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의 기억
화천으로 이사가던날
꿈을 찾아 여행을 떠나며
삼월의 첫날인데도 응달진 골목엔 엊그제 내린 눈이 아직 남아있었다..
창밖은 컴컴하고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진눈개비가 쏟아질 것 같은 음산한 날씨였다.
시나브로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는 듯 꽃샘바람에 휘날리는 싸락눈이 이삿짐을 실은 2.5톤 타이탄 트럭의 방수천막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났다가 돌아와야 할 인부들의 바쁜 몸놀림에 몇 가지 안 되는 이삿짐이 금방 꾸려졌다.
인천 남구 주안동, 오래 묵힌 묵은지 같은 빌라촌,
삶의 기럭지가 고만고만한 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낡은 3층 빌라에서 밥풀 꽃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 년 사계절을 난민촌처럼 살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이 집에서 지냈던 지나간 시간이 쏜살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문제는 커다란 책상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물건이었던 미제 책상, 이 물건이 얼마나 근사했냐 하면 어린아이의 고운 살결 같은 베이지색의 단단한 미송으로 잘 짜인 고급품이었다. 커다랗고 널찍한 엠디에프 상판 위에는 무두질한 부드러운 사슴 가죽을 붙인 미려한 가죽 덮개가 깔려 있었다. 상판 아래 양편으로 미끄러지는 듯한 슬라이딩 서랍이 각 세 칸씩 붙어 있었다. 서랍은 가볍고 부드러워서 일없이 괜히 한 번쯤 여닫고 싶었다.
책상의 각 접합 부위는 아교를 써서 접착한 뒤 나무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했다.
처음 이 책상을 마주하고 나서, 실제 사들일 때까지 오랫동안 뜸을 들였다.
비록 중고품이었지만 워낙 크기가 크고 제법 가격이 있어서 구매하기 전에 여러 번 망설임이 있었다. 비좁은 집에 이렇게 크고 좋은 책상이라니 ? ! 하지만 변변한 살림도 없이 살지만, 책상만이라도 번듯한 게 있다면 뭔가 지적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자리엔 언제나 필기도구와 독서대가 정물처럼 자리하고 앉아 있었다. 나는 이 책상에 앉으면 시인이 되고 철학자가 되고 영성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책상을 구매하기로 한 이유는 아이들이 나중에라도 이 책상을 놀이터 삼아, 오르고 내리고 하면서 넓은 책상에서 그림도 그리고 동화책도 읽을 거라는 싱거운 핑계를 대고 구매했다.
마침내 책상을 사들이고 집으로 들여올 때는 중고가구점 인부들이 배달해 주었다. 현관 출입문과 방문을 떼어내고 들어 앉혔는데 이삿짐으로 나갈 때가 문제였다. 이번 이삿짐 인부들은 이 잘난 책상을 도통 바깥으로 꺼내질 못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통째로 들고나올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책상을 옆으로 들고나오려고 몇 번의 시도를 했지만, 문틀에 끼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책상 사면의 모서리와 가죽 상판을 허옇게 긁어 대고서 상판을 뜯어내어 서랍과 분리했다. 그랬더니 수월하게 빠져나왔다. 정작 지켜보던 내가 힘이 다 빠져 버렸다.
줄이고, 빼고, 버려야 할 불필요한 것을 버렸다고 했지만, 책과 책상은 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젊은 날 세상을 바꿔 보겠다는 생각과 실천 사이에서 방황했던 날들, 그 치열했던 열정의 시간과 함께 해온 인문학 서적과 어렵게 마련한 제법 근사한 책상은 버릴 수가 없었나 보다.
젊은 날 세상을 바꾸겠노라고 할 때는 수중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 “이사 갈 때는 배낭 하나 메고 이사할 거다”. 호언장담했는데 시골로 이사하려니 이삿짐이 2.5톤 타이탄 트럭으로 하나 가득하다.
옷장과 세탁기, 냉장고를 제외하면 책상과 책, 책장 그리고 전기 피아노를 포함한 아이들 물건이었다. 그중 버리기엔 너무 아깝고 가져가기엔 너무 많던 저놈의 책들, 똥 고개 선비 할머니 곁방살이하던 시절에도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니던 저 관념의 짐보따리, 동서양 철학 서적과 신학 개론서들, 이 먼지 앉은 낡은 책들을 이참에도 버리지 못하고 기어이 이고 지고 끌고 나섰다.
일년동안 이 낡은 빌라에서 살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누구는 태어나 보니 아버지가 이병철이라지만 내 아이들은 태어나보니 노숙인들과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장애인 공동체 속이었던 나의 아이들, 이 사람들과 함께 한솥밥 먹고 목욕도 함께 하고 함께 뒹굴다가 막내딸 혜린이가 결핵을 앓게 된 것이다. 당시에 공동체 안에 결핵환자가 있었다.
투약 중이라 결핵균이 전염되지 않을 거라고 조심하지 않고 생활을 분리하지 않고 함부로 접촉한 탓이었다.
그래서 결핵 치료차 아이들을 데리고 따로 나온 곳이 이곳 빌라였다.
그런 이유로 마련한 작은 처소였다.
나는 썰물처럼 짐들이 빠져나간 휑한 텅 빈 방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떠올랐던 상념을 접었다. ‘인제 그만 가야지’ 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으로 챙겨야 할 소지품을 양손에 들고 천천히 계단을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윽고 현관문을 여니 쌔~앵 하고 봄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목덜미를 파고든다. 매서운 꽃샘바람에 흠칫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되돌아올 길이 먼 인부들은 밤새 꾸려놓은 이삿짐을 서둘러 실어 내렸다.
‘음’ ‘벌써 다 실었네’ 혼잣말이 신음처럼 짧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내와 아이들도 먼 길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혹여 미처 싣지 못하고 남겨둔 짐이 없나 마지막 점검을 하고 내려오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동체의 생계를 위해 구입한 1톤 포터 트럭, 그동안 남동공단 그릇 공장에서 포장 판지를 실어 고물상으로 실어 나르던 낡은 1톤 포터 트럭도 함께 길을 떠났다.
1톤 포터 트럭에는 아내 정일과 아들 요한, 둘째 혜린이가 조수석에 함께 탔다. 짐칸에도 따로 싣고갈 물건과 함께 멀찌감치 앞서가는 이삿짐 차를 뒤따랐다.
앞으로 우리 가족이 살아야 하는 곳은 을씨년스런 전방 군인들 동네의 원룸이었다. 겨울이면 엄청 추워 사방이 꽁꽁 얼어 냉동고가 된다는 남한서 젤로 추운 지역이다. 골짜기마다 군부대가 자리해서 총을 멘 군인들이 트럭 뒤에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살벌한 광경만 눈에 보이는 곳, 그리고 북쪽 군인들과 맞서서 서로 대치하고 있다는 휴전선이 고개 너머 있다는 최전방 동네다.
그중에서 최종 목적지는 근처 군부대에서 근무하는 직업군인들로 영외거주하는 하급 장교와 하사관들이 모여 사는 빌라촌이었다.
또 하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돌무더기만 가득한 산비탈, 밀릴 때까지 밀리다 더이상 갈데가 없어서 멈춰진 삼팔따라지 화전민들조차 경사가 급해서 돌아서던 땅, 메주 만드는 백태도 심기 어려워 강냉이만 심어 먹던 급경사의 비탈진 밭 한 뙈기.
여기를 믿고 의지해서 공동체의 전원생활을 꿈꾸기엔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은 애초부터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우리 눈에 그곳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이상향으로 바뀔 거라는 믿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막연한 희망을 품고 미지에로의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시골행을 결행하게 된 배경은 이랬다.
2000년법인 설립 후 정열을 바쳐 추진했던 장애인 부모교육사업이 성과를 보였다. 두 해에 걸친 장애아 부모대학 이후 2002년인천 통합교육 부모회가 조직이 되었다.
통합교육보조원제도 사업이 국가시책으로 결정된 후 맥이 풀렸었나 보다. 인천에서 수 년 동안 추진했던 사업이 2003년 신맹순, 원미정 두분 시의원 도음으로 조례로 통과되고 마침내 2004년 박창달 의원발의로 국회를 통과해 법으로 제정되었다. 그러고 나서 지친 몸과 마음 이제 좀 쉬어야겠다고 했다. 장애인 공동체도, 장애인 교육시설도 건물이 마련되고 나서 이제 고만 쉬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문이 닫히기 전 몸을 던져서라도 전철을 타야 하는 냉정한 규칙의 도시를 탈출하기로 했다.
몸이 불편한 이들도 천천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생각하며 귀촌을 구상했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장애가 있는 이들과 비장애인들 모두가 천천히 살 수 있는 터전을 시골에 마련하기 위해 그 준비를 마칠 기간 동안 잠시 공동체를 인천에 맡겨두고 시골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누구도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 하지 않았다. 처가 부모님, 그리고 내 어머니와 형제들까지 시골행을 그리 말렸는데 기어코 결행한 화천행, 생계 대책도 없거니와 구체적인 준비도 없이 결행하는 귀촌이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 아니라 온통 가시밭길로 접어든다는 것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검회색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눈과 비가 섞인 진눈깨비가 내렸다.
그동안 인천에 마련해둔 사회적 기반들이 있었다. 힘들게 설립한 법인체, 어렵게 지은 장애인 복지시설, 그리고 복권기금으로 새로 매입해서 편의시설까지 갖춘 소중한 공동체 섬김의 집,
청춘을 던져 만든 복지시설과 사회적 관계들을 내어놓고 아무런 인연도 없는 화천으로 이사한다는 계획에 가족들 누구 하나도 동의 하지 않았다. 어려움을 겪어가며 입때껏 마련한 사회적 기반을 내려놓고 떠날 만큼 중요한 무엇인가가 있었던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귀촌을 결심했던가?
새로운 공동체 설립이라는 꿈을 꾸었다.
인천에서 공동체 생활의 목적하던 바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지만 새로운 삶의 국면을 전환해서 만들어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와 내가 세상에 진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녀도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도시를 떠나서 시골로 가서 노숙인과 장애인들 틈 속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시골의 고향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공동체는 그다음이었다. 이미 수년 전 시골에다 헐값에 마련해 둔 이천오백 평의 급경사 맹지를 믿고 내린 결정이었다.
당장 시골로 가서 무얼 해서 어찌 먹고살리라는 대책을 세운 바는 없었다.
가진 돈이라곤 빌라 전세금 포함해서 오천만 원이 수중에 가진 전부였다.
이 돈으로 우선 된장 공장과 살림집을 짓고 꾸러미 장사를 해서 아이들과 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천만 원으로 된장 공장과 집을 지어내라는 생각이 얼마나 현실과 멀리 떨어진 비현실적 구상인지 깨닫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고지였던 곳에 되돌아가는 낙향도 아니고 연고 없는 무작정 시골행을 결정했다. 이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생각한 대로 단순하게 결행해야 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