- D/ 5- E···
즉, 표제(1, 2, 3, 4···)가 본문 속의 ‘목마른 가젤영양(B)’, ‘물 속에 숨은 악어(C)’, ‘초원(D)’, ‘연못(E)’과 단순 결합 할 뿐 의미의 확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위의 의미 결합 양상을 통해 알 수 있었던 바와 같이 시의 표제와 시의 본문과의 의미의 층위가 현격할 때, 의미의 상승적 결합이 이뤄지며 시적 긴장 역시 고조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 다음 시의 표제와 본문과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인텔리겐치아
적들이 뿌린 삐라 한 장 던져져 있다.
얇은 옷 입은 파르티쟌 하나
소총을 든채 죽어 있다.
위의 시에서 표제와 본문 사이의 의미의 층위가 극단적인 거리에 놓인 경우를 보여준다. 표제는 ‘인텔리겐치아’이고 시의 본문은 ‘파르티쟌’이다. 표제 ‘인텔리겐치아’는 한 사회를 대표하는 지적 계층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파르티쟌’은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막강한 적과 대항해서 싸우는 기동타격의 행동대원이다. 그러므로 표제 ‘인텔리겐치아’와 본문의 핵심어인 ‘파르티쟌’은 의미의 양 극단에 있게 되는 셈이고, 거기에 극대화된 의미 발생 공간이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시는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루고 있다. 사회가 혼탁해지고 사회의 혼탁을 바로잡아 줄 가치마저 부재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지식인’은 사회를 바로 잡아 줄 올곧은 가치를 제시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것이 사회의 중심에 바로 설 수 있게 하기 위해 강한 신념으로 가치를 지켜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에는 금권이나 정치권력 같은 유혹에 휘둘리는 지식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위의 시는 그런 현실을 비판하면서 아울러 모름지기 지식인의 길이 어때야 하는가를 노래해 보여준다.
표제 ‘인텔리겐치아’와 본문 ‘파르티쟌’처럼 상호 반대되는 표제와 본문이 상호 상승적인 의미의 결합을 하게 될 때, 무한한 의미를 새롭게 창출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텔리겐치아 파르티쟌
인1. 지식인 파1. 기동타격대
인2. 학식이 높은 사람 파2. 신념의 인간
인3. 사회의 지도층인 사람 파3. 숨어사는 사람들
인4. 존경받는 사람 파4. 비정규 소규모 전투원
··· ···
인∞ 파∞
위의 유추 항목들이 상호 상승적으로 결합하면서 창출해내는 의미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수 있다.
인1파1: 지식인은 기동타격대이다.
인1파2: 지식인은 신념의 인간이다.
인1파3: 지식인은 숨어사는 사람들이다.
인1파4: 지식인은 비정규적인 소규모 전투원이다.
인1파∞:지식인은 ∞이다.
파1인1: 기동타격대는 지식인이다.
파1인2: 기동타격대는 학식이 높은 사람이다.
파1인3: 기동타격대는 사회지도층인 사람이다.
파1인4: 기동타격대는 존경받는 사람이다.
파1인∞:기동타격대는 ∞이다.
인2파1/ 인2파2/ 인2파3/ 인2파4/ 인2파∞/
파2인1/ 파2인2/ 파2인3/ 파2인4/ 파2인∞/
인3파1/ 인3파2/ 인3파3/ 인3파4/ 인3파∞/
파3인1/ 파3인2/ 파3인3/ 파3인4/ 파3인∞/
인4파1/ 인4파2/ 인4파3/ 인4파4/ 인4파∞/
파4인1/ 파4인2/ 파4인3/ 파4인4/ 파4인∞/
인∞파1/인∞파2/인∞파3/인∞파4/인∞파∞/
파∞인1/파∞인2/파∞인3/파∞인4/파∞인∞/
이후 유추에 의한 의미의 상승적인 발생은 지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의 표제와 시 본문은 의미의 층위가 현격한 것일 때, 새로운 의미의 발생이 활발해지기 마련이며 그렇게 해서 창조되어지는 의미도 참신한 것이 될 수 있다.
III. 한국시 표제의 제시형태
이제 한국시의 표제들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가를 알아보려 한다. 이런 고찰은 한국시의 표제 붙이기의 일반적 관행을 알아봄으로써 보다 나은 방안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데 요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시의 표제를 문장 구성 성분으로 제시된 것과, 문장으로 제시 된 것을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I. 문장 구성 성분으로 본 표제
단독명사로 된 표제
밤비 (강문석) 실직 (강서일) 디스크 (고정애)
비번․2 (구창우) 백일몽 (권오택) 산 1999 (권정순)
무창포 (김경실) 삶 (김경호) 손톱 (김기영)
참회 (김남조) 코뚜레 (김리영) 동백꽃 (김상환)
日常 (김석) 노래 (김성춘) 파도 (김송배)
소 (김순일) 골무 (김여정) 축제 (김영박)
지평선 (김용국) 이혼 (김윤희) 방 (김은정)
極樂 (김종길) 풀 (김종해) 바람 (김지향)
달팽이 (김지헌) 계수나무 (김추인) 立冬 (김춘수)
祼木 (김태은) 사랑 (김현숙) 朴木月 (나기철)
風竹 (나태주) 산길 (도숙자) 후조(候鳥) (도한호)
감꽃 (맹문재) 봉숭아 (문상금) 빈터 (박문신)
물 (박성철) 누수 (박소향) 슬픔 (박순옥)
기다림 (박영숙) 여로(旅路) (박영하) 주택복권 (박의상)
불 (박재서) 배반 (박정자) 가을 (박종찬)
낙동강 (박찬선) 하산길 (박천영) 사천역 (박해수)
고물 (배경숙) 민들레 (서수자) 나무 (손기섭)
낙엽 (송예경) 단층 (송종규) 가을 (신기린)
簡易驛 (신미철) 自碑銘 (신창호) 立冬 (심하벽)
막간(幕間) (안영희) 길 (양상욱) 망초꽃 (오만환)
흔적 (오호영) 숲 (유경환) 수박 (윤문자)
自畵像 (윤주헌) 당신 (윤희자) 絶景 (이경)
불꽃놀이 (이재무) 엘리베이터 (이명혜) 눈꽃 (이상열)
감옥 (이상호) 子正 (이상훈) 鳥道 (이성선)
물 (이유경) 입춘 (이윤진) 천마산 (이인복)
白木蓮 (이재식) 개자리꽃 (이정숙) 달마 (이정숙)
황토길 (이정숙) 집 (이충이) 밤꽃 (이한종)
게걸음 (이해웅) 노파 (이향지) 소식 (이현명)
저승 (이화국) 황강 (이희선) 曼茶羅 (임평모)
무심 (장순금) 모래 (정복선) 渡江錄 (정진규)
사열(査閱) (조남익) 부활 (조석구) 젤소미나 (조영서)
화해 (조주숙) 오월 (조창환) 미련 (주문돈)
매향(埋香) (주봉구) 거울 (최경숙) 삼짇날 (최규창)
노을 (최상고) 盛夏素描 (최선영) 뼈 (최영규)
석별(惜別) (최옥) 창 (최종천) 산책 (최춘희)
說話 (최휘웅) 감전(感電) (하연승) 나무 (하영)
칼날 (하현식) 외갓집 (한정명) 자갈치 (한창국)
성미산 (홍금자) 독백 (홍영숙) 가로등 (홍윤숙)
늦사리 (황길현)
명사구로 된 제목
1. 명사 + 명사
통화권 이탈지역 (강현국) 터키 에베소 유적지 (곽현숙)
비번․2 (구창우) 산 1999 (권정순)
너와 나․439 (김경자) 달맞이 노래 (김광자)
하늘 아래 첫 동네 (김규은) 우산 속 연인 (김기완)
겨울안개 (김석규) 여름과 가을 (김재희)
히말라야 산중문답 (김종철) 꿈 이야기․1 (김찬윤)
비취빛 구름향 (노혜봉) 3월 삼짇날 (류기봉)
아침 밥상 (박만진) 옛날 만화 (박종철)
사모곡과 달빛 (박주일) 관악산 연주대 (백우선)
北窓 書齋 (범대순) 목련과 스치로폼공장과 구름 (상희구)
낙엽송 작은숲 (신중신)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그 이름 하나 (윤광수) 적막 속 (윤태혁)
앵두나무 한 그루 (이나명) 중년 여자 (이사라)
신맛과 어머니 (이선영) 地球 空轉 (이승순)
작은 방 한 칸 (이인원) 희화나무와 조지훈(이태수)
靑華 만다라 (이흥우) 호산리 일출 (임동윤)
안개 마을 (전길자) 여름낙엽 (정성수)
서울 사막 (정영선) 영화 감상 (조구자)
삼천포 앞바다 (조정애) 겨울 나무 (주선희)
거울 정원 (지인) 건들바위 고개 (최재명)
새벽 산행 (최충식) 봄 이후 (편부경)
소리 하나 (허선심) 아침 고요 (허형만)
명사 + 동명사형
낙타 죽이기 (이건청) 허물 벗기기 (임지현)
2. 명사 + ‘의’ + 명사
아버지의 집 (국효문) 4․19 세대의 목젖 (권이영)
이상(理想)의 집 (김경수) 브라질의 겨울 (김금용)
모름의 미학 (김동호) 개구리알 속의 詩 (김병중)
보이지 않는 것의 축제 (김선영) 사람의 가을 (김성옥)
연산군의 변(辯) (김시종) 백조의 호수 (김종원)
어른들의 비밀 (김준식)
때죽나무 열매 속의 작은 지구 (김현지) 아비의 집 (김희경)
가을의 말벌 (류시원) 바다의 춤 (박명자)
적막의 자유 (서인숙)
未堂先生님 집 뜰의 작약꽃과 모란꽃 (서지월)
신성의 별 (이옥진) 소라 껍질 속의 또 한 세상 (송상욱)
유클리드의 散步 (송유미) 이 봄의 진달래 (신달자)
古稀의 아침길 (이근식) ‘다꼬’ 아저씨의 스냅 사진 (이영숙) 윤동주의 빛 (이탄) 나의 귀뚜라미 요리 (이형기)
기억 밖의 추억 (정선기) 어머니의 박물관 (추명희)
부싯돌의 꿈 (추영수) 나의 노인슈반스타인 성 (한리나)
3. 수식어 + 명사
(가) 관형사 + 명사
한 장송곡 (김대현) 한 자리 (천양희)
첫 말문 (최명길)
(나) 형용사, 동사의 관형사형 + 명사
데드 마스크 (김광림) 사라진 폭포 (김수복) 휴먼 코리언 (김연대)
잔인한 봄 (김영은) 작은 종(種) (김정원) 깊은 우물 (김추인)
푸른 집 (류정희) 밝은 거울 (박수진) 노란 가을길 (성찬경)
어떤 傷痕 (원영동) 아름다운 불륜 (윤홍조) 슬픈 도시락 (이영춘)
낯선 평화 (정영운) 뜨거운 재 (최문자) 그리운 것들 (허영자)
4. 수식절 + 명사
비올론첼로가 있던 겨울 (김종태) 청평산 가는 길 (김지원)
꽃비 내리는 날 (나숙자) 모과향 그윽한 집 (박서혜)
겨울, 송광사 가는길 (박시향) 사람에 무너진날 (박재화)
유리집을 짓는 곳 (양채영) 쉽게 시가 씌여진날 (임강빈)
모래가 사는 법 (장병천) 아산호 가는 길 (장종권)
다시 태어나는 말 (정영숙) 신동재 가는길 (하청호)
마른 멸치를 위한 에스키스 (허만하) 여주 가는 길 (허문영)
강(江)을 노래하는 여인 (홍윤표)
II. 문장으로 된 표제
1. 온전한 문장으로 표시된 표제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강인한) 슬픔은 없다 (권옥희)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 (권천학) 땅 깊은 곳에는 불이 잠잔다 (김왕노)
경주에는 아무도 없다 (김월준) 유혹은 내 안에 있었다 (김유선)
아직 나는 거기에 앉아 세상을 바라본다 (김은숙)
산에도 섬이 있다 (김춘추) 오늘도 청량리는 즐겁다 (박문재)
白蓮寺에서의 전망은 기막히다 (박희진) 달팽이 가다 (신현정)
내 죽음은 흰빛이니라 (오수복)
그가 내 노트에 별자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규리)
와카티푸 湖水를 지나다 (이승필) 돌 속에 사람이 있다 (이추자)
그들은 말한다 (함혜련) 그방에 왜 내가가 산다 (허금주)
2. 구성 성분이 결여된 문장 제목
1. 부사구만 제시된 문장
쓸쓸함에 관해서 (구석본) 나의 길목에는 (권영목)
금탑 박물관에서 (김규태) 생의 형상 같은 날개 중에서 (김정자)나 홀로 있음에 (김태호) 어둠 속에서․2 (나영자)
푸른 날의 그대 사랑으로․1 (박송죽) 겨울 활주로에서 (배달순)
꽃길에서 (송용구) 지칭개 꽃다지에게 (이섬)
닭장 앞에서 (이승훈) 혼돈 속에서 (이윤경)
벚꽃아래서 (이재관) 정암사에서 (이진홍)
구룡포에서 (이충호) 네 번째 하늘에서 (정숙자)
가을 문턱에서 (최송) 물한 계곡에서 (최정숙)
그녀 S에게 (홍경임) 병상에서 (홍사안)
2. 주어 생략 문장
떠이호(西湖)에 묻히고 싶다 (김삼환) 꽃 속에 갇혀 지내다 (김영근)
젖은 행주로 식탁을 훔치다 (김현서) 숲 속 천사에게 물음 (김후란)
들자니 무겁고 놓자니 깨지겠다 (노명순)
마장리에 가면 솔밭길이 열린다 (박무웅) 마른다 (박청륭)
수평선은 (설태수) 아십니까 (안중원)
오늘을 버리고 싶었다 (오덕교) 오월은 동색이었을까 (오지연)
증오를 밟다 (윤희수) 봄똥을 눈다 (이가을)
이제 좀 느슨해지고 싶다 (이시연) 너를 엿보다 (이진숙)
산그늘에 묻히고 싶어 (정종배) 잘 익은 술 한잔 했었지 (조영수)
밤에는 눈을 감아야 한다 (허홍구)
3. 목적어 생략 문장
내 안에서 보다 (탁영환)
4. 술어 생략 문장
지금 꽃이 (구순희) 지금, 남대천은 (김미순)
반딧불이는 (손경하) 나는 얼마 동안 (이향아)
5. 연결어미로 끝나는 문장
연꽃 보러 갔다가 (김선향) 오해(誤解)의 골을 찾아서 (김영만)
잡풀은 쉬 베이지 않고 (김찬옥) 바람 앞에 서서 (문도채)
냉돌을 덥히며 (문무겸) 고목을 보며 (문상재)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박덕중) 화장터 지나며 (박서영)
물안개에 갇혀 (박영희) 창문을 닦으며 (박종국)
또 한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박종수) 평강리에 가서 (박철석)
그리움 남기고 (박태홍) 실밥을 뜯으며 (박해림)
논둑을 깍으며 (박희선) 세월이 가면 (신경인)
갈대를 보며 (오사라) 나무 젓가락을 타고 (윤향기)
초록빛 따라 초록바람 따라 (이경희) 1천 년 뒤에 남을 집을 위해 (이승하)
곰소에 가서 (진경옥)
생, 긴박한 순간에도 졸음은 오고 (차옥혜) 맑음, 기쁨, 그 소리를 찾아서 (추은희)길을 가다가 (한분순) 나무에 올라갈수록 (조병화)
6. 주부 술부 생략
유리창에 비, 그리고 (서정란) 저 붉디붉은 황토의 (장진숙)
7. 기타
불개미, 그래 그래 (김종섭)
이상에서 제시된 한국시 표제의 제시 형태를 100분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명사로 제시된 표제 223 71.7%
단독명사 115 37.0%
명사+명사 44 14.1%
명사+동명사 2 0.6%
명사+‘의’+명사 29 9.3%
관형사+명사 3 1.0%
형용사, 동사의 관형사형+명사 15 4.8%
수식절+명사 15 4.8%
문장으로 제시된 표제 88 28.3%
온전한 문장 17 5.5%
불완전한 문장으로 제시된 표제 71 22.8%
부사구만 제시된 표제 20 6.4%
주어 생략 표제 18 5.8%
목적어 생략 표제 1 0.3%
술어 생략 표제 4 1.3%
연결어미로 종결된 표제 25 8.0%
주부와 술부가 생략된 표제 2 0.6%
기타 1 0.3%
위의 결과를 통해 다음과 같은 한국시 표제의 특징들을 알 수 있었다.
1. 한국시의 표제는 명사(명사형)로 제시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명사(명사형) 표제가 223개로 71.7%의 시들이 명사(명사형)로 제시되고 있으며 단독명사로 제시되는 경우가 115개로 37%나 되었다. 이것은 명사(명사형) 표제의 51.6%가 단독명사 표제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령, 참회 (김남조), 코뚜레 (김리영), 동백꽃 (김상환), 노래 (김성춘), 골무(김여정), 極樂 (김종길), 풀 (김종해)처럼 하나의 명사로 시의 표제를 삼고 있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단독명사 115개를 다시 구상명사와 추상명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추상명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추상명사 표제는 전체 단독명사 표제의 64.3%였고 구상명사 표제는 35.7%였다. 명사 표제를 쓴 시인들의 절반 이상이 단독명사를 쓰고 있으며, 단독명사 표제의 64.3%가 추상명사 표제였다.
구상명사 표제 41개는 대부분 식물계에 속하는 것들이었고 동물계 구상명사는 ‘소’, ‘달팽이’ 2개뿐이었다. 식물계 구상명사 39개 중 ‘꽃’이 8개로 ‘밤꽃’, ‘백목련’, ‘개자리꽃’, ‘망초꽃’, ‘민들레’, ‘감꽃’, ‘봉숭아’, ‘동백꽃’ 등이 쓰였다.
즉, 한국시의 표제는 명사(명사형)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고, 특히 단독명사를 선호한다. 단독명사 중에서 ‘도강록’(정진규), ‘미련’(주문돈), ‘오월’(조창환)과 같은 추상명사가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시 표제에 명사가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명사 표제가 폭넓은 함의를 지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명사 표제는 여타의 품사, 가령 ‘너’, ‘나’와 같은 대명사나 ‘하나’, ‘둘’, ‘셋’같은 수사에 비해 함의가 크다. 동사나 형용사, 관형사나 부사, 감탄사나 조사와 같은 품사들에 비해 포괄할 수 있는 의미 영역이 크고 넓으며 상상 영역이나 감성 영역 역시 다양하다. 시인들은 명사가 지니는 이런 다양한 기능성을 활용해 명사 표제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상명사 표제에 비해 추상 명사 표제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구상 명사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기능 영역이 한정적이다. 반면, 추상 명사는 의미 영역이 넓고, 다양한 사고를 가능케 해주는 특성을 지닐 수 있다. 시의 표제로 추상 명사가 많이 쓰이는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명사(명사형)로 제시된 표제 223개 중 단독명사를 제외한 108개의 표제는 복합명사 표제였다. 다른 성분과 복합된 명사를 표제로 선택한 시인들은 전체의 34.7%이었다. 이런 경우를 세분화해 보면 다음과 같았다.
‘통화권 이탈지역’(강현국), ‘겨울안개’(김석규)처럼 ‘명사+명사’형의 표제가 14.1%(44)
‘낙타 죽이기’(이건청), ‘허물 벗기기’(임지현)처럼 ‘명사+동명사’형으로 된 표제가 0.6%(2)
‘아버지의 집’(국효문), ‘4․19 세대의 목젖’(권이영)처럼 ‘명사+‘의’+‘명사’형으로된 표제가 9.3%(29)
‘데드 마스크’ (김광림), ‘유리집을 짓는 곳’(양채영)처럼 ‘수식어(절)+ 명사’형의 표제가 10.6%(33)
시의 표제를 명사의 복합 형태로 붙이게 되는 경우는 단순 구조의 시보다는 복합적인 구조의 시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다음의 시들을 비교해보면 그런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자/ 살아있는 나무들은/ 살아 있음의 무게로 하여/ 몸을 비틀며 몸을/ 바람의 반대 쪽으로 눕힌다
그러나 죽어 있는 나무들은/ 죽어 있음의 가벼움으로/ 꼿꼿하게 몸을 세운다
그 가벼움이/ 하늘의 심장을 찌르고/ 나를 찌른다
-나태주, <풍죽>
가벼운 것이/ 파르르 떨리면서 침묵하고 있다/ 날개에 손을 대도 움직이지 않는다/ 살아 있는 그대로 숨을 거둔 잠자리/ 잠자리같은 그것은/ 한 때 하늘을 헤엄쳐 다니던/ 뭐라는 이름의 고래인가/ 우주의 어디선가는/ 마른 번개치는 이 가을/ 점심을 겸한 나의 아침식탁에는/ 쓸쓸한 귀뚜라미 요리 한 접시 올라/ 식욕을 돋군다
이것은 컴퓨터로 합성한 가상의 공간/ 현실이 아니기에 현실보다 더 현실다운 풍경이다
-이형기, <나의 귀뚜라미 요리>
앞의 시 <풍죽>은 구조가 단순해서 명징하고 선명한 정서를 형상화해 보여준다. 그러나, 뒤의 시 <나의 귀뚜라미 요리>는 그 구조가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다. 보다 다양한 사유를 통해서만 시에 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단순 구조의 시에는 단독명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고, 단독명사 중에도 구상명사를 선택하는 것이 적합하고, 구조가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에는 복합명사가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시의 표제가 명사 위주로 붙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시인들은 시의 표제가 명사(명사형)로 제시되는 경우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사와 명사를 중첩해서 복합명사로 쓰든가 명사 앞에 수식 구나 절을 붙이는 경우, 그리고, ‘죽이다’, ‘벗기다’ 등의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꿔, ‘낙타 죽이기’, ‘허물 벗기기’등으로 쓰는 경우가 그런 경우이다. 복합명사나 동사나 형용사의 명사형 표제를 많이 쓰고 있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3. 한국의 시인들 중 문장으로 된 표제를 쓴 경우는 28.3%(88)였다. 이들 중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강인한), ‘땅 깊은 곳에는 불이 잠잔다’ (김왕노)처럼 온전한 문장을 표제로 쓴 경우가 5.5%(17)였다. 반면에 불완전한 문장을 표제로 한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전체의 22.8%(71)를 차지하였다. 불완전한 문장의 표제를 세분화해보면 다음과 같았다.
‘지칭개 꽃다지에게’(이섬), ‘닭장 앞에서’(이승훈) 처럼 부사구만 제시된 경우: 6.4%
‘마른다’(박청륭) 처럼 주어가 생략된 경우: 5.8%
‘내 안에서 보다’(탁영환)처럼 목적어가 생략된 경우: 0.3%
‘지금 꽃이’(구순희), ‘지금, 남대천은’(김미순)처럼 술어가 생략된 경우: 1.3%
‘잡풀은 쉬 베이지 않고’(김찬옥), ‘바람 앞에 서서’(문도채)처럼 연결어미로 끝나는 경우: 8.0%
‘유리창에 비, 그리고’(서정란), ‘저 붉디붉은 황토의’(장진숙)처럼 주부와 술부가 생략된 경우: 0.6%
‘불개미, 그래 그래’(김종석)처럼 기타의 경우: 0.3%
온전한 문장의 표제보다 불완전한 문장의 표제가 많은 것은 함축과 생략을 통해 시에 긴장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의 경우들에서 표제가 완결된 의미를 지시하기보다는 단절과 생략 등을 통해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얼마동안 침묵하기로 하였다/ 벌 쐰 듯이 헤집어서 떠돌아 다니다가/ 푹 사그라들기로/ 죽은 듯이 사그라들기로/ 가슴에 접어두기로/ 속 깊이 담아두기로/ 나는 얼마동안 없어지기로 하였다/ 더러는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모자라도 넘어가기로/ 그러려니 하기로/ 나는 얼마동안 모르는척 하기로 하였다
-이향아, <나는 얼마 동안>
이 저녁 부패는 황홀하다/ 애랫목에 누워 온몸이 욕창 투성이인/ 그의 방문을 열면/ 확 얼굴을 덮치는 냄새/ 이것이 내가 마지막에 풍길/ 냄새라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아, 그러나 고쳐 쓰자/ 나는 늙어가는 그의 몸에서/ 향기롭게 썩어가는 꽃을 보았다고/ 죽음의 향기가 내 추억의/ 관을 떠메고 아득히 사라진다
-박서영, <화장터를 지나며>
앞의 시 <나는 얼마 동안>이나 뒤의 시 <화장터를 지나며>는 모두 문장의 구성 성분의 어느 부분이 생략되거나 결여되어 있는 경우이다. 가령, ‘땅 깊은 곳에는 불이 잠잔다’와 같은 경우, 표제 자체의 표현 의도가 표면에 온전히 드러나 있어 함의를 지니기 어렵게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의 독자가 작품을 감상할 때 지니게 되는 호기심이나 기대 심리를 기대하기 어려운 점도 지적될 수 있다. 시의 독자는 시를 읽어가면서 ‘알아차리기’ 효과(김영철, ≪현대시론≫,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3)나 충격 효과를 통해 경이로움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문장 형식 시 표제의 어느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구성 성분이 결여되게 표현함으로써 이른바 ‘낯설게 하기’ 전략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IV. 한국시 표제의 의장 양상
일반적으로 의장design이란 외관상 미감을 주기 위해서 형상, 색채, 맵시 등을 연구하여 응용하는 장식적 고안을 의미한다. 시에 있어서도 이런 의장의 필요성은 절대적이다. 언어는 통상적으로 미감과는 무관한 질박한 질료이다. 시인은 이처럼 미감과는 무관한 질료를 사용하여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시세계를 표현하려 한다. 시인이 시어를 임의적 목적을 위해 왜곡하거나 문법체계를 일탈하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시는 산문과 달리 세부의 축적으로서가 아니라 선택된 세부의 첨예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시어는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된 시어들이 시인의 표현 의도를 최대화할 수 있도록 긴밀히 조직되어야 한다. 미적 의장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김준오, ≪시론≫, 1999)
시의 표제는 독자로 하여금 한 편의 시가 지니는 총체적 가치에 이를 수 있게 하는 표지이면서, 또한 한 편의 시가 도달할 수 있는 무한 지평을 위한 구조의 중심이다. 시의 표제는 한 편의 시를 위한 안내 표지이기도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가치는 구조의 중심으로 그 구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데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한 편의 시가 지니는 성패 여부가 어떤 의장에 의해 제시된 표제를 획득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별다른 자각 없이 붙여지는 시의 표제 붙이기 관행은 고쳐지는 것이 마땅하다. <흥부전>, <심청전>처럼 주인공 이름이 표제가 되는 경우나 <죄와 벌>, <무정>처럼 작품의 주제가 표제가 되는 경우 <불국사를 보고>, <로마의 인상>처럼 글을 쓰게 된 동기가 표제가 되는 경우 등이 그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의 표제가 어떻게 의장화 되어 있는가의 여부는 본문과의 상관성 위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
사람들이 하는 일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 풀이 되니까/ 하늘은 하늘대로/ 바람은 바람대로/ 햇살은 햇살대로/ 내 몸 속으로 들어와 풀이 되었다/ 나는 어젯밤 또 풀을 낳았다
-김종해, <풀>
위의 시에 표제로 쓰인 ‘풀’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함의도 지니지 않은 구상 명사이다. 그러나, 본문 시의 1, 2 행 ‘사람이 하는 일 하지 않으려고/ 풀이 되어 엎드렸다’와 연결되면서 표제 ‘풀’과 ‘엎드린’ 사람 사이에는 아주 복잡한 상호 관계가 파생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풀과 사람이 의미론적 변용과 굴절을 겪으면서 전혀 새로운 의미의 지평을 창조한다. 이런 의미론적 변용은 시의 표제가 의미전달을 위해 본문 시와 수평적 구조를 지니는 것이 아니고, 시인에 의해 의장화된 데서 연유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는 한국시의 의장 양상들을 알아보기 위해서 분석 대상 작품 311편을 검토하였다. 시의 표제가 의장이 되어 있는가의 여부는 시 본문과의 상관 속에서 검토하였으며, 의장화의 정도가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것들만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에 도달하였다.
1. 의장(desine)이 표면화 되어있는 표제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강인한) 통화권 이탈지역 (강현국)
4․19 세대의 목젖 (권이영) 나는 아직 사과씨 속에 있다 (권천학
개구리알 속의 詩 (김병중) 보이지 않는 것의 축제 (김선영)
사람의 가을 (김성옥) 꽃 속에 갇혀 지내다 (김영근)
오해(誤解)의 골을 찾아서 (김영만) 땅 깊은 곳에는 불이 잠잔다 (김왕노)
유혹은 내 안에 있었다 (김유선) 생의 형상 같은 날개 중에서 (김정자)
산에도 섬이 있다 (김춘추)
때죽나무 열매 속의 작은 지구 (김현지) 숲 속 천사에게 물음 (김후란)
꽃비 내리는 날 (나숙자) 오늘도 청량리는 즐겁다 (박문재)
사람에 무너진날 (박재화) 겨울 활주로에서 (배달순)
적막의 자유 (서인숙) 소라 껍질 속의 또 한 세상 (송상욱)
유클리드의 散步 (송유미) 신발 장(葬) (송희철)
내 죽음은 흰빛이니라 (오수복)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아름다운 불륜 (윤홍조) 나무 젓가락을 타고 (윤향기)
증오를 밟다 (윤희수) 슬픔의 덫 (이수영)
슬픈 도시락 (이영춘) 돌 속에 사람이 있다 (이추자)
윤동주의 빛 (이탄) 모래가 사는 법 (장병천)
서울 사막 (정영선) 거울 정원 (지인)
어머니의 박물관 (추명희) 부싯돌의 꿈 (추영수)
맑음, 기쁨, 그 소리를 찾아서 (추은희) 나의 노인슈반스타인 성 (한리나)
마른 멸치를 위한 에스키스 (허만하)
2. 의장이 감추어진 표제
쓸쓸함에 대해서(구석본) 비번․2(구창우)
데드마스크(김광림) 금탑 박물관에서(김규태)
손톱(김기영) 코뚜레(김리영)
동백꽃(김상환) 겨울안개(김석규)
사라진 폭포(김수복) 골무(김여정)
방(김은정) 풀(김종해)
달팽이(김지헌) 깊은 우물(김추인)
사랑(김현숙) 풍죽(나태주)
푸른집(류정희) 감꽃(맹문재)
봉숭아(문상금) 가시연꽃(문인수)
누수(박소향) 마른다(박청륭)
실밥을 뜯으며(박해림) 논둑을 깎으면서(박희선)
고물(배경숙) 민들레(서수자)
단층(송종규) 가을(신기린)
이 봄의 진달래(신달자) 간이역(신미철)
낙엽송 작은숲(신중신) 달팽이 가다(신현정)
막간(안영희) 유리집을 짓는 곳(양채영)
망초꽃(오만환) 숲(유경환)
수박(윤문자) 당신(윤희자)
봄 똥을 눈다(이가을) 낙타 죽이기(이건청)
그가 내 노트에 별자리를 그리기 시작했다(이규리)
자진한잎(이근배) 앵두나무 한 그루(이나명)
불꽃놀이(이내무) 엘리베이터(이명혜)
중년여자(이사라) 감옥(이상호)
자정(이상훈) 지칭개 꽃다지에게(이섬)
조도(이성선) 자물쇠 소고(이수익)
지구 공전(이승순) 1천년 뒤에 남을 집을 위하여(이승하)
닭장 앞에서(이승훈) 신성의 별(이옥진)
물(이유경) 작은 방 한 간(이인원)
백목련(이재식) 밤꽃(이한종)
노파(이향지) 나의 귀뚜라미 요리(이형기)
허물벗기기(임지현) 저 붉디붉은 황토의(장진숙)
안개마을.5(전길자) 모래.3(정복선)
다시 태어나는 말(정영숙) 도강록(정진규)
사열(조남익) 나무에 올라갈수록(조병화)
젤소미나(조영서) 오월(조창환)
미련(주문돈) 매향(주봉구)
한 자리(천양희) 거울(최경숙)
뜨거운 재(최문자) 포에버 탱고(최상은)
뼈(최영규) 창(최종천)
새벽산행(최충식) 설화.1(최휘웅)
어머니의 박물관(추명희) 감전(하연승)
나무(하영) 칼날(하현식)
그 방에 왜 내가가 산다 소리 하나(허선심)
그리운 것들(허영자) 그녀 S에게(홍경임)
가로등(홍윤숙) 늦사리(황길현)
지금 꽃이(구순희) 작은 종(김정원)
극락(김종길) 불개미 그래 그래(김종섭)
바람(김지향) 꿈 이야기(김찬윤)
잡풀은 쉬 베이지 않고(김찬옥) 계수나무(김추연)
입동(김춘수) 나 홀로 있음에(김태호)
젖은 행주로 식탁을 훔치다(김현서) 아비의 집(김희경)
박목월(나기철)
검토 결과 311편의 시 중에서 142편의 시에서 의장 표현에 대한 적극적 의지를 찾을 수 있었다. 142편의 시중에서 40편의 시는 시 표제의 의장이 겉으로 드러나 있었고 나머지 102편의 시는 그 의장이 내재되어 있는 경우였다.
춘천시 남면 발산중학교 1학년 1반 류창수./ 고슴도치같이 머리카락 하늘로 치솟은 아이/ 뻐드렁 이빨,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보이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아이는 늘 혼자가 된다 혼자 먹는 도시락/ 내가 살짝 도둑질하듯 그의 도시락을 훔쳐볼 때면/ 그는 씩 웃는다 웃음 속에 묻어나는 쓸쓸함/ 어머니 없는 그 아이는 자기가 만든 반찬과 밥이 부끄러워/ 도시락 속으로 숨고싶은 것이다 도시락 속에 숨어서 울고/ 싶은 것이다. ‘어른들은 왜 헤어지고 싸우고 또 만나는 것인지?/ 깍두기 조각 같은 슬픔이 그의 도시락 속에서 빠꼼히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슬픈 도시락>
훨씬 독한 사랑이었더라면/ 잿 속에 손을 넣고/ 더듬더듬 서로의 숯을 만지며/ 다시 한번 살을 데이려 들지는 않았겠지/ 불길이 타오를 때/ 이미 눈 부릅뜨고 보아야 했어/ 서로를 허물며 타다가/ 혼자 먼저 탁 꺼질 수 있는 불씨를/ 훨씬 독한 사랑이었더라면/ 우리는 말 대신 연거푸 재채기를 해댔겠지/ 자고나도 여전히 목구멍에 그렁그렁한 발설 못한/ 말들의 가래를 삼키며/ 마주 바라보고 피 섞인 기침을 해대다/ 마침내는 자지러졌겠지/ 오오, 좀더 독한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죽었던 얼굴을 일상의 일로 가리고/ 핏자국난 시간을 박박 더 할퀴면서/ 인적없는 골목에선 몸 뒤틀며 울음을 참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가 그리운 것들을 윽박지르며/ 흙물 가라앉듯 이렇게 멀쩡하진 못했겠지/ 훨씬 더 독한 사랑이었더라면/ 우리는 없어진 듯 벌써 재가 됐겠지/ 더 이상 손을 넣어/ 서로의 숯을 만져 볼 수도 없는 재/ 타오르는 재/ 아직도 더듬더듬 연기가 피어오르는/ 오오, 영영 식을 수 없는 재가 됐겠지.
-<뜨거운 재>
위의 시 <슬픈 도시락>과 <뜨거운 재>는 일견, 의장이 내재된 표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제로서의 <슬픈 도시락>과 <뜨거운 재>는 표제 자체가 지니는 함의나 시 본문과의 상관성을 통해 파생되는 긴장의 밀도가 다르다.
표제 <슬픈 도시락>은 시 본문과의 상관에서 볼 때 시 본문을 지시하는 단순 지시형 표제이다. 부모의 별거 때문에 자신이 만든 반찬과 밥으로 도시락을 싸온 학생이 느끼는 부끄러움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교사 화자가 느끼는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시 본문을 ‘슬픈 도시락’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제 <슬픈 도시락>은 시 본문 내용을 지시하고 있을 뿐, ‘알아차림’이나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뒤의 시의 표제 <뜨거운 재>는 표제 자체가 지니는 함의와 긴장이 감추어진 채, 역동성을 발휘해 보여준다. ‘재’는 뜨겁게 타오르는 ‘불’의 과정을 거치고 그 결과물로 남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는 뜨거운 것이 아니다. 상호 상반되는 ‘뜨거운’과 ‘재’의 결합이 함의를 지니게 되는 연유이다. 뿐만 아니라 시 본문 자체도 은유적인 언어구조로 표현되어 있다. 의장이 내재된 표제 <뜨거운 재>가 은유적인 시 본문과 결합되면서 의미론적 상호 상승의 의미지평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표현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표제에 의장 효과를 부여하려 한다. 의장 효과는 그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고, 의장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내재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의장 의도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경우보다는 의장 효과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에 의미 확산 효과가 크게 나타나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한국시에 의장 의도가 겉으로 들어 나지 않게 표현된 시편들이 많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V. 결론
시의 표제는 시가 지니는 의미나 정서, 상상력은 물론 한 편의 시가 포괄하는 총체적 가치를 지시하는 기호이다. 시의 표제는 시의 제반 요소들과 상승적으로 결합하면서 작품을 규정하고, 의미론적 변용을 통해 시적 가치를 확대하며 창조한다. 그러므로, 시의 표제가 지니는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연구자는 한국시인들의 표제 붙이기의 관행들을 살펴보고, 바람직한 표제 붙이기의 방법에 대해 검토하였다.
연구자는 우선 한국 현대시의 표제 붙이기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시인단체인 한국시인협회의 회원 사화집을 분석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연구자가 검토 대상으로 선정한 텍스트는 한국시인협회 대표 시선집 ≪보이지 않는 것들의 축제≫(오성문화, 1999)이다. 이 시집에는 한국시인협회 회원 311명이 각자 한 편씩 자선한 311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분석 자료의 검토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한국시의 표제는 명사(명사형)로 제시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명사(명사형) 표제가 223개로 전체의 71.7%의 시들이 명사(명사형)로 제시되고 있으며 단독명사로 제시되는 경우가 115개로 전체 표제의 37%나 되었다. 단독명사 115개를 다시 구상명사와 추상명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는데, 추상명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추상명사 표제는 전체 단독명사 표제의 64.3%였고 구상명사 표제는 35.7%였다. 구상명사 표제 41개는 대부분 식물계에 속하는 것들이었고 동물계 구상명사는 ‘소’, ‘달팽이’ 2개뿐이었다. 식물계 구상명사 39개 중 ‘꽃’이 8개로 ‘밤꽃’, ‘백목련’, ‘개자리꽃’, ‘망초꽃’, ‘민들레’, ‘감꽃’, ‘봉숭아’, ‘동백꽃’ 등이 쓰였다.
한국시 표제에 명사가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명사 표제가 폭 너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명사 표제는 여타의 품사, 가령 ‘너’ ‘나’와 같은 대명사나 ‘하나’, ‘둘’, ‘셋’같은 수사에 비해 함의가 크다. 동사나 형용사, 관형사나 부사, 감탄사나 조사와 같은 품사들에 비해 포괄할 수 있는 의미 영역이 크고 넓으며 상상 영역이나 감성 영역 역시 다양하다. 시인들은 명사가 지니는 이런 다양한 기능성을 활용해 명사 표제를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상명사 표제에 비해 추상 명사 표제가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구상 명사는 대상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징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지만 함의 영역이 한정적이다. 반면, 추상 명사는 의미 영역이 넓고, 다양한 사고를 가능케 해주는 특성을 지닐 수 있다. 시의 표제로 추상 명사가 많이 쓰이는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명사(명사형)로 제시된 표제 223개 중 단독명사를 제외한 108개의 표제는 복합명사 표제였다. 다른 성분과 복합된 명사를 표제로 선택한 시인들은 전체의 34.7%이었다. 시의 표제를 명사의 복합 형태로 붙이게 되는 경우는 단순 구조의 시보다는 복합적인 구조의 시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복합 명사는 명사와 명사가 합쳐진 것으로 의미 영역을 넓게 쓸 수 있으며, 시 본문과의 연관 속에서 상승적인 의미확산을 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시인들 중 문장으로 된 표제를 쓴 경우는 28.3%(88)였다. 이들 중 ‘모든 구름에는 은빛 자락이 있다’, ‘땅 깊은 곳에는 불이 잠잔다’처럼 온전한 문장을 표제로 쓴 경우가 5.5%(17)였다. 반면에 불완전한 문장을 표제로 한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전체의 22.8%(71)를 차지하였다.
온전한 문장의 표제보다 불완전한 문장의 표제가 많은 것은 함축과 생략을 통해 시에 긴장을 불어넣으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불완전한 문장 표제들은, 완결된 의미를 지시하기보다는 단절과 생략 등을 통해 독자의 능동적 참여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장 형식 시 표제의 어느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구성 성분이 결여되게 표현함으로써 이른바 ‘낯설게 하기’ 전략의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한국시 표제 붙이기의 실제를 검토하였다. 연구자는 바람직한 시의 표제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시의 표제는 시 구조에 미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시의 표제는 시 구조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시의 표제가 구조를 규정하고 제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시의 구조는 형태적 요소, 즉 시어, 운율, 이미지뿐만 아니라 의미와의 긴밀한 상호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역동적인 체계이다. 즉, 한 편의 시는 수동적이며 무기력한 낱말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통제와 조직 속에서 약동하는 낱말들의 세트이다. 그러므로, 시의 표제가 한 편의 시가 지니는 요소들을 다양하고 섬세한 광채로 바꿔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의 표제는 시의 구조에 미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도록 선택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단순한 지시성보다는 복잡성과 특수성까지를 감안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독자를 작품 속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표제가 좋은 표제이다. 과거처럼 시인이 쓴 시를 독자가 읽어내는 일방 소통식 전달체계가 아니라, 독자가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함으로써 완결시킬 수 있는 전달체계가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 의해 창작된 작품의 궁극적 의미는 독자에 의해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독서 현상학에서는 문학 작품은 상상에 의해 채워져야 할 틈과 공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그 텍스트 속의 불확실한 틈, 또는 부분은 결점이 아니고 오히려 심미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본적인 요소로 본다. 따라서, 시의 표제는 시 본문이 지니는 단절이나 비약들과의 상관성을 감안해서 선택되어야 한다.
셋째, 시 표제와 시 본문은 가급적 은유나 환유의 관계로 선택되는 것이 좋다. 시의 표제는 시 본문의 세부들과 연결되면서 활발한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시의 표제가 한 편의 시를 비약적으로 심화시키고 완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시의 표제는 시 조직의 세부 국면에 이르기까지 긴밀히 연결되면서 시의 세부를 전체적 통합과의 상관 속에서 새로운 의미 세계로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은유나 환유가 지니는 힘은 이처럼 큰 것이다.
넷째, 문장 형식의 표제의 경우, 생략과 함축의 효과가 감안되어야 한다. 시의 독자는 시를 읽어가면서 ‘알아차리기’ 효과나 충격 효과를 통해 경이로움을 체험하기를 원한다. 문장 형식 시 표제의 어느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거나 구성 성분이 결여되게 표현함으로써 이른바 ‘낯설게 하기’ 전략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시의 표제와 시 본문의 주제는 의미의 층위가 현격하게 선택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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