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이 물러가고 도청이 시민군의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은 밤사이 광주시 전역에 전해졌다. 흥분과 감격에 젖어 이른 아침부터 도청으로 몰려든 시민들은 속속 발표되는 사망자 숫자와 처참하게 일그러진 시체들을 보며 계엄군의 잔학상에 치를 떨었고 앞으로의 상황변화를 예의주시하며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가졌다. 시민들은 자체치안 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섰다. 해방기간 광주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쓰고 시민군들에 적극협조하는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다.
지난밤 지역방어 전투에 참가한 시민군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등록시켜 임무를 부여했으며, 무장시민군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도청에서는 시내 유지급 인사, 목사,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을 토론하고 무기회수를 시작했다. 일부 도청 수습위원들의 구성에 불만을 느낀 홍남순, 김성용, 송기숙 등 재야인사들도 남동성당에서 따로 모임을 갖고 수습대책을 논의하였다. 5.18수습대책위원회는 회수한 무기 중 일부를 가지고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7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계엄군측과 협상, 오후 5시경 협상결과를 도청 광장에서 보고하였다. 그러나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계엄사의 요구와 피의 댓가를 보상하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협상의 내용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협상대표를 향해 야유를 퍼붓기도 했다. 저녁때쯤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한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 되었다.
무기회수를 둘러싸고 수습회 내부는 물론 시민들 사이에도 의견이 크게 엇갈린다. 일부 시민은 무기를 반납했으며, 일부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해 이러한 갈등은 결국 강.온대립으로 갈리게 되어 25일 새로운 항쟁지도부를 탄생시킨다. 시위는 목포, 해남, 강진 등 시외지역으로까지 확산되어 무기 탈취와 차량시위가 계속되었다.
주남부락과 교도소 부근에서는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있는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끊이지 않았고, 계엄군의 통합병원 확보를 위한 진격으로 화정동 주민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2일 존 위컴 주한연합사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 또한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와 필라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긴급 출동시키기로 결정하는 등 광주항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다.
* "초파일인 5월 21일 송암동 일대에서 계엄군을 목격했다. 그날 저녁 9, 10시 사이에 송암동 공단의 빈터에 헬기가 대여섯 번 날아왔다. 이때까지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밤 11시쯤 되어 산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이날부터 22일까지 동네 앞에서 내가 본 시체는 9구였다. 논에 3구의 시체가 거꾸로 처박혀 있었는데 논이 피로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논둑에도 2구의 시체가 있었으며 마을 앞에 세워진 버스에도 2명이 죽어 있었다." (김복동, 청문회 증언)
- 학운동 지역방위대 편성.
* "80여 명의 시민군이 학동 배고픈다리에서 내리자 동네 주민들이 박수를 환영해 주었다. 일단 다리 가운데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우리가 바리케이드를 치는 사이 학운동, 소태동 지역의 예비군과 동네 청년들이 자원하여 지역방위대원은 총 1백여 명이 되었다. 이때 동네 후배인 김복수와 유홍렬도 자원했다. 우리는 다시 조편성을 했다. 처음에는 12명을 1조씩 6개조로 편성했다가 청년들이 계속해서 모여들자 9개조, 11개조까지 늘려서 편성했다. 본부까지 총 12개조였다.
나는 학운동 배고픈다리 지역방위 본부장을 맡았고 유홍렬이 보좌관을 했다. 조를 편성한 후 조장을 뽑고 1인당 3클립의 실탄을 지급했다. 한 클립당 20-30발이었으니 1인당 70발 정도의 실탄을 나눠준 셈이었다. 나는 유홍렬에게 남은 실탄박스를 맡기면서 '내 허락 없이 누구에게도 분배하지 말라'고 했다. 실탄까지 지급한 후 삼교대로 두 시간씩 근무하라고 했다. 최종적으로 암구호를 정하고 각 지역에 나누어 배치했다. 배고픈다리에서 석천다리 사이, 수정맨션 뒷편 야산, 호산나유치원, 무등육아원, 숙실 들어가는 마을, 배고픈다리의 위쪽과 아래쪽 등에 각각 1개조씩 11개의 지역에 나누어 배치했다. 나는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순찰을 했다. 그리고 한 시간 단위로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한 시간마다 1조 조장이 공포를 한 방 쏘고 그것을 신호로 2조 조장이 또 한 방 쏘고 이렇게 11조 조장까지 공포를 쏜 후 이상이 없을 시는 내가 본부에서 공포 2방을 쏘기로 했다. 이렇게 그날 저녁은 별 상황 없이 지역방위를 했다." (구술 : 문장우, 현사연 조사)
- 점차 과열된 소요군중는 폭도로 돌변,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로 21:30 7공수병력 이동중 폭도들의 기습으로 6, 7명 중경상. (육본 상황일지)
- 목포. 학생 1백여 명, 목포경찰서에 들어가 유리창 부수고 뒤뜰에 세워둔 트럭과 호송차 1대 방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광주 - 목포간 도로에 시민군 경계 근무.
* "광주의 시위상황을 알리기 위해 목포로 가던 중이었다. 개방대학을 지나서 길이 곡선으로 휘는 곳(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음)에 버스 1대가 쳐박혀 있었다. 그 차는 벌집이 되어 있었고 운전사는 목에 총을 맞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차에는 10여 명의 젊은이가 피를 흘린 채 죽어 바닥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발목에 총을 맞고 신음하고 있는 여자가 1명 있어 그녀를 차에 옮겨 태우고 급히 병원에 실어다주었다. 병원에서 나온 우리 일행은 외곽지역에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어 위험하니 목포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외곽경계를 맡기로 했다. 우리는 주월동으로 가 대동고등학교 정문에 기관단총을 설치하고 10여 명이 총으로 무장한 채 경계를 섰다. 대동고 앞에 설치한 기관총을 아무리 조종해 봐도 민가에 피해가 될 위치였다. 우리는 광-목간 도로에 설치된 해태동상 주변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2명은 도로에서 지키고, 2명은 철도에 배치, 나와 다른 한 사람은 베니어합판을 깔고 땅바닥에 엎드려 총을 겨누고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포감이 심해졌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란 우리는 총을 갈겨댔다. 별다른 사건 없이 그날 밤을 보내고 우리 대원들은 잠시 후 다시 모이기로 하고 흩어졌다." (구술 : 구성주, 현사연 조사)
21:15 백운동 지역 자체경비대 편성
* "시위차량에 탑승하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김밥과 음료수 등을 올려주었다. '시위차량은 백운동으로 집결하라'는 방송을 듣고 백운동으로 갔다. 그곳에는 20여 대의 버스가 집결해 있었고 시민군도 많이 모여 있었다. 35세 가량의 남자가 시민군을 지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시민군 전체를 지휘 통솔하는 사람은 공수부대 대위 출신이라는 것 같았다. 자기도 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다고 했다. 그 남자가 그날 밤의 암구호가 '담배불-담배연기'라고 알려줬다. 그곳에 집결한 시민군을 5인 1조로 편성햇다. 그는 총을 먼저 쏘아서는 안 되며 총기 오발사고에 유의하라고 했다. 우리 조는 외곽도로 부근에 있는 택시회사 2층 사무실에 배치되었다." (구술 : 강덕진, 현사연 조사)
- 해남 학생들 군복 착용하고 무기 휴대. 해남제곡 및 강진지서 무기 탈취. (계엄사 상황일지)
- 해남. 차량 20여 대에 탑승한 군민, 각 면을 돌아다니며 시위하다 완도로 출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옥내스피커를 통해 '해남에서도 데모를 하는데 완도 군민,청년들은 무얼 하느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광주상황이 급하다. 다 죽어간다. 함께 가자'라는 방송. (계엄사 상황일지)
21:30
- 62연대 2대대 지역 전차 2대, APC 2대 배치 작전통제. (20사 작전일지)
- 광주-목포간 호남선 열차 운행 정지.
- 목포. 흰 머리띠 두르고 각목든 사람들, 전남 5아 1061호 시외버스에 '김대중 석방하라'는 플래카드 걸고 목포시내 시위. (월간조선, 1985. 7)
- 목포. 방송국 마비, 라디오 방송 중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목포. 목포경찰서 방화. 목포 해군 헌병대 파괴중. (계엄사 상황일지)
- 목포. 21:00부터 시내 영해, 대의, 역전, 연동파출소 기물파손. 3차례에 걸쳐 목포 MBC 유리창 깨고, 기재 일부 파손. (월간조선, 1985. 7)
성과: 사살 3, 화기 16정, 포로 1명, 실탄 5백여 발 피해: 부상 2명 (전교사 작전일지)
* "외곽지역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데 빨리 집결하라는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가보니 우리를 지휘하던 남자가 '효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시민군이 밀리고 있다. 우리가 지원을 나가야겠으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효천으로 출동하기 위해 버스에 탔다. 내가 탄 버스에는 40-50명 정도가 타 몇사람은 서서 갔다. 모두 5대의 차량이 출발했다. 5, 10분 쯤 가다 전투가 치뤄졌던 곳에 당도했다. 도로 양쪽에는 논이 있고 건너편에는 산이 있었으며 왼쪽에는 마을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차를 세우고 모두 내렸다. 도로에는 버스 3대와 군용 트럭 1대가 있었는데 이중 버스 1대는 논에 처박혀 있었다. 도로는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먼저 도착한 시민군들이 부상자를 버스에 옮겼다고 했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버스가 출발하자 다른 차도 모두 떠났다. 우리도 광주로 가려고 차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주변을 살펴보니 건너편 산에서 예광탄이 소나기처럼 날아왔다. 우리는 앞을 다투어 의자 밑으로 몸을 숨겼다. 총알이 차에 박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비명소리도 들렸다. 한동안 계속되던 사격이 멎고 조용해졌다. 나는 운전석을 향해 차를 돌리라고 소리쳤다. 사격을 받아 시동이 꺼져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뒤에 세워진 트럭으로 옮겨 타기로 했다. 트럭으로 가기 위해 유리창을 넘으려 하자 다시 사격이 시작되었다. 몇 차례 계속되던 총성이 멎자 부상자를 안고 유리창을 넘어 트럭으로 옮겨탔다. 부상자가 3명이라고 했다. 우리는 트럭을 타고 백운동으로 왔다. 총 한 번 쏘지 못하고 부상자만 낸 채 효천을 빠져나온 것이다." (구술 : 강덕진, 현사연 조사)
22:25
- 보성역에서 폭도 1백20명, 몽둥이를 들고 시위중.
.트럭 3대, 차량 3대로 80여 명은 장흥 쪽으로 이동.
.차량 1대로 30여 명 벌교 쪽으로 향함. (계엄사 상황일지)
22:50
- 완도지서 침입 폭도 2백여 명, 화물트럭 5대에 분승 무기고 파괴했으나 무기가 없자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구호 외치며 22일 01:50 해남 쪽으로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22:57
- 목포역 앞 광장에 2만여 명 운집. 마치크 설치, '김대중 석방하라', '유신잔당 물러가라', '노동3권 보장하라'. (계엄사 상황일지)
23:00
- 목포차량에 플래카드 붙이고 시위, '광주시민 죽이듯이 목포시민 죽여라' 하고 외침.
- 목포 시위대 차량 3대 진입, 유리창 및 기물파손, 방화. 시위군중과 구호 동일(김대중 석방). (계엄사 상황일지)
- 화순 북면지서 접수. 무기 획득 후 철야시위. (1980년대 민주화운동)
23:15
- 폭도 24명, 나주읍에서 치료중 하체 절단 4명, 내장파열 1명, 기타 11명. 총기 오발사고 및 수류탄 사고. 폭도들 휴식하다 23:15 부대로 접근중. (계엄사 상황일지)
공수들의 학살만행을 알리는 유인물을 18일부터 전남대내 '대학의 소리' 구성원과 극단 '광대' 회원이 무등영아원에서 제작하여 시내에 배포하였다. 21일부터 투사회보라는 명칭으로 들불야학팀이 중심이 되어 광천동 천주교회와 들불야학 교실에서 제작하였다. 물자조달, 문안작성, 필경등사, 배포조 등으로 나뉘어 윤상원, 김영철, 박용준, 김성섭, 윤순호, 나명관, 전영호가 주축이 되었다. 24일부터 YWCA내 신협사무실로 자리를 옮겨, 그동안 산발적으로 제작된 유인물을 통합하여 그 명칭이 '민주시민회보'로 바뀌었다. 항쟁의 전기간에 걸쳐 시민 선전의 역활을 담당하게 된 투사회보는 26일 제11호를 마지막으로 제작하였다. (현사연 조사 종합)
-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월간조선, 1985.7)
02:05
- 고창에서 트럭 2대에 탄 폭도, 영광으로 진입. (계엄사 상황일지)
02:10
- 완도. 무장폭도 차 6대로 다이너마이트 탈취, 강진 방향으로 진출. (전교사 작전일지)
02:35 영광에서 부상자 56명 발생
- 영광에서 병원을 찾던 부상 폭도들이 동료 부상병 56명을 광주의원과 윤제의원에 입원시키고, 광주주유소에서 택시와 트럭에 급유중. (계엄사 상황일지)
02:50
- 목포경찰서 무장폭도 기습, 탄띠 146개 탈취. (전교사 작전일지)
03:00
- 목포.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 시내. 시외버스 불통. 중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여 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대다수 시민 호응 안 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 보여. 학생들은 마이크로 '자중하자'며 질서지켜.
- 목포. 새벽 법원, 검찰에도 난입 파괴. (월간조선, 1985.7)
04:55 증원병력 광주에 계속 도착
- 20사단 60연대 병력 전교사에 도착(87/1,562). (전교사 작전일지)
05:00 남평에 매복중이던 계엄군의 총격, 사망 1명, 부상 3명
* "광주에 있던 아들을 데리고 목포로 가던 길이었다. 송암동 공단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주둔해 있던 계엄군들이 검문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빨리 목포로 가야 되는 상황을 얘기하여 그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남평다리 못 미친 곳에 있는 야산에 매복중이던 계엄군이 '정지'라고 외치자 즉시 차를 멈췄다. 차가 멈추자마자 30여 명의 계엄군이 4, 5분에 걸쳐 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했다. 그때 운전수는 즉석에서 사망하고 우리 가족 3명은 온몸에 부상당해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구술 : 황남열, 현사연 조사)
- 보병 20사단, 송정리역 도착. 이 병력은 전투교육사령부로 지원되는 차량으로 보병학교에 집결.
- 22일 김재명 소장이 박준병 소장에게 지시, "광주 전교사 사령관은 육군 박소장이 지휘하는 20사단의 1개 연대와 즉각 출동하라." (말, 1988. 5)
06:30
- 31사단 병력, 비아 송신소, 광주변전소 경계병력 투입. (전교사 교훈집)
06:45
- 차량 3대에 편승한 시민 차량시위.
- 22일 날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많은 시민들과 지난밤 외곽지역 전투에 참여했던 무장시위대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서는 김원갑(19, 재수생)을 중심으로 5백 16명의 청년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차량들에게 모두 번호를 매겨주면서 일종의 '등록'을 필해 주고 있었다. 하얀 페인트로 차량의 앞뒷면에 일련번호를 큼지막하게 써주었다. 이들 중 소형 차량에는 주로 의료, 연락 등의 임무를 부여했으며, 대형 차량은 병력 및 시민들의 수송과 보급, 청소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군용 지프는 지휘통제, 순찰상황 통제와 전달 등 헌병업무를, 군용 트럭은 전투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몇몇 소형 차량을 동원, '등록을 필하지 않은 차량은 즉시 공원으로 모여 등록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받으라'고 홍보하였다. 이날까지 무장한 시위대는 대략 5백 명 정도에 달했는데, 이들은 나름의 조직과 편성에 따라 각 지역에 배치,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이날 오전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여앉아 '도청내의 지도부 결성 여부'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날 새벽 일찍 도청을 '점령'한 일단의 '무장시위대'들은 도청을 본부로 확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처음 이곳에는 일반시민들이 너나없이 들어가 체계적인 질서와 통제가 결여돼 한동안 혼란을 면치 못하였다. 시내 곳곳에서 이따금씩 총성이 들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질서와 체계를 갖춰갔다. (신동아, 1985. 10)
07:00 광천동 공단 입구에 지역방위대 배치
* "도청에서 하룻밤을 잔 나는 날이 밝자마자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서서 중구난방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한쪽에서는 각 차량에 일련번호를 붙여 외곽지역을 방어하도록 했다. 그때 나이드신 분이 나에게 와서 범죄를 방지하는 의미에서 지역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를 포함해 5명이 총 한 자루씩과 무전기를 지급받고 지프차를 탔다. 우리는 광천동 공업단지 입구에 배치되었다. 육군통합병원 근처 도로에 계엄군이 장갑차를 세워놓고 지키고 있었다. 시민들도 공단 입구에다 커다란 통나무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공단 사거리 옆에 처박혀 있는 버스를 본부로 사용했다. 식사는 인근 주민들이 해다준 것을 먹고 차에서 잠을 자면서 지역방위에 전념했다." (구술 : 조철응, 현사연 조사)
- 김원갑은 광주공원에서 무질서하게 운집해 있는 무장폭도 5백여 명을 총지휘.
광주고속버스 등 시내 일원에서 탈취한 78대의 각종 차량에 일련번호를 붙여 부 토록 하고 계엄군의 동태파악과 시내진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금남로, 화정동, 산수동, 학동, 백운동, 서방 삼거리, 신역 등 7개 지역에 무장폭도 40명씩 계 2백80여 명을 차량 5대씩 계 35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계엄군에 무력대응토록 지시. (공소장)
- 목포. 7시부터 시민들 역광장으로 집결. (1980년대 민주화운동)
07:30 전남대 교정에 암매장된 고교생 발견
- 전남대 뒷산에서 교련복 차림의 학생 1명이 절반쯤 매장된 시체로 발견됨. 발견한 시민이 학생에게 연락, 도청 앞 광장으로 옮겨놓자 시민들 흥분. (월간조선, 1985.7)
* "전남대학교에 주둔했던 공수들이 전날 밤 모두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 학교 직원들과 함께 학교 곳곳을 둘러보았다. 가정관의 한 강의실에 한 가마니는 족히 될 만한 양의 머리카락이 수북히 쌓여 있었고 허리띠가 5백여 개, 신발 1백여 개가 널려 있고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그 많은 피로 보아 사람이 죽었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학교내에서 죽은 사람을 암매장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암매장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 뒷산을 지나다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보니 솔잎이 많이 쌓여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땅을 파보니 시체 1구가 나왔다. 온몸에 대검으로 찔린 상처가 있고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여러 상황으로 보아 광주상고생인 듯했다. 나는 그 시체를 상무관으로 옮겼다." (구술 : 서명원, 현사연 조사)
07:50
- 폭도 3백 명 탑승한 군용차 45대 송정리역 집결, 공포 발사. (전교사 작전일지)
- 전날 시외곽으로 나갔던 차량들이 광주로 진입하려다 효천지역에 주둔한 계엄군의 사격으로 길이 막히자 나주에서 하룻밤을 세우고 송정리로 이동한 것이다. (현사연 조사 종합)
08:00
- 목포. 버스 3대에 탑승한 폭도 M1 소지하고 나타나 소요 격화.
- 목포. 아침에 버스 11대가 시위에 합세하기 위해 광주로 감. (월간조선, 1985. 7)
08:10 도청 간부 수습대책 논의
- 정시채 부지사, 문창수 기획관리실장, 김동환 내무국장, 김경수 비상기획관 등 5명의 간부와 일부 직원들이 도청에 출근했다. 장형태 지사도 출근하려 했으나 간부들의 만류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들은 이날 하루 종일 도청에서 광주사태의 추이와 수습방안을 논의했으며, 이날 오후 구성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정시채 부지사가 참여한 후 오후 7시 15분 퇴근했다.
학생들은 간부들의 방이 있는 2층 이상 올라가지 말 것과 집기와 도청 차량은 일절 손대지 말라고 당부를 해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날은 정부의 행정기능과 학생들의 수습대책위 기능이 공존하게 되는 셈이 되었다.
어찌 됐건 시내는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시내의 상가나 건물은 거의 문을 닫고 있었으나 변두리의 구멍가게는 문을 열어 라면 등을 팔고 있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08:20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 시민 탑승 차량에 발포
* "시외지역에서 시외버스 정규노선을 운행하고 있는 우리 회사 버스를 통제하기 위해 회사 동료 2명과 함께 8시경 광주를 출발했다. 광-목간 도로를 이용해서 시외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보니까 도로 양편 논에 대여섯 대의 자동차가 처박혀 있었다. 사람은 없었으나 여기저기에서 핏자국이 보였다. 우리가 송암동 연탄공장 앞을 지날 때 갑자기 드르륵,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매복해 있던 30-40명의 계엄군이 두 차례에 걸쳐 집중사격을 퍼부어 동료 1명은 죽고, 우리는 총에 맞아 부상당했다." (구술 : 해정구, 현사연 조사)
- 교도소 주변 지역 수색정찰. 노획버스로 담양 - 광주간 도로(교도소 정문) 차단. (전교사 교훈집)
- 해남. 버스 3대, 트럭 1대에 폭도 약 4백여 명이 일부는 가면을 쓰고 일부는 공포 사격을 하면서 부대에 진입 기도, 군 지휘관의 설득으로 돌아감. (31사단 전투상보)
미국의 공식적인 개입
- 토머스 로스 미국방성 대변인 발표/존 위컴 유엔군 및 한미연합군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
- 미국 관리들은 대한 군사원조를 축소하는 문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힘. (동아일보, 5. 22)
- 미국무성 성명/광주사태 평화적 해결을, 당사자 자제 대화 희망, 확대되면 외세 오판 위험, 공약 따라 강력 대처. (동아일보, 5. 22)
08:40
- 목포. 버스 탈취한 폭도 20명, M1 소총 무장하고 복면 시위. (계엄사 상황일지)
09:00 종합병원으로 가족을 찾아나서
- 방송차량,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도청 앞에 모이자고 외침.
- 도청 앞에서 강원도 출신 공수대원 1명을 생포함. 그는 '광주시민의 70퍼센트 (490,000명)를 죽여서라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자백. (5.18 광주 민중 항쟁자료집)
- 전남대 의대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도 시위대들이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통행은 자유로웠다. 영안실 앞은 울음바다였다. 시체는 모두 18구였다. 병원측은 영안실이 비좁아 영안실 옆 공터에 텐트를 치고 시체를 옮겨놓았다. 영안실에는 신원이 확인된 10구가 관에 안치되어 있었고, 텐트 속에 있는 8구의 시체는 광목으로 얼굴을 가려놓았을 뿐이다. '행여 내 가족이...' 하는 시민들이 광목을 들춰 얼굴을 확인하다가 가족이 아니면 안도의 숨을 토했고, 자기 아들임을 확인한 50대의 한 아주머니는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기도 했다.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아들 이름을 부르며 하늘을 바라보고 호곡했다. 이 병원에 입원한 40여 명의 부상자들은 병실이 모자라 복도에 누워 있었다. 대부분의 부상자는 20대 청년들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도 마찬가지였다. 오전에 확인한 사망자는 전남대병원 18명, 기독병원 14명, 적십자병원 21명, 성요한병원 2명, 시내의원 3명, 조선대 부속병원 4명 등 모두 62명이었고, 부상자는 1백50명이었다. 실로 엄청난 사상자였다. (월간조선, 1985. 7)
* "전날 집에서 공수들에게 잡혀간 남편을 찾아 전남대로 갔다. 전남대 운동장에는 계엄군이 버리고 간 천막, 취사도구 등이 즐비했다. 수위실로 가서 남편의 외모를 설명하며 혹시 이런 사람 보지 못했느냐고 묻자 '아주머니, 남편의 허리띠를 구별할 수 있겠소?'라고 했다. 내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하자 이학부 건물을 가리키면서 그곳으로 가보라고 했다. 이학부 건물로 가서 발을 들여놓기도 전에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역한 냄새를 맡으면서 강의실로 들어가니 바닥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어 발이 빠질 지경이었고, 한쪽에는 수백 개의 허리띠와 옷가지들이 한무더기나 쌓여 있었다. 그곳에 남편의 잠바와 바지가 있었다. 연행 12일 만에 조선대 부속병원에서 남편의 시신을 찾았다." (구술 : 김옥자, 현사연 조사)
- 목포. 중앙교회에서는 교계 지도자, 재야인사, 경찰대표 등이 모여 시민 지도자모임을 11시에 행복동 소재 안철(34세, 기독교장로회 청년회 전국회장 역임) 집에서 갖기로 계획. (현사연 조사 종합)
09:20 광주교도소 총격전
성과 : 사살 1, LMG 1정, M1 1정, 실탄 230발 노획. (전교사 작전일지)
- 우산동 야산의 총격전.
* "회사 동료들과 함께 차를 타고 서방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 시민들이 길을 가로막더니 계엄군이 교도소 부근에 매복해 있다고 하면서 총이 있는 사람만 교도소 쪽으로 나가게 했다. 우리는 총만 있고 실탄은 없었지만 동신고를 지나갔다. 말바우시장 사거리에 15명 정도의 시민군이 교도소 쪽을 향해 일렬횡대로 서 있었다. 우리 차가 앞으로 나가자 시민군들이 조심하라고 했다. 금방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 같아 조마조마했지만 내친 김에 차를 몰고 갔다. '군인이다'라는 소리에 주위를 살펴보니 야산(현 무진아파트 자리)에 계엄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때 나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팔을 부상당했으나 다른 동료들은 모두 무사했다." (구술 : 채종일, 현사연 조사)
* "도청에 있는데 동신고 건너편 야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며 총을 든 사람은 모두 트럭에 타라고 했다. 나는 25-30명의 시민군과 함께 동신고를 지나 벽돌공장 근처에서 내렸다. 동신고 건너편 야산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들이 우리를 향해 사격을 하자, 지휘관이 카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총을 쏘지 말고 M1을 가진 사람만 총을 쏘라고 했다. 우리가 계엄군과 접전을 벌이고 있을 때 우리쪽 증원군 이 계속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온 증원군 차량이 계엄군의 저지선인 무등도서관을 지나가자 그들은 차를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차를 재빨리 돌려 빠져나왔으나 시민군 1명이 부상당했다.
시민군 몇 명이 실탄을 가득 담고 야산에 있던 보리밭으로 접근하자 매복해 있던 계엄군들이 총을 쏘아댔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잠시 후 그곳에서 철수하여 도청으로 왔다." (구술 : 김현태, 현사연 조사)
09:30 피난 행렬을 향해 집중 사격
* "자식들을 데리고 화순 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9시 30분쯤 지원동 버스 종점에서 화순 쪽으로 1백 미터 정도 가고 있을 때 10여 명의 시민군이 탄 버스가 왔다. 그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 왼쪽 산에 매복해 있던 공수들이 시위차량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갑작스런 사격에 놀란 나는 길 옆 보리밭으로 몸을 숨겼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총탄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자식들이 걱정되어 고개를 쳐든 순간 총알이 내 양쪽 눈을 관통했다. 그로 인해 내 양눈은 실명되고 말았다." (구술 : 강해중, 현사연 조사)
- 광산 서창. 수미상의 폭도, 아파트에 침입하여 군인가족 색출. (전교사 작전 일지)
- 영암. 영암여고생 시위에 참여.
* "시위대가 내려오자 영암의 중.고등학교는 자연 휴교가 되었다. 상당수의 학생들이 시위대의 버스를 탔고, 뒤따라 나온 학부모들이 학생들더러 내려오라고 하고 있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갔다. 평상복 차림의 학생들은 우리가 차에 타자, 부모들의 성화에 못 이겨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교련복(하얀 바지에 체육복 상의)을 입고 구급베낭을 맨 여학생들은 우리가 올라가자 의자 밑으로 고개부터 숙였다. 이런 학생들은 우리가 손을 잡아 끌어내리려고 해도 완강하게 거부했다." (구술 : 장천일, 현사연 조사)
09:35
- 2 1/2톤 차량에 캐리바 50 설치 교도소 진입 시도 차량, 사격으로 전복시킴. 사살 3명, 생포 1명. (전교사 작전일지)
10:00 문화동 고속도로에서 계엄군과 교전
* "특공대에 소속된 나는 운암동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문화동 고속도로 진입로까지의 순찰임무를 부여받고 오전 8시부터 순찰을 돌았다. 오전 10시경 문화동 고속도로를 통해 비아 쪽으로 걸어가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시민군의 경계선을 넘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늙으신 분이 걸어가는 것이 힘들겠다 싶어 차에 태우고 비아 쪽으로 갔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계엄군이 탄 차가 왔다. 우리는 급정거하여 아주머니를 차에서 내려주고 오던 길로 되돌아갔다. 우리를 본 계엄군도 차를 돌려 고속으로 도망갔다. 어느사이 쌍방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때 나는 총알이 눈을 관통해 실명하고 말았다." (구술 : 김태헌, 현사연 조사)
- 학생들이 총기 회수 시작함. '폭력을 없애고 질서를 회복하자'는 운동이 시작됨.
- 남동천주교회 사제관에서 홍남순, 김성용, 송기숙, 조아라, 이애신, 명노근, 김천배, 이성학 등이 회합. 매일 10시경 이 성당에 모여 회합을 갖기로 협의하고 홍남순 변호사 등이 이번 사건은 너무 엄청나니 군관민 합동으로 거도적으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주장하여 참석자들이 승낙함.(공소장)
- 장동 녹두서점에서 김영철, 정현애, 정유아 등은 검정색 다우다천을 사용하여 검은 리본 2천여 개를 제작하여 나명관 외 2명에게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에게 배포함으로써 계엄군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공소장)
10:10
- '폭도들은 자중하라'는 헬기 방송을 듣고 분개한 시민, 헬기를 향해 발포. (10일간의 취재수첩)
- 군사령부 - 자위권 행사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0:20
- 교도소 방위중인 11대대 지역. 소방차에 탑승한 4명의 폭도 기습, 4명 생포. (특전사 전투상보)
10:20 - 12:06
- 국무총리, 전교사 계엄분소 방문
.계엄현황 청취
.국무총리 지시
1. 폭도들과 대화의 길 모색하라.
2. 공수부대 성격 및 훈련상태 등을 광주시민에게 이해시켜라.
3. 지역감정의 문제는 조금도 차별 없고 모든 지원을 부족함이 없이 실시하고 있음을 설득.
4. 도당국은 민방위, 예비군 조직을 이용하여 설득작전 전개. 군작전은 현지 지휘관에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5. 군작전과 선무활동을 병행하고 계속하여 선무활동 강화하라. (전교사 작전 일지)
10:30
- 해남.강진지역 폭도 2백 명이 버스 4대에 분승, 수류탄과 무기 휴대하고 장흥교도소 습격하기 위해 이동중. (계엄사 상황일지)
- 해남. 새벽 6시부터 해남읍-마사면-황산면-문해면-화원면을 돌며 시위를 계속. 10시경 해남읍-옥천면-계곡면-강진읍-영암읍-영산포읍-나주읍-무안읍-목포시 등지를 돌며 연대강화. 시위도중 계곡지서, 온천지서, 화산지서, 월성지서, 월안 지서, 우수영지서 등지에서 M1 소총, 카빈, 수류탄 등 다량의 무기를 획득.
- 강진. 오전부터 광주에서 시위차량 계속 진입. 광주 현지상황 알리며 읍민의 궐기 호소. 수천 명의 읍민,청년,학생들 자체시위. 강진읍교회에 본부를 두고 청년회의소 회원, 기독청년회, 강진농고학생, 청년들 활약.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10:40
- 조선일보 서처원 기자 눈으로 확인한 학생, 시민 사망자 20명. 학생들은 '헌혈하자'고 전단 뿌려. (월간조선, 1985. 7)
10:50 도청 앞에서 궐기대회를 준비하며 총리 도착을 기다림
- 수만 시민이 도청 앞에 모여 궐기대회. 총리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 학생들 수백 명이 총 휴대. 시민들이 경찰 페퍼포그차, 장갑차들을 몰고 질주하고 다녀. 경찰 헬멧 등 장비도 학생들이 쓰고 다니고. 어제 시가전은 예상외로 심하지 않았다. 군이 철수하면서 경찰 무장해제. 경찰간부들 권총도 빼앗아가. 그래서 경찰 불만이 심하다. 무장해제당한 경찰, 사복으로 바꿔입고 광주를 빠져나가.
22일 오전 현재 거리는 학생과 시민뿐. 곳곳에 핏자국, 불탄 자동차 잔해 등이 널려 있고, 22일 계엄사령관의 광주사태 발표는 시민들을 자극, 흥분시켰다. 중앙지, 광주 지방지 없고 이곳 방송도 안돼 전주 KBS 방송을 듣고 있다. 학생들은 강경파(군이 우리를 쏘는데 우리만 당할 수 없다)와 온건파(무기 휴대 반대, 난폭한 행동 반대)로 나뉘어 있음. 12시에 총리가 온다는 소문. 총리가 오면 학생, 시민군, 경찰, 총리 협상. 계엄사 발표 때문에 군이 들어오면 큰 충돌이 있을 것이다. 21일 도청, 도경 시민 인수 후 공공건물 파괴 전혀 없다. 기자가 사진 찍으면 박살. 도경국장집도 가정부 혼자. 이곳도 위험하여 피신하고 싶다. 다른 기자들은 빠져나갔다. 21일 오후 3시 이후 현지에서 전화하는 기자는 자신 뿐 신변위협 느끼고 있다. (월간조선, 1985. 7)
10:45
- 전교사, AH-1J 2대 도착 작전통제. (전교사 작전일지)
10:55
- 군사령부, 송정리 비행장 및 송정리 확보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1:00
- 군사령부, 도로봉쇄 지점간 간격 차단 지시
부대별 책임 지역 할당
협조점 부여 완전차단
광주시 외곽으로 탈출 방지
- 군사령부, 해안경계 태세 강화(훈련단: 해안 경계 지도). (전교사 작전일지)
- 영암. 이날 아침부터 차량획득 시작한 청년들 처음엔 픽업으로 시위. 시위대가 많아지자 계속 자동차 획득.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영암군 서호면 성재리 소재 학파농장 마을 안쪽에 2.5톤 타이탄 트럭 1대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픽업으로는 너무 좁았으므로 트럭 주인을 만나 광주의 상황과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트럭을 빌려타려고 바로 옆 민가로 들어갔다. 우리가 들어서자 30대 중반의 사내가 담을 넘어 집 옆 언덕으로 도망갔다. 트럭 주인이 도망가 버려 주인의 허락을 얻지 못한 채 우리는 픽업에 있던 소지품을 모두 트럭에 옮겨 싣고 트럭을 타고 나왔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 영암군 군서면 소재 군서지서 습격.
* "군서지서는 상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길가에 있었다. 군서지서 숙직실 부근에 있던 경관 2명과 5,6명의 방위병들이 담 너머로 우리를 쭝긋쭝긋 내다보다가 담을 넘거나 지서 앞에 밀집되게 심어진 나무 사이로 황급히 도망갔다. 지서 앞에 차를 세우고 들어가 무기고를 찾았으나 무기고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지서 본관으로 향했다. 본관 벽에 공기총 7정이 세워져 있었는데 본관을 나오면서 이춘원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며 3정을 들고 나왔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11:03
- 군사령부, 고속도로 봉쇄(확보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1:22
- 전교사, 무장 헬기 장흥교도소 정찰. (전교사 작전일지)
11:30
- 전교사, 500-MD 3대 무장화 건의. (전교사 작전일지)
\
12:00 도청 앞에서 5만여 시민 궐기대회 개최
- 신임 국무총리서리의 광주 방문 뉴스를 듣고 흥분을 다소 가라앉히며 총리를 맞이하려고 기다리던 시민들은 박충훈 총리서리의 무책임한 현지 특별담화로 인해 더욱 흥분. 광주 시찰로 취임 첫 나들이를 한 박충훈 총리서리는 광주땅에는 발도 붙이지 아니한 채 송정리에서 계엄분소장의 보고를 듣고 '무법의 도시', '폭도'라는 이름을 남기고 서울로 가버린 것이다. 박총리서리는 방송담화를 통해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의 노력으로 광주사태는 호전 되고 있다'며 '시민들은 극소수의 폭도와 불순분자들의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현혹되거나 부하뇌동하지 말라'고 말했다. (현사연 조사종합)
- 도청 부지사실에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열렸다. 최한영(독립투사), 박윤종 (전광주시장), 이종기(변호사), 조비오(신부), 윤영규(YMCA 이사), 김상형(전남대 강사), 이석연(전남대 교수), 장휴동, 신용순 등 15명의 각계인사가 모였다. 이중 위원장에는 이종기 변호사가 맡음. (월간조선, 1985. 7) - 이종기 변호사 등의 도청 수습위원회와는 별도로 홍남순 변호사, 조아라 장로, 이애신 YWCA 총무, 김성용 신부, 조비오 신부, 명노근 교수, 송기숙 교수, 이기홍 변호사, 윤영규 선생, 장두석 선생 등 15-16명이 남동성당(주임신부 김성용)에 모여 사태수습을 논의했다. 여기에 따로 모인 것은 도청 수습위원 가운데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토의결과 일단 그들의 수습방안을 들어보고 결정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기울어 도청으로 나가 그들이 제시한 7개항의 수습방안을 들어본 결과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 그 방안에 따르기 로 하였다. 그런데 그뒤 이들은 도청 수습위원들과 강온으로 갈려 수사과정에서 남동성당파(강경파)로 지칭, 전원 재판에 회부되어 무기 등 실형을 선고받는다. (현사연 조사 종합)
- 목포. 12시경 목사들, 목포대학장, 시장, 재야인사, 정당대표 등이 모여 아래 사항을 결의했다. 첫째 무정부 속에서나마 치안은 유지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민이 협력할 것.
1) 이 시간 이후부터 사태에 개입되는 데 대하여 추후에라도 보복이 없을 것 .
2) 계엄군이 목포에 진입하면 엄청난 유혈사태가 예상되므로 계엄군의 목포 진입을 중지토록 요구할 것.
3) 시장은 시위학생, 청년들에게 대용식을 제공하고 역광장에 방송시설을 준비할 것.
4) 시내에 있는 모든 식량은 외부방출을 중지하고 비축할 것. 앞으로의 모든 사태 진행 책임을 안철 씨에게 위임 결의. (1980년 민주화운동)
- 전남일보 현관에서 무기 회수.
* "도청에서 무기 회수를 한다는 방송을 했다. 전남일보 앞에서 7, 8명의 학생이 무기 회수를 하고 있었다. 건물 지하계단에 약 2백여 정의 총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학생들을 도와 무기를 회수했다. 기관총과 LMG를 회수했다. 그곳에서 약 3백 정의 무기를 회수하여 도청으로 운반했다." (구술 : 김정현, 현사연 조사)
* "나는 도청에서 기동순찰대원으로 뽑혔다. 5명 1조로 조를 편성하여 차량운행증을 발부받아 그때부터 지프차를 타고 다니며 외곽지역 순찰업무를 수행했다. 외곽지역 순찰시간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계엄군과 대치지점까지 가서 위급상황이 발생하는지 살피는 일을 거의 하루 내내 했다. 그러다 자동차의 연료가 떨어지면 도청 상황실에서 지정해 준 주유소에서 급유했다. 광천동 공업단지 입구에는 시민군의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비행기 잡는다는 케리바50이 설치되어 있었다. 통합병원 부근에는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운 계엄군이 주둔해 있었다." (구술 : 오인수, 현사연 조사)
12:30
- 광주 전신전화국 폭도 침입. 시외전화 개설 강요.
- 불응시 폭파하겠다고 협박. (전교사 직전일지)
- 종합병원에 사망자의 인상착의를 적은 벽보 부착.
* "나는 후배들과 함께 적십자병원으로 가서 총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병원내 사망자와 부상자에 대한 상황체크를 했다. 적십자 병원은 부상자로 붐벼 입원실이 부족했다. 환자들은 신문이나 옷을 깔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간호원의 일을 도와주기로 하고 적십자병원에 있는 사망자의 인상착의, 옷 등을 기록하여 병원 벽에 붙였다. 또 사진이 접수되면 확인하여 벽에 부착했다. 영안실은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해 얼음주머니를 갖다놓았다. 그렇다고 부패로 인한 역한 냄새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영안실에 있던 시체 중에는 머리 부분이 없는 시체도 있었다." (구술 : 정준, 현사연 조사)
13:00
- 화순에서 폭도 2명 1/4톤 차량으로 광주 진입. 군 진격, 사살 1명, 생포 1명, 카빈 2정, 실탄 60발, 현금 11,320원 회수. (전교사 작전일지)
- 오창환 목포대학장, 시내 야당인사, 종교인, 이병대 목포시장 등이 모처에 모여 난폭해져 가는 데모를 건전하고 평화적인 시위로 설득키로 결의. (월간조선, 1985. 7)
- 무등도서관 앞 총격으로 1명 사망.
* "무기를 회수하기 위해 친구와 함께 도청 앞에서 지프차를 타고, 시내곳곳을 돌아다녔다. 서방을 지나는데 교도소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동신전문대를 지나 무등도서관 쪽으로 갈 때까지도 총성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가까이 접근해서 확인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무등 도서관 부근에서 차를 돌리는데 우리가 탄 지프차에 계속 총알이 날아왔다. 총소리가 잠잠해지자 급히 차를 몰고 서방 쪽으로 가는데 아주머니가 차를 세웠다. 총에 맞은 사람이 있으니 빨리 병원으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는 그를 싣고 계림동의 어떤 병원으로 갔다. 잠시 후 그는 병원에서 숨지고 말았다." (구술 : 정영동, 현사연 조사)
- 11여단 외곽지역 봉쇄 작전 및 3여단 교도소 방호 작전 임무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 해남. 무기획득 차량이 군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도착. 차량 50대로 해남읍 소재 군부대 점거를 시도했으나 해남군 당직자와 군부대장의 설득으로 포기. (1980년대 민주화운동)
14:00
- 광주 전신전화국에 무장청년 1명이 들어와 전화국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이 잇달아 들어와 이를 저지, 학생들이 경비를 섰다. 사태가 누그러지자 학생들은 국내기자들에 대해 태도가 나아져 기자들에게 학생대표들이 증표를 주어 도청에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전히 도청 출입은 통제중. (월간조선, 1985. 7)
목포역 광장에서 궐기대회
- 1만여 시민이 집결한 목포역 광장에서 '목포시민 민주화투쟁위원회' 주최로 제1차 민주헌정 수립을 위한 시민궐기대회 개최. 위원장 안철은 '광주시민 학살은 자유시민을 억압하던 유신독재 잔당들과 군인들의 정권욕이 결탁하여 빚어낸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반역사적, 반민족적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 시민 스스로 치안대 조직. 시위대의 모든 무기는 '민주투쟁위원회'에 반납 요구. 평화적 투쟁 주장. 희생이 필요한 경우 앞장서겠다고 다짐. (1980년 민주화운동)
- 피고인 윤금석, 동 이남범은 소총, 각목 등을 휴대한 성명미상자 30여 명과 전남 5자 1359호 버스에 타고 시위하던 중 1980. 5. 22 14:00경 무안군 현경면 소재 무안경찰서 현경지서에 이르러 성명미상자 5,6명이 동지서에 침입, 공포를 쏘며 동지서 사무실 출입문, 전화,창문 유리,텔레비전 등 시가 63만 4천 원 상당을 파괴할 때 이를 격려할 목적으로 동 버스에서 각목 등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하면서 파괴행위를 용이하게 하고 (공소장)
- 목포. 궐기대회 후 시가행진. 시민들은 푸짐한 음식, 음료 제공. 이러한 시민의 일치된 협조는 마지막까지 계속. 각종 성금 모아짐.
- 무장시위대 백여 명, 대형 소방차, 해군 지프차, 교회버스 등에 분승, 법원.검찰청 등 공공건물 파괴. 목포대 학생과 청년회의소 직원들, 그들에게 '목포에서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며 카빈총과 M1 탄피 등 회수. (1980년대 민주화 운동)
- 피고인 박창남은 공소외 김용택, 동 임채분, 성명불상자 10여 명과 합동하여 5. 22 14:00경 나주군 왕곡면 양산리 소재 양산단위조합 창고 뒤 공터에서 동소에 세워진 대한통운 소속 전남 8아 1162호 12톤 트럭에 올라타고 위 김용택이 운전하여 감으로써 약탈하고, 공소외 김용택, 동 성명불상자 2인과 공동하여 같은 날 15:30경 해남읍 성내리 소재 해남경찰서에 침입하여 김용택이 위의 트럭을 후진시켜 적재함 부분으로 동경찰서 무기고를 충돌하여 파괴하고 피고인 등이 동소에 보관중인 M1 소총 50여 정을 가져감으로써 이를 약탈하고 (공소장)
오후 미국의 백악관에서 고위정책조정회의 열림
- 백악관 고위정책조정회의(PRC)/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 즈비그네프 브레진 스키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성 태평양 및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 마이클 아마코스트 국무성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니콜라이 플래트 국방성 아시아태평양담당 부차관보 등 참석/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 필리핀의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호를 한국해역으로 급파하기로 결정. (동아일보, 5. 22)
- 호딩 카터 미국무성 대변인은 22일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우리는 모든 관련 당사자들이 최대한의 자제를 발휘하고 평화적인 문제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대화를 갖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이 성명은 계속되는 불안과 소요의 확대는 외부군사력에 의한 위험한 오판을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정부는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어떤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상의 의무에 따라 강력이 대처할 것임을 거듭 천명한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5. 22)
14:30
- 시민들이 1만여 명으로 늘어나자 구용상 광주시장이 비행기에서 호소전단을 살포.
- 영암. 학산지서 접수. 무기고에 무기가 없자 기물을 파손하고 오토바이 탈취 .
- 같은 날 14:30분경 영암군 학산면 소재 학산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키 위해 상 피고인 박찬재, 동 박재택, 동 최준, 동 서성규, 동 이춘원 등이 동지서 예비군 무기고 문을 쇠파이프, 각목 등으로 파괴하였으나 무기가 없어 실패하고 동지서 사무실로 들어가 공소외 전수용이 거울 1개 시가 1만 원을 파괴하고 동지서 소속 오토바이 1대 시가 30만 원 상당을, 피고인 한규영은 주전자 1개 시가 2천원 상당을, 동 염종문은 헬멧 1개 시가 2만 원 상당을 가지고 나와 이를 약탈하고, 위 전수용은 약탈한 동오토바이를 타고 선두에서 트럭을 지휘하였으며 (공소장)
15:00 도청 앞에서 시민궐기대회 개최
-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가 열렸다. 시민들은 이날부터 매일 오후 3시와 9시, 두 차례씩 도청 분수대 앞에서 궐기대회를 갖기로 결정했다. 원하는 사람에게 연설할 기회를 부여하는 토론과 발표의 광장을 마련했다. 시가행진의 코스와 요령 및 선언문 내용, 그리고 시내 치안유지 방법 등이 광범위하게 토론되었으며, 광주 깡패단의 양대 강력파인 오비파와 화신파 두목들도 연단에 나와 민주화투쟁에 협력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시민들은 특히 시내 질서유지에 역점을 두고 시민들로 치안대를 구성, 경찰서장 집, 박인천 사장 집, 관공서 등까지 요소요소에 배치, 자체경비 강화로써 폭력, 방화 및 도난강도를 방지했다. 시위차량도 조직적으로 분류, 지휘차, 대변인차, 식량수송차, 무기수송차, 시민수송차로 나누어 각기 역할을 전개했으며, 또 생필품의 품귀현상을 빚자 산수 동명시장, 채소가게 등의 폭리를 엄단하기도 했다. 계엄군은 거의 외곽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오후에는 강진에서 들어오던 3대의 시위트럭이 나주 지나 남평 못 미친 지점에서 보리밭에 매복해 있던 계엄군에게 총격을 당해 타고 있던 시민들이 사살되었다. 계엄군은 헬리콥터로 전단을 뿌렸는데, 전단내용에는 '계엄군은 발포 사실 없다. 희생자는 중상자 한 명에 경상자 약간 명인데 이들은 당국에서 잘 보호, 치료중 이다'는 어처구니없는 유언비어가 실려 있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군사령부 . 군 작전참모, 참모총장에게 계획 보고
충정작전 계획 건의(23일 02:00)
. 참모총장 지시
한미간 협의사항: 24일까지 대기
무력으로 평정은 지역감정 해소 곤란
민간인을 인질로 하였을 시 대치 곤란
- 7공수 33대대, 화순 봉쇄지역에서 교전
성과: 사살 1, 생포 1, 1/4톤 차량 전소
- 송정 폭도 무기 반납 조건으로 광주시 진입 요청
폭도 3백 명 광주 진입 허용(버스 1, 트럭 3대)
회수무기 M1 37, 카빈 10, 공기총 10, 실탄1백 발 (전교사 작전일지)
15:18
- 관 위에 태극기를 덮은 18구의 시체가 도청 광장 분수대에 안치.
- 학생들은 협상대표가 돌아오기 전 추도식을 해야 한다며 국기에 대한 경례, 묵념, 애국가 봉창순으로 10여 분 동안 추도식을 거행.
- 같은날 15:40경 광진교통 소속 전남 5아 3019호 버스에 타고 같은 군 망운면 옥동리 소재 무안경찰서 망운지서에 이르러 성명미상자 5,6명이 공포 3발을 쏘며 동지서에 침입, 동지서 유리창, 경비전화, 비상전화, 비상벨 등 시가 39만원 상당을 파괴. (공소장)
16:00 부상자를 위한 모금운동
시민들은 사거리마다 급조한 모금함에 '부상자들을 위한 사랑의 모금함'이라는 글씨를 써붙이고 성금을 모으고 있는데 비교적 좋은 반응을 보였다. 시민들은 1백 원짜리 동전, 1천 원짜리 지폐 등을 넣어주었다. 이날 오후에는 도청 뒤 학동로터리에서 모금을 했던 한 시민은 '조금전 8만 3천2백80원을 모아 도청 시위지휘부에 전달했다'며 빈통을 들고 다시 모금하는 모습도 보였다.
16:10
- 전교사, 500-MD 1대 해남지역 정찰. (전교사 작전일지)
- 영암 미암지서 무기고 습격.
* "미암은 아주 조그마했고 2층집이 하나도 없어 빈촌으로 보였다. 지서는 완전히 비어 있었으며 무기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약간의 기물만 파손하고 나왔다. 지서 경찰들의 행방을 물으러 지서 부근 가게 앞에 차를 세우니 주인이 빵과 음료수를 내다주었다. 가게 앞에 차를 세워둔 채 빵을 먹고 있는데 마을 주민 10여 명이 나왔다. 우리가 마을로 들어가면서 구호도 외치고 차도 두드렸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나온 모양이었다. 우리가 그곳에 들어간 첫 시위대였는지 그들은 아주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16:20
- 전교사, 나주 유도탄 경계 강화. (전교사 작전일지)
16:30 영암지역 무기 회수 시작
* "영암읍의 청년들이 나주로 갔다가 무장을 한 채 버스를 타고 '농촌지도소'로 돌아왔다. '모든 무기를 반납하고 돌아가라'고 했더니 후배들은 모두 내 말에 수긍을 했다. 이렇게 회수한 무기를 우리는 영암 청년들이 타고 왔던 버스와 시위대들이 타고 다니다 버리고 간 포니 승용차에 싣고 영암종합고등학교로 옮겼다. 이때부터 우리는 본격적으로 무기를 회수했는데, 크게 두 개의 팀으로 나뉘어 최충 씨가 이끄는 팀은 영암읍 입구에서, 나와 김희규 씨가 이끄는 팀은 영암경찰서 앞에서 무기를 회수했다. 무기 회수는 24일 지나면서 거의 되지 않았지만, 우리가 회수한 무기는 M1, 카빈 소총 등 총기가 508정, 수류탄이 11발, 그리고 박스 채로 있거나 낱개로 회수된 실탄이 2.5톤 트럭의 적재함에 가득했다. 우리는 이 무기를 항쟁이 수습된 후 영암경찰서가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게 되자 그들에게 반납했다. 후일 우리 중 나와 김희규와 최충 3인은 무기 회수에 공로를 세 웠다 하여 도지사 표창을 받았다." (구술 : 김무, 현사연 조사)
- 60연대 32대대 송정 진압작전 실시, 평정 후 위력 기동순찰.
.병력배치 : 송정교 1개 중대, 삼양타이어 1/2개 중대, 광산경찰서1개 중대, 정유공장 1/2개 중대, 1종창고 1개 중대 (전교사 작전일지)
- 목포역 광장에 목포대학생 2백여 명 모여 평화적 시위를 위한 궐기대회를 갖고 3만여 명의 시민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도록 호소했다. 학생들은 또 무기를 휴대한 젊은이들에게 목포에는 계엄군이나 경찰관이 대치하고 있지 않은데 여러분이 공포를 쏘고 다니면 시민들이 오히려 불안감을 느낀다며 카빈이나 M1 탄피 등을 회수했으나 일부는 계속 공포 시위. (월간조선, 1985. 7)
17:00 계엄사와 협상결과 보고
- 전남 도청 앞 광장 시민궐기대회장에서 시민대표들이 계엄당국에 갔다 온 결과에 대하여 경과보고를 하던 중, 장휴동이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해서는 결국 폭도밖에 안 된다. 어서 빨리 모든 무기를 버리고 계엄사에 반납하여 시내 치안질서는 경찰에게 넘겨주자'라는 발언을 하자, 김종배는 이는 극히 미온적이며 광주시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즉시 연단에 뛰어올라 장휴동이 잡고 있던 마이크를 빼앗아 시민들에게 '장휴동 씨는 정치인으로서 시민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광주시민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사태수습만을 거론해서는 안 된다. 수습을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여야만 한다'고 연설 하였다. (공소장)
* "낮에 구성된 수습위와 계엄군과의 협상내용에 대한 보고대회가 도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시민대표들이 계엄당국과 협상한 경과보고를 하는 도중 장휴동이 나와서 '우리가 이런 식으로 하면 폭도밖에 되지 않는다. 빨리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사에 반납하고 시내의 치안을 경찰에게 맡기자'라는 말을 했다. 장휴동의 발언을 들은 시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을때 김종배가 연단으로 달려가 마이크를 빼앗아 '장휴동은 정치인으로서 시민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발언을 해라. 무고한 광주시민이 수백 명 죽었는데 사태의 수습만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 수습을 할 만한 구체적인 대안 없는 수습은 있을 수 없다'고 설득력있는 연설을 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통합병원 통로 확보 위한 축출작전
- 62연대 2대대, 대치 시민군과 교전. 주공아파트 및 고층건물에서 기습사격.
성과: 사살 3, 체포 25, 부상 10명
피해: 전사 1, 부상 4 (20사단 작전일지)
- 동일 16:00경 폭도 25명과 함께 광주시 화정동 소재 국군 광주종합병원 입구에서 계엄군과 대치 근무중 상무대 방면에서 시내로 진입해 오는 계엄군 장갑차 1대를 약 5백 미터 전방에서 발견하였는바, 동장갑차에 사격을 가하면 장갑차내의 사람이나 장갑차 뒤에 따라오고 있는 보병들이 사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엄군의 진입을 저지할 의도에서 동장갑차를 향하여 소지하고 있던 M1 소총 21발을 사격하였으나 계엄군에 명중하지 않아 살해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고 (공소장)
* "오후 5시경 상무대 쪽에서 탱크 1대를 앞세운 계엄군이 신학대학 부근으로 왔다. 일부는 신학대학 근처 숲에 잠복하고, 일부는 도로 양편에 늘어서서 시내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서 그 행렬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신학대학 부근에 잠복해 있던 계엄군들이 인근 주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하거나 사망했다. 내 아들도 그때 총에 맞아 죽었다." (구술 : 함병남, 현사연 조사)
* "저녁 6시가 조금 못 되었을 때이다. 집에 있는데 요란한 총소리가 들렸다. 잠잠해지자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인가 확인해 보려고 거실로 들어서는데 우리집 으로 총알이 날아들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계속 날아든 총알이 내 얼굴에 박혔다. 우리 집을 향해 얼마나 쏘아댔던지 총알이 거실 유리창은 물론이고 장농까지 뚫고 이불에 수없이 박혀 있었다." (구술 : 최복덕, 현사연 조사)
* "2층에서 방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창문을 뚫고 날아온 총알이 내 어깨에 박혔다. 남편이 총알을 빼려고 총구멍에 손을 넣었지만 피만 계속 흘렀다. 이대로 집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아 남편과 함께 맨발로 뛰쳐나갔다. 우리 집 건너편에 군용 트럭 2대가 정차해 있어 그곳으로 갔다. 트럭에는 총상환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군인이 우리를 상무대로 데리고 갔다. 상무대 복도에는 환자들로 붐벼 발디딜 틈도 없었고 신음소리, 울부짓는 소리로 가득 찼다. 군인들은 통증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몽둥이로 때리고 다녔다." (구술 : 최복순, 동상황 : 부상 -최상언, 손명선, 김철수, 유복동, 이추자. 사망 - 임정식, 김재평 외 다 수. 현사연 조사)
17:30
- 해남. 폭도 55명, 해남경찰서에 총 4발 발포하면서 점거. (계엄사 상황일지)
- 해남. 광주에서 온 시위대들이 해남경찰서 무기고를 파괴하고 M1, 카빈 4백여 정을 탈취. (5,18광주 민중항쟁자료집)
17:40
- 목포청년회의소 회원들 30여 명도 '민주시민의 대행진', '현실을 슬퍼합시다' 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목포대학생들과 함께 무기회수 운동과 함께 평화적 도보시위를 했는데, 연도의 3만여 시민들은 이들에겐 박수로 호응했으나 무기를 들고 자동차 시위를 하는 사람들은 외면했다. 목포-서울 기차나 버스통행이 안 되자 목포해안에선 1인당 1만 원씩 받고 소형 모터선으로 30명만 모이면 목포에서 군산까지 수송하고 있음(군산서 서울 가는 것은 차편이 있음). (월간조선, 1985.7)
17:55 연행학생 석방
-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누군가가 군중 틈에서 '계엄군이 들어온다'고 소리쳤다. 광장에 있던 시민들이 우왕좌왕 피신하느라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것은 연행됐던 학생 848명이 시위대가 마련한 버스와 트럭에 타고 광장으로 오는 것을 오인한 것이었다. 실상 시위대들은 흡사 군인과 비슷한 차림을 하고 있어 밤에는 구분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연행에서 풀려나온 학생들은 시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전남북계엄분소는 18-19일 양일간 연행됐던 학생, 시민 대다수를 21일부터 석방하고 있었다.
- 시위대들은 지프차와 트럭 등 차량 5대에 전남대병원에서 시체 18구를 싣고 도청앞 광장으로 나왔다. 군중을 비집고 도청 분수대 잔디에 시체를 옮겼다. 유족들은 관마다 향을 피우고 울부짖었다. (월간조선, 1985. 7)
18:00 학생수습위원회 구성
- 명노근 교수가 휴대용 마이크로 도청 주변에 있던 대학생 2백여 명을 남도예술회관 앞으로 모아 수습방안을 논의한 결과,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키로 합의. 학생대표를 선출케 하여 전남대 명노근,송기숙 교수가 조선대 학생 10여 명을 데리고 도청 서무과로 들어갔다. 그런데 도청 안에 모여 있던 일부 일반 청년들이 학생수습위원회의 구성을 반대하였다. 학생들이 사태진전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도 같았고, 수습 자체를 반대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학생들의 주도권 장악을 반대하는 것은 20일과 21일의 투쟁은 투쟁의 주류가 학생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수습을 반대하는 것은 수습보다는 투쟁의 전열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총격전 뒤의 아수라장 속에서 잘못하다가는 핏발선 젊은이들의 총구가 불을 뿜거나 수류탄이 터질 것 같은 격한 분위기였다. 밖에서는 거의 5분 간격으로 오발탄의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투쟁이든 수습이든 일단 지휘본부가 있어야 하니, 그 성격은 내일 학생들이 많이 나올 때 학생집회나 대중집회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임시로 학생 위주의 지도부를 결성하자는 송기숙 교수의 제의에 따라 장시간의 실랑이 끝에 20:00경 임시학생수 습위원회가 결성되었다(명노근 교수는 따로 정시채 부지사를 만나 수습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역시 송기숙 교수의 추천으로 위원장에 김창길, 부위원장 겸 장례반장에 김종배,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 홍보반 등의 부서를 두기로 하고, 정해민, 허규정 등이 반장을 맡았다. 2시간 가량의 격론 끝에 최초로 시민군의 지도부가 결성된 것이다. 조직이 완료되자 곧장 홍보와 차량통제 및 무기수거 등 활동에 들어가 사직공원 등 여기저기에 운집해 있는 무장시민군을 장악하는 한편 무기를 수거하였다. 무기수거는 공수단의 재공격에 대비하여 시민군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그대로 두고 길가에 버린 것이나 맡기고 들어간 것만 수거했는데, 이날 저녁 수거한 무기는 1천5백 정 가량이었다. (현사연 조사 종합)
* "대학생들이 도청 1층 상황실에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진행된 일을 점검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 위한 토론이었다. 그때 사회를 봤다. 학생수습위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임원을 뽑았다. 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에 김종배가 정해졌다. 그 명칭을 '임시학생수습위'로 결정하고 부서를 나눴다. 총기회수반, 차량통제반, 치안유지반, 사체처리반 등으로 나누어 학생들에게 역할을 분담 했다. 나는 총무를 맡게 되었다. 나는 총무로써 부서를 통괄하고 실무적인 일을 맡아서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 거의 도청에서 지냈다." (구술 : 정해민, 현사연 조사)
- 김경국, 김성섭, 나명관, 윤개원, 박용준, 동근식, 서대석, 신은주, 노영란과 공동하여 '광주시민은 각 동별로 플래카드를 들고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할 것, 최규하 정부는 물러가라, 계엄령을 해제하고 구속중인 학생과 모든 인사를 석방할 것, 투사들이여 끝까지 투쟁하자'는 내용이 담긴 투사회보 5, 6호를 16절지 앞뒤면을 사용하여 2천여 매 인쇄. (공소장)
도청 상황실에서 증명서 발급
* "도청 상황실은 차츰 드나드는 사람들이 늘어나 도저히 통제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계엄군측의 정보요원이나 공작원이 끼어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특히 '조사반장'을 담당했던 40대의 남자 두 사람은 스포츠형의 머리에다 날카로운 눈매로 보아 형사 같은 인상을 짙게 풍겼다. 이들은 거동이 수상하고 시민군에게 잡혀온 사람들을 자기들 멋대로 처리하는 등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친구와 나는 이들 둘을 쫓아낼 계획을 세웠다. 나는 한 손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다른 손에는 수류탄을 쳐들어 보이며 책상 위로 올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계엄군이 언제 반격해 올지 모르는 조건에서 지금 이 상황실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광주시민 안전을 위해 최대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내부에 믿을 수 없는 자들이 끼어들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상황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할 테니 그렇게 아시오. 우리는 모두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모두 나가고 필요한 사람들만 저희들이 불러들일 터이니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면 다른 사항들은 보고형식으로 해주 십시오.' 그러자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지만 역시 조사를 담당했던 자가 못 마땅한 듯 버티고 앉아 있었다. 나는 수류탄을 그의 턱 밑에 들이댔다. '그럼 여기서 당신과 내가 자폭해 버릴 자신이 있소?' 하고 다그치자 어쩔 수 없는지 사내는 상황실 밖으로 나갔다. 이때부터 책상서랍을 열어 제일 큰 도장을 찍은 증명서가 발급되었고, 상황실에는 증명서 소지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시민군 중 한 사람이 '뭐든지 시켜주시오. 충실히 하겠소' 하여 상황실 통제 경비를 담당시켰는데, 그 보초와 도청 정문 보초 역시 이 약속에 충실히 따랐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8:00
- 쌍촌아파트에서 교전, 폭도 4명 중상,군 1명 중상. (계엄사 상황일지)
- 함평. 많은 시민들 시위. 오후에는 시위차량에 태극기를 꽂은 채 해남, 영광 등으로 진출. 도중 엄다지서의 무기고와 군부대 공격, 다량의 무기 획득. 이 무기는 무안을 거쳐 목포로 반입.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나주지역 전력화중대 비상발령, 사복 착용으로 읍사무소에 집결 5,10명 1개조로 믿을 수 있는 사람끼리 8개조로 편성, 폭도로 가장하여 단체행동, 나주청년회의소와 합동으로 무기 회수 작전. (31사 전투상보)
- 목포. 오후 6시 카빈 소총, M1 소총 220정, LMG 2정 등의 무기 회수 완료. 목포 JC 회장이 이형래가 제3해역에 반납.
- 20만 정도의 군중이 궐기대회 후 횃불시위.
- 영암. 영암군 시종지서 접수, 무기가 발견 안 되고 주민제보에 의해 지서 뒷산 총기 매장한 곳 발견, 1백20여 정의 카빈 소총 획득, 자체무장. (현사연 조사 종합)
18:15
- 나주 예비군 대대 무기 회수, 카빈 26정, M1 12정, AR 실탄 71발, 수류탄 1발. (31사 전투상보)
- 시외지역으로 통하는 너리재 터널 봉쇄를 위해 지나가는 폭도들의 트럭 1대 탈취, 터널 입구에 밀어넣어 소각시킴. (특전사 전투상보)
18:35
- 도로 봉쇄선 설치(공단 입구, 고속도로 톨게이트, 백운동, 법원 앞). (전교사 작전일지)
18:40 영암, 옥야 무기고 습격
* "옥야 무기고는 마을 중앙 앞쪽에 있었다. 무기고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 많은 주민들이 나왔으므로 주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민 한 분이 곡괭이를 들고 와, 박이선이 무기고 자물쇠를 부쉈다. 그러나 실탄이나 무기는 없고 빈 탄창만 2백여 개 있었다. 우리는 '빈 탄창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고 투덜대면서도 50개 정도 차에 실었다."(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19:00 계엄사령부는 광주사태에 대해 발표문 발표
- 22일 오전 광주 현지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광주지역을 대표하는 지도층 인사들은 폭력난동에 가담한 기타 인원들의 대표 10명을 이끌고 지역계엄당국에 대담을 요청했다. 이들 대표는 계엄당국과의 대담에서 만약 군이 난동진압을 위해 시가에 진입하지 않는다면 자체적으로 사태를 수습, 총기 등을 자진반환할 뜻을 비쳤다. 이 밖에도 대표들은 과잉수습책의 방지, 연행자 석방, 수습 후 보복의 금지 등을 요구했는데, 지역계엄당국에서는 현지에서 조처 가능한 사항은 조처하고, 나머지는 상부에 건의하여 조처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런데 지역계엄당국은 그들이 금일중에 자진해서 무기, 탄약 등을 회수해 인계한다면 그들의 요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5. 23)
19:10
- 도청 앞 광장으로 시신 운반.
- 사망자 56. 데모군중이 시체 56구를 관에 넣어 도청 앞 광장에 놓고 7시부터 추도식. 한동안 광장이 숙연해졌으며 시체를 본 청년들은 다시 마이크를 잡고 '죽음의 참뜻을 실현하자'고 외침.
- 시민, 학생 사이에 강. 온이 맞서.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를 것 같다.(월간조선, 1985. 7)
19:20
-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헌법개정을 포함한 정치발전 문제는 최규하 대통령이 이미 밝힌 대로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다짐하고 '헌법개정은 국회안과 정부안이 빠른 시일내에 일치될 경우에는 가급적 조속한 시일내에 국민투표가 이뤄지고 정치발전도 그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저녁 7시 20분 전국에 중계된 TV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정부가 일부러 정치발전 속도를 늦추는 일은 없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고 밝혔다. 박총리서리는 광주사태에 언급, '현재 광주시내는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의 상태이며 일부 불순분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 무기를 탈취해서 군인들에게 발포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은 정부의 명령 때문에 시민들에게 발포하지 못하고 반격을 하지 못하여 울화통이 터지는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시청직원이 사무를 보고 전기, 수도가 공급되며 은행 약탈이 없는 점으로 보아 호전돼 가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5. 23)
- 19:30 나주읍 군청 광장에 집결한 시위군중에게 무기 전달.
- 동일 18:00경 무기를 탈취한다고 영암군 시종면 소재 시종지서에 침입하였으나 무기를 찾지 못하고 동지서 사무실로 들어가 피고인 이달현은 거울 1개 시가 1만 원 상당을 파괴하고, 공소외 전수용은 밍크담요 등 2장 시가 5만 원 상당을 약탈한 다음 계속하여 총기를 찾던 중 지서 뒷산에서 총기를 매장하여 둔 곳을 발견하고 공소외 전수용이 삽으로 흙을 파헤친 다음 피고인 등이 상 피고인 박재택 등과 1백20여 정의 카빈 소총을 파내옴으로써 약탈하고 이를 동일 19:30경 나주읍 군청 광장에 모여 있는 시위군중들에게 전달하였으며 (공소장)
19:40
- 영암 시종지서 뒷산에 묻혀 있던 무기, 시민군에 의해 발견.
* "지서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흙을 파헤친 자국이 있었다. 우리가 그곳을 나뭇가지로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2미터를 50센티미터 정도 파헤치니까 관처럼 생긴 나무상자가 나왔다. 상자 속에는 총열, 개머리판 순서로 여러 정의 총이 담겨 있었다." (구술 : 박재택 외 5명, 현사연 조사)
20:00 담양에서 광주로 진입하는 차에 계엄군 발포
* "교도소 소장 관사 옆 감시대에 있던 공수들이 담양에서 광주로 진입하던 시위대 차량의 바퀴를 명중시킨 뒤 차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차에 있던 시민 중 일부는 사망하고, 일부는 인근 야산으로 도망갔다." (구술 : 홍인표, 현사연 조사)
20:00 대부분의 청년들 도청에 남아 치안 담당
- 3층 이상 건물들은 오후 8시만 되면 모두 소등했고, 일부 불량배들에 의해 변두리에서 강력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월간조선, 1985. 7)
- 도청 광장에 모였던 군중들은 대부분 귀가했고, 4백-5백 명 학생, 청소년들이 남아 시가지를 돌면서 치안을 담당.
- 도청 광장엔 시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분수대에 있던 시체는 도청 앞 뜰로 옮겨졌고 일부 유가족들이 시체를 지켰다. 거리는 다시 시위대들이 장악했다. 차량은 꼬리를 물고 시내를 질주.
- 시외로 빠져나가는 화정동 공업단지 입구와 고속버스 진입로, 목포로 빠져나가는 백운동, 화순으로 향하는 길목인 지원동 무등중학교 앞, 교도소 입구 등 5개 지역에서 군인과 시위대들이 5백-6백미터의 거리를 두고 대치.
- 시가지 중심지에서 시위대들이 통행인을 검문. (현사연 조사종합)
20:30
- 해남. 군부대병력이 증강되고 상부에서 발포명령을 받고 시위대에게 자체수습을 종용. 시위대는 자체수습을 전제로 발포시간을 연기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공식적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나 무장세력을 중심으로 한 상당수는 계속 시위. (1980년대 민주화운동)
21:43
- 전교사, 기교 전차대 9대, 31사에 도착. (전교사 작전일지)
- 영암. 신북고교 1,2년생과 송정리 정광고학생 10여 명, 지역거주의 십대 후반 청년들이 합세하여 낮에 총기를 발견했던 부근 재수색, 카빈 소총 40정과 M1 소총 5정 발견. (1980년대 민주화운동)
22:00 무기 회수를 둘러싼 대립
- 수습위와 계엄분소장과의 협상내용에 관해 대학생들은 수긍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였으나 일부 시위군중은 완강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학생들은 현재 사태가 크게 벌어지자 뒤로 물러서려는 음직임이 나타났고 청년들은 광주시민의 핏값에 보답하지 않고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의견대립으로 도청내 분위기는 굉장히 살벌했다. 이 시간, 시민들은 대부분 귀가했으며 시내를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백-5백 명의 청년과 고등학생들이 시내치안을 담당하며 통행인을 검문했다. 유족들은 분수대 둘레에 있던 시신을 도청 앞 뜰로 옮겨 밤새 곁을 떠나지 않고 통곡했다. 현재 3천5백 정 정도의 총기가 시민 수중에 있고 회수된 것은 2백-3백 정 뿐이다. (월간조선, 1985. 7)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지하실에 시체 18구 전시. (계엄사 상황일지)
22:30
- 수습대책위원회는 학생들과의 협의에 진전이 없자 귀가.
- 관 옆의 시민들과 총기를 가진 시민들은 아직도 과격. 오늘은 소강상태로 넘길 듯.
- 목포. 자동차 시위자 등 4백여 명, 무기 일부와 수류탄 회수 못 했음. (월간조선, 1985. 7)
- 목포. 사복군인이 역청사에 방화하려다 시민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후 병원으로 후송. (1980년대 민주화운동)
* "21일 오후부터 시위대는 무장했으나 시민에게 위압감을 주는 무기는 회수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매일 4만-5만 명이 목포역 광장에 모여 시위에 참가했으며, 3차에 걸쳐 실시된 횃불시위에는 12만-15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5월 22일 목포 민주시민투쟁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나는 집행부의 기획실장을 맡아 역전 광장에서 궐기대회를 기획하여 광주진상보고대회를 갖었고 횃불시위를 주도했다." (구술 : 양지문, 현사연 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