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이사야 11:1-9 마태복음19:13-15
육성한 전도사
[아이들의 세상]
어린이 주일을 맞아 생명사랑교회 어린이들이 예배를 주관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서 생명사랑교회 어린이와 어른들이 서로를 더욱 깊게 알아가고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라는 것을 되새기는 귀한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아이들을 볼 때, 우리는 괜스레 웃음을 짓게 되고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아이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어른들에게 밝고 행복한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저도 매주 아이들과 예배를 드리고 함께 어울려 뛰어노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기만 합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중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예수님께서 왜 “하나님 나라가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새삼 깨닫게 만듭니다. 아이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담긴 말들이 저의 굳어진 마음을 살같이 부드럽게 만들고, 그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린이부 친구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잠시 나누어보겠습니다. 어린이부 친구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만약 식물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식물이 되고 싶어?”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선규는 “저는 벼가 되어요. 벼는 많은 쌀을 품고 있듯이 아주 풍성하기 때문이에요.” 예람이는 “저는 민들레 꽃씨가 되고 싶어요. 민들레 꽃씨는 자유롭게 어디든지 날아다닐 수 있잖아요.” 동규는 “저는 중국의 삼나무가 되고 싶어요. 저는 아주 끊임없이 높게 성장하고 싶거든요.” 하린이는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멋진 말을 해서 저를 당황하게 만드는데요, 이 날도 어김없이 하린이의 대답은 저는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흙이 되고 싶어요. 사람은 흙으로부터 왔잖아요.” 아이들의 답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나요? 아이들이 대답처럼 그들이 바라고 꿈꾸는 대로 잘 성장해나가길 소망합니다. 이들이 풍성하고, 자유롭고, 높이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마음껏 꿈을 펼치도록 우리 모두가 힘써야할 것입니다.
2월 26일, 3·1절 기념주일 예배 때 아이들과 나누었던 대화입니다. 어린이부 친구들에게 “여러분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어요?” 라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합당한 모습을 각자 자유롭게 말해주었습니다. 예람이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요.” 선규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대현이는 “차별없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한솔이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린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은 언제나 아름답고 옳습니다. 우리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저마다 자신만의 꿈을 꾸고 있고 멋진 세상을 그려나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각자의 꿈을 꾸지만 자신의 꿈을 통해서 누군가를 돕고 싶어 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나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 아이들은 정말 멋지고 아름답게 잘 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평화의 나라]
오늘 함께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은 우리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을 연상시킵니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린 아이가 이끌고 다닙니다. 자연의 맹수들과 약한 초식 동물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은 단순히 동물들의 이야기, 사파리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B.C 722년에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는 혼란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전장인 이사야서 10장은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앗수르 제국이 몰락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1장은 이제 더 이상 앗수루 제국의 통치방식이 아닌, 하나님 보내주시는 구원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평화의 세상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가 말하는 평화는 제국들이 만드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제국들은 언제나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말하려 했습니다. 힘이 가져오는 평화, 권력이 가져오는 평화는 어김없이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평화였습니다. 가진 자들이 만드는 평화는 가난하고 작은 자들의 수많은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의 저자는 당시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제국의 권력과 불평들이 가득한 세상 질서를 거부하고 그 대안으로서 이 땅에 실현되어야할 하나님의 평화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선규가 예배 중에 했던 한 말이 저의 가슴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떤 친구들은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잖아요. 저는 그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요. 돈만 있으면 도와줄 수 있는데...” 선규의 말처럼 이 땅에는 고통 받고 있는 어린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언제나 어른들이 만들어낸 사회의 문제와 수많은 전쟁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어린이입니다. 지구 반대편의 수많은 어린이들이 지금도 폭격을 피하기 위한 지하에 숨어있고, 대도시의 길바닥 위에 있고, 이민자들을 가득 태운 선박 밑바닥에 있으며, 출생이 허용되지 않거나, 아무도 배고픔을 해결해줄 사람이 없어 울고 있고, 장난감 대신 무기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리아의 수많은 아이들은 어른들의 싸움에, 어른들이 만든 무기에 피 흘리며 목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는 제국이 이루고자 했던 평화와는 전혀 다른 평화를 노래합니다. 이 평화 가득한 세상은 맹수들과 그들의 먹이가 되던 동물들이 함께 사는, 더 이상 피 흘림이 없는 세상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어울려 살고, 함께 먹고 눕습니다. 그리고 이 평화로운 세상의 중심에 어린 아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동물들을 이끌고 다닙니다. 어린이들이 이 평화 행진의 선두에 서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독사의 구멍 곁에서 천진난만하게 장난을 치며, 젖 땐 아이가 살모사 굴에 손을 넣으며 아무런 위험도 없이 놀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본문은 그때에 전쟁의 위험과 공포 속에서 가장 큰 피해를 받고 고통당했던, 작은 자 중에 작은 자, 모든 존재 중에 가장 작고 힘없는 아이들이 더 이상 고통 받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노래하는 세상에는 더 이상 차별이 없습니다. 빈부의 격차도, 계층도, 권력 잡은 자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어울리고, 눕고, 같은 풀을 뜯는 평등한 존재입니다. 이제 더 이상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세상의 질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위험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여 주님을 올바로 믿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어린이부 아이들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모두 나왔던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이 현실]
오늘날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꿈꾸는 대로 살 수 있게 허락하고 있나요? 그들이 행복하게 평화로운 세상 속에 살아가도록 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있을까요? ‘한국방정환 재단’에서 조사한 OECD 주요국 어린이·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 순위에서 한국 어린이들이 22개국 중에 최하위를 기록했습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이 조사에서 매번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이브더칠드런’이라는 기관과 서울대 ‘사회복지연구소’에서(2013)에 조사한 8개국 ‘국제어린이행복종합지수’에서 7위를 기록했습니다. 8위를 기록한 우간다 어린이들은 내전을 겪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전쟁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앞서며 7위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수치로만 볼 때에 우리 사회는, 또 어른들은 아이들을 잘되게도 만들지 못하고 행복하게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한 어린이가 교과서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과서의 질문입니다. “내가 가보고 싶은 곳과 그 곳에 가보고 싶은 까닭을 글로 쓰세요” 아이가 답합니다. “저는 우주선을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영어도 가야되고 피아노도 가야되고 미술도 가야하기 때문이에요. 아!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우주선도 없어요.” 꿈을 꾸기도 전에 벌써 현실을 직시하는 오늘날 한국 어린이들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몇몇 어린이들 사이에서 ‘휴거’라는 말이 유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휴거(携擧)라는 단어가 심판의 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즉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이들 사이에서 왜 이 단어가 유행하는지 의아해 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가 사용되는 뜻을 듣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장난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휴거의 뜻은 ‘휴먼시아 거지’, 즉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곳은 비교적 비싼 아파트 단지에 사는 부모들의 모임자리였습니다. 이 모임 자리에서 휴거라는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심지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분반해 달라고 학교에 건의까지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모들 밑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사고를 교육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회는, 또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요?
[막는 자 누구인가?]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에 등장하는 어린이들의 현실도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 어린이를 데려와 손을 얹어서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아이들과 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막아섭니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당시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배척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예수께 가까이 가려고 애썼고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어린이들은 가난하고 작은 자들 중에서 무시당하고 배척당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암울한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본문은 우리가 어린이와 관련해서 많이 들어왔고 익숙한 본문입니다. 공관복음서는 거의 유사하게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사람들이 아기들까지 예수께 데려와서 쓰다듬어 주시길 바랬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을 위로해주셨듯이 이제는 작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자인 아이들까지도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길 바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통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인들은 성자나 그의 옷을 만지기만해도 좋은 일이 생긴다고 믿었기에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식들이 예수님의 손길을 받길 간절히 소망했을 것입니다. 눈 먼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귀신들린 아이가 고침을 받는 놀라운 기적들을 눈앞에서 보았는데, 어떤 부모가 예수께 자기 자식들을 데려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로마제국의 식민생활, 가난과 불평등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통해 희망을 보았고 부모들은 아이들에게도 예수가 그들의 새로운 꿈과 희망이 되길 바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로 다가가는 아이들과 부모를 제자들은 막아서고 꾸짖습니다. 아이들이 꿈과 희망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아선 것입니다.
우리는 꿈과 희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던 250명의 아이들이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잠들었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꿈과 희망으로 날아올라야하는 아이들에게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라고 말하며 그들을 막아선 어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날 꿈과 희망인 예수께로 가는 그 길을 막는 자 누구입니까? 어린이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 평화를 빼앗는 자, 아이들의 가슴에 차별과 배제를 심는 자, 아이들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자, 어린이들이 한 인간으로서 누릴 자유를 억압하는 자 이들 모두가 우리 어린이들이 예수께로 가는 길 막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들이 내게로 오는 것을 막지 말고, 허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이 사회가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이 꿈과 희망을 향해, 즉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을 막고 있다면 지금 당장 그 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예수께로 데려갔던 사람들처럼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예수께서 계시는 곳으로 함께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하늘나라를 차지한 작은 사람]
요즘 따라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사회가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듯합니다. 흔히 이들을 ‘다음세대’라고 부르며 장차 앞으로의 사회, 세상을 이끌 존재로서 받아들입니다. 이번 교회학교 주일 포스터에서도 “우리 자녀들은 교회의 미래입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을 다음세대, 미래를 준비하는 세대라고 생각하며 이들의 현재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들이 어린이 되어갈 과정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어린이들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지금 충분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한 사람으로 여겨야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마 아이들이 예수께로 오는 것이 예수님께 귀찮은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해주는 문제는 지금 급한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을 축복하는 일을 뒤로 미루시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 아무리 중요하고 바쁜 일이라도 아이들을 축복하는 것은 예수님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존귀한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은 지금 축복을 받아야할, 지금 행복을 누려야할 존재인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다른 공관복음서과 이 이야기를 거의 동일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구절이 빠져있습니다. 단순히 “하늘나라가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예수님이 아이들에게 손을 얻어주시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이 본문의 중심은 어린이처럼 되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이기 보다,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게 된 어린이입니다.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상징이나 표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이미 아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과 꿈 속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차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이미 하나님 나라의 자리를 차지한 어린이들 곁으로 가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사람, 아무런 권력 없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주인공인 어린이들의 마음을 품고 느끼십시오. 어린이들이 꿈꾸고 그리는 세상을 막지 마십시오. 어린이들과 함께 그들이 꿈꾸는 세상인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억압이 없이 자유로운 세상, 하나님을 잘 믿고 그 뜻에 순종하는 세상 이루어 나가십시오. 그리고 어린이의 손을 잡고 꿈과 희망이신 예수께로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이미 그들 가운데 있습니다.
*설교 후 기도
이 땅의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존귀한 존재로 지으신 하나님,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어린이와 어른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평등한 존재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나라에서는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들, 어린이가 주인공이 됩니다. 어린아이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게 하소서. 우리가 이 땅의 어린이들이 꿈과 희망이 되시는 예수께로 가는 걸음을 막지 않게 하시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주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 땅에 작은아이로 오셔서 모든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