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여행
오희숙
머리 속에서는 자꾸 잔꾀가 난다. 몇일전 부터 꽁지뼈가 묵지룩하게 아파오는데 피곤하고 움직이기가 싫었다. 가지 말까? 안돼 그러면 애들이 놀라 그 복잡한데 내려올것이 아닌가 그냥가자 큰 마음을 먹고 갔다. 기차로 두시간 반을 가서 지하철을 탔는데 앉아 있는대도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자꾸났다. 옆 사람 생각도 안하고 힘이 드니 저절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버스를 타고 또 두시간. 옆 사람이 "멀미나세요? 창문을 열어보세요" 불안했던 모양이다. 간신히 아들네 집에 도착해서 그냥 누웠다.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아파서 못 만나겠다 했드니 기여큼 만나잔다. 내일 아침에 봐서 연락한다고 전화를 끊었다. 아침이 되니 좀 나아 약속을 하고 가서 만나서 맛있는 점심 먹고 수다떨고 왔다 또 힘이 들었다.
삼일째 명절 전날 용미리에 자고 있는 영감을 찾아갔다.가면 왔느냐 잘있었느냐 말도 없는데 가서 물끄러미 보고만 온다. 아들이 일년에 네번은 꼭 찾아간다. 명절 두번 기일날, 어버이날 나는 옥천에 와서는 명절에 한번 갔다. 이번에 들려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그 방안에 한 곳에 노란 딱지가 붙어있었다. 애 저건 뭐냐? 관리비 미납 고지서란다. 후손과 연락이 안되었나 다른 가족도 이렇게 밀리지 말라는 경고인가 죽어있는 사람 문패에 고지서가 왠 말이냐. 이천년 그 때는 화장 장려할때라 우리는 십오년에 일만 오천원이었다. 물론 화장하는데도 무료 였다. 이 한방에는 그때 몇일내로 다 이곳에 온 영혼 들이 있는 곳이다. 큰 아들 집에와서 큰 아들에게 물었다. 올 해가 십오년이니 다시 연장 계약을 할 때다. 아들이 곧 인터넷에 들어가보았다. 연장대상에 들어 있고 앞으로는 오년만큼 이란다. 많이 올랐다. 타지 사람은 화장 하는데 일백만원 서울 시민이나 경기도사람은 구만원이란다. 관리비와 시설 사용비를 합쳐서 오년에 오십만원쯤 된다. 참 싸게 십오년을 있었다. 오년에 오십만원 그것도 싸다.하지만 그것도 못 내서 딱지가 붙었다. 산사람 살기가 얼마나 급급했으면 독촉 딱지까지 붙였을까 얼마 안드려서 한곳에 몇 천명 들어가게 하는 수목장도 있다. 경치는 참 좋다.공기도 맑다. 그곳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우리는 선산도 있고 국립대전 현충원으로도 갈 수 있어 구테어 이곳에 갈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산과 묘지 관리하기가 어려움을 알고 병원에 가면서 유언을 한것이다. 앞으로는 애들이 못할거란다. 화장터로 가면서 되돌리고 싶은 마음을 참고 갔다. 그래 다음에 산 한곳에 합동 가족 납골당을 만들면 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 다음 윤년에 옮기려고 하니 형제들이 반대가 있어 못했다. 몇년 더 있다 아닌게 아니라 관리해주시던 분이 갑자기 교통 사고로 돌아가서 조부모 부모님 모두 화장해서 납골당에 모셨다. 앞으로는 죽은 사람 갈길이 문제다. 산 부모도 모른다고 할 판에 죽어서 걱정하겠는가 추석 여행을 하면서 저 나라 갈곳 까지 마음으로 잘 다녀 왔다. 장기기증 시체 기증은 어떨까?
엄마냄새
원당 오희숙
오늘도 분주한 아침이다. 차량으로 유치원에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탄 손녀가 뒤 따라 들어가는 할미에게 “할머니 엄마 냄새가 나~” 한다. 머리를 감고 채 마르기도 전에 급히 나간 여인의 삼푸 향이 상긋하다.
엘리베이터는 냄새를 잘 흡수하나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 배달을 했으면 피자 냄새, 자장면 배달이면 자장면 냄새, 쓰레기 냄새, 담배를 피우고 갔으면 담배 냄새가 난다.
순간 내 살아온 나날이 빛의 속도 같이 머리 속을 스친다. 부끄럼 없이 살았나, 철없던 육십 오년 동안을.
육남매 중에 유난히 연약했던 나를. 부모님은 늘 걱정했다. 언니와 나는 여덟 살 차이가 난다. 언니 위로 둘이 죽고 밑으로 둘이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말씀은 하나님과 반타작을 했다고 하신다. 예쁜 짓 좀 할 때면 죽었단다. 밑으로 남동생을 바로 보아서 젖이 일찍 떨어졌기 때문에 할머니 빈 젖을 빨며 자랐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참 우량아 같았는데 그 동생마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초등학교 삼학년까지 할머니 빈 젖을 먹은 것 같다. 요즘 아이들 공갈 젖꼭지 빨 듯 할머니 젖을 그리워했기 때문에 학교로 젖 먹이러 오실 정도였다.
초등학교 사학년부터 신경통으로 다리가 아팠다. 비가 오려면 미리 일기 예보를 했으니 얼마나 걱정이었을까. 시집보내 놓고는 나약한 딸 아파서 시집살이 못 하고 쫓겨 올까봐 걱정을 했단다. 그래도 탈 없이 시부모 남편 사랑받고 잘 살았다. 어느 날 둘째 아이 오줌을 뉘고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엄마 생각이 났다. 내 나이 때 엄마가 고생한 생각이 떠올라 시집 온지 오 년 만에 울며 편지를 썼다.
내 일생 중 가장 고생했을 때다. 아버지의 외도로 가정이 파탄 지경이 되었을 때다. 삼대독자에 아들 못 낳아 자손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엄마는 집을 나가 인천으로 갔다. 돈을 벌어 언니와 나를 데려다 키우겠다고 나간 것이다. 언니가 중학교에 갈 때 엄마는 예쁜 본견 원피스와 언니 옷을 한 벌 사서 보냈다. 나는 그 옷을 입고 동내 사람들에게 자랑 했다. 엄마가 옷 보냈다며 싱글 벙글 웃는 모습에 엄마 친구들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철없이 좋아하는 것이 불쌍해 보였나 보다. 이런 이야기를 다 써서 장장 다섯 장을 보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다 기억했냐고 우셨단다. 그 때 내 아이 여섯 살이었다. 그 후로는 무탈하게 산 것 같다.
엄마는 솔직히 정이 없었다. 엄마 냄새보다는 할머니 냄새를 더 맡고 살았기 때문이다. 하루는 할머니가 잠자는 우리를 후려 치셨다. “이년들아 내가 밤새 잠을 잔줄 아냐. 주리를 틀었지.” 작은 키도 크느라 밤새 할머니를 괴롭혔나보다.
할머니는 손녀딸들을 돌보고 엄마는 돈을 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머니가 더 좋았고 정도 더 들었다. 엄마는 신발 신을 새도 없이 일을 했다. 딸 셋이 먼저 신을 신고 나가면 엄마신은 밑창 없는 신만 남았다. 엄마 죄송합니다. 엄마 사랑합니다. 자식에게 나는 어떤 냄새일까? 이순이 되었는데 늦은 엄마의 냄새가 젖어든다. 내일은 엄마 산소에 국화꽃을 한아름 안고 가야겠다.
빈손
오희숙
명절도 닦아오고 해서 지인들에게 작은 선물을 하려고 비와이시 가게를 들렸다.
선물을 하려면 신경이 쓰인다. 무엇이 적당할까 내 형편과 그쪽 받을 사람의 성향에 맞는 것이 무엇일까다. 그래도 속 옷 같으면 언제나 입을 수가 있을것 같아 가게에 들린것이다.
펜티 브래지어를 보니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가격을 물어 보았다 “ 너무 높은 것을 보신 것 같아요” 얼만데요? 이십 삼만 팔천원이란다. 지인에게 늘 받기만 하고 보답한 게 없어 큰 맘 먹고 이번에 생일선물로 속옷이나 보내볼까 하고 나간 길이었다. 천연스럽게 눈은 안 늙었나 보다고 웃었지만 정말 놀랐다. 그런데 그 것을 보고 나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액세서리는 어떨까 하고 백화점 코너로 가서 팔찌를 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니 육십이 만원 사심 오 만원 적혀있었다. 아니 금도 아니고 보석도 아닌데 뭐가 이리 비싸다니. 같이 간 일행에게 물으니 디자인과 수공예라 그렇단다. 속으로 참 비싸구나 중얼거리며 빈손으로 나왔다. 선물이라는 것이 참 그 사람에게 맞게 준다는 것이 어렵기는 하다. 부모님에게 어버이 날이나 생일에 겉 옷을 사오면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저희들은 고심을 해서 샀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부모들도 가벼운 현금이 좋다고 하나보다. 나도 현금이 좋다, 김영란 법으로 십만 원 이상 이면 법에 걸린다고 했다. 나는 십만 원은 큰 맘 먹은 건데 할 것이 없다. 처음에 그 비싼 것을 보지 말았어야 하는데 본 것이 탈이다.
지인이 나에게 생일 선물로 꽃바구니를 들고 오는데 뒤에서 할머니가 따라오면서 “쯧쯧 저게 며칠이나 갈까 에구 저게 며칠이나 갈까” 하면서 따라 오드란다. 한두 번 하고 말지 계속 따라오며 그래서 민망해 죽을 뻔했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책으로 했다. 누구에게 선물을 한다거나 집을 방문할 때도 신경 써지는 것이 선물이다. 나도 계획했던 대로 현금로 해야겠다.
이런 경험도 재미있게 쓴 편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