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峰(1890-1969)
선-교 회통한 근대 스승
1969년 4월 17일 입적
설봉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에서 선(禪)과 교(敎)를 두루 섭렵한 대표적인 스님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선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렀으면서도 『선문촬요에 토를 달고 『벽암록(碧巖錄), 『무문관(無門關)등 교학 강의 있어서도 당대 제일로 손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설봉 스님은 1890년 함경북도 부령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영특해 출가하기 이전부터 이미 스님은 『논어와 『맹자등 유학(儒學)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다.
25세 되던 해 안변 석왕사에서 성파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설봉 스님은 이때부터 제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전을 열람하며 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라 하여 경전을 멀리하던 풍토가 심했던 당시 한국불교계였지만 스님은 참선과 동시에 경학을 중시했다. 경전은 깨달음으로 가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출가 전『논어좭『맹자』섭렵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스님은 출가 전에 유학을 연마하며 익힌 한문실력 덕택으로 다른 어떤 선사들보다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이후 스님은 서울 선학원에서 포교사를 맡아 교화에 힘썼는가 하면 범어사 내원 선원 등 제방의 선원에서 조실로 추대되어 널리 임제의 선풍을 선양하는 데도 앞장섰다.
스님은 탁월한 인품과 월등한 문장력과 서예 솜씨, 높은 도력으로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다. 선승이면서 청빈한 수행자 삶 실천도 어느 강백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경학에도 뛰어났던 설봉 스님은 후학들을 위해 ‘선가한화(禪家閑話)’ 등과 같은 시를 남겨 학업에 정진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다.
저잣거리의 걸인과 다를 바 없이 검소함으로 일관했던 스님은 분수에 넘는 욕구는 수행에 있어 오히려 장애가 된다며 선 밥을 먹고 국물이 없어 말라붙은 국을 들이키면서도 스스로 배부르고 만족해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스님은 술과 담배를 즐겨했다. 그러나 스님은 비록 술 담배를 즐기기는 했으나 여기에 끌려 다닌 것이 아니라 그것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무애행을 몸소 보여왔다.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하고 평생을 수행과 후학 양성을 위해 노력했던 설봉 스님은 1967년 4월 17일 입적했다.
<사진설명>설봉 스님이 주석했던 원산 설봉산 석왕사
“부처있는 곳 없는 곳에도 住着말라”
禪敎에 두루 정통…평생 청빈한 삶 고집
일체의 名利 거부…저자거리 포교 나서기도
“도(道)를 닦는 사람에겐 세상의 즐거움이란 아주 큰 독약일 뿐이다. 차라리 남에게 천대를 받으면서 초목과 함께 썩을지언정 나는 결코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을 것이다.”
갓 출가를 한 설봉(雪峰)은 내심 마음을 다잡았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대자유인이 되어 세상을 맘껏 희롱하는 걸출한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가기 위한 위대한 여정을 떠나려는 그가 이 정도의 신조를 갖는 것은 장부로서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출가해 선문(禪門)에 들기는 하였지만 설봉의 행동거지는 남다른 점이 많았다. 무엇이든 소유하지 않는 삶, 어쩌면 그에게는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는 ‘흐르는 자’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설봉은 내로라하는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서 전국을 돌았다. 어디든 선지식이 있어 혜안(慧眼)의 경계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지체없이 발길을 옮겼다. 또 설사 동년배의 도반(道伴)이라고 하더라도 법이 높으면 청해 듣기에 일체의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구법행각에 나서기를 수십년. 그러나 웬일인지 답답한 마음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지식들이 내려준 말대로 실천을 하려는 마음을 냈다가도 간절함이 부족한 탓인지 문득 용이심(容易心)이 솟아나곤 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그 뜻이 가물가물 피부에 와 닿지 않았고, 때로는 마음이 두 갈래로 갈려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뇌리를 어지럽힐 뿐이었다.
공부가 순일(純一)하게 이뤄지지 않을 때의 괴로움, 그 고통의 깊이를 겪어보지 않은 이가 어찌 알 수 있으랴!
오래 전부터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개에게 불성이 없다(狗子無佛性)’는 화두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이 되어 좌우상하를 온통 캄캄하게 한 채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형국이었다.
“아, 화두(話頭)가 풀리지 않는 이 답답함이란! 답답한 것을 그냥 이대로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출가이래 수십 년을 가난하게 지내며 온갖 역경과 애로를 견뎌왔건만 화두는 무쇠로 된 소(鐵牛)와 같아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보아도 조금도 깨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구나.”
‘개안(開眼)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금생의 인연을 마치는가’라는 자괴감에 늘어진 어깨를 한 설봉은 뉘엿뉘엿 지는 해 마냥 맥없이 육신을 굴려 계룡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신령스러움이 배어있는 명산 계룡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저 기괴한 바위와 고목(枯木), 그리고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계곡 물이라니! 저마다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풍광을 감상하며 설봉은 습관처럼 발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옮기기를 거듭했다. 이윽고 저만치 천년고찰 동학사가 그 고졸한 자취를 드러냈다.
법당에 들어선 설봉은 향에 불을 사르고 부처님 전으로 나아갔다. 뇌리를 짓누르는 답답함이 저 향연처럼 훨훨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향로에 정성껏 향을 꽂았다. 그리고 부처님 전에 간절한 오체투지(五體投地)를 올렸다. 간절함이 복받쳤는지 불끈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동학사에 여장을 푼 설봉은 부처님 전에 향 공양을 올리고, 마당을 쓰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기를 꽤 여러 날, 그러나 불안하고 짓눌린 마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설봉은 방안에서 지인(知人)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홀연히 눈이 열리는 경계를 경험했다. 불법(佛法)의 대의와 우주만유의 근본원리가 확연히 드러나는 궁극의 경지, 천근처럼 자신을 짓눌렀던 답답함은 일시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막상 지혜의 눈이 열리고 나니, 그렇게 막막하게 다가왔던 불법의 대의는 너무도 간결하고 분명한 것이었다.
“옛 어른이 말하기를 작게 잡으면 3일이요, 크게 잡으면 7일이라 하였거늘 나는 둔한 근기(根機)로서 오늘에야 이 경지에 이르렀구나. 그 병의 근원을 찾아보니 다른 게 없고 가마득한 생각을 낸 채 절실하게 밀고 나가는 힘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이 일은 모름지기 성깔이 조급한 놈이라야만 하는 것을 … .”
설봉은 마치 석존이 깨달음을 성취한 뒤 3·7일을 선열정에 들어 있었던 것처럼, 자신의 경지를 찬찬히 점검했다. 오랜 역경 끝에 이룬 깨달음의 기쁨! 그의 얼굴에는 환한, 그리고 감동어린 미소가 감돌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안면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설봉의 입에서 깨달음의 노래(悟道頌)가 흘러나왔으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동으로 서로 안개 속을 헤매다가
계룡산에 와서야 문득 쉼을 얻었네.
만약 누가 조주의 뜻을 묻는다면
해는 서산에 지고 달이 동녘에 솟는다 하리.
劃東指西霧中行
始到鷄龍便卽休
若人問我趙州意
日落西山月出東
개안(開眼)의 경지에 이른 설봉은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무애자재한 도인(道人)의 전형을 말한다면 바로 그를 두고 이르는 것일 터였다. 설봉이라는 그의 법호대로 그가 경영한 일생은 눈 덮인 산봉우리 같이 온갖 티끌을 벗어버리고 항상 서릿발 같이 찬바람을 날리면서도 고고한 자태로 유유자적하면서 험란한 인생살이에 뛰어들어 마치 불 속에서 연꽃이 피워내듯 탈속한 삶 그 자체였다.
설봉은 1890년 함경북도 부령군 부령면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출가하기 이전에 이미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등 유학(儒學)의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다.
25세 되던 해 안변의 석왕사에서 성파(性坡) 화상을 은사로 출가한 후 운수행각에 들어갔다. 제방의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며 법을 물었고, 참선을 하는 중에 틈틈이 장경(藏經)을 열람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여느 선사들과는 다르게 경학에 능통했던 이유는 출가전에 유학을 연마하며 익힌 한문실력에 간경(看經)에 힘쓰는 부지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찍이 서울 선학원에서 포교사를 맡아 교화에 힘썼는가 하면 범어사 내원선원 등 제방의 선원에서 조실로 추대되어 널리 임제의 선풍(禪風)을 선양하는데 앞장섰다.
탁월한 인품, 월등한 문장력과 서예 솜씨, 높은 도력을 두루 갖춘 설봉이었기에 그가 가는 곳은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다. 게다가 까탈스럽지 않고 소탈한 성격인지라 뭇중생들의 접근이 용이했다. 처음 대하는 사람이면 누구도 그가 벽안의 대종사이자 경학에 두루 정통한 선지식임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행동은 평범하고 자연스러웠다. 출가 당시의 신념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터라 항상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거나 손톱만큼의 명리에도 연연해하지 않았던 까닭에 순박한 대중들에게는 더없이 가까운 스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소탈한 그였지만 티끌만큼의 명리라 하더라도 혹 그에게 접근해올 우려가 있으면 무섭게 뿌리치는 매서운 면을 잃지 않았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행동을 먼저 옮기는 것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그러나 설봉에 있어 이것은 일상생활에 지나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은 일반인들에겐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는 불가사의한 일을 예삿일로 행하는 그런 인물이었던 것이다.
선승이면서도 어느 강백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졌던 설봉은 후학들을 위해 손수 붓을 들어 ‘무문관(無門關)’에 다시 평송(評頌)을 더한 ‘선가한화(禪家閑話)’ 등 여러 편의 시(詩를) 남기기도 했으니, 선교(禪敎)에 능통한 그를 스승으로 추앙하는 인파가 날이 갈수록 늘어간 것은 정한 이치가 아닐 수 없었다.
다음은 ‘선화가화’에 실려있는, 설봉이 늘 참구했던 조주의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화두에 대한 게송.
저울머리를 밟으니 굳기가 쇠같은데
부처와 조사들이 원래 모두 모르도다.
두 개의 진흙소가 싸우며 바다로 들어가고
금까마귀가 밤중에 하늘을 뚫고 날으도다.
있다느니 없다느니 모두가 옳지 않다.
백년 요괴가 헛된 입을 열었구나.
우리 집엔 일이 없어 한가한 전지에는
해가 서산에 지자 달이 동녘에 솟는구나.
踏着秤頭堅似鐵
佛祖元來總不知
兩個泥牛鬪人海
金烏夜半澈天飛
道有道無總不是
百年妖怪虛開口
吾家無事閑田地
日落西山月出東
설봉의 활약은 침체되어 가는 한국 선문(禪門)에 청신한 선풍을 일으켜 혼미한 구름을 거두는 일대전기를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가 가는 곳은 그의 살아온 모습만큼이나 걸림이 없었다. 선방에서는 장군죽비를 들고 기강을 바로 세웠고, 법문을 하기 위해 법상에 올라서는 당당한 위의로 사자후를 토해내 청중의 폐부를 찌르는 정법을 선양했으며, 저자거리에 나서서는 중생들과 어우러지며 그들에게 감로법문을 내려 주었다. 그런 행위야말로 실로 축생, 아귀, 지옥, 아수라, 인간계, 천상계의 6도(六途)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그 세계에 들어가 이타교화(利他敎化)하는 방편을 드리우는 입전수수(入 垂手)의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설봉은 문장에도 탁월한 면을 보였다. 이따금씩 지어놓은 시편(詩篇)들은 세상과 자연에 대한 그의 서정이 얼마나 오롯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나이 70세쯤 되던 해, 봄밤의 정취에 취해 문득 북녘의 고향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노래했으니, 그 멋들어진 운율은 이렇다.
남북의 풍운은 아직도 계속되니,
이 밤도 누에 올라 홀로 침음하네.
삼천리 지경에 강산은 늙어가고
70고개에 세월만 흘러가네.
인가(人家)마다 연기는 고국이나 같은데
해마다 꽃과 새는 수심을 불러오나.
아아, 세상에 꿈 아닌 게 무엇이랴
모든 인연 물리치고 유유자적하고지라.
■ 연보
1890년 11월 25일 함경북도 부령에서 장영교의 2남으로 출생. 본명은 장지형(張志衡)
1914년 성파 화상을 은사로 석왕사에서 득도
이후 경학을 공부하고 범어사 내원선원 등 제방선원 조실 역임
1969년 4월 17일 부산 선암사서 세수 80, 법납 55세로 입적
‘무문관’ ‘벽암록’ 강의 ‘당대 제일’ 손꼽혀
언어도단의 경계에서 종횡무진의 삶 일관
몸은 뜬구름 같이 갔다가 다시오니
큰 길이 가로 세로 눈앞에 열렸도다.
이른 봄 온 눈이 신선의 굴을 덮었고
반야에 뜬 달이 고불대에 비쳤구나.
매양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가보를 드날렸으나
몇 번이나 모진 세파에서 고배를 마셨던고.
본래 우리 문엔 묘한 비결이 따로 없어
허공처럼 처세하면 윤회에서 벗어나리.
身似浮雲去復來
縱橫大路眼前開
初春雪壓仙人窟
半夜月生古佛臺
每依聖敎揚家寶
幾人塵波飮苦杯
本是吾門無妙訣
如空處世出輪廻
구름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운수행각을 거듭한 설봉(雪峰)은 그 심회(心懷)를 이렇게 노래했다. 희방사에서 비로사로 돌아가며 읊은 이 노래에는 구도(求道)를 향한 납자의 치열한 열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게송에서 보듯 설봉은 ‘허공’처럼 처세했다. 스스로를 완전히 비우고 오로지 화두와 구세원력의 실천행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설봉은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한 남쪽 지방을 중심으로 구도행각을 벌였다. 오랜 기간을 범어사 내원선원에서 주석하며 후학을 제접했던 터라 당시 절집에서는 그를 일러 ‘남방(南方)의 도인(道人)’이라고 불렀다.
출가할 당시부터 검소함을 철칙으로 삼았던 터라 설봉의 운수행각은 저자거리의 걸인과 다를 게 없었다. 설은 밥을 먹고 국물이 없어 말라붙은 국을 들이키면서도 스스로 배부르고 만족하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니 한 생각 분수를 넘는 바람이 그에게 있을 수 없었고, 바라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저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런 터라 그가 술에 만취해 시궁창에 처박혀 있기라도 하면 제자들이 달려가 업어서 절로 모신 후 정성껏 보살피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설봉을 비난하는 경우는 없었다. 속된 사람들은 겉모습은 그럴 듯 하더라도 내면에는 구렁이 열 마리가 들어있지만 설봉은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가 참모습인 대선지식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봉의 당당한 삶은 이러한 소욕지족(少欲之足)의 생활화와 철저한 걸사정신(乞士精神)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라는 것이 없고 아쉬울 것이 없으니 낯이 뜨거워질 일도 공연히 부끄러워 할 일도 있을 수 없었다.
“수도하는 사람은 마땅히 남의 말을 타지 말 것이며,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이고, 남의 잘못을 가리려 들지 말 것이며, 남의 일을 굳이 나서서 알려고 하지 말라. 먼저 자신을 알고 남의 속임을 받지 않는 것이 요긴한 중에서도 요긴한 일이로다.”
설봉은 언제나 이러한 경책의 글을 마음속 깊이 간직했다. 틈나는 대로, 간혹 해이한 마음이 들기라도 하면 즉시 이 문장을 암송했다. 깨달음은 결코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임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음이다.
설봉이 보여준 모든 행동거지들은 이처럼 오로지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뜨거운 여정의 일환이었다. 가난과 결핍으로 점철된 일상생활에서 오는 불편은 오히려 깨달음을 향한 그의 열정을 부추길 뿐이었다. ‘석가 세존께서 꽃을 들으셨고,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은 도에 드는 관문일진대, 만약 이 관문을 뚫는다면 죽음 속에서도 삶을 얻을 것이요 만약 뚫지 못한다면 몸을 죽이고 목숨을 잃을 것이리라. 슬프다. 생사가 큰 일이요 덧없음은 신속하니 이 어찌 급하지 않은가, 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설봉은 늘 스스로를 다그쳤다. 자신에게 엄격하기가 서릿발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경책하는 게송을 지어 즐겨 암송하곤 했다.
한 사람이 공문에서 도를 얻었거늘
너는 왜 언제까지 고취 속에 있을 것인가.
이 몸을 이승에도 건지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건질 수 있으리요.
幾人得道空門裡
如何長淪苦趣中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설봉은 언행일치가 차원이 아니라 차라리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항상 몸으로 앞질러 도반이나 후학을 이끌어주는 불가사의한 힘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후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너무나 간절해서 이루 표현키 어려울 정도였다. 부처님의 정법안장이 크게 진작되지 못하고 선풍이 점차 잦아드는 것을 늘 안타까워하며 납자(衲子)를 만날 때마다 선문(禪門)의 큰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누구나 그의 당부를 들으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만나는 모든 대중들이 그를 귀의처로 여기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설봉은 구도행각을 나서는 도반이나 후학들에게 일종의 ‘행각지침’ 같은 것을 내리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일등은 바로 도를 닦는 사람인데, 정에 끌리면 여전히 홍진(紅塵)으로 달아나는 법. 백발을 슬퍼하는 남들을 보면 미로를 모르고서 청춘을 보내는 격일세. 친하고 친하지 않음이 있으면 좋은 벗이 아니니,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끊어야만 좋은 이웃인 것이다. 내 이제 여러 사람에게 받들어 권하니, 조주(趙州) 노인의 맑은 차 맛이 새롭구나.”
해인사에서 일본인 고관대작들을 만나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사자후로써 절복시켰던 일이나, 이교도들이 함부로 불법을 훼손하는 것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설복시킴으로써 마침내 그들의 스승이 되었던 일은 설봉이 남긴 일화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발길 닿는 곳마다 마치 구름을 뚫고 나온 달빛 마냥 종횡부진으로 경계를 넘나들며 파사현정의 빛을 세웠으니 그 모두가 선문의 후학들에겐 소중한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춘성이 부산 동래의 금정사에서 여름안거를 마치고 걸망을 메고 막 절을 나설 때였다. 도반 설봉이 뒤쫓아 나와 여비를 챙겨주었다. 춘성이 이를 받고 “우리 작별인사나 나누세.”라고 하자, 설봉이 즉시 주먹으로 춘성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춘성이 질세라 ‘아악’ 할을 뱉었다.
개안의 경지에 오른 선지식들간에 이루어진 일화인지라, 그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무애자재한 삶을 경영해 보인 설봉에게 많은 일화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주로 그의 설법이나 교화는 신도대중 보다는 선원이나 강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루는 한 젊은 스님이 설사가 나서 측간(화장실)을 부리나케 들락거렸다. 볼일을 보고 나오다가 이를 본 설봉이 연유를 물었다. 갑자기 설사가 나서 그렇다는 설명을 들은 설봉은 비켜주기는커녕 측간 입구를 막아선 채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주제의 법문을 하기 시작했다. 젊은 스님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지만 법문은 무려 1시간 30분 동안이나 계속했다. 사색이 되었던 젊은 스님의 얼굴은 차츰 제 색을 찾기 시작했다. 법문을 다 듣고 나서 젊은 스님은 깜짝 놀랐다. 설사가 저절로 멎어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一切唯心造)라는 법문을 설봉은 이렇듯 화장실 앞에서 실감나게 보여준 것이니, 큰 법문도 듣고 설사병도 고친 젊은 스님에겐 여간한 홍복이 아닐 수 없었다.
범어사에 성호(性浩)라는 노사(老師)가 주석하고 있었는데, 그는 일본 메이지대(明治大)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에 떨어진 뒤 출가를 한 인텔리였다. ‘호 스님’이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진 이 스님은 3∼4개 외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정도로 실력파였는데, 그 시대에도 ‘Time’이나 ‘Life’지를 구독해 산중에서도 세계정세를 한 눈에 꿰뚫을 정도였다. 한 번 욕을 하기 시작하면 10분 이상 독설을 퍼붓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늘 120세까지 살겠다고 장담을 하던 이 호 스님이 60세에 입적을 했는데 유교(遺敎)로 “나고 죽는 사이에 간섭이 없다(生死去來無干涉)”는 말을 남겼다. 장례가 진행되는 동안 이 유교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는데, 한 젊은 납자가 대뜸 “죽기 싫어 발버둥을 치다가 죽은 사람이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혹평을 했다. 이를 본 한 구참이 나서 ‘큰스님을 비방했으니 너는 반드시 지옥에 갈 것’이라고 야단을 쳤다.
이 말을 들은 이 젊은 납자는 그 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막말을 해 지옥을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도 그렇거니와 ‘나고 죽는 사이에 거래가 없다’는 유교의 진정한 뜻을 풀지 못하는데서 밀려오는 번민이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던 것이다. 이 납자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 하여 행각을 떠났다. 강원도 지역을 정처없이 돌고 있을 때, 문득 ‘남방의 도인’ 설봉이 대각사에서 ‘3·7일 화엄경 법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부랴부랴 대각사에 도착해보니 화엄경법회가 벌써 끝나버린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술을 좋아하는 설봉이 법상 위에 술을 놓고 법문을 하자 신도들이 ‘술마시며 하는 법문은 들을 수가 없다’며 하나 둘씩 빠져나가 그만 법회가 끝나버린 것이었다. 납자는 설봉의 방으로 찾아가 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설봉을 향해 물었다.
“생사거래무간섭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금새까지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던 설봉이 대답을 했다.
“야, 이놈아! 생사가 본래 없거늘 간섭할 게 있느냐. 한심한 놈.”
납자는 그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 때까지 자신을 짓눌러오던 번민과 고뇌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납자는 당대에 최고의 선지식으로 설봉을 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덕숭산 만공 화상의 회상에서 수행을 한 때문인지, 설봉은 술과 담배를 즐겼다. 이미 절집안에서는 걸림이 없는 행동으로 잘 알려진 터라 설봉이 술 담배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한번은 설봉이 불국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강의할 때의 일이다. 술 담배를 하는 줄 뻔히 알고 있던 강원의 학인들이 강의를 마칠 때까지는 술 담배를 삼가줄 것을 요청했다. 설봉은 이를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는 약 3개월 동안 술 담배를 일체 금했음은 물론이다.
비록 술 담배를 즐기기는 했으나 설봉은 술 담배에 끄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했던 것이다.
확철대오의 경계를 이루었으면서도 ‘선문촬요’를 현토(懸吐)하고 ‘벽암록(碧巖錄)’ ‘무문관(無門關)’강의에 당대제일로 손꼽히는 등 선교(禪敎)에 두루 정통했던 일명 ‘멋진 스승’ 설봉. 그를 오랫동안 가까이서 시봉했던 법제자 지원(智源)은 스승 설봉을 추모해 이렇게 노래했다.
설봉 스님이 보여준 도인의 경계
하늘과 땅 모든 중생들이 찬탄하네.
과거 현재 미래의 밝은 달 누리 비추고
시방세계에 청풍이 떨치고 있네.
행하고 말하는 대방편 닿지 않는 곳 없으니
부처와 조사의 신통한 힘 나타내 보이셨네.
雪峰師閑家具
人天衆共讚嘆
三世明月照
通十方淸風拂
行說俱不到處
具現佛祖神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