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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옥의 <공사장 사람들>에 대한 김병기의 평에 대한 반론
현장의 노동수필을 기다리며 /김종완
김병기 선생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막 읽고난 첫 번째 나의 느낌을 솔직히 말한다면 아, 이거 사고로구나! 였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바가 틀렸거나 맞았거나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말하는 방법의 서투름 때문에 괜한 풍파를 일으킬 것이라는 예상이다. 비평이라는 게 시비를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보면, 그 어떤 의견도 주장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주례사 비평 때문에 비평의 무용론마저 나오는 시대에 평자의 의견이 분명한 비평이란 비평의 본분에 충실한 비평으로 환영받을 일이다.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 하나같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똑같다면 그건 텍스트가 단순하다는 반증일 뿐이다. 결코 시비거리가 없을 것 같은 동요 <송아지>마저 시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에서 왜 한국의 아이들이 부르는 동요에 하필 외래종 홀스타인 젖소 얼룩이냐, 누런 황소이어야지? 라는 문제 제기다. 그러자 그게 홀스타인이 아니고 이미 거의 멸종되어버린 순 우리소 칙소라나! 그런데 이게 궁한 변명으로만 들리는 것은 칙소라는 게 칙칙한 색이지 결코 얼룩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랫말의 얼룩은 얼룩말의 얼룩을 떠오르게 하는 그런 얼룩이다. 이 동요가 일제 때 만들어졌고 그때는 홀스타인 젖소가 이미 조선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걸 본 아이의 감탄이 동시를 쓰게 했고 그리하여 그 가사에 곡을 붙여 이 동요가 만들었다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또한 시비를 걸자면 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모이자’를 문자 그대로 집합의 신호로 읽는다면, 학교에서 종을 치는 일이란 수업이 시작하거나 끝남을 알리는 것이지 결코 모임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고, 굳이 모이라고 치는 거라면 민반공 훈련 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모이자’의 의미를 ‘등교하자’로 읽으면 학교종은 등교를 재촉하거나 권장하려고 치는 것이 아니고, 종 칠 때 학교 등교하면 이미 지각이라는 등 등.
김병기의 <공사장 사람들> 읽기는 충분히 근거가 있다. 그가 이 평을 통해서 관철하고자 하는 바를 뚜렷이 나타냈다. 하지만 우리는 이 글을 쓴 고병옥이 이 글을 통해서 읽어 내고자 하는 것 또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김병기가 싸우는 대상은 수필가들이 은연중에 취하는 ‘대상에 대한 근거없는 연민’이다. 수필가라는 먹물들이란 조선 사대부의 후예로서 사농공상의 신분제의 악습을 아직도 떨쳐내지 못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불쌍타 한다는 것이다. 평자는 화자가 집 짓는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은연중에 근거도 없이 연민하는 걸 조목조목 찾아내 따져 묻는다. 꼼짝 없이 걸렸다.
그런데 말입니다(김상중의 말투로), 연민하면 그게 그렇게 나쁜가? 물론 평자는 글의 모두(冒頭)에 연민의 한계를 분명히 짚고 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동정과는 달리 연민은 그 자체의 감정을 의미한다’동정에 그런 깊은 뜻이? 그래서 필자도 동정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동정[명사]1.남의 어려운 처지를 자기 일처럼 딱하고 가엾게 여김. 2.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도움을 베풂.
이런 정의라면 동정엔 연민을 포함하고 있다 하겠다(평자의 구분에 의하면 1은 연민이고, 2는 동정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으로 맹자가 말한 4단의 측은지심(惻隱之心: 남을 불쌍히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의 측은은 연민일까, 동정일까?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걸 보면(동작 했으므로) 동정에 속하겠다.
평자가 연민에 분개하는 이유는 연민이란 단순히 감정만을 느낄 뿐 행동화하지 않기에 자기만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괜히 상대를 불쌍히 여기다가 자기 우월주의에 빠질 공산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sympathy(동정, 연민)와 empathy(공감)의 문제로 의제를 확대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포클레인 기사의 수입이 높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일하는 그를 연민하는 것은 괜한 짓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독자도 많을 것이다. 불교적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삶이 고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들에(자신을 포함해서) 연민을 느낀다면 잘못된 것일까?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여러 날을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는 그에게 쫓아 나와서 따져야 할까? 야, 밤늦게까지 일하면 주민들은 잠을 어떻게 자냐? 당장 그만두지 못해. 수면 방해죄로 고발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
이젠 평자가 시비를 건 것들에 따라다니면서 ‘꼭 무시해서가 아니라, 그냥 힘들게 사는 것이 안 돼 보여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검은 땅에 그어놓은 백회선을 따라 흙을 파내어 가장자리에 쌓는다. 세상살이에 시달린 지표의 검은 흙을 걷어내니 황토색깔의 고운 흙이 나온다. 사람도 가슴속에 담고 사는 근심 걱정을 흙 걷어내듯 쉽게 걷어낼 수 있다면 인생을 고해라 했겠는가. 각박한 삶을 떨쳐 내려는 듯 운전석의 젊은 기사는 휴식도 없이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 날이 어두워지자 불을 밝히고 작업을 계속한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포클레인 소리만이 밤공기를 타고 널리 퍼진다.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나갔다. (고병옥의 <공사장 사람들> 중에서)
평자에겐 글의 서두부터가 연민하려 작정한 화자의 과도한 감정이입으로 보인다. 충분한 근거가 있는 반론이다. 지표면의 색깔이 검은 것은 세상살이에 시달려서가 아니라 지표면의 퇴적 작용에 의한 색의 변화일 것이고, 왜 알지도 못하는 포크레인 기사의 일하는 동작을‘각박한 삶을 떨쳐내려는 듯’등, 나의 감정을 덧씌우냐는 공격엔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문학을 그렇게 해왔다. 그것이 문학의 기본 원리인 서정의 법칙이다. 서정의 원리는 자기 동일화(同一化)다. 내가 슬프면 꽃이 우는 것이고, 내가 기쁘면 꽃이 웃는다. 꽃이 어디 우리 감정에 따라 그러겠는가? 이러한 서정의 폭력성에 대한 자각과 비판을 이야기하면서 나타난 게 신서정(新抒情)이다. 수필판에선 에세이스트가 신서정을 추구하고 있다. 서정의 왕국에서 보면 일종의 변방 반란군의 작은 소요에 불과할 것이다. 나의 이 말은 평자의 분노는 충분히 근거 있으나 그걸 서정왕국에서 만족해 살아가는 한 착한 백성인 작가에게 따져 묻는 것은 당사자에겐 황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동사무소에 가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직원을 잡고 왜 이 나라의 체제가 자본주의냐고 따져 묻는 꼴이다. 지금이야 없는 일이지만 옛날 거리가 비포장이었을 때 길가 가게에서 흙먼지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 곧잘 길에 물을 뿌렸는데 재수가 없을라치면 길 가던 행인이 물벼락을 맞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고병옥이 꼭 그런 꼴이 되어 버렸다.
평자 김병기의 문제 제기는 서정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이다. 그 구체적인 예문으로 <공사장 사람들>이 인용되었을 뿐이다. 문제는 <공사장 사람들>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딱 들어맞는 예문이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나의 결론은 꼭 들어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외려 평자가 몰리는 꼴이 될 위험도 있다. 공사장의 사람들이 전문직이라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이므로 일용직 말고는 하등 연민할 필요가 없다는 지적에, 수익의 많고 적음을 기준해서 연민의 여부를 따진다는 것이 되레 물질주의적 폭력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의 감상을 말한다면 화자의 연민에 딱 하나를 제외하곤 난 동의할 수 있었다. 아니 그 하나마저 꼭 동의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인테리어 작업을 하는 젊은 부부가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걸 보면서 저들에게도 아이가 있을 텐데, 하며 걱정으로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건데, 정말로 연민이 병인 양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 어쩔 것인가. 작가 자신이 어린 아이들을 두고 직장 일을 한 경험이 되살아나 남의 일 같지 않고, 집을 지키는 어린 아이들이 눈에 밟혀 잠을 못 잤다면?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화자의 연민이 동정으로 진화하는 징조일 수도 있지 않은가.
고병옥 선생께 미안한 말이지만, 난 김병기의 이 평을 평만으론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를 몰아세우는 솜씨가 매섭다. 화자가 레미콘 작업 전에 교직하는 철근을 철사로 묶는 여인들의 작업을 보면서 ‘정성스럽게 묶는다고 표현한 것은 뒤에 인연에 대해서 말하고자 억지스럽게 표현한 것’이라는 대목에선 배꼽을 잡고 웃었다. 김병기다운 논법이다. 그러나 난 고병옥의 표현에 동의한다. 이건 나의 군대경험인데, 군대에서 작업명령이 떨어지면 꼼꼼히 시간 걸려 일 했다가는 일의 진전이 없어 농땡이 친 것으로 간주되어 혼찌검이 나고 만다. 그래서 내가 터득한 것이 ‘대강대강 철저히’다. 빠른 속도로 대강대강 하대 중요 포인트만은 철저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그때 나의 이런 행동을 충분히 정성스럽다라고 생각했었다. 내무반에 표어로 붙여 놓고 싶을 정도였다.
김병기가 <공사장 사람들>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불교적 사유에 낯설기 때문이다. 고병옥의 사유는 불교적이다. 그래서 평자는 두 군데 정도에서 작가의 불교적 사유를 이해하지 못해 부딪히고 만다.
난 김병기의 이 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평문으론 성공했지만 고병옥의 작품 <공사장 사람들>의 작품론으론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평문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자기가 주장하고자 하는 문학론을 성공적으로 폈다는 것이고, 작품론으론 실패했다는 것은 <공사장 사람들>이 갖고 있는 문학적 장점엔 거의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이 평문이 작품론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가 평의 뒤에서 언급했던 부분을 중심으로 씌었어야 했다.
(10년 전) 서사수필은 잘 쓰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설령 작품을 쓴다고 해도 ‘내 자신’의 이야기만을 쓰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고병옥의 <공사장 사람들>은 그런 속에서 내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해 쓴 것이다. 당시만 해도 이런 작품은 매우 특이한 경우였고, 글의 소재 또한 집을 짓는 과정을 채택했는데, 이 또한 독특하다. 각 문단의 성격도 공사장의 공정과 그 공정과정에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서사와 서정이 평행을 이루듯 균등하게 어우러져 나가고 있다. 비록 각론적으로는 문제가 있는지 몰라도 새롭고 획기적인 면이 있어 좋은 작품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니 충분히 공감이 간다.
(김병기의 평문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만약 그가 이런 내용을 앞세웠다면 화자의 수상스런‘연민의 태도’는 이렇게 큰 이슈로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뒷담 수준에서 거론되고 말았을 것이다. 김병기는 한 작품의 작품론에서 문학의 거대 담론을 꺼냈다. 「서정의 폭력성에 대한 고찰 ― 화자의 태도를 중심으로」
김병기가 지적했듯이 <공사장 사람들>은 10년 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수필에서 노동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 대단히 희귀한 소재 또는 주제의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수필 문학사적 의미는 크다 할 것이다. 한국의 수필이 오랫동안 현실에 눈 감아온 결과 ‘음풍농월이나 추상적 담론 내지 자기 자랑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성의 지루한 반복’이라는 혐의를 벗어나기 힘들 때, 노동에 대한 따뜻한 이런 시선은 자체로 선진적인 사건인 것이다. 물론 난 아직도 현장사람들이 현장을 말하는 현장노동수필이 곧 등장하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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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논란의 핵심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되레 호도거나 비호하고 포장하며 변호하는 일인데, 그런 분위기로는 무엇을 개선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기본의 문제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과거 비슷한 토론의 중심에 섰던 당사자로서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는데 대해 실망감이 큽니다. 향후도 이런 '기본의 문제'를 두고 논란이 반복될 것 같아 평론의 길이 멀어만 보입니다. 서로가 문제점에 대해 솔직하고 엄중해야 상황을 타개하고 정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김삼진선생님의 솔직하고도 격정적인 토로에 공감합니다.
2년여 넘게 '김종완의 수필교실'에서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수업은 대개 한 학생이 직접 써서 가져온 작품을 교재로 놓고서 감상평과 의견들을 나눕니다. 작가의 면전이니 칭찬은 직설적이고, 비판은 공손하고 때로 우회적입니다. 그래도 글의 훌륭한 부분이나 미흡하다고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의견교환이 이뤄집니다. 자기가 쓴 글을 제출하고서 애정 어린 난타를 당한 학생은 그 의견들을 반영하여 다시 글을 손보아 가져옵니다. 꿋꿋하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너나없이 글이 향상되어가는 것을 확연히 느낍니다. 작가의 면전이라고 서로 좋은 말만 하고 고언을 하지 않았다면 얻기 어려운 성취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좋은 글을 쓰게 되고 에세이스트에 등단한 학생이 여럿입니다.) 마침 신경숙의 표절과 관련된 어느 칼럼 중에 지금 카페의 상황과 맞는 구절이 있기에 옮겨 적습니다. <한 평론가는 "칭찬도 비판도 평론인데, 후자의 기능이 쇠퇴했다. 편집위원이어도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는 것은 맞다. 작가를 알고 나면 더 어려워진다"라고 말했다.> 김병기 선생이 이미 토로했지만, 저는 <공사장 사람들>에 대한 비평을 올리기 전과 후에 그가 품었던 망설임과 괴로움을 충분히 공감합니다. 김병기 선생도 그리고 저도 작가를, 적확히는 작가가 받으실 상처를 크게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판자 역할을 피할 수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겠지만, 제비뽑기로 작품을 배정하여 평론을 쓰기로 약속을 했기에 그 약속을 이행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토론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일 <공사장 사람들>이 아주 오래 전에 쓰인 작가불명의 글이고, 그 글에 대해 김병기 선생이 똑같은 비평을 썼다면, 독자들의 반응이 지금과 같았을까? 혹시 같지 않다면 결국 비평은 작가를 의식하고 배려해야만 하는 건가? 그렇다면 비평의 본령은 무엇인가?' 에세이스트가 기획한 이번 평론 시리즈는 작가 한 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에세이스트 카페의 많은 독자들과 저처럼 글쓰기를 공부하는 학생을 위한 것입니다.
<공사장 사람들>이 작가 미상의 수필이든 아니든 독자들의 반응은 전혀 달라질 게 없습니다. 작가가 분명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작가를 동정하여 김병기 평문을 질타한다고 믿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신현국선생님의 그런 말씀은 독자들의 수준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에세이스트의 평론 시리즈는 보다 수준 높은 평론을 위한 세미나 성격이 강합니다. 차제에 "작가 한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는 신선생님의 편향된 규정은 많은 독자들의 올곧은 비판을 왜곡하고 호도하는 것입니다. 신선생님의 시각처럼 독자들은 그렇게 어리석은 군단이 아닙니다. 우호적인 편들기는 또다시 동료를 눈멀게 할 뿐입니다.
그러니 김병기 선생의 비평이 작가를 배려하지 않았고, 표현이 공손하지 않고 우회적이지 않다고 비판받기보다는 그의 비평 중 무엇이 비논리적이거나 악의적인지 논리적으로 반박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공사장 사람들>의 작가를 위하는 구체적 방법일 것입니다. 참고로 저는 위에 썼다시피 고병옥 선생님이 받으실 상처를 무척 안타까워합니다. 김병기 선생의 비평 내용과 논조에 전부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김종완 교수님처럼 삶에 대한 작가의 불교적 관점을 고려하더라도) 연민이라는 감정의 과잉이입이라는 비평의 근간에 대해서는 생각이 같습니다.
한편, 김병기 선생의 평론을 통해 글을 읽는 다양한 시각을 배우고 있는 학생인 저로서는 그가 이번 일로 인해 비판적인 평론을 접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작품속의 화자는 자기와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이런 방식으로 연대의식을 갖고 교류하고 싶어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이런 방식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시선을 유지하면서 표현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작품의 키워드가 ‘연민’이라고 보는 순간부터 이 작품속의 화자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고병옥 선생님은, 선생님의 방식대로 <공사장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통해 작가로서 세상과 사람들을 폭넓게 수용하고 소통하고자하는 의도와 노력을 보여 주시려고 한 것은 아닐까요?
저 역시도 공사장 사람들에 대한 화자의 따스한 '관심' 으로 보았지 그게 '연민'(불쌍하고 가련함)의 정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더군요. 또한 연민의 정이란 인간이 인간에게 갖는 보편적 감정이지 그게 신(神)에게만 허용된 절대적 감정이 아니기에 평자가 심각하게 오독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논의가 아직도 이런 기본적인 인식의 문제에 갖혀있으니 답답할 뿐입니다.
저는 작품 속 화자가 품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하는 감정과 시각들. 즉 그가 바라보는 대상과 현상에 대한 어떤 연민과 동정, 혹은 우월감(?)과 평자의 그것에 대한 분개(?)와 연결되는 맥락보다는 작품속 화자의 소박한 자기성찰과 세계관에 대한 성장과 도전에 초점을 둔, 건전한 자극이 있는 평론이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